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7. 성녀 레테의 귀환
라미에 교단의 신전에는 라나 신의 뜻을 받드는 여러 사제들과 더불어 그들의 수호자인 성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수장인 성기사단장 에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신전의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도드라지는 출중한 실력과 상냥한 성격 또한 그가 사랑 받는 이유였지만, 무엇보다도 뛰어난 외양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했다.
이 아름다운 외양의 남자가 이따금씩 마을에 내려갈 때면, 마을 처녀들의 마음은 숱하게 흔들리곤 했다.
“세상에, 에녹 님이야!”
“에녹 님이 마을에 오셨어!”
햇살에 반짝이는 부드러운 백금발과 에메랄드처럼 요요한 아름다운 눈동자가 매번 그녀들의 가슴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에녹 님,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샐리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하나뿐인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외지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에녹 또한 마을에 방문할 때면 샐리의 여관에 제일 먼저 찾아와 짐을 맡기곤 했다.
“대주교님의 심부름으로 왔답니다. 서간을 부칠 수 있을까요?”
샐리를 알아본 그가 입가로 잔잔한 미소를 걸치며 답했다.
그 미소에 마을의 다른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내심 그를 흠모하고 있던 샐리는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그만큼 황홀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움이 있다면, 그의 미소는 결코 한 사람만을 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한 성기사단장 에녹은 상대가 누구든지 언제나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샐리는 그 사실이 좋으면서도 아쉬웠다.
‘저 미소가 내게만 향한다면 정말 기쁠 텐데.’
하지만 영리한 샐리는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저렇게 잘나신 분이 어째서 아직까지 혼자이신 걸까.’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서른 가까이 되어 보이는 그가 어째서 아직까지 연인 하나 없는지. 마을의 처녀들은 그것과 관련하여 상당히 여러 번 논쟁을 벌여 왔었다.
사제들은 연인을 둘 수 없었으나 성기사들은 그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대다수의 성기사들은 신전과 가까운 이 마을에서 가정을 꾸리곤 했다.
‘아마 저 목걸이의 주인 때문일 테지.’
바로 그것이 마을 처녀들이 생각해 낸 결론이었다.
샐리는 그의 목에 매달려 있는 자그마한 하트 모양의 로켓 목걸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성기사가 되어 처음 마을을 방문하였던 십여 년 전부터 한시도 사라지지 않던 물건이었다. 로켓 목걸이의 용도를 생각해 보았을 때, 필히 저것은 멀리 두고 온 옛 연인을 기리는 물건일 테다.
마을의 처녀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목걸이의 주인에 대해 추측하며 숙덕였다.
‘저렇게 잊지 못하는 걸 보면, 사별한 연인이 아닐까?’
‘어쩌면 성기사가 되면서 이곳에 데려올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첫사랑일지도 몰라. 대부분의 성기사들은 그런 경우가 허다하니까.’
‘신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어 이루지 못한 비운의 상대일 수도 있어. 예를 들어 어느 작은 나라의 공주님이라던지…….’
‘이루어질 수 없는 공주님과의 사랑이라니, 너무 멋있어. 에녹 경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그들의 상상 속에서 에녹은 점차 어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희곡의 남주인공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서간을 이리 주세요. 어디로 보내 드리면 될까요?”
“여기 적힌 주소로 부탁드릴게요.”
에녹은 부드럽게 웃으며 정중한 태도로 값을 치렀다. 그렇게 그가 막 대주교의 심부름을 끝마치려던 때였다.
“에녹 님! 에녹 님!”
어린 성기사 폴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대주교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저를요?”
에녹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 아주 중대한 일이라고, 꼭 곧바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내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굳이 폴 경을 시켜 불러들인 것을 보니 필히 급한 일인가 보네요. 어서 돌아가지요.”
그가 푸스스 웃으며 바깥으로 나와 여관 앞에 묶어 둔 백마 위에 올라탔다. 히히힝, 말이 울었다.
샐리를 비롯한 마을 처녀들이 아쉬움이 담뿍 담긴 눈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신전으로 돌아온 에녹은 곧바로 대주교를 찾아갔다. 신비로운 푸른 머리칼을 지닌 대주교 미하일은 자애로운 인간 여자의 모습을 한 라나 신의 동상 앞에 서 있었다.
그를 발견한 에녹은 성큼성큼 걸어가 고개를 숙였다.
“성기사단장 에녹, 귀환하였습니다.”
대주교는 심각한 표정으로 에녹을 돌아보았다.
“늦지 않게 왔군요, 에녹 경.”
“무슨 급한 일이라도……?”
“라나 신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매사 장난스럽기 그지없던 그가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북쪽의 겨울 숲에서, 성녀가 출현할 것입니다.”
“……!”
성녀의 출현. 그것은 벌써 백 년도 더 된 옛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출현하였던 성녀 플로라가 이 세상을 뜬 이후로 무수한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지난 백 년 동안 라나 신의 대리자라는 성녀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때문에 전설 속의 인물로만 여겨지던 터였다.
그런 성녀가 출현하는 자리에, 자신이 함께할 수 있게 되다니……! 에녹은 어쩐지 오싹한 전율마저 느끼며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겨울 숲으로 떠날 것입니다. 기사단을 이끌고 성녀를 데려와야 해요. 당장 준비해 주세요.”
“네, 대주교님……!”
아주 빠른 속도로, 성녀의 출현을 맞이할 기사단이 꾸려졌다. 대주교 미하일은 직접 선두에 서서 에녹과 함께 기사단을 지시했다.
마침내 그들이 차가운 겨울 숲에 도착하였을 때, 모두들 숲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성력을 느끼곤 몸을 흠칫 떨었다.
실로 굉장한 성력이었다. 대주교의 것보다도 더욱 짙은.
“저 안쪽에서 엄청난 성력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부탁하지요.”
말에서 내린 그들은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숲 안쪽으로 내딛었다.
콧등을 에는 듯한 추위에 점차 피부의 감각이 무감각해질 무렵, 커다란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서, 서, 서, 성녀님이십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걸음을 멈추었다.
넓은 공터에는 거대하고 투명한 얼음 덩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작은 여자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대주교 미하일을 비롯한 모두가 헛숨을 삼키었다.
겨울날에 내리는 첫눈처럼 반짝이는 새하얀 머리카락, 두 눈을 감고 있음에도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태…… 열 살 가량의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성녀는 마치 인외의 존재 같았다.
그 신성하고 거룩한 모습에 엄숙한 고요가 흘렀고, 간간이 누군가의 탄성이 섞여들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대주교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제 하나가 고요를 깨뜨리며 물었다.
“일단 얼음 채로 옮기면…….”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여러 기사들이 낑낑거리며 옮겨 보려 하지만 거대한 얼음은 꿈쩍도 않았다.
“꿈쩍도 않습니다.”
“어떡하지요?”
“얼음을 깨뜨려야 할까요?”
“불을 가져와 녹여 보면 어떨까요?”
모두가 난색을 표하며 방법을 강구할 때였다.
“잠시만요.”
성기사단장 에녹이 짧은 한마디와 함께 홀린 듯이 거대한 얼음 앞으로 다가갔다. 얼음 안에 갇힌 성녀를 지그시 쳐다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대었다.
“방금 성녀의 눈이 움찔거렸습니다!”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그가 손을 대고 있던 부근을 중심으로 거대한 얼음이 쩌억, 쩌어억 갈라지기 시작했다.
“조심하십시오!”
기사들은 대주교를 보호하며 물러났다.
허공으로 번쩍 뛰어올라 도약한 에녹이 그대로 얼음 안에 갇혀 있던 성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 분이…… 성녀…….’
작고 서늘한 몸이지만, 이상하게 온기가 느껴졌다. 꼭 어디선가 한번 안아 봄 직한, 그런 눈물겹도록 사랑스러운 온기였다.
아주 짧은 순간, 에녹은 성녀의 작은 몸이 자신의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내려다본 성녀는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고요하게 잠든 채였다.
“어떻게 할까요, 대주교님.”
성녀를 안고서 대주교의 앞으로 걸어간 에녹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잔잔하게 물었다. 대주교는 성녀와 성녀를 안고 있는 에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신전으로 데려가지요.”
대주교는 먼저 몸을 돌리며 말과 마차를 매어 둔 숲의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 뒤를 나머지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따랐다.
가장 마지막으로 숲을 나온 에녹은 준비된 마차 위에 성녀를 눕히곤 곧바로 마차 밖으로 나왔다.
하얀 말 위에 올라탄 에녹이 출발 신호를 보내자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말과 마차가 움직였다.
작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대주교는 자신의 맞은편에 고이 누워 있는 성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성녀, 레테…….”
마지막한 읊조림이 마차 안을 가득 메우다 곧바로 흩어졌다.
* * *
성녀가 눈을 뜬 것은 대주교 미하일과 용맹한 사제들이 그녀를 차가운 겨울 숲에서 모셔온 지 꼬박 닷새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깜빡, 깜빡…….
가냘픈 속눈썹이 그녀의 두 눈이 깜빡일 적마다 함께 흔들렸다. 보석처럼 붉은 눈동자가 차츰 초점을 맞추며 무늬 없는 천장을 노려보았다.
“여긴……?”
장소를 가늠할 수 없어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일어나셨군요.”
“……!”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성녀가 몸을 홱 일으켰다. 처음 보는 잘생긴 남자가 그녀의 머리맡에 의자를 끌어다 앉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성녀를 맞이한 이는 다름 아닌 대주교 미하일이었다.
성녀와 대주교는 서로를 빤히 응시하며 탐색했다. 성녀가 보는 대주교는 젊고 잘생겼지만 어딘가 기분이 나쁜 사람이었다. 그리고 대주교가 보는 성녀는…….
‘확실해. 분명 소멸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주교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복잡한 생각을 포기하고선 성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당신은 누구지요?”
“나를 모르겠습니까?”
“…….”
성녀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주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거짓은 없었기에, 미하일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소개했다.
“미하일. 라미에 교의 대주교입니다.”
“라미에 교……?”
“그럼 이제 당신을 소개해 주시지요.”
“……?”
성녀가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두 눈만 깜빡이자, 대주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요?”
“아…….”
잠시 머뭇거리던 성녀가 대주교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을 소개했다.
“……레테. 그게 내 이름이랬어요.”
“끝입니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요.”
“모른다?”
대주교가 한쪽 눈썹을 엄하게 치켜뜨며 되묻자 성녀는 어쩐지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 들어 울상이 되었다.
“저, 정말이에요. 내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내가 몇 살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을 잃은 것치고는 상당히 침착해 보이는군요.”
“네? 그야…….”
성녀는 문득 말문이 막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걸까? 하지만 어째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거지?
“뭐, 오히려 잘되었습니다. 라나 신의 대리자인 성녀가 속세의 것에 미련을 두면 골치 아파지는 건 이쪽이거든요.”
‘라나 신? 성녀? 그게 대체 뭐지?’
대주교라는 남자는 아까부터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계속했다. 레테는 머리가 핑핑 돌았으나 티 내지 않았다.
“아무튼 레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미하일이 씨익 웃으며 입꼬리를 말았다. 꼭 예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던 것처럼 말하는 그의 태도에 레테는 의아하기만 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걸까?’
그 순간 그가 그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대가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니. 성격이 상당히 바뀐 듯하지만…… 뭐, 이쪽이 그쪽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군요.”
“……?”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칭찬이지요.”
“아…….”
칭찬이라는 말에 뽀송뽀송한 얼굴 위로 금세 화색이 돌았다. 그 모습이 꼭 오랫동안 칭찬을 갈망해 온 어린 아이 같아서 미하일은 당황스러웠다.
“고, 고마워요.”
성녀는 수줍게 웃으며 양 볼을 붉혔다. 그 모습에 미하일이 기겁을 하며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분명 같은 영혼인데, 다른 사람인 건가? 수줍게 웃다니, 그, 그 레테가…….’
양 팔을 문지르며 힐끗 고개를 돌리니 순수한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테가 보였다. 대주교의 얼굴이 꼭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와락 일그러졌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저어…….”
불안한 표정으로 손끝을 꼼지락거리던 성녀가 조심스럽게 대주교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저를 여기 남겨 두고 떠나실 건가요?”
“네?”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되나요? 나 혼자 있으려니 조금…… 무서워서요.”
너무나 정상적인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대주교에게 크나큰 괴리감을 안겨주었다.
‘오, 라나 신이여!’
대주교는 속으로 자신의 신을 찾았다.
‘무언가 굉장히 잘못된 게 틀림없어. 그러지 않고서야…… 않고서야…….’
“대주교님?”
성녀가 몸을 살짝 일으키며 손등을 대주교의 이마 위에 가져다 댔다.
“지금 무슨……?”
“아, 죄송해요! 안색이 안 좋으셔서 혹시 어딘가 아픈 곳이 있는 건가 하여…….”
“아픈 곳은 전혀 없습니다. 걱정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네에.”
성녀는 금세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미하일은 꼭 자신이 어린 아이를 괴롭힌 것만 같아 기분이 안 좋아졌다.
“에녹 경.”
미하일이 대뜸 웬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방의 구석에서 줄곧 소리 없이 서 있던 남자가 그제야 몸을 움직여 성녀가 누워 있던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힉……!”
이제까지 방 안에 자신과 대주교 말고는 아무도 없다 생각했던 성녀는 화들짝 놀라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당신이 성녀님의 호위를 맡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주교님.”
“음…… 성녀님이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예민한 상태입니다. 기억도 전무하고요. 그러니 에녹 경이 옆에서 세심하게 살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 꼼지락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레테는 대주교가 걸음을 옮기는 소리에 두 눈만 빼꼼 이불 밖으로 꺼내었다.
‘아, 어떡하지.’
나가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대주교가 방을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성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또다시 모르는 사람과 둘만 남겨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아까 그 사람은 나를 아는 것 같았는데.’
한편, 이불 속으로 얼굴을 숨겨 버린 성녀를 바라보는 에녹은 침착해 보이는 겉 표정과 달리 내심 굉장히 난처했다.
일단 성녀를 만난 것은 당연 처음일 뿐더러, 이토록 어린 나이 대의 여자 아이를 대하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에녹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성기사단장 에녹이라고 합니다, 성녀님.”
그의 기민한 두 눈에 하얀 이불 속에서 무언가 흠칫거리는 게 보였다.
“앞으로 제 영혼이 다하는 날까지 성녀님을 모실 것입니다.”
그 말에 이불 밖으로 성녀의 두 눈이 빼꼼 튀어나왔다. 여름 꽃처럼 새빨갛고 보석처럼 영롱한 눈동자였다.
“나를 모신다고요?”
성녀는 어색해하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마치 그 나이 또래의 아이처럼 보이는 모습에 에녹은 내심 신기했다.
