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5. 엘리엇과 이브 (17/21)

외전5. 엘리엇과 이브

아스타 제국 황궁의 후원에서는 네다섯 살가량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모래 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친인 클로이 황후를 그대로 빼어 닮은 은색 머리카락의 남자아이는 아스타 제국의 둘째 황자 이브였고,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에 선한 인상을 하고 있는 여자아이는 캐롤라인 공작의 외동딸 레베카였다.

조막만 한 손으로 함께 모래성을 쌓던 중, 이브가 두 눈을 빤히 들어 레베카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브 황자님?”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브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잠깐만, 베키.”

“……?”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이브가 레베카의 얼굴에 묻어 있던 흙을 소매로 닦아 주었다.

“됐다.”

이브는 포스스 웃으며 박수를 쳤다.

“화, 황자님의 소매가 더러워져요!”

“응, 괜찮아. 베키의 얼굴이 더러워지는 것보단 나으니까.”

세상에, 무려 황자님의 옷이 더러워지다니! 그것도 자신 때문에! 레베카는 황망한 마음에 얼굴이 잔뜩 붉어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둔탁한 돌멩이가 그들이 열심히 만든 모래성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꺄악!”

레베카는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황자님, 괜찮으…….”

멀뚱멀뚱 앉아 있는 이브를 향해 괜찮냐고 물으려던 찰나, 딱딱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캐롤라인 공녀, 지금 감히 우리 이브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냐!”

“에, 엘리엇 황자님?”

제 키만 한 목검을 들고 나타나 시비를 거는 남자아이. 이 아이가 바로 아스타 제국의 첫째 황자 엘리엇이었다.

화염처럼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은 그의 아버지 레이몬드 황제를 닮았고,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요정의 것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그의 어머니 클로이 황후와 똑같았다.

“황실의 이름으로 결투를 청하노라, 캐롤라인 공녀.”

“시, 싫어요!”

어린 황자가 불현듯 목검을 겨누며 결투를 신청하자, 레베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후다닥 이브의 뒤로 숨어 버렸다.

“황자의 결투를 거절하다니, 무례하구나!”

엘리엇이 눈살을 찌푸리며 레베카에게 다가가려는 찰나였다.

“엘리. 베키는 아직 검술을 배우지 않았어.”

조곤조곤하게 타이르는 말씨가 엘리엇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베키는 우리보다 훨씬 작고 연약하잖아. 지켜 줘야 한다고 했단 말이야.”

이브의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레베카가 자그마한 손으로 이브의 옷자락을 꼬옥 움켜쥐었다. 그것을 쳐다보는 엘리엇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다.

“그럼 너라도 나와 결투를 해, 이브!”

“으응?”

이브는 제 쌍둥이 형제를 이해할 수가 없어 두 눈만 끔뻑였다.

“내가 왜?”

“네가 캐롤라인 공녀의 대리인이 되어 나와 결투하는 거야!”

“그냥 결투를 안 하면 안 되는 거야?”

“난 오늘 이 자리에서 캐롤라인 공녀를 해치우고 반드시…….”

난처한 얼굴로 웃고만 있는 이브를 향해 엘리엇이 심각한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던 때였다.

“세상에, 베키! 황자님!”

저 멀리서 걸어오던 다리아가 위험한 목검으로 이브와 레베카를 위협하고 있는 엘리엇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뛰어왔다.

“쳇, 캐롤라인 공작이잖아.”

엘리엇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들고 있던 목검을 아래로 내렸다.

“흑흑, 어머님. 엘리엇 전하께서…… 흐아앙!”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레베카가 다리아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엘리엇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황자님, 또 우리 레베카를…… 괴롭히셨군요.”

다리아는 대체 왜 그런 위험한 물건을 들고 있냐는 표정으로 엘리엇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엘리엇은 당당했다.

“공작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캐롤라인 공녀는 어미의 드레스 뒤에 숨어 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군.”

엘리엇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리아를 향해 혀를 쯧쯧 찼다.

