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8. to my little Esthel (20/21)

외전8. to my little Esthel

「나의 작은 에스델에게.

안녕, 에스델. 눈물로 빚어 낸 서러운 나의 첫 아이.

어미의 행복을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였던 너의 그 눈물겹도록 사랑스러운 몸짓을, 이제는 내가 모두 기억한단다.

차가운 첫눈과 함께 다시 돌아온 나의 아가, 작은 에스델.

이제는 엄마의 품속에서 영원토록 행복해지렴.

그저, 행복하기만 하렴.」

활짝 열린 창밖으로 포슬거리는 하얀 눈송이가 춤을 추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손을 내밀자, 손바닥 위로 새하얀 눈송이가 살포시 닿았다가 녹아내리며 살갗에 스며들기를 반복했다. 손끝이 빳빳해질 만큼 시린 공기 속에서도, 차갑다는 느낌보다는 간지럽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이상했다.

첫눈이 내리던 그날 이후로, 클로이는 줄곧 자그마한 여자아이를 생각해 왔다.

성녀 레테, 라나 신의 뜻으로 인간들의 세계에 떨어졌다는 그 작은 아이는 저와 함께 첫눈을 맞으며 눈물을 터뜨렸다.

붉어진 눈가를 벅벅 문지르던 손등 아래로, 그치지 않은 눈물이 연신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 작은 몸을 안아 주었을 때.

쿵-!

심장이 거세게 요동을 치며 뛰어 댔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울지 말라며 아이의 등을 쓸어 주는 내내, 심장이 아프게 뛰어 댔다. 정말 이상했다.

성녀는 처음 만났던 날부터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던 사람이었다. 두 눈이 마주치던 순간 전해지던 묘한 그리움, 꼭 오랫동안 알던 사이였던 것처럼 익숙한 느낌. 그것들이 도무지 성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레테……. 성녀 레테…….”

클로이는 성녀의 이름을 여러 번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철자들의 조합이 아닐 수 없다.

그냥 이름을 읊조린 것뿐인데, 어째서 눈물이 날 것처럼 가슴이 옴찔거리는 걸까.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온통 새하얀 눈송이들이 보였다. 자꾸만 그 위로 서럽게 울던 성녀의 모습이 겹쳐지며 가슴이 아려왔다.

“클로이.”

낮은 음성과 함께 그녀의 뒤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상념을 깨뜨리며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막 씻고 나온 건지 남자에게서 청량한 내음이 물씬 풍기었다. 대답을 하지 않자 굵은 팔뚝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허리를 감싸며 뻗어 나온 두 손이 벌어진 가운의 앞섶을 굳게 여며 주었다.

감기에 걸리지 말라며 다정한 걱정을 담아 움직이는 저 손은 불과 한 시간 전에 제멋대로 그녀의 가운을 풀어 재끼며 파고들었던 고약한 손과 같은 손이었다. 애정이 가득 담긴 그의 손길에 가슴에 머물던 아릿한 감각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레이몬드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그 단단하고 곧은 애정으로 그녀가 모든 슬픔을 이겨 낼 수 있게 힘이 되어 주는 사람.

마저 몸을 돌려 그와 마주선 클로이는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었다.

이마 위로 들러붙은 젖은 머리칼에는 아직 남은 물기가 색스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젖은 앞머리를 매만지자, 눈에 띄게 꿀렁거리는 그의 목울대가 보였다.

클로이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야말로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이러고 있어요.”

책망하듯 속삭이며 손을 떼자 그가 아쉬운 눈빛을 했다.

클로이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레이몬드의 억센 두 팔이 스르륵 떨어졌다.

“나는 고작 이런 걸로 감기에 걸리지 않아.”

심통이 난 것을 채 감추지 못한 음성이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클로이는 그런 그가 꽤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두 눈을 나른하게 휘었다.

그 작은 변화에 반응하듯, 레이몬드의 몸이 움찔거렸다. 물기가 모두 마르지 않아 미끄러우면서도 단단한 그의 가슴팍을 은근하게 밀어내며 클로이가 속삭였다.

“다시 씻고 싶은 게 아니라면 가운이라도 제대로 걸쳐요.”

“……다시 씻을 수 있게 해 줄 건가?”

“그리고 당신은 오전에 있을 회의에 지각을 하게 되겠죠, 레이몬드.”

“…….”

이어진 클로이의 말에 레이몬드가 정말 많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바로 순응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예쁘게 접힌 새 가운을 몸에 걸쳤다.

흘깃 시계를 보니 회의 시간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다. 레이몬드는 그때까지 최대한 길게 시간을 끌며 그녀의 방에서 노닥거릴 심산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다시금 창가에 서서 한 곳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클로이의 모습이 보였다. 유난히도 지켜 주고 싶은 느낌이 드는 어딘가 처연한 분위기의 옆모습이었다.

레이몬드는 아주 천천히 그녀의 모습을 감상했다. 스무 살의 그녀는 어느덧 서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자꾸만 주제를 모르고 그녀에게 반해 구애하는 덜떨어진 남자들 때문에 이따금씩 짜증이 치솟기도 했지만, 어째서 그들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감히 그녀를 사랑한다 외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기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야말로 가장 사랑에 눈이 먼 덜떨어진 남자 중 한 명이었기에.

바람결에 하늘하늘 흩날리는 은사처럼 고운 머리카락이 그의 시선을 강하게 당겼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 레이몬드는 손을 뻗어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단정하게 넘겨 주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옆얼굴이 유독 아슬아슬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애달픈 느낌에 동화될 것만 같았다.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레이몬드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얼굴로,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

클로이는 대답 대신 레이몬드를 한번 돌아보고는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평소와 사뭇 다른 그녀의 모습에 레이몬드는 홀린 듯이 그녀의 옆에서 함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새하얀 눈밭 위를 뛰어다니는 두 명의 아이가 보였다.

“엘리엇……과 성녀로군.”

레테가 엘리엇의 뒤를 쫓고 있었다. 성녀의 손에는 엘리엇이 어릴 적 쓰던 목검이 들려 있었다. 레이몬드가 처음으로 선물해 준 목검이라 애지중지하던 것인데, 용케도 성녀에게 그것을 빌려 주었나 보다.

목검을 붕붕 휘두르며 엘리엇을 쫓고 있는 성녀의 기세가 제법 흉흉했기 때문에, 레이몬드는 엘리엇이 레테에게 붙잡히지 않기를 기원했다.

“이상해요, 레이.”

클로이가 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혼자 있으면 자꾸…… 성녀님이 생각나요.”

엘리엇의 웃음소리와 성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클로이는 창틀을 손으로 짚으며 레이몬드를 돌아봤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며칠 전부터는 계속 성녀님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꼭 당신을 생각할 때처럼 가슴이 설레면서, 또 시큰거리고…….”

“……신기하군.”

클로이의 말에 잠시 멈칫거리던 레이몬드가 그녀와 닮은 먹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그랬어.”

레이몬드는 창틀 위에 놓인 클로이의 손등을 뭉근하게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대와 함께 알현실에서 성녀를 처음 보았을 때…….”

지끈.

거기까지 말을 잇던 레이몬드는 문득 이는 두통에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지끈, 지끈.

어지간한 병에는 걸리지 않는 그인데, 갑작스러운 두통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얼핏 환각과 환청이 그의 주위를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황궁의 온실, 그 가운데 홀로 눈이 부시게 빛나는 클로이와 그녀의 품에 안긴 아주아주 자그마한 아기…….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 천사들의 성이 있어요.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나긋나긋한 노랫소리가 온 공간을 메우던 때였다.

“레이몬드?”

“……!”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잠시 눈앞을 스치던 환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레이몬드는 짧게 숨을 들이쉬며 현실로 돌아왔다.

“왜 그래요, 레이몬드?”

클로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레이몬드는 두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클로이의 침실이고, 그의 앞에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조금 흐트러진 자태로 함께 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로이가 이내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 귀엽지요?”

“응?”

“성녀님 말이에요.”

“아…….”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레이몬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모습을 보면, 라미에 교의 성녀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요. 그냥 우리 엘리엇과 이브처럼 평범한 그 나이대의 아이 같은데…….”

성녀 레테는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역사 속에 기록된 이제까지의 성녀들과 달리, 인간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겨울 숲의 커다란 얼음 속에서 발견된 성녀 레테…….

눈을 뜨기 직전의 일들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기에 인간으로서의 시간 또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동안 역사 속에 등장했던 성녀들이 평범한 인간으로 지내다가 각성 후 새로운 이름을 얻어 신의 대리자가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녀 또한 분명 인간으로서의 시간이 있었을 텐데…….

레이몬드는 성녀에 대해 보고받았던 것을 떠올리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차가운 얼음 속에서 눈을 떴다고 했었지.”

“라나 신은 정말 나빠요!”

그 말에 클로이가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저렇게 어린 성녀님을 그 차가운 얼음 속에 가둬 둘 수 있는 거지요!”

“침착해, 클로이. 그래도 성녀니까 추위를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을…….”

“게다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잖아요!”

레이몬드가 그녀를 달래고자 하였으나, 클로이는 진정하는 대신 더욱 화를 내며 씩씩거렸다.

“정말 너무해요. 성녀님에게도 분명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어지간한 일에 화를 내지 않는 그녀가 이렇게 씩씩거리는 모습에, 레이몬드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라나 신이 잘못했군.”

레이몬드가 클로이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대답했다. 그의 동조에 클로이가 조금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어디로 간 것인지 레테와 엘리엇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두 아이의 자그마한 발자국이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클로이가 먼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레이몬드와 다시금 마주보게 되었다.

“레이몬드?”

함께 몸을 돌리지 않고 앞을 막고 있는 그의 모습에 클로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클로이. 다시 생각해 봤는데…….”

클로이의 손을 감싸 쥐고 있는 레이몬드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불현듯 위험한 빛깔을 띠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잠자코 그의 말을 듣던 클로이가 눈가를 찡그렸다.

“당신이 한 시간으로 끝낼 리 없잖아요.”

“할 수 있어.”

“하지만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해 놓고 결국은…….”

“클로이.”

클로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큼 다가온 레이몬드가 그녀의 몸을 한 팔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졸지에 단단한 가슴팍 위로 안긴 클로이는 피시식 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갈망하고 있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퍽 사랑스러워서, 가만히 손을 뻗은 그녀는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더듬었다.

“가엾은 시종들에게 또다시 목욕물을 데우라 할 생각인가요?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나쁜 황제였네요, 레이몬드.”

“찬물로 씻으면 돼. 아니, 찬물로 씻을게.”

두터운 손끝이 클로이의 가운을 헐겁게 만들었다. 드러나는 어깨 위로 간밤에 그가 만들어 낸 붉은 흔적들이 여직 남아 있었다.

“잠깐만요, 레이! 창이 열려 있……!”

촤르륵, 그녀의 뒤로 커튼이 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클로이가 입술을 다물자, 레이몬드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이제, 모두 해결되었나?”

그의 얼굴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기울어졌다. 붉은 흔적 위에 새로운 흔적을 덧그리며 레이몬드가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위로 파묻었다.

“하아…….”

나직한 숨을 토해 낸 클로이가 레이몬드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느슨한 미소를 지었다.

“회의에 늦어도 나는 몰라요.”

“방금 그건, 허락의 말인가?”

“글쎄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클로이가 보다 깊이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물기가 남아 촉촉한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길 적마다 간지럽고 차가운 감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더 동하게 만들어 봐요, 아스타 제국의 황제 폐하.”

“분부대로.”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허공 위로 들렸다. 비명 대신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안아 들고서 레이몬드는 자박자박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 * *

‘그들도 곧 나를 잊을 거야. 어차피 난 망각이니까…… 모두가 나를 잊게 되겠지.’

‘아니요, 어느 누구도 당신을 잊지 못하게 할 겁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잊지 못할 거라고, 그렇게 단정적으로.

그러나 결국 그녀는 잊히고 말았다. 미하일은 그것이 모두 자신의 실책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그래서 그녀의 모습을 세상에 남겼더라면…… 그럼 그녀는 잊히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모두를 잊은 것은 상관없었다. 힘든 기억은 모두 사라졌으니, 그 위로 행복한 기억을 새로이 심어 주면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굉장히 화가 났다. 그녀의 그 갸륵하고 서러운 희생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미하일을 화나게 했다.

하다못해 모두에게 잊힌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만큼은……. 그녀가 그토록 잊히지 않길 원했던 이들에게만큼은…….

“젠장.”

평생 욕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을 것만 같은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욕지기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 곱씹는 것이 무의미한 가정이다. 이미 그녀는 많은 이들에게 잊혔고,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감히 제가 거스를 수 없는 건데.

“신의 뜻…….”

불현듯 그의 생각이 어느 한 대목에서 멈추었다.

“신의 뜻이라…….”

소멸 전의 성녀 레테는 자신의 망각을 ‘라나 신의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래서 그녀가 끝내 소멸된 거라면.

“그렇다면 소멸된 영혼을 다시 세상으로 보낸 것 또한 신의 뜻이 아닌가.”

신에게서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존재가 성녀다. 그렇게 한 번 소멸하여 신의 품으로 돌아갔던 성녀의 영혼을, 신은 다시 인간들의 세상으로 돌려보냈다.

“설마.”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미하일의 푸른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이 났다. 뭐, 그의 추측이 틀렸다 하더라도 딱히 상관이 없었다.

제가 바라는 것이 신의 뜻이든, 소멸 전 그녀의 뜻이든, 혹은 미하일 본인의 뜻이든. 한 번 앞으로의 방향을 정했으니, 이제 움직일 때였다. 미하일은 일단 황제와 황후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후를 찾아간 미하일은 그녀가 자리를 비웠다는 답변을 받고 아쉽게 물러나야 했다. 황제는 오전부터 이어진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방문을 알리고 터덜터덜 돌아가던 미하일은 저 멀리 은밀하게 움직이는 클로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

미하일은 잠시 자신이 잘못 본 건가 하여 두 눈을 끔뻑였다.

분명 수풀 사이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스타 제국의 황후 클로이였고,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성녀?’

성녀가 새하얀 눈밭 위에 앉아 눈을 뭉치고 있었다. 분명 아침에 나갈 때에는 엘리엇 황태자와 함께였는데, 엘리엇이 가 버린 것인지 그녀는 혼자 눈 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추울 텐데.’

두 눈을 갸르스름하게 뜨고 쳐다보자 성녀의 주위로 희미한 빛무리가 보였다. 의식하고 발현한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성력이 그녀를 춥지 않게 보호해 주는 모양이었다.

흘깃 고개를 돌리자,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서 그런 성녀를 지켜보고 있는 클로이의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그녀의 손에 두터운 모피가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그것을 레테에게 가져다줘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저런 성격이었나?’

