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신혼-9화 (9/95)
  • 두 번째 신혼 9화

    세인의 머릿속은 이미 곤죽이었다.

    이한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세세히 뜯어볼 여력이 없었다.

    내일 당장 어떻게 소문이 날지, 그것도 걱정이었다.

    아까 클럽에서 현준과 이한이 얽혀 그런 일이 있었으니, 또 다른 소문이 돌겠지.

    어쩌면 세인은 왕자님에게 구해진 공주님으로 전락했을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입방아 찧어대는 건 아무리 이한이라도 막을 수 없었고, 그가 막아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저 남자는.

    사이좋은 부부 행세라도 하고 싶은 걸까.

    어슴푸레한 수영장 물을 보고 있자니 세인은 돌연 저곳으로 뛰어들고 싶어졌다.

    죽겠다는 게 아니라, 여름 내내 단 한 번도 수영장을 이용할 틈이 없었다는 게 지금에야 떠올랐다.

    속이 끓어서 그런 거야.

    세인은 갑갑한 마음을 해소하고 싶어졌다.

    그 순간 그림자처럼 어둑하게 서 있던 이한이 세인의 발치에 한쪽 다리를 접어 앉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세인의 운동화를 벗기고 발목을 쥐었다.

    “하지 말, 읏…….”

    “마사지 배운 적 있으니 힘 빼봐요.”

    커다란 손아귀에서 이리저리 돌아가는 발목을 바라보며 세인은 의자의 팔걸이를 꾹 쥐었다.

    “냉찜질하면 나을 거예요.”

    “나 때문에 다친 것 같은데 어떻게 그냥 둬. 질색하면서 도망치다가 넘어진 거 아닙니까?”

    헛웃음 짓는 이한의 목소리 안에 걱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의사를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한이 꼼꼼하게 발을 살피고 눌러 보았다.

    그 모습에 우습게도 호흡이 빨라지고 눈가가 뜨끈해졌다.

    걱정, 그게 뭐라고.

    세인은 오랜만에 마주한 걱정 따위에 흔들리고 있었다. 진심이라곤 없는 걸 알면서.

    “이런 건 너무, 도가 지나친 것 아닌가요.”

    “도?”

    “갑자기 나타나서 이게 다 뭔데요. 전무님 기분에 따라 제가 다 맞춰야 해요?”

    발목에 고정되어 있던 서서히 이한의 고개가 올라왔다.

    이한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았던가?

    어딘가 애틋한 눈빛이었다.

    세인은 그게 의아하면서 화가 났다.

    이한의 모든 것이 가식 같았고, 자신을 기만하기 위한 장치처럼 여겨졌다.

    신뢰는 없는 사이라는 게 상기되자 이 시간이 참 부질없게 느껴졌다.

    세인은 울분을 꾹 참으며 옅게 웃었다.

    “서 전무님이 그러라면 그래야겠지만요.”

    “내 기분이 어떤 줄 알고 겁 없이 입을 놀리지.”

    “한국 들어왔으니 공식적인 일정에 참여해 달라는 말씀이면 그렇게 할게요.”

    “…….”

    “겉보기에 사이좋은 부부 행세가 필요한 거라면 당연히 따라 드린다고요.”

    “그리고.”

    “앞으론 미리 말을 해달란 소리예요. 이런 개인적인 공간까지 침범하지 마시고요.”

    한동안 말이 없던 이한이 서서히 입술을 움직였다.

    “별거부터 그만두고 싶은데.”

    별거라니. 부부 다음으로 생경한 단어였다.

    세인의 붉은 입술 새로 허망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별거 중이었어요? 몰랐는데…….”

    보통 별거라는 말은 동거라는 뜨거운 단어 뒤에 따라붙는 것이었다.

    결혼식만 함께 올린 남남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가까웠던 모양이다.

    “별거와 다름없지 않았나.”

    관계를 심플하게 표현하는 이한의 권태로운 태도가 그녀의 동요를 부추겼다.

    “그래서 이젠 살가운 부부 흉내를 내야 하니, 같이 살잔 말인가요?”

    “흉내가 아니라, 진짜 부부가 되어보잔 소리입니다.”

    이한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이어 갔다.

    “우리가 했던 사랑, 그걸 다시 해보자고 하면, 그것도 기꺼이 따라 줄 수 있나?”

    사랑? 그게 뭐였더라.

    세인의 안에서 지워졌던 단어 하나가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애든 신혼 생활이든, 처음부터 차근차근 쌓아보고 싶은데.”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많이 보고 싶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고 싶었는데,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러질 못했지.”

    이한이 눈썹을 찡그리며 뜸을 들이다가 툭, 말을 내뱉었다.

    “사과할 기회를, 줘.”

    담담한 이한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지는 게 우스웠다.

    “……하.”

    그녀가 헛바람을 흩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빠진 세인의 숨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사과라니. 그딴 말로 상처가 아물 수 있을까.

    그런데 왜 보고 싶었단 말에 곧장 흔들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결국 세인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어렸다.

    “무슨 사과요?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요?”

    “다시 시작해. 미국으로 떠나는 날도, 기다려 달란 말을 몇 번이나 참았는지 모르지.”

    “…….”

    “참을성 있게 오늘만 기다렸어. 정세인 씨가 이렇게 화낼 거 예상하고 온 건데도 거절당하니 아프고. 보고 있으니까 미치게 좋고. 숨이, 막혀.”

    “그 말을 믿으란 거예요? 이거 놔요.”

    세인이 다리에 힘을 주어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발을 빼냈다.

    빈손을 바라보던 이한이 남은 무릎마저 바닥에 댔다.

    두 무릎을 반쯤 세우고 꿇은 그의 행태에 또다시 머릿속이 뒤엉켰다.

