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신혼 2화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그녀에게 대외용 가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었다.
다만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를, 낯선 이를 대하듯이 말을 주고받으려니 위에서 경련이 나는 것 같았다.
느긋하게 물수건을 찾는 이한의 동작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여기 처음이에요?”
“네.”
“음식 괜찮아요.”
2년간 해외에 있었으면서 그는 아주 잘 안다는 듯이 얘기했다.
세인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기대되네요.”
기대는 무슨.
심장이 귀에서 뛰는지 목에서 뛰는지 모를 정도로 세인은 긴장하고 있었다.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금 이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기분 탓일까.
그의 다갈색의 눈동자가 갑자기 어둑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이한의 비딱한 미소.
더 날렵해진 인상 때문인지 세인은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저 아름다운 얼굴로 속삭이던 달콤한 말들이 떠올랐다.
‘키스, 처음이야?’
‘이거 너 때문인데.’
‘사랑해.’
헛된 기억이 가시처럼 솟아 세인의 심장을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마음을 다잡고 나왔는데도 술렁이는 마음을 다독일 길이 없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이한이 슬며시 웃자 볼우물이 생겼다.
저걸 예쁘다고 생각했던 옛 감정이 불순물처럼 떠올라 세인은 얼른 눈을 모로 돌렸다.
미쳤구나. 정세인.
“죄송합니다. 고객의 기분을 살피는 일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빤히 봤나 보네요.”
세인이 혼란스러움을 숨기려 물잔을 쥐었다. 손끝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정세인 씨가 보기엔 내 기분이 어떤 것 같습니까.”
물수건을 펼친 그가 깔끔한 동작으로 손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말해 봐요. 궁금하네.”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투로 물었으나, 그가 정말 궁금해서 하는 말이란 건 알았다.
세인이 누구보다 그를 잘 알았던 때가 있었으니까.
“글쎄요.”
“긴장하고 있는데, 그게 안 보이나.”
말과 다르게 물잔을 문지르는 이한의 태도는 유유자적하기만 했다.
이렇게 능청을 떤다는 건, 과거의 일을 전부 묻어두고 싶든가, 아니면 아무런 영향력 없는 일로 치부 중이란 뜻일 터다.
하기야 이한에겐 어린애 장난이었겠지.
물잔을 입가에 가져간 뒤에야 세인은 자신이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인은 혀로 스며드는 물기를 느끼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 그녀를 주시하며 이한이 입을 열었다.
“더블나인에서 근무 중이라고. 근무 환경은 어떻습니까.”
이한이 왜 근무 환경에 관심을 가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근무 환경에 대해 궁금하신 건가요?”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까?”
“네.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퇴사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기에 빠르게 답했다.
이한이 웃으며 물어왔다.
“혹시 그거 정혜인 씨 때문인가.”
“네?”
“아직도 언니 치마폭에서 못 벗어난 것 같아서.”
세인의 입매가 굳었다. 그가 혜인의 일로 이죽거릴 줄은 몰랐던 터라 솔직히 당황했다.
혜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는 사정을 다 알면서, 왜 비웃듯이 말하는 걸까.
그래, 이렇게까지 그는 나쁜 사람이었던 거다.
그녀는 아픈 속을 숨기며 산뜻하게 웃었다.
“저는 이 일이 마음에 들어요.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천직.”
그녀의 말을 따라 하며 이한이 눈썹을 구겼다.
“호텔 일이, 아니면 보모 노릇이.”
보모 노릇.
이한은 세인의 처지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해지고 눈가가 뜨끈해졌다.
문득 이한이 오늘 자신을 불러낸 게 이런 수모를 안겨 주기 위함은 아닐까, 비약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말이 지나쳤다면 미안한데, 다시 물을게요. 호텔 일은 계속할 겁니까?”
리조트 호텔의 부총지배인 자리.
그의 아내가 갖기에 미천한 직업일지 모르겠으나, 세인은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아마 이 부분은 제문 그룹의 개를 자처한 그녀의 부모님도 의견이 같을 터였다.
세인이 화제를 돌리듯 입을 열었다.
“……출국은 언제라고 했죠?”
“내일 오후 비행기입니다.”
며칠간 머물다 갈 줄 알았는데, 더 빠르게 돌아가는구나.
촉박한 일정이었다. 오늘 그와 잘 수 있을까.
이런 순간에도 역정 낼 부모님의 얼굴을 상상하며, 이한을 침대로 끌고 갈 계산을 해야 하는 처지라니.
세인은 웃음을 옅게 터뜨렸다.
이한의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비웃음으로 비쳤을 법도 한데,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는 이한 역시 완벽한 가면을 쓴 것 같았다.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익살스럽게 결혼하자고 속삭이던 이한의 짓궂은 얼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게 가면이었을까, 지금이 가면인 걸까.
따져 봐야 소용없을 일에 머리를 쓰다 보니 허기가 졌다.
세인은 그제야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게 떠올랐다.
“이만 음식을 내오라고 해야겠어요.”
말을 마친 세인이 벨을 눌러 테이블 세팅을 주문했다.
그러자 이한이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리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정세인 씨가 좋아할 만한 코스로 예약했으니 입맛에 맞을 겁니다.”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에요.”
“그랬나.”
낮게 따라붙는 목소리가 세인은 불편했다.
똑똑똑똑똑.
곧 다섯 번의 노크가 알림처럼 울리고 서빙 카트에 담긴 음식이 세팅됐다.
능숙한 솜씨로 음식이 담긴 개인 접시를 가지런히 정렬한 직원이 조용히 사라졌다.
