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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23화 (23/95)
  • 두 번째 신혼 23화

    약을 챙겨준 김 의원이 전화를 받으며 의료실 밖으로 나갔다. 마침 그때 세인의 핸드폰도 울렸다.

    세인은 낑낑대며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이모님.”

    -지금 오셔야겠어요!

    “무슨 일 있나요?”

    -큰아가씨께서 침대에서 떨어지셔서 입 안쪽을 다치신 것 같아요. 세상에 이를 어째…….

    발을 동동 구르는 것처럼 간병인 이모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피가, 피가 많이 나요!

    세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지금 바로 올라갈게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이한과 의미 없는 실랑이를 벌일 때가 아니었다.

    언제나 혜인이 1순위라는 것을, 이한과 있는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혜인을 의식에서 지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야.”

    이한이 다리를 펴고 일어나며 물었다.

    “가 봐야겠어요.”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그녀의 어깨를 눌러 앉힌 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딜.”

    “놔요. 가야 한다는 말 못 들었어요?”

    “그러니까 어딜. 말하고 가야지. 같이 가.”

    은근하지만 집요한 이한의 시선이 세인을 옭아맸다.

    대답하기 전까진 보내지 않겠다는 가당치도 않은 태도에 세인은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언니가 다쳤어요. 빨리 가야 해요.”

    “놓아주면 뛰어가기라도 할 것 같은데.”

    “비켜요. 한 번만 더 막으면 정말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세인이 다가오는 이한의 팔을 매정하게 쳐냈다. 이번엔 억지로 웃는 얼굴도 하지 못할 만큼 다급했다.

    “같이 가. 데려다줄 테니까 안겨.”

    “제발.”

    “안아주는 게 싫으면 휠체어라도 타.”

    “그만해요!”

    세인이 소리 질렀다. 꾹꾹 참고 참았던 울분이 기어코 터져 버린 거다.

    “사람 가지고 흔드는 게 재미있어요? 제발 그만 좀 해요.”

    “흔들리긴 했고?”

    “서이한 씨.”

    “난 시작도 안 했는데.”

    “미안하지만, 친한 척 이름 부르는 거, 자꾸 얼씬거리는 거, 걱정하는 척 가증 떠는 거, 전부 역겨워요.”

    일어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한이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겠지, 하며 세인은 말을 이어갔다.

    “나는 당신이 싫어요. 보고 있으면 내가 너무 초라해. 후지고 바닥 같아. 그러니까 제발 좀 사라져 줘요.”

    세인은 울먹이며 말했다.

    그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싫었다.

    더 싫어지기 전에, 더 작아져 아예 소멸하기 전에 이한이 그만했으면 했다.

    “제발 가줘요. 원래대로, 하던 대로 하란 말이에요.”

    세인의 말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원래대로라면, 언제. 우리 처음?”

    “…….”

    “그때처럼 하면, 내가 더 미친 새끼가 될 텐데.”

    “말장난하는 거로 보여요?”

    “내가 그때 어떤 마음으로 널 좋아했는지 알긴 해?”

    이한이 목을 긁듯이, 상처를 긁어내듯이 거칠게 물어왔다.

    좋아했단 말에 세인의 심장이 주저앉았다. 욱신욱신한 가슴에서 자꾸만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아픈 과거.

    배신당한 기억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현재의 이한이 세인을 더 힘들게 하고 있었다.

    지금의 이한이 폭풍과도 같아서, 그때의 이한이 희미할 지경이었다.

    다만 세인은 이렇게 이한과 감정을 소모할 여유가 없었다.

    귀가가 늦은 탓에 혜인이 다쳤다.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 혜인의 상처를 살펴야 했다.

    세인은 심호흡하며 과열된 흥분을 누그러뜨렸다. 촉촉해진 눈시울을 무시하며 세인이 말했다.

    “불면증은 안타깝게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서이한 씨를 돕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내가 고작 불면증 때문에, 정말 잠이나 자보겠다고 이러는 것 같아? 정말 그래?”

    이한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말을 덧붙였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해 봐.”

    대답 대신 세인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끈거리는 통증이 발목을 관통했으나 반깁스를 한 상태라 아까보단 걷기가 수월했다.

    절뚝거리며 그를 지나친 세인이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부탁인데, 앞으론 개인적인 이유로 찾아오지 말아요. 내 일에 관여하지도 말고요.”

    6년 전 세인의 마음처럼, 의료실 문이 차갑게 닫혔다.

    ***

    그날 저녁, 세인은 혜인의 출혈이 멎은 걸 확인한 뒤에야 고객을 찾아가 사과했다.

    분실한 귀걸이를 같은 모델로 변상한다고 하자, 고객은 이미 받았다며 흔쾌히 용서해 주었다.

    세인이 혜인에게 달려간 사이, 이한이 주문한 새 귀걸이가 벌써 전달된 거다.

    이걸, 이한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세인은 복잡한 머리를 털며 혜인을 데리고 본가로 향했다.

    혜인의 상처는 다행히 입안이 터진 것에 그쳤지만, 자칫 다른 곳이 다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던 걸 생각하면 안주할 수가 없었다.

    세인은 간병인 이모님이 계속 사죄하는 걸 겨우 만류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간병인 이모님과 혜인, 세인이 탄 차에 적막이 가득 내려앉았다.

    세인이 룸미러를 살피며 말했다.

    “출발할게요.”

    “천천히 가. 속 울렁대.”

    혜인이 창밖을 보며 말했고 세인은 최대한 상냥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응. 조심히 갈게.”

