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6. 망각 (2) (18/21)
  • 외전6. 망각 (2)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대의 축복이자 저주였다. 잊힌다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카일로스 루드비히에겐 그러했다. 한때 그는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되길 바랐다.

    운이 좋게도 괜찮은 혈통을 타고난 그는 제국에서 가장 풍족한 가문 중 하나를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원하는 만족감을 안겨주지 못했다.

    그래 봤자 그는 결국 황실의 핏줄이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묻힐 것이었고, 그의 이복아우는 모든 이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을 아스타 제국의 황태자였다.

    이복아우의 모든 것을 탐하였으나, 그 죄로 그가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여자를 잃었다. 어렵사리 갖게 된 한 번의 기회로 그녀를 되찾길 바랐으나, 아주 뒤늦게 그는 깨달았다.

    시간의 역행은 그를 위해 준비된 기회가 아니었다는 걸.

    ‘나와 함께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자, 카일로스.’

    자신을 이곳에 가두고 사라져 버린 어린 여자의 날 선 증오, 그리고 그 증오보다 더욱 깊었던 원념이 이 공간 안에 남아 오래토록 카일로스를 괴롭혀 왔다.

    ‘역사조차도 너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저주와도 같은 한마디는 그대로 카일로스를 옭아맸다. 처음에는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의 카일로스는 클로이가 또다시 자신을 버리고 이복형제에게…… 아니, 사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 남자에게 가 버린 일로 상당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저 비유적인 표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정말로 잊히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처음에는 그를 ‘루드비히 대공’이라 부르던 간수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서서히 ‘대공’이라고만 칭하더니, 이제는 그저 ‘이름 없는 죄인’이라 불렀다.

    ‘정말 모두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말도 안 돼. 난, 난 그래도 한때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가문이었던…….’

    레테의 저주를 곱씹고 또 곱씹던 카일로스는, 문득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가문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아챘을 때, 온몸의 핏기가 빠져나가고 식은땀이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오슬오슬한 한기 속에서 카일로스는 자신의 이름마저 기억해 내지 못했다.

    ‘내 이름이 뭐였지? 나는…… 나는 누구였지? 대체, 나는 왜 이곳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레테가 말했던 ‘모두’에는 ‘카일로스 그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때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억될 자리에 오르길 갈망했던 이에게는, 정말이지 가장 끔찍한 저주였다.

    좁은 창을 노려보던 그는 문득 귓가에 아득히 들리는 목소리 하나에 정신을 차렸다.

    ‘숙부님…….’

    그가 사랑하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여자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언제나 자신의 앞에 서면 수줍은 표정을 짓곤 하던 앳된 여자…….

    “클로이…….”

    자신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여자의 이름만큼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의 언저리에 남아 있었다.

    괜찮았다. 모두의 기억에서 잊힌다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클로이, 그녀만은 자신을 기억해 주길 바랐다.

    ‘그녀라면 나를 기억해 줄 거야. 그녀라면…… 그토록 맹목적으로 나만을 쫓아왔던 아인데…… 그녀라면, 틀림없이…….’

    그 쓸쓸하고 황폐한 서쪽 탑에서 존재를 잃은 남자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클로이, 그녀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주기를. 갇혀 있는 저를 구해 주기를.

    좁은 창을 통해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아침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계절의 변화뿐이었다.

    “클로이…….”

    이따금씩 그녀가 그리워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는 벽에 머리를 찧으며 절규하곤 했다. 물론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간수들의 폭력에 여윈 몸은 금방 무너지고 말았지만.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좁은 창 너머로 그녀를 발견했다.

    “클로이……!”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곧바로 제게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몸뚱이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다.

    분명 그가 알고 있던 남자였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탐내던 남자였다.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탐욕스러운 남자였다. 끝내는 사랑하는 그녀마저도 그 남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남자는 이를 바드득 갈며 분통을 터뜨렸다.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야, 클로이. 네가 있을 곳은 그곳이 아니야. 너는 여기…… 내 품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또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

    수십 번의 계절이 흐르는 동안 존재를 잃은 남자는 매일 좁은 창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잔인하게도 그가 갇혀 있는 탑에서는 이따금씩 다른 남자와 함께 산책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잘 보였다.

    그 남자의 부인이 되고, 그 남자의 아이를 낳고, 그녀와 그 남자의 아이들이 자라나고…….

    그녀는 하루하루 보다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클로이…… 클로이…….”

    이제는 쉬어 버린 목소리가 하염없이 그녀만을 불러 댔다.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저를 잊고서…….

    “아니야. 그럴 리가. 클로이가 나를 잊었을 리 없어!”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 때면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리쳤다.

    과연 그럴까? 너도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녀가 과연 너를 기억할까?

    그럴 때면 남자는 양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어느 순간부터 남자는 날짜를 세는 것을 포기했다. 시간이란 더 이상 남자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간혹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덧없는 시간의 흐름을 알려 줄 뿐이었다.

