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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16화 (16/95)
  • 두 번째 신혼 16화

    차로 한 시간가량 달려 식당에 도착했다.

    좋은 곳을 예약했다던 무영의 말은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가 예약한 프렌치 레스토랑은 입구부터 근사했다. 프런트에서 무영의 이름을 확인한 직원은 세 사람을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더블나인처럼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인 듯, 명단을 확인하는 태도가 꼼꼼했다.

    자리를 안내받은 세 사람의 귓가로 잔잔한 선율이 들려왔다.

    “많이 먹어라. 혜인이 너도.”

    오랜만의 외출에 들떴는지, 혜인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표님 덕에 바람도 쐬고 좋네요.”

    “그러냐? 맞다, 저번 주에 보낸 거 곧 통장으로 들어갈 거다.”

    “항상 감사해요, 대표님.”

    혜인이 방긋 웃었다. 사근사근하고 친화력이 좋은 그녀는 대표인 무영을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절친인 양 금방 이야기꽃을 피웠다. 세인은 그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에 맞장구치는 게 다였다.

    “대표님, 저 다음 작품은 한 달 정도 쉬었다가 시작하려고 해요.”

    “그래. 네가 뭐 돈이 급한 것도 아니고.”

    혜인은 그림을 그렸다. 무영은 그녀의 작품을 VIP 회원에게 비싼 값을 받고 넘겼다.

    세인의 부친 정홍춘과 무영의 유대 관계가 깊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혜인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화가였다. 전위적이고 강렬한 그림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다만 전시회를 열거나 실명을 드러내진 않고 비밀스럽게 활동했다.

    그런 점이 상류층의 관심을 끌었다. 돈세탁을 위해서 수십억짜리 작품을 턱턱 사들이거나, 희귀한 것에 수집욕을 발휘하는 이들 사이에선 혜인의 이름이 가치를 발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먹음직스럽게 플레이팅 된 음식이 세인 앞에 놓였다.

    밝은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온기를 띤 음식이 제법 군침 도는 향기를 풍겼다.

    그제야 세인에게로 허기가 밀려들었다. 종일 커피 말곤 제대로 먹은 게 없다는 게 생각났다.

    부드러운 걸 한 입 먹자, 위장이 요동치며 음식을 반겼다.

    세인은 숟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부지런히 씹고 삼켰다.

    “입에 맞아?”

    평소보다 적극적인 먹성이 눈에 띄었는지, 무영이 물어왔다.

    “네. 대표님.”

    “그래, 많이 먹어라.”

    “또 시켜도 되죠?”

    “다 먹고나 말해라. 맨날 밥도 애새끼들처럼 조금씩 먹으면서.”

    무영이 너털웃음 터뜨리며 말했다.

    세인은 아까부터 가슴을 조여오는 갑갑함을 무시하기 위해 더욱더 식사에 열중했다.

    지금쯤, 이한의 수준에 맞춘 화려한 파티가 루프탑에서 진행되고 있겠지.

    꿀꺽. 호박 덩어리를 삼키자 돌덩이가 틀어막힌 것처럼 목이 메어왔다.

    세인은 황급히 물을 마시며 이한의 생각을 지워 내려 노력했다.

    사납게 생긴 눈매로 그녀를 주시하던 무영이 그녀 앞으로 고기를 덜어주며 말했다.

    “또 시킨다는 애가. 팍팍 좀 먹어라. 어? 피골이 상접해선. 누가 보면 악덕 업주한테 고용된 줄 알겠다.”

    “맞지 않아요?”

    “까분다, 또.”

    말은 이래도 무영은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크게 자른 고깃덩어리를 몇 번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킨 그가 손을 휘휘 저어 세인에게도 어서 먹으라 신호했다.

    문득, 늘 깔끔하게 식사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련한 정세인.

    속으로 한숨을 흘린 세인은 손톱 크기로 자른 고기를 씹으며 혜인을 바라보았다.

    적당한 속도로 음식을 먹는 혜인 또한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와 클럽이나 카지노는 곧잘 방문하지만, 이렇듯 완전한 외부로 외출하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했다.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는 높은 턱이나 좁은 통로가 의외로 많았다.

    오늘은 무영이 있으니 걱정 없이 나온 것이고.

    다행히 레스토랑은 딱 다섯 테이블뿐이었다. 그래서인지 혜인을 향해 관심을 보이는 이는 없는 듯했다.

    휠체어를 탄 사람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오는 것 또한 자주 있는 일이었다.

    상대는 잠시 쳐다보는 것뿐이라고 생각해도 당사자인 혜인은 수많은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세인은 그 시선이 제게로 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해자인 혜인이 아니라, 그녀의 인생을 망쳐 버린 자신이 눈총받아야 마땅했다.

    그러질 못하니 죄책감은 나날이 깊어졌다.

    “언니, 와인 좀 더 할래?”

    혜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무영이 직접 와인을 따라 주었다.

    그가 제 빈 잔에도 채우더니 맥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냅킨으로 거칠게 입을 닦은 무영이 세인을 흘긋대며 말했다.

    “너는 왜 안 마시냐.”

    “평일엔 안 마신다고 몇 번 말씀드렸잖아요.”

    “술 그렇게 약한 것도 아니면서 그냥 좀 먹지?”

    “죄송합니다.”

    “하여간. 말을 하면 곱게 들은 적이 없어요. 표정이나 좀 풀든가. 낮에 그거 때문이냐?”

    낮의 일? 기억을 더듬은 세인은 임 본부장의 너구리 같은 얼굴을 생각해 냈다.

    정신이 딴 데 팔려 잠시 잊고 있었다.

    평소라면 내일 어떤 서비스로 본부장의 마음을 달래놓을지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지금 세인은 이한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쳤어. 그녀는 테이블 아래로 매만지던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버렸다.

