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4. 쌍둥이 황자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던 차가운 겨울날, 아스타 제국의 황실에는 두 명의 아기 황자가 태어났다.
바깥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던 아스타 제국의 황제 레이몬드는 벌컥 산실의 문이 열리자마자 황후궁의 시녀장을 붙들고 외쳤다.
“어떻게 되었느냐? 클로이는? 클로이는 지금 어떤 상태지?”
분명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해산이 끝났다고 생각되던 때, 다시금 그녀의 신음 소리가 들려 왔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문을 두드리는 그에게 산실 안쪽의 사람들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했다.
당장에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고 싶은 것을, 그 빌어먹을 전통이란 것 때문에 참느라 상당히 고역이었다.
사실, 그를 말리는 기사들이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저 문짝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널브러졌을 것이다.
저를 붙잡은 황제에게 시녀장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주 건강하십니다. 아기님들을 안아 보신 뒤, 잠드셨습니다.”
“아기님들……?”
레이몬드는 시녀장의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멈칫했다.
“쌍둥이 황자님이십니다. 경하 드립니다, 폐하!”
“……?”
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자, 곧이어 황후의 시녀들이 포대기에 감싸인 두 명의 아기 황자를 안고서 그에게 다가왔다. 레이몬드는 멍하니 두 명의 아기 황자를 한 팔에 하나씩 안으며 번갈아보았다.
어쩐지 아기의 울음소리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클로이가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사고가 마비된 그는 그것이 두 아기의 울음소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왼쪽에 안으신 분이 첫째 황자님이시고, 오른쪽에 안으신 분이 둘째 황자님이십니다.”
모두 작고 쭈글쭈글해서 분간이 가지 않았으나, 두 아기의 머리색만큼은 확연히 달랐다. 아마도 황후의 시녀들은 그것을 보고 두 아기를 구분하는 듯했다.
레이몬드는 아직도 쉽사리 믿기지가 않는 표정으로 잠자코 두 아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클로이의 아기라 그런 걸까. 어쩐지 두 아기가 그녀를 닮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가슴 위로 포근하고 뭉근한 감각이 피어나 번지기 시작했다.
“아…….”
그의 입술 사이로 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이를 안은 두 팔이 가늘게 떨리었다.
클로이의 아기가 태어난 날이다. 그녀를 닮은 아기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제 양팔에 가득 안기어 있었다.
“이렇게…….”
환희에 가득 찬 굵은 목소리가 그의 온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렇게 기쁜 날이 있나……!”
“경하 드립니다, 폐하!”
“경하 드립니다, 폐하!”
황제의 기사들이 동시에 부복하며 외쳤다.
“오늘부터 한 달간을 경축일로 삼을 것이다! 온 제국민이 아기 황자들의 탄생을 축복하도록 황실의 창고를 열고 축제를 벌여라!”
레이몬드는 두 아기를 다시 시녀들에게 건넨 뒤, 어느새 깨끗이 치워진 산실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짧은 사이에 새로 간 푹신한 이불 위에서 그녀가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고이 잠들어 있었다. 시녀 한 명이 옆에서 따뜻한 물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고 있었다.
“그것을 이리 주거라.”
시녀의 손에 들린 물수건을 뺏어든 레이몬드가 찬찬히 허리를 수그리며 그녀의 얼굴과 손을 닦아 주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닦아 주며 레이몬드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쥐어 보았다. 그의 한 손에 딱 쥐이는 자그마한 그녀의 손을 보자니 보드라운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렇게 작은 몸으로, 아기를 낳다니. 그것도 둘씩이나.’
오묘한 전율과 함께 레이몬드는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런 그의 벅차고 설레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이는 여전히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뿐이다.
한참 동안 그녀의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레이몬드가 그녀의 손등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수고했어, 클로이.”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다가 천천히 흩어졌다. 푸근한 미소가 레이몬드의 입가에 머물렀다.
* * *
시린 겨울의 공기 속에서 태어난 두 명의 아기 황자는 한 번의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그해의 겨울을 보냈다.
“정말 두 분 황자님의 얼굴이 똑같이 생기셨어요!”
“똑같이 생겼다고?”
나는 시녀 제이시 글로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다르게 생겼는데?”