    * * *

    황제와 황후의 열 번째 결혼기념일 날, 제국은 온통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럴 때면 간혹 가장 악질적인 죄수에게도 온정의 손길이 닿곤 했다. 서쪽 탑에 갇힌 남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아주 이른 아침부터 간수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오늘만큼은 서쪽 탑 꼭대기에 갇힌 죄인도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간수는 덥수룩하게 자란 남자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 주었다. 딱딱한 벽돌을 헤집느라 늘 자라지 못하고 검붉은 핏물이 맺힌 채 짧은 길이를 유지하고 있는 손톱은 굳이 다듬을 필요가 없었다. 귀찮은 일거리가 하나 줄었기에 간수에겐 좋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사람의 몰골이 아닌데.”

    “쯧쯧, 이놈은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기에 이곳에 갇힌 거야?”

    가장 오래 일했다는 간수조차도 남자가 누구인지, 무슨 연유로 탑에 갇혔는지 알지 못했다.

    “반역이라도 저지르려고 한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십 년 전에 있었던 아놀드 캐롤라인의 반역 사건 이외에는 단 한 건의 반역도 없었다고.”

    “하긴, 누가 감히 우리 폐하께 반역을 꾀하겠어.”

    간수들은 실없이 키득키득 웃으며 남자의 정체를 저희끼리 추론해 댔다.

    “어쩌면 우리 황후 폐하께 추파를 던지다가 붙잡힌 건지도 몰라.”

    “에이, 고작 그런 일로 이곳에 갇혔다고? 아, 물론 그것도 굉장히 불경한 죄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폐하께서 클로이 황후님을 얼마나 애지중지 아끼는지 못 봤나?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실 것 같은데.”

    간수의 입에서 황후의 이름이 나온 순간 흐릿하던 남자의 두 눈이 번뜩 깨었다.

    “으음…… 하긴, 황후 폐하처럼 아름다운 분을 옆에 두고 계시려면 불경한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겠지.”

    “뭐, 이 남자의 정체가 뭐든, 우리에겐 고마운 존재 아니겠어? 이 남자 한 명 덕분에 우리가 녹을 받으며 먹고 사는 거니까.”

    결국 남자의 정체를 파헤치는 걸 포기한 간수들은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자, 다 되었다, 이놈아!”

    남자의 머리와 수염을 짧게 다듬어 준 간수가 호탕한 목소리로 외치며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

    오랫동안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앙상하게 마른 몸이 그대로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보니 꽤 곱상한 얼굴을 하고 있잖아?”

    “그럼 뭐해. 평생 이곳에서 썩어 나갈 가죽데긴데.”

    간수들은 무엇이 우스운지 엎어진 남자를 보며 웃어 댔다.

    순간, 바닥에 엎어진 남자가 고개를 들어 밖으로 나가는 간수들을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이따가 한 시간쯤은 특별히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도록 해 줄 테니…….”

    마치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중얼거리던 간수의 입이 돌연 멈추었다. 그의 눈에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간수의 허리에 달려 있던 검을 빼앗고 그의 목을 베어 낸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 이게 무슨……!”

    놀란 나머지 두 명의 간수가 일제히 칼을 뽑았다. 그러나 남자는 그들이 자세를 갖추는 것을 기다려 주지 않고 그들의 손목을 베었다.

    끔찍한 비명이 서쪽 탑을 가득 메웠으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남자는 스산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며 잘려 나간 손목을 보며 울부짖는 간수들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너무 오랜만에 검을 잡은 탓일까. 깔끔하게 죽이지 못한 간수들이 옅은 숨을 내쉬며 끄윽끄윽 울고 있었다.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을 스윽 내려다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를 찾으러 갈 심산이었다.

    ‘클로이…….’

    오랜 세월 동안 빛이 바랜 기억 속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온전한 빛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굽이치는 은빛 머리칼과 사랑스러운 적색 눈동자, 제게 다가올 때면 양 볼에 홍조를 띠고서 슬며시 짓곤 하던 수줍은 미소…….

    저를 이루던 모든 것이 회색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오직 그녀만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나의 클로이…….’

    곧 그녀와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오랫동안 죽어 있던 가슴이 다시 들끓어 댔다.

    남자는 은밀하게 몸을 숨기며 그녀를 찾아 움직였다.

    무슨 특별한 날인 건지, 유독 궁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오랜 세월 좁은 창을 통해 보아 왔던 그녀가 자주 다니는 산책로를 향해 걸었다.

    다들 정신이 없는 탓인지 아무도 남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남자가 아주 조용히 움직일 때였다.

    ‘아……!’

    환한 빛이 눈앞으로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수풀가에서 움직이던 남자는 그 자리에 붙박인 채 저 멀리 보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클로이……?”