성녀라고 하면 조금 더…… 조금 더 뭐랄까…… 조금 더 신비로운 존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씀을 편하게 낮추셔도 괜찮습니다.”
“네? 하지만…….”
눈치를 살피며 쭈뼛거리는 모습이 썩 사랑스러웠다. 성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에녹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에녹이라 불러 주십시오.”
“안녕하세요, 에녹.”
그가 다시 한번 이름을 알려 주자 성녀는 재빠르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그를 슬쩍 훑어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에녹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요?”
기억을 잃었지만, 그래도 어른과 아이의 개념은 있었다.
“당신은 라미에 교의 성녀니까요. 무려 백 년 하고도 십 년 만에 다시 출현한.”
“그, 성녀라는 게 대체 뭐예요?”
“네……?”
예상치 못한 답에 에녹은 순간 얼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륙의 사람이 어떻게 성녀를 모를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이곳에 오기 전에 아주 외진 산골에서 사셨습니까?”
“……음. 사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내 이름이 레테라는 것 외에는.”
성녀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단 말에 에녹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출현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다른 세계에서 넘어왔다 하더라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천천히 설명해 드리지요.”
그가 부드럽게 두 눈을 휘며 답했다.
“이곳은 이 세계를 창조하신 라나 신.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대륙의 많은 국가들이 라나 신의 교리를 따르고 있지요. 대륙 최강이라는 아스타 제국을 비롯해서요.”
“아스타 제국?”
“들어 봤습니까?”
성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양 옆으로 도리도리 저었다.
“역사 속에서 라나 신은 아주 가끔씩 본인의 뜻을 세상에 퍼뜨릴 성녀님들을 보내 주시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라나 신의 대리자라고 부르지요.”
“제가 그 성녀예요?”
“백십 년 전에 출현하셨던 꽃의 성녀 플로라 님 이후로 굉장히 오랜만에 이 땅에 찾아와 주신 귀한 분이지요.”
“…….”
에녹이 열심히 설명해 주었지만 성녀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에녹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잘 모르겠어요.”
약간의 투정 섞인 목소리에 에녹은 빙그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방비한 상태로 그의 미소와 마주친 레테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꼭 오랫동안 알아 온 사람처럼 따뜻해. 아까 그 대주교라는 남자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어.’
대주교라는 남자는 꼭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지만, 태도가 영 불만스러웠다. 대뜸 인상을 쓰질 않나, 사람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질 않나.
‘흥,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보지?’
하지만 이 에녹이라는 남자는 달랐다. 자상하고 친절했으며 무엇보다도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잔잔하게 휘는 두 눈동자가 레테를 기분 좋게 해 주었다.
“함께 라나 신을 보러 갈래요?”
그의 상냥한 물음에 레테는 귀를 쫑긋하며 되물었다.
“라나 신을 만날 수 있어요?”
“직접 만날 순 없지만. 신전의 정문에는 그분의 동상이 있어요.”
“만나러 갈래요!”
레테는 신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내내 덮고 있던 흰 이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에녹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레테에게 손을 건넸다.
“……?”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테는 제게 내밀어진 그의 손바닥을 말똥말똥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가볍게 힘을 주며 레테의 손을 맞잡았다. 어쩐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레테는 수줍게 웃으며 침대 밑으로 폴싹 뛰어내렸다.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 에녹의 손이 있었기에 중심을 잃고 넘어질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침대 아래로 내려서자마자 곧바로 거두어지는 그의 손에 레테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럼 안내해 드리지요.”
그런 레테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건지, 에녹은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복도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는데, 레테를 발견하자마자 다들 화들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힐끔힐끔 쳐다봐요.”
레테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에녹에게 중얼거렸다.
“말씀드렸잖아요. 성녀님은 굉장히 오랜만에 찾아와 주신 귀한 분이라고.”
에녹이 안심시키듯 말해 주었지만, 레테는 그다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 ‘귀한 분’이라는 것도 크게 와 닿지 않았고, 괜히 움츠러들었다.
레테는 앞서 걷는 에녹의 손을 쳐다보았다.
‘아까처럼 붙잡고 싶은데, 그럼 귀찮아할까?’
그렇게 한참 동안 에녹의 손끝만 쳐다볼 때였다. 돌연 걸음을 멈춘 그가 빙글 몸을 돌려 레테와 마주보았다.
‘으엑? 뭐, 뭐야? 설마 내 속마음이 들린 건 아니겠지?’
레테가 긴장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꼴깍 숨을 삼킬 때였다.
“양 옆에 걸린 초상화들이 역대 성녀님들이랍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그가 복도 양 옆으로 걸려 있는 초상화들을 가리켰다.
“빛의 성녀, 유리엘라. 행복의 성녀, 나비드…… 그리고 가장 최근, 백십 년 전에 다녀가셨던 성녀 플로라. 이다음에는 이제 레테 님의 초상화가 걸리겠군요.”
“나, 나도요?”
놀라 묻자 그는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테는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내 초상화가 저 여자들과 함께 이곳에 걸린다니…….’
정말로 자신이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지려고 했다.
정문으로 나가자 커다란 라나 신의 동상이 있었다. 레테는 고개를 꺾어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라나 신은 엄청 크네요.”
“실제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동상이니까요.”
자애로운 창조신의 동상 앞에서 레테는 익숙한 그리움의 향기를 느꼈다. 가슴이 뭉클, 하면서 세차게 뜨거워졌다. 레테는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라나 신의 동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성녀님.”
멀리서부터 그녀를 힐끔거리던 한 무리의 사제들이 다가와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라나 신의 종이 성녀님을 뵙습니다.”
“……!”
낯선 이들의 인사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재빠르게 에녹의 뒤로 숨어 버렸다. 사제들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자그마한 손이 에녹의 옷깃을 꼬옥 붙들었다.
“성녀님께서 수줍음이 많으십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에녹이 작게 웃으며 대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놀라던 사제들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성녀에게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놀라게 하려던 것은 아닌데…….”
“그럼 저희는 다음에 다시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사제들이 인사를 마치고는 물러난 뒤에야 레테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에녹의 옷깃을 놓았다.
“많이 놀랐나요, 성녀님?”
“아주 조금…… 어? 에녹의 옷깃이 구겨졌어요!”
뒤늦게 구겨진 에녹의 옷깃을 발견한 레테가 울상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그가 기분 나빠 할까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에녹의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성녀님. 옷깃이야 뭐…….”
그가 보란 듯이 구겨진 옷깃을 탈탈 털며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다시 펴면 되니까요.”
“하지만…….”
“신전의 다른 곳도 구경하러 갈래요?”
에녹이 방긋 웃으며 레테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제게 내밀어진 손끝을 바라보는 레테의 얼굴 위로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함박웃음을 얼굴 가득 띠우며, 레테는 에녹의 손을 붙잡았다.
* * *
미하일은 창가에 선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총총거리며 신전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어린 성녀의 모습이 보였다.
‘레테…….’
그는 가만히 그 이름을 속으로 읊조려 보았다. 찬찬히 시선을 옮기자 그녀의 손을 꼬옥 붙잡고 함께 걷고 있는 젊은 남자가 보였다.
라미에 교의 성기사단장 에녹.
그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성기사가 되겠다고 교단을 찾아왔을 때, 응당 곁에 있어야 할 작은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있지요?’
‘그녀라니요……?’
미하일의 물음에 남자는 당황한 듯 두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자의 얼굴이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미하일은 곧바로 자신의 질문을 철회했다.
남자가 교단을 찾아오기 얼마 전부터 미하일은 그녀의 성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라미에 교의 대주교는 그의 성녀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끝내 소멸하였음을 깨닫고는 한동안 스스로를 방에 가두고 나오지 않았다.
성녀 레테는 ‘망각’이었다. 그녀가 처음 교단에 나타난 날, 미하일은 무언가 뒤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주교 미하일, 라나 신의 기록자. 신은 그에게 세상 만물을 통찰할 수 있는 눈을 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신의 대리자라는 성녀 레테가 나타났을 때, 미하일은 아주 잠시 자신이 헛것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미하일?’
성녀는 마치 오랫동안 자신을 알아 온 사람처럼 대했다.
‘당신은…….’
‘라나 신의 대리자, 성녀 레테.’
‘망각이군요.’
‘역시, 한눈에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어.’
반짝이는 은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성녀는 빙그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낯선 얼굴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한번 보면 잊기 힘들 만큼 굉장한 미모를 지닌 얼굴이기도 했다.
‘말도 안 돼. 아직 당신은 출현할 때가 아닌데.’
대주교는 신으로부터 아무런 계시도 받지 못했다. 신의 계시 없이 출현한 성녀라니, 적어도 미하일이 아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눈에 띄게 적은 시간…….
성녀에게는 고작 일 년의 시간만 남아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대주교는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성녀를 보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서 보이는 시간은 일 년뿐이었다.
‘라나 신의 사랑을 받는 성녀가 고작 일 년의 시간만 갖고 있다고?’
‘으응…….’
성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미하일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것이 꼭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것처럼 보여서, 미하일은 인상을 왈각 찌푸렸다.
‘당신…….’
천천히 그녀를 쳐다보던 미하일은 곧 깨달았다.
‘한 차례 시간을 ‘망각’시켰군요.’
‘음, 뭐…….’
‘당신이 원래 갖고 있어야 할 시간들을 모두 잃어버렸어요.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지요?’
‘그냥…… 시간을 역행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이게 어떻게 역행입니까! 본래 있어야 할 시간을 모두로부터…… 심지어 신의 기록자인 내게서마저도 망각시켜 놓고서!’
미하일이 낯선 이에게 그토록 화를 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성녀는 씩씩거리는 미하일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미안해, 미하일. 다시는 안 그럴게.’
‘안 그러는 게 아니라 못 그러는 거겠지요.’
미하일은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남은 성력으로 기록자의 눈까지 가릴 수는 없을 테니.’
‘어쩔 수 없었어. 라나 신의 뜻이었으니까.’
‘신께서 신의 사랑을 받는 대리자에게 스스로 소멸의 길로 걸어 나갈 것을 명하셨다고요?’
‘되돌려야만 했어. 그 남자가 위험한 일을 벌이려고 했거든.’
‘그 남자?’
그의 물음에 순간 성녀의 표정이 싸하게 변했다.
‘아스타 제국의 황제. 지금은 아니지만 얼마 뒤에 황제가 될 남자. 그 남자가 한 번 죽은 이를 되살리려고 라나 신의 질서를 거역했거든.’
잠자코 성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미하일의 표정 또한 덩달아 싸늘해졌다.
‘무고한 이들의 영혼을 팔아 흑마법에 손을 댔나 보군요. 교단이 그것을 그저 지켜볼 리 없었을 텐데.’
‘제국과 교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지.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었어. 그리고 너도.’
‘…….’
무려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였다. 그런 위치에 있는 자가 신의 질서를 거역했을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참변이 일어났을지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이제 무엇을 하려 합니까?’
‘네 도움이 필요해, 미하일. 성녀가 출현했다고 사람들에게 공표해 줘.’
스스로가 성녀라던 그녀의 주장대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신전에서 머무는 동안의 그녀는 마치 태어날 적부터 성녀였던 것처럼 익숙했다.
미하일은 그녀가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반드시 아스타 제국의 수도로 가야 한다는 그녀의 요구에 따라 그해의 성 플로라 축일에 교단의 대표로 성녀를 대신 보냈다.
일부러 그녀에게 더욱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 성녀 따위, 라나 신의 뜻에 따라 제 역할만 다하고 가면 그뿐. 그 이상 신경 쓰지 않고자 했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으로는 언제나 그녀에게 딸려 보낸 사제들로부터 온 보고를 읽고 있었다.
성녀가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신경이 쓰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일 년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가졌으면서 배시시 웃던 그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탓이었다.
그러던 중 재미난 보고가 하나 있었다.
‘성녀와 황후의 시녀가 자매처럼 닮았다고…….’
사제는 ‘자매처럼 닮았다’는 표현을 썼지만, 미래에서 건너왔을 성녀의 본래 나이를 추정하자면 ‘자매’보다는 ‘모녀’처럼 닮았다는 표현이 더욱 옳을 것이다.
미하일은 어쩌면 황후의 시녀라는 그 여자가 역행의 비밀을 품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해의 가을. 황제와 새 황후의 결혼식 날 두 사람을 마주했을 때. 미하일의 입에서는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당신에게 피와 살을 나눠 준 이들이 저들이로군요.’
‘어때? 한눈에 알아볼 만큼 내가 두 사람과 닮았어? 클로이는 정말 예쁘지? 하지만 반하면 안 돼. 클로이는 레이몬드의 부인이 되어서 영원토록 행복할 거거든.’
‘반하지 않았습…… 잠깐.’
무심하게 대답하던 미하일의 표정이 돌연 매섭게 굳었다.
‘당신, 어째서 시간이 또 줄어든 겁니까?’
‘어? 응, 그게…….’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던 성녀는 머쓱한 얼굴로 미하일의 눈치를 봤다.
‘어쩌다 보니…….’
‘미쳤습니까?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당신의 의지로 줄인 거예요?’
‘어쩔 수 없었어.’
성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미하일이 성녀와 처음 만난 때는 그해의 신년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이 해의 마지막까지는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녀의 시간은 이제 채 한 달도 남지 않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먼지가 되어 흩어질 듯, 희미한 성력이 미하일의 신경을 자극했다.
‘당신은…… 정말…….’
미하일은 이를 악물었다.
‘아까 그 사람들 때문이지요? 당신에게 피와 살을 준 자들. 그 자들에게서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당신의 곁에 있던 그 잘생긴 기사에게 느껴지던 것과 같은 기운이었습니다.’
제국의 황제 레이몬드와 황후 클로이, 성녀의 곁에 있던 기사 에녹…….
그들은 완벽한 ‘망각’을 이루지 못한, 시간을 역행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마도 그녀가 망각되지 않기를 바라던 이들…….
미하일은 아주 짧은 사이에 그들에게 질투를 느꼈다. 저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을 망각하지 않았더라면…….
‘간신히 막고 있었군요. 그들이 당신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라서.’
‘그들도 곧 나를 잊을 거야.’
성녀는 슬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차피 난 망각이니까…… 모두가 나를 잊게 되겠지.’
‘아니요, 어느 누구도 당신을 잊지 못하게 할 겁니다.’
황제와 황후의 결혼식이 끝난 뒤, 미하일은 곧바로 수도를 떠났다. 그리고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를 수소문해서 성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아직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비록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기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 당신을 세상에 남길 시간은 아직 많아요. 한 달이면, 충분해요.’
미하일은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녀가 도착할 날만 손꼽았다. 그렇게 그림으로나마 그녀를 세상에 남긴다면…….
‘아…….’
문득 으스스한 기운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불길한 감각이 엄습했으나 미하일은 애써 모른 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전에 ‘그 남자’가 찾아왔을 때. 응당 곁에 있어야 할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그녀를 잊어버린 바보 같은 남자만 성기사가 되겠다며 나타났을 때.
