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신혼-13화 (13/95)
  • 두 번째 신혼 13화

    이한도 덕수가 우려하는 부분을 모르진 않았다.

    이한은 형 재한과 달리 출발선이 늦었다.

    본래 경영에 관심이 없고 그냥저냥 사는 게 목표였기에, 후계자가 되기 위한 준비는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누나인 가은도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이한에게 경영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가끔 덕수가 속 터진다며 꾸지람하긴 했으나 그게 다였다.

    그러나 재한의 사망으로 기업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덕수는 가은과 이한이 힘을 합세해 오너가의 권력을 꿋꿋하게 거머쥐길 바랐다.

    이한도 마냥 철없는 어린애로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재한이 이루고자 했던 꿈을 외면하기엔 죄책감이 컸다.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이번 프로젝트로 능력을 인정받았으니, 본사에서도 세력만 잘 구축하면 문제없이 제문 건설의 수장 자리를 꿰찰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도 덕수 눈엔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덕수의 인정을 받으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재한에 대한 속죄, 그리고 세인을 얻을 방편이었을 뿐이다.

    “어휴. 목 많이 마르죠?”

    마침 용주댁이 시원한 녹차를 내왔다.

    단숨에 그것을 들이켠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건강하신 거 보니, 죄책감 없이 불효해도 되겠네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이대로 가시게요? 생신상 다 봐 놨는데……? 작은 사모님은 안 오세요?”

    용주댁이 아연히 물었다.

    그녀가 이한의 음료 취향을 헷갈린 건 아침부터 생일 상차림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나간 탓이었다.

    용주댁은 필시 모두가 모여 생일을 기념할 줄로만 알았다.

    더군다나 이한이 아주 귀국하지 않았던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찬을 차리는 중인데 주인공이 그냥 간다니,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용주댁이 이한의 팔을 붙들었다.

    “도련님이라도 한술 뜨고 가세요. 네?”

    용주댁이 소싯적 호칭까지 꺼내며 친근감을 과시해 봤으나 이한은 칼같이 선을 그었다.

    “먹은 거로 하죠.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이한이 두둑한 봉투를 내밀었다.

    돈으로 대신하는 걸 그다지 선호하진 않지만, 이만한 것도 없었다.

    용주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덕수와 이한을 번갈아 보았다.

    신경 쓰지 말고 받으라는 듯 덕수가 눈을 모로 돌렸다.

    “이게 다 뭐예요, 전무님?”

    “선물은 못 샀습니다.”

    “아휴, 이런 거 말고 작은 사모님 한번 모시고 오세요. 네?”

    “이 집에 세인이 데려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회장님 장례식 때나 뵙겠네요.”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

    덕수가 크게 호통쳤다.

    이한은 제 조부가 세인을, 세인의 전부인 그녀의 가족을 건드릴까 봐 고분고분 6년을 버렸다.

    “저도 좀 숨 쉬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회장님.”

    “아주 너 혼자 불행하지, 어디서 약해 빠진 소리를……!”

    덕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한은 뒤돌아섰다.

    “정말 이렇게 가시게요? 곧 사장님이랑 사모님도 들어오시는데…….”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서 용주댁이 따라붙었다.

    “그럼 찬이라도 가져가세요. 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기에 이한이 한숨 쉬며 멈춰 섰다.

    “들어가시죠.”

    “어휴. 속상해라.”

    이한이 그대로 1년 만에 찾은 본가를 빠져나왔다.

    정성, 정성…….

    단어를 곱씹는 표정이 싸늘했다.

    세인을 향한 갈증에 지독한 불면증까지 더해져, 그녀를 건드리는 이가 있다면 잘근잘근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한이 모든 것을 서둘러 마치고 돌아올 이유가, 여기 있었다.

    정세인에게.

    그리고 돌아오면 그땐 묻고 싶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그리웠는지.

    혹시 조금이라도 다른 새끼에게 눈 돌렸는지.

    나는 이렇게 너만 생각했다고, 그러니 직진할 일만 남았다고 말하고도 싶었다.

    ***

    이한이 몰고 온 풍파를 곰곰이 되짚으며 괴로워하기엔, 세인은 온종일 바빴다.

    그녀는 골프장에서 들어온 직원 실수 컴플레인을 해결하기 위해서 리조트 호텔 1년 이용권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것만으론 회원의 화를 풀 수 없어서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굽신거려야 했다.

    세인은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피곤함에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사무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배고프다.

    점심을 거른 여파가 뒤늦게 몰려들고 있었다. 계단 난간을 짚은 손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압박 붕대를 감아둔 발목이 시큰거렸으나 꾹 참고 계단을 올라갔다.

    가족을 제외하면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해본 적 없었던 세인은, 처음 입사했을 때 이 일에 쉽사리 적응할 수가 없었다.

    늘 서비스를 제공받는 쪽이었으니,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어야 하는 이 일에 회의감을 느낀 거다.

    하지만 그것도 다 지난 일이 되었다.

    이제는 하루만 지나면 전날의 불미스러운 일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세인은 걸음에 속도를 냈다. 퇴근을 1시간 앞둔 시간은 밀린 서류를 처리하기에도 빠듯했다.

    오늘도 늦으면 혜인의 짜증이 심해지겠지.

    그녀의 병은 스트레스에 취약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했다.

    세인은 봉인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밀었다.

    부재중 3통. 모친 심은희에게서 온 것이었다.

    업무에 관련된 건 바로바로 받았으나, 은희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한가할 때까지 미루곤 했다.

    어차피 좋지 못할 소리를 들을 게 뻔했으니까.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은희의 잔소리까지 더해지면 위가 욱신거리곤 했다.

    “읏…….”

