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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10화 (10/95)
  • 두 번째 신혼 10화

    시원한 이한의 손끝이 세인의 젖은 앞머리를 들추고 동그랗게 부푼 이마를 문질렀다.

    다정하게 느껴지는 행위였다.

    세인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눈을 치뜨자, 이한이 등을 받친 팔을 더 조여왔다.

    “여기 예쁜 이마에 키스하면서 약속했잖아. 왜 모르는 눈을 하지.”

    탐욕스러운 시선이 세인의 이마에 길게 머무르고 있었다.

    약속이라면, 어떤 약속을 말하고 있는 걸까.

    예상되는 게 몇 있었다.

    아니, 실은 이한과 다짐했던 일은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되짚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이한에겐 한때의 가벼운 장난이었을 테니.

    “글쎄요. 저는 기억 안 나서요.”

    “내가 기억해. 모르겠으면 기억날 때까지 말해 줄 수도 있어.”

    “……의미 없이 했던 말을 전부 간직하고 살진 않잖아요. 서이한 씨는 우리가 아직도 철없는 어린애 같나요?”

    이한의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의미가, 없었어?”

    시큰하게 웃는 그의 표정이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이한이 상처받은 것처럼 보인다면 억측이겠지.

    ‘죽는 날까지 좋아할게.’

    문득 진지했던 이한의 얼굴이 떠오르자 세인은 기분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우리 약속이 정말 기억 안 난다는 거지.”

    이한의 음성이 아까보다 낮고 짙었다.

    물속이 못 견디게 추운 것도 아닌데 소름이 일어났다.

    하지만 먼저 세인을 저버린 건 이한이었다.

    그러니 세인에게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었다.

    “중요하지 않은 기억은 지우고 사는 편이에요.”

    “아, 중요하지 않은 기억.”

    “저 그때 겨우 스물두 살이었어요. 서 전무님은 6년 전의 일이 지금껏 중요한가요?”

    “기억 안 나면, 알려 주면 되고.”

    이한이 차갑게 말했다.

    고개를 약간 숙인 그가 손끝으로 세인의 젖은 뺨을 문지르며 눈을 맞춰왔다.

    그 시선이 마치 온몸을 핥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한이 잔잔한 목소리로 6년 전 세인이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재현했다.

    “잠들지 못하겠으면 언제라도 찾아와요.”

    “…….”

    “지금처럼 잠들 때까지 토닥여 줄게.”

    “…….”

    “……라고 네가 말했지. 사람 환장하게.”

    이한이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놀랐지만 세인은 애써 모르는 체하며 웃었다.

    “제가 어리긴 어렸나 봐요. 전무님께 별말을 다 했네요.”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거야.”

    뺨을 타고 내려온 이한의 손가락이 세인의 입술에 안착했다.

    주름을 밀듯이 입술을 문지르는 손짓에, 머리에 심장이 달린 것처럼 아득해졌다.

    쿵쿵대는 심장을 외면하려는 세인에게로 이한이 더욱 깊숙하게 침투해 왔다.

    “오늘 그 약속, 지켜 줬으면 하는데.”

    “가, 같이 자자는 말이에요?”

    “같이 잘까?”

    “……뭐?”

    “같이 자.”

    이한이 재촉하듯 세인의 등줄기를 꾹 짓누르며, 열이 고인 하체를 맞대었다.

    달아나려 해도 덫에 걸린 듯 몸이 말을 들지 않았다.

    “정세인이 내 옆에 없던 순간부터 잠이 잘 안 와. 하루하루가 지겹고 무료하지.”

    선득해진 피부 위로 덮인 목소리가 수렁으로 안내하는 유령처럼 세인을 홀렸다.

    조금만 넋을 놓으면 세인 스스로 이한에게 빠져들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려야 했다.

    앞뒤 따지지 않고 몸을 내던지던 스물두 살과는 달랐다.

    그땐 감정이 앞섰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한에게 배신당한 뼈아픈 경험은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미미한 미련으로 사그라진 불씨를 다시 지피기엔, 이한에게 받은 상처가 컸다.

    어떻게든 밀어내고 어떻게든 외면해만 했다.

    상황을 부정하는 세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이한의 입술이 농밀하게 속살댔다.

    “잠이 안 올 때마다 그때 그 약속을 되새기면서 참았지.”

    “……혹시 잠자는 게 요즘도 힘들어요?”

    “늘 그래.”

    이거였구나.

    입술을 깨문 채 세인은 가슴속으로 탄식했다.

    이한이 이제 와서 부부 행세를 하는 이유를 명백하게 깨달았다.

    의미 없는 약속을 끄집어내면서까지 이한이 바라는 건, 바로 숙면이었다.

    과거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이한은 희한하게도 세인의 손만 닿으면 금세 잠이 들었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에 다시 불면증이 발병한 게 아닐까.

    예정된 일정을 축소하고 달려올 만큼 상태가 심각하다면 모든 것이 말이 되었다.

    “모든 게 엉망이야. 더는 정세인이 아니면 안 돼.”

    이한이 고개를 틀어 입술을 살짝 붙여 왔다.

    세인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단 수치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눈물이 지나는 길에 부드럽고 뜨거운 이한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주 예전, 그가 우는 세인을 달랠 때도 이렇게 했다.

