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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4화 (4/95)
  • 두 번째 신혼 4화

    그래, 미친 짓이었다. 사랑해 미치는 여자를 두고 혼자 떠나는 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침대에 누운 세인의 등이 불규칙적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자는 척이 어설펐다.

    이한은 더 다가가진 못하고 침대의 측면에 멈춰 섰다.

    이불을 조금만 내리면 세인의 입술까지 보일 것 같아서 애가 탔다.

    이한은 주먹을 그러쥐고 손을 뻗지 않기 위해 인내를 발휘했다.

    긴 차양을 만든 속눈썹과 아치형의 눈썹이 어여뻤다.

    고양이처럼 치켜뜨는 눈도 보고 싶은데…….

    착해 빠져선 독하게 굴지 못하는 점이 영 걱정이라고 말하면.

    솔직하게 너를 얻기 위해 떠난다고 말하면, 아마 넌 많이 좌절하겠지.

    언니 혜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순진한 이 여자는 깊은 죄책감을 느낄 게 뻔했다.

    그래서 말할 수가 없었다.

    이 불완전한 결혼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 잠깐 떠나는 것이라고.

    “정세인.”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코끝을 찡그릴 뿐.

    “길게 얘기할 생각 없어.”

    아까보다 속눈썹이 깊게 눌렸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했는지, 그녀가 손끝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다녀올 테니 바람피우지 말고.”

    뜨거운 시선을 견디지 못했는지 그녀가 살짝 뒤척였다.

    “보는 눈이 많아진 건 알겠지. 그러니 조심해.”

    그 바람에 그녀의 입술이 이불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달게 물오른 과육처럼 붉게 물든 그곳을 바라보며 이한이 말했다.

    “맹한 데가 있어서 안심이 안 돼.”

    제 딴엔 강한 척하지만 실은 눈물이 많은 정세인.

    “제문 본가에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무례한 부탁이나 명령을 해오거든 내 쪽으로 연락해. 윤 비서 연락처는 알 거고.”

    여기까지 말한 이한은 숨을 내쉬었다.

    차마 제게 연락하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세인의 목소리를 들으면 언제고 뛰어오고 싶어질 테니까.

    지금도 이렇게 견디기 괴로운데, 세인의 목소리를 들으면 아마 무너질 거다.

    그리고 어설프게 세인을 붙들다가 모든 걸 망치겠지.

    이한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그리고 바보 같은 짓 좀 적당히 하고 너부터 챙겨. 알아들어?”

    세인은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고 이한은 그저 웅크린 그녀를 한동안 눈에 담았다.

    긴장한 채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세인이 안쓰러워진 이한은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

    너는 우리가 함께할 이 새집이 마음에 드는지.

    잠자리가 바뀌어 밤사이 뒤척이진 않았는지.

    결혼식은 부족함이 없었는지.

    네 손에 끼워진 반지는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건지.

    내가 떠나면 조금은 그리워해 줄 건지.

    아니면 결혼하자마자 해외로 발령 난 남편 따윈 기억에서 잊고 잘 살아갈는지.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서 억지로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

    “하…….”

    긴 회상을 마친 이한이 시큰하게 웃었다.

    세인이 다녀갔단 이유만으로 한식당의 한 공간이 애틋해지고 있었다.

    미미하게 남은 세인의 향기가 사라질까 봐 아쉬워서 몸을 일으키기 싫었다.

    한국을 떠난 지 고작 2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야 학위를 취득해 회사에 자리 하나를 얻어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형의 자리를 메우려면 갈 길은 아직 멀었다.

    그런데도 오늘 세인과 약속을 잡은 건, 더는 버티기 힘들어서였다.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여정이 남아 있었다.

    실은 본가의 행사를 핑계로 귀국할 때마다, 멀리서 세인을 보고 돌아갔었다.

    이번엔 함께 돌아가고 싶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인은 미련 한 줌 없어 보였고, 그래서 이한은 자신의 욕심대로 그녀를 붙들 수가 없었다.

    “정세인.”

    이한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두 사람의 첫 번째 신혼이 막을 내렸다.

    ***

    4년 뒤.

    서울 중심부에서 40분 정도만 벗어나면 유명한 산이 있다.

    허가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샛길을 통과하면 거대한 몸체를 자랑하는 리조트 호텔이 보였다.

    연회비가 1억을 호가하며 VIP 회원권을 지닌 이들만 이용할 수 있는 리조트 호텔 더블나인.

    높은 담장과 산으로 둘러싸여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보호하는 이곳은 도심 속 발리라고도 불렸다.

    아는 사람만 알고 선택된 사람만 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리조트 호텔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동남아의 고급 휴양지를 떠올리게 하는 시설과 VIP 고객을 대상으로 한 차별화된 영업을 선보여 변함없는 인기를 유지했다.

    산과 호수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입지적 장점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결같은 흑자를 안겨 주었다.

    개별 수영장이 딸린 객실에서 볼 수 있는 노을 또한 장관이었다.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과 편의 시설, 유흥거리에 반해서 더블나인에 일 년 내내 머무르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세인의 언니, 혜인이 그랬다.

    몸이 불편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혜인은 이국적인 정취의 이 리조트를 마음에 들어 했고, 이곳에 4년째 기거 중이었다.

    혜인의 손발이 되어줄 세인도 이 리조트에 취직해 쭉 함께 지냈다.

    세인은 낙하산이란 편리한 제도 덕에 쉽사리 부총지배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저녁 7시가 가까운 시각, 세인은 아직 퇴근하지 못했다.

