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신혼 1화
2년 전, 스물두 살의 세인은 첫사랑을 했다.
단 3개월.
그 짧은 기간 동안 서이한이란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고, 처음으로 넘치도록 사랑받았다.
그와 만난 지 4개월 되었을 때, 결혼에 골인했다.
아무리 뜨거웠다지만 성급한 결혼이었다.
이한이 제문 그룹 회장의 손자란 걸 안 세인의 부모가 급하게 결혼을 밀어붙인 결과였다.
이상하게도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 이한은 점차 멀어져만 갔다.
급기야 이한은 매몰찬 태도로 세인을 내쳤다. 말 그대로 마음이 떠난 거다.
그리고 그는 결혼식 다음 날 바로, 후계자 수업을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그래, 쉽게 타오른 만큼 허무하게 사그라든 거겠지.
홀로 남은 세인은 씁쓸하게 현실을 마주했다.
이한에게 버림받은 기억은 세인을 이성적이고 메마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했다.
그러다 문득, 못된 이한의 기억이 되살아나 그녀를 괴롭히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잠든 세인의 꿈속으로 2년 전 기억 한 토막이 흘러들었다.
당시 그녀는 VIP 병실의 작달막한 스툴 위에 앉아 있었다.
생일의 주인공인 그녀가 아른대는 케이크 촛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앞으로 딸기를 얹은 케이크를 가져온 이한의 색조 옅은 눈동자가 예쁘게 빛났다.
‘세인아, 앞으론 생일 같이 지내자.’
스물두 살, 어린 세인의 눈가로 뜨끈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우는 줄도 몰랐다.
이한이 길쭉한 손가락으로 눈가를 매만진 뒤에야 울고 있단 걸 알았다.
‘이게 뭐예요…….’
‘울보였네, 몰랐는데.’
‘오빠가 가,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하니까 그러지.’
이한의 입가가 서서히 올라갔다.
‘이딴 게 뭐라고 울어.’
‘……난 생일을 축하받을 자격이 없어요.’
‘웃어, 정세인. 그래야 내가 살아.’
이한이 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마음 아팠던 세인이 그에게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짠짠. 일하세요. 일해야죠.
어디선가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세인의 눈꺼풀이 서서히 젖혀졌다.
“……아.”
이맛살을 찌푸리며 세인이 시트에 파묻혔던 몸을 일으켰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개꿈이야.
이런 꿈을 꾼 이유가 짐작이 가긴 했으나, 아직도 이한을 의식하고 있단 소리 같아서 기분이 몹시 별로였다.
-일하세요. 일해야죠. 짠짠.
아까부터 들려오는 우렁찬 벨 소리가 세인의 귓전을 두드렸다.
채 잠기운을 떨치기도 전에 완전히 이불을 걷고 일어난 세인은 협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발신인을 확인한 세인의 눈매가 설핏 굳었으나, 목소리는 상냥하게 흘러나왔다.
“네, 엄마. 일어나셨어요?”
-너 오늘 저녁 일, 잊지 않았지?
심은희, 세인의 모친이었다.
-왜 말이 없니?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함께 어려 있었다.
“그럼요. 어제도 말씀하신 걸 잊었겠어요.”
세인이 미소를 지으며 상냥히 대꾸했다.
오늘 저녁 6시. 서울 도심의 한정식집에서 이뤄질 남편과의 재회.
2년 만에 귀국하는 남편이 며칠간 한국에서 머무르다 갈 예정이란 사실을 부모를 통해 들었다.
세인이 함께 출국하지 못하는 실정이니, 오늘이라도 그를 침대로 끌어들이라는 게 부모의 바람이었고.
제문 그룹의 황태자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질 확률보다 그와 결혼에 성공할 확률이 더 희박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감히 오르지 못할 제문 그룹의 발톱 끝에 매달리는 데 성공한 부모는 이제 두 사람 사이에서 2세를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의 피가 섞인 아이가 제문 그룹의 일원이 되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은 거다.
안타깝게도 세인은 이토록 혈안이 된 부모님의 일생일대 목표를 망쳐 버릴 용기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 시간 여유 있게 출발하렴.
“네, 그럴게요.”
-숍 들어갈 때, 엄마한테 연락해. 아니다, 지금 연락 넣어놔야겠네.
은희가 극성스럽게 말했다.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병원의 병원장인 모친, 심은희.
세인은 그녀의 막내딸, 착한 딸, 고운 딸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실제로 은희에게 합격점을 받는 삶이 세인의 지향점이기도 했다.
-가기 전에 네 언니 한 번 들여다보고 엄마한테 문자 넣으렴.
“그럴게요.”
-옷은 보내준 거로 입어야 한다. 쓸데없이 바꿔 입지 말고. 알았니?
세인은 어젯밤 도착한 맞춤 드레스를 떠올리곤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늘 이한과의 식사를 위해 요란을 떨어 맞춘 원피스.
말이 원피스지 세인이 보기엔 속옷이나 다름없었다.
주로 말끔한 정장을 선호하는 세인에게 과감한 의상은 그녀의 한숨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네, 엄마.”
좋은 딸이 할 법한 대답을 내어놓고 전화를 끊었다. 세인은 시계를 확인하곤 욕실로 향했다.
세안 후, 언니 혜인의 객실에 방문하여 식사와 세안을 돕는다.
이어 세인이 거주 중인 이곳, 호텔 더블나인의 직원으로 출근.