미하일은 새삼 새로운 시선으로 클로이를 쳐다보았다. 조금 더 우아하고 귀족적인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평범한 어머니 같았다.

‘아, 그래, 어머니……. 저 여자가 성녀의 어머니였지.’

비록 그녀 자신은 모조리 잊어 버렸으니 모르겠지만, 그녀는 분명 레테의 어머니였다. 그것을 인지하자, 미하일의 가슴 위로 알싸한 감각이 번져 나갔다.

어머니와 딸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게 신의 뜻일 리 없었다. 자신의 결정을 소멸 전의 그녀가 알게 된다면 분명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녀가 무엇을 위해 희생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하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 아닌 그녀였다.

라나 신의 기록자라는 이름으로, 미하일은 성녀의 출현 직전까지 대륙에서 가장 신성한 이 취급을 받아 왔다.

그러나 미하일은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상냥하고 성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잠시 클로이를 부를까 고민하였지만, 그녀와 레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대로 몸을 돌렸다.

* * *

미하일은 겨울이 끝날 때까지 황궁에 머무를 거라고 말했다.

레테는 자신이 처음 눈을 떴던 따뜻한 교단도 참 좋았지만, 그곳만큼이나 이곳 황궁도 좋았다. 무엇보다 황궁에는 교단과 달리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있었다.

엘리엇 황태자는 조금 어긋났던 첫 인상과 달리 나이에 비해 점잖았다. 그렇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레테와 단둘이 있을 때 그는 조금 더 심술궂어지곤 했다.

이브 황자는 정말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각기 황태자와 황자라는 지위에 있는 만큼,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바빴다. 레테는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앙증맞은 두 손이 바닥에 쌓인 눈을 뭉쳤다. 레테는 눈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가 않아서 속상했다.

“눈사람도 만들지 못하는 성녀라니. 사람들이 이걸 알게 되면 난 틀림없이 놀림거리가 될 거야. 그럴 순 없어!”

레테는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투지를 불태웠다. 이왕이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눈사람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왜인지 쉽지가 않았다.

“이렇게 뭉치면 되는 게 아닌 건가……?”

레테가 굉장히 심각해진 표정으로 손바닥 아래에서 푸스스 흩어지는 눈뭉치를 노려볼 때였다.

사박, 사박.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클로이 황후가 그녀를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어……? 어어……! 클로이 황후님!”

클로이를 발견한 레테가 활짝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눈송이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디 가시는 길인가요?”

“네, 그냥…… 음,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클로이는 약하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레테기 울상이 되어 물었다.

“감기에 걸린 건 아니지요, 황후님? 방금 기침을 한 것도 그렇고…… 귓불도 빨개졌어요.”

자신을 걱정해 주는 그 따뜻한 마음씨에 클로이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는 아주 건강해요. 하지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성녀님.”

잠시 머뭇거리던 클로이가 용기를 내어 들고 있던 모피를 내밀었다.

“……?”

레테는 그것이 무슨 용도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어깨에 망토처럼 두르는 거예요. 성녀님이 조금 추워 보여서…….”

“……!”

그 설명에 레테의 눈이 토끼처럼 땡그래졌다. 꼭 감동을 받은 것처럼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러더니 돌연 기침을 시작했다.

“엣취! 엣취!”

“세상에, 괜찮으세요, 성녀님?”

깜짝 놀란 클로이가 레테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묻자, 레테가 고개를 푹 숙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 조금 추운 것 같아요.”

사실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 희미한 빛무리가 그녀의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시켜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테는 처음 받는 걱정과 친절이 너무 좋아서 앙큼하게도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클로이의 두 눈꼬리가 아래로 추욱 늘어졌다.

“이런.”

다소 다급한 손길로, 그녀가 레테의 어깨 위에 모피를 둘러 주었다. 그러고는 양쪽 끄트머리에 달린 리본을 당겨 나비 모양으로 단단하게 묶어 주었다.

“아스타 황성의 겨울은 꽤 추운 편이에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꼭꼭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모피를 더욱 바짝 여며 주는 손길에 레테는 어쩐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수줍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해서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그리고 바깥에 너무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아요.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았어요.”

“아침부터 계속 들어가지 않고 눈 위에서 놀았잖아요.”

“앗, 그걸 어떻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설득하던 클로이가 레테의 물음에 멈칫했다. 그러더니 레테와 함께 덩달아 수줍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스타 제국의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제가 모르는 건 없어요.”

그러면서 슬쩍 레테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행히도 레테는 그녀가 온종일 자신을 지켜봤단 걸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모르는 게 없다니, 클로이 황후님은 정말 대단해요!”

대신 그녀의 대답에 신기해하며 양손으로 박수를 쳤다. 클로이는 어쩐지 머쓱해져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녹여요.”

“아, 하지만…….”

레테는 곧바로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대신 방금 전까지 자신이 만들던 눈뭉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눈사람을 완성해야 하는데…….”

“눈사람이요?”

클로이가 두 눈을 끔뻑이더니 레테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차마 눈사람을 만들려고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괴상한 눈뭉치가 시선에 닿았다.

“음…….”

이상했다. 엉터리로 뭉쳐진 괴상한 눈뭉치를 보자 레테가 더욱 귀엽게 느껴졌다. 클로이는 이내 빙그레 웃으며 레테에게 제안했다.

“그럼 제가 눈사람 만드는 걸 도와줄 테니, 같이 만들고 나서 따뜻한 곳으로 돌아갈래요?”

“황후님이 직접 도와주시는 거예요?”

“물론이죠.”

“저, 정말 좋아요!”

돌연 두 눈을 반짝 빛낸 레테가 클로이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신이 나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클로이 황후님과 함께 만드는 눈사람이라니! 에녹과 미하일이 레테를 엄청 부러워할 거예요!”

기뻐하는 레테의 모습에 클로이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자, 이쪽으로 와 보세요, 성녀님.”

클로이는 거추장스러운 장갑을 벗고는 맨손으로 하얀 눈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의 맞은편에 함께 쭈그려 앉은 레테도 클로이보다 조금 더 작은 손으로 함께 눈을 쓸어 모았다. 그러고는 클로이가 하는 것을 흉내 내며 자그마한 눈뭉치를 만들어 탄탄하게 다졌다.

“레테가 만드는 건 클로이 황후님이 만든 것처럼 예쁘게 되지 않는 것 같아요.”

“벌써 실망하지 마세요. 이걸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눈 위에 굴리듯이 하면…….”

“이, 이렇게요?”

클로이가 몇 번 시범을 보였으나, 레테는 둥그런 눈뭉치를 만드는 데 계속 실패했다. 낙담한 레테의 표정에 클로이가 짧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이 스치며 레테의 눈뭉치가 점차 동그란 모양으로 굴려졌다.

“아……!”

어느덧 클로이의 것처럼 동그래진 자신의 눈뭉치를 보며 레테가 활짝 웃었다.

“이것 보세요, 황후님! 레테의 눈뭉치도 황후님의 것처럼 예뻐졌어요!”

“그러게요. 성녀님을 닮아서 귀엽고 예쁜 눈뭉치예요.”

클로이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눈뭉치가 점점 몸집을 불렸다.

“잠시만요, 성녀님. 그렇게 계속 굴리기만 하면…….”

레테가 굴리던 눈뭉치는 결국엔 그녀의 몸만큼이나 커졌다. 클로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레테는 그저 신이 나서 헤헤 웃었다.

“눈덩이가 레테의 키만큼 커졌어요!”

“……정말 커졌네요.”

클로이는 피시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두 개의 눈덩이를 쳐다보았다.

“눈사람을 만들려면 이걸 이렇게 올려야 하는데…… 아무래도 우리 둘만의 힘으로는 힘들겠지요?”

“에이, 그냥 이렇게 들면…….”

별것 아니라는 듯 양손으로 눈덩이를 들어 보려던 레테는 생각보다 무거운 무게에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 이거 왜 이렇게 무거운 거예요?”

“일단 이렇게 두고 나중에 레이몬드에게 부탁해야겠어요.”

그냥 지나가는 기사들에게 부탁을 해도 되지만, 클로이는 다른 기사들이 아닌 레이몬드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많이 바쁘잖아요.”

“성녀님의 눈사람인데, 틀림없이 도와주실 거예요. 그럼 이제 들어갈까요?”

클로이는 빙긋 웃으며 레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레테가 활짝 웃으며 그 손을 붙잡았다.

“네!”

레테의 작은 손은 오랜 시간 동안 눈 위에서 논 것치고는 차갑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로이는 ‘역시 성녀님이라 보통 사람들과 다르구나.’ 라고 곧바로 납득했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길 위로 성인 여성의 커다란 발자국과 어린 소녀의 자그마한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다.

* * *

레테는 따뜻한 난롯가에서 클로이를 기다렸다.

몸을 흔들면 함께 앞뒤로 흔들리는 안락의자가 재미있어서, 레테는 연신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무릎을 덮고 있던 담요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레테가 발끝에 떨어진 담요를 줍기 위해 몸을 굽히려 할 적에,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클로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어머, 그냥 앉아 계세요.”

빠르게 걸어온 클로이가 들고 있던 쟁반을 옆에 내려놓고는 흘러내린 담요를 위쪽으로 끌어올려 주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쟁반에서 달콤한 향기가 물씬 번졌다.

레테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것을 보자, 클로이가 작게 웃으며 컵을 건넸다.

“따뜻한 코코아예요.”

“코코아? 그게 뭐예요?”

레테는 양손으로 코코아가 담긴 컵을 붙잡고는 코를 킁킁거렸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연기와 함께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자 기분이 좋아졌다.

“한번 마셔 봐요. 몸이 따뜻해질 거예요.”

클로이의 말에 레테는 의심 없이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두 눈을 반짝거리며 클로이를 바라봤다.

“정말 맛있어요!”

“성녀님의 입맛에 맞아 다행이에요.”

클로이는 포스스 웃으며 레테의 앞에 마주앉았다.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레테를 위해 주방에 내려가 코코아를 준비해 오면서도, 혹시나 레테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꽤 오랫동안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본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는 레이몬드를 대할 때에도 이 정도로 눈치를 살피지는 않았다. 그런데 왠지…… 성녀를 대할 때면 모든 것이 조심스러워진다.

‘그건 아마도 성녀님이 너무 작기 때문일 거야.’

엘리엇과 이브를 대할 때와는 또 달랐다. 작고 귀여운 것은 두 황자나 성녀나 다를 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성녀를 대면할 때면 유달리 가슴이 뭉클해졌다.

역사 속에서 ‘성녀’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강하고 위대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런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여삐 웃고 있는 저 사랑스러운 얼굴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게 했다.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요. 레테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컵 안에 든 코코아를 호로록 마시며, 레테가 예쁘게 말했다.

“별말씀을요. 저도 성녀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서 즐거웠는걸요.”

“정말이요?”

“네, 그럼요. 제가 언제 이렇게 귀여운 성녀님과 함께 눈 놀이를 하겠어요.”

귀엽다는 말에 레테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클로이 황후님은 정말 친절하셔요.”

진심으로 기뻐하며, 레테가 수줍게 말했다.

“레테가 이제까지 만나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친절한 분이세요! 아, 물론…… 저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많은 사람들은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얼음 속에서 발견되셨다고 들었어요.”

“네? 아, 네! 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미하일이 그렇게 말해 줬어요. 얼음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레테가 성녀로 발견되었을 때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클로이는 이렇게 작은 레테가 그 추운 얼음 속에 있었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춥지는 않았나요?”

“전혀요. 기억도 안 나는걸요.”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클로이가 의자에서 일어나 레테의 앞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가 무릎 위에 덮고 있던 담요를 더욱 바짝 당겨 덮어 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성녀님을 안아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에……?”

예상하지 못한 클로이의 제안에 레테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 불편하시다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다만, 성녀님이 혼자서 얼음 속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안아 드리고 싶어서…….”

막상 입 밖으로 말을 내뱉고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불편할 리가요! 안아 주세요!”

레테는 새빨개진 얼굴로 잽싸게 대답했다. 거절을 했다가는 클로이의 아름다운 얼굴이 상심으로 물들 것 같았다. 그건 너무 싫었다.

레테의 허락을 들은 클로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클로이는 길쭉한 두 팔을 뻗어 레테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레테가 너무 작아서, 가득 끌어안은 그녀의 두 팔이 한참 남았다.

두근, 두근, 콩닥, 콩닥.

두 사람의 심박 소리가 한데 섞여 울리기 시작했다. 클로이는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두 눈에 힘을 바짝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레테도 마찬가지였다.

성녀와 함께 있다는 게, 황후와 함께 있다는 게, 어째서 이렇게 슬프고 벅차는지 두 사람은 알 수 없었다.

“엘리엇 황태자님과 이브 황자님은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가만히 클로이에게 안겨 있던 레테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내 작은 몸을 끌어안고 있던 클로이가 고개를 들어 레테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상냥하고 아름다우신 분을 어머니로 두었으니까요. 제게도 만약 어머니가 있었다면 클로이 황후님처럼 따뜻하게 안아 주셨을까요?”

“…….”

그 말에 클로이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그 길쭉한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것 같은 그녀의 표정에 레테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저는…… 이상한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라 그냥…….”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레테의 모습에 아이를 끌어안은 클로이의 양 팔에 힘이 더욱 바짝 들어갔다.

“당연한 말씀을 하세요, 성녀님.”

클로이는 최대한 레테가 안심할 수 있도록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성녀님이라면 누구든지 사랑하지 않고 배기지 못할 거예요. 하루에 열 번, 아니, 스무 번도 넘게 안아 주었을 걸요?”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답하자, 레테도 그녀를 따라 자그맣게 웃었다.

레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코코아를 마저 호로록 마시며,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제국에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처음에 미하일이 제국에 가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만나야 한다고 알려 줬을 때는, 솔직히 걱정됐었거든요. 두 분 모두 엄청 굉장한 분들이잖아요. 나는 이름만 성녀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앤데…… 혹시나 실수라도 할까 봐 조금 무서웠어요.”

클로이는 이제 빈 코코아 컵을 받아 쟁반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레테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고, 함께 첫 눈도 맞아 주시고, 눈사람도 만들어 주시고, 맛있는 코코아도 주시고……. 너무 기쁜 일들만 가득했어요. 클로이 황후님의 친절을 아주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할 거예요.”

정말 사소한 일들이었는데, 그런 것에 고마워하는 레테의 말이 클로이의 가슴을 울렸다.

이러다 아까부터 자꾸만 가슴을 먹먹하게 물들이는 기묘한 감정에 취해 추태를 보일 것 같아서, 클로이는 슬픈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코코아를 더 마실래요?”

클로이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레테에게 자신의 코코아를 건넸다. 아직 입을 대지 않은 그녀의 컵에는 조금 식었지만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네! 아, 하지만 이건 클로이 황후님의 코코안데…….”

