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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28화 (28/95)

두 번째 신혼 28화

번번이 나타나 백마 탄 악마를 자처하는 이한이 미워야 마땅한데, 세인은 이상하게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남편으로서 할 일을 해주었을 뿐일지라도, 세인에겐 이런 작은 위로가 필요했던 걸지도 몰랐다.

세인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가 서이한 씨랑 왜 그런 걸 해야 하죠?”

이한이 바로 답하지 않고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계속 이런 취급을 당했나. 그럴 때마다 웃으면서 받아줬고?”

이런 취급이란 건, 조금 전 그 룸에서 지윤과 그의 무리에게 받았던 모난 시선일 것이다.

“서비스직이 다 그렇죠.”

이맛살을 찌푸린 이한이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너는 이 일을 그만두는 게 나아.”

“그만두고 서이한 씨 베개나 하라는 건가요?”

이한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눈동자에 어린 짙은 황폐함이, 어쩐지 그가 화난 것처럼 느껴졌다. 입은 웃고 있는데도.

“저딴 것들한테 비위 맞추고 살 필요 없잖아.”

“누구나 고개 숙일 때가 있는 거예요.”

싫어도 좋은 척, 기분 나빠도 담담하게. 그게 세인의 일이었다.

“이렇게 억지로 웃으면서 고개도 숙이고. 정세인은 참 어렵게 살아.”

세인이 가면처럼 띠고 있던 미소를 어정쩡하게 지웠다. 억지로 웃는다는 말에, 더는 거짓으로 웃을 수가 없던 거다.

옆을 흘긋 바라본 세인은 조금 더 가까워진 지윤을 발견하곤 눈을 내리깔았다.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삶일지도 몰랐다.

언니 혜인을 보살피며, 착한 동생을 연기하려 애쓰고 있다. 연극을 하듯 살았다.

세인은 위가 쿡쿡 쑤셔왔다.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세인이 내리깔았던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좋아요. 서이한 씨, 오늘 하루 재워줄게요.”

“적선?”

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어오는 순간 솜털이 일어섰지만 세인은 힘주어 말했다.

“거래예요. 대신 서이한 씨도 나한테 협조해 줘요.”

“어떤 협조.”

“할 건가요?”

“돌아가란 소리만 아니면 듣지.”

세인은 생긋 웃으며 한 발 그에게로 다가섰다. 그녀가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자 이한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거 꼭 사고 치기 전 표정인데.”

세인이 팔을 들어 이한의 목에 감았다. 살짝 발을 들어 올려 밀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쯤이면 이한과의 사이가 끈적하게 보일까.

지윤은 의심 많은 여자이니 아직도 이한과 자신 사이에서 무언갈 찾아내려 눈을 번뜩이고 있을 터다.

“조금만 옆으로 움직여 줘요.”

세인이 천천히 힘을 주자, 이한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직접 움직였다.

그 바람에 이한과 다리가 뒤엉켜 비벼졌다.

“읏…….”

“이렇게?”

지나친 접촉이었으나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살짝 숙였다.

이제 지윤에겐 두 사람의 옆모습만 보일 터. 세인은 딱딱하게 굳은 몸을 이완시키려 애썼다.

유난히 자존심에 상처를 많이 받은 날이었다. 조금은 엇나가고 싶은지도 몰랐다.

세인은 숨을 참았다. 조금 뜸 들인 그녀는 뒤꿈치를 들어 그의 입술을 훔치고 돌아왔다.

짧은 접촉이 잔열을 남겼다. 이한의 한쪽 눈썹이 슬쩍 들렸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오늘 서이한 씨 베개 되어주는 값이에요.”

“하.”

이한이 낮게 웃더니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부드럽지만 강직한 힘이 세인의 척추를 감쌌다.

지윤이 보고 있는 마당에 밀어낼 순 없었다.

오히려 이한이 적극적으로 나서주니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었다.

“네가 시작한 거야.”

“……더 해줄 건가요?”

“친히 버튼을 눌러주는데, 모르는 척이 되나.”

콧날을 비스듬히 튼 그가 입술을 깊게 내리눌렀다. 처음에 놀라 속눈썹을 떨던 세인은 서서히 눈꺼풀을 닫았다.

그저 입술 표면이 닿은 것뿐인데 더 안쪽의 뿌리까지 뒤섞인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끈적하게 흘러오던 재즈 음악도, 시원하게 불어오던 늦여름의 바람도, 지윤과 현준도 점점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포근한 온기와 강인한 힘, 단단하지만 아늑한 품만이 느껴졌다.

이한이 턱을 살짝 틀어 입술을 더 깊게 밀착했다. 세인의 다리가 살짝 풀리는 것을 이한이 받쳐 안았다.

부드럽게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지고 지척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사정없이 얽혀 들었다.

“이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소문이 날까요?”

세인이 변명하듯 물으며 떨리는 속을 감추려 애썼다.

“고작 이거론 부족하지.”

“저기 사람들이 우리 보고 있는 거 알아요?”

“그래서 열 받아.”

이한이 그녀의 손을 잡아 손가락 사이사이로 침투해 깊게 깍지를 끼었다.

애틋한 연인 사이라도 되는 양, 맞잡은 손이 어색해 세인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몸을 돌린 이한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세인은 그 상태로, 본 걸 믿지 못하겠단 표정의 지윤 곁을 지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또 무슨 정신으로 복도를 지나, 객실 현관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세인은 자신이 향한 곳이 낯선 객실이란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한과 맞잡은 손이 뜨겁고 겹쳤던 입술이 홧홧해서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심장이 머리로 옮겨간 듯 쿵쿵대는 박동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이한이 객실 문을 닫는 순간, 뒤늦게 세인이 마지막 핑계를 웅얼거렸다.