    “나를 못 믿는 게, 거절하는 이유야?”

    “기억도 안 나는 예전 일을 이어 가자고 하는 게, 그럼 정상인가요?”

    “그래서 이렇게 애원하는 거잖아. 내가 길까? 바닥이라도 기면, 받아줄 수 있나.”

    쿵. 심장이 저 밑까지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딴 거 어렵지도 않아.”

    고개를 살짝 기울인 이한은 위험성을 띤 짐승 같았다.

    곧 덮쳐올 것처럼 흉흉한 눈빛이면서, 두 무릎을 꿇고 앉은 모양새는 이미 길든 짐승처럼 얌전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함정이란 걸 세인은 지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달콤한 말로 속삭인 뒤 훌쩍 떠나 버리겠지.

    그랬기에 세인은 그를 간신히 노려볼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웃음기를 말끔히 지워낸 이한을 마주할 때면 작아지는 기분이 들곤 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덤덤하고 차가운, 그리고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이한의 무미건조한 거죽을 완전히 벗겨낼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좋겠어.”

    “여기서 나가 줘요. 그게 제가 바라는 거니까.”

    그 순간 이한이 건조했던 표정을 밀어내며 나른한 포식자처럼 미소 지었다.

    “평생에 걸려서라도 사죄할게.”

    “…….”

    “그러니까, 얼마든지 욕해도 좋으니까. 예전처럼 내 무릎에 앉아봐. 정세인 씨 예뻐하고 싶은 거 못 해서 진짜 병났어.”

    살짝 벌어진 탄탄한 허벅지를 눈짓하는 이한과 더는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어졌다.

    “미쳤어.”

    중얼거린 세인이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이한이 서서히 걸음을 옮겨 따라오고 있었다.

    “다리 조심해야지.”

    하나 그보다 세인이 뒷걸음질 치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중심을 잃은 세인의 몸이 수영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풍덩!

    늦여름의 시원한 수면이 세인을 집어삼켰다.

    갑작스럽게 수영장에 빠진 것과 다름없었지만 놀라움은 길지 않았다.

    세인은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고 수영장 바닥으로 헤엄쳤다. 시원한 수온이 차라리 후련했다.

    은은한 야간 조명을 따라 수면 아래를 부유했다.

    과열된 머리를 식힐 겸 호흡을 참아 한계까지 스스로를 내몰았다.

    세인은 숨이 턱 끝까지 차서야 수면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녀의 등허리를 휘감아 위로 끌어 올렸다.

    “읏! 흐윽…….”

    참았던 숨을 터뜨린 세인의 눈앞에 딱딱한 것이 맞닿았다.

    이한의 가슴팍이었다. 어느샌가 그도 흠뻑 젖은 채였다.

    “사람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어?”

    밀착한 탓에 이한의 젖은 셔츠 위로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이한이 거듭 따져왔다.

    “나 때문에 죽고 싶은 줄 알았잖아.”

    그사이 호흡을 갈무리한 세인이 속눈썹을 위로 젖히며 입술을 달싹였다.

    “서이한 씨가 뭔데? 뭔데 당신 때문에 죽어요?”

    등허리를 감싼 강한 팔 때문인지 세인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왔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무리 나라도 아파. 아프다고, 세인아.”

    이한이 가슴께를 눈짓했다. 마치 심장이 아프다는 듯, 그렇게.

    그가 잠시 변덕을 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랜만에 고국 땅을 밟아서, 드디어 정착할 수 있어서 미쳐 버렸는지 모른다.

    너무 배가 부른 나머지 잠시 별미에 눈이 가는 거겠지.

    그저 괴롭히며 만족감을 얻고 싶은 것일지도.

    세인은 자학에 가까운 결론을 내놓고 나자 되레 머리가 맑아졌다.

    허튼 기대는 초반에 싹을 잘라야 불행이 찾아왔을 때 절망감이 크지 않았다.

    세인이 인생을 살며 깨달은 이치였다.

    “경고하는데 앞으론 너 인질 삼아서 시위하지 마.”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요? 서이한 씨, 저한테 아무 의미 없……!”

    순간, 이한이 팔을 감싸 세인의 몸을 바짝 당겨 안았다.

    가슴부터 골반 아래까지 그에게 달라붙은 형국이 되었다.

    “여기 깊으니까 내 발 위로 올라와.”

    수심이 세인의 턱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저 수영 잘해요.”

    “내가 불안해서 그래. 정세인 어떻게 될까 봐 등신처럼 벌벌 떠는 날 위해서 올라오란 소리야.”

    이한이 껴안다시피 하는 바람에 절로 까치발이 된 세인은 바닥에 닿지 않은 발을 휘젓다가 결국 이한의 발등을 밟고 올라섰다.

    “……변태예요?”

    세인이 이마를 찡그리며 묻자, 이한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뭐가 되든 좋으니까, 이제 떨어질 생각 마. 부탁이야.”

    세인이 불편함에 바르작댈수록 그와 몸이 진득하게 비벼졌다.

    하루 이틀의 노력으로 완성된 게 아닌 딱딱하고 강직한 남자의 몸.

    아주 예전, 그를 안고 잠들었을 때보다 더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이 미묘한 열감을 부추겼다.

    여러모로 이한은 세인이 감당하기에 더 어려운 상대가 되어 있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요.”

    “약속은 지켜야지.”

    “……약속?”

    세인이 영문을 모른다는 듯이 되묻자 이한이 웃으며 말했다.

    “기억 안 나나?”

    세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한이 팔을 들어 올리자, 물방울들이 궤적을 그리며 수면 위로 거칠게 낙하했다.

    그 소리가 지금 세인의 심정처럼 요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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