신이 나서 대답하던 레테가 그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클로이는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셔요, 성녀님.”

코코아가 담긴 컵을 자그마한 손에 쥐여 주자, 레테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해맑은 표정으로 방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클로이는 아주 잠시 그 함박웃음에 시선을 빼앗긴 채로 멍하니 레테만을 쳐다보았다. 컵 안에 가득 찬 코코아를 홀짝 맛보며 기뻐하는 모습에 심장에 뻐근했다.

‘너무…… 귀엽잖아.’

클로이의 시녀 중 한 명인 제이시는 가끔 클로이를 쳐다보며 가슴을 쥐어뜯는 시늉을 할 때가 있었다.

‘황후 폐하의 미모 때문에 심장이 뻐근해진다고요! 이러다 심장병에 걸려 요절할 지도 몰라요!’라는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럴 때마다 클로이는 키득키득 웃고 말았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이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테를 볼 때마다 어딘가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과 별개로, 코코아를 마시는 레테의 모습은 너무나 귀여웠다.

‘앞으로 성녀님의 식사가 끝날 때마다 후식으로 코코아를 준비하라고 주방에 일러둬야겠어.’

열심히 코코아를 마시던 레테가 클로이와 눈이 마주치고는 쑥스러워하며 헤헤 웃었다. 너무 전투적으로 코코아를 마신 것 같아 부끄러웠다.

두 사람이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는 때, 레이몬드가 도착했다. 오전부터 회의에 시달린 그는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클로이, 네가 주는 휴식이 필요…… 아, 성녀도 함께 계셨군.”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서던 그가 레테를 발견하고는 빙그레 입꼬리를 말았다.

“아침에 엘리엇이 성녀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던데.”

“앗, 그, 그걸 봤나요?”

레테가 민망해하며 되묻자, 레이몬드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침에 멀리서 보았던 도망치는 엘리엇과 목검을 붕붕 흔들고 쫓아가던 레테의 모습이 다시 생각났기 때문이다.

“엘리엇이 무례하게 행동한다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시오.”

“그…… 엘리엇 황태자님은 무례하지 않았어요. 그냥 함께 장난을 치던 거였어요.”

부끄러운 마음에 말투가 새침해졌다. 레이몬드는 그런 레테가 꼭 그 또래의 어린아이 같아서 마냥 귀엽게 느껴졌다.

“그럼 다행이군. 엘리엇이 나를 닮지 않아 보기보다 짓궂은 면이 있다오.”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클로이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시선이 클로이에게로 모였다. 웃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쳐다보던 클로이는 문득 둘의 눈동자가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잘 왔어요, 레이. 당신이 필요했어요.”

“필요?”

“우리를 위해 힘 좀 써 주셔야겠어요.”

“……?”

레이몬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번에는 클로이와 레테가 동시에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클로이와 레테에게 끌려 나온 레이몬드는 두 사람이 만들어 놓은 커다란 눈덩이 두 개를 발견했다.

제법 닮은 외양의 두 여자로부터 응원을 받으며 레이몬드는 아주 가뿐하게 눈덩이 하나를 다른 눈덩이 위로 올려 눈사람의 모양을 만들었다.

“우와……!”

레테가 신이 나서 눈사람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이걸 봐요, 황후님! 진짜 눈사람이 됐어요!”

“이제 눈사람을 꾸며 주어야지요.”

클로이는 밖으로 나오기 직전 시녀들에게 부탁해 준비한 바구니를 레테에게 내밀었다. 눈사람을 꾸미기 위한 각종 잡화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장 먼저 길쭉한 당근을 붙잡은 레테가 그것을 눈사람에 코에 붙여주고 싶어 했지만, 키가 작은 탓에 팔이 잘 닿지 않았다. 클로이가 힐끔 눈치를 주자 레이몬드가 레테의 뒤로 다가섰다.

“잠시 실례하겠소.”

그렇게 말한 레이몬드는 레테의 허리를 붙잡아 허공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으앗! 고마워요!”

레테는 꺄르륵 웃으며 눈사람의 머리를 쳐다보더니 원하는 위치에 당근을 붙여 주었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듯 턱 끝을 슬쩍 젖히며 우쭐댔다.

레이몬드가 다시 바닥에 내려 주자 또다시 바구니를 뒤적거리던 레테가 커다란 단추 두 개를 골랐다. 그것으로 눈사람의 눈동자를 만들어 줄 참이었다.

“잠깐.”

어쩐지 레테만큼이나 눈사람 만들기에 열중하게 된 레이몬드가 그녀를 말리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단추 대신 이건 어떻소?”

레이몬드가 꺼낸 것은 커다란 보석들이었는데, 붉은 빛깔이 꼭 그들의 눈동자와 닮았다.

“앗, 정말 예뻐요! 그런데 이건 조금 귀해 보이는데, 이렇게 사용해도 괜찮은가요?”

“물론이오.”

레테가 신이 나서 폴짝거리자 레이몬드는 흐뭇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보석들을 이것저것 비교해 보며 신중하게 어떤 보석이 가장 눈사람에게 어울릴까 고민하는 레테의 모습이 어쩐지 레이몬드의 기분을 기묘하게 만들어 주었다.

따스하고 포근하면서도…… 이상하게 심장이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 개의 보석 중에서 두 가지를 골라 낸 레테의 얼굴 위로 개구진 보조개가 피어났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순간이었다.

지끈.

또다시 예고 없이 이는 두통에 레이몬드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어디선가 갓난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머니, 아버지…….’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 맺힌 목소리…….

“레이몬드?”

그러나 클로이의 부름에 곧바로 소리가 흩어졌다. 레이몬드는 꼭 유령에 홀린 기분으로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혹시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지요?”

“아니. 아니야.”

레이몬드는 혹여나 그녀가 걱정할까봐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레테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어떤 것으로 눈동자를 만들 건지 결정하였소?”

“네!”

레이몬드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레테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레이몬드는 다시금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주었다. 드디어 눈사람에게도 눈과 코가 생겼다.

“눈사람이 레이몬드 님을 닮은 것 같아요.”

“흠, 내 눈에는 성녀를 닮은 것 같소만.”

두 사람은 눈사람의 눈이 된 붉은 보석을 보며 서로를 닮았다고 주장했다.

“눈사람에게 팔도 필요할 것 같아요.”

클로이의 제안에 레이몬드가 씨익 웃으며 성녀를 돌아보았다.

“눈사람의 팔이 되어 줄 나뭇가지를 함께 주우러 가겠소?”

“네, 좋아요!”

레테는 씩씩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테를 중심으로 나란히 선 세 사람은 나뭇가지를 주우러 가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재잘재잘 떠드는 레테의 목소리와 간간이 화답하는 클로이와 레이몬드의 웃음소리가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주욱 이어졌다.

* * *

“미하일, 혹시 사랑을 해 본 적 있어?”

창가에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앉아 있던 레테가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무슨 헛소리입니까.”

그렇게 되묻는 미하일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있지,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쨍그랑!

쟁반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테와 미하일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에녹이 처음 보는 멍청한 표정으로 레테를 쳐다보고 있었다.

깨져 버린 컵에서 흘러나온 코코아가 바닥을 적셨다. 달콤한 향내가 방 안에 물씬 퍼졌다.

“성녀님이…… 사랑을 시작했다고요?”

언제나 담담하던 그의 목소리가 슬며시 떨리고 있었다.

“대체, 누구입니까?”

“에녹! 컵이 깨졌잖아요!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말아요!”

깜짝 놀란 레테가 벌떡 일어나 에녹에게 다가갔고, 미하일은 옆에서 방관하며 쯧쯧 혀를 찼다.

“컵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설마 이상한 사람에게 휘둘리는 건…….”

“이상한 사람들 아니에요!”

“잠깐, 사람‘들’이라고요?”

잠자코 있던 미하일이 에녹 못지않게 심각해진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응. 레테가 사랑하게 된 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인 걸.”

“……!”

“……!”

레테가 흘린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뭐, 뭐야. 둘 다 왜 이렇게 심각해진 거야?”

에녹과 미하일의 반응에 당황한 레테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난 그냥 클로이 황후와 레이몬드 황제를…….”

“아…….”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방 안의 분위기가 풀어졌다.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상대가 황제와 황후였습니까?”

“그럼! 황궁에 두 사람 말고 내가 반할 것 같은 상대가 어디 있다고!”

“……다행입니다.”

내내 얼어 있던 에녹이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불순한 목적을 가진 자들이 성녀님께 접근을 한 줄 알고…….”

“에녹 경의 잘못이 아닙니다. 성녀님이 표현을 이상하게 하니까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한숨을 내쉬며, 미하일이 불퉁한 표정으로 레테를 쳐다봤다.

“이상한 표현이라니, 아니야! 나, 난…… 정말로 두 사람에게 사랑을 느꼈는걸…….”

양손을 교차하며 가슴 위에 얹은 레테가 클로이와 레이몬드를 떠올리며 들뜬 표정을 했다.

“두 사람을 볼 때면 기분이 이상해. 막 심장이 간질간질 간지럽고, 두근두근 뛰어. 눈 놀이를 하고 나서 씻는 걸 도와 줬던 황후궁의 시녀가 그랬는데,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른댔어.”

“으음…….”

“그러니까 나는 클로이 님과 레이몬드 님을 사랑하는 거야!”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미하일은 잔뜩 못마땅한 어투로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테는 활짝 웃으며 물었다.

“오늘은 두 사람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어! 같이 보러 갈래?”

“귀찮습니다. 밖은 추워서 나가기 싫어요.”

“그런 게 어딨어! 나가자! 에녹도 같이 나가요!”

“네? 네, 성녀님.”

레테는 귀찮아하는 미하일과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에녹을 각기 양쪽에 끼고서 밖으로 나갔다.

‘사랑’을 하게 되면 세상이 모두 아름다워 보인다고 했다.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미하일조차 아름다워 보일 만큼 레테는 굉장히 행복했다.

* * *

“……그러니까, 성녀를 황가에 입적시켜 달라?”

예기치 못한 제안에 레이몬드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혹시 그 일로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지…….”

내내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클로이 또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전혀 문제될 것 없습니다.”

심각한 표정의 두 사람과 달리 미하일은 부드럽게 웃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성녀께서 발견된 곳은 차가운 겨울 숲의 커다란 얼음 속에서였지요. 기본적인 대륙의 질서나 인간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은 있으나, 인간으로서의 기억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그분이 인간들 틈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가족이 필요해요.”

사실 미하일은 아까부터 억지를 부리는 중이었다.

“그저 수도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무려 제국 황제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성녀의 신분을 가지신 분인데…… 아무에게나 가족의 역할을 부탁할 순 없는 노릇이지요.”

“그것도 일리가 있지.”

“그러니 두 분 폐하께 부디 청하옵건대, 성녀님을 두 분의 양딸로 삼아 주십시오.”

레테를, 그들의 가족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레테가 두 사람과 함께 만든 눈사람을 자랑하듯 보여 주었을 때. 그리고 그 눈사람의 두 눈을 장식한 붉은 보석들이 레테의 눈동자와 닮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한 미하일은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황제와 황후를 알현하길 청해 왔다.

오래전, 모든 시간의 기억을 갖고 있었던 망각의 성녀 레테는 오직 그들에게만큼은 잊히지 않기를 소망하였다.

‘그들도 곧 나를 잊을 거야. 어차피 난 망각이니까…… 모두가 나를 잊게 되겠지.’

슬픈 목소리로 속삭이던 그녀의 표정을,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미하일은 여전히 잊지 못한다.

제국의 황제 레이몬드, 황후 클로이, 늘 그녀의 곁에 있었던 기사 에녹……. 완벽한 ‘망각’을 이루지 못하고 시간을 역행한 이들. 그녀는 그들에게 망각되지 않기를 그토록 바랐었다.

당시의 미하일은 그들에게 미약한 질투마저 느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일이 끝난 이후 그녀를 기억하는 유일한 이는 바로 자신이 되었다.

라나 신의 기록자, 라미에 교단의 대주교 미하일.

그는 가엾은 그녀를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면, 그녀의 행복을 위해 응당 힘써야 하는 것 또한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녀가 망각시켜 버린 최초의 시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사랑했던 이들이 모든 슬픔을 잊고서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 바랐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잊히지 않고 곁에 남기를 바랐으면서, 웃으며 아닌 척하던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것을 잊지 못하기에 미하일은 지금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설사 말도 안 되는 억지와 거짓을 일삼아야만 하고 심지어 라나 신을 이용해야 하더라도 소멸 전의 그녀가 그토록 바랐던 행복을 지켜 주고 싶었다. 이제는 그들의 곁에서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모두 라나 신의 뜻입니다.”

미하일은 그 옛날 레테가 그랬던 것처럼 일단 라나 신의 뜻이라 우기며 뻔뻔하게 찻잔을 들어올렸다.

내내 억지를 부리던 것과 대조되게 우아한 자태로 차를 음미하는 그 모습을 레이몬드와 클로이는 난처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주교의 제안은 제국에게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오래전 황실과 교단의 유착으로 인해 생겼던 여러 문제점 때문에, 제국법은 성녀와 황족의 결합을 제한했다.

그러나 그 ‘결합’은 어디까지나 혼약에 의한 것을 말했다. 즉, 성녀의 이름을 황적에 올려 황족으로 받아들이는 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성녀가 황실의 일원이 된다니. 그것도 황태자나 황자의 부인이 아닌 정식 황녀로서……. 제국으로서는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교단은 대륙의 어느 왕국과도 동맹을 맺지 않고 방관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런 교단과 적어도 성녀가 살아 있는 한 절대 깨지지 않을 단단한 동맹을 맺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대주교의 뜻은 잘 알겠지만, 그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레이몬드는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가 황족이 된다는 건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 일단은 그들의 ‘가족’이 되는 일이었다. 정치적인 이득을 꾀할 목적으로 성녀의 뜻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제안을 받아들였다가는 필히 상처받는 이가 생길지도 몰랐다.

“본래 성녀가 수도에 머무르기로 했던 기간이 석 달이었지. 그 안에 결론을 내겠다.”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그런 레이몬드의 신중한 태도를 보며 미하일은 빙그레 웃었다. 성녀에게 피와 살을 물려 준 남자는,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 * *

최근 들어 레베카 캐롤라인 공녀는 전보다 더욱 줄기차게 황궁을 방문했다. 어머니, 아버지와 있을 때보다 소꿉친구인 이브 황자와 함께 있을 때가 더 많을 정도였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바로 얼마 전에 등장한 성녀 레테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순 거짓말쟁이셔. 성녀님보다 내가 더 예쁘니까 안심하라더니…….’

