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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35화 (35/95)
  • 두 번째 신혼 35화

    이한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시선이 두 사람에게 닿았다.

    “안녕하세요.”

    “어, 정 지배인. 옆에는…… 어?”

    누군가 이한을 알아보고 고개를 까딱, 했다. 이한도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이한과 함께 아는 얼굴을 만나는 건 아무래도 불편했다. 세인은 길게 말을 섞지 않으려 간단히 인사를 하며 말을 아꼈다.

    딩. 입을 벌린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이 우르르 내렸다.

    순간 이한이 세인의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괜찮…….”

    “내가 안 괜찮아. 네 몸에 누구 닿는 거, 일일이 열 받거든. 그러니 같이 참아봐.”

    이한과 맞닿은 부위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밥을 먹은 뒤라 배가 볼록해졌을까 봐 걱정하는 스스로를 깨닫고 세인이 헛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어?”

    이한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물었다.

    두 사람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 사람이 꽤 됐기에 거머리 같은 손을 매정하게 내칠 수는 없었다.

    세인은 싱긋 웃으며 다정한 남편 역할에 심취한 그에게 맞춰 대꾸했다.

    “네. 여보.”

    병원에서 갑자기 여보란 말을 꺼내 세인을 당황하게 만든 이한에 대한 작은 보복 같은 거였다.

    “하…….”

    이한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호칭도 둘만 있을 때 써야겠는데.”

    이한의 말에 세인이 살짝 발을 들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혹시 후계자 대열에서 쫓겨난 거예요?”

    “……예상치 못한 방향의 질문인데.”

    “시간이 많아 보여서요.”

    그만 들리게 이야기한 세인이 다시금 앞을 보자, 이한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이 아깝겠어? 전부 줘도 부족한데.”

    속삭이듯 말한 세인과 다르게 이한의 목소리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했다.

    저런 소리를 뻔뻔하게…….

    세인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따가운 시선들을 외면하고 엘리베이터에서 서둘러 내렸다.

    그 뒤를 이한이 놓치지 않고 따라왔다.

    “천천히. 다리 나은지 얼마 안 됐는데 조심해.”

    이한의 걱정을 대충 흘려들은 세인은 객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객실 앞을 서성이는 남자를 보곤 다리를 멈추었다.

    “선배?”

    세인이 어리둥절하게 남자를 부르자, 멀쑥한 차림의 남자가 세인을 보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어, 세인아. 어디 갔다 오니?”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여긴 어떻게 알고…….”

    세인의 질문에 남자가 그 뒤로 따라오는 이한을 발견하더니 헛기침했다.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왔는데, 때를 잘못 맞췄나?”

    남자의 이름은 유주석. 그는 세인의 대학 시절 학과 선배로, 최근 더블나인에서 다시 만난 바 있었다.

    다만 가정이 있는 주석이 조금씩 선을 넘는 것 같아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요즘 통 안 보인다 싶었는데, 객실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한이 그녀의 곁에 섰다. 그러자 세인은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심장이 쿵쿵댔다.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선배, 제 번호 아시잖아요. 할 말 있으면 전화를 하시지 그러셨어요.”

    “어, 아냐. 나는 그냥 지나가는 길에…… 인사라도 하려고 온 거야.”

    말을 마친 주석이 이한을 흘긋댔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세인은 정적이 흐르는 공기를 깨고 이한의 앞을 손짓했다.

    “선배, 알죠? 제 남편 서이한 씨예요.”

    “전에 결혼식장에서 뵀었는데…… 인사는 못 드렸네요. 세인이 선배, 유주석이라고 합니다.”

    “서이한입니다.”

    두 남자가 딱딱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서서 얘기를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죄지은 것처럼 쿵쿵대는 가슴 때문이라도 두 남자를 분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참에 선 넘는 행동을 일삼는 주석을 확실히 정리해야겠지.

    이한에게 그런 모습까지 보일 순 없으니 혼자 정리하는 게 옳았다.

    세인은 고개를 돌려 이한에게 말했다.

    “이한 씨, 먼저 들어가 있을래요?”

    “혼자?”

    그러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한이 언짢은 시선을 보내왔다.

    “네. 선배랑 얘기 좀 나누고 올게요.”

    “아니다, 세인아. 너 바쁜 거면 그냥 갈게. 남편이랑 오붓하게 시간 보내는데 내가 방해할 수는 없지.”

    앞에서 주석이 민망해하며 웃었다.

    그러나 주석을 나중에 따로 만나는 편이 더 피곤했다. 용무가 있다면 오늘로 끝내는 게 나았다.

    그가 불편하단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해야 했다.

    세인은 허리에 감긴 이한의 손을 떼어내며 웃었다.

    “아뇨, 선배. 나가요. 커피 마시겠어요?”

    “어? 어, 좋지.”

    주석이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이한에게 부랴부랴 인사를 하곤 세인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호텔 뒤편의 공원이었다.

    카페에 들른 주석과 세인은 얼음을 가득 채운 아이스 커피를 하나씩 들고 앉았다.

    멀리나마 경호원들과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딱히 위험할 건 없었다.

    무엇보다 세인은 주석과의 대화를 아무도 못 들었으면 했다.

    이 호텔엔 말 몇 마디를 주워듣고서 말을 부풀려 소문낼 작자들이 제법 많았다.

    늦여름의 풀 내음이 바람을 타고 솔솔 불어왔다.

    그 순간, 시원한 향을 품은 이한이 떠오르고 말았다.

    세인은 눈을 감았다 뜨며 습관처럼 찾아오는 이한의 잔상을 지우려 애썼다.

