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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25화 (25/95)
  • 두 번째 신혼 25화

    아래층은 여러 개의 룸이 있어 술이나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였다.

    세인은 아래층의 상태도 확인할 겸 지윤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게요.”

    반깁스를 풀었더니 아직은 걷는 게 불안했다.

    세인이 난간을 잡고 지윤의 무리를 따라 내려가자, 길게 난 복도의 은은한 조명이 그녀를 반겼다.

    지윤이 향한 곳은 복도 한가운데의 메인 룸이었다.

    현란한 조명이 번쩍이던 홀과 다르게 룸 안은 어둡고 묵직한 분위기였다.

    끈적하게 엉켜있던 사람들이 주인공 지윤을 발견하곤 반갑게 인사했다.

    “뭐야. 지윤이 왜 이렇게 늦어?”

    “인사 좀 하느라. 맞다, 너희도 정 지배인님 알지?”

    지윤이 뒤쪽을 눈짓하자, 불시에 수십 개의 시선이 세인에게로 쏟아졌다.

    세인이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잠깐 당황했으나 세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에게만 살짝 눈인사를 하고 빈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상석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현준과 눈이 마주쳤다.

    “……어?”

    세인의 입술에서 작은 의문이 터져 나왔다.

    왜 강현준이 여기 있지?

    체크아웃했다고 들었는데…… 이한과의 일 때문에 꽁무니를 뺀 게 아니었나?

    세인과 눈이 마주친 현준이 휙 고개를 돌리더니 옆자리에 앉는 지윤의 가방을 받아 옆으로 치우며 세인을 외면했다.

    지윤의 생일이니 참석을 거절할 수 없었던 걸까.

    어쨌든 이한과 마주치지만 않으면 될 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세인이 눈가를 살포시 찌푸렸다.

    손님들은 모두 남녀로 짝을 지어 앉아 있었다. 전부 연인이나 약혼한 사이, 혹은 부부인 듯싶었다.

    지윤이 의도적으로 커플 동반인 자리에 세인을 데려온 게 분명했다.

    홀로 덩그러니 자리한 세인은 지윤의 저열한 수준에 헛웃음을 지어야 했다.

    온 김에 룸의 컨디션을 확인했다. 조명이 조금 흐릿하긴 했으나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직원에게 10분 뒤에 테이블을 한 번 정돈하란 지시를 메신저로 남겼다.

    “자기야, 나 오늘 많이 마신다? 그래도 되지?”

    한편 현준의 팔에 머리를 기댄 지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든가.”

    “나 취하면 업어줄 거야?”

    “야. 취하진 말고.”

    “자기가 있는데 뭐 어때.”

    지윤은 현준의 팔을 끌어안으면서도 세인을 향해 과시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현준을 두 팔로 꽉 쥐고서 온몸에 가시를 세우는 지윤이 어떻게 보면 귀여웠다.

    세인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일단 짠 하자. 지윤이 생일 축하하는 의미로.”

    현준의 말에 모두가 잔을 들었을 때였다.

    순간 지윤이 세인을 향해 물었다.

    “우리 지배인님은 남편분 언제 오셔요?”

    세인은 곧장 남편이란 단어를 해석하지 못했다.

    아, 남편. 서이한.

    이렇듯 이한과 그녀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는 그와의 거리감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세인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지윤이 목소리를 높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설마 서 전무님은 안 오시는 거예요?”

    지윤 덕에 또다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다.

    이한으로 인한 관심은 어떤 것이든 끔찍한 편이었다. 동정, 비난, 멸시 섞인 눈빛은 여전히 세인을 괴롭게 했다.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이한이 미웠다.

    그런데 오늘은 이한보다 지윤이 더 원망스러웠다.

    “네. 바쁠 거예요.”

    세인이 웃는 얼굴로 적당히 대꾸한 뒤 잔에 술을 직접 채웠다.

    그러자 지윤이 말했다.

    “하긴. 서 전무님께 초대장을 보내면서 나도 긴가민가하더라고요.”

    “……초대장이요?”

    “커플 동반이니 당연히 지배인님 남편분께도 초대장을 보냈는데…… 어머. 그것도 모르셨구나.”

    지윤이 안타깝단 투로 말하며 생글생글 웃는, 얄미움의 극치를 보였다.

    이한에게 멋대로 초대장을 보내 놓고 참석하지 않았다고 세인에게 창피를 주는 상황은 다분히 계획적이었다.

    세인은 이곳에서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시간을 계산해 보며 의무적으로 건배를 하고 술을 털어 넣었다.

    평일에 참았다가 주말에 포상처럼 마시는 술은 단 편이었다.

    “정 지배인님, 근데 나 사실 좀 궁금하다? 서 전무님 말이에요. 왜 더블나인에 오신 거래요? 진짜 이혼 도장 찍으러 온 거예요?”

    지윤이 꼬박꼬박 지배인이란 호칭을 잊지 않는 것은 세인의 위치를 상기시켜 주기 위한 장치였다.

    아무리 지윤이 막 나가도 세인은 지배인이니 달려들지 말라는 경고 같은 거였다.

    평소의 세인이라면 대충 얼버무렸겠지만, 지금은 그러기 싫었다.

    “부부가 만나는 게 이상한 일인가요?”

    “음…… 두 분에겐 이상한 것 같던데?”

    작정한 듯 지윤이 말한 그때였다.

    “어떻게 이상한데.”

    이한의 목소리가 세인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세인이 고개를 젖혀 올려다보는 순간, 이한이 세인이 쥔 술병을 가져갔다.