성녀의 등장 이후 내내 불안해하던 레베카에게, 다리아는 걱정하지 말라고 제 딸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나 막상 성녀의 환영회 날 어머니를 따라가 직접 두 눈으로 본 성녀는 연회장 내의 모두를 사로잡을 만큼 굉장히 예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이브 황자와 닮은 외양에 모두가 술렁거렸는데, 다리아 또한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성녀를 쳐다보더니 뒤늦게 레베카를 위로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베키. 어차피 제국법상 성녀님이 황자비가 되는 건 불가능해.’

그러나 다리아의 위로는 그다지 레베카의 기분을 풀어 주지 못했다. 사람들이 성녀의 외모를 두고 술렁거릴 동안, 레베카는 성녀를 보는 이브의 반응을 보며 속을 태웠다.

이브는 성녀에게 대놓고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눈빛과 은은한 미소가 레베카를 대하던 때보다 훨씬 더 다감하고 상냥했다.

‘게다가 이브 황자님 정도면…… 자기 자신이 이상형이라 해도 놀랍지 않은걸!’

그렇게 생각하며 레베카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아 꺾어 온 꽃송이로 화관을 엮으며 흥얼거리고 있는 이브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지금도 이브는 굳이 성녀를 위한 화관을 엮어 주겠다며 황제와 황후만 출입할 수 있는 황궁 온실에 레베카까지 끌고 온 터였다.

“이거 어때, 베키? 성녀님이랑 잘 어울릴 것 같지?”

이브가 한참동안 꼬물거리며 엮은 화관을 자신의 머리 위에 얹으며 생긋 웃었다. 알록달록한 화관이 그의 은빛 머리카락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 레베카는 아주 잠시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베키?”

대답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이브가 다시 한번 그를 부르자, 그제야 레베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 잘 어울려요!”

새빨개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이브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 말고, 성녀님과 잘 어울릴 것 같은지 물어본 거잖아.”

그러고는 가만히 손을 뻗어 레베카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황자 전하?”

“손을 펴, 베키.”

나긋하게 쏟아지는 명령에 레베카는 홀린 듯이 손을 폈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 위로 반짝거리는 은빛 색깔의 꽃송이가 내려앉았다.

“어……?”

“선물이야.”

레베카는 여전히 이브에게 붙잡힌 자신의 손목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아…… 너, 너무 기뻐요……!”

귓불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레베카를 보며 이브는 피시식 웃음을 흘렸다.

붙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 준 그가 다시금 성녀에게 줄 화관을 만지작거릴 때였다. 불현듯 입구 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기민하게 그것을 알아챈 이브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황자님?”

갑자기 차가워진 그의 표정에 레베카가 섬칫 놀라며 그를 부를 때였다.

“쉿.”

이브의 손바닥이 그대로 레베카의 입술을 덮으며 조용히 하라고 눈짓했다. 레베카는 영문을 모른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의 발소리와 함께 도란도란거리는 말소리가 점차 커졌다. 레베카를 데리고 나무 기둥 뒤로 숨은 이브는 두 사람이 클로이와 레이몬드라는 것을 알아챘다.

‘큰일이네. 여기 몰래 들어온 걸 알면 아버지가 화를 내실 텐데.’

그들이 있는 곳은 황자라 하더라도 황제의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없는 온실이었다.

몰래 숨어든 걸 들킨다 해도 큰 벌을 받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화를 내거나 실망을 할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엇과 달리 이브는 이제까지 사고 한번 치지 않은 얌전한 아들이었으니까.

이브는 눈동자를 데루룩 굴려서 제 옆에 함께 숨죽이고 있는 레베카를 쳐다보았다. 레베카만 조심한다면 두 사람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이브는 레베카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싱긋 웃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자 레베카가 다시 한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는 게 보였다.

이브는 레베카의 정수리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클로이와 레이몬드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성녀가 황실의 일원이 된다면 제국으로서는 큰 이득이겠지만…….”

문득 들려오는 말소리에 이브와 레베카의 귀가 동시에 쫑긋 섰다.

“가족이 되는 거니까요. 일단은 성녀님의 뜻을 들어본 후 엘리엇과 이브에게도…….”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지……. 어째서 대주교가…….”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길을 따라 사라졌다.

굉장히 중요해 보이는 이야기를 우연히 엿듣게 된 이브와 레베카가 두 눈을 끔뻑이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이브가 먼저 푸스스 눈꼬리를 접어내리며 레베카에게 속삭였다.

“오늘 있었던 일들은 모두 비밀로 해 줘, 베키.”

“네, 네……!”

레베카는 위아래로 고개를 강하게 흔들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핑글핑글 쌓여 어지러웠다.

‘성녀님이 황실의 일원이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제국법상 성녀님은 황자비가 되지 못한다고 했는데…… 하, 하지만 방금 분명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 * *

미하일은 레테가 만든 눈사람에 성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봄이 올 때까지 눈사람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덕분에 신이 난 레테는 한참 동안 눈사람 주위를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눈사람을 더 많이 만들어서 미하일에게 성력을 넣어 달라 할 거예요!”

에녹은 그런 레테의 근처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에녹도 함께 만들어요!”

“네? 제가…… 말입니까?”

조용히 서 있던 에녹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당혹스러워하며 되물었다.

“싫은가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런 그의 반응에 레테가 소심하게 묻자, 에녹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에녹도 어제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쉬워요. 미하일이 에녹을 너무 부려먹는 건 아니지요?”

은근슬쩍 미하일의 흉을 본 레테는 키득키득 웃으며 눈밭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자그마한 손으로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자, 이렇게 레테처럼 해 보세요.”

“이렇게요?”

“네! 우와, 에녹은 역시 못하는 게 없어요!”

아닌 게 아니라 에녹은 몇 번 손을 툭툭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아주 동그랗고 예쁜 눈덩이를 만들어 냈다.

“너무 크게 만들면 눈뭉치를 쌓을 때 힘들어요. 그러니까 아주 작은 눈사람을 만들 거예요.”

신이 난 레테가 재잘재잘 떠들며 자그마한 눈사람들을 여러 개 만들었다.

“이건 클로이 황후님이에요. 그리고 이건 이브 황자님이고…… 여기 이 못생긴 눈사람은 미하일이에요!”

레테는 가장 울퉁불퉁한 눈뭉치 두 개를 위아래로 쌓으며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못된 미하일. 맨날 레테에게 악담이나 하고.”

마치 인형을 갖고 노는 여자아이처럼, 레테는 손끝으로 미하일 눈사람을 툭툭 괴롭혔다.

“나중에 레테가 성력이 강해지면 그간의 악담들을 모두 되돌려 줄 거야.”

에녹은 그런 레테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한참 동안 미하일 눈사람을 괴롭히던 레테가 에녹을 향해 고개를 힐끔 돌렸다.

“동글동글 예쁜 눈사람이네요?”

“성녀님이 보기에도 예쁜가요?”

레테가 눈사람을 세 개나 만들 동안 에녹은 하나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의 손에서 모양을 찾아가는 눈뭉치는 꼭 장인이 빚어 낸 것처럼 근사했다.

“이 눈사람은 성녀님이에요.”

“네? 정말이요?”

레테는 기뻐서 껑충 뛰며 에녹의 주위를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러고는 에녹의 등에 끌어안듯이 매달려 그가 눈사람을 빚는 걸 구경했다.

“에녹은 틀림없이 눈사람 빚는 예술가가 되어도 성공했을 거예요.”

클로이가 선물해 준 두터운 모피 망토가 레테의 어깨 위에서 나풀나풀 흩날렸다. 종달새처럼 사랑스러운 레테의 말소리도 함께 흩날리고 있었다.

그때, 사박거리는 발소리에 레테가 고개를 돌렸다.

“어? 이브 황자님!”

“안녕하세요, 성녀님.”

마침 길을 지나가던 이브가 형형색색의 꽃송이로 엮은 화관을 들고서 레테에게 걸어왔다.

“어? 꽃이네요!”

레테는 이브의 손에 들린 화관을 보며 신기해했다. 계절에 맞지 않는 꽃들이 알록달록 엮여 있었다.

“선물이에요.”

폭삭한 감촉과 함께 이브의 손에 있던 화관이 레테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향긋한 꽃 내음이 물씬 풍겼다.

“역시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어요.”

이브는 자신이 만든 화관이 레테에게 썩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황자님! 이브 황자님은 정말 친절하고 좋은 분이에요!”

“눈사람이네요.”

이브가 레테의 뒤로 보이는 커다란 눈사람과 자그마한 눈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모두 레테가 만든 눈사람이에요!”

레테는 이브의 손을 잡아끌며 자신의 눈사람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이미 아까 에녹에게 한번 설명해 주었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레테와 그런 레테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 주는 이브 황자를 보며 잠자코 눈사람을 빚고 있던 에녹은 빙그레 소리 없는 미소를 지어냈다.

* * *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시간.

황실 기사단을 위한 연무장에는 열 살 가량의 소년이 혼자서 연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늘을 물든 노을 빛깔처럼 시뻘건 머리카락이 유독 소년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스타 제국의 황태자, 엘리엇.

겉으로 보이는 외양만큼은 클로이 황후를 닮아 인형처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지녔지만, 검 끝을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평상시에는 나이에 비해 점잖고 어른스러운 황태자였지만, 검을 휘두를 때면 다른 사람이 되곤 했다.

이브는 제 형제가 보여 주는 두 모습의 격차가 참 좋았다. 그래서 이따금 여유가 생길 때면 엘리엇이 검을 휘두르는 걸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브는 한쪽 구석에 앉아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형제를 감상했다. 저 커다란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엘리엇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수차례 휙휙, 검을 휘두르던 엘리엇이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아까부터 자신을 구경하고 있던 이브에게로 걸어갔다. 이브는 자연스럽게 엘리엇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생긋 웃었다.

“굉장해, 엘리.”

“황궁 온실에 다녀온 거야?”

엘리엇이 이브의 의복 상태를 힐끔 쳐다보고서 물었다.

“응? 어떻게 알았어?”

“흔적이 남아 있잖아.”

이브의 머리카락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있는 하얀 꽃잎을 손으로 쓸어 치워 버린 엘리엇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어린 황태자는 한번 스쳐 본 것만으로도 이브의 옷에 달라붙어 있는 초록색 잎사귀와 소매 끝에 어슴푸레 물든 꽃물을 기민하게 발견했다.

지금보다도 더 어릴 적 이브와 함께 황궁 온실에 몰래 숨어들곤 했는데, 그곳에서 맡았던 향기가 은은하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역시 대단해, 엘리!”

이브는 마냥 즐거워하며 두 눈을 둥글게 휘었다.

“성녀님께 화관을 엮어 드리려고 베키랑 같이 다녀왔어. 그런데 내가 거기서 이상한 말을 들었지 뭐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조곤조곤한 말씨를 들으며 엘리엇이 이브에게 손수건을 돌려 줄 때였다.

“성녀님이 우리 가족이 될 수도 있대.”

“가족?”

이어지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엘리엇의 두 눈이 화들짝 커졌다.

“응, 가족.”

“하지만 그건 제국법상 불가능…… 아, 설마 양녀로 입적하시려는 건가?”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던 엘리엇이 이내 납득하며 되물었다.

“아마도.”

이브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잔잔하게 웃고 있는 이브와 달리 엘리엇은 사뭇 심각해진 표정으로 입을 꾸욱 다물었다.

“성녀님은…… 조금 이상해. 꼭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아기 같아.”

“어딜 봐서?”

엘리엇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이브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아마 조만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 같은데. 너는 어때, 엘리?”

“나는…… 뭐…….”

이브에게 손수건을 돌려준 엘리엇은 레테를 떠올려 보았다.

레테는 정말 가족이라 해도 믿을 만큼 그들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엘리엇조차도 레테를 이브라고 착각했으니.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서 지켜본 레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브와 상당히 달랐다. 정말 닮은 것은 외양뿐인 듯,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 표정이라든가 사소한 말씨와 행동, 아이 같은 성정 등이 굉장히 달랐다.

기다란 은색 머리를 앙증맞게 흩날리며 뛰어다니는 레테는 분명 귀여웠다. 귀여운데, 귀엽긴 한데……. 괜히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성녀님은 정말 귀엽잖아.”

“전혀.”

엘리엇은 단 한 번도 레테를 귀엽다고 여긴 적 없다는 것처럼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가 훨씬 더 귀여워, 이브.”

그 말에 이브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싱긋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엘리.”

“내 동생은 너 하나면 돼.”

“언제는 여동생이 갖고 싶다고 그랬으면서.”

“내가 언제!”

잔잔하게 흘러나온 이브의 말에 엘리엇이 화르륵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재작년 탄신연 때 어머니께 여동생을 낳아 달라 우겼잖아. 기억 안 나?”

“그, 그랬나……?”

생각해 보니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굉장히 난처한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떠오를 듯 말 듯하기도…….

“그리고 더 어렸을 때는 나중에 여동생이 태어나면 줄 거라면서 아버지의 온실에 들어가 꽃을 잔뜩 따 왔었잖아. 결국엔 다 시들어 버렸지만.”

“어…… 음…….”

점점 기억이 선명해졌다. 여섯 살 때였나, 일곱 살 때였나.

황자들의 검술 스승이던 브랜던이 늦둥이 여동생이 태어났다고 자랑을 한 적이 있었다.

막내의 신세를 벗어났다며 동생 자랑을 어찌나 해 대던지, 엘리엇은 심통이 나면서도 은연중에 그가 굉장히 부러웠다.

언젠가 태어날 여동생을 위해 부모님 몰래 꽃을 잔뜩 따 왔지만 결국엔 모두 시들어 버려졌다.

제국의 주인이 될 사람은 울면 안 되니까, 그래서 엘리엇은 이불 속에 들어가 몰래 울었다.

“하지만 그건 다 철없을 적 이야기야. 난 여동생 없어도 돼. 이브가 있으니까.”

열 살의 엘리엇이 근엄하게 턱끝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새빨갛게 물든 그의 귓불은 근엄한 표정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이브는 그런 엘리엇이 너무 귀여워서 형제의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엘리는 여동생이 생기면 정말 좋은 오빠가 될 수 있을 거야. 아, 여동생이 아니라 누나가 생기는 걸까? 내일 성녀님과 만나면 생일이 언제인지 여쭤봐야겠어.”

“…….”

이브의 쓰다듬을 받으며 엘리엇은 레테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성녀가 우리의 가족이 되는 거라면…….’

두근.

순간 애매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스쳤다. 언제나 넷이던 그들 가족의 중앙에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성녀가 함께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두근, 두근.

처음 목검을 들고 검술 수련을 받았을 때처럼 기분 좋은 울림이 느껴졌다.

* * *

클로이는 이틀 내리 대주교의 제안을 곱씹었다.

‘성녀님을 두 분의 양딸로 삼아 주십시오.’

