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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15화 (15/95)
  • 두 번째 신혼 15화

    이한과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음식을 나눠 먹은 기억은 많지 않았다.

    세인에겐 이한과 함께하는 식탁보다 그가 없는 식사가 당연했다.

    세인 혼자 감당해야 했던 많은 시간 중에, 만약 이한이 지금처럼만 해주었다면.

    식사를 권하고 다친 발목을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주었다면 아마 이렇게까지 그를 원망하진 않았을 거다.

    머리가 정돈되자 살며시 달아올랐던 세인은 피부가 차게 식어갔다.

    “오늘은 나랑 먹어. 오랜만이잖아.”

    “아뇨, 언니랑 먹을게요.”

    “그럼 식사 후에 본관 루프탑으로 오는 건 돼?”

    루프탑?

    “거기 경치가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불현듯 오늘 루프탑이 예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이 났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정원 야경이 절경이었기에 루프탑은 리조트 호텔의 핵심 장소 중 하나였다.

    다만 렌트 비용이 상상을 초월해서, 주로 파티를 개최할 때나 오픈되는 곳이었다.

    오늘 렌트한 사람이 이한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귀국 파티라도 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파티 업무는 세인의 직무와는 거리가 먼 쪽이라 예약자의 이름을 대충 살핀 기억이 났다.

    아마 이한 쪽 사람의 이름으로 계약서를 작성했을 터다.

    대충 어떤 상황인진 그림이 그려졌다.

    제문 황태자의 귀환이니, 그에게 잘 보이려 줄 선 사람들이 한 트럭일 거다.

    이한의 입장에선 한 번쯤은 자리를 마련해 얼굴을 보여야 귀찮지 않겠지.

    “식사 후엔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무슨 일정. 또 그 클럽에 기어들어 가려고?”

    “말씀 가려서 해주세요.”

    “유부녀가 갈 만한 곳은 아니지.”

    이한이 피식 웃더니 세인의 옆구리 쪽에 손을 끼워 그녀를 달랑 들어 올렸다.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다가 번쩍 위로 들린 세인이 놀라 바르작댔다.

    “제, 제가 물건이에요? 왜 자꾸 서이한 씨 마음대로…….”

    세인은 이 장면을 지나가는 누가 볼세라 창문부터 살폈다. 다행인지 아닌지 이한 덕에 창문이 블라인드로 차단되어 있었다.

    “귀엽긴 하다만, 위험하니까 가만히.”

    귀여워? 그녀가 기막혀하는 사이에 이한이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스툴을 가져와 다친 다리를 얹어둔 그가 뒤로 물러섰다.

    “저녁엔 편한 신발 신고 와.”

    말을 마치고는 미련 없다는 듯 이한이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세인은 멍하니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순 제멋대로인 서이한.

    “아. 그리고.”

    문 앞에선 걸음을 멈춘 이한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물어볼 게 있는데.”

    “……뭘요?”

    “혹시 다른 새끼, 아니. 다른 자식한테 눈 돌린 적 있나?”

    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세인이 살포시 이마를 찡그렸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기도 했고, 좋은 뜻으로 한 질문 같지 않았다.

    이한이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말했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세인은 심장 박동이 미미하게 빨라지는 걸 느꼈다.

    다른 남자라니. 구설이라도 경계하는 걸까.

    이제 국내에 머물러야 하니 이목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겠지.

    날 다른 데 눈 돌릴 수준의 인간으로 봤던 걸까?

    아무렴 결혼을 했는데, 불륜 따위를 저지를까.

    세인은 애써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는 서이한 씨는요?”

    “굳이 타인에게 관심을 둬야 하나.”

    “그거야 모르죠.”

    “아니, 넌 알아.”

    이한이라면 남녀를 막론하고 타인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두지 않았다.

    6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불쾌한 심문을 받은 세인은 그걸 아는 척하기 싫었다.

    “서 전무님께 다가오는 이성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이한의 눈썹이 위로 슬쩍 들렸다. 그에 세인은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서이한 씨가 미국에 꾸린 살림이 여럿 된다더군요.”

    “누가 그딴 개소릴.”

    그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져 있었다.

    “서이한 씨 문란한 이미지인 건 맞잖아요.”

    이한의 목울대가 느리게 잠기는 걸 확인한 세인이 당당하게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럼 서이한 씨는 다른 여자분이랑 바람난 적 있어요?”

    이한의 눈썹이 아까보다 더 크게 실룩였다.

    이한이 문란하단 소문은 그와 맞선 보기 전부터 들었던 거였다.

    세인은 원치 않아도 종종 그의 소문을 듣곤 했다.

    오는 이성을 막지 않는다던 이한의 취향은 관능적이고 키가 큰 여성이라고들 입 모아 말했다.

    결혼 후엔 이한이 LA에 새살림을 차렸다더라, 하는 소문 또한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진실이야 어쨌든, 이한의 날카로운 이미지 안에 내포된 되바라진 면은 문란하단 소문과 찰떡같이 어울렸다.

    하지만 세인이 아는 이한은 일정한 선 안에 타인을 들여놓지 않는 편이었다.

    이한이 유부남의 신분으로 다른 여성과 뒹굴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괘씸해서 일부러 몰아붙였다.

    “대답을 못 하는 거 보니 사실인가 봐요.”

    “정세인.”