비로소 미하일은 인정해야 했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소멸하였다고.
그렇게 소멸했던 그녀는 정확히 십 년 뒤에 다시금 세상에 출현하였다. 얼음 속에 갇혀 있는 작은 소녀와 마주친 순간, 미하일은 그것이 그녀의 영혼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한 번 소멸했던 영혼이 어떻게 다시금 회생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번만큼은 그때처럼 허무하게 그녀를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 *
레테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 가까이 지났다.
어느덧 신전 생활에 익숙해진 레테는 침대 위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의 짧은 두 다리를 허공에서 까딱까딱 움직였다.
“이상해요.”
책장을 넘기던 레테가 대뜸 중얼거렸다.
“뭐가요?”
그녀의 침대 맡에 의자를 끌어다 앉아 마찬가지로 고요히 책장을 넘기고 있던 에녹이 부드럽게 물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 목소리에 레테가 읽던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에녹이랑 있으면 참 편하고 좋은데, 다른 사람들은 조금 부담스러워요.”
아기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종알종알 이야기하던 레테가 돌연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그 미하일인가 하는 대주교요!”
“제가 왜요?”
레테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주교의 고개가 불쑥, 창문 안쪽으로 들이밀어졌다.
“꺄아악!”
“성녀님!”
레테는 비명을 내지르며 튀어 오르더니 방안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놀란 에녹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자 그녀는 잽싸게 에녹의 뒤로 몸을 숨기며 미하일을 노려보았다.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미하일의 두 눈이 아주 가늘어졌다.
“모, 몰라서 물어요? 갑자기 그렇게 나타나면 놀라는 건 당연하다고요!”
“그래요?”
앙칼지게 대꾸하는 레테의 태도에는 개의치 않은 듯, 그는 창문을 활짝 열고 가뿐하게 안쪽으로 들어섰다.
“어머나, 정말 예의도 없어! 어떻게 대주교씩이나 되어서 창을 통해 넘나들 수 있는 거지요?”
“모두 당신에게 배운 겁니다만.”
“내가 언제요? 모함하지 마요!”
레테는 진심으로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물론 당신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겠지요.”
미하일은 피식 웃으며 우아한 자세로 방금 전까지 에녹이 앉아 있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당신에게 예법 운운하는 소리를 듣는 것부터가 굉장히 불쾌하군요. 예의를 아는 사람이 지금 그렇게 맨발로 돌아다니고 있습니까?”
“흥, 나와 대주교는 다르지요? 난 기억도 온전치 않은 어린애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을 보이지 않게 꼼지락거리며 숨기는 게 정말 아이다웠다.
결국 미하일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그게 레테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만들었다.
“왜 웃어요? 웃지 마요!”
“그 성격은 여전하군요.”
미하일이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는 레테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레테는 그를 향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다가갔다.
“제국에 가기 전에 기본적인 것들은 익혀 두어야겠지요. 뭐, 금방 배울 거라 생각되지만.”
“제국이요?”
“아스타 제국의 황제와 황후를 만나러 갈 겁니다.”
처음 듣는 소리에 레테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제랑 황후면 엄청 대단한 사람들 아니에요?”
“그러니 준비할 게 많지요.”
무려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와 황후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미하일은 거리낌이 없었다. 레테는 새삼 그가 대단해 보였다.
그런 레테의 기색을 알아챈 눈치 빠른 미하일이 웃으며 덧붙였다.
“기죽을 필요는 없어요. 라미에 교의 성녀는 절대 황제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대륙에서 황제의 반려인 황후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황제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격이 있지요. 당신은 황제의 후계자인 황태자보다도 윗사람임을 명심하세요.”
꼴깍, 좁은 목구멍을 타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것을 보고 큰 소리로 웃어 재끼던 미하일은 곧바로 바쁜 일이 생겼다며 다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황제와 황후라니. 왠지 걱정 돼요. 엄청 대단한 사람들일 거 아냐.”
에녹과 함께 방 안에 남겨진 레테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테는 잘 할 거예요.”
“에녹은 그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
“사 년에 한 번 열리는 성 플로라의 축일 때면 대주교님을 모시고 제국 수도에 다녀오곤 했지요.”
에녹이 그들을 만나 본 적 있다고 답하자 레테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어때요?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와 그 반려는?”
“아스타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굉장히 용맹하고 뛰어난 전사이십니다. 그 어떤 전투에서도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다 하지요. 우리 같은 기사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에요. 그리고 아스타 제국의 황후 폐하는……”
에녹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무언가를 그리는 듯, 일순 애틋한 표정이 그의 얼굴 위로 스쳤다.
“굉장히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뭐예요, 에녹? 혹시 황후와 아는 사이인 거예요? 오래 전 좋아했던 사람?”
“그럴 리가요. 저 같은 신분의 사람이 감히 한번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영광인 분인걸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다 같은 사람인데.”
“레테도 아스타 제국의 황후님을 한번 만나 보게 되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단순히 황후라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존재만으로도 숨이 멎을 듯이 아름다운 분이거든요. 황후 폐하의 미모에 눈이 멀어 버린 비운의 남자들이 넘쳐난다지요.”
“그렇게 아름다워요?”
“음…… 그러고 보니.”
에녹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테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레테와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말에 레테는 양 손으로 발그레해진 두 뺨을 감쌌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와 닮았다는 말을 들으니, 굉장히 부끄러워졌다.
“그, 그렇게 갑자기 불쑥 칭찬해 버리면 부끄럽잖아요.”
“칭찬이 아니라 진실을 말한 거예요.”
레테는 에녹의 얼굴 위로 떠오른 잔잔한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저 웃는 얼굴은 상당히 유해하다고.
“신전 안에만 있으려니 따분해요.”
공연히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마을에 내려가 볼래요?”
“어……? 그래도 되나요?”
“뭐, 안 된다는 말은 없었으니까요.”
“그럼 갈래요!”
레테는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조금 놀랐으나, 금세 기쁜 마음으로 수락했다.
* * *
내내 신전에만 머물던 레테에게 마을은 굉장히 신선한 곳이었다. 에녹은 레테와 함께 언제나와 같이 오가는 사람들로 활기찬 거리를 걸으며 낯선 장소에 경계하는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아직 일반 사람들은 성녀님의 출현을 알지 못해요. 그러니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요.”
“하, 하지만…….”
레테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에녹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럼 대체 왜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는 거예요?”
아닌 게 아니라 다들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 대다수는 마을의 처녀들이었다.
그들은 매번 혼자서 마을을 방문하던 에녹이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낯선 여자아이와 함께 나타난 것에 굉장한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에녹 님!”
아무도 먼저 나서서 물어보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던 때에, 여관 주인의 딸인 샐리가 용기 있게 먼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샐리.”
그녀를 알아본 에녹이 정중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지난번엔 무슨 일로 그리 급히 가셨던 건가요?”
“안타깝게도 그건 기밀이랍니다.”
에녹이 자신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냥하게 여자를 대해 주자, 레테는 왠지 심통이 났다. 그녀는 에녹의 팔에 보란 듯이 매달린 채 여자를 노려보았다. 물론 여자에게는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 귀여워라!”
사실은 에녹이 마을에 등장했을 때부터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 샐리는 뒤늦게 알아챈 척 과장된 목소리로 어색하게 말했다.
“이 아이는 누구예요?”
“아, 음…….”
그러나 에녹은 난감해하며 대답을 피했다. 그의 애매한 태도에 샐리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에녹 경, 설마…….”
떳떳한 관계라면 굳이 그가 대답을 회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샐리는 다시 한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잘 빚어 낸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남자와 그런 남자의 팔에 꼬옥 매달려 있는 마찬가지로 요정처럼 아름답고 아주 작은 여자 아이…….
마치 아버지와 딸 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수, 숨겨 둔 딸을 다시 찾은 건가요?”
“네?”
대뜸 샐리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에 에녹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양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샐리는 더욱 확신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던 에녹이 이렇게 당황해하는 모습이라니…….
“역시 목걸이의 주인이 따로 있었던 거군요! 떠나 온 연인의 딸인 거지요?”
샐리는 검지를 쭉 뻗어 에녹의 목에 매달려 있던 작은 목걸이를 가리켰다.
“잠시만요, 샐리. 떠나온 연인이라니요?”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에녹 경이 어느 작은 왕국의 공주님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나누다가 이곳까지 쫓겨났다고…….”
“대, 대체 무슨 말씀을……?”
에녹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자신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남녀 간의 관계에는 뜻이 없어서 여태 여자의 손목 한번 잡아 본 적 없었는데, 누가 누구와 무엇을 나누다 쫓겨났다고……?
“괜찮아요, 에녹 경! 저는 에녹 경을 위해서라면 사랑의 힘으로 에녹 경의 아이도 함께 품어 줄…… 어머, 내가 무슨 소릴……! 방금 그 말은 잊어 주세요!”
흥분해서 홀로 떠들던 샐리는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바람처럼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조용해졌다.
‘방금 그게 무슨 말이지?’
레테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간에 인상을 쓸 적에 그녀의 위에서 에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오해를 사 버린 것 같네요.”
“오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에녹은 허탈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 자세한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에녹, 아까 그 여자가 가리킨 목걸이에는 뭐가 들어 있어요?”
“네?”
생각 없이 내던진 레테의 질문에 에녹의 잘생긴 얼굴이 잠시 삐끗거리는가 싶더니 그 위로 옅은 균열이 일었다. 그러나 에녹은 곧바로 짧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그가 달칵, 하고 로켓을 열어 보였다. 로켓의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평범한 로켓 목걸이에요.”
“소중한 사람에게 받은 거예요?”
“…….”
에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마찬가지로 잔잔하게 미소 지을 뿐.
* * *
마을에 다녀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레테는 자다가 깨어나 대주교에게 이끌려 비몽사몽한 채로 나와야 했다.
“우으으, 이거 놔요, 미하일…… 나 졸립단 말이에요.”
“나태하군요, 레테. 아침에 첫 닭 울음이 들리기 전에 일어나는 건 사제의 기본 덕목입니다.”
앙증맞은 손으로 두 눈을 비비적거리며 귀엽게 칭얼댔지만, 미하일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당신의 초상화를 그려 줄 화가입니다. 대륙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이지요. 무려 아스타 제국의 궁정 화가였답니다.”
“초상화가 무슨 중요한 일이라고.”
레테는 짜증을 내며 하품을 했다. 주먹만 하게 벌어지는 입을 보며 미하일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신경이 거슬린 레테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댔다.
“왜 이렇게 서둘러요? 시간도 많은데 천천히 해도 될 걸, 자는 사람까지 깨워 가면서.”
“시간이 많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죠.”
“네?”
“그냥 닥치고 자세를 취하세요, 성녀님.”
“뭐, 뭐……?”
졸음에 가득 차 있던 두 눈이 토끼처럼 똥그래졌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대주교란 사람이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 봐요!”
미하일은 씩씩거리는 레테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 잠이 다 깬 것 같군요. 그럼 잘 그려 주세요.”
“당신, 내가 신성모독으로 가만히 안 둘 거야!”
레테가 뒤늦게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외쳤지만, 미하일은 얄밉게 싱긋 웃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레테는 잔뜩 뾰로통한 얼굴이 되어 화가의 앞에 앉았다. 잠은 이미 달아나 버렸고, 별 수 없이 초상화나 그려야 할 판이었다.
“호오, 성녀님은 꼭 아스타 제국의 황후 폐하와 닮으셨군요.”
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으로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해졌다.
“아스타 제국의 황후를 알아요?”
“네, 그럼요. 이래봬도 대륙에서 가장 알아주는 그림쟁이입니다.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아스타 제국의 궁정 화가로서 황족들의 초상화도 몇 번 그려 보았지요.”
“정말로 나랑 황후가 그렇게 닮았어요?”
“성녀님이 조금 더 자라면 그분과 똑같아질 겁니다. 마침 제게 그분의 초상화 몇 점이 있지요. 보여 드릴까요?”
“네……!”
기대에 가득 찬 그 모습에 화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주섬주섬 그림 몇 점을 꺼내었다.
한 손에 부채를 든 채 우아한 자태로 홀로 서 있는 아스타 제국의 황후, 황제와 함께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황후, 태어난 지 채 일 년도 되어 보이지 않는 두 황자와 함께 있는 황후의 초상화들이 레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사람이…… 아스타 제국의 황후…….”
“네, 맞습니다. 이 분이 클로이 황후이십니다. 그리고 여기 이 분이 레이몬드 황제 폐하이시며, 여기에 계신 이 분들은 아스타 제국의 황자님들이지요. 올해로 열 살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두 분 모두 황후 폐하를 쏙 닮아 아스타 제국의 보물로 불린다지요.”
“아…….”
그들의 가족사진을 보는데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얼음 속에서 깨어난 이후, 이따금씩 몇 번이고 그녀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던 그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황후의 이야기를 더 해 줘요. 궁금해요.”
“클로이 황후께서는 본디…….”
화가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얼굴도, 마음씨도요.”
화가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자랑스러워하며 이야기했다.
어느새 화가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버린 레테는 언제 그렇게 퉁명스러웠냐는 듯 얌전하게 두 손을 모으고 앉았다. 노련한 화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목탄을 들어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래서 한 번은 제국을 방문했던 외국의 왕자가 황후님께 반해 버렸는데…….”
“안 돼요! 클로이 황후에게는 레이몬드 황제가 있잖아요!”
이야기에 몰입한 레테가 두 손을 꽈악 맞잡으며 진지한 얼굴로 외쳤다.
“물론, 황후께서는 그 자리에서 정체를 밝히시고 단박에 그 고백을 거절하였지요. 그러자 가엾은 외국의 왕자는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는데…….”
레테가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이에 초상화는 서서히 완성되어 갔다. 흘깃 벽시계를 쳐다본 화가는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것을 알아채고는 목탄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내일부터는 채색에 들어갈 겁니다.”
“고마워요.”
레테는 싱긋 웃으며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물었다.
“혹시 아주 작은 크기의 초상화도 그려 줄 수 있나요?”
“작은 크기라면……?”
“로켓 목걸이에 들어갈 정도로, 아주 작은 그림이요.”
그녀가 엄지와 검지로 아주 작은 동그라미를 말며 설명했다. 화가는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능하지요.”
* * *
그림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빠르게 완성되었다. 캔버스 위에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한 여자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와…….”
그림 속 여자는 레테 본인마저도 넋을 놓고 올려다 볼 만큼 아름다웠다. 대주교 미하일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림을 쳐다보았다.
“다소 미화된 감이 있지만 썩 훌륭하군요.”
“미화라니!”
그 말에 레테가 두 눈을 부릅뜨고 미하일을 노려보았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 ‘닥치고 자세를 취하라’던 미하일의 발언 이후로 줄곧 그를 적대시하던 중이었다.