“공작이 평소에 공녀를 얼마나 온실 속의 화초로만 키워 왔는지 충분히 알 만하구나.”

“엘리, 캐롤라인 공작은 어머니의 친우잖아.”

잠자코 있던 이브가 불안한 표정으로 엘리엇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흥, 그래 보았자 한낱 공작이지. 장차 내가 제국의 황제가 되면 내 밑에서 고개를 조아릴.”

엘리엇이 콧대를 높이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런데 공작은 어찌 제국의 황자를 보고도 예의를 갖추지 않느냐?”

레이몬드의 어린 시절과 쏙 닮은 그 모습에 다리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애써 참으며 인사를 올렸다.

“서쪽 땅의 지배자인 다리아 캐롤라인이 엘리엇 황자님과 이브 황자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를 발견한 엘리엇의 피식거리는 비웃음은 피할 수가 없었다.

* * *

황후궁의 응접실에는 황후 클로이와 그녀의 손님 다리아 캐롤라인 공작이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클로이의 초대를 받은 다리아는 일주일째 황궁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어제 보니깐 엘리엇 황자님이 목검을 들고 돌아다니시던데.”

“아, 으응. 엘리엇과 이브가 검술 수련을 시작했거든.”

“벌써?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되셨는데.”

“다섯 살이면 충분히 한 손으로 목검을 들 수 있는 나이라고 그랬어.”

비록 주어가 빠진 말이었지만, 다리아는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곧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레이몬드도 그 나이 때 검을 배우겠다며 황궁을 뒤집고 다녔지…….”

다리아는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는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고맙게도 아멜리아의 막내 동생인 브랜던 케니스 경이 황자들을 가르쳐 주고 있어. 사실 레이몬드는 직접 가르쳐 주고 싶어 했지만.”

클로이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음미하며 싱긋 웃었다.

“엘리엇만 신이 났지.”

또다시 엘리엇의 이름이 나오자 잠자코 있던 다리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정말 엘리엇 전하는 레이몬드의 어린 시절과 똑같아.”

“그래?”

클로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곧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레이몬드가 그렇게 사랑스러웠단 말이야?”

“…….”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던 다리아가 짜증스럽게 인상을 쓰며 찻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로이는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주위로 참새들이 짹짹거리며 날아왔다.

클로이의 발치에서 레베카와 함께 노닥거리던 이브가 날아오는 참새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참새 한 마리가 이브의 손끝에 내려앉았다. 이브는 다섯 살 난 아이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우아한 손짓으로 참새를 쓰다듬었다.

“참새가 황자님의 손에 앉았어요!”

“한번 안아 볼래, 베키?”

“저, 정말요?”

레베카의 두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 빛났다. 이브는 포스스 웃으며 참새를 안아 레베카의 품에 안겨 주었다.

“우, 우와…….”

“귀엽지?”

“네, 너무 귀여워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레베카를 보며 이브가 생긋 눈꼬리를 접어 내렸다.

“베키도 귀여워.”

그 말에 레베카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네 아들이 내 딸을 유혹하고 있어.”

그런 둘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다리아가 돌연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중얼거렸다.

“유혹이라니.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클로이는 작게 키득거리며 타박하듯 말했다. 그러나 다리아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이브 황자님은 위험해. 존재 자체만으로도.”

어쩐지 그런 다리아가 재미있어서 클로이는 나른하게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그럼 엘리엇은?”

“엘리엇 황자님도 위험하지. 굉장히 다른 의미로.”

다리아는 작게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다른 의미?”

클로이가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거릴 적에 응접실 문이 열리며 엘리엇이 등장했다.

“어머니, 찾으러 갔는데 여기 계신다고…… 앗, 이 캐롤라인 가의 마녀! 또 우리 이브를 유혹하고 있었구나!”

막 안쪽으로 들어서던 엘리엇이 사이좋게 앉아 있는 이브와 레베카를 발견하곤 도끼눈을 떴다.

“지난번에 못 다한 결투를 마저 하자, 공녀!”