    “솔직히 말해도 돼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아무렇지가, 않아?”

    이한이 헛바람을 내뱉었다.

    “네. 다만 주변을 생각해서 조금만 조심해 주세요. 들키면 서로 곤란하잖아요.”

    세인은 무지근해진 가슴을 외면하며 밝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이한이 돌아서며 말했다.

    “뭐가 됐든 얼마든지 대답해 줄 테니 올라와. 기다릴 테니까, 도망갈 생각 말고.”

    대꾸하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이 문이 닫히고 정적이 찾아들었다.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머릿속이 쑥대밭이 된 뒤였다.

    세인은 고개를 저어 불쾌함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수작이야, 잠자려는 수작.”

    세인은 그가 스툴에 얹어둔 다리를 내릴까 했으나 말았다. 이한을 너무 의식하는 것 같아서.

    세인은 서류를 끌어오는 동시에 만년필을 꺼냈다. 이한이 꽂아둔 장미가 눈에 띄었으나 애써 무시하곤 업무를 시작했다.

    밀린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기지개를 켜자, 어느덧 5시 55분이었다.

    벗어두었던 재킷을 걸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활짝 젖혀진 문밖에서 우람한 체구의 남자가 들어왔다.

    “넌 일을 어떻게 하는 거냐.”

    세인이 놀라 커졌던 눈을 좁히며 피식 웃음을 흩뜨렸다.

    터벅터벅 걸어 들어온 무영이 소파에 앉은 뒤 다리를 활짝 벌리곤 팔 하나를 소파 헤드에 기대었다.

    “커피 드시겠어요?”

    “커피는 됐고 어떻게 된 건지, 그것부터 설명해.”

    무영이 손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

    더블나인 리조트 호텔 대표 이무영.

    서른네 살의 젊은 오너인 그는 범죄 조직과 연루된 사람이었다.

    더블나인을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하며 은밀하게 의뢰를 주고받는 시스템은 무영의 주목적이었다.

    정보를 팔아넘겨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회원권으로 얻는 수익보다 뒷사업으로 벌이는 수완이 더 좋다고 할 만큼, 그의 인맥과 정보력은 가히 대단했다.

    그렇다 한들, 세인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할 일은 부총지배인의 직함에 부합하는 범위 안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무영은 종종 세인의 방식에 대해 지금처럼 의문을 드러냈다.

    “부총아, 임 본부장 그게 왜 너한테 지랄했냐고 묻잖냐.”

    “대표님, 일 생기는 거 하루 이틀 아니잖아요. 이렇게 찾아오실 만큼 큰일도 아니었고요.”

    세인의 오늘 하루를 힘겹게 만든 무역 회사 임 본부장은 소문난 진상이었다.

    직원이 실수로 그의 골프 가방을 헷갈렸고, 임 본부장은 제 가방이 다른 손님의 손에 들어갔단 걸 알고 난동을 피웠다.

    세인은 직원이 골프채로 얻어맞기 직전 구해낸 뒤, 직원의 몫까지 열심히 사죄했다.

    하지만 단단히 화가 난 임 본부장은 쉽사리 용서하지 않고 독설을 퍼부었다.

    주변의 물건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어쨌든 호텔 측의 실수였다. 세인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호텔 이용권까지 주며 겨우 임 본부장의 기분을 달래놓았다.

    임 본부장이 이곳에 머무르는 일주일간은 꼼짝없이 시달리겠지만, 매뉴얼대로 대응하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 있으리라.

    “내쫓아 버려라, 그냥.”

    그러나 무영이 속 편한 소리를 해댔다.

    두려울 게 없는 무영은 손님의 기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세인과 달라도 한참이나 달랐다.

    “너한테 재떨이 던졌다며? 고자 새끼를 만들지 그랬냐. 너 내가 뭐랬어. 지랄하면 그냥 발로 까라니까?”

    “고소는 제가 당하고요?”

    “X발. 변호사 뒀다가 뭐 해. 그리고 내가 거기까지 가게 두겠냐?”

    VIP에게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거나 불법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루트를 팔아넘기는 무영이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라면 임 본부장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그러나 세인은 그저 부총지배인이란 직함 안에서 움직일 뿐이었다.

    언니, 혜인이 원하기에 조용히 이 직업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맞춰진 인생이었다.

    세인이 퇴근 준비를 마치는 동안, 무영은 움직이지 않고 눈으로 그녀의 동선을 쫓았다.

    세인은 불편함을 느꼈으나 감히 대표에게 그만 쳐다보라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저 이만 퇴근하려고 하는데, 대표님은 퇴근 안 하세요?”

    “뭐냐. 오늘 밥이나 먹자. 좋은 데 예약했어.”

    “밖에서요?”

    “왜, 싫냐?”

    “그건 아닌데…….”

    “혜인이도 나오라고 해. 세 사람 예약했으니까.”

    대표의 명을 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혜인과 함께라면 상관없기도 했다.

    “네.”

    시계를 한 번 본 세인은 조용히 응했다.

    이한이 자신을 애타게 기다릴 일은 없을 거다.

    혹여 기다린다고 한들, 그건 불면증 치료제에 대한 염원이겠지.

    귀국 파티라면 손님을 맞이하기에도 정신없을 테고.

    그렇게 세인은 애써 머릿속에서 이한을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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