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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27화 (27/95)
  • 두 번째 신혼 27화

    콜록대는 그녀를 돌려 앉혀 등을 두드리고 입가를 손으로 닦아내는 이한의 행동은, 그가 조금 전 한 말을 뒷받침할 만큼 다정했다.

    “괜찮아?”

    “처, 첫사랑? 거짓말. 어, 어떻게 만났는데요?”

    그때 세인만큼이나 당황한 목소리로 지윤이 되물었다.

    “함부로 떠들 이야기는 아니라.”

    뻔뻔한 이한의 대답에 세인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냅킨으로 입을 가렸다.

    기침이 멎지 않은 세인이 밖으로 달려 나가려 하자, 이한이 테이블과 동떨어진 바 테이블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가 세인을 앉힌 뒤 생수를 따서 내밀었다.

    “천천히 마셔.”

    “이제, 그만 됐어요. 밖으로 나가요.”

    잔기침을 쏟아내며 세인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연기라면 이쯤 하면 됐다.

    “그래, 그럼 이제 자러 갈까.”

    이한의 낮은 목소리가 세인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에 세인이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꿈이 야무지시네요.”

    “당장 끌어안고 자고 싶은 지 오래야. 더 참기 힘들어.”

    “…….”

    이한으로서는 그저 숙면하고 싶단 표현일 텐데, 유혹처럼 들려오니 큰일이었다.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이한이지만, 그에게서 향긋한 알코올 냄새가 나는 듯했다.

    세인은 점점 몽롱하게 퍼져오는 술기운에 기대 잠시 침묵했다.

    “식사는, 또 안 했지.”

    누구보다 불편하고 원망스러워야 할 상대에게 걱정이나 받고 있다니.

    세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이한이 볼우물을 보이며 물었다.

    “밥부터 먹을까.”

    “수작이 자연스럽네요.”

    “빈속에 그렇게 마셔도 되나.”

    이한이 짧게 대꾸하며, 그녀의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손끝으로 지웠다.

    세인은 손을 뻗어 술병을 하나 꺼냈다.

    머리로는 이한을 밀어내야 한다는 걸 알았으나, 온 신경이 그를 의식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이한도 곤란했으나, 좀처럼 냉정해질 수 없는 세인 스스로가 더 큰 문제였다.

    마시자. 어차피 주말이니 그냥 마시자.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이한에게 더 말려들 것 같았다.

    이한의 의도야 어떻든, 위로를 받았단 핑계로 그에게 휩쓸릴 것만 같았다.

    술에 취하면, 이한의 온기엔 취하지 않겠지.

    잠시 후.

    약간의 취기에 오른 세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술을 씰룩였다.

    “가요. 먼저 가라고요.”

    “술을 못 마시는 거면, 말을 했어야지.”

    “……서이한 씨가 따라 줬잖아요.”

    “내가 주면 다 마셔? 그래?”

    “네. 지금은, 그래요.”

    세인이 흐릿한 눈을 들어 이한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줄 줄 알고.”

    세인이 젖은 눈으로 이한을 마주 봤다.

    팔짱을 끼고 앉은 그의 입가가 유연하게 늘어나 있었다. 마치 기쁘기라도 한 듯이.

    “왜 그렇게 웃어요?”

    “예전 생각이 나서.”

    “좋았던 기억도 없으면서.”

    세인은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모로 돌렸다.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든 가운데 지윤의 야멸찬 눈빛이 느껴졌다.

    왜? 내가 이 남자와 사이가 좋으면 왜 너는 그렇게 화가 나는데?

    세인이 소리 없이 물었으나, 지윤은 입술만 잘근댈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강현준이 보이질 않았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게 이한의 탓이라고 생각 중인 걸까. 테이블 위로 올라온 지윤의 주먹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더블나인을 찾은 순간부터 세인에게 관심을 보이던 강현준. 그는 원래 그렇게 추저분한 종족이었다.