    길게 뻗은 가로등을 올려다보며 주석이 입을 열었다.

    “나 부산으로 가게 됐어.”

    “발령 난 거예요?”

    “음…… 좌천이야.”

    가로등의 은은한 조명을 뒤집어쓴 주석의 눈가에 그늘이 짙었다.

    왜 이런 얘길 자신에게 하는지 세인은 가늠하려 눈썹을 좁혔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한 번 헛기침한 그가 말을 이어갔다.

    “흠흠, 그래, 사실은…… 내가 회사 장부를 약간 조작했어. 부장님 지시였지.”

    “갑자기 무슨…… 차근차근 얘기해 보세요.”

    “두 달 전쯤이었나. 상부에 사입 장부를 조작한 걸 들켰어. 그런데 부장이 내 실수로 몰아가서, 나 하나 좌천되는 거로 일단락되었고.”

    “…….”

    “그런데 장부 조작이라곤 해도 위에서 눈감아주는 게 관례야. 문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 일로 좌천된 거네요.”

    “상사 명령 거절 못 한 내 잘못이지. 그래서 말인데…… 세인아, 네 남편 말이야.”

    “이한 씨요?”

    갑자기 이한은 왜?

    주변을 살핀 주석이 목소리를 죽였다.

    “어어…… 그래, 서이한 전무.”

    난감한 듯 멋쩍게 웃은 주석이 말을 이어갔다.

    “부장이 어제 술에 취해서 그러더라고. 제문 그룹 서이한이랑 아냐고.”

    “그게 무슨…….”

    주석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리 회사 상부에 이번 일을 고발한 사람이 서이한 전무야.”

    “……뭐라고요?”

    “부장님 말에 의하면 조사 나온 상부에서 서이한이랑 뭐 척진 거 있냐고 물었다더라.”

    “…….”

    “서이한 전무가 정확히 나를 지목해서 조사를 지시했다던데 나도 처음엔 믿을 수가 있어야지.”

    주석이 눈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서 전무랑 우리 이사님이랑 친구래. 너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정말 이한 씨가 지시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한 씨랑 선배,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래, 너를 통해 아는 것 말곤 없지.”

    세인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한이 설마 그랬다고? 대체 왜?

    주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한이 무슨 이유로 주석의 뒷조사를 지시한 걸까.

    이한이 자신의 남편이란 명분, 그리고 진심 어린 듯한 고백을 생각하면 그가 꼭…….

    생각을 정리한 세인이 입을 열었다.

    “믿기지 않지만 이한 씨가 내 주변을 정리했단 소리로 들리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너한테 집적댄 건 사실이잖아.”

    커피를 쥔 손을 꼼지락거리며 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어버린 세인의 입술 새로 한숨이 가늘게 샜다.

    “너무 쉽게 인정하는 거 아니에요?”

    세인은 쓰게 웃었다.

    그동안에는 주석이 더블나인의 고객이었기에 때때로 뺨을 내려치고 싶을 때마다 참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해 버리면, 더는 그의 무례함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 세인아. 나 너랑 자고 싶어서 그랬다.”

    “유주석 씨.”

    “다시는 안 그럴게. 부산에서도 쪽박 차면 내 인생 어떻게 하냐……. 난 부인도 있고 애도 있…….”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세인은 벤치에서 일어나며 커피가 담긴 컵 뚜껑을 열었다.

    촤악.

    그의 머리 위로 차가운 커피를 끼얹었다.

    주변의 시선을 생각하지 못한 충동적인 짓이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툭, 툭. 그의 정수리와 뺨을 타고 얼음덩어리가 꼴사납게 떨어졌다.

    “…….”

    눈을 내리깐 주석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거면 되냐?”

    “……뭐?”

    “서이한 전무한테 말 좀 잘해 줘라. 아까도 봤잖아. 서 전무 나한테 살기 장난 아닌 거.”

    “닥쳐요.”

    “용서해 줘라. 세인아.”

    함께 호텔로 올라가자고 속삭이며 술기운을 핑계 삼아 치덕거리던 때처럼 아무 말이나 내뱉는 주석을 더는 상종할 수 없어졌다.

    “앞으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요.”

    “그럼 말 잘해 줄 거지? 어?”

    끝까지 거머리처럼 들러붙으려는 주석을 향해 경멸의 눈빛을 내비친 세인이 몸을 돌렸다.

    다행으로 여길 수 있는 건 늦은 밤이라 이곳을 주시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단 것, 그것뿐이었다.

    세인은 그 와중에도 주변을 한 번 더 살피곤 객실로 올라갔다.

    주석의 말이 거짓인 것 같지는 않았다.

    부산으로 떠나는 마당에 굳이 이런 얘기를 할 이유는 없을 테니.

    그것도 저딴 말을 덧붙여 쓰레기를 자처할 필요는 없었을 터다.

    그럼 정말 이한이 주석에게 손을 쓴 걸까.

    두 달 전이라면 한참 전이었다.

    그때부터 이한이 제게 신경 쓰고 있었단 게 사실이라면…….

    ‘6년 전부터 지금까지 좋아했어. 하루도 빠짐없이 정세인을 생각했고, 내 인생의 대부분을 너로 채웠어.’

    이한의 목소리를 되새기자 눈가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세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의 귀퉁이를 불편하게 만지작거렸다.

    “그럼 왜 그렇게 떠난 건데.”

    마음이 떠난 것처럼, 의무만 남은 결혼이었던 것처럼.

    중얼거린 세인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한의 객실 벨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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