굉장히 당혹스러운 제안이었지만……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 심장이 쿵쿵 뛰며 설렜다. 당장 그 자리에서 레이몬드의 뜻도 들어보지 않고 곧바로 승낙의 말을 내뱉을 뻔할 정도였다.

‘말도 안 돼. 성녀님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우신 분을…….’

엘리엇과 이브를 출산한 뒤로,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았다.

손이 귀한 황실이었지만 레이몬드는 클로이에게 아이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두 명의 황자가 있으니 굳이 작고 연약한 그녀의 몸에 무리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이렇게 갑자기 딸…… 이라니.’

두 황자를 임신했을 적에 아들이 태어날지 딸이 태어날지 몰라 두 개의 이름을 지어 두었다. 결국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아들이라서, 딸이 나오면 주려 했던 이름은 아직 주지 못하고 남아 있던 터였다.

건국 신화에 등장하던 요정 여왕의 이름.

두 황자를 임신할 당시, 유독 그 이야기를 즐겨 읽었다. 엘리엇도, 이브도, 그리고 ‘그 이름’도 모두 아스타 제국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이름들이었다.

“…….”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 보려 했지만 어쩐지 기분이 뒤숭숭하고 목이 메여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클로이는 달싹거리는 입술을 다물고는 다시 성녀 레테에 대해 생각했다.

성녀님은 인간 사회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고 했다. 겉보기엔 조금 어리지만 그럼에도 완벽한 성녀의 모습이었는데.

그럼 그 모습들은 모두 단기간에 교육받은 결과라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굉장했다. 성녀로서의 모습도 단기간에 갖췄으니까, 틀림없이 황녀로서의 모습도 어려움 없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황후 폐하?”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끊고, 베스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클로이의 머리를 만져 주던 베스티가 빙그레 웃으며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아, 그냥.”

클로이는 거울 속 가볍게 단장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고마워, 베스티.”

“뭘요.”

이제는 ‘빈센트 백작 부인’이라 불리는 베스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여전히 귀엽고 천진난만한 베스티는 벌써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세 명의 딸은 모두 베스티를 쏙 빼닮았는데, 빈센트 백작이 어찌나 그 아이들을 아끼는지 절대로 밖에 내보이지 않았다.

클로이조차도 백작저에서 열리는 행사 때만 베스티의 아이들을 만나 볼 수 있었는데, 어째서 빈센트 백작이 그토록 아이들을 아끼는지 알 법했다.

클로이의 방문에 쪼르르 계단 아래로 뛰어나와 그녀를 구경하다가 눈이 마주치자 동시에 난간 뒤로 숨던 어린 세 자매는 정말 귀여웠다.

베스티의 부름에 줄지어 걸어온 세 자매가 양손을 배꼽 위에 모으고 짧은 혀로 제법 황실 예법에 맞춘 인사를 했을 때는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게다가 유난히 어려 보이는 얼굴에 성인 여성치고는 체구가 작은 베스티가 어린 세 자매와 나란히 서 있으니 꼭 베스티까지 네 자매로 보였다.

베스티와 세 자매를 바라보는 빈센트 백작의 얼굴 위로 흐뭇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것은 클로이 또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힘든 일을 겪었는데도 구김살 없이 밝은 베스티가 자랑스러웠고, 그런 베스티와 쏙 닮은 세 자매도 사랑스러웠다.

“딸이 있는 건 아들이 있는 것과 또 다른 느낌이겠지?”

“네? 갑자기 그건 왜……? 설마, 황후 폐하……?”

클로이의 질문에 베스티가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시선이 슬금슬금 클로이의 아랫배 쪽으로 향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정말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왠지 클로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기대를 하는 것 같아서 클로이는 재빨리 두 손을 내저었다.

“쳇, 아니었군요.”

베스티는 아쉽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황궁에도 예쁜 황녀님이 생긴다면 제가 매일같이 머리를 예쁘게 만져 주었을 텐데.”

세 자매의 어머니가 된 이후, 베스티는 머리카락 단장하는 솜씨가 굉장히 늘었다. 그래서 황궁에서도 틈만 나면 클로이와 다른 시녀들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놀곤 했다. 예쁘게 단장을 해 주겠다는 핑계로 말이다.

특히 그녀는 클로이의 머리카락을 굉장히 좋아했다. 짧은 머리를 고수하는 엘리엇과 이브에게도 머리를 기를 생각이 없는지 넌지시 물어 보기도 했다.

“머리…… 음……. 아무래도 딸이 생긴다면 머리카락도 예쁘게 땋아 줄 수 있어야겠지?”

클로이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다른 사람의 머리는 한 번도 만져 본 적이 없어서인지 그런 생각을 하자 왠지 가슴이 울렁울렁거렸다.

“에이, 황후 폐하께서는 굳이 그런 거 할 줄 몰라도 괜찮아요.”

베스티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제가 있는데 뭐 하러 그런 걸 직접 하나요?”

거만하게 코끝을 치켜세우며 말하는 베스티의 모습은 썩 귀여웠지만, 클로이는 왠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머리를 만져 주고 싶은데…….’

보드라운 은색 머리카락이 손에 감기는 상상을 하니,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클로이는 퍼뜩, 아직 성녀를 양딸로 받아들일지 결정 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그녀와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정말 왜요, 황후 폐하? 새삼 예쁜 아기 황녀님을 낳고 싶어진 건가요?”

베스티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클로이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예전에는 두 황자님만으로 충분하다 하시더니.”

“그런 거 아니래도.”

아직 결정 나지 않은 사안을 베스티에게 말할 순 없어서, 클로이는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베스티가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클로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레이몬드와 클로이는 이미 레테를 황족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찬성의 뜻을 모았다. 엘리엇과 이브의 뜻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레테만 괜찮다고 하면 어떻게든 밀어붙일 의지 또한 있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대주교는 절대 합리적인 근거 없이 억지를 부리는 이가 아니야.’

그날, 대주교 미하일이 그들 앞에서 보인 태도가 영 미심쩍었다.

‘꼭 대놓고 눈치를 주는 것 같았지.’

레이몬드 또한 그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라나 신의 종인 대주교가 신의 사랑을 받는 성녀를 위해 황실을 이용하면 이용했지, 절대로 성녀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대주교의 뜻이 뭔지 한번 캐물어 봐야겠어.’

* * *

황궁에 도착한 이후, 레테의 일상은 매우 평화로웠다. 매일매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먹고, 놀고, 또 놀았다.

“이렇게 놀고먹기만 해도 되는 거야?”

그런 자신의 생활에 불쑥 걱정이 든 레테가 아주 조심스럽게 미하일에게 물었다.

“당신도 양심은 있나 보군요. 하긴, 그렇게 매일 놀고먹으며 살만 찌우고 계시니 누가 당신을 보고 성녀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살만 찌우다니! 그건 깃털처럼 가벼운 내 몸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레테는 두 눈을 뾰족하게 뜨고서 미하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어찌됐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기만 하는 건 사실이라서 양심이 쿡쿡 찔리긴 했다.

“나 명색이 성녀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뭐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정 뭔가 하고 싶다면, 그 쓸모없는 성력이나 키워 보든가요. 성력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성녀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나섭니까?”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며 이야기를 꺼낸 건데, 미하일은 코웃음을 치며 레테를 비웃었다. 그 말에 빈정이 상한 레테가 막 화를 내려던 참이었다.

“미하일, 너……!”

“그나저나 오늘 오후엔 클로이 황후님과 티타임이 약속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더 늦으면 황후님을 기다리게 만들 텐데요.”

“아, 맞다! 티타임……!”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레테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단순하기도 하시지.”

큭큭거리는 웃음이 미하일의 잇새로 터져 나왔다.

“이번 생에는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나태한 베짱이가 되는 겁니다, 레테.”

미하일은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빠른 걸음으로 황후궁을 향해 걷던 레테는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엘리엇과 마주쳤다.

“아, 성녀…….”

레테를 발견한 엘리엇이 흠칫 표정을 굳히더니, 이내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

“안녕.”

레테도 엘리엇을 따라 마찬가지로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매번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이브와 달리 엘리엇과는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데면데면했다. 그래도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세 어색함이 풀려 함께 웃고는 했는데, 그래 놓고 다음날 다시 마주치면 어색했던 처음으로 돌아갔다.

“어디 가?”

그냥 지나칠 거라고 생각했던 엘리엇이 레테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황후님을 만나러.”

“아…….”

그녀의 대답에 엘리엇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붙어서 걸었다.

“……?”

“데려다 줄게.”

레테가 왜 따라 오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엘리엇이 답지 않은 친절을 베풀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속으로 생각하던 것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엘리엇이 도끼눈을 뜨고서 레테를 노려보았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난, 네가 귀찮을까 봐…….”

“엘리엇이야.”

“응?”

“엘리엇이라고 불러.”

“어, 응.”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엇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은 눈빛에 레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덧붙였다.

“너도, 아니, 엘리엇도 그냥 레테라고 부를래?”

“그래.”

그러자 엘리엇은 잽싸게 대답하며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하나도 안 귀찮으니까 데려다줄게, 레테.”

선심을 베푸는 듯한 그의 말씨에 레테는 왠지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그렇지만 데려다준다는 그의 친절을 거절하는 것도 찝찝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엘리엇은 힐끔힐끔 레테의 눈치를 보았다.

‘성녀를 황가에 입적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 중이다.’

며칠 전, 모처럼 가족끼리 가졌던 단출한 식사 자리에 레이몬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브를 통해 미리 들어서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동안 굉장히 심각한 고민을 안겨준 문제였다.

‘대주교는 성녀에게 가족이 필요하다고 했고, 우리가 성녀의 가족이 되어 주길 요청했다. 아무 귀족 가문이나 성녀의 가족으로 붙여 주었다간 장차 그들이 교단의 세력을 이용해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일단 나와 너희 어머니는 성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데 찬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정치적인 사안을 떠나 가족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너희의 의견을 물어볼 참이란다.’

레이몬드는 다정한 시선으로 엘리엇과 이브를 돌아보며 말했다.

‘봄이 오기 전에 교단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야 해. 그때까지는 우리도 결정을 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가족이라니. 그것도 하필이면 제 형제와 착각될 만큼 쏙 닮은 성녀와.

“눈을 뜬 지 얼마 안 됐다면서?”

“으응?”

뜬금없는 엘리엇의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레테가 이내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끄덕였다.

“응! 대주교가 나를 얼음 속에서 발견했다는데, 나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어떻게 알았어?”

“……그냥, 어디서 들었어.”

잠시 머뭇거리던 엘리엇이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넌 가족에 대한 기억도 하나도 없는 거야?”

“에녹이랑 미하일이 내 가족이야.”

“아니, 그런 거 말고…….”

엘리엇이 무언가 더 말하려고 할 때였다.

“엘리엇 전하.”

두 사람의 뒤편에서 웬 남자가 섬뜩한 목소리로 엘리엇을 불렀다. 흠칫 놀란 엘리엇이 뒤를 돌아보자 그의 검술 스승인 브랜던 케니스 경이 무서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케, 케니스 경…….”

동시에 엘리엇이 사색이 되었다. 무려 엘리엇을 겁에 질리게 하는 남자가 누구인지 신기해하는 레테의 앞에 브랜던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저는 엘리엇 전하의 검술 수련을 돕고 있는 브랜던 케니스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브랜던을 쳐다보는 레테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잘생긴 건 에녹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태자의 검술 스승이라는 이 남자는 에녹만큼이나, 아니, 에녹보다 미세하게 더 잘생겼다.

“수련을 하다가 어디로 사라지셨나 했더니, 여기에 계셨군요.”

레테에게 상냥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던 브랜던은 곧바로 엄하게 표정을 바꾸어 엘리엇을 쳐다보았다. 엘리엇은 브랜던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레테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심해. 케니스 경은 잘생긴 얼굴과 달리 성격이 개차반이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속삭이는 소리는 브랜던의 귀에까지 들리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왜 사람 들리게 험담을 하고 계십니까.”

브랜던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엘리엇의 귀를 쭈욱 잡아당겼다.

“아야. 아야야.”

엘리엇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레테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스승에게 끌려가 버렸다.

레테는 그저 신기하단 눈으로 멀어져 가는 엘리엇에게 손을 흔들었다.

* * *

클로이는 황궁에 머무는 레테가 심심하지 않도록 종종 그녀를 불러내 함께 코코아를 마시거나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클로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레테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황궁 생활은 심심하지 않으세요?”

“네! 황후님께서 돌봐 주셔서 하나도 심심하지 않아요! 모두 황후님 덕분이에요!”

“어머.”

그녀의 우렁찬 답변에 클로이는 쿡쿡 웃었다. 레테를 바라보는 클로이의 눈동자가 따스한 빛깔로 물들었다.

이상하게 애틋하고 뭉근한 감정이 들었다. 단순히 제 아이들과 닮은 외양 때문이 아니다.

대주교는 성녀가 그들과 닮은 이유가 모두 라나 신의 뜻이라고 말했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성녀는…….

그냥…… 뭉클한 사람이었다, 성녀는.

‘정말로 성녀님이 우리의 가족이 되는 게 신의 뜻인 걸까? 그래서 성녀님은 엘리엇과 이브를 닮은 얼굴로 이렇게 나타난 걸까?’

클로이는 레테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성녀는 쌍둥이인 엘리엇과 이브 둘 다 닮았지만, 그중에서도 이브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말 닮았다. 레테가 이브보다 조금 더 키가 작고, 대신 머리카락이 긴 정도밖에 차이가 없었다.

“있지요, 성녀님은 혹시 가족이 생긴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요?”

“가족이요?”

코코아를 홀짝거리던 레테가 이어진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클로이를 만나러 오기 직전에도 엘리엇이 ‘가족’에 대해 한차례 물은 터였다. 레테는 어쩐지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잘 모르겠어요, 가족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아니, 하지만 에녹과 미하일이 제 가족이긴 한데…… 그런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레테의 모습에 클로이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어린 성녀가 가족에 대해 머뭇거리는 게 안타까웠다.

“어…… 그러니까 에녹이랑 미하일이 제 가족인 걸까요?”

레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클로이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레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레테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죄, 죄송해요, 황후님.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요? 가족이 누군지도 모르고 묻다니…… 하하…….”

어색하게 웃는 그녀에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 주려던 참이었다.

“클로……! 어머, 성녀님께서도 같이 계셨네요?”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다리아가 레테를 발견하고는 우아하게 허리를 접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성녀님. 캐롤라인 공작 다리아가 인사를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공작!”

그렇잖아도 갑작스럽게 어색해진 분위기가 난처했던 레테는 냉큼 다리아를 향해 몸을 돌리며 해맑게 인사를 받았다.

“제가 두 분의 자리에 함께해도 괜찮을까요?”

“네, 그럼요!”