“내가 예쁘지 않다는 거야?”
“그럼 당신이 저 초상화 속의 여자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나요?”
“윽…….”
레테는 마치 뼈를 맞은 것처럼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하, 하지만 그 화가가 그랬어! 내가 조금만 더 자라면 아스타 제국의 클로이 황후보다도 예뻐질 거라고!”
정확히는 황후 ‘만큼’이라고 표현했지만.
“당신이 클로이 황후와 어느 정도 닮았단 것은 인정합니다만, 그녀보다 예뻐지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왜, 왜……!”
“일단 한번 황후를 만나게 되면 방금 당신이 한 말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알게 될 거예요.”
“우으으…….”
레테의 두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별안간 뒤를 홱 돌아보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에녹?”
“네?”
“에녹도 내가 클로이 황후보다 예뻐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으음…….”
갑작스럽게 질문의 화살을 받은 에녹은 당황한 얼굴로 레테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에녹의 행동에 레테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얼굴로 외쳤다.
“너무해! 언제는 내가 클로이 황후와 닮았다고 했으면서!”
에녹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레테를 달랬다.
“그 말은 정말입니다. 레테는 클로이 황후님과 정말 닮았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가족이라 해도 믿을 만큼요.”
“닮긴 했지만 그만큼 예뻐지지는 못한다는 거구나……”
“어…… 그건…….”
언제나 유려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에녹이 쉽게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은 그와 십 년간 신전에서 함께 지낸 대주교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클로이 황후님은 조금……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분이라서요…….”
“하지만 나, 나도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사람이잖아요! 나는 특별하다면서요! 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라면서요!”
“정확히는 백십 년 만이지요.”
미하일은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레테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레테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댔다.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던 미하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황후보다 예뻐지는 것에 집착하는 겁니까?”
“그, 그런 건 아니야. 난 그냥……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과 내가 닮았다고 해서 기뻤는데, 이제 와 아니라고 하니까…….”
“닮았다는 건 정말입니다, 성녀님!”
“뭐, 곧 제국에 가게 되면 성녀님도 직접 그분을 뵐 수 있겠지요.”
어떻게든 울적해진 레테를 달래 주고자 하는 에녹과 달리, 미하일은 빙그레 웃으며 완성된 초상화를 액자에 끼웠다.
“부담스러워…….”
레테는 복도에 전시된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성녀의 사후에 전시하는 거라면서?”
“누가 그런 말을 해 줬습니까?”
“에녹이 말해 줬어.”
미하일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이렇게 하면 아무도 당신을 잊지 못할 것 아닙니까.”
“……?”
읊조림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에 레테가 두 눈을 깜빡이자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가 손을 뻗어 레테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고는 몸을 돌렸다.
“내일이면 제국으로 떠날 테니, 미리 준비해 두세요.”
대주교가 사라지자 복도에 남은 것은 레테와 에녹뿐이었다.
한참 전부터 둘만 남기를 기다렸던 레테가 주위를 힐끔 둘러보더니, 대뜸 손바닥을 내밀었다.
“에녹, 그 목걸이를 이리 줘 보세요!”
“네?”
“목에 달려 있는 그 목걸이요!”
“이 목걸이를…… 말입니까?”
에녹은 당황하며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쥐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 한 번도 몸에서 떼어내거나 다른 이에게 건네준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음……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성녀의 요구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에녹은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풀어 레테에게 건네주었다. 레테는 씨익 웃으며 목걸이 안쪽에 자신의 초상화를 끼워 넣었다.
“자, 여기요.”
“이건…….”
에녹은 멍하니 그녀의 초상화를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텅 비어 있던 목걸이가 이제야 주인을 찾은 것처럼 가득 찼다.
“레테의 초상화예요!”
뿌듯한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그 목걸이, 계속 비어 있는 상태로 가지고 다니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그래서 레테가 채워 준 거예요. 하지만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레테는 에녹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가 혹시 싫어하는 건 아닐까 눈치를 살폈다.
“아닙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에녹은 짧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마음에 꼭 들어요.”
그의 싱그러운 웃음에 레테는 순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녹이 좋아해 줘서…… 아주 다행이에요.”
“레테가 주는 건데, 뭐든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상냥한 대답에 레테는 기분이 좋아져서 그를 따라 씨익 웃었다.
“정말 같은 라나 신을 모시는 사람인데, 에녹과 미하일은 어쩜 이렇게 다를까요?”
“대주교님도 나름의 방식으로 성녀님을 굉장히 아끼고 계신걸요?”
“나를 아끼고 있다고요? 미하일이? 말도 안 돼!”
레테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쁘다는 듯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것이 귀여워 에녹은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 * *
드디어 아스타 제국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레테는 누가 깨우지 않았는데도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어서 빨리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오늘따라 시간이 왜 이렇게 느리게 흐르는지, 결국 참다못한 레테는 새벽부터 돌아다니며 신전 안의 모든 사람들을 깨워 버리고 말았다. 가엾은 미하일은 그녀의 첫 번째 희생양이었다.
“으음…….”
묵직한 것이 누르는 느낌에 자다가 눈을 뜬 미하일은 아주 잠시 동안 신전에 유령이 나타난 것인가 고민했다. 그러나 곧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이 레테의 형체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성녀님……?”
미하일의 눈가가 와락 찌푸려졌다.
“지금 제 방에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컴컴한 방 안, 하얀 원피스를 입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레테의 모습은 정말이지 꼭 아기 유령 같았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인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아서 레테가 깨우러 왔어.”
“아직 아침 해가 떠오르지도 않았는데요.”
잠이 덜 깬 목소리 사이로 드문드문 짜증이 섞여 있었다. 레테 또한 그것을 알아챘지만 모른 척하며 씨익 웃었다.
“첫 닭 울음이 들리기 전에 일어나는 게 사제의 기본 덕목이라고 하지 않았나? 대주교가 모범을 보여야지, 미하일!”
턱 끝을 오만하게 치켜들며 하는 말에 미하일의 표정이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 말씀, 나중에 그대로 돌려 드리지요. 그만 비켜 주시겠습니까? 성녀님 때문에 무거워서 일어날 수가 없잖아요.”
“너무해! 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레테는 툴툴거리면서도 폴짝 일어나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상당히 무겁습니다. 하마터면 누워 있는 채로 질식사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에녹은 날더러 깃털처럼 가볍다고 그랬는걸!”
“에녹 경이 거짓말을 했나 보지요.”
미하일은 레테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커튼을 걷었다. 이제 막 동이 트고 있었다.
“에녹은 거짓말 안 해! 그런 건 미하일처럼 나쁜 사람들만 하는 거지!”
“그럼 에녹 경에게 가시지요. 왜 잘 자고 있는 나를 깨우러 왔습니까?”
“음,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레테는 배시시 웃으며 눈꼬리를 접어 내렸다.
“너무 곤하게 자고 있어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는걸?”
“…….”
그 사랑스러운 미소를 바라보는 미하일의 얼굴이 점점 썩어들어 갔다.
“나도 곤히 자고 있던 건 마찬가지였는데요.”
“에녹과 미하일은 다르잖아.”
“그래요, 다르겠지요.”
미하일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창밖으로 점차 하늘이 밝아지는 게 보였다.
“날이 밝았군요.”
어찌됐든 이젠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함께 산책이나 하자며 물어볼 요량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방금 전까지 방 안에 함께 있던 레테가 보이지 않았다.
“성녀님?”
대신 활짝 열린 방문이 그녀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알려 주고 있었다. 미하일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방문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총총거리며 뛰어다니는 레테의 뒷모습이 보였다. 날이 밝은 걸 보고 사람들을 깨우러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전 전체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두 시간은 일찍 준비된 아침 식사를 보며 미하일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후를 만나러 가는 게 그렇게 기대되나 보군.”
아직 아이의 몸이라 그런 걸까. 표정과 행동에서 생각하는 바가 그대로 훤히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이 참 재미있었다.
마침내 출발 시각이 다가왔다. 레테가 이른 새벽부터 재촉한 덕분에 이미 한 시간 전부터 말과 마차가 정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테는 사제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 위에 올라탔다.
“황후님을 빨리 만나 보고 싶어.”
그녀가 화가에게 받은 클로이의 초상화를 품속에서 꺼내며 중얼거렸다. 그저 그림일 뿐인데도 두근두근, 심장이 뛰어 댔다.
“정말 변함이 없군요.”
맞은편에 앉은 미하일이 웃음을 터뜨리자, 레테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뭐야?”
“귀여워서 그럽니다.”
그가 손을 뻗어 레테의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었다.
“아이 취급하지 마!”
레테는 버럭 성을 내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귀엽다니, 그 말을 저 사람에게 들을 줄이야. 온몸에 소름이 쭈삣 돋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미하일은 왜 따라와?”
“사라지지 않게 감시하는 겁니다.”
그 말에 레테가 코웃음을 쳤다.
“헹. 누가 보면 내가 말도 없이 사라지는 어린앤 줄 알겠어. 이래봬도 내 앞가림 정도는 스스로 할 줄 안다고.”
“네, 그러시겠죠.”
미하일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후의 초상화를 품에 안은 레테의 얼굴 위로 불그스름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 * *
“아…… 힘들어…….”
며칠째 낑낑 앓는 소리가 마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미하일이 눈썹을 찌푸리며 맞은편에 엎드려 있는 레테를 힐긋 보았다.
“괜찮습니까?”
“아니, 안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그녀는 길쭉한 의자 위에 엎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의 몸이라 그런가.’
레테는 오는 내내 상당히 심하게 멀미를 했다. 그 바람에 몇 번이나 마차를 멈췄는지 모른다.
“잠시 마차를 세우겠습니다.”
“우으윽…….”
마차를 세우자마자 마차 밖으로 뛰쳐나간 레테가 여전히 핼쑥한 얼굴로 에녹에게 달려가 안겼다.
“레테, 괜찮아요?”
“나 죽을 것 같아요, 에녹…….”
에녹은 조심스럽게 레테를 안아들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대주교님, 성녀님이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만 이동하고 이쯤에서 쉬어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흐음…….”
미하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아스타 제국의 수도까지는 아직도 하루거리가 더 남았다. 그렇잖아도 레테의 멀미로 이동이 지연된 탓에, 서둘러 움직이지 않으면 약속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안 돼애애…… 빨리 클로이 황후님을 보러 가야 하는데에에…….”
창백한 얼굴로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일정에 맞추겠다고 무리해서 움직이는 게 오히려 더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군요.”
결국 미하일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 근방의 마을에서 하루 쉬어 가도록 하지요. 제국 황제에게는 늦을 수도 있으니 따로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으아아…… 드디어 쉰다아…….”
에녹의 어깨에 매달린 레테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늘어졌다. 에녹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안은 채 움직였다.
마차를 세운 곳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제법 큰 규모의 도시가 있었다. 제국의 수도만큼은 아니지만 오가는 사람이 많고 활기찬 도시였다. 성녀의 일행은 그곳에서도 가장 크고 중심에 있는 여관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폭신한 침대 위에 앉아 창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니, 한결 몸이 편안해졌다.
“쉬고 계십시오.”
미하일과 에녹은 레테만 남겨 두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편하게 쉬도록 배려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레테는 막상 몸이 편안해지고 혼자 얌전히 쉬려고 하니, 조금 심심해졌다.
한참 동안 침대 위에 누워 뒹굴뒹굴 굴러다니길 반복하던 레테는 돌연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방문을 열었다.
“에녹!”
그러나 복도는 사람의 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아래로 내려와 여관 주인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일행들은 모두들 한참 전에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우으음…… 너무 심심한데…….”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가 봤자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조금 고민하던 레테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저녁 먹기 전에만 돌아오면 되겠지, 뭐.’
레테는 아직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아까 여관에 올 때는 너무 힘들어서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여관의 위치가 시가지의 중심에 있었다.
눈을 뜬 후 방문한 곳이라고는 신전과 신전 근처의 마을 둘 뿐이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큰 도시의 시가지가 무척이나 신기했다.
어쩐지 들뜬 마음에 신이 나서 경쾌한 걸음을 내딛던 레테는 사람들이 유독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사람들은 그림 몇 점을 둘러싸고 숙덕대는 중이었는데, 그림 속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레테였다.
‘어……? 저건 나잖아!’
미하일의 말을 빌리자면 잔뜩 미화된 그녀의 초상화를 두고서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들뜬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 분이 그 성녀님이라고?”
“정말 아름다워요. 꼭 천사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아요!”
“클로이 황후님도 울고 갈 미모인걸요?”
사람들이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칭찬하는 말에 레테는 쑥스러워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이 참…….”
절로 입에서 헤실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애석하게도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 속의 우아한 성녀는 완연하게 성숙한 아가씨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 레테는 성인 남녀의 허리 부근까지 겨우 머리가 닿는 키의 작은 아이였던 탓이다.
사람들은 홀로 몸을 배배 꼬며 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테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채, 여전히 자기들끼리 숙덕댔다.
“이번에 북쪽의 겨울 숲에서 성녀님이 출현하셨다잖아요.”
“그렇잖아도 지금 수도는 성녀님을 맞이할 준비로 한참 난리가 났대요.”
“우리 사촌도 성녀님을 만나러 갈 거라고 며칠 전에 수도로 떠났어요.”
“성녀님이 수도로 가는 길에 우리 도시도 지나가지 않을까요?”
“우연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만나 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람들이 이토록 자신을 반긴단 사실을 알게 된 레테는 가슴이 간질간질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전에 머물렀을 때도 다들 상냥하게 대해 주었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표하는 무수한 호감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행복해졌다.
레테는 꼭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행복한 얼굴로 신이 나서 총총거리며 시가지를 거닐었다.
‘빨리 에녹에게 자랑하고 싶어! 미하일에게도!’
거리의 사람들은 성녀의 출현으로 인해 들떠 있었다. 레테 또한 덩달아 들떠서 바보 같은 얼굴로 웃고 있을 때였다.
“이브?”
웬 남자아이가 그녀의 손목을 홰액 낚아챘다. 그러자 레테의 작은 몸이 남자아이에게로 기우뚱 기울었다.
“이브! 네가 왜 여기 있어!”
레테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아이가 양 손으로 통통한 얼굴을 덥석 붙잡고는 외쳤다. 순간 움찔하던 레테는 남자아이의 얼굴이 기묘하게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어……?”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레테는 깜짝 놀라 폴짝 뛰었다.
“뭐, 뭐, 뭐, 뭐야? 나, 나랑 똑같은 얼굴이잖아!”
화염처럼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비록 레테보다 한 뼘 정도 큰 키를 갖고 있었지만, 남자아이는 레테와 쌍둥이처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브?”
남자아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 머리카락이랑 옷차림은 뭐야? 진짜 여자아이 같잖아. 무슨 장난을 친 거야?”