“다르다니요! 물론 엘리엇 황자님이 황제 폐하를 닮아 태양처럼 불타는 적발을 지니셨고, 이브 황자님은 황후 폐하를 닮아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을 지니셨지만, 두 분 모두 황후 폐하의 아름다운 외양을 그대로 빼어 닮으셨는걸요!”
제이시는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며 두 눈을 반짝였다.
“황후 폐하를 곁에서 모시며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얼굴을 매일 보는 것이 제게 가장 큰 행복이었는데, 이토록 아름다우신 분을 이제 세 분이나 곁에서 모실 수 있다니…… 저는 정말 황후 폐하의 시녀가 되길 잘한 것 같아요!”
내가 황후가 되기 전부터 자칭 ‘황후 폐하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제이시 글로아의 말에 다른 시녀들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제이시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잖아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도 두 분 황자 전하께서 황후 폐하의 얼굴을 쏙 빼닮으셨어요!”
“쌍둥이를 본 적이 없어서 너무 신기해요. 어떻게 이렇게 똑같으실까요?”
“맞아요, 머리색이 다르지 않았더라면 저는 두 분을 구분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나는 비단 머리색뿐만 아니라 소소한 부분에서 두 아기가 다르다고 느꼈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기의 차이점이 이렇게 선명한데, 그것을 나만이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뿌듯했다.
그렇게 시녀들과 노닥거리며 있을 무렵,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황후 폐하, 다리아 캐롤라인 공작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모시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아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모두들 나와 다리아의 편안한 대화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침실에서 맞이하는 걸 용서해, 다리아.”
“무슨 말씀을. 일이 바빠 뒤늦게 찾아오는 내가 네게 용서를 구해야지. 반년이 훌쩍 지나서야 인사드리는 저를 부디 용서해 주세요, 황후 폐하.”
다리아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쌍둥이 황자님이라더니, 정말 똑같이 생겼네.”
“이쪽이 엘리엇이고, 이쪽이 이브야.”
나는 작은 요람 위에 기대 앉아 낯선 이를 향해 두 눈을 끔뻑이는 두 아이를 소개해 주었다.
사실 나와 레이몬드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남자아이일 경우의 이름과 여자아이일 경우의 이름을 각기 하나씩 생각해 두었다. 하지만 막상 태어난 아이가 두 명의 남자아이라서 곧바로 이름을 결정짓지 못하고 우린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아스타 제국의 보석이라 불린다더니, 우리 황후 폐하를 닮아 미모가 남다른데.”
“이제 겨우 혼자 앉기 시작한 아기들에게 붙이기엔 조금 쑥스러운 별칭이야. 한번 안아 볼래?”
그녀의 칭찬에 어쩐지 민망한 마음이 들어, 나는 말을 돌리며 첫째 엘리엇을 안아 들었다.
“내가 그래도 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 다리아가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빙그레 웃으며 답하자 그녀가 잔뜩 설렌 듯 신나 하며 아이를 안아 보았다.
“이, 이렇게?”
“아니, 이렇게.”
어색한 자세로 엘리엇을 안은 다리아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다리아가 조금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무엇이든 잘 할 것 같은 다리아도 못 하는 게 있었다니…….
“안녕하세요, 엘리엇 황자님.”
“우으…….”
다리아의 품에 안긴 엘리엇이 얼굴을 찡그리며 작게 칭얼거렸다.
“흐음, 첫째 황자님은 눈빛이 사나운 게 레이몬드를 닮았군요.”
“우으으…….”
“어쩐지 레이몬드의 어릴 적이 생각이 나서 기분이 안 좋아지는데…….”
“다리아는 레이몬드의 아기 시절도 알아?”
“물론,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레이몬드의 보모였으니까.”
“뭐?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에 나는 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때의 나도 고작 네다섯 살이었으니까 아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기억은 나. 어머니가 황태자의 보모라서 레이몬드가 다섯 살 정도 될 무렵까지는 공작성보다 황궁에서 더 오래 머물렀어.”
“그랬구나, 그래서 다리아는 레이몬드의 어린 시절도 아는구나…….”
나는 방싯방싯 웃고 있던 둘째 황자 이브를 품에 안아들며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좋겠다…….”