    “분위기 개 같을 땐 혼자 술 따라 마시는 거 아니지.”

    이한이 선 채로 술병을 기울여 술을 따라냈다. 그러곤 가득 채운 술잔을 직접 세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자, 마셔.”

    세인이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이한의 잔의 테두리로 세인의 입술을 뭉근하게 짓눌렀다.

    “얼른 마셔야지. 정세인한테 껄떡대던 저 새끼가 이 입술만 보잖아.”

    이한의 볼우물을 발견하고 나서야 가출했던 그녀의 정신이 돌아왔다.

    벌어진 입술 새로 액체가 밀려들었다. 마주한 이한의 시선에서 무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줘, 줘요. 내가 마실게요.”

    “그래, 그럼.”

    세인이 술잔을 받아 꿀빛 액체를 넘기는 사이, 이한이 그녀의 옆에 착석했다.

    이한은 쏟아지는 이목을 무시한 채 세인에게만 눈길을 주었다.

    누군가 그를 불렀으나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근육질의 허벅지가 세인의 맨살에 밀착했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차림을 단숨에 훑었다.

    “내 아내랑 어울리려면 나도 단추를 몇 개 풀어야 할까.”

    단조롭게 말하는 투에서 냉랭함이 느껴졌다.

    그레이 슬랙스에 셔츠를 입은 이한은 평소보다 편한 차림으로, 이 자리와 어울리는 행색을 하고 있었다.

    초대장을 받아서 온 건지, 아니면 또 집요하게 쫓아온 건지 선뜻 가늠하기 어려웠다.

    세인은 고민하며 이한의 눈썹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를 살폈다.

    시선을 천천히 내려 이한의 가슴을 보다가 핏줄 돋은 가지런한 손가락을 살폈다.

    그의 왼손 약지에 자리한 결혼반지.

    세인은 빼 버린, 그래서 불화설이 거세지는 데 큰 기여를 한 결혼반지를 이한은 여태 끼고 있었다.

    하도 하찮아서 뺄 의미를 느끼지 못한 걸까. 아니면 서류뿐인 부부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빼지 않은 걸까.

    매끈한 손가락에 자리한 결혼반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하면서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

    “대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커플 동반 자리에서 청승 떨면서 할 말은 아니지 않아?”

    “개인적인 일로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잖아요.”

    세인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이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관심이 그에게 닿아 있었기에 큰소리를 낼 수조차 없었다.

    그녀의 질문에 이한이 천천히 웃었다. 천진하게 팬 볼우물에 홀릴 만큼 바보가 아니건만, 그녀는 쉽게 동요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이한을 마주치면 부질없이 매듭이 풀렸다.

    그래, 이한이 돌아온 순간부터 마음이 흔들렸다. 술기운 때문인지 인정은 쉬웠다.

    “전화 안 받던데. 벌써 술 많이 마셨어?”

    그가 세인 앞에 놓인 술병을 손끝으로 툭 두드렸다. 혼자 마신 것 치곤 꽤 비어 보이는 형태였다.

    “이제 두 잔 마셨어요. 방해할 거예요?”

    “방해를 왜 해. 술 취한 정세인을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인데.”

    알몸을 내보이고도 당당한 이한보다 지금, 바로 옆에서 다정하게 웃는 이한이 훨씬 더 위험했다.

    자꾸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한에게 새로이 반하고 있는 건 아닐까.

    불길한 예감에 세인이 고개를 슬슬 저었다.

    “왜.”

    그가 한술 더 떠 세인의 젖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당연한 태도로 젖은 물방울을 거둬가는 이한을 향해 세인이 더듬더듬 물었다.

    “혹시 자고 싶어서 그래요?”

    그의 책상에는 하루에도 수십 장씩 초대장이 쌓일 터였다.

    이한이 그 많은 일정 중, 굳이 이 파티를 택한 이유는 하나일 터다.

    숙면하기 위해서겠지.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함께 잘 수 있나?”

    붉은 입술을 벌리며 그가 분명한 목적을 전달해 왔다.

    그래, 이한은 단지 숙면을 목적으로 이곳까지 찾아온 것뿐이었다.

    어떤 기대라도 한 걸까.

    세인은 찰나 이한에게 품었던 미련한 기대감을 마주하고서 자조했다.

    학습 능력이 꽝이구나. 정세인.

    “너만 괜찮으면 지금 침대로 가고 싶은데.”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이한의 본심에 세인이 옅게 웃었다.

    “되겠어요?”

    그녀의 거절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이한이 말을 이어갔다.

    “혹시 내 몸이, 취향이 아니라든가.”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체 본 뒤로 눈을 잘 못 맞추는 것 같아서.”

    나체란 단어에 세인의 뺨이 홧홧해졌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그리고 이런 대화 껄끄러워요.”

    “부부간에 이보다 더 중요한 대화가 어디 있는데. 내 거 생김새가 별로야?”

    “제발 입 다물어요.”

    세인이 흘긋흘긋 닿는 시선들을 의식하고 목소리를 억눌렀다.

    세인의 입술 새를 비집고 들어온 건 말랑한 체리였다.

    “빈속일 텐데 너무 과음하진 말고.”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문지르는 이한의 눈이 보기 좋게 휘었다.

    세인이 의도적으로 치아를 파고든 손가락을 피하기 위해 체리를 받아먹으려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그가 세인의 허리를 안아 제 무릎 위로 당겼다.

    아까부터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한 덕에 세인만 말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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