뜬금없이 목검을 들이밀며 결투를 청하는 그 모습에 클로이는 깜짝 놀라 테이블 위에 올리고 있던 팔꿈치를 삐끗했다.

“저, 저는 황자님과 결투를 하고 싶지 않아요……!”

레베카가 소심한 목소리로 항변했으나, 엘리엇은 그저 코웃음만 쳤다.

“도망칠 생각하지 말거라!”

“그러지 마, 엘리. 지금 어머니와 손님께서 함께 계시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이브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레베카를 보호하며 말했다. 그러자 레베카와 이브를 번갈아 쳐다보는 엘리엇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캐롤라인 가의 마녀, 이브에게 못된 술수를 부려서 제 편으로 끌어들였군.”

엘리엇은 몹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레베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 눈빛에 깜짝 놀란 레베카가 비명을 지르며 이브의 뒤로 쏙 숨어 버렸다.

“엘리엇.”

결국 지켜보던 클로이가 나섰다.

“이게 무슨 무례이니? 지금 응접실에는 네 어머니인 나와 나의 친우인 캐롤라인 공작까지 함께 있는데.”

“무례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어머니. 하지만 지금 당장 캐롤라인 가의 마녀를 처단하지 못하면 우리 이브가 위험합니다.”

“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져 엘리엇을 쳐다보던 때였다.

“이 마녀! 썩 이브에게서 떨어져!”

“꺄악!”

“세상에, 엘리엇!”

“엘리엇 황자님!”

엘리엇이 목검을 붕붕 휘두르며 이브의 뒤에 숨어 있는 레베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놀란 레베카와 클로이, 다리아가 순서대로 외쳤고, 순식간에 응접실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만둬, 엘리!”

언제나 차분하던 이브마저 힘껏 외치며 수련할 때 외에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던 자신의 목검을 꺼내 엘리엇을 막았다.

어린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아주 작고 가벼운 목검이었지만, 두 개의 나무 막대기가 허공에서 부딪쳤을 때 굉장한 소리가 들렸다.

“……!”

“……!”

순간 응접실 안의 모두가 동그래진 눈으로 허공에 부딪친 두 개의 목검을 보았다. 작게 균열이 이는 소리와 함께 이브의 목검이 댕강 부서져 버렸다.

“어…… 어어……?”

이브가 반 토막이 난 자신의 목검을 빤히 쳐다보며 동공을 흔들었다. 덩달아 그런 이브를 바라보는 엘리엇의 눈동자도 지진이 인 듯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브…… 나, 난 절대로 의도한 게 아니라…….”

“이, 이거…… 아버지가 주신 건데…….”

이브의 눈가가 차츰 붉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촉촉한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우, 우으으…… 으아앙!”

“이브 황자님, 우아아앙!”

결국 이브는 울음을 터뜨렸고, 이브의 뒤에 숨어 있던 레베카도 이브의 옷자락을 꽈악 움켜쥔 채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우, 울지 마, 이브! 내 꺼, 내 꺼 너 줄게!”

“엘리, 정말 나빠.”

“으, 으으으, 그런 게 아니야, 이브……!”

뒤늦게 엘리엇이 이브를 달래 보려고 했다. 하지만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는 이브의 모습에 엘리엇 또한 흐어어엉, 하고 함께 울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클로이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울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다리아는 황급히 레베카에게 달려가 달래 주고 있었지만, 클로이는 차마 아이들을 달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다리아의 말대로 엘리엇은 정말 위험해……. 여러 의미로…….’

* * *

아이들을 재운 뒤, 클로이는 레이몬드와 함께 모처럼 밤 산책을 하다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있지요, 레이몬드. 오늘 낮에 엘리엇이 이브와 레베카를 울린 거 있지요?”

“엘리엇이, 이브를?”

레이몬드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분명 그 뒤에 레베카의 이름도 언급했는데, 레이몬드에겐 들리지 않았나 보다.

클로이는 레이몬드에게 낮에 있던 일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큰일이에요. 엘리엇이 너무 호전적이라…….”