세인은 사기그릇의 뚜껑을 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떴다.
순간, 숟가락을 입가에 가져가려는 세인의 손목에 커다란 손이 감겼다.
“내려놔요.”
세인은 눈을 크게 뜬 채 갑작스러운 이한의 태도에 의문을 드러냈다.
“네?”
“전복이 있어서.”
전복? 전복이란 말에 세인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그제야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릇 안을 확인했다.
정신이 하도 없어서 음식 확인하는 걸 잊었는데, 죽 그릇에 큼직하게 썰린 전복이 보였다.
이한이 직접 그릇을 치웠다.
“전복을 주의해 달라고 말해 뒀는데, 전달이 안 된 모양입니다.”
죽 그릇을 치운 그가 세인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내 새것을 쥐여 주었다.
“이걸 먹죠.”
이어 냉채를 앞으로 밀어주는 가지런한 손가락엔 망설임이 없었다.
이한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음식을 먹었다.
“이젠 괜찮을 겁니다.”
“……네.”
그가 깔끔하게 식기를 움직이는 모양을 보다가 세인도 이내 젓가락질을 했다.
하나 이미 입맛이 싹 달아난 뒤였다.
이한의 행동을 곱씹을수록 농락당하고 있단 기분이 짙어진 터다.
전복을 먹으면 새빨갛게 혓바늘이 돋는다는 걸 이한은 잊지 않고 있었다.
남처럼 말을 건네오면서, 알레르기 반응은 모른 체하지 않았다.
이한이 자신을 가지고 논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2년 전, 유학행을 알리던 때처럼.
이한을 흘긋거리며 세인은 연신 깨작거렸다.
“맛이 없나?”
어느새 그릇 하나를 전부 비운 이한이 미소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우환 있는 얼굴이네요. 아니면 이 자리가 별로인가.”
“편하진 않네요.”
세인이 지지 않고 빙긋 웃자, 이한이 중얼거렸다.
“난 기대했습니다. 귀국할 생각에 잠도 안 오던데.”
“저는 잘 잤습니다.”
세인이 눈에 힘을 주고 하는 말에 이한이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 가시를 세워 놓곤 아차 싶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옛 감정에 치우쳐, 그를 구슬려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에 소홀하고 말았다.
젓가락을 쥔 세인의 가느다란 손목에 이한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한식 좋아했잖아요. 편히 들죠.”
또 아는 척이었다. 구차한 것도 싫었고 휩쓸리는 것도 싫었다.
그녀가 테이블에 고정해 두었던 시선을 들어 이한을 마주 봤다.
“사람을 가지고 놀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누가 누굴.”
“서 이사님이 저를, 지금 그러고 계시잖아요.”
“지금 정세인 씨 말이 이해가 안 되는데.”
세인이 긴 한숨을 내쉴 때였다.
“기껏 만날 수 있게 됐는데 널 두고 장난을 하고 있다고, 내가.”
“…….”
“같잖은 장난으로 천금 같은 기회를 낭비할 것 같나.”
웃음기가 걷힌 이한의 표정이 어두웠다.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눈썹을 구기는 이한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오늘, 저랑 약속은 왜 잡으신 거예요?”
“그러는 정세인 씨는 왜 나오겠다고 했을까. 별로인 이 자리에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한은 잠자리를 원하는 세인의 목표를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가 이 정도로 질 낮은 사람이었다니.
기억이란 건 왜곡이 심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한이 오늘 잠자리에 긍정적인 답을 줄 게 아니라면,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는 게 낫지 않을까.
그저 조롱하기 위한 자리라면, 세인이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부모님께 큰 실망감을 안겨 드리겠지만, 이한이 싫다는데 그를 좌지우지할 능력 같은 건 없었다.
무엇보다 이한 앞에서 작아지는 이 순간이 너무나 비참했다.
“서 회장님께서 손주를 기다리세요.”
“아, 손주.”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시간 있으시면 호텔로…… 가요.”
세인은 가까스로 웃으며 밑바닥인 속을 내보이고 있는 스스로를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외웠다.
“자자는 말을 이렇게 들을 줄은 몰랐는데…….”
“정 잠자리가 싫으신 거면 시험관이나 인공수정에 협력해 주세요.”
“가관이네.”
말투가 예전의 이한으로 돌아와 있었다고 여긴 찰나, 기억의 한 부분이 세인의 머리를 강타했다.
‘우리 아이는 낳지 말자. 너만 예뻐하기도 힘들어.’
이한의 목소리가 생생한 게 이토록 끔찍할 수가.
“제문가 며느리 자리가 마음에 들긴 하나 봐. 마음에도 없는 잠자리를 원하는 걸 보면.”
일을 저질러 놓고 내빼듯 가방을 쥐려던 세인의 입술이 옅게 경련했다.
세인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억누르며 겨우 입술을 열었다.
“서이한 씨.”
“아…… 그렇게 불리니까.”
말을 끊은 이한이 커다란 손으로 아랫배를 느긋하게 쓸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장난스러워 보였다.
“애새끼처럼 또 꼴리네요. 몸 비비면, 잘 수는 있겠네.”
“서 이사님.”
“오길 잘했네. 정세인 씨 화난 얼굴을 다 보고.”
이한이 이마를 찌푸린 채 고개를 까딱했다.
세인은 시큰한 콧대를 찡그리며 울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서 이사님은 우리 결혼이 장난 같아요?”
“지금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일어나진 말고, 세인아.”
세인아.
과거를 불러오는 그 한마디에 가방을 찾던 그녀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불길처럼 얽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