    그러나 지윤은 그녀의 사랑이 어긋난 걸 세인의 탓으로 돌리며, 공격할 대상을 헛짚고 있었다.

    지윤의 비위를 맞추는 건 완전히 물 건너갔으니 자리를 뜨는 게 나았다. 여기 더 있어 봐야 좋은 꼴은 못 볼 터다.

    마침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세인은 금방 가겠다고 답한 뒤, 옆자리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이한을 향해 말했다.

    “직원이 찾고 있어요. 가 봐야겠어요.”

    이한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곧장 몸을 일으켰다.

    “같이 일어나.”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제법 왁자지껄해진 공간 속, 세인은 여전히 초조해 보이는 지윤을 뒤로하고 룸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임 본부장이 어떻게 나올지 살짝 걱정이긴 했으나, 수습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으니 흐름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지윤을 달랠 방도를 찾겠지만, 굳이 숙이고 들어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서서 편을 들어준 이한을 바보로 만들 만큼 자존심이 없지 않았다.

    룸 밖으로 나서자 이한이 말했다.

    “일 마치면 정원 쪽 테라스로 바로 와. 기다릴게.”

    “먼저 가요.”

    “여기까지 와서 각자 돌아가면, 또 같잖은 소문이 돌 텐데.”

    이한이 소문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뇨. 기다리지 말아요. 언제 마칠지 장담 못 해요.”

    미련 없이 등을 돌린 세인은 음악 소리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이어 인파를 뚫고 홀로 향하자, 기다렸단 듯 지민이 달려 나왔다.

    “지배인님!”

    지민도 명지의 손을 거쳤는지 과감한 차림이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옷차림이 아니었다.

    “지민 씨, 무슨 일 있어요?”

    “얼른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싸움이 났는데……!”

    “어느 쪽이에요?”

    다급한 목소리를 끊고 세인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곤 침착한 태도로 지민이 안내하는 곳으로 향했다.

    클럽 지하 탈의실에서 일어난 소동이었다. 각종 기물이 부서지고 부상자가 속출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인은 곧장 경호 인력을 호출하고 다친 고객의 주치의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탈의실을 정리하고 나자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한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세인은 남아 있는 술기운을 털어내려 머리를 흔들고 테라스로 향했다.

    시끄럽고 난잡한 홀과 다르게 테라스는 차분한 분위기였다.

    선선한 바람과 조용한 공간, 매끄럽게 흐르는 재즈 음악이 심신을 달래주는 듯했다.

    세인이 난간을 짚고 크게 숨을 들이켜던 그때였다.

    “네가 아무리 까라면 까야 하는 입장이라지만, 임지윤 생일 파티까지 나올 줄 몰랐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현준이 있었다.

    “지윤이 걔 성격 알면서 여길 오면 어떻게 하냐?”

    현준은 얇은 셔츠 차림으로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건들거렸다.

    “어? 사람이 묻는데 대답을 안 하냐.”

    입가에 물린 담배 끝에 벌건 불씨가 붙었다. 세인은 그의 뒤편을 살피며 물었다.

    “지윤 씨는?”

    “내가 걔 보모야? 가뜩이나 피곤한데 너까지 왜 이래.”

    현준이 제법 친근한 투로 말하며 웃었다.

    조금 전 이한을 보고 곤란해하더니, 다시 제 컨디션을 찾은 모습이었다.

    세인은 제 몸을 위부터 아래까지 찬찬히 훑는 현준의 시선을 느끼곤 잘라내듯 물었다.

    “왜 그렇게 봐?”

    “너 이런 옷도 입냐?”

    “남이야, 무슨 상관이야?”

    세인이 말을 돌려주자, 현준이 이마를 살짝 긁더니 담배 연기를 흩었다.

    “정혜인 조심해라.”

    잘못 들었나 싶어 세인이 소리 내어 웃으며 되물었다.

