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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33화 (33/95)
  • 두 번째 신혼 33화

    이한은 태어나 처음으로 살의를 느꼈다. 정혜인을 죽인대도 죄책감을 못 느낄 만큼.

    아니지. 그래선 안 되지.

    이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호흡을 가라앉혔다.

    뭐든 세인이 다치지 않게 해야 했다.

    잠시 창밖에 눈을 두었던 이한이 입을 열었다.

    “제대로 세인이 옆에서 떨어져.”

    “나, 나는…….”

    “불륜설에 휘말린 비운의 화가가 될지, 남은 생이나마 편하게 살아남을지. 골라. 답은 쉽잖아.”

    “부, 불륜 아니야. 사랑이야!

    혜인이 펄쩍 뛰는 꼴이 이한은 참 우스웠다.

    “경고는 한 번뿐이야. 널 사람으로 대해 주는 것도 마지막이고.”

    혜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지금 혀, 협박하는…… 거야?”

    “공기 좋은 국외 시골에서 썩어가는 것도 괜찮겠지. 너 하나 내보낼 명분이야 만들기 쉬워.”

    혜인이 거친 숨이 새어 나오는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곤 쌕쌕거렸다.

    “호, 혹시 이번에 입원한 것도 네 짓이니……?”

    “어디까지 할 수 있나 궁금하진 않고?”

    이한이 포식자처럼 여유롭게 말했다.

    “흐윽…….”

    혜인이 곧 쓰러질 것처럼 헐떡이는 그때였다.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한이 시선을 그리로 던지며 허리를 세웠다.

    “이 이상 멍청하게 굴지 마.”

    마지막 경고였다. 이한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병실 응접실 쪽으로 향했다.

    이한이 응접실로 향하는 문을 열자 병실 복도에서 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세인과 그 부모였다. 나직한 말소리가 이한에게까지 닿았다.

    “입원하게 돼서 애 마음이 어떻겠니. 세인이 네가 더 잘 들여다봐야지.”

    “네.”

    “대답만 하지 말고. 요즘 너 건성이야.”

    세인을 타박하는 음성이 이한의 고막으로 파고들었다.

    “서 전무 들어왔다고 혜인이한테 소홀해질 생각 말란 소리야. 응? 두루두루 잘하는 거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 어려운 것도 아니잖니.”

    “엄마 신경 안 쓰시게 잘할게요.”

    “또 말만 잘해.”

    “에이 엄마, 저 잘할 때도 많잖아요.”

    세인이 아무렇지 않은 투로 대꾸하는 게, 이한은 가슴 아팠다. 그리고 화가 났다.

    앞장서 병실로 들어오던 은희가 우뚝 서 있는 이한을 보고 깜짝 놀라 반응했다.

    “서 전무 아니에요?”

    “네.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한이 미소 지으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의 두 눈은 은희 뒤로 따라 들어오는 세인에게 닿아 있었다.

    동시에 이한을 발견한 세인의 눈도 커졌다가 이내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왔다.

    세인은 빙긋 웃으며 마치 이 만남이 약속되었던 것처럼 이한을 맞이했다.

    “이한 씨 왔어요?”

    세인은 예전부터 거짓 미소를 잘 짓는 편이었다. 하도 익숙해서 그게 진짜처럼 보일 만큼.

    이한은 그마저도 애틋하고 마음이 아렸다.

    “조금 전에 도착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먼저 올라왔어. 어디 다녀와?”

    그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부모님 마중 다녀왔어요.”

    세인이 비켜서며 뒤에서 오던 홍춘을 눈짓했다. 이한이 나서며 손을 내밀어 먼저 악수를 청했다.

    “장인어른도 계셨네요. 찾아뵀어야 하는데 늦었습니다.”

    “아이고, 서 전무. 왔습니까.”

    “네. 건강하셨습니까.”

    이한은 단조롭게 인사치레하며 세인을 꼼꼼하게 훑어 내렸다.