“저 조금 취한 것 같아요.”

“취해서 실수야?”

이한과 마주 서자 아까보다 더 팽팽해진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한의 탄탄한 가슴에 시선을 못 박고 있던 세인이 겨우 그를 마주 보았다.

“아까 일은…… 제가 이한 씨 이용한 거예요.”

“아니. 내가 너한테 키스한 거야.”

“…….”

“그리고 이런 건 나만 봐야지.”

이한의 눈빛이 더욱 흉포해진 것만 같았다. 세인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한이 세인의 무릎 안쪽을 스치며 다리를 밀어 넣자 자연스레 그녀가 떠밀렸다.

세인의 등으로 현관 벽이 닿았다. 그가 은은한 조명과 함께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지, 지금은 사이좋아 보일 필요 없는데…….”

“세인아, 왜 자꾸 나를 미친 새끼로 만들어.”

벽을 짚은 그가 아픈 듯 괴로운 듯 말해 왔다.

이한이 다시금 입술을 가볍게 맞붙였다가 떼었을 때 세인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녀는 이제 이한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가 퇴로를 차단해서가 아니었다.

밀어낼 의지가 없다고 하는 게 맞았다.

지윤에게 보여 주기 위해 키스했단 건 핑계가 아니었을까.

옛 기억에 젖어 이한의 품을 찾고 싶었던 건 아니고?

복잡한 감정을 잊고 싶은 세인은 그의 목에 팔을 감아버렸다.

“……저 취해서 이래요. 정말 취해서 이러는 거니까. 서이한 씨가 뿌리쳐 주세요.”

“취하면 아무한테나 이래?”

“남편이니까…….”

서이한이 내 남편이니까.

이한이 잠시 침묵했다.

세인은 아까와 같이 먼저 이한의 모양 좋은 입술에 제 입술을 비볐다.

능숙함이라곤 전혀 없는, 투정에 가까운 마찰이었다.

이한이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저돌적으로 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턱을 비스듬히 튼 이한이 순식간에 세인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뜨겁고 부드러운 혀가 입안을 가득 채운 채 미끄러졌다.

세인은 뒤꿈치를 들어가며 세차게 솟구치는 열기에 매달렸다. 빠듯하게 갈빗대를 조여오는 단단한 포옹이 흥분을 재촉했다.

기이한 안도감이 들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이게 뭘까.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미약하게 남았던 세인의 이성은 뺨을 감싸 쥐는 이한의 손길에 무너졌다.

이한의 혀가 간질간질한 가슴 안팎까지 부드럽게 휘젓고 다니며 고민할 것 없다고, 그저 맡기면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한은 농밀하고 끈덕지게 세인을 핥아먹었다.

입술을 촉촉 빨아들이며 살덩이를 뜨겁게 마찰했다. 생각지도 못한 깊숙한 곳까지 이한이 들이닥쳤다.

세인은 바르르 떨리는 두 손을 꼭 쥐고선 이한을 좀 더 끌어안았다. 그러자 맞닿은 흉부가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손길이 세인을 어루만지다가 다시금 꽉 껴안았다.

그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듯한 느낌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인을 파고든 이한은 좁은 공간을 모조리 갈취하고도 부족한지 한동안 유영했다.

깊게 똬리를 틀었던 혀가 스르르 빠져나가자, 막혔던 세인의 호흡이 가쁘게 터져 나왔다.

“하아…….”

혀를 물린 뒤에도 이한은 달큼해진 입술을 집요하게 빨아댔다.

“아직도 서툴러선, 환장하게 하지.”

“그러는…… 서이한 씨는…….”

기억 속의 키스보다 더 흉포하고 거친 입맞춤이었다. 서른이 된 이한의 키스는 더 날것에 가까웠고 더 뜨거웠다.

“많이 했지, 상상으로, 너랑.”

가슴이 요동쳤다. 세인은 아직도 제 입술을 느리게 빠는 이한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자꾸만 다리가 풀리는 탓이었다.

감았다가 치켜뜬 세인의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변태.”

“예전보다 더 참기가 힘들어.”

이한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커다란 손에 세인의 뺨 한쪽이 파묻혔다.

뜨겁게 작열하는 이한의 눈동자가 6년 전과 겹쳐 보였다.

아니, 그때보다 더 위험하게 무언가 넘실대고 있었다.

이한이 다시금 턱을 틀어 입을 맞추었다. 세인은 그 기세에 짓눌려 고개를 젖히며 두툼한 형태를 버겁게 받아들였다.

거친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이한의 키스는 휩쓸리기 좋았다.

꼭 그와 같은 입맞춤이었다.

격렬한 것 같으면서도 다정하고, 날 선 듯하면서도 묵직했다.

온통 휘젓고 다니는 게 이한의 입술인지, 이한 그 자체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에게 또다시 사로잡힐 게 분명하단 깨달음을 얻으며 세인은 숨 가쁘게 그에게 매달렸다.

그냥 취한 탓이었으면 좋겠단 소망은 잠시.

세인은 정신없이 몰아치는 열기에 조금 더 몸을 맡기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이한이 물러나자 힘들어하면서도 세인은 그를 졸라댔다.

“으응, 더…….”

“돌게 하지 말고 눈 떠 봐.”

낮아진 이한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인은 감았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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