    짧은 순간, 어느 쪽이 그녀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기억 속의 그녀보다 조금 더 성숙해 보이는 여자와, 그의 기억 속 최초의 그녀보다도 어려 보이는 작은 아이…….

    아, 그러니까 저 두 사람은…… 그녀와 그녀의 아이였다. 그녀가 아이의 손을 가볍게 잡고서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가 멍청하니 서 있는 동안 그들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클로이……!”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수풀 밖으로 뛰어나갔다. 단란하게 웃으며 걸어오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 어머니!”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여자의 치마 뒤로 숨었다. 여자는 마치 위험한 것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듯, 양 팔을 벌리며 아이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신가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남자에게 향했다. 동시에 몇 발짝 뒤에서 여자를 따르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남자를 위협했다.

    남자는 자신을 향한 날 선 쇠붙이에도 굴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더 다가갔다.

    “클로이…….”

    서글픈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기실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못했던 남자의 목청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라고는 오직 그녀의 이름뿐이었다.

    “클로이, 나의 클로이…… 클로이…….”

    남자는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여자의 이름을 읊어 댔다.

    한편, 아스타 제국의 황후 클로이는 정오에 있을 황제 레이몬드와의 열 번째 결혼기념식을 앞두고 둘째 황자 이브와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얼마 전 황태자 책봉을 받은 첫째 황자 엘리엇은 결혼기념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녀를 위한 선물을 사냥해 오겠다며 새벽 일찍 사냥터로 떠나고 없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두 형제지만 엘리엇과 이브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이브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보다 어머니인 클로이와 함께 산책을 하며 이야기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

    그런 이브와 클로이는 엘리엇이 과연 어떤 선물을 사냥해 올 지 이야기를 나누며 황궁 뒤편을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낯선 남자가 그녀와 이브의 앞에 나타났다. 준수한 얼굴과 달리 상당히 볼품없는 행색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처음에는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안전을 위협하는 괴한이라 여겼다. 그러나 남자는 두 사람을 위협하는 대신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이름만을 읊조렸다. 그것도 아주 구슬픈 목소리로 클로이, 하고.

    ‘나를 찾아온 건가?’

    클로이는 재빠르게 이브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향한 빛바랜 눈동자에 그득한 환희가 차오르고 있었다.

    ‘우리를 해치려는 기미는 없어.’

    정신이 온전치 못한 남자 같았다. 기사들은 이 남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클로이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황후를 부르며 애달픈 눈을 하고 있는 이 괴인을 그녀의 아름다움에 휩쓸린 가엾은 남자라고 여겼다.

    딱히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일 년에도 두어 번씩은 있어 왔던 일이니까. 다만, 직접적으로 황궁에 침투한 점이 색달랐을 뿐.

    클로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일 무렵, 친위대의 보고를 받은 레이몬드가 직접 나타났다.

    “클로이! 괜찮나?”

    “레이몬드!”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이브를 안아 황궁 친위대에게 건네어 아이를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던 클로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혹시 다친 곳은?”

    “없어요, 전혀.”

    레이몬드의 등장에 뒤늦게 마음을 놓은 클로이가 가벼운 한숨을 쉬며 그의 품에 기대었다.

    그 순간, 내내 그녀의 이름만을 읊던 남자의 동공이 가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남자가 무릎을 꺾으며 바닥에 엎어졌다. 레이몬드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누구지, 저 남자는?”

    “모르겠어요.”

    클로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한번 스쳤더라면 분명 기억할 법한 준수한 외양의 남자였는데도, 기억에 없는 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으음…….”

    레이몬드는 조금 불쾌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남자에게서 썩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오랫동안 씻지 않은 자의 것처럼.

    “친위대에 맡기고 이만 돌아가지.”

    “네.”

    클로이가 막 레이몬드를 따라 돌아서려던 때였다. 바닥에 엎어져있던 남자가 밭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

    두 사람이 돌아서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을 적에 남자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클로이의 앞까지 다가왔다. 이에 놀란 기사들에 금방이라도 남자를 찌를 듯 창검을 들이밀었다.

    “잠시만요.”

    클로이는 기사들을 잠시 멈추게 하고 남자를 향해 천천히 몸을 수그렸다. 그리고 그대로 남자와 두 눈을 마주쳤다.

    “괜찮으세요?”

    “……!”

    동정심 가득한 목소리가 남자에게 향했다. 그 나긋한 음색에 남자는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고.

    ‘역사조차도 너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저주와도 같은 목소리가 남자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나와 함께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자.’

    깊은 절망이 온 정신을 잠식해 버린 순간, 남자가 클로이의 드레스 밑단을 부여잡으며 울부짖었다. 동시에 레이몬드가 클로이의 허리를 낚아채며 남자에게서 떼어놓았다.

    “위험했어, 클로이.”

