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신혼-26화 (26/95)
  • 두 번째 신혼 26화

    종잇장처럼 끌려간 세인은 그의 무릎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자마자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겉옷을 안 가져와서 가릴 게 없어. 그러니까 가만히.”

    이한의 단단한 팔이 세인의 배를 벨트처럼 휘감으며 영문 모를 소리를 계속했다.

    “너무 보여 주지 마.”

    “숨 막혀요…….”

    세인은 바르작거리다가 수많은 시선이 이리로 닿아 있단 걸 깨닫고선 동작을 멈추었다.

    “…….”

    모두가 황망하고 당혹스러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와 이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이한과 아옹다옹하는 꼴이 애정 어린 행위로 비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이한의 팔이 조금 더 꼼꼼하게 그녀를 감쌌다.

    “……이거 놔봐요.”

    “불편해? 그럼 이렇게 하고.”

    이한은 허벅다리를 벌려 그사이에 세인을 앉혀 버렸다.

    그런 뒤 등 뒤에서 끌어안자 꼼짝없이 그의 사지에 구속되었다.

    “서, 서이한 씨.”

    “왜. 자기야.”

    능청스레 대꾸하며 이한이 긴 팔을 테이블 위로 뻗어 술을 따라냈다.

    졸졸 쏟아지는 액체를 바라보며 세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적당히 봐야지.”

    돌연 서늘해진 이한의 목소리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에 대한 답이었다.

    “이거 파트너끼리 어울리는 자리 아니었나.”

    이한의 쐐기에 그들이 어색하게 눈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완벽하게 거두진 못했다.

    특히 지윤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세인을 홀로 앉혀두고 골릴 생각이었는데, 계획과 다르게 이한이 나타나자 당황한 듯싶었다.

    지윤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누군가 말을 건네는 것도 듣지 못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현준 또한 낯빛이 어두워 보였다.

    지윤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는 현준은 이 상황이 썩 달갑지 않은 듯했다.

    기묘한 분위기 속. 눈치 없는 누군가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서 입을 열었다.

    “근데 세인아, 저기…… 두 사람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몇 번 본 적 있는 현준의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아, 이런 질문 실례인가?”

    이한을 의식했는지 남자가 뒤늦게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세인은 이런 질문에 평소처럼 대충 얼버무리는 것보단 확실하게 말해 두는 편이 이롭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한과 공적인 자리에도 함께 참석해 사이좋은 부부 행세를 해야 했다.

    사이가 좋은 쪽으로 연기해 두는 편이 앞으로 편할 터다.

    그러나 세인이 입을 열려는 찰나에 이한이 나섰다.

    “내가 세인이한테 잘못한 게 좀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이한이 가득 채운 술잔을 세인에게 쥐여 주었다.

    “소문이 개같이 퍼졌더라고.”

    날 선 이한의 음성에 술잔을 쥔 세인의 손가락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세인은 사자의 발톱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불편했다. 뒤로 닿는 이한의 존재감이 전의 그 흉물은 아닐까, 괜한 신경까지 쓰였다.

    그러자 질문을 한 현준의 친구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실은 사이가 좋은 거예요? 그래 보이긴 하는데……. 아니, 여기만 오면 정 지배인님 두고 하도 말이 많으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요.”

    세인이 연거푸 술을 삼키는 동안 이한이 대화를 주도했다.

    “그게 왜 궁금하지?”

    “아니, 뭐…… 당연히 궁금하죠. 정 지배인님도 유명인이신데.”

    남자가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더블나인의 회원들은 소문과 정보에 예민했다.

    젊은 층은 덜하다곤 하나 더블나인이 굴러가는 원동력이 엄선된 VIP인 만큼, 주요 인물의 행보에 모두 촉각을 세우는 편이었다.

    물론 세인이 주요 인물이란 소리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한이 관심 대상이었고, 세인은 그저 술상의 안줏거리 수준이었다.

    “흠흠, 나만 궁금한 것도 아닌데……. 다들 그동안 궁금해했잖아요?”

    위축된 남자가 말을 더듬으며 모두의 동조를 바랐다.

    그때, 내내 잠자코 있던 지윤이 나서서 말했다.

    “정 지배인이 입을 꾹 닫으니, 소문이 더 이상하게 번지는 거 아닌가요?”

    이한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계속 얘기하란 뜻이었다.

    “정 지배인에게 남자가 많단 소문 못 들어보신 분?”

    “…….”

    주변을 둘러본 지윤이 어깨를 으쓱하며 보란 듯이 말했다.

    “이 자리에 정 지배인이 고객들 그런 식으로 관리한다는 소문, 모르는 사람 없을걸요?”

    “그런 소문.”

    이한의 입안에서 굴러가는 단어가 탁했다.

    “젊은 여자가 남자 지갑을 열게 하는 방식이야 뻔하단 거죠. 그런데도 정 지배인은 즐기는 것처럼 아무 해명도 안 하잖아요.”

    지윤이 얼굴까지 붉히며 목소리를 높이자, 누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 지배인이 내 약혼자까지 건드렸단 소문을 듣게 됐죠.”