    그렇게 한 시간 반가량을 달려서 본가에 도착했다. 세인이 운전석에서 내리자, 마중 나온 모친 심은희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엄마, 나와 계셨어요?”

    세인이 묻는 순간이었다. 은희가 팔을 휘둘러 세인의 뺨을 내려쳤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란 세인은 따끔한 뺨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

    “너는 대체 뭘 하는 애야.”

    “……네?”

    “정신을 얻다 두길래, 혜인이가 다치니.”

    “…….”

    “생각이 있어, 없어. 애를 왜 혼자 침대에서 내려오게 해!”

    “죄송해요.”

    “기어코 네 엄마까지 죽일 거니? 연락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죄책감을 들추는 모진 추궁 앞에 세인의 고개가 무거워졌다.

    “죄송, 합니다.”

    “혜인이 다쳤단 소리만 또 들려봐. 그땐 너 내 딸 아니야.”

    송곳 같은 말이 세인을 난도질했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세인의 텅 빈 가슴을 아프게 긁어댔다.

    세인은 한쪽으로 비켜서서 은희가 혜인을 휠체어 태워 집으로 들어가는 걸 바라보았다. 큰딸을 애지중지하는 걸 모를 수가 없는 태도였다.

    그 자리에 멈춰 선 세인은 밝게 불이 켜진 따뜻한 집안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흐린 시야를 깜빡이고 있자니, 자신이 꼭 이 집안의 관찰자 같아졌다.

    절대로 섞여들 수 없는 불순물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서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인은 반깁스한 발을 절뚝이며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꽤 아팠다. 문득 안아줄까, 휠체어를 태워줄까, 극성을 부리던 이한이 떠오르고 말았다.

    의도야 어떻든 그런 관심을 주는 건 이한뿐이었다.

    여름의 밤이 겨울보다 더 시렸다.

    ***

    대연 병원 진료실.

    혜인의 정기 검진을 마친 후, 세 모녀가 진료실 의자에 착석했다.

    모니터를 빤히 살피던 단발머리의 은 교수가 난감한 낯으로 진단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입원 치료를 하셔야겠습니다.”

    “은 교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은희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 거다.

    이곳 대연 병원이 아닌, 상영 병원의 병원장인 은희는 피부과 교수였다.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은 교수를 찾아 이 병원까지 찾아온 건, 20년도 더 된 일이었다.

    은 교수를 상영 병원으로 스카우트하기 위해 높은 페이를 제시한 적도 있었으나, 은 교수의 남편이 이곳의 이사장인 터라 무산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은희는 병원장의 체면과 명예를 덮어두고, 혜인의 치료를 위해 이곳 대연 병원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자 은희의 이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환자분께 신경 퇴행 현상이 보입니다. 여기 보시면…….”

    “은 교수님, 우리 혜인이가 더 안 좋아졌단 소리예요?”

    “환자분, 혹시 스트레스받는 일이라도 있었나요?”

    은 교수가 냉정하기 그지없는 투로 물었고 혜인과 은희의 시선이 세인을 향했다.

    마치 혜인의 병이 악화된 게 세인의 탓이라는 듯이.

    “저는 절대로 입원 안 할 거예요.”

    혜인이 입원 치료를 거부하자, 예상했다는 듯 은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춘기에 접어든 이후부터 혜인은 가장 중요하다는 재활 치료를 마다했다.

    주기적인 검진으로 상태만 체크해 왔는데 결국 일이 커진 모양이었다.

    “불완전 마비라곤 하나 계속 재활을 미루시면 지금보다 더 거동이 어려워지실 겁니다. 배변 장애가 올 수도 있고, 그림도 그리지 못하실 수 있어요.”

    은 교수의 말에 혜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런 그녀를 감싸 안으며 은희가 세인을 노려보았다.

    “세인아, 빨리 네 언니 설득하지 않고 뭐 하니.”

    은 교수의 안쓰럽단 눈빛이 제게 닿은 순간, 세인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혜인을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그녀의 몫이었다.

    상태가 나빠졌다면 치료해야 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도 했다.

    “언니, 교수님 말씀 듣자.”

    “싫어! 병원 답답하단 말이야.”

    “얼른 치료받고 나가면 되잖아. 응?”

    세인의 끈질긴 회유와 설득으로 혜인은 입원 수속을 밟았다. 적어도 두 달간은 집중 치료를 받아야 했다.

    지겨운 병원 냄새에 혜인의 신경이 곤두섰다. 병상에 누운 혜인이 잡히는 대로 아무 물건이나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아아!”

    어제부터 저조하던 혜인의 기분이 한계치에 달한 것이다.

    “언니.”

    “다 나가!”

    쨍그랑.

    세인은 쾌적한 VIP 병실이 망가져 가는 걸 묵묵하게 바라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혜인이 내쫓은 사람에 세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은희와 간병인 이모님이 나가고 난 뒤, 한참 뒤에야 혜인의 폭주가 잠잠해졌다.

    혜인이 손을 달달 떨며 머리를 한쪽으로 모았다. 천천히 머리를 땋아 내리며 세인을 향해 말했다.

    “검사 다시 받을 거야. 아니, 병원을 옮겨야겠어.”

    이렇게까지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병원을 싫어하는 혜인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혜인이 씨근덕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그녀를 두고 세인은 허리를 굽혔다.

    어질러진 바닥을 치우는 것 또한 세인의 몫이었다.

    “휴…….”

    깁스한 다리를 어정쩡하게 바닥에 댄 세인은 절뚝거리며 깨진 물건을 쓸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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