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신혼-3화 (3/95)
  • 두 번째 신혼 3화

    탐색에 그쳤던 이한과의 눈 맞춤이 구렁이처럼 감겨들고 있었다.

    결국 세인의 원망 섞인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돌멩이가 틀어막힌 것처럼 가슴과 목이 아팠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이한이었다.

    그가 다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제문가의 처마가 좋아도, 애 배는 것까지 누구 지시받아야 하나.”

    금세 건조한 표정이 된 그는 스물두 살의 이한이 아닌, 낯선 남편으로 상대로 돌아와 있었다.

    “임신 못 하면 이혼하게 될 거예요.”

    세인이 진심을 다해 대답하자 이한이 물어왔다.

    “그게 무서워?”

    매끈하게 웃은 이한이 그릇을 열어 조리된 생선 살을 발랐다. 가지런한 젓가락질로 그녀의 앞접시에 놔주곤 손짓했다.

    “식기 전에 먹죠. 통 안 먹네.”

    너나 먹으란 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참았다.

    세인이 억지웃음을 쥐어짜 최대한 가지런하게 웃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체면치레였다.

    고개를 돌려 어느덧 한참이나 지난 시곗바늘을 확인한 이한이 브리핑이라도 하듯 건조하게 말을 이어 갔다.

    “본가에서 정세인 씨에게 접촉하는 일은 없을 테니, 그 부분은 마음 놓아도 좋아요.”

    순간 이한이 왜 이 결혼을 마음먹었는지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결혼하기 편한 상대잖아요. 너무 잘난 처가, 저 피곤해요. 할아버지.’

    ‘제문 살림에 관여하지 않을 테고, 주제넘지도 않을 겁니다.’

    그가 해외에 있는 동안, 아니, 평생에 걸쳐 어딘가에 처박아 놔도 한마디 말도 못 하는 그런 꼭두각시 같은 아내가 필요했을 거다.

    너무 잘나지도, 그렇다고 너무 후지지도 않은 처가라면 세인의 배경이 적격이었다.

    그러니 먼저 손을 내밀어 효율적으로 그녀를 택한 거다.

    이한이 이 결혼을 택한 이유가 명백해져 갈수록, 세인은 이 자리에 앉아 이한의 간택을 기뻐해야 하는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후지게 만들었다.

    세인은 원피스를 꾹 그러쥐었다.

    “식사는 잘했어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원피스의 끝자락에 이한의 시선이 닿았다.

    노골적인 시선이 오래도록 머무는 게 느껴졌다.

    서둘러 가방을 챙긴 세인이 치맛단을 정돈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나 때문에 입은 겁니까?”

    “무례하시네요.”

    “2년 만에 취향이 변했을 리는 없고.”

    “저 이런 스타일 좋아해요. 매일 입는걸요.”

    세인은 밝게 웃는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둘째 딸에게 선정적인 포장지를 덧씌운 부모의 시커먼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그리고 그런 부모에게 끈 달린 종이 인형처럼 휘둘리는 처지를 들킨 것 같아서 수치스러웠으나,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의도는 알겠는데, 나 말고 다른 새끼가 볼 건 계산 못 했고?”

    “어쨌든 이사님께서 관심 없는 건 잘 알겠네요. 그럼 살펴 가세요.”

    제법 독한 말을 남긴 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을 빠져나갔다.

    그렇지 않으면 이한의 앞에서 주저앉을 것 같았다.

    ***

    세인이 나간 공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이한이 갑갑한 넥타이를 잡아끌며 욕설을 내뱉었다.

    “X발.”

    실은 당장에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세인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 마른세수하며 충동을 억눌렀다.

    2년 전, 이한은 제 욕심을 버리고 세인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마음 편히 언니 혜인과 가족을 택하도록 물러난 거다.

    그러니 그녀를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인을 보자마자 화가 났다.

    세인은 기억 속 앳된 얼굴이 아닌 한층 성숙해진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고, 그게 못내 짜증스러웠다.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고양이처럼 쭉 뻗은 눈매엔 이한이 알지 못하는 능숙함과 의연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변해 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했다는 불쾌함이 단번에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날카로운 성질머리가 발동해서, 세인에게 잘 보여도 부족한 시간에 사사건건 이죽거리고 말았다.

    “하…….”

    그리고 세인은 여전히 정혜인에게 묶여 있는 모습이었다.

    혜인은 세인의 역린이었다.

    이한에겐 그걸 함부로 침해할 권리는 여전히 없었고.

    만약 세인이 퇴직에 뜻이 있다면, 어떻게든 함께 미국으로 떠나자고 권했을 거다.

    그녀를 멀리하라 종용한 서 회장에게 무엇을 내주어서라도 세인과 함께 떠났을 텐데…….

    세인은 틈조차 내어주질 않았다.

    너를 그리워했다고, 한 번도 잊은 적 없단 말만으론 붙들 수 없겠지.

    이제 와서 경거망동할 순 없었다.

    그는 지난 2년간 단 한 번도 세인을 잊지 못했다.

    수년간 계속된 열병이 이한의 심장을 아프게 짓누르고 있었다.

    세인을 원하고 원해서 미쳐 버린 남자가 가슴을 들썩이며 웃었다.

    “호텔에 가?”

    억지인 게 분명한 그녀를 끌어안고, 그것마저도 감동이라며 미친 듯이 땀을 흘릴 제 모습이 연상되어 헛숨이 터졌다.