“좋기는, 무슨!”
내 중얼거림을 엿들은 다리아가 질색하는 얼굴로 내게 외쳤다.
“정말 끔찍했다고, 어린 시절의 레이몬드는…….”
“레이몬드는 그때도 멋있었을 것 같은데.”
“뭐, 겉모습이야 꽤나 사랑스러웠지. 황궁의 유일한 아기이기도 했고……. 선황제 폐하와 선황후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탓인지 굉장히 오만방자했어.”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레이몬드는. 그게 레이몬드의 매력이잖아.”
“…….”
어린 시절의 레이몬드를 상상하자 어쩐지 얼굴이 홧홧해졌다. 나를 쳐다보던 다리아의 두 눈이 가늘게 변했다.
“콩깍지가 아직 벗겨지지 않았구나.”
다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 품에 안긴 엘리엇을 내려다보았다.
“클로이의 얼굴을 하고서 레이몬드의 눈빛이라니…….”
“우으으……!”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듯, 엘리엇이 다리아를 향해 두 눈을 세게 깜빡였다. 그 눈짓이 꼭 노려보는 것처럼 보여서 나와 다리아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난 이쪽보다는 둘째 황자님 쪽이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이브는 자신을 향한 다리아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배시시 미소를 내지었다. 그 순간 다리아의 두 눈이 뭉근하게 풀렸다.
“둘째 황자님은 클로이랑 판박이네. 너무 사랑스러워. 혼담을 넣고 싶을 정도야.”
“혼담이라니?”
나는 화들짝 놀라 강경한 목소리로 외쳤다.
“절대 안 돼! 아무리 다리아가 대륙에서 가장 막강한 공작이라 할지라도 우리 이브와는 나이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내가 그녀로부터 이브를 보호하기 위해 감싸 안자, 다리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가를 찡그렸다.
“나와 윌의 아기를 말하는 거라고요, 황후 폐하.”
“아기……?”
나는 잠시 동안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두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다 이내 곧바로 환하게 웃으며 아직은 납작한 그녀의 아랫배를 쳐다보았다.
“다리아, 이제 어머니가 되는 거야?”
“음, 뭐…… 어쩌다 보니.”
“축하해, 다리아! 정말 축하해!”
“사실 내 인생에 다시 아이를 품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말이야.”
다리아는 쑥스러운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돌연 음흉한 눈빛으로 내 품에 안겨 있는 이브 황자를 쳐다보았다.
“되도록 나와 윌의 아기는 정략혼을 시키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이 정도의 외모라면 틀림없이 장차 태어날 아이도 어미의 결정에 탄복하겠지.”
“태어날 아기가 아들일지 딸일지 어떻게 알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을 것 같은데? 난 내 아이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 해도 관대한 마음으로 품어 줄 생각이…….”
“미친 소리. 절대 안 돼.”
그녀의 말을 끊은 것은 내가 아니었다. 자박자박 걸음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레이몬드의 등장에 나는 반색하며 일어났다.
“레이몬드! 오늘은 업무가 일찍 끝났군요?”
“조금 뒤에 다시 가 봐야 해.”
가볍게 내 어깨를 한번 끌어안은 레이몬드가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내 이마 위로 입을 맞추었다.
“캐롤라인 공작이 방문했다기에 찾아와 봤더니, 역시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너를 괴롭히고 있었군.”
다리아를 돌아보는 레이몬드의 눈빛이 방금 전 나를 향한 것과 동일인물의 눈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해졌다.
“안녕, 레이몬드. 오랜만이야. 안 그래도 방금 막 내가 황실에 혼담을 넣던 참이었어.”
“설사 네 아이가 딸이라 할지라도, 절대 불가해. 다리아 캐롤라인의 딸을 황자비로 들이라니, 끔찍한 소리를.”
“내 딸이 황자비가 되는 게 아니라, 네 아들이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는 영광을 누리겠지.”
레이몬드의 단호한 거절에 발끈한 다리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
“감히 내 아들더러 네 남편처럼 고작 공작가의 살림을 다스리는 일이나 하라는 것이냐?”
“고작 공작가라니! 캐롤라인 공작령은 어지간한 소국들보다도 훨씬 규모가 크다고!”
