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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8화 (8/95)

두 번째 신혼 8화

여태 연락 한번 없던 남자가 인제 와 끼어드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니, 해석은 무슨.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모른 체해 주었으면 했다.

같잖은 남편 행세를 하다가 또다시 훌쩍 떠나서, 두 번 버림받은 여자란 타이틀을 기어코 씌워 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는 사라져야 했다.

또 한 번 이한이 그런 식으로 떠난다면, 세인은 회복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이런 세인의 마음과 다르게 이한은 끈질겼다.

필사적인 현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한은 새로운 의문을 거론했다.

“그건 그렇고 장난까지 나눌 사이라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을까. 강현준 저 쓰레기랑.”

이한이 세인을 향해 몸을 완전히 돌리며 물어왔다.

그 동작이 여유롭고 고고했다.

입이 슬쩍 올라가서 웃고 있단 착각을 주는 인상이었지만, 쉽게 생각해선 안 됐다.

이한이 대체 강현준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위험한 무언가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세인은 이한의 시선을 피해, 죄인처럼 쭈뼛대고 있는 현준에게 말했다.

“사과받았으니까 오빤 이만 가. 그게 낫겠다.”

“어, 어, 그래.”

“아, 오빠.”

이번에도 특정 단어를 곱씹는 이한의 표정이 비딱했다.

하나 이런 곳에서 이한과 씨름해 봐야 제 얼굴에 침 뱉기였다.

“일은 해결한 것 같네요. 조금 소란스러웠지만.”

미소 지으며 말한 세인이 시선을 돌려 혜인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이 언짢아 보이는 것이, 돌아가면 꽤 신경질을 부리겠구나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최선이란 생각이 짙어졌다.

세인이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다친 건가.”

갑자기 들려온 이한의 말에 세인이 멈칫하며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이한이 굳어버린 세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으며 말했다.

“발목이 왜 이 꼴이지. 언제 다쳤는데.”

“됐……! 아!”

아픈 발목을 이한이 감싸 당겨가는 바람에 세인이 휘청거렸다.

“어깨 잡아 봐요. 넘어질라.”

세인은 어찌할 도리 없이 앞으로 쏟아지는 상체를 붙들기 위해 이한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꽤 부었는데 어떻게 서 있던 겁니까. 여기까진 걸어왔나?”

당연한 걸 묻는 이한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조금 전 사람 하나를 잡으려고 했던 사람이 이렇게 쉽게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다니.

부부 관계가 굳건하단 걸 널리 알리고 싶기라도 한 걸까.

세인은 복숭아뼈를 문지르는 감각에 움찔하며, 그를 밀어냈다.

“괘, 괜찮아요.”

“괜찮기는 무슨, 정세인 씨는 괜찮다는 소리가 입에 붙었지. 이거 발 더 쓰면 안 될 것 같은데.”

“괜찮으니까 놔요.”

“놓으면, 함부로 돌아다니게.”

“우선 언니부터 데려다주고 올게요.”

“그럼 기다리죠.”

사람들을 의식한 말을 그가 덥석 물었다.

세인은 그의 팔에서 발을 빼내곤, 혜인 쪽으로 다가가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이한이 발목을 문지르던 감각이 남아 살갗이 화끈거렸다.

“언니, 이만 들어가자.”

“오늘은 그래야겠다. 제부, 다음에 봐요. 집에 정식으로 인사하러 올 거죠?”

“초대해 주신다면.”

이한이 건조하게 대답하자 혜인이 예의상 미소를 짓고 가자고 작게 말했다.

세인은 혜인의 휠체어를 끌고 그곳에서 벗어났다.

혹여나 이한이 쫓아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더는 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현준이 내빼는 게 언뜻 보였으니, 더 큰 싸움은 나지 않겠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에 세인은 지나가는 직원을 불러 세웠다.

“여기, 동쪽 클럽 룸 청소 좀 해줘요.”

혜인과 세인을 번갈아 살피던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세인의 편한 차림새가 낯선 탓이었다.

“혹시 정 지배인님…… 이십니까?”

“네. 지금 말고 한 10분 있다 들어가세요.”

상대하기 어려운 이한과 마주치지 않게 직원을 배려한 세인은 엉망이 된 머릿속이 심란해서 작게 한숨 쉬었다.

“제부 성격이 원래 저러니?”

엘리베이터 앞에서 혜인이 입을 열었다.

혜인 앞에선 말을 조심해야 했다.

고지식한 부모님의 귀에 오늘 일이 들어가면, 괜한 질타를 받게 될 거다.

부모님은 세인이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하길 바랐고, 납작 엎드려서라도 이한의 비위를 맞추길 원했다.

제문 그룹과 사돈 시간이란 타이틀은 부모의 트로피였고, 세인이 마음대로 벗어버릴 수 없는 족쇄였다.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긴 해.”

“난 좀 무섭다. 전에도 느꼈는데 사람이 눈빛이 너무 차가워.”

세인은 입을 벌린 엘리베이터로 휠체어를 밀며 덤덤히 대꾸했다.

“언제는 아무에게나 틈을 안 줄 것 같아서 좋다고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어휴. 그런데 왜 갑자기 들어온 거래? 너 보러 온 거야?”

“한국에서 지낼 거래.”

“뭐? 왜? 이번에 맡았다던 무슨 프로젝트인지 뭔지 실패한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실은 세인도 이한의 귀국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려야 했다.

“언니, 들어가서 바로 잘 거지? 오늘은 이모님한테 부탁해도 될까?”

“제부한테 가려는 거야?”