    호텔 방문 때마다 세인을 찾는 성문 제약 김 회장을 배웅하는 일정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세인은 로비 앞에서 김 회장과 그의 비서진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고개 숙였다.

    “편안한 여정이셨길 바랍니다. 언제든 다시 방문해 주시면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대형 세단의 열린 뒷문으로 향하려던 김 회장이 걸음을 멈추고 세인을 돌아보았다.

    “참, 우리 정 지배인만 보면 아까워.”

    세인이 빙그레 웃으며 김 회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네 이렇게 일찍 결혼할 줄 알았으면 나도 우리 아들이나 좀 소개할 걸 후회가 돼서 말이야. 자네도 내 아들 알지?”

    “그럼요. 김 사장님 잘 압니다.”

    김 회장의 아들 김대완은 40대로 책임질 아이가 둘이나 있는, 속된 말로 한 번 다녀온 남자였다.

    폭력을 일삼는 개차반인지라 더블나인을 찾을 때마다 사고를 일으켜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자네가 결혼만 안 했어도 내가 중매를 서는 건데 말이야. 정 지배인처럼 참한 며느리가 딱이지. 허허허허.”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세인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서 이사, 아니지, 이제 전무지. 서 전무랑 영 소원하다며. 그럼 우리 대완이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 아닌가?”

    농담이라고 한 걸까. 말을 마친 김 회장이 큰소리로 웃어 젖혔다.

    굳은 얼굴로 곁을 지키는 비서들이 되레 세인의 눈치를 살폈다.

    “내 말이 틀렸나? 자네 소박맞았다고 말들이 많아.”

    “놀리시는 거라면 김 회장님, 짓궂으십니다.”

    “놀리긴 누가? 자네랑 서 전무, 공식 석상에 얼굴 비친 적이 없으니 의심을 사는 게야.”

    김 회장이 웃음을 멈추고 세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언가 가늠하려는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이한의 본가인 제문 그룹과 세인의 친정이 여전히 돈독한 관계인지 알고자 하는 자들은 많았다.

    김 회장도 비슷할 터였다.

    세인은 동요를 감추고서 미소를 지었다.

    “거리가 거리다 보니 만나기 어렵습니다. 서 전무님 유명세에 소문이 과장되곤 하고요.”

    “에잉. 늙은이 바보 취급하는 거 아니야. 어디 신혼부부가 거리를 따져. 전세기라도 이용해서 붙어먹어야 신혼이지.”

    그가 혀를 찬 뒤 말을 이었다.

    “아무리 정략결혼이어도 말이야, 보는 눈은 생각하거든.”

    김 회장이 현관을 차지하고 오래도록 떠나지 않자, 주변을 지나는 이들이 흘긋흘긋 이쪽에 관심을 보였다.

    세인은 슬슬 이 대화가 불편해졌다.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아? 아니면 서 전무가 수년 안에 이혼이라도 하재?”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긴. 한참 기우는 결혼이었잖아. 대체 왜 자네랑 결혼을 했나, 궁금해 죽는 사람 많아. 연애결혼도 아니었다며?”

    대체 뭘 쥐여 주고 감히 제문과 혼맥을 맺었느냐, 하는 속뜻이 빤히 보였다.

    세인은 딱딱하게 굳어가는 입매를 애써 끌어 올리며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이런 식의 괴롭힘은 이미 여러 번 겪었다.

    그러니 이제 무뎌져야 하는 거 아닌가.

    결혼하자마자 이한에게 버림받은 가련한 처지가 된 걸 온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듯했다.

    그녀의 반응을 즐기려는 못돼 먹은 심보이든, 정말 궁금해서든.

    세인이 잊을 만하면 주위에서 이렇게 이한의 이야기를 꺼내 속을 뒤집어 놨다.

    결혼 후 지금껏 이한은 이런 식으로 세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흠흠. 그래, 이혼하면 언제든지 우리 집으로 들어오게. 자네라면 내가 꽤 예뻐하지 않겠어?”

    김 회장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을 때였다.

    “누가 이혼을 한다고 그럽니까.”

    느릿하지만 유려한 발음이 허공에 흩어졌다.

    세인이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연애결혼 아니란 소리는 또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생각보다 함부로 지껄여 대는 입들이 많네.”

    서이한, 그가 환상처럼 서 있었다.

    세인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굳었다.

    정말 이한이었다.

    세상만사가 무심하고 지루하단 낯빛이 영락없이 그였다.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만드는 날카로운 시선 또한 예전 그대로였다.

    은근하게 달라붙은 재수 없는 미소 또한.

    가만히 있어도 눈길이 가는 남자는 순식간에 주변을 압도하며 그렇게 세인의 세상으로 찾아왔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다만 질문은 세인의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보는 눈이 많았거니와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밀어 입술이 떨어지지 않은 터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건 김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김 회장이 주먹을 쥐고 헛기침을 터뜨렸다.

    “커흠, 서 전무 아닌가. 아직 미국에 있다고 들었네만.”

    “오늘 새벽에 귀국했습니다.”

    당황한 기색을 순식간에 지운 김 회장은 이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만면에 띠며 표정 관리를 했다.

    “그래, 이게 얼마 만인가. 더 듬직해졌구먼. 소식은 들었네. 축하하네.”

    이한에게로 먼저 걸어가 손을 내미는 김 회장의 우호적인 행동은 나름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그 손을 내려다보는 이한의 시선은 비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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