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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14화 (14/95)
  • 두 번째 신혼 14화

    세인의 귀로 온종일 이한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어젯밤 행차한 제문 그룹의 황태자에 대해 쑥덕거렸다.

    대체로 그가 이곳을 찾은 목적에 대해 궁금한 눈치였다.

    우습게도 이한이 이혼 합의서를 작성하기 위해 찾아왔단 소문이 가장 힘을 받는 추세였다.

    다행히 세인과 한 객실을 사용했다든지, 클럽에서 행패를 부렸다든지 하는 소문은 퍼져 나가지 않은 듯했다.

    세인은 포기하듯 한숨 쉬며 책상으로 향했다. 그러자 잊고 있던 통증이 지끈거리며 밀려들었다.

    “읏…….”

    이한의 서늘한 동공이 삐걱거리는 세인의 발목에 닿았다.

    발목을 덮는 슬랙스 덕에 압박 붕대는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한은 커다란 결점을 발견한 것처럼 못마땅하게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김 교수 말론 휴식이 필요하다던데 말을 안 듣네. 몸 챙길 줄을 모르는 건 그 나이 되도록 변함이 없고.”

    책상 위로 소리 나게 파일을 내려놓은 세인이 빼곡한 서류를 들추며 말했다.

    “1분이에요. 그 안에 용건 말해요.”

    급하게 내쫓으려는 세인의 마음을 무시하듯 이한이 사무실 내부를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이 일이 정세인 몸보다 중요해?”

    “무슨 뜻이에요?”

    “그렇게 혹사해 가면서 할 만큼 이 일이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서.”

    세인은 이한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책상 한쪽을 차지한 꽃 때문이었다.

    분홍빛 장미 한 송이.

    이런 걸 챙겨올 사람은 눈앞의 이한밖에 없었다.

    세인은 주저 없이 장미를 들어 책상 옆의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어쩐지 마음이 욱신댔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한이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마음 아프게 하는 데 도가 텄지.”

    나지막하게 말한 이한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복도로 통한 창의 블라인드가 내려갔다.

    무슨 수작인지 알 수가 없어서 세인은 긴장했다.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한의 모습을 경계했다.

    “또 뭘 하려고 그래요?”

    “겁먹게 하려는 건 아니니까, 너무 경계하진 말고.”

    눈썹을 살짝 구긴 이한이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기절이라도 시켜서 강제로 붙들어두려는 걸까.

    불어나는 상상보다 이한이 더 큰 존재감을 드리우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세인은 순식간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든 장신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좋아했잖아. 이제 아니야?”

    무심히 말하며 이한이 허리를 접어 휴지통에서 장미를 구제했다.

    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얇은 비닐이 바스락거리며 세인의 신경을 긁었다.

    그가 장미를 볼펜 통에 고이 끼워 넣으며 말했다.

    “앞으론 내가 모르는 건 말해 줘. 이런 식으로 짓밟아도 계속해서 정성을 다할 거니까.”

    “짓밟아……? 정성?”

    세인이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장미꽃 한 송이가 이한의 정성이란 걸까.

    숙면을 도와달란 아부치곤 너무 보잘것없는 거 아닐까.

    적어도 금은보화 중 하나는 가져와야지.

    “많이 참아서 그런지 제어하기가 어렵네.”

    뜻 모를 소릴 내뱉은 이한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책상에 꽂힌 장미를 덕에 기분이 더 싱숭생숭해진 세인은 아예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 자리기 불편하기만 했다.

    “노골적으로 눈 피하지도 말고.”

    순간 세인의 허리를 잡은 그가 책상 위로 그녀를 올렸다.

    “뭐 하는……!”

    놀라 바르작거리는 세인의 속눈썹을 빤히 주시하며 이한이 점점 가까워졌다.

    “밥 좀 잘 먹고. 잘 쉬고. 알아들어?”

    “…….”