    결국엔 입술로 떨어진 그의 호흡이 어떻게 얽혔는지…….

    고개를 휙 옆으로 돌린 세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이한이 매달리듯 축축한 목소리로 말해 왔다.

    “이젠 안 떠나. 네가 빌라면 빌 테니까…….”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던 세인은 이한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쳤다.

    의외로 이한이 쉽게 물러났고 세인은 그에게서 멀어졌다.

    세인은 물살을 가르며 수영장을 빠져나갔다.

    물 밖으로 나온 뒤, 테라스 입구로 걸어갔다.

    욱신대는 발목을 무시하며, 뒤죽박죽된 오늘을 선사한 이한을 원망했다.

    테라스 입구에 도착한 세인은 물 먹은 후드 티셔츠를 벗어 던진 후 쇼트 청바지도 벗었다.

    이한은 신경 따윈 안 쓴다는 듯, 속옷 차림이 되어 비치된 가운을 몸에 걸쳤다.

    매듭도 제대로 여미지 않은 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눌렀다.

    그러다 수건을 내던지며 뒤돌아서며 물었다.

    “함께 있어도 잠이 안 오면 어쩌려고 이래요?”

    6년 전에야 세인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마음이 통했을 때의 일이었다.

    남남처럼 지내 온 이한을 그저 닿는 것만으로 잠들게 할 자신 따윈 없었다.

    이한은 아직도 수영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만 어두워서 그가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있나. 벌써 이렇게 노곤해졌는데.”

    크지 않은 이한의 목소리가 깊은 울림으로 세인에게로 파고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했다.

    별 효과를 보지 못하면 이한은 또 떠날 터다.

    “또다시 떼어내고 싶어지면, 이번엔 이혼 서류를 줄 건가요?”

    “이혼 서류라니…… 너 진짜.”

    “그래요. 차라리 이혼이 낫겠어요.”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되는 것도 이제 지쳤다.

    이한 쪽에서 먼저 이혼을 요구하면 부모도 더는 어쩌지 못하겠지.

    그대로 이한을 외면한 세인이 객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씻고 나왔을 때, 객실에서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인은 그래서 이한이 돌아간 줄 알았다.

    멍하니 서서 수영장이 보이는 창가를 응시하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서이한?”

    자세히 보니 수영장에서 이한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매끄러운 손동작으로 셔츠 단추를 모조리 풀던 이한과 문득 눈이 마주쳤다.

    깜짝이야. 세인은 저도 모르게 주저앉아 몸을 숨겼다.

    객실로 들어온 이한이 반대쪽 욕실을 이용하는 것 같았으나,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었다.

    세인은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연스레 스물두 살의 풋풋했던 날이 떠올랐다.

    자신을 꼭 껴안고 잠드는 걸 좋아하던 이한.

    결혼 뒤 홀로 사라진 남자.

    그래 놓곤 다시 재워 달라고 찾아오다니.

    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둥, 세인이 착각할 만한 달콤한 말로 현혹했으나 세인은 속지 않았다.

    이한이 정말 취하고자 하는 건 진짜 세인이 아닌 안정적인 수면일 터다.

    이한에게 또다시 상처를 받게 된다면 모든 인간을 불신하게 되지 않을까.

    계속 질질 끌려가느니, 이혼이란 제도로 그와의 고리를 완벽하게 끊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이혼. 그러나 이혼을 직접 입에 올린 뒤부터 세인의 가슴이 욱신댔다.

    바보 같아.

    침대에 누운 뒤에도 세인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나쁜 서이한.

    암만 욕을 해도 시원찮았다.

    세인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이 손이 닿아도 잠들지 못한다면, 이한은 당장에라도 미련 없이 떠나겠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든 세인이 눈을 떴을 땐 아침 6시였다.

    폭격 맞은 상황에도 생체리듬은 정확하게 일어날 시간을 기억했다.

    이제부터 나갈 준비를 한 뒤, 7시에 혜인의 방으로 건너가서 세안을 돕고 함께 식사해야 했다.

    그 후 출근까지 정해진 루틴이었다.

    이한은 돌아갔겠지?

    가뜩이나 불면증인데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을 리가 없었다.

    그가 객실의 불편한 소파에 긴 몸을 구기고 누워 있는 장면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그런데 얼마나 못 잤기에 여기까지 달려온 걸까.

    미련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관심 끊자.”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연락 온 곳이 없나 확인하자,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일어나면 주치의 김 교수 연락해 봐. 아래에서 대기 중이니까.]

    [이왕이면 병가 내고.]

    발신인의 이름은 없었으나 이한이 분명했다.

    발목 좀 삐끗한 거로 얼굴조차 모르는 주치의를 맞이해야 한다니, 세인은 급격히 피곤해졌다.

    더블나인에도 의료실이 있으니, 심해지면 그곳을 찾으면 됐다.

    내 몸에 관심이 많은 건 역시 투자일까.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인은 액정 상단에 찍힌 11자리 번호를 보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렇게 쉽게 연락할 수 있는 거였네.

    연락 한 번 없던 이한이 언제든 연락할 수 있었단 것을 확인하자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많이 보고 싶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고 싶었는데,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러질 못했지.’

    이런 말을 믿으라는 걸까.

    세인은 주먹으로 침대를 콩 내려쳤다.

    “안 재워 줄 거야.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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