“난 이브가 아닌데.”
레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남자아이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검지로 꾸욱 눌렀다.
“내가 걱정돼서 몰래 따라 나온 거야? 하지만 변장을 하고 싶었으면 얼굴부터 바꿨어야지. 너무 눈에 띄잖아.”
“……?”
“일단 이쪽으로 와.”
도무지 남자아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두 눈만 깜빡이고 있자, 남자아이가 레테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어딘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여긴 위험해, 이브. 일단 친위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테니까 그곳에서 기다렸다가 나랑 같이 수도로 돌아가자.”
“자, 잠깐만. 난 이브가 아니라…….”
속절없이 끌려가던 레테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남자아이를 만류하고자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남자아이가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다소 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이브.”
“으, 응? 아니, 응이 아니라 난…….”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야. 물론 장난을 치는 이브는 정말 귀엽지만…… 그래도, 지금은 안 돼.”
“아니, 내 말을 좀…….”
“휴……. 나랑 함께하고 싶은 이브의 마음은 잘 알겠는데, 이브.”
레테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적에, 남자아이는 어쩐지 우쭐해진 얼굴로 레테를 쳐다보았다.
“여긴 이브처럼 예쁜 아이들만 노리는 유괴범들이 나다니는 곳이라고.”
“유, 유괴범?”
“물론 감히 우리 이브에게 손끝 하나 댔다가는 가만 안 둘 거니까 걱정하지 마.”
뿌듯하게 말하는 남자아이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아무튼 여긴 위험하니까 일단…….”
남자아이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을 하였지만, 이미 레테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유, 유괴범이라니!’
혹시라도 유괴라도 당했다가는, 길이길이 미하일에게 놀림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자신을 향해 차가운 비웃음을 내던지는 미하일의 얼굴이 눈앞에 스치자 끔찍한 감각이 온몸을 관통했다.
‘저, 절대 유괴를 당하면 안 돼!’
레테는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며 절대 유괴를 당하지 않겠다고 의지를 불살랐다. 그때였다.
“호오, 웬 귀족 꼬맹이들께서 호위하는 기사도 없이 홀로 외진 골목에 기어들어 왔을까나?”
그녀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절대 유괴를 당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유괴범들이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별 거지 같은 게 하필이면 지금 나타나서는…….”
레테의 손을 꽈악 붙잡은 남자아이의 입에서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상스러운 말이 쏟아져 나왔다.
“걱정하지 마, 이브. 여기 내 뒤에 숨어 있어.”
남자아이가 레테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유괴범들을 향해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가 허리춤에서 제 키만 한 검을 뽑아들었다.
유괴범들은 고작 열 살에서 열두 살 사이로 보이는 작은 아이가 검을 뽑고 자세를 취하자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곧바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남자아이를 비웃었다.
“그런 위험한 물건은 대체 어디서…… 흐억!”
유괴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아이가 재빠르게 걸음을 옮기더니, 칼등으로 유괴범의 목을 쳤다. 방금 전까지 남자아이를 비웃던 유괴범이 헉 소리를 내며 목을 붙잡고 쓰러졌다. 만약 칼등이 아닌 칼날로 내리쳤다면, 지금쯤 유괴범의 목은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다녔을 것이다.
“짜증나게. 이브 앞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진심으로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남자아이가 자신의 목을 뚝뚝 꺾으며 유괴범의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살기등등한 그 눈빛에 유괴범의 동료들이 겁을 먹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예쁜 남자아이들만 노린다는 그 변태 같은 작당들이 너네인가 봐, 그치?”
아이의 입에서 자신들의 정체가 흘러나온 순간, 유괴범들은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어떻게…… 설마, 수도에서 보낸 치안대의 함정인가?”
“어린 아이를 앞세워 함정을 파다니. 정말 치졸한……!”
“함정?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남자아이는 재미있다는 듯 붉은 눈동자를 둥그렇게 휘며 웃었다.
“얌전히 걸어가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재수 없게 나타난 건 너희잖아.”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려는 듯, 남자아이가 한쪽 팔을 높이 들어 올릴 때였다.
“으, 으아아!”
레테의 비명 소리에 놀란 남자아이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거구의 남자가 뒤편에서 나타나 레테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단도를 꺼내 위협하고 있었다.
“너! 당장 이브를 내려놓지 못해?”
남자아이의 두 눈에 순간 위험한 기색이 서렸다.
거구의 남자는 남자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잠시 흠칫 몸을 떨었지만, 곧 자신들이 훨씬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 자만했다.
“너야말로 그 검을 내려놓지 않으면 네 친구는 죽는다, 꼬맹이.”
“…….”
이번에는 남자아이가 몸을 굳히며 검을 고쳐 잡았다. 남자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감히…… 지금 누구를…….”
열 살을 겨우 넘긴 듯한 어린 남자아이의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살벌한 눈빛이었다.
“이브의 앞에서 피를 보기는 싫어서 봐주고 있었는데.”
남자아이가 당장에라도 유괴범의 손목을 잘라 낼 것처럼 이를 바드득 갈 때였다.
“싫어!”
유괴범에게 잡혀 있던 레테가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유괴범의 팔을 깨물었다. 그 순간 새하얀 빛이 그녀의 몸에서 쏟아지더니,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브!”
재빨리 몸을 날린 남자아이가 이브를 껴안고 바닥을 굴렀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자리에 새하얀 빛기둥이 저 높은 하늘 위까지 솟아 있었다.
“괜찮아, 이브?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레테를 안고 흙바닥을 구른 탓에 남자아이의 값비싼 옷이 모두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나, 나는 괜찮은데…….”
레테는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해진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를 위협하던 이들이 모두들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이, 이게 뭐야?’
그저 이러다 정말 유괴를 당해서 미하일의 놀림거리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을 뿐인데…….
“조심해, 이브.”
남자아이는 레테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일으켜 주었다. 그러고는 혹시나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레테는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놀랐지, 이브? 저 망할 것들……. 내가 황궁으로 끌고 가서 가만 안 둘…….”
“황궁?”
“그래, 황궁. 같이 돌아가자, 이브. 더 이상 이 역겨운 도시에 있고 싶지 않…….”
여전히 남자아이가 레테를 ‘이브’라고 부르며 챙길 무렵이었다.
“성녀님!”
저 멀리서 에녹과 미하일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어? 에녹!”
에녹을 발견한 레테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남자아이에게서 벗어나 에녹에게로 폴짝 뛰어갔다.
“괜찮으십니까, 성녀님!”
“응, 난 괜찮아요!”
에녹은 제게 달려드는 레테를 번쩍 들어 안아 올렸다. 평상시와 달리 상당히 흐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레테는 미안한 마음이 물씬 들었다. 아무래도 그에게 많은 걱정을 끼쳐 버린 것 같았다.
“하……. 정말 다행……입니다.”
에녹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성력이 발현되었군요.”
에녹보다 한 발짝 늦게 도착한 미하일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성력?”
“대충 보아하니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겠습니다만.”
미하일이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빛기둥 주위로 유괴범들이 쓰러져 있었다.
“이 큰 도시에서 유괴를 당할 뻔하다니. 그것도 무려 성녀님께서.”
“아, 안 당했어! 나 유괴 같은 거 안 당했다고!”
“네, 네, 그렇겠지요.”
건성으로 대답한 미하일이 뒤따라온 성기사들에게 쓰러진 유괴범들을 처리하라고 막 명령하던 때였다.
“멈춰라.”
레테와 함께 있던 남자아이가 아까부터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성녀 일행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자들은 황궁으로 데려갈 것이다.”
“당신은……?”
남자아이를 알아본 미하일이 눈가를 설핏 찡그렸다.
삼 년 전, 성 플로라의 축일에 잠깐 스치듯 인사만 하고 지나친 뒤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레테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는 저 남자아이는 틀림없이 제국의 황태자 엘리엇이었다.
“날 알고 있나?”
“라나 신의 종, 대주교 미하일이 아스타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대주교?”
엘리엇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대주교가 왜 여기에…… 아, 성녀가 출현하였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작게 중얼거리던 그가 돌연 퍽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에녹을 노려보았다.
“그보다 이브를 이리 줘. 넌 뭔데 우리 이브를 안고 있는 거지?”
“이브……?”
당황한 에녹이 의아한 얼굴로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난 이브가 아니라니까!”
레테는 아까부터 줄곧 주장하던 것을 다시 한번 외치며 답답하단 표정을 했다. 그 모습에 재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미하일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 이 분은 라나 신의 대리자이자 성녀 레테입니다.”
“성녀…… 레테……?”
순간 사납던 엘리엇의 얼굴 위로 어리둥절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브가 아니라고?”
“내가 뭐라 했어! 나는 이븐가 뭔가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렇게 똑같은데…….”
“이브 황자님은 틀림없이 남성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 말에 엘리엇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레테를 빤히 쳐다보더니 별안간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말도 안 돼! 어서 네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이브!”
“으, 으아악!”
엘리엇이 갑자기 달려든 바람에 레테를 안고 있던 에녹까지 함께 바닥에 엎어졌다. 이제 열한 살이 된 아이의 힘이라 믿기지 않는 괴력이었다.
에녹이 어떻게든 레테를 보호하기 위해 양 팔 가득 끌어안는 와중에 엘리엇이 레테의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가발이 아닌 진짜라는 것을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
“으악, 아프잖아!”
“말도 안 돼, 정말 이브가 아니잖아…….”
레테는 엘리엇에게 뽑힐 뻔한 머리카락이 너무 아파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런데 기가 차게도 엘리엇은 사과를 하기는커녕 레테를 노려보며 살벌한 목소리로 위협했다.
“감히, 제국의 황자를 사칭하다니.”
“무슨 소리야? 난 계속 말했는데! 이브가 아니라고!”
“어째서 우리 이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두 아이는 금방이라도 한바탕 싸울 기세였다. 만약 미하일이 중간에 중재를 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제국의 황태자와 대륙의 유일한 성녀가 길바닥에서 서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뒹굴었을 것이다.
“그만하십시오, 황태자 전하.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이 분은 라미에 교의 성녀이십니다.”
“그래서, 뭐?”
“원칙상으로는 제국의 황제 폐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 하셔도 성녀께 함부로 대하실 순 없습니다.”
“……쳇.”
엘리엇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으며 물러나야 했다. 반면 미하일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의기양양해진 레테는 콧대를 높였다.
“성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엘리엇 전하께서 황태자의 지위에 있으나, 장차 아스타 제국을 이끌어 나갈 분입니다. 적당한 예의를 갖춰 드려야 합니다.”
물론 이어지는 미하일의 말에 곧바로 입술을 삐죽 내밀어야 했지만 말이다.
빠르게 상황을 납득한 엘리엇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을 적에 그의 기사들이 헥헥거리며 달려왔다.
“화, 황태자 전하!”
“늦었구나.”
힐긋 그들을 쳐다본 엘리엇이 방금 전 레테를 대할 때와는 달리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테는 신비로운 생명체를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이브’라고 착각했을 때는 친남매처럼 다정했는데, 착각했다는 걸 알고 난 이후에는 그토록 무서운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지금 기사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정말 제국의 황태자란 말이 사실인 듯 위엄 있었다.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기사들은 열 살은 더 어려 보이는 황태자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딱히 그들이 늦은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괜찮다. 애초에 혼자 나선 것은 나였으니.”
레테는 그런 황태자가 굉장히 신기했다. 제게 매섭게 굴던 것처럼 기사들에게도 화를 내며 벌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태자가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가 봐.”
엘리엇에게는 들리지 않게, 아주 작은 소리로 레테가 미하일에게 속닥였다.
“어린 나이이지만 레이몬드 황제와 클로이 황후를 닮아 독보적인 무위와 빼어난 학문 성과를 보인다고 들었습니다. 몇 달 전 황태자 책봉을 치른 이후로는 이런저런 국무에도 참여하고 있다지요.”
“정말? 나랑 비슷한 나이인 것 같은데.”
“당연한 겁니다. 그냥 황자도 아니고 황제의 뒤를 이을 황태자 아닙니까.”
막힘없이 뒤처리를 지휘하는 엘리엇의 뒷모습을 보며 미하일은 나지막이 덧붙였다.
“일처리에 있어서도 공정한 편이라 제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이브 황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굉장히 예민해진다고 하더군요.”
* * *
한바탕 소동을 치른 탓에 아직 저녁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피곤함이 밀려 왔다.
“졸리면 먼저 올라가 주무세요, 성녀님.”
입을 쩌억 벌리며 하품을 하는 레테의 모습에 에녹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권했다.
“싫어. 난 에녹의 옆에 있을 거예요.”
‘세상에, 품위 없게 입도 가리지 않고 하품을 하다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엘리엇이 속으로 경악했다. 엘리엇은 대체 자신이 왜 저 여자아이를 이브와 헷갈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브와 성녀는 외양만 비슷하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다시 보니 이브보다 체구도 작았다.
‘이브라면 절대 저렇게 격 떨어지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이 났다. 이브와 똑같은 얼굴로 격식 없는 말투와 격식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여자애라니.
무엇보다도 짜증이 나는 건 이 여자애를 이브와 착각한 자신이었다.
‘어떻게 내가 이브를 저런 여자애와 착각할 수 있지.’
미약한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어서 빨리 수도로 돌아가 이브에게 자신의 죄를 털어놓고 용서받지 않으면 큰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일단은 황실의 일원으로서 제국의 손님을 모른 체할 수 없기에 동행하던 터였다.
“아스타 제국의 황태자께서 황제 폐하의 어린 시절을 닮아 무위가 굉장하다고 들었습니다만, 기사들도 모두 돌려보내고 홀로 다니실 줄은 몰랐군요.”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다니는 것은 약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엘리엇은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성녀를 흘깃 보았다.
은근히 그녀더러 ‘넌 나보다 약해!’라고 암시를 주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엘리엇의 의도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헤벌쭉 웃고 있었다.
“그런데 에녹, 아까는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고 달려온 거예요?”
“빛의 기둥을 보고 성녀님이 계신 곳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성력이 느껴졌거든요.”
“으음, 성력…… 나는 전혀 못 느끼겠는데…….”
레테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는 분명 손바닥에서 짜릿한 느낌이 들면서 빛기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손바닥에 힘을 주어도 작은 변화조차 없었다.
“너무 애쓰지 마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게 될 테니.”
그런 레테를 응시하던 미하일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또 아까처럼 나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어떡해!”
“설마 우리 성녀님께서 또 유괴나 당하는 한심한 상황에 놓이려고요.”
“나 유괴 안 당했어! 안 당했다고!”
발끈한 레테가 미하일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것을 본 엘리엇은 다시 한번 왜 성녀 같은 여자애와 이브를 헷갈린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처럼 유치하게 목소리나 높이는 모습이라니! 우리 이브라면 절대 저러지 않을 거야!’