    “숨은 쉬어야지. 네 허락도 없이 잡아먹겠어?”

    이한이 희미하게 웃었다.

    잡아먹다니, 뭘?

    세인은 의문을 가지며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이한의 잘난 얼굴이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갔다.

    한쪽 무릎을 접고 앉은 그가 세인의 발에서 구두를 벗겨낸 건 순식간이었다.

    “서, 서 전무, 서이한 씨!”

    이한이 온종일 그녀를 압박하던 구두를 벗겨냈다. 그의 잘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음 아프게 하는데 도가 텄다는 말을 또 해야겠는데. 발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뭐 한 거야.”

    이한이 커다란 손으로 세인의 양발에서 구두를 벗겨내고 발목을 이리저리 살폈다.

    세인이 발가락을 접으며 몸을 뒤로 내빼려 했으나 발목을 움켜쥔 손가락이 단단했다.

    이한은 급류 같았다. 어제처럼 불시에 다가와 그녀를 휩쓸어가고 있었다.

    “뭐, 뭐 하는…… 읏.”

    “스스로 몸을 챙기는 게 어려우면, 챙겨주는 대로 받아. 그거라도 허락해.”

    발목 부위를 주무르는 이한의 부드러운 손길에 뭉쳤던 근육이 시원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세인을 콧잔등을 찌푸리면서도 아까처럼 이한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발이 많이 혹사당했는지, 밀어내야 마땅할 상대의 손에 노곤해지고 있었다.

    “읏……!”

    아픈 부분을 과감하게 주무르는 압력에 세인의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경련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시큰했다.

    이한이 손을 살짝 떼어내며 물었다.

    “이 꼴을 하고 종일 뛰어다녔나. 스스로한테 가학적으로 굴면 성취감이라도 느껴져?”

    “놔, 놔줘요…….”

    발목에 닿았던 이한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상기된 세인의 뺨에 닿았다.

    이한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곤란한 것을 바라보듯 복잡한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 어렸다.

    그렇게 이한은 꽤 오래도록 세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했다. 지금쯤 이죽거리든 능청을 떨든, 무슨 말이라도 할 남자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눈빛이 왜 그래요?”

    “내 눈빛이 왜.”

    “그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 꺼림칙하잖아요.”

    세인이 미미한 가시를 세우자 이한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그리 파렴치한은 아니야.”

    “얼추 비슷하긴 하지 않나요.”

    세인이 억지로 웃으며 말하자 이한의 미소도 짙어져 볼우물이 드러났다.

    “눈에 새겨두려고 그래. 흑심이 보였다면 별수 없지만.”

    “……흑심이요?”

    “용서받고 싶은 흑심.”

    이한이 담담히 내뱉은 말에 세인의 마음이 등불처럼 흔들렸다.

    그는 정말 너무나 이상했다.

    왜 지금에 와서 첫사랑을 나눴던 그 시절처럼 자신을 바라보는지.

    왜 진심인 양 잘해 보고 싶단 말을 하는지.

    세인은 그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잘 보이기 위한 수작이라기엔 도가 지나친 게 아닐까.

    “당분간 휴식기를 가지는 건 어때.”

    “휴식기라니요?”

    “가끔은 휴가도 좋잖아. 머리 비우고, 푹 쉬고, 잘 먹고, 잘 자고. 지금 너한텐 그게 제일 필요해 보여.”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제대로 쉰 적이나 있나?”

    “그럴 상황이 못 돼서요.”

    “상황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야.”

    이한이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세인을 보고 있었다.

    그에 세인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전 일하는 게 좋아요. 쉬는 게 더 불편하고요.”

    “그건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지. 한 번쯤 쉬어봐.”

    쉬라는 말이 세인에겐 너무나 생소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쉬란 말을 해준 적이 없어서일까.

    낯선 외국 말을 들은 것처럼 어색하게만 들려왔다.