“기별도 없이 무슨 일이야, 다리아?”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는 레테와 달리 클로이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에 다리아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들 사이에 앉았다.

“우리 베키 때문에 계속 고민이 생겨서…… 상담을 받으러 왔어, 클로이.”

“레베카가? 왜?”

“아직 아홉 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 사춘기가 시작되려나 봐. 자꾸 외모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고…….”

“그 나이 때는 그럴 수도 있지.”

“며칠 전에는 윌을 졸라서 이브 황자님의 초상화를 대량으로 구입하더니, 오늘 아침에 보니 방 한쪽 벽면을 모두 이브 황자님의 초상화로 장식했지 뭐야?”

“어머, 정말?”

“웃을 일이 아니야. 나는 정말로 심각해.”

“이제 보니 그 대단하다는 캐롤라인 공작도 결국엔 ‘어머니’로구나.”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니까.”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푸념하는 다리아와 달리 클로이는 작게 쿡쿡 웃으며 대꾸했다.

레테는 굉장히 신기한 눈으로 레베카를 걱정하는 다리아를 쳐다보았다. 레테가 듣기엔 그다지 심각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다리아가 자신의 딸을 걱정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엔 캐롤라인 공작도 ‘어머니’라서? 원래 ‘어머니’란 다들 저렇게 걱정이 많은 존재인 걸까?

기억을 잃었어도 인간 사회의 질서는 모두 꿰뚫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건 너무나 어려웠다.

클로이와의 티타임이 끝난 이후로도 한동안 그날 나누었던 대화를 계속 생각하던 레테는 도서관을 찾아갔다. ‘가족’과 관련된 책들을 한 무더기 빌려 들고 나오는데, 또다시 엘리엇과 마주쳤다.

레테를 발견한 엘리엇은 곧바로 달려와 그녀가 한 아름 안고 있던 책들을 대신 들어 주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또 그 소리네.”

엘리엇이 레테를 향해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는 거야.”

“……고마워.”

그렇게 말하자 왠지 쑥스러워졌다.

“황궁 온실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온실?”

“황제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 조용하고 책 읽기에 좋아.”

앞장서서 걷던 엘리엇이 레테를 돌아보며 씨익 입매를 휘었다.

“같이 가자.”

“황제만 갈 수 있는 곳이라며. 그런데 우리가 가도 되는 거야?”

“괜찮아. 나랑 이브는 아버지와 어머니 몰래 안 가 본 곳이 없거든.”

“……?”

레테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엘리엇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러자 엘리엇이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냥 따라와.”

정말 따라가도 되는 걸까? 황제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라 했는데…….

레테는 왠지 걱정되고 조마조마한 마음에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엘리엇의 뒤를 총총 쫓아갔다. 다행히도 황제만 출입할 수 있다는 온실 주위엔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었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

엘리엇을 따라 온실 안쪽으로 한 발짝 내딛는 순간, 가슴께가 뜨거워지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처음 오는 곳인데도 낯익은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

문득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사들의 성이 있어요…….’

정신이 차츰 몽롱해졌다. 소리를 쫓아 움직이려던 때였다.

“괜찮아?”

엘리엇이 레테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어…… 응?”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레테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그러자 귓가에 울리던 노랫소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잘못 들은 건가.’

레테는 머리를 긁적이며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는 엘리엇을 향해 헤헤 웃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때,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레테와 엘리엇은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이브?”

“이브 황자님!”

“엘리! 성녀님도 오셨네.”

이브가 레베카와 함께 온실 안을 날아다니는 아기 참새들과 놀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성녀님. 우리 엘리랑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안녕하세요, 이브 황자님.”

레테는 쪼르르 안쪽으로 들어와 이브에게 인사를 했다.

“캐롤라인 공녀도 안녕하세요.”

막 아기 참새를 손바닥 위에 앉히던 레베카가 이브의 뒤로 후다닥 숨더니, 고개만 빼꼼 내밀어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성녀님……!”

레베카에게서 레테를 견제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레테는 그런 레베카가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며 씨익 웃었다.

‘공녀는 나보다도 키가 작네. 이브 황자님이랑 같이 있으니까 정말 잘 어울려!’

두 사람과 인사 나누는 레테를 지켜보던 엘리엇이 피식 웃으며 레테를 지나쳐 온실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책들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여기가 독서하기 가장 좋은 자리야.”

“응!”

엘리엇의 말에 레테는 또다시 그의 뒤를 쪼르르 쫓아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동화책이네요?”

이브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레테에게 다가가자, 그의 뒤에 숨어 있던 레베카도 함께 그쪽으로 다가갔다. 네 명의 아이가 둥글게 원을 그리고 바닥에 앉아 한 무더기의 책들을 뒤적거렸다.

“어? 이거 다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화책이에요!”

이브의 옆에 붙어 소심하게 함께 책을 뒤적거리던 레베카가 놀라운 발견을 한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이며 외쳤다.

“맞아요. 가족에 대해 알고 싶어서 책을 빌렸어요.”

레테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레베카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브를 돌아봤다.

“똑똑하네, 베키.”

이브는 꼭 칭찬해 주듯 레베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 너무 귀여워……!’

두 사람을 지켜보는 레테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 반면, 함께 앉아 있던 엘리엇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레베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엘리엇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대신 헛기침을 하며 존재감을 알렸다. 그러자 레베카가 화들짝 놀라며 이브에게서 떨어졌다.

‘황태자가 공녀에게 눈치를 주고 있잖아? 방금 전까지 정말 예쁘게 웃고 있었는데……. 역시 엘리엇 황태자는 심술궂은 사람이야.’

레테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아쉬워했다.

“그런데 어떤 게 더 알고 싶은 거예요? 우리에게 말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아, 음…… 그게…… 가족은 어떤 느낌인건지 궁금해서요.”

이브의 질문에 레테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는 걸 혼자만 모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래서 재빨리 덧붙였다.

“그렇다고 내가 가족이 없는 건 아니에요! 나도 가족이 두 명이나 있어요. 에녹이랑 미하일이 내 가족이거든요.”

“대주교랑 그 기사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그 사람들은…….”

“가족 맞아! 내가 눈을 뜰 때 같이 있어 주고, 몇 달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 나를 지켜 줬어.”

의구심을 표하는 엘리엇에게 레테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에녹이랑 미하일이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니잖아. 그래서 그게 궁금한 거야.”

레테의 말에 모두가 생각에 잠겨 각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렸다.

“일단 어머니는 엄청 좋은 느낌이야. 함께 있으면 포근하고, 따뜻하고…… 그래서 내가 지켜 줘야 해.”

“네? 지, 지켜 준다고요? 어머니를요?”

엘리엇이 클로이를 떠올리며 말하자, 다리아를 생각하고 있던 레베카가 창백한 표정이 되었다.

“그럴 리가…… 지켜 줘야 하는 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예요. 어머니 앞에 있는 아버지는 커다란 사자 앞에 있는 토끼처럼 연약하잖아요.”

“뭐? 아버지가 연약하다고?”

엘리엇의 새빨간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끔뻑끔뻑 움직였다.

“음…… 아버지가 연약한 느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지켜 줘야 하는 건 맞는 것 같아요.”

잠자코 듣고 있던 이브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니까요.”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

레테는 이브의 말을 따라 읊으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레테에게도 소중한 존재들이 있었다. 에녹이 소중했고, 또 인정하기는 싫지만 미하일도 소중했다. 두 사람 모두 잃게 된다면 굉장히 슬플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들이 말하는 가족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우으으…… 더 어려워졌어요.”

결국 레테는 울상이 되어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가장 쉬운 방법은 정말로 가족을 가져 보는 건데…….”

이브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레테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그 순간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 곱씹고 있던 레베카가 흠칫 놀라며 불안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레테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는 이브의 손을.

‘서, 설마 이브 황자님이 정말로 성녀님의 가족이 되어 주시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얼마 전 이브와 함께 엿들었던 황제와 황후의 대화가 떠오르면서 불안한 마음이 점점 커졌다.

황족의 가족이 되는 방법은 역시 그것밖에…….

“아, 정말 모르겠다.”

레테는 동화책을 옆으로 치우곤 바닥에 드러누웠다. 일 년 내내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는 황궁의 온실 바닥은 하얀 눈으로 뒤덮인 바깥과 달리 따뜻했다.

바닥에 스치는 풀꽃들에게서 또다시 그리움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레테는 손을 뻗어 푸릇푸릇한 잎사귀들을 스치듯 매만지며 빙그르르 몸을 굴렸다.

“어, 성녀님. 그럼 옷이 엉망이 될 텐데…….”

“괜찮아요!”

이브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레테는 크게 개의치 않으며 활짝 웃었다. 대신 바닥 위에 귀를 대고서 풀잎사귀 아래에 숨겨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근, 두근.

꼭 흙바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소리가 났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바닥에 귓가를 더욱 바짝 대던 레테는 그 소리가 바닥이 아닌 자신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어……?”

불현듯 온실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묘한 감각이 또다시 몸을 울렸다. 레테는 가만히 양손을 가슴 위로 올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왜 그래, 레테?”

엘리엇이 영 불안하다는 얼굴로 레테를 내려다봤다.

“……그냥, 기분이 이상해.”

레테는 멍청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가족들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쳤던 아이들은 조금 심심해졌다.

“어라? 이브 황자님, 저게 뭐지요?”

“어? 못 보던 물건인데.”

이브와 레베카가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바스락바스락 풀잎 사이로 움직였다.

그 사이, 두근거리는 레테의 심박 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작은 상자예요.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나 봐요.”

“으음…… 이렇게 하면 열리지 않을까?”

두 사람의 말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스라했다.

“너 정말 아픈 거 아니야?”

“…….”

레테를 내려다보는 엘리엇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러나 레테는 엘리엇이 아닌 그 너머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유리 온실 위로 눈이 쌓인 탓인지, 천장이 온통 새하얬다.

아주 오래전에 레테는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따뜻한 시선 속에서…… 포근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어! 열렸다!”

귓가가 먹먹한 가운데 철그럭거리며 무언가 열리는 소리만이 이명처럼 크게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쿵!

레테의 심장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아래로 추락했다.

“아……!”

순식간에 몰아치는 고통에 가슴을 움켜쥔 레테가 몸을 비틀며 숨을 토해 냈다.

“레테! 너, 왜……!”

엘리엇의 외침이 온실 안을 크게 울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던 이브와 레베카도 놀라 레테에게 뛰어왔다.

“정신 차려! 레테! 레테……!”

“성녀님! 괜찮으세요? 성녀님……!”

“우으으, 흑…… 성녀님……! 안 돼요, 성녀님!”

세 아이의 얼굴이 어지럽게 눈앞을 스쳐갔다. 점차 시야가 흐릿해졌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사이로 아까부터 환청처럼 어렴풋이 들려오던 노랫가락이 다시금 들려왔다.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나를 향해 웃어 줘요. 꽃과 나비와 함께 춤을 추고…….’

그 노래는 쉬이 잠들지 않는 어린 아기들을 위해 부모들이 들려 주던 요람노래였다.

‘어머니…… 아버지…….’

뜨거운 눈물이 왈칵 눈가를 타고 흘러내림과 동시에, 레테의 눈이 감기었다.

“안 돼! 레테!”

레테의 몸이 아래로 추욱 쳐졌다. 이브와 레베카는 어쩔 줄 몰라하며 울음만 터뜨렸다.

그 와중에 혼자 울지 않던 엘리엇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침착하게 레테를 등에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브와 레베카도 눈물을 닦으며 엘리엇의 뒤를 따라 함께 뛰었다.

방금 전까지 네 명의 아이들의 대화로 소란스럽던 온실은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그 적막한 고요 속에서 이브와 레베카가 발견하였던 작은 상자가 뚜껑이 열린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썩 조잡한 모양새의 가죽 팔찌 세 개가 밖으로 튀어나와 풀잎사귀 위를 나뒹굴었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엘리엇과 이브는 레이몬드에게 크게 혼이 났다.

어지간해서 아이들 앞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는 레이몬드가 화를 내자, 간신히 울음을 그쳤던 이브와 레베카는 다시금 찔끔찔끔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는 엘리엇마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미하일과 에녹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잠시 레테를 살피던 미하일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님의 몸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곧 깨어나실 터이니 걱정은 내려놓으십시오.”

“정말 괜찮은 게 맞나요? 얼굴이 이렇게 창백한데, 혹시 잘못되는 건……!”

레테의 머리맡에 있던 클로이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레테보다도 더욱 창백해진 얼굴로 미하일을 다그쳤다.

“……황후 폐하께서는 제게 무슨 뜻으로 그런 제안을 했냐고 물으셨지요?”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미하일이 나직한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성녀님께서 쓰러지신 곳이 어디라고 하셨지요?”

“황궁의 온실이다.”

미하일의 물음에 대신 답한 것은 레이몬드였다. 그는 아까부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눈가를 찡그렸다.

“내 허가 없이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인데 황자들의 말썽에 성녀가 휘말린 모양이다.”

“그럼 그곳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살펴보라니?”

레이몬드가 물었으나 미하일은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성녀의 안정을 위해 에녹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방에서 내쫓았다.

“어머니, 성녀님은 깨어날 수 있는 거지요?”

“엘리, 이브. 너희는 캐롤라인 저택까지 레베카를 데려다주고 오렴. 많이 놀라서 혼자 돌아가긴 힘들 거야.”

훌쩍거리며 묻는 이브를 다독이며 클로이가 아이들을 보냈다. 엘리엇과 이브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레베카를 데리고 갔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레이몬드와 클로이는 무의식적으로 황궁 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주교가 무슨 뜻으로 그곳을 살펴보라 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레테가 쓰러진 원인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온실 안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디딜 적에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공기가 두 사람을 에워쌌다.

“이브가 말한 상자가 이것인가 보군.”

바닥에 떨어진 작은 나무 상자를 발견한 레이몬드가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요 며칠 계속되었던 두통이 더욱 거세어졌다.

“윽…….”

“괜찮아요, 레이?”

무릎을 털썩 꺾으며 바닥에 주저앉는 레이몬드의 모습에 놀란 클로이가 그에게 달려갔다.

“잠깐, 클로이…… 이건…….”

레이몬드가 숨을 거칠게 토해 내며 바닥을 짚었다. 풀밭 위로 굴러다니던 오래된 디자인의 가죽 팔찌 세 개가 그의 손바닥을 스쳤다.

“아…….”

동시에, 클로이 또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이건…… 틀림없이 그때…….”

‘그 팔찌’였다. 묵은 기억 속, 그 아이가 선물해 주었던…….

그 아이?

그 아이가 대체 누구지?

‘그럼 나랑 가족 같은 사이해요, 클로이!’

어디선가 또랑또랑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나와 클로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오롯한 애정과 호의만이 깃든,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럼 클로이도 아기가 생겼을 때 젬마 부인처럼 기뻐서 울었나요?’