“내 아들은 장차 나를 닮은 훌륭한 전사로 키워 낼 것이다! 어림없는 소리는 말고 공작성으로 돌아가 버려, 캐롤라인 가의 마녀.”
마치 철없는 아이처럼 다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두 분 모두 그만 하세요. 아직 다리아가 딸을 낳을지 아들을 낳을지도 불분명하잖아요. 의미 없는 논쟁이에요.”
“나는 아들을 낳아도 괜찮…….”
나의 중재에 다리아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재차 말을 이어나가려던 때였다.
“절대 안 돼!”
동시에 터져 나온 나와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다리아의 말을 잘라냈다.
“쳇…….”
결국 다리아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절세의 미색을 우리 공작가로 훔쳐올 기회라 여겼는데…….”
“우으으으…….”
“에, 엘리엇 황자님?”
내내 다리아의 품에 안겨 있던 엘리엇이 얼굴을 찌푸리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 모습에 다리아는 당황하고 말았다.
“자, 잠깐. 울면 안 돼요……!”
아주 어렸을 적에 레이몬드를 본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아이를 대해 본 적이 없다던 다리아가 어찌할 줄 몰라 절절맸다. 그때, 레이몬드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엘리엇을 이리 줘.”
레이몬드는 아주 능숙하게 아이를 한 팔에 안아들고서, 다정한 손길로 아이를 토닥였다.
“울지 마, 엘리엇.”
“아바, 아으.”
그가 나를 대할 때면 종종 나오곤 하던 다정한 음색이 아이를 부드럽게 달래 주었다.
“착하군.”
“아우으!”
그의 낮은 웃음소리와 어느새 얼굴을 활짝 펴고 꺄르륵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한데 섞였다.
잔잔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이브를 요람 위에 내려놓고는 레이몬드에게서 엘리엇을 건네받았다.
“고마워요, 레이몬드.”
“뭘.”
애정이 담뿍 담긴 두 눈이 허공에서 시선을 교환하며 부드럽게 휘었다.
“우와…….”
다리아는 멍하니 나와 레이몬드의 모습을 쳐다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나와 레이몬드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돌아보았다.
“방금 정말…… 가족 같았어.”
“가족 같다니.”
레이몬드가 언제 그토록 부드럽게 웃었냐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잔뜩 주며 삐딱하니 다리아를 노려보았다.
“가족 같은 게 아니라 진짜 가족이다.”
은근하게 턱끝을 치켜세우는 모양새가 마치 자랑하는 듯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 모습을 보며 레이몬드를 놀렸을 다리아지만, 레이몬드와 나의 새로운 모습에 많은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럼, 클로이. 나는 이제 다시 가 봐야 할 것 같아.”
“벌써요?”
“저녁 만찬 전까지 일을 마치고 돌아올게.”
아쉬워하는 나를 향해 그가 느리게 허리를 수그렸다.
“보고 싶을 거야. 너도.”
미련이 가득 남은 입술이 나의 이마 위로 살며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엘리엇과 이브도.”
“나도 레이몬드가 무척 보고 싶을 거예요.”
나는 엘리엇과 이브에게도 마찬가지로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추고 일어나는 레이몬드를 보며 수줍게 대답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다리아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두 사람, 누가 보면 사나흘 동안 떨어져 있는 줄 알겠어.”
“어머나, 다리아! 사나흘이라니! 너무 끔찍한 소리야!”
“그렇게 오랫동안 클로이와 떨어져야 한다면, 차라리 제위를 걷어차겠다.”
나와 레이몬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다리아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몬드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엘리엇이 나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나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요람 위에 눕혔다. 나란히 잠들어 있는 두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평온한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클로이와 레이몬드 둘 다 정말 부모님의 모습이구나.”
“다리아도 곧 어머니가 될 거잖아.”
“글쎄, 나는…….”
다리아는 답지 않게 자신 없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흐렸다.
“아직은 조금 걱정이 되어서. 내가 과연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어떤 게 걱정인데?”
“당장 아이를 낳고 난 뒤에, 곧바로 공작의 일을 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고. 그간 영지를 돌보느라 잠시 소홀히 했던 귀족 의회의 일도 이제는 슬슬 해야 할 텐데 말이야.”
