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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36화 (36/95)
  • 두 번째 신혼 36화

    벨이 채 울리기도 전에 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킷을 벗은 이한은 아까보다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늦었네.”

    “감시해요?”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것 같은데.”

    이한의 음성이 짙게 가라앉은 채였다.

    만약 이한이 주석을 떼어낼 목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거라면, 세인에게도 할 말은 많았다.

    “안에 들어가도 돼요?”

    “그 떨거지는.”

    이한이 날카로운 눈을 그녀 뒤로 보내며 물었다. 혼자 온 걸 알면서 굳이 묻는 의도가 꼭, 주석이 어떻게 됐나 확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유주석 씨는 뒤집어쓴 커피를 닦아내고 있을 거예요.”

    눈썹을 들썩인 그가 자리를 비켜 세인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내주었다.

    “선배한테 들었어요. 좌천된 게 서이한 씨 입김이라던데, 그게 사실이에요?”

    “아직도 그 새끼를 선배라고 불러?”

    “……유주석.”

    “잘하네.”

    객실 안으로 들어가던 이한이 멈춰 세인이 현관 한쪽에 멈춰 서는 걸 못마땅하게 지켜보았다.

    “내 질문에 답해 줘요. 사실이에요?”

    “사실이야. 정세인 주변에서 쓰레기 치우기 시작한 건 꽤 오래된 일이고.”

    “뭘…… 치워요?”

    “불순한 목적으로 네 곁에서 얼쩡거리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거? 나한텐 당연해.”

    이한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세인은 차분하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세인에게 무슨 마가 끼었는지, 그녀에게 추근대는 손님은 꽤 많았다.

    갑질로 객실로 불러대거나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농담을 하고, 심지어 스킨십까지 하는 무익한 인간들은 말해 입 아플 정도였다.

    그러나 속된 말로 세인을 어떻게 해보려던 손님들은, 얼마 못 가 더블나인에 발길을 끊었다.

    마치,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듯이.

    그래서 대표 무영이 손을 쓴 건가, 아니면 부친 홍춘의 힘인가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다만 홍춘이 개입하는 건 늘 있던 일이기에 굳이 들추려 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게 이한의 짓이었다고?

    가만. 추근대던 손님들이 알아서 떨어져 나간 게 언제부터였더라. 1년 전? 2년 전?

    아니, 입사 직후부터였던 것 같다.

    “하…….”

    설마. 입사하자마자 주변을 정리했단 거야?

    기막힌 깨달음에 세인이 기도하듯 모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럼 다른 남자에게 눈 돌렸냐는 날 선 질문은, 이한이 알지 못한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하려던 것일까.

    “전부 서이한 씨가 했…… 정말? 정말 다 그렇게 내 주변에서 없앤 거야……?”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개중엔 남자구실을 못 하게 된 쓰레기도 있었지.”

    이한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결국 이한이 떠나 있던 시절부터 손을 썼다는 건데…….

    그땐 그와 아무런 접점도, 교류도 없던 때였다.

    “못 믿겠어? 아니면 이런 게 많이 불편한가.”

    이한이 세인의 앞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좁지 않은 공간인데도 현관에 그와 단둘이 서자 밀폐된 곳에 있는 것처럼 폐부가 조여왔다.

    뜨거움이 전이되기라도 하는 듯이 가슴이 욱신댔다.

    “그럼 정말……. 저를, 좋아한다는 말…… 정말, 진심인 거예요?”

    정말이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이 상황을 설명할 방도가 있을까.

    이한의 깊은 상실감, 그리고 한탄이 그의 표정에서 짙게 묻어나왔다.

    “이보다 어떻게 더 그리워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리워했어.”

    “그걸 어떻게 믿어…….”

    “그래서 이젠 그동안 못한 만큼 널 예뻐하고 싶어.”

    “전부 이상해.”

    “정세인 똑똑하잖아. 제대로 날 봐. 어떻게 하고 싶어. 여전히 밀어내고 싶어?”

