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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12화 (12/95)

두 번째 신혼 12화

후계자로 자리매김해야 할 급박한 상황에 힘이 없는 처가를 맞이하는 건 이한에게 독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서 회장의 반발이 심했다.

작은아버지들과 사촌들까지. 재한의 뒤를 노리는 후계자 후보가 쟁쟁한 게 문제였다.

서 회장과 노선을 달리한 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고, 그들을 뛰어넘는 게 이한의 숙제였다.

가진 것도, 제 편도 없는 이한에겐 든든한 처가가 필수였다.

그럼에도 이한은 세인을 꽉 쥐고서 놓지 않았다.

결국 이한의 고집을 꺾지 못한 조부 서 회장은 이한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결혼을 승낙할 테니, 제대로 공부 마쳐라. 누구나 인정할 만한 성과를 보이기 전까진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 말아라.’

부디, 그때까지만 세인이 기다려 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땐 정말, 제대로 시작해 보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이한은 자신 때문에 세상을 등진 재한을 대신해 후계자가 돼야만 했다.

죄책감과 더불어 형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야 한다는 책임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세인을 지킬 힘을 거머쥐려면 이 길뿐이었다.

그렇게 이한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출국했다.

미련을 남겨두고서.

부족한 처가를 맞이했단 이유로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거다.

이한에게 첫사랑은 이미 첫사랑이 아니었다.

한시도 잊지 못하고 가슴에 품은 현재진행형의 사랑이었다.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뜨거워진 이한과 다르게 세인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린 후였다.

이대론 승산이 없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이한이 버석하게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윤 비서, 연애해 봤나?”

“어휴. 제 별명이 소싯적에 탈곡기 아니겠습니까. 여성분들의 진심을 탈탈 털어버린다고요. 여심이라면 제 전문입니다.”

민성이 거들먹거리는 꼴이 마뜩잖았으나, 이한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어제의 실패로 두서없이 들이대선 마이너스만 될 거란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중하게 다가갈 수밖에.

“우리 세인이 취향 알지. 고급이야.”

그러니 터무니없는 수작을 내밀면 재미없을 줄 알라는 뜻을 내비쳤다.

“정성, 아니겠습니까.”

“정성? 그딴 걸 방법이라고.”

“크흠, 그래도 이것만 한 게 없습니다. 꾸준히 진심을 보이십시오. 그렇다고 싫다는 분께 억지로 들이대면 범죄고요.”

민성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뭐 전무님께선 늘 범죄를 일삼으…… 흠, 아닙니다. 아무튼 정성을 보이시면 될 겁니다. 소소한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이를테면 꽃이라든가요.”

이한이 입안에서 단어를 곱씹었다.

정성이라.

어울리지도 않는 존댓말부터 집어치워야겠네.

격 있는 척하려다 혀에 가시가 돋는 줄 알았다.

“3분 후면 도착입니다, 전무님.”

“앞에서 대기해. 금방 나와.”

“그래도 본가엔 6년 만에 돌아오셨는데 정말 얼굴만 비치시려고요? 그러지 말고 사모님도 함께 오시지 그러셨어요. 오늘 생신이잖아요.”

“말했잖아. 우리 세인이 취향 고급스럽다고. 이런 천박한 집구석이 마음에 들겠어?”

귀국하자마자 회사에 들러 아버지를 뵙긴 했다.

모친이야 따로 약속을 정하면 되니, 오늘은 서 회장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굳이 자리를 만들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흉내 내며 가식 떠는 건 질색이었다.

그 사고 이후 가족이 전부 모이는 게 껄끄럽기도 했다.

형의 빈자리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었고, 누구도 탓한 적도 없는데 죄인이 된 것 같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한은 다른 데 쏟을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정성, 이란 걸 시도해야 했다.

묵직한 차체가 대문부터 웅장한 저택의 차고로 들어섰다.

최고급 슈퍼 카부터 단종된 모델까지 전시되다시피 한 차고는 제문 그룹의 재력을 드러내는 아주 사소한 일면일 뿐이었다.

차에서 내린 이한은 슈트 단추를 잠그며 계단을 올라갔다.

길쭉한 다리가 금세 정원을 가로질렀다. 활짝 열린 현관은 이한을 반기고 있었다.

이한이 들어서자 사용인들이 나와 인사를 건넸다.

대충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나눈 이한은 제문 그룹의 회장, 서덕수가 있을 응접실을 찾았다.

복도의 끝에 도달하자 덕수의 취향에 맞춘 한옥 마루가 나타났다.

열린 미닫이문 너머에서 화초에 물을 뿌리고 있던 덕수가 고개를 돌렸다.

손주를 바라보는 눈빛에 반가움보단 못마땅함이 먼저 스쳤다.

일흔다섯의 나이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이는 정정한 기세는 사나워 보일 정도였다.

“들어왔으면 인사부터 해라.”

“며칠 전에 골프채로 사람 하나 잡으셨다던데, 건강은 문제없어 보이네요. 안심입니다.”

배반을 꿈꾸던 신 부장이란 작자가 뼈도 못 추렸단 소문을 은밀히 들은 바 있었다.

“그래. 네놈 들어오는 날 기다리느라 죽지 못해 살았다. 뭐 해, 앉지 않고?”

덕수가 바닥에 깔린 두툼한 방석을 눈짓했다.

이한은 그곳이 아닌 티 테이블과 세트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젊은 사람 불러내서 저딴 데 앉히는 습관을 아직도 못 버리셨습니까.”

“내가 부르긴 누굴 불러.”

