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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5화 (5/95)
  • 두 번째 신혼 5화

    김 회장이 손을 좀 더 쭉 내밀며 큼직하게 입을 벌려 웃었다.

    “허허허, 오랜만에 보니 더 반갑구먼. 자네 형보다 인물이 낫단 소리 많이 들었지?”

    보통 이럴 땐 연륜을 따라 위아래를 정하는 법인데, 제문의 이름값 때문인지 김 회장 쪽이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다만 이한은 별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김 회장이 내민 손을 대놓고 무시했다.

    허공에 머문 손을 머쓱하게 거둬가며 김 회장이 말을 이어갔다.

    “흠흠. 그래, 언제 다시 나가나? 준공하려면 꽤 걸릴 텐데 말이야.”

    “아주 들어왔습니다. 별다른 일 없으면 쭉 국내에 머무를 예정입니다.”

    대답하는 이한의 시선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선 세인에게 닿아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정보다 2년이나 빠른 귀국이었다.

    이한의 나이가 서른둘은 되어야 한국에 자리를 마련할 거란 소리를 들었으니까.

    전혀 들은 바 없는 얘기이기에 세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한이 돌아왔다면,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의 귀국은 먼 훗날의 일로 미뤄두었기에 귀국 후의 상황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말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이한이 반가울 리도 없었다.

    딱 뺨 한 대만 쳐봤으면.

    못된 생각을 하는 세인에게로 시선을 빤히 찔러 넣은 이한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멀쩡한 부부 사이를 이렇게 와해해도 되는 겁니까, 김 회장님.”

    “와해라니, 난 그냥 우리 정 지배인이 예뻐서.”

    “예뻐하는 방식이 특이하시네요.”

    이한의 서늘한 눈빛이 김 회장에게로 돌아갔다.

    “내가 우리 정 지배인이랑 사이가 각별해. 그리고 웃자고 한 말에 감정 상할 게 뭐 있겠나.”

    허허허허. 김 회장이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이혼하면 받아주겠다던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진 태도였다.

    “우리 세인이가 아무리 탐이 나도 그렇지, 갖다 붙일 걸 붙여야죠.”

    김 회장의 표정이 슬그머니 일그러졌다.

    그 옆에서 세인은 이한의 반응에 적응하지 못하고서 꽉 다문 턱에 힘을 주었다.

    서서히 거리를 좁혀온 이한이 그녀의 곁에서 멈춰 섰다.

    너무 가깝다고 여겼을 무렵, 그의 팔 하나가 세인의 어깨를 감쌌다.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힘이 그녀를 끌어당겨 단단한 가슴팍이 보이도록 안았다.

    언젠가 안겨 보았던 그 가슴이지만 6년 만이라서 그런지 낯설었다.

    “그럼 정세인 씨가 말해 봐요. 우리 이혼하나?”

    세인이 겨우 대답을 쥐어짰다.

    “……아뇨.”

    “그럼 연애를 안 해봤을까?”

    달콤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나른하게 휘감았다.

    상냥하기만 한 이한의 목소리에 위화감이 가득해서, 세인은 웃는 표정을 만드는 게 꽤 힘들었다.

    “……했었죠.”

    “그럼 조금 더 반가워해도 되지 않나? 너무 굳어 있으니까 김 회장님이 의심하잖아요.”

    “업무 중에 갑자기 나타나서 놀란 것뿐이에요.”

    세인이 생긋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히 목소리가 산뜻하고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세인 씨가 이렇게 놀랄 줄 알았으면 미리 말하고 왔을 겁니다.”

    누가 본다면 두 사람의 불화설은 거짓이었다고 말할 만큼 다정한 목소리였다.

    “지금 기분 별로구나.”

    세인의 목덜미 쪽으로 달라붙은 이한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했다.

    나쁜 자식. 세인이 열렬한 눈빛으로 그에게 따져 보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래, 정세인 씨는 눈 치켜뜰 때가 제일 귀엽지.”

    이한의 낮은 웃음소리가 목덜미를 핥아 올리듯 요요하게 파동했다.

    그의 볼우물을 보자 세인은 가슴께가 걷잡을 수 없이 울렁거렸다.

    이한이 등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제야 밀착한 신체 부위에 신경이 쏠리기 시작한 세인은 서둘러 물러나 이한과 거리를 벌렸다.

    그러곤 정면의 김 회장에게 말했다.

    “김 회장님, 보시다시피 저희 부부 사이가 그리 나쁘진 않습니다.”

    김 회장이 서로 골반을 딱 붙이고 선 이한과 세인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소문이 진짜인지 눈앞에 보이는 게 사실인지. 잘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하나 아무리 김 회장이라고 한들 당사자가 모두 있는 자리에서 이혼을 입에 올리진 못했다.

    이한의 기에 눌린 듯도 했다.

    “뭐…… 그래 보이긴 하네만.”

    “회장님, 지금 가셔야 합니다.”

    그때 김 회장의 비서가 세단 쪽을 가리켰다. 마지못해 김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럼 감세. 정 지배인 자네, 앞으로도 잘하고. 응?”

    “네. 살펴 가세요.”

    세인이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잘하나 지켜볼 거야.”

    이한에게 무시당한 자존심을 세인에게서 찾은 김 회장이 뒷좌석에 올랐다.

    세인은 적당히 고개 숙여 멀어지는 세단의 꽁무니에 인사했다.

    세단이 사라지자 그녀는 경직되었던 어깨를 펴고 짧게 숨을 내뱉었다.

    “하…….”

    “일 마쳤으면 나 좀 봐요.”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단둘이 얘기했으면 하는데.”