    진짜 개새끼가 되고 싶은 걸 참느라 날카로운 말이 튀어 나갔다.

    이한은 이마에 손을 얹은 채, 2년 전 한국을 떠나던 날을 회상했다.

    ***

    2년 전, 결혼식 다음 날.

    그날 이한은 밤새, 아내가 된 세인의 침실로 쳐들어가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수시로 열이 오르는 게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몇 번의 고비 끝에 날이 밝았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거나 마찬가지인 이한은 주저 없이 침대 시트를 걷고 일어났다.

    얇은 면바지만 걸친 그의 상반신 근육이 뚜렷하게 과시되었다.

    새벽 시간에 피트니스 센터를 꾸준히 이용한 결과였다.

    신혼집은 단독 주택이었기에 굳이 공동 시설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위층으로 올라간 이한은 집안에 마련된 피트니스 룸으로 들어섰다.

    러닝머신에서 1시간가량 쉬지 않고 뛰었다.

    무식하게 땀을 빼서 들끓는 기력을 일부러 소진했다.

    “하…….”

    지칠 때까지 달린 이한은 짧은 욕설을 뱉어내곤 땀에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잡티 하나 없는 말끔한 얼굴을 타고 맑은 땀이 뚝뚝 흘렀다.

    힘이 가득 들어간 턱을 수건으로 무심히 닦아낸 이한은 지금이라도 세인의 침실로 향할까 고민했다.

    “잠이 와?”

    미친놈처럼 따져 묻고 싶은 것을 참고 욕실로 향했다.

    긴 시간 샤워를 한 뒤, 준비된 스리피스 슈트를 걸쳤다.

    퍼스널 쇼퍼가 엄선해서 고른 슈트가 이한의 몸을 보기 좋게 감쌌다.

    그가 정갈한 손짓으로 푸른색의 넥타이를 맸다.

    시계를 고르고, 향수까지 뿌린 후에 거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진 얼굴이야 24년간 보던 것이니 익숙하다만, 사탕을 뺏긴 아이처럼 심통 난 눈매는 낯설고 우스웠다.

    이한은 결국 목울대를 두드리며 낮은 웃음을 흩뜨렸다.

    “표정 최악인데.”

    어제 막 결혼한 사람이 느낄 리 없는 뭣 같은 감정에 지배당한 스스로가 한심했다.

    언제부턴가 정세인이란 기준을 세우면 항상 처절한 남자가 되었다.

    이한은 무심하게 방을 등져 복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짙은 그레이 색상의 슈트 속에 감춰진 호리호리한 근육질의 다리가 넓은 보폭으로 움직였다.

    광활한 신혼집을 가로지르자 이제야 집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신혼집을 구한 건 전문가와 세인이었다.

    조부와 부친은 마음에 차지 않는 결혼을 이행한 이한을 물 먹이듯, 쉼 없이 일감을 밀어주었다.

    덕분에 이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이 집을 본 것도 결혼식을 마친 직후인 어제가 처음이었다.

    거실의 통창을 반쯤 가린 블라인드의 좁은 틈새로 침투한 햇살이 대리석 바닥을 조명했다.

    벽 한쪽에 자리한 창은 정원의 한 면을 그림처럼 담아냈고, 높은 담과 나무를 멋들어지게 투과했다.

    그 가운데 이방인처럼 우뚝 서서 이한은 생각했다.

    시원한 아침 공기를 그녀와 함께 나눠 마실 순간이 오긴 할까.

    이한은 아득하기만 한 미래를 갈망하길 그만두고 세인의 방을 찾았다.

    제 방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그녀의 방이 있단 것도, 어제 알았다.

    일부러였겠지.

    이한이 결혼 준비를 하며 세인과 얼굴을 맞댄 건 세 번밖에 되지 않았다.

    상견례, 백화점, 결혼식 리허설이 다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한은 세인을 밀어냈다.

    바쁜 일정을 핑계로 결혼 준비에 동참하지 않았다.

    어차피 홀로 떠나야 하니까.

    그녀 곁에 있어주지 못할 테니까.

    끓어오르는 정을 조금이라도 떼어내는 게 옳다 여겼다.

    그렇게 그녀와 제대로 된 얘기 한번 나누지 못한 채 결혼식을 올렸다.

    어제가 되어서야 결국 나눈 얘기라곤 앞으로의 일정이나 공적인 일에 대한 것뿐이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강행군에 지친 세인은 일찌감치 방에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어젯밤 침실이 왜 두 개인지 따지려던 이한은, 그럴 주제가 못 된다는 걸 깨닫고서 그녀의 방 앞을 서성이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세인의 방 앞에 선 이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내리곤 손을 들었다.

    똑똑똑.

    이제 곧 공항으로 떠나야 했으니, 마지막이나마 얼굴을 보고 인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인은 대답이 없었다.

    아직 자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제 얼굴이 보기 싫은 건지 알 수 없던 이한은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들어갈게.”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문고리를 돌리자 세인에게서 풍기는 달큼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정세인.”

    부드러운 카펫이 슬리퍼에 짓뭉개지는 느낌이 기이했다.

    그의 방엔 필요치 않은 것들이 소담하게 들어찬 여자 방은 낯선 풍경이었다.

    그중에서도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린 채 웅크리고 잠든 세인의 존재는 단연 이한의 가슴을 술렁이게 했다.

    저 조그마한 여자 때문에 미친 짓을 저질렀다고,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