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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30화 (30/95)
  • 두 번째 신혼 30화

    얼떨떨한 세인의 뺨을 문지르며 이한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도 좋아하니까. 봐달라고 아양 부리고 있잖아.”

    세인의 커다란 눈에 잔물결이 일었다.

    미미하게 남았던 잠기운은 어느덧 달아나 버린 뒤였다.

    “6년 전부터 지금까지 좋아했어. 하루도 빠짐없이 정세인을 생각했고, 내 인생의 대부분을 너로 채웠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세인은 얼어붙어 있었다.

    이한이 뜨겁게 맞닿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세인이랑 있으면 이렇게 돼. 내가, 너한테만 이래.”

    거짓말.

    “받아들여. 어차피 네 선택지도 평생 나일 거야.”

    “…….”

    “우린 부부잖아.”

    오만한 말투에 장난기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세인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그저 멍하니, 이한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한 거 알아. 그래서 어떤 꼴을 해서든 잡을 거고.”

    “……이 말을 믿으란 건가요?”

    “내가 지금 많이, 간절해.”

    세인은 잠이 덜 깬 건가 싶어 머리를 짚었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켰다가 내쉬자 조금쯤 침착해질 수 있었다.

    사랑이란 어설픈 감정에 놀아났던 과거.

    이한과의 기억은 추억이 아닌 상처였다.

    그러니 지금 이한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얘길 하든…… 세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마음을 강요하는 게 아니야. 네 옆자리. 그거라도 달라고 애원하는 거지.”

    “어차피 제가 서이한 씨의 옆자리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요.”

    가만히 눈을 내리깐 세인은 그제야 제 옷차림을 눈에 담았다.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폭이 넓은 반소매 티셔츠와, 마찬가지로 헐렁한 반바지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서 침실을 한번 훑어보았다. 낯익은 구조지만 가구와 인테리어가 세인의 객실과 약간 달랐다.

    이한의 객실일까.

    “체크인은 언제 한 거예요?”

    이한의 이름으로 체크인했다면 세인의 귀에 들어왔을 터. 다른 이름을 이용한 것 같았다.

    이한이 의뭉스레 웃었다.

    “지금 서이한 씨 되게 스토커 같은 거 알아요? 그리고 이 옷은 뭐예요? 설마 직접 갈아입힌 거예요?”

    세인이 옅게 웃으며 물었다. 물론 정말 기뻐 웃는 것이 아니란 건 이한도 알았다.

    “겁 없이 잘도 벗길래 봐도 된단 허락인 줄 알았지.”

    “뭐?”

    “수영장에서 훌훌 벗었잖아. 보란 듯이.”

    세인은 수영장에서의 일을 떠올리곤 입술을 질끈 물었다. 창피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우선 언니한테 가 봐야겠어요.”

    꿈을 깨고 나온 것처럼 말한 세인이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벗어나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6년 동안 좋아했다면서 연락 한 번 없던 모순투성이의 남자에게 시간을 더 할애할 여유가 없었다.

    이한은 그저 통제하기 쉬운 부인이 필요한 거다.

    그가 속삭이는 말이 뜨거울수록 세인의 의심도 치밀해져야만 했다.

    “브런치 같이하는 건, 어때.”

    “아뇨. 늦었어요.”

    일요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지금쯤 혜인은 굉장히 화난 상태일 거다.

    한시라도 빨리 혜인에게로 가야 했다.

    침대를 벗어난 세인이 침실의 문고리를 잡는 순간, 이한이 먹구름처럼 다가와 세인의 손을 감쌌다.

    “어제 일로 사람들이 다르게 입방아를 찧을 거야. 서이한이 팔불출이었단 소문이 돌고 있겠지.”

    “그래서요?”

    “이럴 때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더러운 소문을 한 번에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구미는 당기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고백 때문에 속이 시끄러운 이유가 컸다.

    세인은 뒤돌아서며 싱긋 웃었다.

    “저는 소문 같은 거 상관없어요.”