“그, 그게 왜?”

레이몬드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되물었다.

“다섯 살이면 충분히 그럴 나이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피하는 레이몬드의 모습이 어쩐지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아서 그를 보는 클로이의 두 눈도 차츰 가늘어졌다.

“설마 레이몬드도 그 나이 때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결투를 신청했나요?”

“이브, 그 녀석이 너무 유약한 거야! 내 아들이라면 응당 제국 최고의 전사로 길러져야 하는데, 계집애와 함께 참새나 쫓고 있다니!”

슬쩍 떠보기 위해 묻는 말에 곧바로 걸려든 레이몬드가 발끈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레이몬드도 그 나이 때 이곳저곳 결투를 신청하고 다녔다는 거구나.’

클로이는 레이몬드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끔찍한 표정을 짓던 다리아를 생각했다.

“혹시 레이몬드가 어렸을 적에 다리아에게도 그렇게 결투를 신청한 적이 있었나요?”

“물론, 그 여자는 내가 무찔러야 할 적들 중 하나였지.”

“다리아도 레이몬드의 희생양이었군요.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치를 떨지.”

“그 여자가 내게 치를 떨 만도 하지. 왜냐면 그 여자는 나보다 세 살이나 많았는데도 한 번도 나를 이기지 못했거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클로이의 중얼거림을 들은 레이몬드가 흐뭇한 표정으로 거만하게 턱 끝을 치켜들었다.

“지금 설마 그걸 자랑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왜 자랑이 아니겠어? 내가 강한 남자라는 증거라고!”

“……뭐, 그렇다고 칠게요.”

선심 쓰듯 말하는 클로이를 레이몬드는 키득키득 웃으며 끌어안았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클로이. 너의 사랑스러운 이마에 주름이 생기는 건 싫거든.”

그렇게 말하며, 그가 클로이의 콧잔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레이몬드는 걱정도 안 되나요? 엘리엇은 고작 다섯 살인데, 목검을 부러뜨렸다고요. 아무리 어린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가벼운 목검이라 해도, 그래도 그렇게 쉽게 부러지는 게 아닐 텐데. 그러다 크게 다치는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요?”

“흠, 나는 그 아이 때 성인 남자들이 들고 다니는 목검도 부러뜨렸다고. 하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잘 자랐잖아. 게다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너를 만나 황후로 맞이하기까지 했고.”

또 다시 자랑스럽게 말하는 레이몬드의 모습에 클로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그렇게 자부심 가질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엘리엇에게 주의를 줄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흐음…….”

레이몬드는 여전히 클로이의 말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수긍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가 엘리엇과 한번 이야기해 보지. 남자 대 남자로서 말이야.”

“고마워요, 레이. 그럼 나는…….”

그의 말에 한시름을 던 클로이가 방긋 웃으며 그를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선 양 손으로 그의 양 손을 각각 맞잡으며 깍지를 꼈다.

“레이몬드와 남자 대 여자로서 오늘 밤을 보내고 싶은데요.”

가볍게 다가와 까치발을 들고서 입술을 촉 맞대고는 금세 다시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에 레이몬드는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결혼식을 올린 지 벌써 여섯 해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가벼운 애정표현에 얼굴을 붉히는 그를 보며 클로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정말이지…… 더한 것도 많이 했으면서 겨우 이런 것에 얼굴이 빨개지면 어떡해요, 레이몬드?”

“이런 거니까, 빨개지는 거야.”

레이몬드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클로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네가 이렇게 장난치듯 가볍게 다가와 나를 자극하고 물러날 때면, 나는 더 안달이 나.”

그가 손에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클로이의 몸이 그대로 그의 품으로 안겼다.

“당장이라도 너를 이 품에 안고 삼켜 버리고 싶을 만큼.”

“그럼 어서 삼켜 버려요, 레이.”