    여전히 어깨를 감싸 안은 이한의 느긋한 목소리에 세인의 신경이 곤두섰다.

    세인은 이한의 손을 옆으로 밀어내며 몸을 돌렸다.

    여전히 이한은 입가를 올린 채 세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아주 귀국한 거예요?”

    4년 전에 그는 얼굴만 비치고 돌아갔다.

    시계를 한 번 본 이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계획보다 일이 빨리 끝났습니다. 자세한 건 저녁이라도 하면서 천천히 얘기하죠.”

    “귀국은 축하드려요. 그런데 어쩌죠.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세인의 말에 이한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식사가 어려운 겁니까?”

    “…….”

    “아니면 내가 곤란한 거야.”

    이한이 고개를 기울이며 지그시 눈을 맞춰 왔다.

    마치 세인의 거짓 미소 따윈 간파할 것처럼, 노골적이고 짙은 시선이었다.

    “미리 전화라도 해주셨으면 일정을 조율했을 텐데. 아쉽네요.”

    “새삼 연락하면, 받을 생각은 있고?”

    두 사람은 지난 6년간 단 한 통화도 하지 않았다.

    세인은 대놓고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그에게 먼저 전화를 걸 만큼 속이 없지 않았다.

    꼭 전달해야 할 용무가 있을 땐 이한의 비서, 민성을 통해 전달했고, 그도 비서를 통해 용건을 주고받았다.

    그러니 이한이 이렇게 말하는 건 무척 억울했다.

    “그럼 윤 비서님 통해서 말해 줬으면 됐잖아요. 각자 살긴 해도 소통할 일은 생길 건데, 그때마다 이렇게 불쑥 찾아오실 거예요?”

    이한이 한국에 있는 이상, 전달할 말이 많아질 테니 한 소리였다.

    “각자?”

    그런데 이한은 특정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되물었다.

    “우리가 왜 각자일까. 엄연히 부부인데.”

    각자라는 단어에 누구보다 환호할 것 같은 사람이, 꽤 거슬린단 표정이었다.

    아마도 사업 공동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인은 애써 생긋 웃었다.

    “오랜만의 귀국이라 바쁘실 텐데, 저랑 식사하는 것보단 다른 데 시간을 투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내 아내에게 먼저 시간을 내고 싶어서.”

    옅게 웃음 지으며 아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이한은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남보다 못한 존재 아니었을까.

    “오늘은 제가 시간이 안 돼요. 미안해요.”

    세인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정말 안됐단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부탁인데 앞으론 제 일에 나서지 말아주세요.”

    “…….”

    “제 업무에 서 전무님이 얽히면 입장이 곤란해지거든요.”

    앞으로 김 회장의 얼굴을 어떻게 볼지 앞이 캄캄한 건 사실이었다.

    “내가 안 나섰으면.”

    어느새 이한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짙은 그늘이 진 이한의 눈가가 꼭 화난 것처럼 보였다.

    “정말 김 회장 며느리라도 되려고 했나?”

    “비약하지 마요. 고객 응대를 했을 뿐이잖아요.”

    “그럼 김 회장 앞에서 죄인 같은 표정은 짓지 말았어야지. 나한테 그딴 걸 보게 해놓고 빠져 있으라고.”

    “내가, 애초에 누구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려던 세인은 화를 꾹 눌러 담았다.

    살짝 눈가를 찌푸린 이한이 숨을 깊게 내쉬었다.

    “알아, 나 때문인 거.”

    “전무님이 대체 뭘 아는데요?”

    그와의 결혼으로 몇 년간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이한이 일부분이라도 알긴 할까.

    소문이 번지고 번져서 그의 귀까지 흘러 들어갔으려나.

    그렇다 한들, 매번 심판대에 오르는 듯한 기분을 알진 못할 거다.

    “그래서 앞으론 정세인 씨 개소리 안 듣게 하려고. 김 회장이든 누구든 내가 직접 치우면 되겠지.”

    “치우다니.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요.”

    “갈아 마셔도 시원찮은 새끼 감싸지 마.”

    이제 와 이러는 이한이 가증스럽고 원망스러웠다.

    세인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주변의 이목이 쏠린 상황에 더 소란을 피울 수 없다.

    그녀와 이한을 보고 멈춰 선 이들이 몇몇 있었다.

    그중엔 반가운 얼굴로 이한에게 다가오려는 이도 있는 듯했다.

    그래, 이런 실랑이가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이한은 이름뿐인 남편이었다.

    쇼윈도 부부로서 책임을 다하면 될 뿐이었다.

    세인은 감정을 애써 갈무리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식사는 나중에 해요.”

    “저녁이 어려우면 포옹은, 그것도 어렵습니까.”

    이한이 미간을 좁히며 애매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한 번만 안아 보고 싶은데.”

    제멋대로인 이한 때문에 세인의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 되었다.

    갑자기 나타나선 진짜 부부 행세라도 하자는 듯 살갑게 구는 것 하며,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는 그가 이해되질 않았다.

    “서 전무님,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요.”

    “보니까 더 해야지.”

    “보여 주기 위한 포옹은 하고 싶지 않아서요.”

    “왜. 내가 정세인 씨한테 뭣도 아닌 그냥 서 전무라서?”

    “뭐라고요?”

    “앞으론 거리감 느껴지는 호칭 말고, 이름으로 불러요.”

    불편함 그 자체인 사람이 하는 말이라 하나도 설득력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요. 이만 가 볼게요.”

    “정세인 씨에게 사과할 기회를 달라고 하면.”

    “…….”

    뭘 잘못 들은 걸까.

    돌아서려던 세인의 발이 그대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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