    “……고마워요, 레이몬드.”

    갑작스러운 남자의 울부짖음에 내심 놀랐던 클로이는 레이몬드의 품 안에서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남자의 울부짖음이 더욱 거세어졌다. 기사들이 남자를 옴짝달싹 못하게 창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어딘가…… 아픈 사람인가 봐요.”

    “그러게 말이다.”

    레이몬드 또한 남자를 딱하게 여기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동정하는 순간, 남자는 더 이상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클로이, 왜…… 어째서…… 왜 나를…….’

    무언가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녀의 이름 외에 어느 단어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자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를 위협하고 있던 창날에 피부가 쓸리고 피가 났다.

    “위험해!”

    놀란 클로이가 남자를 향해 외쳤다. 그 순간 놀랍게도 남자의 몸이 멈추었다. 남자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클로이 또한 남자를 보았다.

    오랜 세월 속에서 다소 망가지고 무너진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남자는 그 옛날 제국에서 가장 우아하고 기품 있던 루드비히 대공의 모습을 아주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었다.

    ‘너는 여전히 나를…….’

    클로이를 응시하던 남자의 두 눈이 일순 부드럽게 휘었다.

    ‘걱정해 주고 있구나…….’

    망각의 늪 속에서도 유일하게 잊지 못한 여자를 향해, 남자는 소리 없이 작별을 고했다.

    ‘안녕, 클로이…….’

    굵은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자신을 향해 창을 겨누고 있던 기사에게로 돌진했다.

    “눈 감아, 클로이!”

    레이몬드의 두터운 손바닥이 클로이의 눈을 가렸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가슴이 날카로운 창끝에 꿰뚫렸다. 짙은 피 내음이 코끝을 찔러 왔다.

    “레이몬드…….”

    “젠장.”

    “이제 괜찮아요.”

    클로이는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의 작은 손으로 레이몬드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스르륵, 그의 손이 소리 없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좋은 날인데, 아침부터 좋지 못한 것을 보였어.”

    레이몬드가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괴한의 출몰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를 곧바로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지 못한 게 상당히 후회되는 눈치였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당신이 옆에 있어 주어서…….”

    그녀가 깊은 숨을 한번 내쉬며 레이몬드의 손에 깍지를 꼈다.

    “고마워요, 레이몬드.”

    그러고는 죽은 이를 위해 짧게 묵념하고 애도를 전했다.

    애도를 끝낸 그녀가 레이몬드를 돌아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파르르 떨고 있는 속눈썹은 그녀가 아직도 놀란 것을 진정시키지 못했다고 알려 주었다.

    “가자, 클로이.”

    레이몬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모른 척해 주었다. 깍지를 끼지 않고 있던 반대편 손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래도 이브를 먼저 대피시켜서 다행이지요? 어린 나이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일 뻔했잖아요.”

    “그래.”

    “이브에게는 비밀로 해요, 레이.”

    “물론 그래야지. 너를 닮아 연약한 그 아이가 충격 받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머, 아직도 절 연약하다고 하시는군요? 제가 십 년 전에 사냥제에 나가서 황금 사자의 모피를 타온 걸 기억하시면서.”

    “그리고 네가 그 사냥제에서 아무것도 사냥하지 않고 다친 어미 새와 날지 못하는 아기 새들을 주워 온 걸 기억하지.”

    금세 전환된 화제에 우울하던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클로이는 피시식 웃으면서 밉지 않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헤지스 공작의 말에 따르면 무려 살아 있는 생명을 가져온 최초의 참가자라 했다고요.”

    “그래, 그럼 연약하지 않은 걸로 인정해 주지.”

    레이몬드의 입가에서도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이야기했다.

    “아, 참. 재밌는 소식이 하나 들어왔어. 동쪽 땅에서 성녀가 출현했다는데…….”

    “성녀요?”

    흥미로운 소식에 클로이의 두 눈이 반짝였다. 레이몬드는 그녀가 관심을 가질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달 미하일 대주교와 함께 제국에 방문할 예정이라는군.”

    “성녀님은 이야기 속에서만 등장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곧 실재하는 성녀와 만나게 되겠지. 이름이 뭐라더라? 레테…… 라고 했던가.”

    “정말 기대돼요.”

    방금 전에 있던 좋지 않은 일을 기억에서 밀어낸 그녀가 싱긋 웃으며 두 눈을 휘었다. 레이몬드는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봉긋한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기대되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지금은 성녀보다는 우리의 기념식을 더욱 기대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당연하지요.”

    두 사람의 맞잡은 두 손 가득 힘이 실렸다. 특별한 날이었다.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한 기념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클로이는 좋지 않은 기억을 밀어내고 좋은 기억으로 다시 채우기 위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보았던 참담한 기억이 꽤 긴 시간 동안 그녀를 괴롭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잊을 수 있길 바랐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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