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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24화 (24/95)
  • 두 번째 신혼 24화

    병실을 전부 치우고 나자, 혜인이 잠들어 있었다. 많이 피곤했겠지. 놀랐을 거고.

    세인은 미안한 마음에 습도와 온도를 체크하고 혜인의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그런 뒤엔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병실의 응접실로 향했다.

    “네.”

    -자기, 오늘 언제쯤 오니?

    또 다른 부총지배인, 신명지였다. 그녀는 마흔 중반의 나이로 이혼 뒤 두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었다.

    “신 지배인님, 저 빠지면 안 되겠죠?”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가 입원했어요.”

    세인의 상황을 대충 아는 명지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이고. 자기 입장은 알겠는데, 저녁에라도 잠깐 얼굴 못 비치나? 두 시간만. 아니. 한 시간이라도.

    난감해하는 명지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낙하산 세인을 옆에 끼고 가르친 게 명지였다.

    “그럼 잠깐 들르는 거로 해도 될까요?”

    -그래야지, 그럼. 언니는 어떻게 하니? 마음이 안 좋다.

    “번번이 죄송해요.”

    -죄송하면 휴무 대타나 좀 해줘. 알았지? 그만 끊자.

    많이 바쁜지 명지는 서둘러 통화를 종료했다.

    바쁜 은희는 곧 돌아갈 테니, 저녁 시간은 간병인 이모님께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싫어할 혜인을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웠다.

    “어디 갔다가 와?”

    혜인이 그새 깨버렸는지, 이불을 움켜쥐고선 세인을 바라보았다. 분리 불안을 앓는 것처럼 혜인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잠깐 전화했어.”

    “왜? 누군데?”

    “이따가 호텔 들어가야 해서 신 지배인님이 전화하셨어.”

    혜인의 눈빛이 단번에 예민해졌다.

    “지금 날 여기 처박아 두고 너는 돌아가겠다는 거야?”

    “미안해. 미룰 수가 없는 일이야. 전부터 하기로 한 일이라서…….”

    “매일 그렇게 말하잖아!”

    “이번 일 끝나면 휴가계라도 신청해 볼까? 그러면 병원에 쭉 있을 수 있잖아.”

    “그건 싫어. 호텔은 계속 다녀.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혜인의 변덕이야 익숙한 일이기에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문득 이한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남 뒤치다꺼리하는 정세인의 일.’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소리였다.

    세인이 머뭇대다가 조심히 물었다.

    “언니, 그냥 차라리 일을 그만둘까?”

    “그건 안 돼!”

    혜인이 과민하게 반응한 탓에 세인은 약간 당황했다.

    “언니……?”

    “그, 그만둘 생각 꿈에도 하지 마. 알았어?”

    혜인은 일 때문에 세인이 자신에게 소홀해지는 걸 싫어하면서도 세인이 계속해서 호텔에 근무하길 바랐다.

    “나는…… 네가 호텔 부총지배인인 게 좋아. 내 동생이…… 그런 직책이라고 하면 뿌듯하단 말이야. 언니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응. 나도 그냥 해본 소리였어.”

    세인이 냉큼 말을 바꾸며 혜인의 안색을 살피려 애썼다. 다행히 흥분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너 앞으론 그런 소리 하지 마.”

    “미안해. 그리고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응?”

    세인이 잘 부리지 않는 애교를 부리며 혜인을 끌어안았다.

    혜인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된 건 더블나인을 찾았을 때부터였다.

    자유롭고 아름다운 더블나인을 마음에 들어 하는 혜인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아마 평생 헤아리지 못할 터다.

    건강을 염려하는 부모님 덕에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는 상황까지 더해져 혜인은 많이 억눌린 상태였다.

    그러니 세인이 더 잘해야 했다.

    시간이 되어 나갈 채비를 하는 세인의 등 뒤에서 혜인이 넌지시 물어왔다.

    “일요일엔 오는 거지?”

    “응. 일 마치고 빨리 올게.”

    세인은 당연히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

    그날 저녁, 세인은 분주한 걸음으로 객실로 향했다. 파티 홀을 둘러볼 새도 없었다.

    더블나인에 도착하자마자 급한 보고만 받은 뒤, 귀걸이를 분실한 고객을 찾았다.

    위로금과 함께 선물을 건네고 나자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제 객실에 배달된 종이 가방을 연 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음…….”

    손바닥만 한 바지를 손끝으로 들어 올린 뒤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 지배인님이 고르신 걸 텐데…….”

    명지의 안목에 의심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이걸 정말로 입으라는 거야?”

    검은 가죽 바지에 크롭탑. 옷차림에 편견 없는 세인이라지만 지나치게 노출이 강한 옷이었다.

    이걸 파티에 입고 오란 의도가 심히 부담스러웠다.

    고상한 선율에 맞춰 가식적인 미소를 섞어야 하는 파티보단 나을까.

    그래, 그럴 거야.

    세인은 그렇게 위안 삼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반깁스를 푼 뒤 태그를 제거한 옷을 입었다.

    조금 진하게 화장을 마치고 머리를 만지자, 이목구비가 짙어져 있었다.

    이런 모습이 어색했으나 나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세인은 거울에 비친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업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논다고 생각하라던 명지의 금쪽같은 조언을 되새기며 허리를 폈다.

    ***

    파티는 수영장이 내다보이는 홀에서 진행되었다.

