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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11화 (11/95)
  • 두 번째 신혼 11화

    대형 세단의 뒷자리에 앉은 남자가 긴 다리를 꼬아 두곤 창밖을 응시했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늦여름의 아침 풍경이 제법 생기 있었다.

    이한이 몇 달 만에 느끼는 고국의 하늘은 6년 전, 그 계절과 닮아 보였다.

    ‘제대로 일 마치기 전에 들어올 생각 말아!’

    노인네의 핏발 서린 목소리가 생생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내쫓기듯 공항으로 향하던 날.

    그날 아침, 잠든 척하던 세인의 얼굴을 곱씹고 곱씹어 간직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났고, 흘러간 세월만큼 세인과의 거리도 멀어져 버렸다.

    밀어내려는 세인을 붙들기 위해 예전처럼 잠이 안 온다는 핑계를 대보았는데, 그게 세인의 화를 더 부추긴 것 같았다.

    “하…….”

    이한이 턱을 쓸며 낮게 한숨 쉬었다.

    “전무님, 사모님 객실로 필요한 것 좀 보내 놓을까요?”

    송 기사의 옆 조수석에 앉은 윤민성, 그의 비서가 물었다.

    “옷만 몇 벌 보내. 거기 오래 안 있을 거야.”

    “네.”

    조금 전, 세인의 객실에서 날을 샌 이한은 민성을 호출해야 했다.

    가운 차림으로 나올 수 없거니와, 바닥에 처박아 둔 옷을 세탁해 입을 마음도 들지 않아서였다.

    덕분에 민성은 귀국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새벽같이 달려와야 했다.

    이렇듯 도덕적인 잣대보다 규율을 선호하고 감성보다 이성을 우선하는 그인데, 세인의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슴 졸이고 있다.

    원리 원칙을 앞세우고 예외는 허용하지 않는 이한의 방식이 그녀에게 통용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지난밤 이한은 꽉 닫힌 세인의 침실 앞에서 뿌리내린 듯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세인에게 허락받은 건 객실까지였으니, 득실대는 욕심을 어쩌질 못하고서 얼쩡댄 것이다.

    어떤 개수작을 부려서라도 침대까지 찾아갔어야 했나.

    아니면 물리적으로나마 거리를 좁힌 성과에 기뻐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 만났는데도 거머쥘 수 없음을 슬퍼해야 하나.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하룻밤 새에 다 몰아친 것처럼 이한의 영혼은 수척해져 있었다.

    이한은 단단하게 굳은 배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세인을 보자마자 반응한 짐승 같은 하반신은 불에 달군 것처럼 뜨거웠다.

    이한은 끓는 열기를 억누르며 새벽까지 세인의 방 앞을 서성였다.

    그러다 세인의 침실이 아닌, 창고로 쓰는 방을 발견하고 탄식했다.

    ‘하…….’

    그 방은 세인의 짐으로 가득했다. 마치 리조트 객실이 세인의 집인 것처럼.

    우선은 세인을 신혼집으로 돌아오게 해야 했다.

    그래야 파고들 틈이 생기지.

    세인이 더블나인에 지박령처럼 묶여 있는 이유가 혜인 때문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다.

    예전부터 세인의 1순위는 혜인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일 터다.

    “윤 비서, 정혜인 주치의랑 조만간 자리 마련해.”

    “네, 전무님.”

    민성은 그 연유가 궁금했으나 우선은 말을 아꼈다.

    하나 얼마 못 가 민성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조바심을 냈다. 민성은 지금 이한이 무슨 생각인지 몹시도 궁금했다.

    이한이 LA에 있는 동안 매일같이 세인의 소식을 보고한 게 민성이었다.

    그래서 저 미친 상사가 아내와 잘 재회했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이한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면, 불똥이 여러 갈래로 튈 위험이 있었다.

    이한이 평소와 같은 얼굴이라 그 기분을 가늠할 수 없었던 민성이 슬쩍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주치의를 만나시는 거면, 정혜인 씨 치료에 도움을 주시려는 겁니까?”

    언니 쪽을 공략해서 세인의 환심을 사려는 건가 싶었다.

    이한이라면 더 좋은 의사를 소개해 줄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부디 그런 선한 마음가짐이었으면, 하고 당치도 않은 바람을 품어보았다.

    “내가 왜.”

    “큼, 아닙니다.”

    대체 무슨 더러운 꿍꿍이를 품고 계신 거지?

    민성은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지는 걸 느끼며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못된 짓 하실 거면 제게 언질이라도 좀 주십시오. 수습이라도 빨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병원에 처넣을까 하는데.”

    “……예?”

    “우리 세인이 고생 그만해야지.”

    “또 그런 몹쓸 생각이셨군요…….”

    “정혜인에 대해서 더 알아봐. 약점이든 뭐든, 이용할 수 있는 대로 긁어모아. 자세하게.”

    “네.”

    민성이 착잡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도움을 주려는 게 아니라 제거하겠단 뜻이었다니.

    찝찝하게 생각하는 건 송 기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핸들을 잡은 송 기사의 손에 힘이 들어간 걸 보며 민성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괴상하고 괴팍한, 그리고 악랄하고 가끔은 유치한 상사.

    그러나 머리가 비상하고 수완이 좋은 이한은, 상대하기 까다롭단 생각과 더불어 묘하게 존경심을 가지게 하는, 하여간 특이한 인간이었다.

    “가는 동안 눈 좀 붙이십시오.”

    “잔소리면 거기까지.”