“하긴, 나도 엘리엇과 이브를 낳은 뒤엔 내가 해야 할 업무들의 상당수를 레이몬드가 나눠 하고 있으니까.”
잠자코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몬드가 나의 업무를 나눠간 것은 순전히 나와 그의 욕심 탓이었다.
나는 유모를 두지 않고 엘리엇과 이브를 손수 돌보길 바랐다. 그래서 본래 내가 맡았던 업무 중 상당수를 다른 이들에게 맡기려 했다.
역대 황후들 중에도 나처럼 유모를 두지 않고 직접 황자나 황녀를 돌보던 이들이 있었다. 그럴 때는 일반적으로 임시 보좌관을 두어 황후의 업무를 나누곤 했다. 문제는 우리에겐 임시 보좌관으로 둘 만한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황후의 임시 보좌관은 대개 황제의 남매가 맡았는데, 레이몬드에게는 남매가 없었다. 그의 사촌뻘인 남매가 하나 있었지만, 먼 나라의 왕비로 있었기에 나의 보좌관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귀족가의 부인들 중에서 보좌관을 고르자니, 황실 내부의 기밀들이 유출될 우려가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결국 내가 두 아이를 직접 돌보는 걸 포기하려 할 때였다.
‘네가 나 때문에 하고 싶은 걸 포기하게 둘 수 없어.’
레이몬드는 나의 업무를 자신이 모두 가져갈 테니 내게는 엘리엇과 이브에게 전념하라고 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상황이 어쩔 수 없는 거지, 이게 어떻게 레이몬드의 탓인가요?’
‘내가 황제만 아니었더라면 네가 이렇게 고민할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나는 극구 그를 말렸지만, 그는 심각해진 얼굴로 강경하게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네게 청혼할 적에 상당히 고심했었지. 내가 가진 지위 때문에 네가 힘들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네 곁에 있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네게 청혼했어. 그리고 너는 그런 나를 받아주었고.’
‘잠깐만요, 레이몬드. 지금 너무 거창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때는 나도 당신의 청혼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
‘약속했잖아. 내 지위 때문에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끝까지 함께하기로. 그러니까 네 업무는 내가 가져갈게.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여전히 망설이는 내게, 그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아이를 대신 품어주지도, 출산의 고통을 함께하지도 못한 내가 너와 아이들을 위해 이 일이라도 하게 해 줘.’
덕분에 나는 엘리엇과 이브에게 모든 것을 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출산한 모든 여자들의 삶이 나와 같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다리아도 이토록 걱정하는 것이겠지.
“무엇보다도 내가 직접 공작위에 오른 게 잘 한 일인가 의문이 들겠지?”
심란해 보이는 그녀를 위해 나는 조용한 위로를 보냈다.
“다리아는 지금까지 잘 해 왔잖아.”
“지금의 내 자리가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야. 사실은 굉장히 많이 부담되거든. 여자로서 작위를 물려받은 건 대륙의 역사 이래 최초의 일이니까. 혹시나 내가 잘 못하면 앞으로도 나와 같은 성별을 지닌 자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
“다리아에게도 불안한 게 있구나.”
“그럼. 나도 불안한 게 얼마나 많은데?”
내가 꼭 신기한 것을 본다는 듯 감탄하자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리아, 출산 예정일이 언제라고 했지?”
“아마도, 내년 봄.”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다리아의 양손을 꼬옥 붙잡아 주었다.
“뱃속의 아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다리아와 루카스 경의 사랑으로 맺은 열매잖아. 틀림없이 잘 할 수 있을 거야.”
부드럽게 두 눈을 휘며 응원해 주자, 그녀 또한 잔잔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래. 고마워, 클로이.”
* * *
“결국은 저녁 만찬 때까지 너를 그 여자에게 빼앗겨 버렸군.”
벌컥 문이 열리더니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며 레이몬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와요, 레이몬드.”
“오늘 피곤하지 않았어?”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레이몬드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거침없이 뻗어 나온 그의 손이 내 손에 깍지를 끼며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한 손으로 내 손목을 감싸 쥐고서 다른 한 손으로 마사지 하듯이 내 손을 꾹꾹 눌러 주었다.