    한쪽은 통유리창이었고, 반대편은 크리스털 기둥이 현대적으로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내부는 DJ가 달군 비트로 요동하고 있었다.

    EDM과 베이스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고, 파티의 열기는 자리를 채운 젊은 손님의 피처럼 뜨거웠다.

    생일 파티라더니 지윤은 인맥을 과시하듯 많은 사람을 불러들였다.

    메인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던 세인은 인파를 헤치고 천천히 걸어오는 지윤을 보며 남은 술을 털어 넘겼다.

    지윤이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은빛 스트랩이 어쩐지 피곤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세인의 앞에 당도한 지윤의 입매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지배인님, 많이 바쁘시다더니 오긴 왔네요?”

    지윤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마치 올 줄 몰랐던 것처럼 말하는 점이 가증스러웠지만 세인은 굳이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말이 손님으로 참석이지, 계속해서 파티 컨디션을 파악해야 하는 세인은 이곳의 책임자와 다름없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 사석이잖아요. 오늘은 편하게 하세요.”

    지윤이 친밀함을 과시하듯 웃었다. 그러나 그 말이 가만두지 않겠단 소리처럼 들려왔다.

    지윤은 종종 더블나인의 클럽을 찾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준이 있는 날에 더블나인을 찾았다.

    그전에도 임 본부장과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더블나인에 관심을 보인 건 최근 현준이 귀국하면서부터였다.

    지윤은 정략혼을 뛰어넘어 현준에게 진심인 듯했다.

    현준과 어울리는 여성들 및 세인을 바라보는 지윤의 눈에 경멸과 질투가 어리곤 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지윤은 현준의 약혼녀란 사실을 과시하길 좋아했다.

    현준의 곁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으니, 그녀 나름의 방비책이었으리라.

    지윤의 과열된 질투는 세인에게까지도 뻗쳐왔다.

    그녀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거나 시비를 걸어 세인을 당혹스럽게 했다.

    다행히 사석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세인도 적당히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 파티에 강제로 초대받은 거지만.

    “정 지배인님, 오늘은 마음 푹 놓으시고 마음껏 즐겨요.”

    약 올리는 게 분명한 지윤의 곱상한 미소에 세인도 거짓 웃음을 유지한 채 속으로 한숨 쉬었다.

    이런 기 싸움은 어렸을 때나 하는 줄 알았는데.

    “아아. 지배인님 불편한 게, 설마 우리 아빠 때문에 그래요?”

    굳이 임 본부장의 일을 꺼내는 의도야 훤했다. 세인을 창피 주기 위해서였다.

    “저도 얘긴 들었어요. 정 지배인님 머리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사과했다죠?”

    소리 내어 웃는 건 덤이었다. 아무리 유치한 장난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울화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윤의 친구들 또한 입을 가리고 웃거나 조롱하듯 세인을 훑어보고 있었다.

    사실 세인은 이런 기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체력과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적을 늘리거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진 않았다.

    지윤이 적당히 물러난다면 세인도 강경히 대응할 마음은 없었다.

    “또 뭐라고 했지? 아! 우리 아빠한테 봐 달라며 무릎 꿇었다면서요? 아쉽다. 내가 그걸 봤어야 하는데.”

    “재미있으세요?”

    세인이 조용한 투로 되묻자, 지윤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어머. 마음 상하셨구나. 근데 내가, 우리 지배인님 잘 봐달라고 아빠한테 말이라도 해줄 수 있는데.”

    세인은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끝도 모르고 들이받으려는 지윤 같은 종자를 무한히 포용할 정도로 마음이 넓진 못했다.

    세인이 태연히 지윤을 보며 말했다.

    “걱정 감사합니다. 그럼 저도 걱정되는 마음으로, 한마디 해도 될까요?”

    승리를 확신한 듯 우쭐한 표정의 지윤이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정 지배인님 걱정이라니, 감동인걸요?”

    또다시 깔깔깔 무리가 웃음 지었다. 세인도 옅게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이번 파티에서는 실수를 안 하셔야 하잖아요.”

    “실수?”

    “과음은 삼가시고 질 낮은 손님들은 멀리하는 게 좋겠어요.”

    “그게 무슨…….”

    “몇 달 전에 크게 실수하셨다고 들었어요. 이번에도 그러시면 곤란하실까 봐요.”

    말을 마친 세인이 약간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지윤과 그 무리를 천천히 훑었다.

    올해 초, 지윤이 임 본부장의 얼굴에 먹칠한 사건은 더블나인까지 소문이 파다했다.

    임 본부장이 주최한 디너파티라고 했나. 그곳에서 지윤이 술에 취해 난동을 피웠다고 들었다.

    임 본부장 외동딸이 술에 취해 속옷 차림으로 남직원의 뺨을 올려쳤단 소문은 아직까지도 술자리 안주로 회자됐다.

    차마 입에 올리기 낯부끄러운 소문인지라, 당사자 앞에선 쉬쉬하는 모양이지만.

    세인이 가만히 지윤을 보고 있자,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창피한 건 아는 듯싶었다.

    “그럼 오늘은 즐거운 파티 되시길.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세인이 쐐기를 박자, 지윤의 입매가 찰나 뒤틀렸다. 화를 억누르고 있는지 입술이 파르르 경련하기까지 했다.

    “하, 그럼 지배인님도 같이 내려가죠.”

    지윤이 눈짓한 곳은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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