    “요즘 더 심해지셨습니다. 클리닉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입조심하자.”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핸들을 좀 더 꽉 쥔 송 기사가 눈치 빠르게 말을 붙였다.

    이한은 잠을 이루지 못해서 뻑뻑한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눈꺼풀이라도 덮어두려 눈을 감자, 수마가 아닌 옛 기억이 밀려들었다.

    6년 전, 세인을 만나기 전이었다.

    이한이 몰던 차가 역주행하는 음주 운전 차량과 크게 충돌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한은 그 사고로 팔과 어깨가 골절됐고, 조수석에 있던 형 서재한이 사망했다.

    수술을 마친 이한이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재한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형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한 거다.

    사고 난 차는 형의 차였다.

    피곤해하는 형을 대신해 운전하겠다고 나서지만 않았어도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아니, 평소처럼 운전기사에게 운전대를 맡겼더라면.

    도로 막힌다며 다른 길로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조금만 천천히 달렸더라면.

    수만 번 후회하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재한은 한량 같은 이한을 단 한 번도 비난한 적 없는 좋은 형이었다.

    후계자로서 더없이 완벽한 형.

    그는 이한이 우러러보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형을 이한이 죽인 거나 다름없었다.

    재한을 잃은 뒤, 이한은 깊게 자책하며 절망했다.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음에도 이한은 죄책감 때문에 식이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렸다.

    당시 이한이 천천히 망가져 가고 있단 것을 가족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재한은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누나에게도 소중한 이였다.

    가족들은 깨어난 이한을 보며 기뻐하기보단, 재한을 잃은 슬픔에 가슴을 치기 바빴다.

    그렇게 서서히 이한은 홀로 병들어갔다.

    그러다가 만난 게 세인이었다.

    당시 VIP 병동의 최상층에 머물던 이한은 조금이라도 사람과 어울리는 게 좋겠다는 주치의의 조언으로 몇 층 아래의 병실로 이동했다.

    총 4개의 병실 중 가장 끝 병실을 사용하게 되었고, 전보다 북적이는 병원 복도를 내다보게 되었다.

    문을 열고 응접실 쪽 소파에 앉아 있노라면 사람의 말소리가 곧잘 들려왔다.

    ‘언니, 저기 구름 좀 볼래? 토끼 모양이야.’

    ‘넌 아직도 저런 게 좋니?’

    ‘언니 솜사탕 좋아하잖아. 몽글몽글한 게 솜사탕 닮았지?’

    ‘보면 뭐 해. 나가질 못하는데.’

    슬쩍 내다보니 소녀티를 못 벗은 여자애가 환자복을 입은 여자의 휠체어를 끌고 있었다.

    환자의 다리를 덮은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를 다친 건가.

    며칠이 지난 후, 이한은 여자애의 이름이 정세인이라는 것과 언니 정혜인의 다리가 온전치 못하단 걸 알게 되었다.

    이한은 어느덧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재잘대는 세인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한 번 시선이 가자 세인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해졌다.

    세인은 언니에게 굉장히 살뜰했다.

    간병인이 있을 텐데, 직접 물을 먹인다든지 머리를 넘겨준다든지. 일일이 혜인의 수발을 들었다.

    이걸 착하다고 해야 하나, 조금 미련하다고 해야 하나.

    새벽 내내 간호했는지 낮만 되면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세인이 답답하기도 했다. 비척거리며 건강음료를 챙겨 먹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세인이 한심한 한편, 대단했다.

    재한이 살아 있다 하더라도 이한은 아마, 세인만큼은 못 했을 테니까.

    그리고 세인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싶던 어느 날이었다.

    사고 이후 이한은 처음 입을 열었다.

    오직 세인을 부르기 위해.

    ‘너.’

    ‘저요?’

    ‘어. 이것 좀 뽑아줘.’

    이한은 마시지도 않는 음료수를 눈짓하며 자판기로 세인을 유인했다.

    유인?

    그래, 선량한 토끼를 늑대 굴에 유인한 것과 같았다.

    세인이 지폐를 받아 들고 초콜릿이 섞인 캔 음료를 뽑았다.

    자판기 커버를 올리고 캔을 꺼낸 그녀가 이한의 한쪽 팔과 반대편 어깨에 감긴 붕대를 보곤 물었다.

    ‘따 드릴까요?’

    ‘먹여 줘.’

    ‘네?’

    ‘입술에 대고 먹여 달라고.’

    세인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이한의 다친 팔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렇게 시작됐다.

    이한은 순진한 토끼를 제 병실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했고, 잠이 들지 않아 괴롭단 말로 동정심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

    ‘서이한, 잘 잔다. 잘 자.’

    말랑한 목소리로 부르는 세인의 엉뚱한 자장가가 사랑스러웠다.

    자는 척 연기했으나 실은 열에 들끓어 밤을 지새웠던 나날들은 아직도 선명했다.

    그러나 평온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세인의 부모가 이한에게 협박을 해왔다.

    그녀를 늙어 빠진 남자의 재취 자리에 내보낼 생각이라고.

    이한은 지체하지 않고 세인에게 청혼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조금은 장난스럽게, 그래서 세인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온도로.

    다행히 세인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그녀의 배경이었다.

    대형 병원의 병원장인 모친 심은희는 나쁘지 않았으나, 합법을 가장한 대부 업체에 몸담은 부친 정홍춘이 걸림돌이 됐다.

    이한의 근본인 제문 그룹에서 반대할 만한 조건이었던 거다.

    이한의 조부인 서 회장이 노발대발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형의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이한에게로 수많은 약혼녀 후보가 거론되고 있을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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