목소리는 때론 어른의 형상이다가도 또 때로는 아이의 형상을 갖추었다.

‘클로이랑 나랑 이러고 있으니까 꼭 가족 같지 않아요?’

클로이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안다. 어떻게, 어떻게 이 목소리를 잊고 있었던 거지?

“레테…….”

망각의 장막이 걷히며 오랫동안 묵혀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씩 흘러나왔다.

‘완전히 잘못 짚었네요. 난 그쪽이 아닌데.’

‘제 어머니는……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어요.’

‘어머니가 나를 정말 사랑했다는 걸 알아요.’

‘괜찮아요. 어차피 나와 함께 있던 일은 다 잊어버릴 테니까.’

‘저는 레테잖아요.’

휘몰아치는 기억의 홍수에 클로이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이는 스스로를 레테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는 레테가 아니었다.

“아니야, 레테가 아니라…….”

거친 숨과 함께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클로이는 두 팔로 바닥을 짚은 채 간신히 버티며 잃어버린 아이의 이름을 토해 냈다.

“에스델…….”

에스델, 에스델. 나의 작은 에스델. 눈물로 빚어 낸 서러운 나의 아이.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나를 붙들던 아이의 작은 온기로 살아 숨 쉴 수 있었다.

‘이제 그만 나를 알아봐 주면 안 되나요? 어머니, 엄마, 아빠…….’

‘나, 에스델이에요. 당신이 죽는 순간까지 사랑해 주었던.’

‘제발, 제발 한 번만 내 이름을 불러 주세요, 엄마…….’

‘나 여기 있잖아요. 당신들의 에스델이 여기 있잖아요. 그런데 왜 날 몰라보나요…….’

너를 더 일찍 알아보지 못했던 내가,

오랫동안 너를 잊고 살아갔던 내가,

어떻게 네게 용서를 바랄까.

에스델, 에스델, 나의 서러운 에스델.

‘나는 죽는 게 아니에요. 사라지는 것도 아니에요. 라나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두 분 모두 울지 마세요.’

‘망각은 내가 두 사람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에요. 에스델은 이제 잊고, 두 사람을 축복할 새로운 생명과 함께 행복하세요.’

아니다. 내가 너를 잊는 건 결코 선물일 수가 없다.

고통스러웠던 과거, 거슬러 올라와야 했던 한 차례의 죽음, 나를 괴롭혔던 남자…….

그 모든 것을 모두 합하여도 너를 잃어버린 슬픔에 비견되지 않는다.

에스델, 에스델, 나의 가엾은 에스델.

그러나 너는 나를 위해 망각을 선택했구나.

‘사랑해요. 그리고 정말 많이 감사합니다, 두 분. 나의 어머니…… 아버지…….’

사실은…… 누구에게도 잊히지 않기를 원했으면서.

그래서 그토록 서글픈 미소와 함께 떠나갔으면서.

‘나는 이렇게 한눈에 클로이를 알아봤는데, 왜 클로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거야?’

모두가 잠든 어느 밤, 옛 동화 속에 등장하는 요정처럼 날아온 너는 속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클로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해. 전혀 못 알아봐. 나는 그녀에게 없는 사람인 거야.’

‘사실은 안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안기고 싶었는데.’

‘나를 조금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눈동자에 의심이 있었어.’

너의 설운 울음은 모두 나로 인한 것이었다. 너를 알아보지 못한 한심한 내가, 너를 울렸다.

나는 그토록 못난 어미였다.

“……로이! 클로이!”

세차게 흔드는 손길에 클로이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참혹하게 젖은 얼굴을 하고 있는 레이몬드가 있었다.

“레이, 에스델, 에스델이…….”

클로이가 울먹이며 레이몬드의 팔을 붙잡는 순간, 어디선가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은 이 공간에 남아 있는 서러운 환영을 발견했다.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자그마한 아기 에스델을 품에 안고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젊은 날의 클로이. 그리고 몇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두 모녀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젊은 날의 레이몬드.

그들이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었던 옛 시간 속의 기억이었다.

“아…….”

클로이의 잇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쓰러지려는 그녀의 몸을 레이몬드가 단단히 붙잡았다.

“나는 저 장면을…….”

짓씹듯이 내뱉은 레이몬드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에스델에게 노래를 불러 주던 클로이가 레이몬드와 눈을 마주치며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잠든 에스델이 그녀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옛 기억의 환영을 바라보는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런데, 내가 잊고 있었어. 그렇게 아팠던 너를…… 너와 나의 에스델을…….”

점차 흐릿해지던 환영이 마침내 희미하게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싸늘한 적막이 두 사람의 사이로 내려앉았다.

두 사람이 한참동안 멍하니 있던 때, 돌연 정신을 차린 클로이가 벌떡 일어섰다.

“당장 에스델에게 가 봐야 해요……!”

두 사람은 곧바로 에스델이 누워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되찾았음을 알아챈 미하일이 피식 웃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레테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던 에녹 또한 미하일에 의해 억지로 끌려 나갔다.

“아…… 에스델…….”

클로이는 다시 한번 무너지려는 몸에 힘을 주며 간신히 에스델이 누워 있는 침대 앞까지 걸어갔다.

아이는 그들이 방을 나서던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 위에 바르게 누워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을 내쉬었다. 아까와 달리 혈색이 도는 아이의 얼굴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에스델, 착한 내 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클로이가 아이의 얼굴 위로 떨어진 자신의 눈물을 닦아 내며 속삭였다.

“엄마를 위해 그랬구나. 엄마가 슬플까 봐…… 불행하지 말라고, 모든 힘든 기억들을 가지고 가 버렸구나…….”

“…….”

서럽게 우는 클로이의 뒤편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레이몬드는 울먹이는 클로이의 손등을 감싸 쥐며 마찬가지로 서글픈 눈으로 작은 에스델을 쳐다보았다.

“불쌍한 내 아가, 엄마는 네가 있어 숨 쉴 수 있었는데…… 왜 너의 기억까지 가져가 버렸니. 너는 절대 잊고 싶은 기억이 아니었는데……. 내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반짝이며 빛이 나는 기억이 너였는데…….”

정말이었다. 시간을 거스르기 전, 삶의 모든 것이 불행하였던 클로이 가넷슈를 유일하게 지탱해 주었던 게 바로 어린 에스델이었다.

그 소중한 에스델을 오랜 기간 잊고 살았다는 게 너무나 죄스러워서, 클로이는 에스델의 작은 몸 앞에 결국 무너져 버렸다.

“가엾은 내 아이…….”

레이몬드의 낮은 음색이 슬픔에 젖어 바스러졌다.

그의 굵은 손바닥이 무너져 버린 클로이의 몸을 한 번, 잠든 에스델의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슬픔을 표현할 줄 모르는 남자라서, 죽음의 순간에마저 눈물이 아닌 웃음을 선택한 남자라서. 잃어버린 아이와의 재회 앞에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헛헛한 가슴을 억누르며 아이의 얼굴만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가 뿌옇게 흐려진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 낸 그는, 자신이 한참 전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면 안 된다고. 대륙의 주인이 될 사람은 울면 안 되는 거라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배워 왔는데.

잃어버린 시간 속, 레이몬드는 그녀의 배반에도 울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에도 울지 않았다.

한차례 시간을 거슬러 다시 만난 그녀에게 사랑을 토해 냈을 때, 한 번. 그때도 딱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린 정도였다. 이렇게 온 얼굴이 처참하게 젖을 만큼 서글피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 아니.’

그러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지금과 같이 울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아이가, 성녀의 가면을 쓴 작은 에스델이 그들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그 순간에 자신은 분명 울고 있었다.

“에스델…….”

레이몬드는 소리 내어 아이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여전히 잠든 아이는 깨어나지 않았다.

* * *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두 사람은 진정하고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그 사이 핼쑥해진 클로이의 얼굴이 안쓰러워서 레이몬드는 그녀에게 들어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클로이는 레이몬드와 함께 에스델의 곁을 지킬 거라며 고집을 부렸다.

별수 없이 클로이에게 약한 레이몬드는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함께 에스델을 지켜보는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작았던 에스델이…… 이만큼이나 자라다니.’

클로이는 자신의 사후 에녹 브란스 경이 아이를 지켜 주었단 사실을 기억해 냈다.

성녀로 돌아온 레테의 옆을 한결같이 지켜주던 사람. 참, 고마운 사람…….

“클로이. 괜찮은가?”

클로이가 자신이 모르는 에스델의 시간들을 생각할 적에, 레이몬드가 그녀에게 물었다.

“……?”

두 눈을 깜빡이며 돌아보자, 그의 다정한 손끝이 까칠해진 그녀의 뺨을 쓸었다.

“힘든…… 기억들이 갑자기 생각난 거잖아. 그것도 한꺼번에.”

“아…….”

뒤늦게 레이몬드의 말을 알아들은 클로이가 부드럽게 두 눈을 휘며 답했다.

“난 괜찮아요.”

잔잔한 눈동자가 더욱 짙은 애정을 담으며 자신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힘들던 순간들마다 힘이 되어 주었던 당신을 함께 기억하니까.”

그녀가 여러 번 레이몬드에게 강조하였던 것처럼,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나약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의 불행을 이겨 낼 만큼 곧은 의지가 있었고, 제게 그런 의지를 심어 준 남자를 향한 굳은 신뢰와 애정이 있었다.

“아까는 갑작스러운 기억에 놀라 약한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우리 에스델을 위해서라도 더 강한 모습만 보여 줄 거예요.”

클로이는 그렇게 말하며 잠든 에스델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레이몬드가 그런 클로이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아 주었다.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잠든 에스델만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정자세로 누워 있던 에스델이 몸을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

클로이와 레이몬드는 숨을 죽이고 그런 에스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조금씩 뒤척거리던 에스델은 눈가를 찌푸리더니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올렸다. 꼭 긴긴 겨울잠을 자다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어…….”

몽롱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흐릿하던 시야가 차츰 밝아지면서 에스델은 뒤늦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클로이……. 레이몬드……?”

발음이 뭉개지며 사랑해 마지않는 이름자가 자그마한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아니야, 그럴 리가.

너무 그리운 나머지 환상이 보이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분명히 그때 소멸되었는데…….’

에스델은 자신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클로이와 레이몬드에게 작별을 건넨 이후, 에녹의 품에 안겨 그의 노래를 들으며…….

“에스델……!”

벅찬 감정을 견디지 못한 클로이가 에스델을 와락 끌어안았다. 순간 붕 떠 있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동시에 머리가 핑글핑글 돌며 갖가지 기억들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탑에 갇혀 있던 자신을 구하러 와 주었던 에녹. 어느 날 갑자기 발현된 성력과 라나 신이 보여주었던 클로이의 가엾은 삶.

클로이를 되살리겠다며 흑마술에 손을 대 제국민의 삼 분의 일을 학살하였던 카일로스. 한차례 시간을 망각시켜 모든 것을 되돌리고자 하였던 일.

마침내 떠나야 하는 시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레이몬드의 곁에서 진심으로 미소 짓던 클로이.

그리고 가장 최근에 얼음 속에서 다시 눈을 뜬 것까지…….

“아……!”

에스델은 그제야 이미 한 번 소멸되었던 자신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라나 신은 어째서…….’

가슴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시선을 내리자 잘게 떨리고 있는 작은 두 손이 보였다. 에스델, 그녀의 손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그녀의 손이었다.

‘나를…… 소멸시키지 않고…….’

소멸되지 않고 살아 있었다. 아까부터 쿵쿵거리며 거세게 뛰고 있는 심장이 그 증거였다.

“에스델, 우리 아가…….”

가느다란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니 구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클로이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보다 조금 더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 얼굴은 제가 사랑하던 클로이가 맞았다. 그녀가 제게 ‘에스델’이라고, 오랫동안 잊혔던 이름으로 저를 부르고 있었다.

“클로이…… 정말 클로이예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들이 믿기지가 않아서, 에스델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지, 에스델.”

클로이가 웃을 듯 울 듯 애매한 표정으로 에스델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클로이가 아니라 ‘어머니’잖아.”

“……!”

그 순간, 선연한 감각 하나가 에스델의 심장을 관통했다.

‘아, 어쩌면 라나 신은…….’

클로이와 레이몬드, 그들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성녀 레테가 아닌, 그들의 아이 ‘에스델’로서.

한차례 시간이 뒤틀렸기에, 원래라면 지금은 더 이상 그녀가 존재할 수 없는 시간대였다. 두 명의 쌍둥이 황자가 그 증거였다.

그러나 라나 신의 권능이 그녀를 다시 이곳에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만고의 법칙을 깨는 일이기도 했다.

‘감사해요, 라나 신, 나의 조물주. 부모님의 곁에서 행복하게 지내다가 반드시 다시 당신의 품으로 돌아갈게요.’

자신이 존재하면 안 되는 이 시간대에, 하필이면 열 살 남짓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피와 살을 내어준 어버이의 곁에 돌려보낸 라나 신의 뜻이 새삼 가슴 위로 뭉클하게 와 닿았다.

왈칵, 울음이 눈가로 차올랐다. 토끼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어, 어어…….”

클로이가 말한 것처럼 ‘어머니’라고 부르려 했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에 띄게 달달 떨고 있는 손끝을, 클로이가 말없이 감싸 쥐어 주었다.

그 온기에 용기를 낸 에스델이 클로이에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거예요?”

“그럼.”

대답한 것은 클로이가 아니라 레이몬드였다. 제 앞에 나란히 무릎을 꺾어 앉은 채 서글피 미소 짓고 있는 두 사람을, 에스델은 떨리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너는, 우리의 에스델이잖아.”

“어머니, 아버지라고 불러 줘, 에스델.”

아이를 어르듯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에스델의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더 이상 그들의 앞에서는 울지 않고 싶었는데. 서러운 울음이 에스델의 의지를 배반하며 쏟아졌다.

“우, 우으으, 흐어어어엉. 내, 내가 얼마나…… 얼마나…….”

발갛게 물든 눈을 한 에스델이 클로이와 레이몬드의 품으로 와락 안겨들며 코를 훌쩍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몰라요. 클로이와 레이몬드를…… 어머니와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아버지라고. 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두 사람을 그렇게 불러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허락된 순간은 마지막으로 그들을 떠나던 시간뿐이었다.

“나는 첫눈에 알아봤는데, 두 사람은 나를 못 알아봐서…… 나는 그게 너무 속상해서…… 아, 아니, 그러니까 두 분을 탓하는 게 아니라…….”

에스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두 사람에게 매달렸다. 그런 에스델의 작은 몸을 레이몬드의 굵은 손바닥이 토닥토닥 다독여 주었다.

“울지 마, 아가.”