뒷짐 진 덕수가 맞은편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걸음걸이는 정정했으나 쭈글쭈글해진 손등은 세월을 숨기지 못했다.

“저기 앉으면 벌 받는 기분이라니까요. 왜요, 아직도 벌줄 게 남았습니까.”

“네가 벌주면 받는 놈이야?”

6년의 유배가 벌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한은 무표정하게 덕수를 직시했다.

“신혼부부를 갈라놓고선 모르는 척하시긴.”

“두 분, 차 좀 드세요.”

그때 마침 이 집에서 30년 넘게 일한 용주댁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이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니 가족과도 같았다.

조금 전 가볍게 인사했기에 따로 말을 더 하진 않았다.

이한은 신경 쓴 티가 나는 한과 세트를 바라보다가 찻잔을 툭 손톱으로 튕겼다.

“시원한 거로 주세요.”

“어마. 내 정신 좀 봐. 우리 전무님 따뜻한 거 안 드시지.”

한과를 좋아하는 건 형 재한이었고, 이한은 단것과 뜨거운 것을 싫어했다.

용주댁이 사라지자, 헛기침한 덕수가 눈매를 찌푸리며 물었다.

“왜 얼굴을 못 보게 해? 이제 들어왔으니까 좀 보여 줄 거냐?”

세인의 이야기였다.

“보여 드리면. 우리 세인이 저 자리에 앉혀 두고 골리시려고요? 저 그 꼴 못 봅니다.”

이한이 두툼한 방석을 눈짓했다.

사람 하나 말려 죽이는 건 손쉬운 늙은이였다.

세인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으며 난감하게 만들 성격 고약한 영감이란 걸 누구보다 이한이 잘 알았다.

이한이야 내성이 생겨 뻔뻔하게 맞받아친대도, 세인은 필시 웃는 얼굴로 앉아 노인네의 성깔을 다 받아줄 거다.

그런 꼴은 못 봤다. 저도 한 번 제대로 놀려보질 못했는데.

아니, 제대로 아껴 주지도 못했는데.

그래, 안 될 일이었다.

“내 손주며느리한테까지 그리 빡빡하게 굴 것 같으냐?”

악독한 노인네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했다.

“결혼하는 조건으로 손주 내쫓으신 분이 우리 세인이 얼굴은 보고 싶으시고. 하나만 하십시오. 제가 뭘 믿고 세인이를 회장님을 만나게 합니까.”

이한의 말투가 아까보다 더 차분해졌다. 기분이 좋지 않단 증거였다.

“우리 세인이, 세인이…… 그리 감싸고도니 궁금해서 그런다, 이놈아!”

“감싸게 하질 마셨어야죠. 세인이로 장사하신 분이 뻔뻔하시네요.”

“쯧,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지난 4년 동안 한 번을 안 만나? 민성이 말로는 연락도 안 했다던데, 그게 말이 돼? 민성이랑 다 짜고 맞춘 것 아니냐?”

“나가 있는 동안 헛된 사심 집어넣으라 하시던 분이 회장님입니다. 세인이 만나는 거 감시하려고 윤 비서 꼽아둔 거 아닙니까?”

“뭣이?”

“아아. 윤 비서도 못 믿겠습니까?”

이한이 벼린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어 말했다.

“사람 하나 신뢰 못 하시고. 회장님도 많이 늙으셨네요.”

“이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어떤 마음으로 참았는데, 어떻게 버텨냈는데.

지난 6년간 쥐어짠 인내심이 얼마큼인지 가늠조차 안 되었다.

여자에 빠져 일을 그르칠 놈이라고 소리를 지르던 덕수의 낯이 지금과 겹쳐졌다.

‘변변치 않은 여자한테 빠져선! 그래서야 큰일을 할 수 있겠어!’

혹시라도 세인과 붙어먹느라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덕수의 추악한 모습이 뇌리에 선명했다.

서덕수 회장은 수틀리면 세인과 처가까지 구렁텅이로 내몰 그런 인간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동안 더더욱 세인과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느슨해진 꼴을 보였다간 서 회장이 세인을 괴롭혔을 테니까.

세인을 저 방석에 앉혀 놓곤 서 전무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있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며 호통쳤겠지.

그랬기에 지금도 이한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준공은 언제야.”

“1년 6개월 남았습니다.”

제문 건설의 전무로서 해외 파트를 맡은 이한은 LA의 노다지 땅에 리치 타워를 착공하는 데 성공했다.

국내 기업이 철벽같은 미국 건설 시장을 뚫은 건 손에 꼽히는 일이었다.

트로피 프로퍼티(Trophy Property)라 불리는 상위 계층의 최고급 주택을 모델링 한 주거 시설을 시공 중이었다.

초호화 펜트하우스보다 힘을 좀 뺀, 그래서 접근성을 높인 호텔형 아파트가 될 터였다.

기획부터 시안, 법망을 파악하고 계약을 따내기까지.

이한의 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뒤 이한의 위치는 막 유학을 마친 애송이에서 사업가로 한껏 격상했다.

이제 당당히 후계자의 대열에 올라선 것이다.

이한을 뒷받침해 줄 든든한 처가를 얻지 못했으니, 프로젝트를 꼭 성사시키라던 게 서 회장의 조건이었다.

“다 된 밥을 남의 손에 넘기고 왔으니. 쯧쯧.”

다만 마무리를 누나인 서가은에게 넘겼다.

더는 세인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그런 이유에서였다.

“서 부사장이 남입니까.”

“그거라도 완벽히 마무리해야 기반이 탄탄하게 잡힐 것을.”

덕수가 혀를 찬 뒤에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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