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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20화 (20/95)
  • 두 번째 신혼 20화

    유독 긴 샤워를 마친 이한이 손님용 목욕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정세인.”

    그러나 침실과 밖, 어디에도 세인은 없었다. 이마를 찌푸린 이한은 핸드폰을 찾았다.

    세인에게 전화를 연결했지만, 상대방이 받을 수 없다는 냉정한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하…….”

    이한은 세인이 사라진 객실 한가운데 서서 쓰게 웃었다.

    이런 숨바꼭질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다만 그녀가 진심으로 달아나려 하는 상황만은 오지 않길 바랐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미쳐 버릴지 몰랐으니.

    지금도 최선을 다해 참고 있었으므로 얄팍한 인내가 깨져 버릴까 그는 두려웠다.

    이한은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차지하지 못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세인에 대한 갈망이 컸다.

    정세인이란 여자는 유일 그 자체였다.

    그가 가지지 못한 독보적인 가치였으며, 그럼에도 이한의 방식대로 취하기엔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세인에게 지독한 방법을 쓸 순 없으니 자중해야 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세인도 많이 놀랐겠지. 곁에 없는 동안 많이 힘들었을 거고.

    세인의 이런 태도가 당연히 이해되었다.

    이한은 조금만 여유를 가지자고 다짐하며 비서 민성을 호출했다.

    세인의 객실에 채워두라 말한 여분의 옷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터다.

    잠시 뒤 완벽한 차림이 되어서야 이한은 세인의 객실 밖으로 나왔다.

    “전무님, 옷 챙겨 온 건 언제 들여놓을까요?”

    곁에서 걷던 민성이 묻자,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이한이 대답했다.

    “옆의 객실, 차명으로 잡아둬.”

    “예. 거기에 둘까요?”

    “우선은 그렇게 하지.”

    “네.”

    세인의 허락 없이 문을 따고 들어가서 짐을 들여놓는 무뢰배 같은 짓을 저지르는 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막 깨달은 차였다.

    그렇다면 좀 더 여우처럼 머리를 굴려야지.

    엘리베이터에 두 남자가 나란히 올랐다. 정면을 보고 선 이한이 물었다.

    “이무영 대표는 어때.”

    무영에 대해선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 조사를 마쳤지만, 마음에 차지 않는 정보뿐이었다.

    늘 이무영을 주시하고 있는 만큼 그의 행보에 꺼림칙함을 느꼈다. 세인과 사적으로도 얽히려는 정황이 종종 포착되었다.

    아무리 선해 봐야 깡패 새끼다. 세인에게까지 해가 될 만큼 위험한 짓을 일삼는 자였다.

    그래서 이한은 귀국과 동시에 이무영을 밀착 조사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세인이 가져온 남자 재킷이 무영의 것이란 것도 붙여놓은 자석에 의한 정보였다.

    그녀가 누구와 식사를 했는지, 무슨 메뉴를 먹었는지까지도 이미 알고 있을 만큼, 이한은 주변 파악에 치밀했다.

    “리조트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는 눈치였습니다. 자세한 건 조금 더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대중적인 모토로 새 리조트를 올리지 않을까 합니다.”

    이무영이 거머쥔 검은돈은 그가 가진 인맥과 정보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끈끈한 뒷배들의 도움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겠단 포부가 가히 대단했다.

    그래봤자 깡패 새끼였지만.

    이한은 가지고 싶은 것을 실패 없이 소유한 것과 같은 의미로, 제 것에 눈독 들이는 시선에 예민했다.

    무영이 세인의 주변을 빙빙 도는 이유가 짐작한 대로라면 굳이 참아줄 필요는 없었다.

    세인과 더불어 그녀의 부친이 거머쥔 밑 세계의 장악력을 탐내고 있겠지.

    팅. 중간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열린 문 사이로 얼굴을 보인 건 이무영과 같은 부류인 또 다른 껄떡쇠, 강현준이었다.

    이한을 보고 멈칫하던 현준이 이내 어쩔 수 없단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의 손엔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

    도망치듯 휴가를 반납하고 돌아가는 꼴이 가소로웠다.

    “좋은 여행이었나.”

    이한이 모른 체하려는 현준을 가만두지 않고 툭 찔렀다. 사색이 되는 옆모습을 보며 비식거렸다.

    결혼한 여자에게 술이나 먹여서 어떻게 해보려는 저열한 양아치 새끼.

    엘리베이터 밖으로 밀어내도 시원찮았으나, 굳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강현준이 다쳤단 소리를 들으면 세인이 한 번이라도 그의 생각을 하게 될 테니, 이쯤 할 생각이었다.

    “정세인 말이에요.”

    “우리 세인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한이 묻자, 현준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걔한테 이 갈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 건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잠자는 이한을 현준이 겁 없이 도발하기 시작했다.

    이한에겐 별 타격이 없는 말이었지만.

    “혼나더니 말투가 고분고분해졌네.”

    “꽤…… 여유 있으신가 봅니다. 보니까 정세인 일에 좀 진심이신 것 같던데. 소문과 다르게요.”

    “내가 여유 없어질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인가?”

    이한의 질문에 약간 움찔한 현준이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불룩하게 도드라지는 게 확연했다.

    애송이. 이한은 상대조차 되지 않을 양아치의 말에 좌지우지될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정세인이 조용한 것 같아도 누가 건드리면 물잖아요. 걔한테 당한 새끼들이 다 때만 보고 있습니다. 남녀 할 것 없이요.”