    모르겠다.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손발이 저리고 머리가 아팠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위까지 울렁거리고 있었다.

    아니, 실은 그를 믿어도 된다고, 그가 상처 주지 않을 거란 걸 직감했는지도 몰랐다.

    그걸 인정할 수가 없을 뿐.

    세인이 겨우 팔을 뻗어 그의 셔츠 끝을 잡았다.

    이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의미인지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갑자기 어지러워서. 좀 진정이…… 안 될 것 같아서…… 잠깐만요. 조금만 잡고 있을게요. 정말 이게 다 뭔지 모르겠어…….”

    세인이 한숨처럼 내뱉은 말에 이한이 반응했다. 그가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 당겼다.

    “용서가 어렵다면, 좋아한단 말이라도 받아. 내가 하는 말만 들어. 그리고 다른 새끼들 말고, 내 호의만 가져.”

    말을 마친 이한이 세인의 목덜미에서 척추,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찔하고 간지러운, 그러나 위로가 되는 온기에 세인은 눈을 내리감고 몸을 내맡겼다.

    시원하고 깨끗한 향기가 첫사랑의 기억을 달고 흘러들었다.

    그때도 이랬다. 애틋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이어가듯 이한은 빛바랜 적 없는 애정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아는 서이한, 내가 아는 사랑.

    이 혼란을 잠재울 방법은 인정뿐인지도 몰랐다.

    그가 자신을 또다시 뒤흔들고 있단 인정.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진정한 세인은 용기를 내어 이한의 목 뒤로 팔을 감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으나 부딪쳐 봐야 알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의 이 두근거림이 불안감인지, 아니면…….

    “무슨 뜻이야.”

    이한이 조금은 거칠게 물어왔다.

    세인이 가만히 눈을 내리감자, 잠시 뜸 들인 이한이 짧은 욕설과 함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러곤 몇 초간의 망설임을 지워 버리듯 농밀하게 입술을 겹쳐오며 열기를 퍼부었다.

    6년 전에도 이토록 열렬했던 남자.

    하지만 그때보다 더 짙은 갈망이 느껴졌다. 미처 삼키지 못한 숨결이 세인을 얽어맸다.

    세인은 입술을 열어 더욱더 이한을 받아들였다.

    묵직한 형태가 좁은 입안을 점령하며 똬리를 틀었다. 벽과 이한의 사이에 갇힌 세인은 격렬한 파동에 떠밀려 겨우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매달리기 힘들어 그의 셔츠를 꽉 잡았다. 끝까지 치민 그가 세인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있었다.

    버거워하면 조금 물러났다가 틈이 생기면 다시 찾아와 말캉한 살점을 비볐다.

    고막에서 젖은 소리가 마찰했다. 이한이 나직하게 탄식하는 신음에 세인의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세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이렇게 달콤한 건 반칙이었다.

    이러면 내가 꼭, 기다렸던 것 같잖아…….

    촉촉. 부드럽게 입술을 훔친 그가 살짝 입술을 떼어냈다.

    “그거, 다시 해봐.”

    이한의 목소리가 잠겨 흘렀다. 그도 열에 취한 것처럼 탁한 눈빛이었다.

    세인이 과육처럼 빨갛게 익은 입술 새로 가쁜 숨을 내쉬자, 이한이 귓바퀴를 깨물며 말했다.

    “정세인, 아까 부르던 대로 다시 불러 봐.”

    “……어떤 거?”

    세인이 쌕쌕, 숨을 토해내며 물었다.

    “……사람 환장하게 만들던 거 있잖아.”

    “……여보?”

    “너 일부러 이러지.”

    이한이 눈썹을 좁히며 물었다.

    “……나는 서이한 씨 좀 놀리면 안 돼요?”

    “아니. 다 해도 돼. 나를 죽이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요동했다. 세인의 심장이 아릴 만큼 뛰고 있었다.