“응.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엘리베이터의 거울로 보이는 혜인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간병인 이모님이 상주하지만, 퇴근 후 혜인과 외출한 뒤 목욕과 취침을 돕는 것은 세인의 몫이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무렵부터 시작된 오랜 습관이었기에, 혜인에겐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픈 다리 때문인지, 이한 때문인지. 세인도 이만 쉬고 싶었다.

“언니 정 불편하면, 씻는 것만 돕고 나갈게.”

“아니, 대신 내일 일찍 와.”

거울로 보인 혜인의 표정이 여전히 굳은 채였다.

“고마워.”

세인은 객실로 향해 혜인을 간병인 이모님에게 맡겼다.

곧바로 객실 밖으로 나가자, 그 앞에 이한이 있어 주춤했다.

“다친 발로 휠체어를 끄는 건 어디 하나 부러지겠단 시위 같은데.”

“아까 그 말은 정말 다시 만나자는 말이 아니었…… 읏!”

성큼 다가온 이한이 허리를 숙여서 세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남을 돌보기 전에 자기 몸부터 챙겨야지.”

옆구리와 오금 사이를 받친 이한의 체온이 뜨거웠다. 그가 몇 걸음 남짓 움직여 세인의 객실 앞에 섰다.

“바로 앞인데 굳이 이러실 필요는…….”

난감함에 세인이 중얼거리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흘러내린 이한의 앞머리 사이로 이한의 다갈색 눈동자가 엿보였다.

“나도 알아, 여기가 정세인 씨 방인 거.”

“어떻게……?”

“내 아내가 지내는 곳을 모를까.”

몇 발자국 안 되는 거리를 굳이 안아 들고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가 뭘까.

로비에서, 클럽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이한은 작정한 것처럼 세인을 쫓아다니며 그녀를 죄 흔들어 놓고 있었다.

한식당에서 보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지난 4년간의 행적을 생각하면, 이한이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영 신빙성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할 말 있으면 정식으로 약속 잡아요. 불쑥불쑥 나타나서 놀라게 하지 말고요.”

“부부가 같은 방 쓰는 게 놀랄 일인가?”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부부, 같은 방? 어느 부분이 의아한 건데.”

이한의 입에서 부부라는 단어가 흘러나올 때마다 세인이 흠칫흠칫 놀랐다.

결혼 후 이한과 한집에 머물렀던 시간은 하루가 채 되질 않았기에 그만큼 부부란 관계는 생소했다.

“부, 부부랍시고 갑자기 같은 객실을 쓰겠단 소린 아니겠죠?”

“문 열죠. 내가 다른 객실 체크인하면 더 시끄러워질 텐데, 그걸 바라진 않을 테고.”

이한의 말이 맞았다.

오늘 더블나인에서 이한을 본 사람이라면 그의 향방을 주목하고 있을 거다.

이한이 세인의 객실을 사용하지 않고 돌아가거나 다른 객실에 체크인한다면, 불화설에 정점을 찍게 될 게 뻔했다.

“정말 여기서 자고 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완전히 틀어졌단 소리 듣고 싶은 거 아니라면, 아침까진 머물러야겠지.”

이한의 목소리가 유독 낮았다. 그에 세인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런 소리는 들어도 어차피 제가 들어요.”

“이제 정세인 씨 그딴 소리 안 듣게 한단 말을 한 것 같은데. 벌써 잊었나?”

“그 말을 믿으란 거예요?”

세인이 곧장 대꾸한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와 뒤섞인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를 눈짓하며 재촉하는 이한을 노려보던 세인은 포기하고 말했다.

“내려 줘요. 카드가 주머니에…….”

삐빅.

세인의 엉덩이를 기계에 갖다 대어 잠금을 해제한 이한이 뻔뻔하게 말했다.

“비밀번호.”

순식간에 엉덩이를 이용당한 세인은 설명하지 못할 미묘한 수치심에 휩싸였다.

하나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커진 탓에, 세인은 손을 뻗어 11자리 번호를 재빨리 입력했다.

“할 얘기 있으면 얼른 하고 나가 줘요. 집으로 가면 되잖아요. 여기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서 잠자기에는 불편할 거예요.”

객실은 테라스와 맞닿은 커다란 거실을 가운데 두고서 양옆으로 두 개의 침실과 욕실이 자리했다.

사용하지 않는 방을 창고로 쓰고 있었기에 이한에게 내어줄 방은 없었다.

세인은 직접 손잡이를 당겼다.

문을 열고 객실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무슨 수를 써서든 이한을 돌려보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진 호박색 조명이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한이 있단 이유로 늘 보던 풍경이 다르게 와 닿는 건 아닐 거라 마음을 다잡았다.

세인은 애써 불분명한 감정을 치워 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서로의 시선이 한참 엉겨 붙어 있었다는 것을, 센서 등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든 뒤에야 깨달았다.

뒤늦게 세인이 이한의 팔을 잡고 몸을 비틀었다.

“이제 내려 줘요. 누가 보면 중환자인 줄 알겠어요.”

“중환자가 되기 직전으로 보이긴 해. 억지로 잡고 싶지 않으니까 가만히.”

이한이 걸어갈 때마다 객실 천장에 매립된 조명이 하나씩 켜졌다.

이한은 거실을 지나 테라스로 나서서, 개인 수영장이 훤히 보이는 벤치에 그녀를 앉혔다.

“왜 여기로 나와요?”

“내가 어떻게 할까 봐 불안하단 표정이잖아, 지금.”

“…….”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붕도 없는 곳에서 개짓거릴 하겠습니까.”

이한이 피식 웃는 순간 뜨거운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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