레이몬드는 목울대를 꿀렁이며 제 품에 안긴 클로이를 내려다보았다. 속눈썹이 달빛에 반사되어 은색으로 반짝였다. 그 속눈썹이 촘촘히 자리 잡은 두 눈이 사르르 휘며 그를 유혹했다.

“하…….”

“어서요, 어서 날 삼켜 봐요.”

“이게 모두 날 안달 내려고 의도한 거라면 굉장히 훌륭해, 클로이.”

그녀의 눈가를 스친 굵은 손끝이 턱 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더니, 이내 붉은 입술을 엄지로 느릿하게 훑었다.

레이몬드는 천천히 고개를 꺾어 내리며 그녀의 입술 위로 입을 맞추었다. 동시에 꺄르륵, 하는 웃음소리가 그녀에게서 터져 나왔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니지요?”

어느 틈에 양 팔을 벌려 자신의 목을 휘감은 채 요염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레이몬드는 헛숨을 삼키며 피식 웃고 말았다.

“물론.”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제게서 슬며시 떨어뜨린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자신을 향해 갸웃거리고 있는 그녀의 몸을 양 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레, 레이몬드?”

“나머지는 방에 들어가서 하지.”

레이몬드는 그대로 클로이를 안고서 자박자박 걷기 시작했다. 아, 뭐예요. 내려 줘요, 하는 그녀의 귀여운 투정에 흘러나온 낮은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밤공기를 적셨다.

* * *

이튿날,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훑던 레이몬드는 문득 시간을 확인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엘리엇이 수련을 마치고 쉬고 있을 시간이었다.

“엘리엇의 위치는?”

“아직 수련장에 계십니다.”

“그쪽으로 가지.”

라트 후작의 보고를 들은 레이몬드는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수련장에 도착하니, 널따란 공간 안에 엘리엇이 홀로 덩그러니 쭈그려 앉아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쳐다보는 레이몬드의 눈가가 작게 찡그러졌다.

“엘리엇.”

“아, 아버지!”

레이몬드를 발견한 엘리엇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혼자 쭈그려 앉아 있던 거지?”

“그게…….”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엘리엇이 답지 않게 소심한 목소리로 우물쭈물 대답했다.

“이브는 오늘 수련에 나오지 못했어요. 다 저 때문에…… 제가 이브의 목검을 부러뜨려서…….”

“나는 지금 왜 이브가 이곳에 없는지를 물어보는 게 아니다. 어째서 나의 후계자인 네가 그토록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는지를 묻고 있는 거야.”

“…….”

“언제 어디서든 너의 위치를 잊지 말라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너무…… 너무 속상한 일이 있어서 그랬어요.”

레이몬드는 저렇게 속상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똑바로 올려다보는 아들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속상한 일이라.”

“…….”

“어디 한번 네 이야기를 들어 볼까?”

그가 씨익 웃으며 아들의 손을 감싸 쥐었다. 놀란 엘리엇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는 개의치 않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레이몬드는 맞잡은 손의 온기가 익숙해졌을 무렵이 되어서야 다시금 입을 뗐다.

“어제 이브가 울었다던데.”

그 말에 뜨끔한 엘리엇이 걸음 속도를 늦추었다. 레이몬드는 엘리엇의 속도에 맞추어 걸음을 늦추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브를 왜 울렸지?”

“이브를 울리려던 게 아니에요.”

“그럼?”

“캐롤라인 공녀에게서 이브를 지켜 주려고 한 거예요.”

“캐롤라인 공녀?”

“네! 그 마녀가 우리 이브를 유혹하고 있었다고요!”

엘리엇은 아예 걸음을 멈추고선 씩씩거리며 레이몬드를 올려다보았다.

‘클로이와 닮은 얼굴로…… 화를 내고 있다니…….’

레이몬드는 어쩐지 감격스러운 마음이 들어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너무 걱정 말거라, 엘리엇. 설마 우리 이브가 고작 캐롤라인 가의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겠느냐.”

“하지만…… 하지만 이브는 마음씨가 약하고 착하잖아요. 공녀가 가엾어서 유혹에 넘어가 줄지도 몰라요.”

