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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19화 (19/95)
  • 두 번째 신혼 19화

    그녀의 몸을 뒤덮은, 남자다운 선으로 이뤄진 단단한 몸은 낯선 듯 익숙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이한 특유의 체향은 추억을 끌어오기 충분했다.

    세인이 난감함에 들썩이는 동안 이한은 그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렇게 움직이면 곤란한데.”

    “그럼 비켜주시면 되겠네요.”

    세인이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 부근을 콱 쥐었다.

    그리로 내려앉은 이한의 눈빛이 더 깊어진 건 왜일까.

    “지금 움직이면 또 실수할까 봐 그러지. 또 잠들면 감당되겠어?”

    “거짓말. 그럼 방금은 어떻게 그렇게 재빨리 움직였는데요?”

    “너 보자마자 품에 넣어두고 싶어서. 가둬놓고 싶어서.”

    이한의 목소리가 동굴에서 울리는 것처럼 웅웅, 세인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심장?

    세인은 어디선가 맹렬하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가슴뿐만 아니라 마주 본 이한의 심장에서 강한 격동이 울리고 있었다.

    가둬놓고 싶단 이한의 말에 애정이 담긴 건 아닐까.

    멍청한 착각을 해버릴 것처럼 부드럽게 휜 이한의 눈가가 다정하게 느껴졌다.

    바보 같아.

    “정세인, 혹시 내가 잠들면 머리를 뽑아서라도 깨워. 걷어차든가, 깨물어도 되고.”

    “그러려면 서이한 씨가 우선 비켜주셔야죠.”

    이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긴장이 풀렸나. 자꾸 눈이 저절로 감겨…… 왜 그런지…….”

    중얼거리던 이한의 음성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단단한 팔이 구부러지고 이한의 상체가 서서히 세인의 위로 주저앉았다.

    묵직한 무게감과 동시에 이한의 뺨이 세인의 귓가에 자리를 잡았다.

    “……뭐, 뭐예요. 수작 부리지 말아요.”

    “…….”

    “서이한 씨?”

    세인은 미동이 없는 그를 밀어내려 끙끙댔다.

    “서이한 씨, 자요? 나 진짜 머리 뽑을 건데?”

    대답 없는 이한의 어깨를 두들기고 발을 동동거리던 세인은 그를 겨우 옆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커다란 몸 아래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자,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아…….”

    세인은 손을 뻗어 이한의 잘난 얼굴 위로 슥슥 흔들었다.

    “자는 척하지 말고 일어나 봐요.”

    슬쩍 이한의 머리털도 당겨보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정말 잠든 듯했다. 수면 장애가 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 이러려고 온 거면서.”

    거짓말만 줄줄이.

    긴장이 풀린 세인은 허탈하게 한숨을 토해내며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오늘 하루가 도무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혼란의 중심에 있는 건 당연히 이한이었다.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자, 문득 병실 침대에 누워 이한과 함께 보냈던 밤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이한은 세인의 손길을 받아야만 잠이 들었다.

    가엽고 불쌍하고 귀여우며 사랑스럽던, 때론 얄밉고 어른스럽기도 했던 첫사랑 서이한.

    하지만 퇴색된 감정은 세인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겨 버렸다.

    그가 물밀듯이 치고 들어와서 잠시 흔들릴 순 있겠지만, 결국 흘러가 버릴 터였다.

    고된 하루를 보낸 세인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막지 못했다.

    그녀가 잠들자, 이한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고된 가슴을 조심히 두드렸다.

    늘 외로웠던,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던 세인의 생일은 침입자 이한으로 인해 평소와 다르게 지나갔다.

    ***

    이한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눈을 떴다.

    너무 잤나. 두통이 밀려들었다.

    잠에서 완벽히 깨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세인을 찾았으나 옆자리가 휑했다.

    “X발.”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자빠져 자느라고.

    이한은 목을 조르던 넥타이를 내리며 구겨진 슈트 재킷을 팔에서 빼냈다.

    세인을 닮아서 필요한 것만 딱 갖춘 침실을 느리게 훑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제는 약에 취한 것처럼 잠들어 버렸다. 세인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도 부족한데, 등신처럼.

    어젠 정성을 곱씹으며 장시간 세인을 기다렸으나, 그거로는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예상한 바였지만, 마음이 괴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아침 11시. 세인은 벌써 출근했을 시간이었다.

    이한은 침실에 붙은 욕실을 이용하려 하나둘 옷을 벗었다.

    그가 속옷을 발목 아래로 빼냈을 때였다.

    침실 문이 열리고 화장기 없는 뽀얀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세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한은 조심스레 밑으로 향했던 눈동자가 조금 커지는 걸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꾹 감았다 뜬 세인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왜 옷을 벗고 있어요?”

    “샤워하려고.”

    “제 잘못 아니에요. 무, 문이 열려 있어서…….”

    “그래, 아무 말 안 했어.”

    이한이 팔짱을 끼고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자 세인의 안색이 허옇다 못해 퍼렇게 변했다.

    붉게 물든 입술이 여러 번 뻐끔대다가 닫혔다. 아, 귀여워라.

    “굳이 따지자면 내 잘못이지. 집주인한테 허락도 안 받고 욕실을 쓰려고 했으니까.”

    “…….”

    “뺨이라도 칠래?”

    “나, 남자 알몸 같은 건 숱하게 봤어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그러니 놀라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었나 본데, 좋지 않은 포인트를 건드렸다.

    이한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숱하게? 그딴 걸 어디서 봤는데.”