    무음 상태로 찍히던 부재중 전화에서 관심을 떼기로 강하게 마음먹고 이한을 지워 내려 다짐했다.

    코스로 이뤄진 식사를 마치고 나니 8시가 훌쩍 넘어갔다.

    휠체어를 끌고 식당 입구로 빠져나온 세인은 무영과 그의 비서를 향해 고개 숙였다.

    “대표님, 잘 먹었습니다.”

    한쪽에서 비서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무영이 씨익 웃었다.

    “인사는 무슨. 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겠다. 우리 부총은 술 안 마셨으니까 기사 없어도 되지?”

    “네.”

    “그래, 그…… 축하하고.”

    무영이 멋쩍은 듯 허공을 보며 말했다. 축하? 세인의 고개가 갸웃했다.

    “무슨 축하요?”

    “오늘 부총 귀빠진 날이라며. 아니냐?”

    “아…….”

    세인이 입매를 어색하게 굳혔다.

    “뭐야. 몰랐냐?”

    “……아뇨. 아침까지만 해도 알았는데, 정신없어서 잠시 잊었어요.”

    무영이 이곳에 데려온 이유가 생일 때문이었다니. 단순히 혜인과 작품 얘기를 하기 위한 자리인 줄만 알았다.

    사실 생일인 것도 몰랐다. 무영이 아니었으면 언제나처럼 그냥 지나쳤을 날이었다.

    “감사합니다. 살펴 가세요.”

    “뭐,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케이크랑 팍팍 챙겨 먹고.”

    “네. 그럴게요.”

    세인이 옅게 웃고 나자 무영이 손을 설렁설렁 흔들곤 차에 올랐다.

    무영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세인은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잠자코 있던 혜인이 담요를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너 생일이었니? 왜 말 안 한 거야?”

    “몰랐어. 깜빡했어.”

    “넌 꼭 그러더라. 왜 자꾸 날 나쁜 언니로 만들어?”

    혜인이 속상한 듯 투덜거렸다.

    생일을 음력으로 지내다 보니 가족들조차 깜빡할 때가 많았다. 세인도 챙기기 싫어 일부러 기억하지 않는 편이었다.

    세인의 네 살 생일날, 고작 여섯 살이었던 혜인은 큰 사고를 당했다.

    당시 세인이 선물 받은 세발자전거를 끌고 대문 밖으로 나갔고, 주차된 트럭이 후방에서 놀던 세인을 보지 못하고 후진했다.

    그를 발견한 혜인이 달려와 동생을 감싸 안았고, 그 사고로 크게 다쳤다.

    그녀는 척수 손상을 입고 하반신 불완전 마비란 장애를 얻었다.

    평화로웠던 가정에 검은 폭풍이 들이닥친 날이었다. 그 후 혜인은 평생을 재활과 약물에 의지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생일을 챙길 수가 있을까.

    세인에게 생일이란 태어난 기쁨을 축하하는 날이 아닌, 태어난 걸 후회하는 날에 가까웠다.

    주차해 둔 차로 향한 세인은 허리를 숙여 혜인을 안아 조수석에 태웠다.

    혜인은 다른 사람이 닿는 걸 싫어해서 늘 이렇게 세인이 안아서 옮기는 편이었다.

    휠체어를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 차를 개조하는 방법은 혜인이 거부했다.

    리프트를 이용해 차에 오르는 것도 꺼렸기에 이렇듯 일일이 손을 써야 했다.

    혜인이 무슨 생각이든 그 마음을 이해했기에, 세인은 늘 군말 없이 혜인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계속 발목을 혹사해서일까. 여느 때처럼 혜인을 옮기려다가 사달이 나고 말았다.

    “어어?”

    혜인을 내려놓던 세인의 발목이 꺾였고, 그 바람에 혜인의 무릎이 대시 보드에 살짝 부딪히고 말았다.

    “정말, 조심 좀 해.”

    혜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짜증을 냈다.

    세인은 깜짝 놀라 담요를 걷어 올렸다.

    앙상한 뼈마디가 느껴지는 다리에 이상이 생기진 않았는지 꼼꼼히 손으로 매만졌다.

    “미안, 미안해.”

    “그만하란 말이야!”

    혜인이 화를 냈다. 감각이 거의 없다시피 한 다리에 통증이라도 느꼈을까 주무르던 행위가 그녀에게 상처였단 걸, 세인은 뒤늦게 인지했다.

    더 이상 미안하다고 하는 것조차 기만 같아서 세인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객실로 돌아간 뒤부터 혜인의 신경질이 시작되었다.

    물잔을 던졌고 소리를 질렀으며 이불이 눅눅하다고 짜증을 부렸다.

    세인은 묵묵히 깨진 유리를 치우고, 이불을 갈아주었다.

    늦은 밤, 혜인이 잠든 뒤에야 세인은 침대맡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겨우겨우 잠근 혜인의 눈가에 붉은 기가 돌았다.

    미안해.

    혜인의 인생을 보상해 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차라리 그 트럭에 깔려 죽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을 만큼 죄스러웠다.

    그랬다면 살아 있는 사람은 그래도 그냥저냥 행복하게 살았을지 몰랐다.

    원망만 남은 가족애보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일찍 떠난 딸을 추모하는 게 가족들에겐 더 나은 일이지 않을까.

    내일은 더 잘해야지. 세인은 오늘도 다짐했다.

    지친 얼굴로 돌아선 세인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세 통의 부재중 전화와 더불어 메시지 한 통이 확인되었다.

    [기다릴게.]

    메시지를 확인한 세인의 시선이 액정에 못 박힌 듯 고정되었다.

    “서이한…….”

    하…… 세인이 한숨을 토하며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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