    제대로 식사를 챙기지 않은 건가. 세인은 힘이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현대판 콩쥐도 아니고, 밥은 먹여가면서 애를 부려야지.

    앞에선 홍춘이 마주 잡은 손을 흔들며 민망함을 표출했다.

    “흠흠, 먼저 연락한다는 게 바쁜 사람 잡아두는 것 같아서, 원.”

    “예.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시간이 몇 신데 벌써 먹었죠. 서 전무는 아직입니까? 허허.”

    이한에게 존대하는 홍춘의 태도에서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아무리 사위라지만 마음 편히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홍춘은 한때 커다란 조직을 일궈낸, 배포 큰 사내였다.

    법과 도덕 따윈 가볍게 무시하는 홍춘이 이토록 자세를 낮추는 이유는 이한의 등 뒤에 자리한 제문 그룹 때문이었다.

    이한은 곧 제문을 진두지휘하는 대열에 올라설 테고, 대한민국의 중심부에서 단단히 자리 잡을 터였다.

    “전 일이 바빠서 식사 시간을 놓쳤네요. 세인이랑 함께 식사 좀 할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이한의 말에 세인이 웃으며 물어왔다.

    “이한 씨, 여태 식사 안 했어요?”

    “일이 바빠서 아직.”

    이한도 옅게 웃어주었다.

    “어, 그래. 세인아, 뭐 하냐. 서 전무랑 나가서 밥 먹고 와라.”

    홍춘은 쩔쩔매며 세인의 등을 밀었다. 이한이 팔을 뻗어 세인의 팔목을 가볍게 잡았다.

    한 줌도 안 되는 부피감에 그의 눈가가 살짝 올라섰다.

    “세인이 피곤한데 여기서 먹겠습니다. 도시락을 가져왔네요.”

    이한이 응접실 테이블을 가리켰다. 금색 보자기에 싸인 5단 찬합과 보온통 두 개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작정하고 챙겨온 듯한 도시락 행렬에 홍춘이 작게 헛기침했다.

    세인이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점이 면목이 없긴 한지 민망해하는 모양이었다.

    “흠흠. 그럼, 그렇게 해요.”

    “장모님, 잠시 앉겠습니다.”

    “그럼요. 어서 앉아요. 식사를 내가 대접해야 하는 건데……. 이번 주 주말은 어때요? 조만간 저녁 같이해요.”

    “비서 통해서 일정 확인해 보겠습니다.”

    은희와 대화하며 자리에 앉은 이한이 웃으며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앉아.”

    어정쩡하게 선 세인을 옆자리에 앉혀 손가락을 닦아준 그가 보온통을 열어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목부터 좀 축이고.”

    “이한 씨 따뜻한 거 안 좋아하잖아요.”

    세인의 말이 이한의 가슴을 이상하게 두드렸다. 그가 볼우물을 보이며 웃었다.

    “기억하고 있었네.”

    “…….”

    세인이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곤 직접 찬합 뚜껑에 손을 가져갔다.

    이한이 이렇게까지 한 마당에 먹지 않겠다고 거절하면 부모님 보기에 곤란하니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는 걸 터다.

    이한은 이렇게 해서라도 세인의 밥을 챙겨 먹이고 싶었다.

    “둬. 내가 해.”

    이한이 세인의 손을 거둬내며 직접 찬합을 펼쳤다.

    그사이 홍춘이 혜인을 휠체어에 태워 데리고 나왔다.

    혜인은 단시간에 핼쑥해져 있었다. 머리칼을 내려 눈가를 가린 건 현명한 대처였다.

    이한이 혜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처형과는 먼저 인사 나눴습니다.”

    “혜인아, 그랬니?”

    “어, 응.”

    은희의 질문에 이한과 눈을 마주친 혜인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이윽고 다섯 명이 어색하게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은 형국이 되었다.

    세인이 여분의 젓가락을 꺼내며 말했다.