    “그런 것까지 말해야 돼요?”

    세인이 시선을 절대로 내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약간은 안쓰러웠으나, 숱하게라는 단어에 심기가 뒤틀린 후였다.

    이한의 머리에 손님 따위가 알몸으로 뒹굴다가, 혹은 조심성 없는 모습으로 지배인을 호출하는 그림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그래서 어때. 이 정돈 성에 안 차?”

    이한이 배꼽 아랠 눈짓하며 말하자 세인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힘주어 눈을 치뜬 세인이 중얼거렸다.

    “……야만인.”

    세인이 쾅, 부서져라 문을 닫은 뒤 사라졌다. 이한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욕실로 들어섰다.

    수영장에서 빠져나와 속옷 차림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더니, 말과 다르게 남자 몸엔 면역이 없으시고.

    세인이 저런 반응을 숱하게 내보였을 걸 상상하자 눈에 핏대가 섰다.

    “하…….”

    그녀가 웃는 얼굴로 속내를 감추는 점이나, 담대한 척을 하나 실은 겁이 많은 점.

    야무지면서 한 번씩 맹탕처럼 구는 모습 전부 사랑스러웠다.

    다른 사람 눈에도 비슷하게 비칠 거란 게 문제였다.

    이한은 심호흡했다.

    “정성…… 진심.”

    세인을 잘 어르고 달래서 점심을 함께할 생각을 하며 뜨거운 물줄기 속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출근하지 않은 게 어디인가.

    어제 저녁은 함께하지 못했으니 오늘이라도 따뜻한 밥을 함께 먹고 싶었다.

    세인이 사용했을 물건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건드려 가며 몸을 씻던 이한은 결국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

    이한의 목울대가 묵직하게 잠겼다가 떠올랐다. 그가 짙은 시선을 깔아 성난 분신을 곤란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흔적만으로 이 지경이 되는 건 빈번했지만 세인의 생활 반경 내에서 미친놈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어젯밤 불치에 가까운 불면증을 순식간에 몰아낸 정세인.

    그녀는 사춘기 때조차 성욕에 지배받지 않던 무감각한 이한을 절절 끓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한편 이른 아침, 눈을 뜬 세인은 묵직한 팔 아래에 깔려 있었다.

    누구인가 싶어 보니, 이한의 팔이었다.

    “……!”

    그의 옆에서 잠들었단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존심도 없이 이한에게 덥석 틈을 내어준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했다.

    침대에서 빠져나온 세인은 고요한 이한의 잘난 얼굴을 노려보다가 입술을 씹으며 거실로 향했다. 차라리 빨리 씻고 출근할 작정이었다.

    미니 주방으로 들어가서 물을 꺼내 마시려는 순간, 메모지를 발견했다. 자그마한 쪽지가 아일랜드 식탁에 붙어 있었다.

    정갈한 필체는 어딘가 낯익었다. 이한의 것이었다. 그와 실제로 알고 지낸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이한의 필체를 단박에 알아본 것이다.

    [생일 축하해. 태어나 줘서 고마워.]

    ……언제 이런 걸 둔 거지?

    곰곰이 머리를 굴려 보자 이한이 처음 이리로 들이닥친 날에 두고 간 게 아닐까 싶어졌다.

    그게 뭐. 이맛살을 찌푸린 세인은 메모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서둘러 씻고 나온 세인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그만 나가야 하는데 메모를 버린 쓰레기통으로 자꾸만 시선이 쏠렸다.

    “……그래. 사람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잖아.”

    입술을 질끈 문 세인은 쓰레기통을 뒤졌다. 구겨진 메모를 펴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록 메모에 불과하지만, 살아생전 이런 걸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누가 생일을 물어보면 이미 지났다고 하든가 한참 먼 날짜를 얘기했고, 혹여 누군가 생일을 기억해 주어도 일부러 연락을 피했다.

    그렇게 평생 거부해 온 생일을, 이한이 허무하게 축하해 버렸다.

    메모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태어나 줘서 고맙단 문구에 가슴이 아파졌다.

    나는 정말 태어나 마땅했을까, 세인이 수없이 생각했던 질문이 재조명되었다.

    그리고 이한에게 그 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한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따지고 싶었다.

    정말 태어나길 잘한 것 같아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는데?

    태어나 줘서 고맙단 말이, 설령 입에 발린 소리라고 해도…….

    “……정말 미워.”

    그래, 위안을 받아버렸다. 조금 더 이 세상을 살아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만 같았다.

    메모지를 곱게 접어 지갑 안쪽에 넣어두었다. 버리긴 찜찜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한에게 위로받았단 불편함은 그냥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이한이 잠든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어제저녁부터 식사를 못 했을 이한이 신경 쓰인 거다.

    세인도 이한의 여우짓에 휘말리고 있단 자각은 있었다.

    그래도 식사 한 번으로 자지레한 미련을 털어낼 수 있다면,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식사 후에 확실하게 선을 그으면 될 거야.

    우선은 혜인의 방으로 건너가서 아침 식사를 챙기고 세안과 옷 입는 걸 도왔다. 혜인은 다행히 전날보단 기분이 나아 보였다.

    잠시 급한 업무만 처리하고 돌아온 침실.

    세인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나체의 이한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경악한 세인을 놀리듯 이한은 뻔뻔하기만 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시선이 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믿을 수 없는…… 잘못 본 건 아닐까?

    그러기엔 거대한 형체는 너무나 뚜렷했다. 당황스러움에 헛소리를 내뱉던 세인은 질겁한 채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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