그의 굵은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따스한 온기가 손을 타고 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모처럼 반가운 친구의 방문에 즐거웠어요. 레이몬드도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그다지 우스운 대답도 아니었는데, 그는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나의 반대편 손을 이어 마사지해 주었다.
“레이몬드야말로 피곤하지 않았어요? 업무가 많잖아요. 난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왠지 마사지는 내가 아니라 그가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끝을 흐리자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도움이 안 되다니, 무슨 소리. 네 존재 자체만으로도 내게 굉장히 큰 도움이야.”
그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내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넌 나의 유일한 휴식처잖아.”
휴식처, 라는 말이 상당히 나를 기쁘게 했다. 그가 내게 하는 말들에는 물론 어느 정도 과장도 섞여 있겠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좋았다.
“내가 레이몬드의 휴식처예요?”
“그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향해,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럼 어서 이리 안겨요, 레이몬드. 내가 휴식을 줄게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양 팔 가득 그의 어깨를 그러안으며 그의 아랫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새가 모이를 쪼듯이, 가볍게, 촉.
그리고 한 번 더, 이번에도 역시 가볍게, 촉, 촉.
두 눈을 마주하고서 작은 웃음을 함께 터뜨리며, 마지막엔 조금 더 길게, 촉, 촉, 초옥.
“어때요?”
유혹하듯 눈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묻자, 그가 작게 신음하며 내 이마 위로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미칠 것 같아. 너무 좋아서.”
정염에 휩싸인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나를 담았다. 그 타오르는 눈빛마저 사랑스러워서, 나는 그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고는 몸을 뒤로 빼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 위로 아쉬운 기색이 스쳤으나, 나는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
“이제 슬슬 다시 일을 시작할까 해요. 너무 오랫동안 쉰 것 같아요.”
“벌써?”
그가 두 눈을 살짝 키우며 물었다.
“벌써라니요. 근 일곱 달 동안 황후궁을 관리하는 일 외에는 제대로 한 게 없는걸요.”
“아니야, 클로이. 더 쉬어도 괜찮아. 네 일은 모두 내가 할 테니까…….”
“레이몬드를 계속해서 혹사시킬 순 없어요.”
“혹사라니, 전혀 아니야!”
“저 때문에 두 사람의 몫을 하고 계시잖아요. 엘리엇과 이브가 태어난 이후로, 쭉.”
“하지만 그러다가 아프기라도 하면…….”
레이몬드의 붉은 눈동자가 나의 몸을 훑었다. 나는 아주 건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듯 턱 끝을 슬쩍 내밀며 대답했다.
“레이몬드는 가끔 보면 나를 종이 인형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연약하지는 않은걸요.”
“무슨 소리. 종이 인형이 아니라 유리 인형으로 생각하고 있어. 조금만 힘을 주면 깨질 것만 같은.”
“네?”
나는 아주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두 눈을 끔뻑였다. 유리가 종이보다 약한 거였나? 아니, 그보다 유리란 게 힘을 조금 준다 해서 깨지는 건 아닌 걸로 아는데…….
내가 이상한 대목에 초점을 맞추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레이몬드가 아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너를 볼 때마다 항상 불안해. 너무 작고 연약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바닥과 내 손바닥을 가만히 맞대어 보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레이몬드는 나를 너무 과보호한다. 물론 그게 아주 싫지만은 않지만, 나의 손이 그의 손보다 손가락 한 마디하고도 절반이나 더 작다고 해서 아기처럼 연약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안 되겠어요, 레이몬드. 내가 그렇게 연약하지 않다는 걸 보여 줘야겠어요.”
나는 웃으며 그의 무릎 위로 올라 양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매달렸다.
“어떻게 보여 줄 건데?”
그가 흐뭇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당장 내일부터 체력을 키워서 가을에 있을 사냥제에 참가해 볼 생각이에요!”
“뭐……?”
그 말에 당황한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칫했다.
“사냥제의 우승자가 되어서 황금 사자의 모피를 받아 그걸로 엘리엇과 이브의 겨울옷을 만들어 줄 거예요.”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모피가 필요한 거라면 황궁의 창고에도 훌륭한 것들이 잔뜩…….”