    유부녀에게 들이대다가 차인 쓰레기 주제에 현준은 분하다는 듯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정혜인만 지켜봐도 아실 겁니다. 걔가 선동해서 정세인 물 먹인 것도 여러 번이거든요.”

    “그래서.”

    “정세인 그 멍청한 게, 가스라이팅인 줄도 모르고 제 언니 뒤만 졸졸졸. 그래서 제가 몇 번 도와줬는데, 눈치도 없게 진짜.”

    “우리 세인이 걱정을 많이 하나 봐.”

    신나게 떠들어대던 현준이 아차 싶었는지 뒤늦게 표정을 굳혔다.

    어쩐지 이한이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은 착각에 현준이 마른침을 삼키며 한 뼘 정도 더 큰 이한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세인이한테 별 거지 같은 것들이 겁도 없이 꼬여 드는 게 한두 번일까?”

    “아니, 저는…….”

    이한이 한 발 더 다가가자 현준이 눈에 띄게 쪼그라들며 엘리베이터 벽으로 바짝 붙어 섰다.

    이한이 술병을 들고 다가왔을 때처럼, 생명에 위협을 느낀 거다.

    이한의 눈빛에서 지난번보다 진득한 광기가 엿보이는 느낌은 결코 현준의 착각이 아니었다.

    “왜, 왜 이러세요…….”

    “세인이에게 적이 많다고 그랬나?”

    “그게 제, 제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툭. 이한이 손가락으로 현준의 코끝을 가볍게 튕겨냈다.

    맞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던 현준의 목이 시뻘게졌다.

    “우리 세인이가 기댈 데가 나밖에 없는 건 좋은 일이지.”

    “…….”

    “좀 예뻐야지.”

    현준은 질린 표정으로 이한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자꾸 벌레가 붙어. 짜증 나게.”

    짓씹듯 말하는 이한의 입가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으나 동공엔 경멸이 가득했다.

    현준은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를 듣곤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다.

    이한의 뒤에서 한숨 소리가 퍼졌다.

    “적당히 하시지 그럽니까. 나이도 드실 대로 드신 분이 유치하십니다.”

    민성이 치를 떨며 말했다.

    “세인이 이름을 함부로 나불대는 새끼를 왜 참아.”

    사랑하는 여자의 문제라면 체면 가리지 않고 들이받을 치기 정돈 아주 많이 남아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른 이한이 입을 열었다.

    “정혜인 쪽은 어떻게 됐어?”

    “병원 측과는 얘기가 끝났습니다.”

    정기 검진이 주말이라고 했나.

    이한은 뒷좌석 시트에 등을 느긋하게 파묻으며 그래프가 입력된 태블릿 PC를 문질렀다.

    상향 곡선을 그리는 도표를 보며 세인과의 관계도 날개가 달리길 기원했다.

    그녀를 떠나 있던 6년은 태어나 가장 불행했던 시간이었다.

    세인과 결혼하기 위해 이별이란 선택을 했으니.

    이젠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우선은 세인이 갇힌 혜인이란 굴레에서 그녀를 자유롭게 만드는 게 첫 번째였다.

    그래야 내내 접혀 있던 날개를 펼친 세인이 이리로 포르르 날아올 게 아닌가.

    세인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이한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담당 교수가 이번 내원 때 정혜인 씨에게 입원을 권유할 겁니다.”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 않았다. 그보다 더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인간들이 거머리처럼 세인을 착취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모르게 하나하나 떼어낼 것이다.

    ***

    세인은 며칠 전 클레임이 들어왔던 임 본부장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사죄의 의미였다.

    막막한 점심 식사를 마친 세인은 습관처럼 소화제를 삼켰다.

    “체했나…….”

    날도 덥고 어질어질한 정신을 깰 겸, 직원 전용 카페테리아를 찾았다.

    창가에 자리 잡은 세인은 시원한 커피를 머금었다. 그리고 분수대를 보며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도무지 잊히지 않는 날것의 형태 때문에 문득문득 소름이 돋곤 했다.

    원래 다 그런 걸까…….

    그렇게 크…….

    “……인님.”

    근데 뭘 그렇게 뻔뻔해? 참나.

    “지배인님?”

    코앞까지 당도한 직원의 얼굴을 보고서야 세인이 화들짝 놀라며 상념에서 깨었다.

    “……네?”

    “지배인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빨가세요.”

    “아뇨. 괜찮아요. 말하세요. 지민 씨.”

    세인은 뜨거워진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직속 부하인 지민에게 말했다.

    “더위 드신 거 아니죠?”

    “그럼요.”

    “근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여러 번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시고요.”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직도 얼이 빠져 보이는 세인을 살폈다.

    “그냥 잠깐 딴생각을……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네. 총지배인님이 부르세요. 식당에서 마주쳤는데 말씀 전해 달라고 하셔서요.”

    상사의 호출을 좋아하는 직장인은 없었다. 찰나 스친 세인의 노곤함을 읽었는지 지민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고선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음, 주말에 있을 클럽 파티 때문일 거예요.”

    “그래요. 전해 줘서 고마워요. 지민 씨는 가서 조금이라도 쉬어요.”

    “네.”

    지민이 고개를 숙인 뒤 빠르게 사라졌다. 아까운 점심시간을 상사와 나누기 싫은 건 지민도 마찬가지일 거다.

    세인은 재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창밖으로 그늘이 졌다.

    무심코 창밖을 바라본 세인은 그대로 호흡을 멈추었다.

    통창 너머에 이한이 서 있었다.

    ‘이리 와.’

    이한의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찰나 그의 아랫도리로 시선을 내렸던 세인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끼이익. 의자가 마찰하는 소리가 두근거리는 세인의 심장을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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