    “우리 언니를, 말하는 거야?”

    “너 지윤이랑 정혜인 친한 거 모르지?”

    친하다고?

    몇 번 같은 자리에서 어울린 적은 있지만, 지윤이 워낙 현준 주위의 여자에 대한 경계가 살벌한 탓에 친해질 기회는 없었다.

    미간을 좁히는 세인을 두고 현준이 큭큭대며 웃었다.

    “오늘 파티에 너 초대한 것도 정혜인이 부추긴 거야. 이 순진하고 가련한 어린 양아.”

    “많이 취했구나.”

    “난 말했다.”

    후.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현준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던 눈을 거두었다.

    그때였다.

    “여기서 둘이 뭐 해?”

    지윤의 목소리가 불시에 날아들었다.

    좌측에서 걸어온 그녀가 불륜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예민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뭐 하는 거냐니까?”

    “아무것도 안 했어요.”

    헛숨을 내쉬며 세인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다 어두운 구석에 앉은 남자를 발견했다.

    가만히 앉아 이쪽을 주시하는 이는 이한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그가 일어나 천천히 이곳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한을 발견했을 뿐인데, 텅 비었던 세상이 점차 그로 물들어갔다.

    그게 우습고 무서웠다. 이한의 존재가 아직도 의미 있는 양.

    출렁거리는 물결처럼 이한이 조금씩 조금씩 세인을 흔들며, 결국 해일이 될 것처럼 다가와 말했다.

    “쓰레기랑 어울릴 시간이 있어?”

    지윤과 현준이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를 올려다보며 뒤로 주춤했다.

    “와씨, 깜짝이야.”

    “꼭 죄지은 것 같은데.”

    이한이 피식 웃으며 현준을 겨냥하듯 바라보았다.

    현준은 지윤이 나타났을 때보다 더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자존심은 있는지 더 물러서진 않았다.

    “하, 서 전무님은 마누라를 직접 감시하나 봅니다? 아까부터 얘 뒤만 졸졸 따라다니시고. 모양 빠지게.”

    “우리 세인이 찾아서 여기까지 기어 온 네 새끼만 할까.”

    그의 낮은 음성에 바짝 졸아붙은 현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현준이 짧아진 꽁초를 아무렇게나 내던졌을 때였다. 세인이 이한의 팔을 잡았다.

    “이만 가요.”

    “…….”

    “가자고요.”

    팔에 닿은 세인의 두 손을 내려다보는 이한의 눈동자에 차츰 즐거움이 고여 들었다.

    “어디로.”

    “일단 이리 와요.”

    세인은 있는 힘껏 이한의 팔을 끌어 테라스 가장 끝 쪽으로 향했다.

    전처럼 이한이 술병을 들고 설치는 건 사양이었다. 방금도 탈의실 싸움을 수습하느라 진이 다 빠졌는데 이한까지 합세해 거친 상황을 만든다면 정말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녀는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 자리로 이한을 끌고 온 뒤에야 지친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더는 현준과 지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이한이 고갯짓했다.

    “아직 저거랑 할 말 안 끝났는데.”

    “무슨 할 말이요. 또 유치하게 협박이나 하려고요?”

    이한이 느긋하게 웃었다.

    “아니. 유치한 협박이 안 먹히네. 다른 수를 써야겠지.”

    “……무슨 수를 써요?”

    “처단?”

    세인은 입안이 깔깔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이한의 옆쪽으로 테라스 안쪽을 기웃거리는 지윤의 얼굴이 보였다.

    이한도 흘깃 뒤를 바라보곤 지윤의 존재를 눈치챈 듯싶었다. 세인이 골치 아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한의 말대로 지윤의 집념은 정말 살벌한 처단이 아니고서야 떨쳐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으슥한 김에 뽀뽀할래?”

    취기 때문일까, 피곤함 때문일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이한의 목소리가 달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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