어서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 이브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야만 지금의 불쾌한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맞아요, 성녀님은 유괴 당하지 않으셨어요.”
그때, 이브의 것과 같이 나긋나긋한 목소리 하나가 엘리엇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 제가 옆에서 꼭 지켜 드릴게요. 그러니 성력을 다루는 일에 조급해하지 마시고 천천히 기다리세요.”
아까부터 성녀의 옆에 꼬옥 붙어 있던 온유한 인상의 성기사였다.
‘차라리 이쪽이 더…… 이브와 비슷한 느낌이야.’
생김새는 전혀 달랐지만, 부드럽게 웃는 표정과 상냥하고 나긋한 말씨가 꼭 이브를 생각나게 했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성기사를 향한 묘한 호감이 피어올랐다.
“에녹도 성력을 사용할 수 있어요?”
“성녀님이나 대주교님만큼 굉장한 힘은 없지만, 검에 성력을 담아낼 수는 있습니다.”
“대단하다! 나도 빨리 성력을 자유롭게 쓰고 싶어요.”
레테는 여전히 양 손바닥을 꼬물거리며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그다지 소용없는 일이었다.
“막상 성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 귀찮은 일만 잔뜩 생길 겁니다. 나라면 성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뒤에도 되도록 오랫동안 그 사실을 숨길 거예요.”
“대주교란 사람이 그래도 되는 거야?”
“대주교도 일단은 사람이니 하기 싫고 귀찮은 일은 있는 법이지요.”
“미하일은 정말 엉터리야.”
레테가 미하일을 흘겨보며 밉지 않게 혀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제게 한숨 쉬는 미하일의 모습에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엇은 그런 레테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뭐, 웃는 건…… 귀엽긴 하네. 우리 이브처럼.’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가 상당히 귀엽다고 생각하며.
* * *
성녀의 일행은 이른 아침부터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수도까지는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이니, 지금부터 움직여야 해가 지기 전에 수도 광장에 도착할 것이었다.
“으음…….”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던 레테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곧 미하일에게 다가가 불쑥 말했다.
“머리를 묶어 줘!”
“머리를…… 말입니까?”
미하일은 예상하지 못한 요구에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드디어 수도에 도착하는 날이잖아. 최대한 예쁘게 보이고 싶단 말이야. 아, 그렇지!”
무언가 생각이 난 건지 품속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조심스럽게 꺼낸 레테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여기, 여기 초상화 속에 있는 클로이 황후처럼 머리를 땋아서 묶어 줘!”
“으음…….”
그림 속 클로이 황후의 머리 모양은 척 보기에도 굉장히 고난이도의 기술을 요구하고 있었다.
“뭐야? 설마 대주교가 머리 하나 못 묶는 거야?”
“애석하게도 대주교의 자질 중에 머리 묶기 따위는 없어서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하일은 착실하게 레테의 뒤에 서서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땋아 묶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손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거울을 응시하는 레테의 표정이 점점 울상이 되어 갔다.
“으으으…… 이게 뭐야…….”
“아무래도 이 꼴로 나가는 건 어렵겠군요.”
미하일은 냉철한 목소리로 자신의 결과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마침 에녹이 간단한 빵과 우유를 들고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성녀님, 아침 식사를…….”
언제나처럼 빙그레 웃으며 들어서던 그가 거울 앞에서 낙담하는 레테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습격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에녹 경. 그저 성녀님의 머리를 묶어 드리려다 실패한 것뿐이니까요.”
“아, 머리…….”
“잘됐군요. 에녹 경이 왔으니 에녹 경이 성녀님의 머리를 묶어 드리면 되겠습니다.”
“그래, 에녹. 에녹이 다시 묶어 줘요. 에녹은 착하니까 머리도 더 예쁘게 묶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말입니까?”
에녹은 머뭇거리며 빵과 우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엉성하게 묶였다 풀려 산발이 된 레테의 머리를 부드럽게 빗겨 주었다.
조심스럽게 빗질을 하였는데도 아프기만 했던 미하일의 손길과 달리, 에녹의 빗질은 거침없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머리를 묶어 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에녹이 작게 웃으며 능숙한 솜씨로 머리를 가늘게 땋아 내리기 시작했다.
“우, 우와…….”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점차 레테의 머리 모양이 초상화 속 클로이 황후의 것과 비슷하게 변해 갔다.
마침내 그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레테와 미하일은 동시에 감탄하며 외쳤다.
“굉장하군요.”
“정말 예뻐요, 에녹!”
신이 난 레테가 거울 앞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에녹은 뿌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정말 처음이 맞습니까? 설마 에녹 경, 우리가 모르게 숨겨 둔 딸이 있었던 건…….”
“절대 아닙니다.”
“역시 에녹은 못 하는 게 없어요!”
레테는 에녹을 향해 엄지를 치켜 올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이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에녹이었다.
에녹은 자신의 손을 잠잠하게 내려다봤다. 정말로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을 땋아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그 스스로 느끼기에도 묘하게 익숙했다. 대주교의 말마따나, 꼭 남몰래 어린 여자아이를 키워 본 사람처럼.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에녹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서 아침을 드세요, 성녀님. 곧 출발해야 하니까요.”
“네!”
에녹의 말에 쪼르르 달려온 레테가 얌전히 앉아서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수도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당일이라 그런지, 그녀의 상태가 상당히 좋았다.
“이것도요.”
“이게 뭔데요?”
“멀미를 가라앉혀 주는 약이래요. 어제 대주교님과 함께 시가지에서 구입했어요.”
레테는 다소 감동받은 표정으로 에녹이 건넨 약을 받아 마셨다. 다들 말도 없이 어딘가로 가 버렸나 했더니, 이 약을 찾으러 사라진 거였구나.
“헤헤, 오늘은 정말 하루 종일 마차를 타도 거뜬할 것 같아요!”
그렇게 상쾌한 기분이 쭉 유지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막 마차에 오른 레테는 불청객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너……!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제 이야기할 때 듣지 못했나? 수도까지 동행할 것이다.”
황태자 엘리엇이 삐딱한 자세로 팔짱을 낀 채 떡 하니 마차에 앉아 있었다.
“네가 왜?”
“제국의 황태자로서 책무를 다하기 위해 귀빈을 맞이하는 것뿐. 나도 그다지 그쪽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뒤이어 마차에 오르려던 미하일이 두 사람의 대치를 보고는 혀를 쯧쯧 찼다.
“미하일? 빨리 여기로 와!”
“됐습니다. 저는 말을 타고 따로 가겠습니다.”
“어? 왜?”
“이대로 불화를 안은 채 수도에 도착할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두 분께서 비슷한 나이 대니 함께 있으면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럼 도착할 때까지 즐거운 시간 되시길.”
“자, 잠깐만! 미하일! 이, 이 무책임한 사람……!”
레테는 미하일을 향해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마차를 빠져나갔다. 마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얼굴로 레테는 끔찍하단 표정을 지었다.
‘으으으, 말도 안 돼. 그럼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저 황태자랑 둘이서 있어야 한다는 거야?’
힐끔 돌아보자 엘리엇 역시 질색을 한 채 레테를 쳐다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모습에 레테는 기분이 슬금슬금 나빠졌다.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고개를 홱 돌릴 것까진 없잖아!’
결국 그렇게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고요한 정적만 흘렀다.
* * *
한편, 엘리엇은 레테가 짐작하는 것과 조금 다른 이유로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이브랑 더 닮았잖아.’
좁은 마차 안에서 마주보기엔 레테의 얼굴이 이브와 너무 똑같았다. 그리고 엘리엇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싫어. 기분 나빠.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싫어.’
그녀가 이브와 닮은 것도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싫었던 것은, 그녀가 이브의 쌍둥이인 자신보다 더 이브와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이러다가 수도에 가면 저 애한테 이브를 빼앗기는 건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럴 순 없었다. 이브는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것이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영혼의 반쪽이었다.
‘절대 안 돼. 내가 그동안 이브를 얼마나 힘들게 지켜 왔는데.’
그렇게 엘리엇이 속으로 전전긍긍하던 사이, 마차는 어느덧 수도에 다다랐다. 아침에 에녹이 가져다준 약 덕분인지 한나절을 꼬박 마차를 탔는데도 레테는 멀미 한번 하지 않았다.
잠시 바깥이 소란스러운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이내 마차가 멈추었다.
“성녀님.”
단정한 목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열렸다. 에녹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
그 말에 엘리엇과 함께 마차 안에서 내내 따분해하던 레테의 심장이 다시 두근, 하고 뛰기 시작했다.
“아스타 황실에서 둘째 황자님께서 성녀님을 맞이하러 나오셨습니다.”
“뭐? 이브가?”
마차가 멈추든 말든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창밖만 쳐다보고 있던 엘리엇이 그 말에 벌떡 일어났다.
힐긋 그쪽을 쳐다본 에녹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레테를 향해 두 눈을 휘었다.
“인파가 많으니 조심해서 내리십시오.”
레테는 자그마한 손으로 에녹의 손을 꼬옥 붙들고는 마차 밖으로 내렸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넓은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환호성을 내지르며 그녀를 반겼다.
“아…….”
미약한 탄성이 그녀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터였다.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세요. 연습했던 것처럼요.”
자그맣게 속삭이는 에녹의 말에 레테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를 향한 환호성이 더욱 짙어졌다. 레테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엘리엇이 그녀의 옆에 섰다. 엘리엇은 익숙한 광경이라는 듯 무심하게 사람들을 향해 손을 몇 번 흔들어 주며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이브를 찾았다.
몇 발자국 앞에서 네 마리의 하얀 말이 이끄는 황금 마차를 배경으로 한 채 서 있는 이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엘리엇이 반가운 얼굴로 이브의 이름을 외치려던 때였다.
“안녕하세요, 성녀님.”
큰 보폭으로 자박자박 걸어온 이브가 레테의 앞에 서서 빙그레 눈웃음을 쳤다.
“아스타 제국의 2황자 이브입니다. 황실의 대표로서 성녀님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긋나긋한 인사말에 그렇잖아도 살짝 상기되어 있던 레테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이 사람이…… 이브…….’
황태자의 말마따나 이브는 그녀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대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 자신과 달리 전혀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저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성녀님을 여기까지 무사히 모셔와 줘서 고마워, 엘리.”
슬쩍 고개를 돌린 이브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그 자리에 굳어 있는 엘리엇에게도 인사말을 전했다.
홀린 듯이 그를 쳐다보던 레테는 뒤늦게 아직 자신이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곧바로 미리 연습한 것처럼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서 턱 끝을 살짝 들어올렸다.
“성녀 레테, 라나 신의 뜻을 받아 걸음 했습니다.”
혹시나 목소리가 떨리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속으로 마른 침을 삼키며 우아하게 손끝을 들어올렸다.
“라나 신의 축복이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축복하듯 내리는 말에 황자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라나 신의 따님께 무한한 영광을 바칩니다.”
우아한 미성이 황자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던 ‘그’ 황태자의 쌍둥이 형제라기에 긴장했었는데, 황태자와는 성격이 전혀 딴판이었다.
“제가 라나 신의 따님을 황궁까지 에스코트를 해 드려도 될까요?”
황자가 두 눈을 사르륵 접어내리며 물었다. 레테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물론이지요.”
레테는 이브 황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기다리고 있던 황금 마차에 올라탔다.
한편, 레테의 옆에서 줄곧 서 있던 엘리엇은 충격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브가…… 이브가 나를 모른 척했어!’
물론 이브는 엘리엇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레테를 맞이하면서 엘리엇에게도 간단한 인사말을 전했다. 게다가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직전에도 엘리엇에게 시선을 보내며 눈인사까지 했다.
그렇지만 이브에게 자신이 최고의 우선순위일 거라 생각해 왔던 엘리엇은 자신보다 성녀를 먼저 챙긴 이브의 행동을 ‘무시’라고 판단했다.
‘이러다가 정말로 저 여자애에게 이브를 빼앗기겠어.’
그럴 순 없었다.
엘리엇은 큰 보폭으로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그러고는 막 닫히려는 마차의 문을 붙잡았다.
“엘리?”
성녀와 마주앉아 웃고 있던 이브가 그런 엘리엇을 발견하고는 놀라 두 눈을 깜빡였다.
“나도 같이 가.”
“잠깐, 성녀님의 의중도 여쭤 본 후에…….”
엘리엇은 이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큼성큼 마차 위에 올라타 성녀의 옆자리에 턱하니 앉았다.
“어차피 수도까지 쭉 동행했는데, 여기서 황궁까지 조금 더 같이 간다고 뭐 얼마나 불편해하시겠어.”
이브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가 함께해도 괜찮으신가요, 성녀님?”
“네, 뭐…….”
레테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난처해하는 이브의 모습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쌍둥이라면서, 어쩜 이렇게 다를까.’
레테가 두 황자를 보며 속으로 감탄하는 것과 비슷하게, 엘리엇도 자신의 앞에서 보이던 것과 사뭇 다른 얌전해진 레테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차였다.
‘예의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줄 알았는데, 이브의 앞에서만 얌전한 척하고 있잖아? 틀림없이 나쁜 속셈이 있을 거야. 순진한 우리 이브를 꼬여내려고…….’
황실의 마차는 부드럽게 내달려 황궁에 도착했다. 대주교를 비롯한 사제들은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랐다.
마침내 황궁의 정문을 통과하고 황제와 황후가 기다리는 응접실 앞에 다다른 레테는 잔뜩 긴장하여 경직되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 그녀의 기색을 알아챈 이브가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두 분 모두 상냥하고 좋으신 분들이거든요.”
“아…… 고마워요.”
그 말에 놀랍게도 긴장이 빠른 속도로 풀렸다. 대신 묘한 두근거림이 그녀의 가슴을 온통 휘저어 댔다.
이윽고 커다란 문이 열리고, 레테는 이브 황자의 에스코트와 함께 알현실 안으로 한 발짝씩 내디뎠다. 높다란 두 개의 황금 의자 위에 앉아 있는 황제와 황후의 인영이 보였다.
‘저 사람들이…….’
초상화 속에서 본 것보다 조금 더 성숙한 느낌을 풍기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레테는 손끝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성녀 레테, 라나 신의 뜻을 받아 걸음 했습니다. 아스타 제국과 제국의 주인에게 라나 신의 축복이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그러고는 아까 광장에서 한 것과 비슷한 인사말을 전하며 황제와 황후의 앞에 섰다. 다소 권태로운 얼굴로 황금 의자 위에 앉아 있던 황제 레이몬드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성녀께서 이토록 앳된 분이실 줄은 몰랐는데.”
느른한 저음이 귓가에 쿵쾅쿵쾅 울려 댔다.
“제국의 주인된 자가 라나 신의 딸에게 무한한 영광을 바치오.”