천천히 내려앉은 클로이의 입술이 에스델의 이마 위에 닿았다.

“엄마가 여기 있잖아.”

“아버지도 여기에 있어.”

“엄마랑 아빠가 미안해. 우리 아가를 조금 더 빨리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에스델. 착한 우리 아가…….”

동시에 굵은 눈물방울이 에스델의 얼굴 위로 후두둑, 하고 떨어졌다. 클로이와 닮은 에스델의 길고 촘촘한 은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눈꺼풀이 감김과 동시에 늘어졌다.

레이몬드가 아이의 작은 몸을 안아들고서 침대로 향했다. 옆에서 클로이가 함께 걸으며 아이가 좋아하던 요람가를 흥얼거렸다.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 천사들의 성이 있어요…….”

희미한 노래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여요…….”

마침내 노래가 끝났을 때,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두 사람은 서글피 두 눈을 휘었다.

“사랑해, 에스델. 어머니와 아버지가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에스델.”

* * *

이튿날, 엘리엇과 이브는 성녀님이 걱정된다며 아침 일찍부터 찾아왔다. 그곳에는 이미 일어난 에스델이 테이블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레테!”

깨어난 에스델의 모습에 엘리엇이 기뻐하며 쪼르르 달려갔다.

“레테가 아니라 에스델이란다.”

에스델의 옆에 앉아 썩 좋지 않은 솜씨로 정성스럽게 머리를 빗어주고 있던 클로이가 두 아이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에스델…… 이요?”

혹시나 성녀님이 아직 아픈 건 아닌지 꼼꼼하게 안색을 살피던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다가오는 신년제 때 모두에게 공표할 것이다. 아스타 제국의 유일한 황녀, 에스델의 존재를 말이야.”

마찬가지로 에스델의 옆에 앉아 먹기 좋게 빵을 잘라 주던 레이몬드가 흐뭇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미리 이야기한 것들이 있었기에, 엘리엇과 이브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그럼……!”

엘리엇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스델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성녀님이 제…… 여동생이 되는 건가요?”

여동생, 이라는 대목에서 엘리엇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을 타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클로이가 어머,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찰나.

“여동생이라니!”

레이몬드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에스델은 명백한 너희의 누나이다.”

“네?”

단정 짓는 아버지의 말에 엘리엇이 놀라 두 눈을 끔뻑였다.

“하, 하지만 제가 아스타 황실의 첫째였잖아요!”

“나와 네 어머니의 첫 아이는 에스델이다.”

“에스델은 우리보다 키도 한 뼘이나 작은데요?”

그렇게 되물으며 에스델을 쳐다보는 엘리엇의 표정이 다소 억울해 보였다.

“그렇구나. 성녀님은, 아니, 에스델은 이제 우리 누나인 거구나.”

반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브가 활짝 웃으며 에스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가족이 되어 줘서 고마워, 에스델.”

혼란스러운 표정의 엘리엇과 화사하게 웃고 있는 이브, 두 쌍둥이 동생을 바라보는 에스델의 얼굴 위로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고마워, 엘리엇, 이브. 내가 없는 동안 두 분이 슬프지 않도록 옆을 지켜 주어서.’

차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감사 인사를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은 에스델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답했다.

“나야말로, 이브.”

에스델은 까치발을 하고서 자신을 거부감 없이 받아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쳐다보던 엘리엇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내적 합리화를 시도했다.

‘뭐, 누나든 여동생이든 그건 크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에스델이 나보다 누나지만, 그래도 나보다 작고 귀여우니까. 그러니까 상관없는 거야!’

머릿속에서 판단을 마친 엘리엇이 이브의 옆으로 쪼르르 걸어가더니, 에스델을 향해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

“이브만 편애하는 건 반칙이야. 나도 쓰다듬어 줘.”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과 달리,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엘리엇이 오래 전부터 여자 형제를 갖고 싶어 했던 걸 알고 있는 클로이와 레이몬드는 그 모습을 보고 소리 내어 쿡쿡 웃었다.

“엘리엇, 이브. 아버지가 너희에게 당부할 것이 있으니 잘 명심하도록 하여라.”

몇 번의 헛기침을 하며 이목을 집중시킨 레이몬드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부터 에스델을 너희가 지켜 주어야 해. 에스델은 너희 어머니를 닮아서 작고 연약하니까…….”

그 대목에서 말을 흐리며 힐긋 클로이의 눈치를 보자, 조금 샐쭉해진 표정으로 그녀가 레이몬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연약하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음,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말이다. 아버지에 비하면 연약하잖니. 아무튼 너희, 그동안 어머니께 접근했던 위험한 남자들을 아버지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기억나지?”

“네, 아버지.”

“그럼요, 아버지.”

엘리엇과 이브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앞으로 에스델에게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너희가 그 자들을 처리해야 한다. 알겠느냐?”

“에이, 아무도 저한테 위해를 가하지 못할 거예요. 이래 봬도 대륙에 유일한 성녀인 걸요!”

흥미로운 표정으로 세 부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에스델이 푸스스 웃으며 끼어들었다.

“맞아요, 레이몬드. 게다가 ‘처리’라니. 꼭 나쁜 짓을 하는 악당 같잖아요.”

“…….”

클로이마저 나서서 거들자 레이몬드는 입을 꾸욱 다물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래도 엘리엇과 이브에게는 두 여자가 없을 때 따로 다시 당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엘리엇, 이브, 여기 앉아서 이거 같이 먹을래?”

에스델이 레이몬드가 먹기 좋게 잘라 준 빵조각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쌍둥이 황자는 냉큼 대답하며 에스델의 앞에 마주앉았다.

“이제는 정말 괜찮은 거지?”

“어제처럼 또 쓰러지는 건 아니지?”

누가 보아도 남매란 걸 알 수 있을 만큼 꼭 닮은 세 아이가 한 테이블 앞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클로이와 레이몬드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세 아이를 바라만 보았다.

* * *

에스델은 아주 북적거리는 아침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 시도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족들이 각기 바쁜 일로 돌아간 뒤에야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직도 꿈만 같아…….”

조막만한 손을 가슴 위에 올리자 콩콩 뛰는 심박 속에 깃든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에스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 줄곧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에녹 브란스.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 주었던 남자.

한차례 시간을 되돌리기 이전, 가엾은 에스델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자, 스승이자…… 어떤 의미로든 유일했던 남자.

시간을 되돌린 이후에도, 그녀의 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기억해 주었던 남자.

“나를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더니.”

밖으로 나온 에스델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두 눈을 내리감고 있는 에녹을 발견했다. 차가운 눈밭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에스델의 가슴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우리가 만났구나.”

한 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에스델의 몸이 조금씩 자라나더니, 그녀가 시간을 되돌리기 직전의 나이까지 자라났다.

눈을 감고 있는 에녹을 향해 허리를 숙이자, 함께 자란 기다란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위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동시에 촘촘하게 자리 잡은 백금색의 속눈썹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누구십니까.”

미약하게 찌푸린 얼굴과 차가운 목소리가 에스델을 향했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불쾌감을 잔뜩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에스델이 그토록 좋아하고 사랑하였던 얼굴과 목소리였다.

“이런, 깨어났네.”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에녹은 한껏 예민해진 상태였다. 제국 수도에 온 이후로 젊은 여자들의 접근이 끊이질 않았다. 자꾸 거부해도 다가와 오죽하면 미하일이 딱하게 여길 정도였다.

그렇잖아도 성녀의 곁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 같아 죄스러웠는데, 어제 성녀가 황궁의 온실에서 쓰러진 일로 죄책감이 극에 달했다.

다행히 몸에는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지난밤 이후로 황제와 황후가 성녀의 곁을 지키는 바람에 그로서는 성녀의 안위를 살필 길이 전무했다. 때문에 그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이다, 에녹이 나를 기억하지 못해서. 에녹은 필요 없는 부분에서 고지식하니까.”

그러던 와중에 처음 보는 여자가 다가와 친밀하게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얼핏 클로이 황후와 닮았으나, 황후는 아니었다.

“당신에게 많이 고마웠다고 말하려고 왔어.”

“……?”

정신이 이상한 여자인가. 고민하는 찰나.

“사랑해, 나의 에녹.”

여자가 에녹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 쥐며 서서히 허리를 수그렸다. 당황한 그가 두 눈을 동그랗게 키우는 게 보였다.

여자는 포스스 웃으며 그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동시에 에녹의 녹색 눈동자가 감기며 스르륵 잠들었다.

“가족은 이제 많으니까, 이번에는 가족이 아니라 다른 유일한 존재가 되어 줘.”

규칙적인 숨을 뱉어 내며 잠든 에녹의 모습을 보며 에스델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육 년만 지나면 에스델도 어른이 되니까.”

그의 목에는 여전히 늘 매고 다니는 목걸이가 함께 있었다.

“그때까지 예쁘게 기다려야 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를 내려다본 에스델이 아이처럼 말간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돌렸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그녀의 몸이 다시금 어린 아이의 것으로 변해 갔다.

에녹이 앉아 있는 자리 주변에 차가운 눈이 녹아 내리고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아났다. 따스한 기운이 오래도록 그 공간에 머물렀다.

* * *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신년제의 날, 레이몬드는 모두의 앞에서 깜작 놀랄 발표를 했다.

“성녀 레테를 황제 레이몬드와 황후 클로이 사이의 유일한 황녀로서 아스타 황실에 입적할 것이다.”

그는 놀라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며 비스듬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황녀 에스델. 그것이 앞으로 성녀의 또 다른 이름이 될 것이니, 모두 아스타 제국의 새 황녀를 반가이 맞이하라.”

당당하게 ‘성녀 레테’가 이제는 ‘황녀 에스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레이몬드의 목소리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이들도 이내 세차게 박수를 치며 에스델 황녀를 환영했다.

“오늘 밤의 무도회는 온전히 제국의 안녕과 에스델 황녀를 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말한 레이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긴장한 표정으로 엘리엇과 이브 사이에 앉아 있던 에스델에게 다가갔다.

자박, 자박. 그의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에스델의 표정 또한 더 이상 긴장할 수 없을 만큼 뻣뻣하게 굳어갔다.

“사랑스러운 나의 에스델.”

에스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레이몬드가 굵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더없이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녀로서의 첫 춤은 아버지와 함께해 주겠니?”

“…….”

긴장한 에스델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쳐다보고만 있자, 옆에 있던 엘리엇이 에스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네, 넵!”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에스델이 벌떡 일어나 레이몬드의 손을 잡았다. 어린 황녀의 사랑스러움에 모두가 흐뭇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의 정가운데로 나아가는 작은 에스델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에스델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성녀 레테로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보다도 더욱 설렜다. 이러다 너무 좋아서 기절해 버리면 어떡하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레이몬드와 에스델이 춤을 추었다. 클로이는 어쩐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휴, 다행이야.’

한편 다리아의 옆에 꼬옥 붙어 있던 레베카는 그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 한 달간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혹시나 성녀님이 이브 황자님의 황자비가 될까 봐.

이제 겨우 안도하게 된 레베카는 이 자리에 모인 누구보다도 즐거운 얼굴로 새 황녀님을 환영해 주었다.

음악이 끝나자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쏟아지는 가운데, 레이몬드는 에스델을 데리고 클로이가 있는 쪽으로 갔다.

클로이와 레이몬드의 황금 의자 사이에 에스델의 체구에 맞는 자그마한 황금 의자 하나가 더 놓여 있었다.

“멋진 춤이었어, 에스델.”

클로이가 에스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녀의 칭찬에 에스델의 두 뺨이 수줍게 달아올랐다.

“고마워요, 어머니.”

웅얼거리듯 작은 소리로 클로이를 향해 속삭인 에스델이 슬쩍 고개를 돌려 레이몬드에게도 말했다.

“아버지도 고마워요,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셔서…….”

그들을 어머니와 아버지라 부른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단어들을 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가슴이 간지러웠다.

두 번째 음악이 시작되고 이번에는 구경하던 이들이 하나둘씩 중앙으로 나와 파트너와 손을 맞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조금 더 소란스러워진 가운데, 엘리엇과 이브가 에스델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두 쌍둥이 황자가 에스델을 보며 동시에 씨익 웃었다.

“안녕, 에스델. 진짜 가족이 됐네.”

“멋진 데뷔였어, 에스델.”

두 황자들에게까지 에스델이라 불리니, 이제는 정말로 가족이 된 느낌이었다.

“고마워, 엘리! 그리고 이브!”

잔뜩 들뜬 에스델이 온 얼굴 가득 화사한 함박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엘리엇과 이브는 아주 잠시 동안 멍하니 그 웃음을 보다가, 이내 함께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미하일과 에녹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참 잘됐지요?”

“그러게 말이에요.”

미하일의 말에 에녹이 나직하게 맞장구를 쳤다. 에녹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함께 걸려 있었다.

“당신은 아쉽지 않습니까?”

잠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미하일이 불쑥 물었다.

“네?”

에녹은 그제야 에스델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미하일을 돌아보았다.

“아쉬워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어리둥절한 에녹의 표정에 미하일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이제 곧 교단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겁니다. 당신은 어떡할 겁니까?”

“아…….”

에녹이 잠시 망설이며 다시금 저 멀리 웃고 있는 에스델을 힐긋 쳐다보았다. 그는 라미에 교의 성기사였다. 대주교가 돌아간다면 마땅히 그와 함께 교단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원한다면 제국에 남아 성녀님, 아니, 에스델 황녀님의 기사가 되어 곁을 지켜 주세요.”

“제가 그래도…… 괜찮습니까?”

“물론이요. 당신은 누구보다도 가장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미하일은 단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하다면, 황녀님의 곁에서 자라는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어요.”

에녹은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이것 참, 괜히 배가 아프네요.”

투덜거리는 대주교의 목소리에 에녹은 잔잔하게 웃었다.

곧이어 세 번째 곡이 시작되며 에녹을 알아본 귀족 영애들이 그들이 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몰려들었다.

미하일은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테라스가 있는 복도 쪽으로 나가려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 에스델을 보았다.

에스델은 여전히 새 가족들 틈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이번에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성녀고 뭐고 용서 않을 겁니다.”

들리지도 않을 위협을 내뱉는 그의 입술 사이로 피식,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좀 해피엔딩으로 끝내 보자고요, 우리 공주님.”

아, 공주가 아니라 황녀였지요. 아무렴 어때.

에스델이 두 황자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일어나는 것을 본 미하일이 구시렁거리며 몸을 돌렸다. 이제는 에스델의 해피엔딩을 위해 남은 미련을 내려놓아야 할 때였다.

은은하게 울러 퍼지는 음악 사이로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그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미하일은 적막한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옆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창밖으로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려앉고 있었다.

아스타 제국의 가장 아름다운 한 해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작은 나의 에스델.

아가는 그저 행복하렴. 오래오래.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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