퇴근 후엔 다시 언니 혜인의 식사와 목욕을 돕는다.
정해진 루틴 끝에 이한과의 식사 자리가 있었다.
세인은 오늘 하루가 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찌감치 식사 자리에 나온 세인은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들의 행렬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심장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이 바닥에선 나이가 차면 결혼 시장의 상품이 되어 맞선을 본다.
세인도 비슷했다.
부모의 눈에 차는 집안 남자와 혼인한 뒤, 몸이 불편한 언니 혜인을 계속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걸 조금 일찍 했을 뿐인데, 많은 것이 어그러졌다.
“하…….”
옅게 발색한 입술 새로 한숨이 샜다.
세인은 비어 있는 테이블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2년 전, 외롭기만 하던 세인의 세상에 찾아와 애정을 알게 한 이한.
그는 평생 편히 쉰 적 없는 세인을 처음으로 위로한 이였다.
‘정혜인이 다친 게 왜 네 탓이야? X같이 사고 낸 가해자 잘못이지.’
세인의 언니 혜인은 어린 시절 장애를 얻었다.
세인을 구하기 위해 대신 트럭으로 뛰어든 대가였다.
‘간병은 전문가한테 맡기고, 너는 네 인생 살아야지.’
‘언제까지 정혜인 뒤만 따라다니려고. 이게 정말 네가 원하는 일이야?’
이한은 다 때려치우란 말을 서슴없이 하며 수몰 직전의 세인에게 숨구멍을 내주었다.
‘절대 네 잘못 아니야. 멍청한 생각하지 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부모님도 용서 못 한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가족도 용납하지 못한 걸 이한이 해주었다.
기댈 곳 없이 자란 세인의 마음이 열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한의 모든 것에 설레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포만감이 느껴졌고 시도 때도 없이 미소가 흘러나왔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울 만큼 이한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그래서 이별이 찾아왔을 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가 세인을 외면했을 땐,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혼자 도려내져 세상 밖으로 던져진 것처럼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 버렸다.
그렇게 다시 혼자였다.
처음 손에 쥐어 본 달콤한 사탕이 다 녹아버려 형체도 없어졌단 걸 알았을 때의 상실감은, 지금까지도 세인을 괴롭게 했다.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더니 남이 된 것처럼 정을 떼고 증발해 버린 남자.
사람에 대한 불신만 심어주고 끝난 이한과의 첫사랑엔 마침표가 찍혔다.
이한과 결혼만 안 했더라면, 빛바랜 추억에서 멈췄을 터였다.
그러나 이한과는 말 그대로 정략혼을 했다.
세인은 대형 병원의 병원장인 어머니와 조직과 연루된 금융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아래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렇다 한들, 대한민국의 최상위 계급인 이한의 발끝에는 미치지 못할 배경이었다.
어딜 보나 세인은 이한의 결혼 상대로 부족했다.
그러나 부모는 온갖 능력을 발휘해 고작 스물두 살이었던 딸을, 제문가의 며느리로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세인은 강자들의 섭리를 잘 알았다.
얻을 게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이한도 바라는 게 있기에 제게 접촉한 거란 깨달음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거다.
첫사랑은 결국, 세인의 외사랑이었다.
세인도 비즈니스에 응하는 마음가짐을 되새기며 허리를 똑바로 폈다.
벌써 산부인과 전문의를 섭외하는 둥, 헛바람이 들어간 부모의 기대감을 충족하려면 이한과 잠자리도 불사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세인에겐 첫사랑에게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 부모의 희망이 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유리창에 비친 파리한 여자의 안색에 헛웃음이 났다.
늘 입는 정장이 아닌 화려한 원피스가 못내 낯설었다.
가슴골이 보일락 말락 하는, 허벅지가 반이나 드러난 옷.
서구형의 육감적인 여성을 좋아한다는 이한의 취향에 맞춘 차림새였다.
세인은 아버지의 지시 아래, 이한이 귀국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일주일 전부터 옷과 액세서리를 준비하고 단장에 힘썼다.
그녀의 의견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준비는 참으로 거창했다.
그렇게 고심해서 고른 원피스 자락에 주름이 갈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세인은 똑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서이한. 애증의 첫사랑 그가.
색이 약간 옅은 다갈색 눈동자와 커다란 키.
눈썹까지 내려온 머리칼.
결혼 후 헤어져 있던 2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히 잘난 얼굴이었다.
청량했던 이한의 미소는 어느덧 어른 남자의 여유로 변해 있었다. 흘러간 시간이 새삼 실감됐다.
“시간을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정세인 씨보다 늦었네요.”
쓰지 않던 존댓말이 세인의 가슴으로 아프게 날아들었다.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 딱 벌어진 어깨와 시원한 걸음걸이는 예전과 같았다.
다만 2년 전보다 눈매가 깊어졌고, 몸이 더 단단해졌다. 키도 좀 더 컸을까.
세인은 그를 훑다가 너무 집요하게 쳐다본 것 같아서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사이 이한이 단정한 손짓으로 재킷 단추를 풀고 자리에 앉았다.
익숙한 이한의 향이 느껴졌다. 시원하면서 깨끗한 향.
그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단 걸 깨달은 세인은 급속도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아뇨. 저도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말끝이 조금 떨린 것 같았다.
“길이 조금 막히더라고.”
“괜찮습니다.”
세인이 기계처럼 입꼬리를 올려 평정을 가장한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