    “상관이 없어?”

    “네. 흘려들으면 그만이라서요.”

    이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잠시 고심하던 그가 말했다.

    “흘려듣기 힘든 소문이 많던데. 난 그걸 여태 몰랐고. 이제라도 바로잡고 싶어.”

    “말씀드렸듯이 저는 아무 상관 없어요. 말씀 다 하셨으면 이제 가 봐도 될까요?”

    “식사가 힘들면, 집으로 들어오는 건.”

    “……집이요?”

    “그래, 우리 신혼집.”

    이한이 미끈하게 입술을 올려 웃었다.

    “그건 해야지. 부부인데.”

    무언가 세인의 발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한이 돌아왔으니 그와 같은 지붕을 써야 한단 단순한 이치가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

    이제 한 걸음 전진한 건가.

    “정성…….”

    달리는 차 안에서 이한이 미소 띤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전진이라기엔 어폐가 있습니다, 전무님.”

    조수석에 앉아 서류를 넘기던 민성이 이한의 행복을 가만두지 않고 딴지를 걸어왔다.

    “내가 소리 내어 말했나.”

    “예. 입에 귀에 걸리셔선 우리 세인이, 세인이. 아침부터 노랠 부르고 계시질 않습니까.”

    “우리 세인이……?”

    이한이 네깟 게 왜 그렇게 부르냐는 듯한 의미를 담아 날카롭게 되묻자 민성이 손사래를 쳤다.

    “흠, 말이 그렇단 겁니다. 제가 어찌 감히 사모님 존함을…… 함부로 부르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삐죽하게 올라섰던 이한의 눈썹이 약간 주저앉았다.

    “윤 비서는 그래도, 축하를 해줘야지.”

    “제가 왜 그런 것까지 축하드립니까?”

    민성의 일 처리는 늘 완벽했지만 가끔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융통성이 없어졌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그냥 적당히 이한의 기분을 맞춰주면 좋으련만, 옳고 그름을 확실히 구분하려는 사람처럼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그가 말했다.

    “그리고 사모님께서는 전무님 귀국, 별로 안 좋아하실걸요?”

    “…….”

    “이제 정말 완벽한 부부 행세를 해야 하니 골머리를 앓으실 겁니다.”

    처음에 서 회장이 보낸 정찰견이었던 민성은 금세 이한의 사람이 되었다.

    이한이 민성의 가족에게 후한 보상을 내리자, 그는 영리하게 주인을 바꿨다.

    다만 민성은 돈독해진 사이를 이용해 아픈 말을 술술 내뱉는, 조금은 건방진 수하였다.

    “계속 지껄여 봐.”

    “쇼윈도 부부가 으레 그렇듯이 보이는 데 예민하니 사모님께서도 신경 쓰셔야…….”

    “그래, 해보라고.”

    그제야 민성이 서늘해진 공기를 눈치채고 헛기침했다.

    “……흠흠, 사모님께서 정혜인 씨 퇴원하신 후에 신혼집으로 오신다고 하셨으니 나쁜 신호는 아니죠. 예.”

    “우리 세인이가 착해서 정혜인을 그냥 못 둬.”

    “예. 그럼요.”

    “그런데, 윤 비서. 도청해?”

    “도청이라뇨!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전무님께서 직접 해주신 말씀입니다. 중얼중얼하셨잖습니까.”

    그랬나. 이한이 고개를 비틀었다.

    자는 세인을 밤새도록 지켜보다가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걸지도.

    아니, 본래도 반쯤 나가 있었으니 완전히 나가 버린 건가.

    “신혼집 공사는 오늘 마무리될 겁니다.”

    이한이 귀국하자마자 지시한 것 중 하나가 신혼집 정돈이었다.

    세인이 신혼집으론 거의 가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굵직한 행방 정도는 훤히 꿰고 있었다.

    “클리닝까지 신경 써.”

    “네.”