    성적 행위로 인한 흥분이라고 치부하기엔, 그의 눈빛에, 체온에, 음성에 반응하고 있단 게 너무도 확실했다.

    그때였다. 세인의 가방 안에서 힘찬 벨 소리가 들려왔다.

    계속해서 울리는 커다란 벨 소리가 대화를 이어갈 수 없을 만큼 요란했다.

    이한이 비켜서며 발치에 떨어진 세인의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다.

    [대표님.]

    액정에 찍힌 문구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이한이 세인의 앞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받아.”

    핸드폰을 받은 세인은 자리를 피할까 하다가, 그냥 그 자리에서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이한은 물러서지 않고 세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조금 민망했다.

    열렬히 입을 맞춘 후여서 이한을 똑바로 볼 용기가 없달까.

    세인은 옅게 드러난 볼우물로 시선을 회피하며 통화에 집중했다.

    “대표님? 말씀하세요.”

    -부총아, 지금 어디냐. 호텔 들어왔다며.

    “네. 조금 전에 들어왔습니다.”

    -여기 진 부사장이 너 찾네. 잠깐 들렀다가 가. 내일 필드 뛸 때 동행하자는 것 같다.

    “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세인은 고민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대충 통화를 마무리하고 끊었다.

    “내빼?”

    이한이 툭툭, 베스트 단추를 밀어내며 물었다. 심장이 철렁할 만큼 짙게 가라앉은 눈빛이 세인을 핥아먹듯이 파고들고 있었다.

    “이렇게 된 나를 두고 정말 가겠다고.”

    그가 배꼽 아래를 눈짓했다. 본능적으로 따라 내려간 시선을 서둘러 수거한 세인은 눈을 피하며 말했다.

    “난…… 내가 너무 바보 같아요.”

    “그러면 안 돼?”

    툭, 이한의 베스트가 던져져 의자 위로 아무렇게 안착했다.

    그가 이번에는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단추가 하나하나 밀려날 때마다 단단한 그의 살갗이 드러났다.

    “야무진 정세인도 좋지만, 적어도 내 앞에선 편했으면 해.”

    “옷을 벗으면서…… 어떻게 편하게 생각하라는 거예요?”

    “살 부대끼며 뭔갈 나누다 보면, 언젠가는 편해지겠지.”

    그렇게 버림받고, 달콤한 말 몇 마디에 홀랑 틈을 내어주는 자신이 스스로도 기가 막히는데.

    이한에겐 얼마나 쉬워 보일까.

    “쉬운 내가 싫어요. 감정에 휩쓸리는 것도 정말 괴롭고…….”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대상이 정세인이야. 그래서 이렇게 몸이 달아선, 맥도 못 추지.”

    세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세인은 누군가를 떠받드는,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다.

    고객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가장 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한이 그녀를 가장 어렵다고 해주고 있었다.

    빈말이면 어떨까. 위로를 받아버렸는데.

    제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이 가장 큰 위로를 주는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그럼에도 실은…… 이 고백에 기대보고 싶었다.

    눈앞의 이한이 끌리지 않고 배길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란 이유든, 과거처럼 무턱대고 감정에 휘말리고 싶단 이유든.

    어쨌든 세인은 나아가야 했다. 정체하면 할수록 그는 더 파고들 테니까.

    “말이라도 듣기에…… 좋은데요.”

    “말뿐일까.”

    이한의 손끝에 마지막 셔츠 단추가 걸려들었을 때였다.

    “줘요.”

    세인은 이한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직접 단추를 잡았다.

    진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추를 푸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인이 몇 번이나 단추를 놓치는 걸 이한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이한은 예전도 그랬다. 조금은 느린 세인의 식사 속도를 기다려 주고, 혜인의 일로 인해 번번이 늦을 때마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단추가 고리를 벗어나자 셔츠가 양옆으로 벌어졌다. 그러자 이한이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밑은, 안 해?”

    허릿단으로 얌전히 수납된 셔츠단을 꺼내보라 권하는 이한의 복부가 탄탄하게 조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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