레테는 가만히 황제를 응시했다. 강한 인상과 달리 포근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드레스 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옆에 앉아 있던 황후 클로이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내려와 레테의 앞에 섰다.
“아스타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성녀님.”
무릎을 살짝 꺾어 레테와 눈높이를 맞춘 황후가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가까이에서 싱그럽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레테는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그, 그림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
하마터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성녀님께서 머무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레테의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이 있다면…… 성녀님?”
부드럽게 웃고 있던 그녀의 두 눈이 불현듯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얼굴이 지나치게 붉어요. 식은땀까지…… 어디 아프신 건가요?”
“아니, 전혀요.”
레테는 한 발짝 뒷걸음질을 치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주 멀쩡한 상태랍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클로이 황후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러고는 재빠르게 인사를 마치며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성녀의 일행으로 함께 뒤따라 온 대사제 미하일과 성기사 에녹도 짧은 인사를 하곤 성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성녀 일행이 나간 뒤, 알현실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니 황제와 황후만 남았다.
자리에 돌아가서까지 내내 입가에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던 황후 클로이는 황제 레이몬드를 향해 부드럽게 몸을 돌리며 양 손으로 턱을 괬다.
“미리 전해 듣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어린 분이네요.”
레이몬드 또한 클로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씨익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이브와 함께 들어오는데, 정말이지 깜짝 놀랐어.”
그의 손끝이 클로이의 머리카락을 한 줌 움켜잡으며 부드럽게 매만졌다. 손끝에서 흩어지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끼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닮은 것을 넘어서, 같은 사람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까.”
두 사람은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이브와 성녀를 떠올렸다. 이브 쪽이 한 뼘 정도 더 크긴 했지만, 그대로 복제해 낸 듯 닮은 두 아이의 모습에 그들은 남몰래 숨을 삼켜야 했다.
“이상하게 성녀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 있지요? 엘리엇과 이브의 또래라 그런지, 조금 더 마음이 쓰여요.”
“나도 그래.”
레이몬드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끝에 입을 살짝 맞추었다.
“의연한 척 인사했지만 아직은 어린 느낌이 나더군. 멀리서부터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대가 조금 더 챙겨줘, 클로이.”
“네, 그럴게요.”
클로이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둥글게 휘었다. 레이몬드는 제게 눈웃음치는 그녀를 보며 성녀를 생각했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전해지던 묘한 그리움……. 제 아이들과 닮아서일까. 꼭 오랫동안 알던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자꾸만 성녀가 신경 쓰였다.
그리고 그것은 클로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시종은 성녀 일행에게 각기 머물 방을 안내해 주었다.
“모쪼록 계시는 동안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네, 고마워요.”
안내를 마친 시종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레테는 참았던 숨을 후, 하고 내뱉었다.
“으아아……!”
방금 전까지 보인 모습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듯,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운 레테는 두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미하일이 그 모습을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신전에서 배우던 것을 잊었습니까?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긴장을 놓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지 몰라요.”
“하지만 너무 힘들었단 말이야. 여긴 아무도 없으니까 조금만 편하게 있을래.”
“아무도 없긴요. 저와 에녹 경은 사람도 아닙니까?”
레테는 미하일을 향해 입술을 삐죽이고는 에녹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그녀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녹, 나 조금만 편하게 있으면 안 돼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성녀님.”
역시나 에녹은 잔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레테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미하일을 향해 혓바닥을 내밀었다.
“방금 들었지? 에녹이 허락해 줬어.”
“…….”
미하일은 자신을 가뿐히 무시하며 상큼하게 웃는 레테의 모습에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어떡해, 클로이 황후가 나한테 인사해 줬어! 정말 그림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어!”
그러거나 말거나, 레테는 신이 나서 침대 위에서 방방거렸다.
“에녹도 봤지요? 클로이 황후가 레테에게 인사해 준 거 봤지요?”
“네, 봤어요.”
“오늘부터 새로운 목표를 정했어요. 레테는 꼭 커서 클로이 황후님처럼 될 거예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투지를 불사르는 레테에게 미하일이 담담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지금 제국의 황후가 되겠다고 다짐한 겁니까? 하지만 그러려면 엘리엇 황태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
“끄악! 절대 싫어!”
엘리엇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레테는 질색하며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황후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클로이 황후님처럼 우아하고 멋진 여성이 되고 싶다는 거야!”
“그러려면 지금부터 연습해야지요. 클로이 황후는 혼자 있을 때도 성녀님처럼 흐트러진 모습으로 있진 않을 텐데.”
“헙!”
침대 위를 굴러다니던 레테의 몸이 곧바로 벌떡 일어나 앉으며 바른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음…… 조금 더 연습이 필요하겠네요.”
미하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때요, 에녹? 클로이 황후와 비슷한 것 같아요?”
“네, 아주 똑같아요. 하마터면 성녀님을 클로이 황후님과 착각할 뻔했어요.”
“헤헤.”
에녹의 적극적인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레테는 수줍게 웃으며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쌌다.
“클로이 황후가 레테를 환영해 줬어요. 레이몬드 황제도요. 레테에게 영광을 바친다고 했어요. 두 분 다 너무 좋은 분들인 것 같아요.”
황제가 한 말은 형식적인 인사말이었지만, 레테는 그마저도 좋았다.
제국에 오기 전 연습한 것처럼 우아하게 일어난 레테가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양 손을 가슴 위에 얹으며 크게 심호흡을 하자 바깥의 상쾌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수도에 온 이후로 계속 좋은 느낌이 들어요. 왠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요.”
작은 소곤거림에 그녀를 지켜보던 에녹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 * *
다리아 캐롤라인 공작과 윌터 캐롤라인 경의 외동딸인 레베카 캐롤라인 공녀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성녀님은 어떠셔요? 황후 폐하처럼 아름다우신가요?”
“음…….”
그녀의 옆에 앉아 잠잠히 질문을 듣던 이브는 잠시 성녀를 떠올렸다.
아버지 레이몬드 황제의 명으로 성녀를 맞이하러 나갈 때까지만 해도 이브는 그녀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따금씩 제국을 방문하곤 하는 외국의 귀빈들과 별다르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수도의 광장에서 성녀와 처음 마주쳤을 때, 그는 첫째로 자신과 닮은 성녀의 외모에 놀랐다. 성녀는 마치 신이 장난을 부린 듯, 거울로 찍어 낸 것처럼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놀랐던 것은, 성녀와 손이 맞닿은 순간,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한 심장이었다. 굉장히 오묘한 울림이었다. 꼭 그의 형제인 엘리엇을 대할 때처럼 편안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맞아. 굉장히 예쁘고, 귀엽고…… 느낌이 좋은 분이셨어.”
이브는 나긋한 말씨로 성녀에 대해 평했다. 레베카는 성녀를 칭찬하는 이브의 말에 괜히 울적해졌다. 시무룩하니 내려간 그녀의 눈꼬리를 보며 이브는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 베키가 왜 이렇게 속상한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의 손바닥이 레베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동시에 레베카는 새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아, 안 속상해요! 속상한 일은 전혀 없는 걸요!”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하는 것과 달리 내심 속상했다.
그렇잖아도 상냥한 성격과 사랑스러운 외모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인기가 좋은 이브의 곁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브는 언제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특별하게 말한 적은 없었는데…….
‘이브 황자님은 성녀님을 좋아하는 걸까? 성녀님도 우리 또래의 여자아이라고 했는데…….’
레베카는 속으로 전전긍긍했다. 사실 그녀는 이브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어머니인 캐롤라인 공작도 항상 그렇게 가르쳤다. 이브 황자를 꼭 네 것으로 만들어서 캐롤라인 공작가로 납치해 오라고.
“그래? 속상한 게 아니라면 다행이고.”
이브는 레베카를 향해 화사하게 웃으며 눈꼬리를 접어 내렸다. 레베카가 그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이브는 속마음이 투명하게 비치는 그녀가 너무 귀여웠다.
두 아이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던 때, 엘리엇이 별안간 난입했다.
“이브! 이브!”
“엘리?”
엘리엇을 발견한 이브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브에게로 뛰어오던 엘리엇이 그의 옆에 붙어 있는 레베카를 발견하고는 손을 내렸다.
“공녀도 함께 있었군.”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레베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브 황자님.”
그러고는 재빠르게 이브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는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결투를 신청하거나 괴롭히지 않는 엘리엇이지만, 이브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한없이 날카로워졌다. 자칫 함께 있다가 이브를 좋아하는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하면 그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엘리엇은 후다닥 사라지는 레베카를 힐긋 쳐다보고는 방금 전까지 레베카가 않아 있던 이브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이브를 노려보았다.
꼭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 이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엘리?”
“배신자.”
“……?”
“너, 어떻게 나보다 성녀를 먼저 챙길 수 있어!”
잠시 의아해하던 이브는 곧 엘리엇이 광장에서의 일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엘리, 성녀님은 제국의 귀빈이잖아. 나는 아버지의 명으로 성녀님을 모시러 간 거고.”
이브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도!”
냅다 성을 내던 엘리엇이 이브의 무릎에 고개를 묻으며 비비적거렸다.
“이브는 내 건데 그 요망한 성녀가 나타나서 내게서 이브를 빼앗으려 했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성녀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엘리. 성녀님은 귀한 손님이라고 그러셨단 말이야.”
이브는 나긋하게 달래며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까 레베카를 쓰다듬어 줄 때와 같은 나긋한 손길이었다.
“내 앞에서 성녀님 편들지 마. 언제는 나를 위한 사람이 될 거라 약속했으면서, 이렇게 변해 버리다니.”
엘리엇이 제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던 이브를 떠올리며 분한 마음을 터뜨렸다.
황자들의 스승으로 초청하였던 제국의 내노라하는 학자들은 입을 모아 이브를 칭찬했다. 자신의 자질을 발견한 이브는 제일 먼저 엘리엇에게 달려와 약속했다. 나중에 커서 꼭 제국 최고의 학자가 되어 엘리엇의 보좌를 맡을 거라고.
“무슨 소리야, 엘리. 나는 오늘도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 종일 공부만 했는걸?”
“거짓말. 방금도 캐롤라인 공녀와 함께 노닥거리고 있었으면서.”
엘리엇의 표정이 뾰로통하게 변했다. 그것은 본 이브가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엇은 가끔 동생 같았다. 너무 귀여웠다.
이브는 엘리엇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그와 닮은 성녀 레테를 떠올렸다. 성녀라고 해서 어머니처럼 성숙하고 자애로운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막상 만나 본 성녀는 엘리엇처럼 귀여웠다.
귀여운 것이라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물건이든 모두 좋아하는 이브는 귀여운 사람이 늘어나 기분이 무척 좋았다.
* * *
저녁에는 성녀 일행을 위한 황궁 만찬이 준비되었다고 했다. 레테는 거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두 원피스를 두고 고민했다.
“이거랑 이거 중에 어떤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에녹은 그녀가 내민 두 원피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무리 다시 보아도 똑같은 색깔과 똑같은 디자인의 원피스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건 레테가 원하는 바가 아니리라.
결국 그는 애매하게 웃으며 왼쪽의 원피스를 가리켰다.
“이쪽의 원피스가 레테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 말에 레테는 신나하며 옷을 갈아입은 뒤, 에녹에게 머리를 땋아 달라 부탁했다. 준비를 마친 그녀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두근두근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마침내 만찬 시간이 되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엘리엇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녁 만찬장까지 에스코트하러 왔다.”
새침하게 턱 끝을 들어 올리는 엘리엇을 보며 레테는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의심했다.
‘왜 이 애가 온 거지? 날 괴롭히려고 찾아온 거 아냐?’
그녀의 의심을 알아챈 엘리엇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아버지의 명으로 온 거지.”
엘리엇이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순간, 곧바로 그의 뒤편에서 조곤조곤한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엘리, 성녀님껜 예의를 갖춰서 말씀드려야지.”
둘째 황자 이브의 목소리였다. 엘리엇과 레테는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브! 나를 보러 온 거야?”
엘리엇은 레테를 대할 때와 사뭇 다른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나 이브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아니, 네가 또 무례하게 행동할까 봐 걱정돼서 온 거야.”
“무례하게 행동 안 했어!”
엘리엇은 꼭 말썽을 피우다 어머니께 들킨 기분이 들었다.
“정말인가요, 성녀님?”
이브는 엘리엇의 어깨 너머로 레테를 쳐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질문의 화살이 제게 오자 레테는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전혀 무례하지 않으셨어요.”
엘리엇과 더불어 덩달아 말썽을 피우다 들킨 기분이 들었던 레테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답했다.
그러자 그녀를 응시하던 이브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만찬장까지 함께 갈까요?”
얼떨결에 레테는 엘리엇과 이브, 두 황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만찬장까지 가게 됐다. 그들의 뒤를 미하일과 에녹이 따랐다.
만찬장에는 이미 레이몬드와 클로이가 상석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성녀님. 먼 길 오시느라 피곤했을 텐데 여독은 푸셨나요?”
“네, 덕분에요.”
두 사람을 보니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레테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부디 황궁에서의 첫 식사가 입에 맞기를 바라오.”
“감사해요.”
레테는 신전에서 배웠던 제국의 식사 예법을 떠올리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클로이가 식사를 하는 도중 소소한 것들을 물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럼 성녀님께서는 제국에 방문하는 것도 처음이겠군요.”
“제가 기억하는 한, 처음이에요. 그래도 많은 분들이 환영해 주셔서 무척 기뻤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상대를 불편하지 않게 해 주는 힘이 있었다. 레테는 어느 순간 그녀와의 대화에 흠뻑 빠져 버렸다.
“시간이 나시면 수도뿐만 아니라 남쪽의 휴양 도시들도 소개시켜 드리고 싶네요.”
“휴양 도시요?”
“네, 제국 남쪽에는 휴양을 위한 도시들이 많이 있답니다. 황실 소유의 도시도 몇 군데 있어요. 이번 겨울이 지날 때까지 제국에 머무를 생각이시라면, 나중에 함께 휴양을 떠나는 것도 좋겠네요.”
“너무 기대되는걸요. 저도 꼭 가 보고 싶어요.”
조용한 만찬장 안에서 간간이 꺄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주로 대화를 하는 이는 클로이와 레테였고, 레이몬드가 흐뭇한 얼굴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종종 한마디씩 끼어들곤 했다.
“성녀가 원한다면 나 또한 기필코 시간을 내 보겠소. 제국의 황제로서 귀한 손님을 제대로 맞이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정말 감사해요. 이렇게까지 환대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레테의 두 뺨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황제와 황후의 호의가 그녀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같은 부모님뻘의 사람들이었지만, 에녹이나 미하일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에녹이나 미하일이 그녀의 보호자이면서도 한편으론 가까운 친구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라면, 클로이와 레이몬드는 정말로 어른의 느낌을 풍기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자신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레테는 클로이의 옆에 차례로 앉아 있는 엘리엇과 이브를 힐끔 보았다.