    이한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창밖을 무심히 내다보았다. 잿빛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에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세인의 생각만 하면 자꾸 웃음이 났다.

    세인이 먼저 입을 맞춰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민성 앞에서 세인과 입을 맞춘 얘기까지 나불대진 않았다.

    그녀와 나눈 뜨거운 시간은 오로지 이한만의 것이었다.

    세인이 지윤에게 보이기 위해 입을 맞췄단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구름이 스쳐 간 듯 가벼운 입맞춤에 크게 열이 올라선.

    이한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격동했으나, 세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누가 침을 흘릴까 봐 경계부터 했다.

    그녀에게 입을 맞추면서도 가시를 세우곤 주변을 살펴야만 했다.

    그는 세인을 객실에 밀어 넣고 나서야 본성을 드러냈다.

    거들 듯 달라붙어 오는 세인을 욕심껏 취하고 싶은 걸 억누르고 억눌렀다.

    그리고 취기에 휩쓸린 세인을 조금은 마음 아프게 마주 보았다.

    그녀의 마음이 온전히 돌아온 게 아니란 걸 알기에 더는 밀어붙일 순 없었다.

    이한의 노고를 알아주듯 세인은 결국 신혼집으로 돌아오겠단 약속을 해주었다.

    ‘네. 신혼집으로 가긴 가야겠죠.’

    고백에 대한 답은 아니었으나, 세인이 허락했으니 전진이라고 봐도 옳았다.

    ‘겉보기에 우린 부부니까요. 부부 행세는 제대로 할게요.’

    부부 행세를 강조하던 하얀 얼굴을 되새기고 있자니, 밤새 이한을 괴롭히던 열기가 다시금 치솟았다.

    이한이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곤 처치 곤란한 하반신을 노려보았다.

    이한을 태운 차가 도심에 들어서자 서행하는 구간이 잦아졌다.

    운전에 몰두하던 송 기사가 흠흠, 헛기침을 작게 한 뒤 이한에게 말을 붙여왔다.

    “전무님께서 오죽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드디어 함께 살게 되셨는데요.”

    “송 기사님이 보기에도 넋 놓을 만합니까.”

    “예. 6년을 그렇게 보내셨으니 이제야 진짜 신혼이지 않겠어요. 그리고 사모님이 워낙 아름다우시잖습니까.”

    허허. 송 기사가 사람 좋게 웃었다. 그에 기분이 누그러진 이한이 대꾸했다.

    “너무 예뻐서 문제죠.”

    “전무님이랑 함께 계시면 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으십니다. 두 분이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송 기사는 어깨 형님 같은 외모를 가졌으면서, 변호사 출신답게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화술을 구사했다.

    “서두르죠.”

    이한이 낮게 읊조리곤 손에 쥐고 있던 경제지로 눈을 돌렸다. 빼곡한 영자를 순식간에 훑으면서도 머리 한편으론 계속해서 세인을 생각했다.

    한참을 달려 제문 건설 본사 주차장에서 차가 멈추었다.

    송 기사가 먼저 자리를 비우자 민성이 입을 열었다.

    “정혜인 씨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이한은 대답하면서 세인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늠했다.

    그는 외부 일정을 소화하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세인은 아직 병원에 있을 시간이었고.

    점심 식사는 했으려나. 4시를 알리는 시계가 어째 불길했다.

    예쁘게 미소 짓는 세인의 두 뺨에 생기는 가득했지만, 조금만 관찰해 보면 많이 야위었단 걸 알 수 있었다.

    어제 이한은 잠든 세인의 옷을 갈아입히다가 멈칫했다.

    불편해 보이기에 건전한 마음으로 옷만 갈아입히려 했는데, 애써 모로 보냈던 시선을 고정할 만큼 작고 여린 몸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모습으로 너는 온종일 고군분투했구나.

    이한이 쉼 없이 달렸다고 자부하는 지난 6년은, 그녀 앞에서 자랑거리가 못 되었다.

    그만큼 세인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게 대단했고 마음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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