“흐음, 그렇다면 그건 정말 큰 문제로구나.”

“그렇지요?”

레이몬드가 자신의 말에 동조해 주자 엘리엇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저는 절대 이브를 울리려던 게 아니었어요! 이브를 지키려고 그랬던 거라고요! 그 마녀로부터!”

자그마한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서 외치는 엘리엇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레이몬드는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정말 든든하구나, 엘리엇.”

아버지의 칭찬에 엘리엇은 기분이 좋아졌다. 언제 침울했냐는 듯, 신이 나서 턱 끝을 치켜 올리며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기까지 했다.

“이브는 너무 착해서 걱정이에요. 제가 이브의 형제니까, 이브를 지켜 줄 거예요!”

“아주 좋은 생각이야.”

레이몬드의 부드러운 저음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엘리엇. 정말 이브를 지켜 주려면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돼. 어제만 해도 이브를 지켜주려다가 오히려 울리고 말았지.”

“아, 그건…….”

“게다가 이브뿐만이 아니라 네 어머니의 마음까지 속상하게 만들지 않았느냐?”

“……맞아요.”

방금 전까지 당당하게 외치던 엘리엇이 다시금 고개를 수그렸다. 그런 엘리엇을 향해 레이몬드가 다정하게 말했다.

“고개를 들어, 엘리엇.”

“고개를 못 들겠어요.”

그러나 엘리엇은 양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대답했다.

“이브를 지켜 주겠다 했으면서 결국 울려 버리고…… 어머니까지 저 때문에 속상해하셨잖아요. 결국 저는 아무도 지키지 못했어요.”

레이몬드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가린 채 웅얼웅얼 대답하는 엘리엇의 모습은 꽤 귀여웠다.

‘클로이를 닮아서 정말 다행이야. 나를 닮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사랑스럽진 않았을 테니까.’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너는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두 눈을 가리고만 있을 건가?”

“…….”

“나는 네 잘못을 탓하기 위해 널 찾아온 게 아니야. 다만, 도와주려는 거지.”

“도와준다고요?”

엘리엇이 손가락 사이로 눈동자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그래, 그러니 이제 그만 그 손은 치워.”

“뭘 도와주실 건데요?”

레이몬드가 정말로 자신을 혼낼 생각이 없다는 걸 파악한 엘리엇은 냉큼 손을 치우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것을 본 레이몬드가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브에게 사과를 하고 싶잖아? 도와줄게. 같이 가자.”

“하, 하지만…… 황제가 될 사람은 아무에게나 사과하면 안 된다고, 아버지께서…….”

엘리엇은 선뜻 레이몬드의 손을 맞잡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이브가 네게 ‘아무나’였나?”

“아니요! 절대 아니요!”

그러나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묻는 아버지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거세게 저으며 제게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그럼 문제없군.”

짧은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터져 나왔다. 엘리엇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레이몬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브가 제 사과를 받아줄까요?”

“글쎄.”

“화가 많이 나서 제 얼굴은 보기도 싫다고 하면 어쩌지요?”

“흐음.”

레이몬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이브가 네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까 두렵느냐?”

“네…….”

“어째서지?”

“그야, 이브는…… 제게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세상에서 하나뿐인 제 반쪽이라고요.”

그 대답에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방금 네가 한 말을 잘 기억해, 엘리엇. 소중한 사람을 지키겠다는 너의 마음은 굉장히 훌륭하단다. 나도 지키고 싶은 이가 있고, 늘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하지만 그 마음이 지나쳐서 다른 이를 해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

“특히나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은 여린 마음씨를 지녔잖니. 언제나 지켜 주고 싶을 만큼.”

레이몬드는 클로이와 이브를 떠올렸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가녀린 외양과 달리 굳센 내면을 가졌지만, 한편으로는 여리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다.

그리고 그녀의 외양뿐만 아니라 성정까지 쏙 빼어 닮은 이브 역시 유약하지는 않았으나 섬세하고 사려 깊은 아이였다.