이브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줄곧 사근사근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엘리엇은 레테와 있었을 때와 사뭇 다른 태도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가족들 앞에서는 얌전한 척 내숭을 떠는 모양이다.
“식사를 마친 뒤 함께 산책을 하실래요? 여자들끼리요.”
“좋아요!”
클로이의 제안에 레테는 두 눈을 반짝 빛내며 대답했다. 그녀와 단둘이 산책을 한다는 생각에 신이 난 레테는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까지 빛의 속도로 해치웠다.
옆에서 미하일이 천천히 먹으라고 아주 작게 속삭였지만, 이미 클로이와의 산책으로 들뜬 레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황궁 안에만 열 개가 넘는 산책로가 있답니다.”
나직한 어둠이 깔린 산책로를 함께 걸으며 클로이가 상냥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나 많이요?”
“네. 괜찮으시다면 머무시는 동안 다른 산책로들도 모두 소개시켜 드릴게요.”
“너무 좋아요, 클로이 황후님과 산책이라니……!”
남은 날 동안 계속 함께 산책을 하자는 그녀의 제안에 레테는 잔뜩 들뜨고 말았다.
“있지요, 저는 사실 클로이 황후님을 엄청 만나 뵙고 싶었어요.”
“저를요?”
갑작스러운 레테의 고백에 클로이가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 음…… 그, 초상화를 봤거든요.”
레테는 잠시 멈춰 서서 품속에서 고이 간직하던 클로이의 초상화를 꺼내 보여 주었다.
“어머, 정말로 제 초상화네요? 시중에 황실의 초상화가 거래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우연히 갖게 되었는데, 어…… 그림만으로도 너무…… 음…….”
클로이는 정말 신기해하며 자신의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생긋 웃었다.
“이것 참 영광이에요. 무려 성녀님께서 제 초상화를 간직해 주시다니.”
그녀의 반응이 나쁘지 않자, 레테는 더욱 신이 나서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초상화를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 하고 뛰지 뭐예요? 아마도 저는 황후님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버린 것 같아요!”
“저도 성녀님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버린 것 같은데, 이러다 레이몬드 폐하께서 알게 되실까 봐 큰일이네요. 보기와 달리 질투가 많으시거든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클로이 님처럼 멋진 부인이 있는데, 항상 주위를 경계해야지요.”
클로이는 그런 레테의 말이 재미있어서 키득키득 웃었다.
자신의 딸뻘인 여자아이가 자신을 칭송하는 게 썩 귀여웠다. 비슷한 또래이지만 엘리엇과 이브는 전혀 보여 주지 않던 면모였다.
“성녀의 출현은 백십 년 만에 일어난 이라 다들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당장 사흘 뒤에는 성녀님을 환영하는 파티가 열릴 거고요.”
“환영 파티요?”
파티, 라는 말에 레테가 조금 긴장해서 물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곧바로 알아챈 클로이가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저 사람들 앞에 얼굴을 보인 뒤에 맛있는 것들을 먹고 즐겁게 노니시면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말하니 정말 간단한 일처럼 느껴지잖아요.”
레테는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뵈었을 때 말씀드렸다시피, 조금이라도 불편한 일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성녀님이 머무시는 동안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황후님은 정말 친절하셔요.”
“제국의 귀빈을 모시는 건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데,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흘깃 고개를 들어 올리던 레테는 빨갛게 물든 클로이의 귓불을 발견했다.
‘조금 추워 보여.’
한 번 인지하고 나자, 그녀의 옷이 지나치게 얇아 보였다. 이러다 그녀가 감기에 걸리면 어떡하지, 걱정이 되었다.
“왜 그러세요, 성녀님?”
불안한 기색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는 레테의 시선에 클로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춥지 않으세요?”
“아…… 괜찮아요.”
클로이는 괜찮다며 짧게 웃었지만, 레테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다. 갑자기 기분이 초조해졌다.
레테가 몇 번이나 괜찮다는 클로이의 말에도 어쩔 줄 몰라 하던 때였다. 그녀의 손바닥 위로 별안간 작고 둥그런 구체가 생겨났다.
“어…… 어어?”
클로이와 레테는 동시에 놀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이게…… 말로만 듣던 성력이군요? 굉장해요.”
“아, 아니…… 저는 그냥…….”
레테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하며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구체를 쳐다보았다.
‘너무 추워 보여서……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둥그런 구체가 조금씩 커지더니 부드러운 빛무리가 되어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따스하게 물들었다.
“따뜻하네요. 꼭 초겨울이 아니라 봄날 같아요. 고마워요, 성녀님.”
클로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자신보다 더 놀라하고 있는 레테에게 감사를 표했다. 잠시 동안 어안이 벙벙해있던 레테도 이내 따스한 공기 속에서 그녀와 얼굴을 마주 보며 함께 웃었다.
* * *
성녀를 위한 환영 파티는 황궁의 무도회장에서 열렸다. 오전부터 시작된 행사는 오후가 되었음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클로이의 말에 따르면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한꺼번에 모인 자리라고 했다. 미하일은 황궁에서 주최해 주는 환영 파티가 끝나고 나면, 사제들과 함께 황궁 밖을 순회하며 평민들과도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
새삼 자신의 위치가 다가오는 느낌에 레테는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오늘만 해도 그녀는 끝없이 다가와 인사를 하고 비켜 주는 처음 보는 귀족들로 인해 정신이 없었다.
한동안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던 레테는 간신히 자리를 피했다. 모두가 그녀에게 다가와 비슷한 말을 했다. 제국에 와 주어 감사하다고. 그녀를 정말 뵙고 싶었다고.
처음 보는 이들의 크나큰 호의가 아주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잠시 구석에서 숨을 돌리던 레테는 여유롭게 다과를 먹고 있는 미하일을 발견했다.
‘나는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대주교는 저렇게 한가롭게 맛있는 거나 먹고 있고.’
얄미워서 괴롭히고 싶었지만 이곳에서 미하일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가는 또 그 근처의 사람들에게 붙잡혀 인사를 주고받아야 할 것 같아서 관뒀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미하일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에녹이 눈에 들어왔다.
에녹은 굉장히 인기가 많았는데, 젊은 영애들과 결혼한 귀부인 할 것 없이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에녹이라면, 인기가 많을 만하지.’
에녹이 인기가 많은 모습에 괜히 레테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성녀의 열렬한 추종자 중 한 명인 빈센트 백작 부인이 에녹의 주위를 둘러싼 무리에 함께 있다가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빈센트 백작이 재빠르게 부인의 곁으로 다가가 자신의 겉옷을 걸쳐 주며 에스코트했다. 부인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며 굉장히 절절매고 있었는데, 그가 부인을 많이 좋아하는 게 멀리서도 느껴졌다.
‘백작 부인은 백작에게 엄청 사랑받고 있네.’
그들을 한참 들여다보자니, 감정의 빛깔이 어스름히 느껴지는 듯했다. 사람들이 레테에게 보내는 것과 사뭇 다른 종류의 호감이었다. 두근두근, 핑크빛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레테는 연회장 안을 주욱 둘러보았다. 모여 있는 대다수는 다들 나이가 찬 성인이었다.
그중 레테 또래의 아이가 세 명 보였다. 엘리엇 황태자와 이브 황자,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는 이브의 옆에 꼭 붙어서 수줍은 얼굴로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 여자애는 이브 황자를 좋아하고 있어. 그리고 엘리엇 황태자를 싫어해.’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감정이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것도 성력의 일종인 걸까.
그렇게 한참 동안 사람들을 구경하는 레테는 문득 클로이와 레이몬드가 보이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클로이 황후가 안 보여. 레이몬드 황제도…… 어디 있지?’
그들이 보이지 않자 괜한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레테는 연회장 내의 분위기를 한번 훑어본 뒤,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다 저 멀리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는 클로이를 발견했다.
‘저기 있잖아! 어디를 가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테의 입가 위로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레테는 조심스럽게 몸을 숨기고 천천히 클로이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클로이는 자신을 뒤따르는 레테를 알지 못하고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인적이 드문 커다란 나무 앞에서 멈추었다.
‘레이몬드잖아!’
숨어서 클로이의 뒤를 쫓던 레테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서로를 마주 보며 무언가 속닥속닥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도 핑크빛 감정이야.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는 게 느껴져.’
어쩐지 자신의 일도 아닌데 기분이 흐뭇해졌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는 걸까?’
레테도 두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 그들 사이에서 흐르는 이 기류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두 사람의 감정이 보다 짙게 물들더니, 색깔을 달리했다. 클로이의 색깔은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고, 레이몬드는…… 점점 마음이 새까맣게 변해 갔다.
‘갑자기 왜……!’
화들짝 놀란 레테가 두 사람이 싸우는가 싶어 자칫 뛰어나가 말릴 기세로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돌연 레이몬드가 클로이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안 돼! 저렇게 큰 팔로 낚아채면 분명 아플 거야!’
레이몬드의 새까만 마음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그가 아주 무서운 표정으로 클로이를 향해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클로이 황후님을 위협하고 있어!’
보다 못한 레테는 레이몬드를 말리기 위해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자신을 잡아당기는 누군가가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누……! 읍!”
놀라 소리치려는 레테의 입을 얇은 손바닥이 텁, 하고 틀어막았다. 한참 동안 바둥거리던 레테는 자신을 붙든 이가 엘리엇 황태자란 걸 알아챘다.
“조용히 하겠다고 약속하면 손을 놓아 줄게.”
엘리엇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하자, 레테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엘리엇에게서 해방된 레테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난…… 황후님이 안 보이기에 걱정 돼서.”
“난 네가 수상한 행색으로 어머니의 뒤를 쫓길래.”
“수상하다니! 누가!”
발끈한 레테가 양 주먹에 힘을 주며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클로이와 레이몬드에게 들키고 말았다.
“엘리엇…… 그리고 성녀님?”
레이몬드와 붙어 있던 몸을 재빠르게 떼어 낸 클로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불렀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오?”
레이몬드 또한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그게…….”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린 레테와 엘리엇은 동시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차마 클로이를 미행했다고, 그리고 클로이를 미행하는 레테를 마찬가지로 미행하는 중이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어색한 공기가 네 사람 사이로 흐를 적에, 차갑고 촉촉한 것이 레테의 얼굴 위로 톡 하고 떨어졌다.
“어?”
고개를 들어 올리던 레테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두 눈을 잘게 흔들었다.
“눈이 내려요……!”
하늘에서 새하얀 눈송이가 송이송이 흩날리고 있었다.
“올해의 첫눈이네요.”
클로이가 그녀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이와 레테는 동시에 손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하이얀 눈송이가 그녀들의 손바닥 위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울컥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성녀님?”
“왜, 왜 울어?”
“무슨 일이오, 성녀?”
그녀를 지켜보던 세 사람이 당황하며 물었다.
“아니요, 이건 그냥…… 갑자기 왜 눈물이…….”
레테 또한 자신의 눈물에 스스로 당황하며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그러나 왠지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그냥 하늘에서 내리는 올해의 첫눈을 맞았을 뿐인데. 그 순간 이상하게 감정이 북받쳐 버려서.
“…….”
안타까운 얼굴로 지켜보던 클로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레테의 작은 몸을 안아 주었다. 포근한 그녀의 품 안에서 레테는 간신히 울음을 멈추었다.
“고마워요, 클로이 님. 안 좋은 모습을 보였어요.”
“괜찮아요. 누구나 가끔 이유 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클로이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춥지는 않으세요? 이만 들어갈까요?”
“아니요.”
레테는 씩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클로이와 레이몬드와 그 옆에 있던 엘리엇까지, 모두를 돌아보았다.
“함께 첫눈을 더 맞고 싶어요. 우리 조금만 더 여기 있어요.”
그 말에 모두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엘리엇마저도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그맣던 눈발이 점차 굵어지고 있었다. 따스한 눈송이가 세상을 하얗게 내리덮기 시작했다.
아주 먼 테라스에서 푸른 머리카락의 남자가 그들을 보며 작게 두 눈을 휘었다.
“결국, 이루어졌네요.”
작은 읊조림에 남자의 옆에 있던 자그마한 남자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쪽에 뭔가 있나요?”
남자아이는 남자가 보는 쪽을 향해 고개를 뻗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닙니다, 황자님. 아무것도.”
“흐음…….”
아이는 이내 흥미를 잃고서 난간에 등을 기댔다.
“그나저나 성녀님이 계속 보이지 않네요. 대주교님과 함께 있으면 금방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돌아오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그러지 말고 대주교님이 성녀님을 찾아 주시면 안 되나요?”
“글쎄요. 지금은 그다지……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방해요?”
아이가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두 눈을 끔뻑거렸지만, 남자는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고 그저 희미한 미소만 머금었다. 물끄러미 남자를 올려다보던 아이는 잔잔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녀님을 볼 때마다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엘리를 볼 때랑 비슷한데, 조금 더 짙은 느낌이에요. 심장이 쿵, 뛰고…… 왠지 모르게 울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같은 영혼이 서로를 알아보는 거지요.”
아무도, 심지어는 성녀마저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신의 기록자인 남자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건너온 성녀 레테의 영혼과 아스타 제국의 황자 이브의 영혼이 서로 같은 영혼임을.
성향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들에게는 같은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어긋난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두 개의 같은 영혼이 같은 흐름 속에 공존하는 괴이한 상황이 생겨나 버렸다.
아마 앞으로도 두 사람은 종종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낄 것이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레테는 늘 그들의 가족이 되기를 소망했으니까.’
남자는 눈앞의 영혼 또한 굉장히 사랑스러웠지만, 그가 알고 있는 가엾은 또 하나의 영혼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레테…… 어쩌면 이 시간 속에서 존재하면 안 되는 세상에서 가장 이질적인 영혼. 그리고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남자는 거기까지 생각을 멈췄다.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같은…… 뭐라고요?”
“아닙니다.”
남자는 또다시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을 돌렸다. 아이는 괜히 입술을 한 번 삐죽 내밀며 말했다.
“아무튼 저는 성녀님이 참 좋아요.”
“저도 성녀님을 참 좋아하고 있습니다.”
“에이, 그게 뭐예요.”
실없는 웃음이 두 사람 사이를 떠다녔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올해의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지요.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으니.”
“저는 조금 더 이곳에 있다가 갈게요.”
아이는 양 손을 뻗어 내리는 눈송이를 붙잡으며 푸스스 웃었다. 잠시 그 모습을 응시하던 남자 또한 아이와 함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그럼 저는 이만.”
남자는 먼저 자리를 떴다. 홀로 테라스에 남은 아이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선 채로 내리는 눈을 맞았다. 이상하게 차갑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해의 첫눈은 지나치게 따스하여서, 눈물겹게 포근하여서.
아이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