    모두 그녀에게 더 열심히, 더 많은 일을 해내길 강요했지 이한처럼 쉬어보라 권하진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많이 힘들었던 건지, 세인은 고작 이런 말에 위로라도 받은 것처럼 울컥했다.

    쉬지 못하고 달려와야 했던 지난 노고를 이한이 알아준 것처럼 가슴이 먹먹하기까지 했다.

    나도 참 쉽구나. 헤픈 걸 알면서도 세인의 심장이 눈치 없이 쿵쿵댔다.

    “같이 휴가를 보내도 좋고. 어때, 같이 따뜻한 나라로 여행이라도 갈까?”

    이한의 얼굴이 너무 가까운 탓일 터다. 이런 얼굴로 달콤한 말을 속삭이면, 당연히 누구라도 흔들릴 터다.

    세인은 값싼 자존심을 들킬세라 눈에 힘을 주고 일부러 웃어 보였다.

    “불면증이 많이 심한 건가요? 그래서 이래요? 재워 달라고 아부하는 거예요?”

    세인이 속내를 숨기려 환하게 웃으며 묻자, 이한이 눈을 맞추며 대꾸했다.

    “그렇다고 하면, 너랑 같이 잘 수 있나.”

    재차 파고드는 이한의 목소리가 야하게 들리는 건 세인 안의 마귀 때문이 아니라 이한의 입술이 너무 촉촉한 탓이었다.

    무슨 남자가 입술에 각질도 없이 저렇게 말캉, 매끈…….

    삼천포로 빠지려는 정신머리를 붙들며 세인이 대꾸했다.

    “아니요. 절대로, 그럴 일 없습니다.”

    “절대로 그럴 일 없어?”

    “네. 서이한 씨 이러는 거 다 헛수고예요.”

    이한이 어루만지던 손길을 거두어 가자 뜨겁게 부어오른 발목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마치 그가 머무르던 자리가 아쉽기라도 하듯 움츠러들었다. 세인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헛숨을 삼켰다.

    이한의 따뜻한 눈빛과 손길 따위를 신뢰하면 안 됐다. 언제든 세인을 배신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때, 이한이 손바닥만 한 구두를 바라보다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손도 작고, 발도 작고. 이러니 잘 넘어지지.”

    예전에도 했던 말과 비슷했다.

    ‘손도 발도 작네. 이러니까 매번 넘어지지.’

    자꾸만 옛 기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자 절망감이 번졌다.

    다 떨쳐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왜 자꾸 연애하던 그 시절이 겹치는 걸까.

    “신발 이리 줘요.”

    세인이 손을 흔들자, 이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발에 다시금 신겨주었다.

    그러나 신기는 손길이 영 서툴러 발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이한의 눈썹이 구겨졌다.

    “부어서 안 들어가네. 이건 버리고 활동하기 편한 걸 신어.”

    “멀쩡한 신발을 왜 버려요?”

    “중심도 안 잡히는 구두를 신고 뛰어다니니까 안 다치고 배겨? 이럴 땐 원흉의 싹을 잘라야지.”

    “원흉이 신발일까요, 갑자기 나타난 서이한 씨일까요?”

    세인이 차분히 대꾸한 뒤 신발을 낚아채 직접 발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1분 지났어요. 용건 없으면 이만 나가 줘요.”

    “오늘 저녁 식사 같이해.”

    말하는 이한의 눈동자가 그녀의 책상 위에 종착했다. 세인의 업무가 언제쯤 끝나려나 가늠하려는 눈빛이었다.

    “시간 걸리는 거면 기다리고.”

    “제가 왜…… 서 전무님, 그래요. 서이한 씨랑 밥을 같이 먹어요?”

    “정혜인, 아니. 꼭 처형이랑 먹어야 하는 법이라도 있나?”

    세인은 처형이란 이질적인 단어에 말문이 턱 막혔다. 당연한 건데도 어색한 호칭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이한과 가족으로 맺어졌단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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