    “좀 드세요. 언니 좀 덜어줄까?”

    “난 괜찮아.”

    “우리도 됐다.”

    홍춘이 손사래를 쳤다. 어색한 분위기 따윈 모른다는 듯 이한이 느긋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곤 손수 미나리로 싼 고기찜을 세인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먹어봐. 전에 이거 잘 먹던데.”

    “……고마워요.”

    세인이 입을 작게 벌렸다.

    음식을 오물거리는 입가를 직접 손으로 닦아준 이한이 이번에는 세인의 입가에 차를 대주었다.

    꼴깍꼴깍. 먹는 것도 정갈하고 예뻤다.

    세인의 입으로 부부 행세는 하겠다고 했으니,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진 못할 터.

    이한은 즐기기라도 하듯 세인의 입으로 여러 가지 음식을 부지런히 날랐다.

    “이한 씨도 먹어봐요.”

    하얀 손에 같은 음식이 들려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이한의 눈이 커졌다가 즐겁게 휘었다.

    “그래요, 여보.”

    여보 소리에 세인이 작게 기침하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아챈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왜. 매워서 그래?”

    빨개진 귓가를 바라보다가 세인의 손을 잡아 그녀가 집어준 반찬을 받아먹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홍춘은 이한과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했다.

    “흠.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들어요.”

    “네. 그럼 세인이 좀 챙기겠습니다. 안 본 새 살이 너무 빠져서.”

    이한은 작정한 것처럼 옆에 세인을 끼고 음식을 집어 날랐다. 작은 입이 음식을 삼키기 무섭게 그 앞으로 이것저것 가져갔다.

    “이제, 그만…….”

    세인이 손을 저으며 사양하고 나서야, 이한이 다른 보온통을 열어 숭늉을 따랐다.

    “뜨거우니까 조심히.”

    “……그럼 이한 씨가 불어줄래요?”

    숭늉을 건네던 이한의 손이 멈칫했다. 한술 더 떠 세인이 은은히 미소 짓고 있었다.

    윤기 도는 입술을 보며 이한은 낮은 한숨을 삼켜야 했다.

    세인은 음식물이 배 속에 꽉 차오르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이한의 등장에 안절부절못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자, 차마 식사를 거절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한이 집어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부모님의 만족을 위해 살가운 부부의 모습을 연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속으로 수천 번 물음표를 띄웠다.

    그가 가진 영향력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왜 이한에게 이렇게까지 쩔쩔맬까.

    혜인까지 조용한 게 조금 이상했다.

    어쨌거나 세인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식사를 끝내기 위해 음식이 남은 찬합 뚜껑을 죄 닫아버렸다.

    이한이 이 시간까지 식사를 안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순 없었다.

    설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한은 세인의 부모 앞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희희낙락할 성격이 못 되었다.

    이한이 갑자기 나타난 건 분명, 세인이 어제 아침에 했던 그 말 때문일 거다.

    부부 행세를 위해 신혼집으로 들어가겠단 말.

    ‘부부 행세라. 기대되네. 나도 노력하지.’

    이한이 뭘 어떻게 노력할지 불안하긴 했는데, 이렇게 갚다니.

    좋아한단 고백에 심장이 바삐 뛰었던 게 억울해져 세인은 빙긋 웃으며 이한을 마주 봤다.

    그러자 이한이 함께 웃어주었다. 세인은 더욱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잠자코 있던 은희가 이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세인이랑 용인 회장님 댁에도 한 번 찾아가야겠네요.”

    “아뇨. 세인이가 본가에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은희가 의아하단 표정을 가감 없이 내비쳤고, 이한이 제 뜻을 담담히 피력했다.

    “세인이가 그 집 문턱 밟을 일 없을 거란 뜻입니다.”

    그 말은 꼭 세인이 절대 이한의 가족이 될 수 없단 뜻처럼 들려왔다. 세인이 입술을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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