    계단을 디딜수록 발목을 관통하는 시큰한 통증이 거세졌다.

    이한을 통해 왕진 온 김 교수가 근육이 놀랐으니 되도록 걷지 말라고 했으나, 발로 뛰어야 하는 세인에게는 지키기 어려운 일이었다.

    통화음이 세 번 정도 지났을 때 모친 은희가 전화를 받았다.

    -넌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되니.

    단정하지만 노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는 단 한 번도 세인에게 다정한 적이 없었다.

    “조금 바빴어요.”

    -거긴 일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 신 지배인은 뭐 하고 맨날 네가 바쁘니.

    낙하산으로 꼽아줬다고 대충 일해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은희는 늘 이런 식이었다. 본인도 병원장으로서 바쁜 일과를 소화하면서 유난히 세인이 바쁜 걸 이해하지 못했다.

    -내일모레 혜인이 정기검진인 거 알지?

    “네.”

    이번 주 토요일에 혜인의 정기 검진이 있었다. 가족 모두가 신경이 곤두서는 날이었다.

    -그 전날 집으로 올 거니?

    “네. 그럴게요.”

    -그날은 퇴근 한두 시간 여유 있게 해. 네 언니 시간 맞춰서 약 먹어야 하잖아. 전처럼 늦어서 혜인이 식사 거르게 하지 말고. 알았니?

    금요일은 주간 회의 때문에 30분에서 1시간 늦게 끝나는 편이었다.

    그걸 알고도 하는 소리였다.

    행여나 혜인의 식사와 약 시간이 늦어질까 걱정되는 거겠지.

    이해는 했지만 불쾌함이 미미하게 일렁거렸다.

    “그러지 말고 이 기사님 보내는 게 어떨까요. 그날 늦을 것 같아서요.”

    -뭐? 혜인이가 너 없으면 어디 움직일 애야? 갑자기 왜 이래, 얘가.

    욱신거리는 발목 탓일까. 세인은 저도 모르게 비딱하게 대꾸했다.

    “업무가 조금 밀렸어요.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서요.”

    혜인은 급한 상황에도 세인이 없으면 병원에 가려 하질 않았다. 세인에게만 의지하는 성향은 주변인 모두를 가슴 졸이게 했다.

    지은 죄가 큰 세인이 모든 것을 혜인에게 맞춰왔지만, 가끔은 버거울 때가 있었다.

    오늘처럼 피곤하고 아픈 날이면,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날이면, 부쩍 그랬다.

    -너는……! 네 언니가 중요하지, 일이 먼저니?

    “…….”

    -어? 뭐가 문제야?

    문제는 세인이었다. 결국 반항은 짧게 마무리되었다.

    “……죄송해요.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어요.”

    -오늘 혜인이 식사는 잘했지?

    “그럼요.”

    -혜인이 요즘 너무 말랐더라. 신경 좀 더 쓰고.

    세인은 자신의 끼니를 거르기 일쑤면서도 혜인이 식사를 잘했는지 시간마다 확인했다.

    부모도 그게 세인의 본분이라고 생각했다. 세인이 만사 제쳐두고 혜인을 보필하길 바랐다.

    혜인이 원한 탓에 리조트 호텔에서 근무하는 건데도, 부모는 세인이 일 때문에 혜인에게 소홀해지는 것을 무척이나 경계했다.

    “이만 끊을게요. 전화 들어와요.”

    -참, 내 정신 좀 봐. 서 전무 들어왔다며? 언제 식사 한번 해야지.

    “아…… 아마 바쁠 거예요. 나중에 일정 물어볼게요. 이만 끊어요.”

    세인은 핸드폰을 내린 뒤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과 함께 이한이 식사하는 장면을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렸다.

    심해진 통증 때문에 마지막 계단을 딛는 게 조금 힘겨웠다.

    피곤함을 억누르며 사무실로 들어간 세인은 멈칫했다.

    검정 가죽 소파에 앉은 남자 때문이었다.

    옆모습을 보인 채 비딱하게 앉은 이한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세인을 마주 보았다.

    네이비 슈트에 하얀 셔츠를 입은 그는 와인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꼬고 앉은 모양이 모델처럼 근사하긴 했다.

    이한이 발을 한 번 까딱거렸다.

    “늦네.”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질 좋은 구두에 박혔던 세인의 시선이 이한의 서늘한 눈매에 안착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젯밤 젖은 몸으로 수영장에서 걸어 나와 단추를 풀던, 흐트러진 이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자태에 긴장감이 엄습했다.

    단정하지만 그 속에 위험을 내포한 폭탄 같은 남자.

    다시금 심장이 술렁이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징조를 애써 무시하며 세인이 입을 뗐다.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주인 없는 사무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거예요?”

    그녀가 빙긋 웃자, 이한의 시선이 절뚝거리던 세인의 발목에서 멈추었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병가는 왜 안 내지.”

    “다음부턴 함부로 들어오지 마세요. 여긴 제 업무 공간이에요.”

    “직원이 안내하던데.”

    문밖을 눈짓한 이한이 느긋하게 대꾸했다.

    “내가 정세인 씨 남편인 걸 잘 알고.”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에 다다랐든 어쨌든 이한과 법적으론 부부였다. 직원이야 찾아온 이한을 내치지 못하고 이리로 안내했을 거다.

    세인과 사이가 나쁘다고 소문난 남편이 찾아온 거니 제법 당황했을 직원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언질이라도 주지. 냅다 자취를 감춘 직원이 살짝 원망스러웠다.

    “도둑 취급이 아니라 깍듯했지.”

    이한이 뻔뻔하게 응수하며 살짝 웃었다. 그 모습이 기막히게 근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