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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34화 (34/95)
  • 두 번째 신혼 34화

    이한은 결혼할 때부터 그랬다.

    제문 본가와 세인 사이에 깊고 진한 선을 그어두어, 감히 넘어갈 생각조차 못 하게 막았다.

    그건 세인이 어떻게 해도 이한의 가족으론 인정받을 수 없단 표현으로 보였다.

    따지고 보면 세인에게는 잘된 일이었으나, 이한이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란 걸 확인받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세인은 먹은 게 얹히는 기분이었다.

    잠시 침묵했던 은희가 다리를 꼰 채 턱을 살짝 틀며 물었다.

    “혹시 말이에요. 우리 세인이 신혼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서 전무가 원한 건가요?”

    “언제까지 서울 집을 비워둘 수는 없으니, 들어가야죠.”

    이한이 답했다.

    그간 신혼집을 비워둔 세인을 향한 질책이 담긴 말이었다. 그걸 모를 만큼 은희는 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은희는 별로 괘념치 않는 표정이었다.

    “서 전무도 아시다시피 우리 혜인이가 세인이 없이는 힘들어요.”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몇 달만, 아니. 반년만, 시간을 주면 어떨까요?”

    은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이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이한을 설득하려는 은희의 붉은 입술이 바삐 움직였다.

    “서 전무가 일찍 귀국한 게, 혜인이 입장에선 갑작스럽잖아요. 우리 혜인이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면 안 되겠어요?”

    은희의 주장은 억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은희는 몸이 불편한 딸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게 주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주관적인 의견일지라도.

    지금도 은희는 첫째 딸의 안위만 신경 쓰고 있었다.

    “우리 혜인이 생각 좀 해줘요.”

    “아니에요, 엄마. 그러지 마. 난 괜찮아요.”

    그런 은희를 말리며 혜인이 나섰다.

    의외였다. 혜인은 이상하리만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은희를 만류하고 있었다.

    “혜인아.”

    “자꾸 그러면 제부 곤란하잖아요, 엄마.”

    “정말 너 괜찮니?”

    “응. 두 사람 부부인데, 당연히 함께 지내야죠…… 내가 어떻게 방해하겠어요.”

    이상하네. 세인은 의문을 품은 속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그런 세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혜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세인아, 대신 출퇴근할 때는 꼭 들러줘. 또 근무 중에 시간 나면 짬짬이 와줘. 그건 해줄 수 있지?”

    “……언니는 괜찮은 거야?”

    “참아볼게.”

    찜찜함을 전부 털어낼 순 없는 대답이었으나, 어쨌거나 수락이었다.

    혜인이 당연히 반발할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허무하리만치 쉽게 허락했다.

    혜인의 태도가 이상하다 느낀 건 은희도 마찬가지였다.

    “혜인이 너 정말 괜찮겠니? 얘가 정말, 물러빠져선. 네 동생만 생각하지 말고, 널 생각해야지. 응?”

    “응. 아주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제부, 가, 가끔은 세인이 내 방에서 자게 해줘요. 그건 되죠?”

    혜인이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레 묻자 이한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글쎄, 한두 번이라고 해도 세인이와 떨어져 지내면 구설에 오르기 쉬울 테고, 그럼 회장님 심기 건드릴 명분이 될 텐데.”

    “어이구, 그건 안 되지.”

    허허허. 홍춘이 화통하게 웃었다.

    “장인어른, 지금은 세인이와 단단한 관계란 걸 명시할 시기입니다.”

    “맞아. 그렇지. 그래야죠.”

    “이해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리고, 흠. 6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얼마나 애틋하겠습니까.”

    홍춘이 맞장구를 치자,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이던 은희가 입을 다물었다.

    서 회장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로서도 더는 밀어붙일 명분이 없었던 거다.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이한이 드디어 자리를 털고 일어날 기색이었다. 그러자 조금은 반가운 표정으로 은희가 말했다.

    “서 전무, 시간 되는 날 꼭 봐요. 한 번은 다 같이 식사해야죠.”

    “그러겠습니다. 세인아, 밖에서 기다릴 테니 나와. 호텔로 가야지.”

    이한이 세인에게 말하며 재킷 단추를 잠갔다. 이곳에서 세인을 데리고 나가겠단 표현이었다.

    “네. 그럴게요.”

    세인이 웃었다. 이한이 나가자 그 뒤로 홍춘이 따라나섰다. 그를 배웅하려는 것이다.

    은희, 혜인, 세인. 셋만 남은 병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한숨을 가늘게 내쉰 은희가 우아한 말투로 말했다.

    “너희 아빠는 대체 왜 저러는 거니?”

    “항상 그러시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혜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홍춘은 권력을 사용하는 모습만큼이나 힘 앞에 굴종하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자주 보였다.

    그것이 홍춘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딸들에게 기회주의자가 되라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강조했다.

    주변을 마저 치운 세인이 혜인의 얼굴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언니, 차라리 일을 그만둘까? 그러면 신혼집에서 언니한테 왔다 갔다 하면서 집중할…….”

    “싫어!”

    그 순간, 혜인이 소리를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그 때문에 혜인에게 물을 먹이려던 은희가 컵을 놓쳤다.

    쨍그랑, 유리잔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깨졌다.

    “내가 전에도 싫다고 했잖아!”

    세인은 순식간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부서진 유리 조각이 혹시 혜인에게 튀었을까 걱정도 됐다.

    세인은 얼른 혜인을 살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괜찮아? 어디 좀 봐.”

    그러자 혜인이 히스테리를 부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세인은 수없이 되뇌어야 했다.

    내가 미안해. 미안해.