레이몬드는 그들의 따스한 마음씨를 언제까지나 지켜 주고 싶었다.

“아버지는 위대한 제국의 황제잖아요. 그러니까 저처럼 말썽을 부린 적이 없었겠지요?”

말없이 걷던 엘리엇이 레이몬드에게 불쑥 물었다.

“음……. 나도 너처럼 어렸던 시절이 있었지. 걸핏하면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결투를 신청하는 통에 돌아가신 부황께서는 굉장히 골치 아파하셨어.”

“정말이요?”

엘리엇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말썽을 부리는 어린 아버지의 모습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럼. 내 또래의 귀족 아이들이 황궁에 출입하길 꺼려할 정도였지. 소문이 점점 변질돼서, 나중엔 말 안 듣는 아이들을 훈육할 때 황궁에 데려가겠다고 협박을 할 정도였어.”

“대체 소문이 어떻게 났길래요?”

“음……. 레이몬드 황태자는 눈빛만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라고 소문이 났던가.”

“으엑!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누가 믿어요?”

“하하, 그러게 말이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둘은 어느덧 이브의 방 앞에 도착했다.

“안에 누가 더 있나?”

레이몬드가 방문 앞에 서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레베카 캐롤라인 공녀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 여자애는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네가 어제 울린 아이 중에는 공녀도 포함되어 있었지, 아마?”

“…….”

“두 아이에게 모두 사과를 하고 와. 그 여자애도, 굳이 울리고 싶었던 건 아니잖아?”

“하지만…….”

“기억해, 엘리엇. 너는 장차 내 뒤를 이어 아스타 제국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남자다. 응당 제국의 모든 이들을 공정하게 보호하는 것이 너의 의무야. 캐롤라인 공녀 또한 네가 보호해야 할 사람 중에 하나이지. 네가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공녀를 울렸다면, 그건 모두 너의 허물이 되는 거야.”

“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고리를 노려보던 그는 깊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레이몬드와 눈짓을 주고받은 뒤에 문을 열었다.

“엘리?”

방의 정중앙에 앉아 레베카와 함께 커다란 책을 읽고 있던 이브가 형제를 발견하고는 화사하게 웃었다.

“어서 와, 엘리!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었어!”

“나한테 화…… 안 났어?”

엘리엇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화?”

“내가 어제…… 너를 속상하게 했잖아.”

“아, 그거?”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브가 이내 배시시 웃으며 두 눈을 접어 내렸다.

“괜찮아. 엘리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그럼 용서해 주는 거야?”

“엘리와 나 사이에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엘리엇은 용기를 내어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래도 미안해, 이브. 그리고 공녀. 절대 두 사람을 속상하게 하고 울리려던 생각은 아니었어.”

그의 사과에 이브와 레베카가 서로 마주보더니 헤헤 웃는다.

“알아, 엘리.”

“괜찮아요, 황자님.”

“어…… 어……?”

너무나 쉽게 사과를 받아들이는 두 사람에게 엘리엇이 떨떠름해할 적에 이브가 그에게 손짓했다.

“같이 놀자, 엘리.”

“응?”

“방금 막 베키에게 『검은 협곡의 마녀 이야기』를 읽어 주던 참이었어. 엘리에게도 읽어 줄게.”

평소 같았더라면 책을 읽는 것보단 뛰어 노는 게 좋다며 거절했을 엘리엇이지만 순순히 다가가 옆에 앉았다.

“옛날 옛적에 커다란 용이 사는 검은 협곡이 있었어요. 그 협곡에는…….”

이브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읽어 주기 시작했다.

엘리엇과 레베카는 이브의 양 옆에 꼬옥 붙어 앉아서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꼴깍 침을 삼키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클로이에게 칭찬 받을 일이 하나 늘었군.”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몬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비단 아이들의 일을 해결해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과 그녀를 닮은 두 아이가 사이좋게 붙어 있는 모습이 그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레이몬드는 천천히 자신의 연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분 좋은 웃음이 그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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