    현준을 바라본 지윤의 얼굴에 언뜻 증오가 스쳤다. 세인을 향한 적개심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이한이 툭, 아이스 버킷에서 얼음을 꺼내 온더록스 잔에 투하했다.

    그 바람에 술이 튀었으나 이한은 괘념치 않고 말했다.

    “그래서 임지윤 씨가 죽고 못 사는 그 새끼 때문에, 우리 세인이 불러놓고 회 쳐 먹으려고 그랬습니까?”

    이한이 현준을 노려보자, 뭐 씹은 표정으로 담배를 태우던 현준이 놀라 콜록댔다.

    “똥은 지들이 싸고, 책임은 우리 세인이한테 뒤집어씌우고. 이걸 어디까지 봐줘야 하나.”

    이한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장내에 차가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세인도 이한이 그다지 예의범절에 철두철미한 성격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본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공격적일 수 있단 건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이한과 함께 다른 사람을 대면할 상황이 거의 없었으니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세인이 아는 것보다 더 이한은 결벽적인 성격인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이런 일에 화를 내고 대응할 리가 없었다.

    순간 이한이 피식 웃었다. 그의 호흡이 세인의 둥근 어깨에 스미자, 그녀가 움찔했다.

    세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한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름으로 반성 중이라 함부로 만나러 오지 못한 건데…… 내 부재가 이런 식으로 조롱거리가 되었나.”

    “서 전무님이 뭘 잘못했는데요?”

    지윤이 호기심을 거두지 못하고선 물었다.

    “내 고해성사는 그쪽이 들을 것 없고, 임지윤 씨.”

    “……네?”

    “머리가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네?”

    “정 걱정이면 발정 난 그쪽 개새끼나 간수 잘해. 저 새끼가 두 번 다시 우리 세인이 두고 침 흘리지 못하게.”

    현준을 지그시 바라보며 이한이 말을 이어갔다.

    “남자구실 못 하게 되는 건 바라지 않겠지. 그럼 임지윤 씨도 손해니까.”

    이한이 차게 웃으며 말을 마쳤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모두가 굳었다. 깊은 바다에 잠긴 것처럼 숨소리 하나 들려오질 않았다.

    주변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가운데서 세인은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몇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가슴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어떤 의도이든 자신의 편을 들고 있는 이한을 막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감싸준 건 처음인 것도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취한 게 틀림없었다.

    현준이 세인에게 추근댔던 사실은 이곳에 자리한 대부분이 알고 있었기에 이한의 경고는 타당했다.

    모두 세인과 이한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소문대로 이한이 세인을 버렸다면, 오늘 같은 날 굳이 나타나서 화낼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공범인 양 이한에게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혹여 제게도 불똥이 튈까 봐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한을 지지하는 제문 그룹이란 거대한 힘 앞에서 세인을 깔아보던 인간들 전부 약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이 불쾌해야 마땅한데, 세인은 실없이 웃음이 나오려 했다.

    결국 웃음이 터져 잘게 흔들리는 세인의 어깨너머로 이한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겨우 이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어?”

    고개를 튼 이한이 세인에게로 달콤한 시선을 보내왔다.

    가까운 간격에 놀람도 잠시, 그가 별로 미워 보이지 않는단 사실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세인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이한을 오래도록 마주 봤다.

    그가 돌아왔을 당시엔 얼굴 보는 것조차 괴롭기만 했는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지금은 꽤 봐줄 만했다.

    심장이 자꾸 과민 반응을 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무얼 그렇게 미워했나, 대상이 흐려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속도 없이, 그의 죄를 덜어내려 하고 있었다.

    이런 위로에 목말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 남자에게 그리움을 느꼈던 걸까.

    이한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세인의 안에서 바보 같은 희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저 외면했던 감정의 진실을 향해 한 발 나선 걸지도 몰랐다.

    “고작 이거로 성에 차면 안 되지.”

    “그럼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데요?”

    세인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에게 무얼 해줄 수 있냔 질문을 해보았다.

    가슴이 이상했다.

    이한은 어디까지 손을 내어줄까. 어디까지 연기해 줄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이한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해 왔다.

    그냥 하는 소리겠지. 그걸 알면서도 세인은 마음이 흔들렸다.

    어떻게 해야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긴 이한을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미련한 고민이 번지고 있었다.

    미쳤어. 그를 용서할 방법을 찾고 있다니.

    “정세인을 조롱한 것들 전부 산 채로 묻어줄까.”

    “묻어요……?”

    “그래. 전부 죽인 뒤에 죗값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잔인한 말에, 우습게도 마음이 흔들렸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면.”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이한의 음성이 달콤했다.

    아니야, 술 때문일 거야. 세인은 크게 심호흡했다.

    그때였다. 지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정략결혼이잖아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자, 지윤은 이성을 잃은 게 분명했다.

    “저, 정략결혼인 거 뻔히 아는데 포장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요?”

    재차 소리치는 지윤의 흰자위에 핏대까지 올라서 있었다.

    씩씩대는 지윤을 바라보는 이한의 눈빛은 그늘처럼 차가웠다.

    “정략결혼 전에, 첫사랑입니다.”

    이한이 내뱉은 첫사랑이란 말에 물을 마시던 세인은 사레들리고 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