    ***

    겨우 진정한 혜인이 잠든 후에야, 세인은 병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터덜터덜 힘없이 병원 로비로 향했다.

    “하아…….”

    실은 조금 더 혜인의 상태를 지켜보고 싶었는데 홍춘이 사람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니라며 세인의 등을 떠밀었다.

    바깥과 연결된 회전문이 세인의 속마음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회전문을 밀고 나가자 장신의 남자가 뒤돌아 세인을 마주 보았다.

    “전화할까 하던 참이었는데.”

    “언니 자는 거 보느라 늦었어요.”

    “기껏 먹여놨더니, 에너지를 그런 데나 쏟고.”

    “그러게 먼저 가라고 문자 넣었잖아요. 사람 미안하게 왜 여기서 기다려요?”

    이한은 차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병원 입구에 서 있었다.

    위치뿐만 아니라 외모만으로도 주변의 이목을 끄는 사람이니 기다리는 시간이 편치는 않았을 터다.

    아니나 다를까 행인들이 이한을 흘긋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다친 거 맞네.”

    “네?”

    “아까부터 거슬려서. 이거 왜 이래.”

    이한이 손을 들어 세인의 왼쪽 뺨을 조심히 감쌌다. 세인은 휙 고개를 돌려 그런 이한의 관심을 밀어냈다.

    은희에게 맞은 곳이 아직도 얼얼했으나, 그걸 이한 앞에서 티 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한에게 이보다 더 우습게 보이기 싫었다.

    “잠을 잘못 자서 그래요. 조금 터진 거예요.”

    “그런 거면 다행이고.”

    “그런 거 맞아요.”

    이한이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마치 알고도 속아준다는 눈빛 같아서 세인은 그를 더 마주 볼 수 없어졌다.

    “얼른 가요. 늦었어요.”

    이한이 기다렸다는 듯 세인의 손을 맞잡았다.

    사이사이 맞물리는 부드럽고 단단한 손가락이 어색하고 낯설어 세인은 몸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것처럼 이한이 물었다.

    “부부는 이렇게 하는 거 맞지 않나.”

    “글쎄요. 다른 부부를 눈여겨본 적이 없어서요.”

    “누구처럼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표정은 안 짓겠지.”

    세인은 긴장했던 게 티 났나 싶어 얼른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어 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왜. 사탕 사줘?”

    말을 하며 이한이 픽 웃었다.

    그 바람에, 바람이 심장에 머물다 간 듯 가슴이 간질간질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한의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운전기사가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준 그가 보닛을 빙 돌았다.

    세인은 좋은 향기가 나는 이한의 차를 둘러보며 짧게 숨을 터뜨렸다.

    이한과 있으면 좀처럼 진정이 안 되었다.

    스포츠카였던 6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세단은 지나간 세월을 실감케 했다.

    6년 전, 몇 번인가 이한의 차를 탄 적이 있었다.

    모두가 잠든 밤, 이한과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 드라이브를 갔던 기억이 밀려들었다.

    갓 면허를 취득한 세인은 벌벌 떨며 값비싼 티가 줄줄 흐르는 이한의 차를 몰았었다.

    별것 아닌 것에도 기쁘고 설렜던 날들.

    그녀가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이한이 차에 올라 벨트를 맸다.

    “식사는 했으니 차를 마시는 게 낫겠지. 아니면 술?”

    “차요. 호텔에서 마셔요.”

    “그래.”

    짧게 말한 그가 차를 출발시켰다.

    세인은 긴장한 채 표정을 살피다가 운전대를 잡은 이한의 손가락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교통사고로 형을 잃은 터라, 이한은 두 번 다시 운전대를 잡지 못할 것 같다고 했었다.

    아픈 눈으로 말했던 이한의 표정, 목소리, 냄새까지 세인의 기억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미안. 운전대를 잡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대신 운전할래?’

    그런데 지금의 이한에게선 그때의 두려움이나 상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 걸까?

    “운전…… 할 수 있는 거예요?”

    결국 세인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했다.

    천천히 돌아오는 이한의 시선이 그녀에게 찰나 닿았다가 전방으로 돌아갔다.

    “연습했어.”

    얼마나 연습한 건지, 정말 괜찮은지 자세히 묻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이 이상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다면, 이한과의 거리가 가까워질 게 뻔했다.

    그 후엔 그의 말을 전부 믿고 싶어지겠지.

    호텔로 가는 동안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대신 묵직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득 메웠다.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가 세인을 조금씩 압박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이한이 실없는 소리라도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여느 때보다 더 이한은 조용했다. 앞을 주시하는 표정이 화난 것도 같았다.

    호텔 앞으로 들어서자, 주차 요원이 달려 나왔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태워다 줘서 고마워요. 미안한데 차는 다음에 마셔요.”

    재빨리 인사한 세인은 차에서 내렸다. 그길로 달아나려고 했는데, 이한은 순순히 그녈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빠르게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세인의 손목에 이한의 길쭉한 손가락이 감겼다.

    “도망 못 가.”

    “설마 오늘도 여기서 묵을 거예요?”

    “정세인이 집으로 들어올 때까진 나도 여기서 신세를 져야지. 그래야 그림이 괜찮을 거고.”

    “이한 씨 객실 있잖아요.”

    그러니 그쪽 객실을 사용하란 뜻이었다.

    “거긴 업무 보는 용도로 마련한 공간이야. 객실을 따로 사용하려던 목적이 아니지.”

    “하지만…….”

    세인은 이틀 전, 밤을 지새운 이한의 상태를 아주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또 그런 상황이 되는 건 세인뿐만 아니라 이한도 고역일 터.

    남자라면 자연스러운 반응이니 그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세인이 입술을 닫으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저는 그거 책임 못 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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