“싫어요! 내 손으로 모피를 타고 싶어요.”
물론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사냥제는 남녀가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는 행사였다. 그렇기에 참가자들 중 대다수가 남자이기는 해도 여성 참가자 또한 아주 적지는 않았다. 게다가 활이라는 종목 특성상 이따금씩 드물게 여성 우승자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도 사냥을 해 본 적 없는 내가 우승자가 되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레이몬드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내가 마냥 약하지만은 않다고. 비록 우승은 못 하더라도 말이다.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그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위험해, 클로이. 사냥이란 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이 가느다란 손으로 고삐를 잡고 말에 오르는 것부터가 고역일 거라고.”
“걱정 마세요. 승마는 할 줄 알거든요.”
“활시위를 당기려면 손바닥이 얼마나 아픈데. 네 예쁜 손이 상할 수도 있어.”
“그럼 조금 상하고 말지요, 뭐.”
그 어떤 설득도 내겐 통하지 않았다.
내게 자기 주장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은 레이몬드였는데, 아마도 그는 지금쯤 그 일을 아주 조금은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얼굴이 상당히 난감하게 변하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사냥제에 집착하는 거지?”
“다리아에게 들었어요. 레이몬드는 열두 살 때 사냥제의 우승자가 되었다면서요?”
“뭐? 그야, 그건…….”
처음에는 나를 연약하게만 보는 레이몬드를 놀려 줄 생각이었는데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점점 오기가 생겼다. 그동안 나를 활시위조차 당기지 못하는 연약한 아이로만 보고 있었다니…….
열두 살의 그는 늑대를 세 마리나 잡아 사냥제의 우승자가 되었다던데. 스물두 살의 나는 작은 들짐승 정도는 무난하게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토끼나 다람쥐 같은…….
“아직 해산한 지도 얼마 안 됐잖아.”
“무려 일곱 개월이나 지났지요. 의사도 이제 충분히 몸을 움직일 수 있다 했는걸요. 오히려 적당한 운동은 몸에 좋다고 권장했다고요.”
“하…….”
결국 나의 고집에 못이긴 레이몬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허락하고 말았다.
“좋아. 사냥제에 참가하도록 해. 대신 활을 쏘는 건 내가 직접 가르쳐 줄 거야.”
“어머나, 정말이요?”
“하지만 각오해, 나는 상당히 무서운 스승이니까.”
그러나 무서운 스승이 될 거라는 그의 말과는 달리, 그는 너무나 상냥하고 마음이 약한 스승이어서 문제였다. 그것은 며칠 뒤, 궁술장에서 그에게 활쏘기를 배우기 시작하며 드러났다.
“안 돼, 클로이. 이러다가 손에 물집이 잡히겠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발갛게 부어오른 내 손바닥을 용케도 알아챈 그가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는 레이몬드가 생각하는 것처럼 곱게만 자라진 않았어요.”
고작 손바닥이 붉어진 것을 보며 심각해진 그의 얼굴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레이몬드의 머릿속에 있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당한 괴리가 있는 모양이다.
“젠장, 손바닥에 붉은 실금이 생겼잖아.”
“그야 시위를 당길 때 그 부분이 마찰되니까…….”
“손을 이리 줘.”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자,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잡으며 입김을 불어 댔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조금 쓰리긴 해도 그렇게 못 견딜 정도는 아닌데…….”
“오늘은 이만하지.”
“네?”
나는 억울한 감정을 가득 담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엄한 표정으로 칼같이 말했다.
“자꾸 고집부리면 사냥제에 나가는 걸 다시 취소할 거야.”
“너무해요!”
“오늘도 충분히 했어, 클로이. 과욕을 부리면 몸을 망칠 수도 있으니까 그러는 거야.”
“우으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팔이 조금 뻐근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몇 발의 화살촉이 명중해 있는 과녁을 쳐다보았다.
‘조금 아쉬운데…….’
그러나 여기서 더 고집을 부리면 안 될 것 같은 그의 분위기에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
간단하게 몸을 씻고 나오니 세인 백작부인이 나를 반겼다.
“아기 황자님들이 방금 막 잠에서 깨셨어요.”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황궁에 들어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세인 백작부인은 엘리엇과 이브의 유모였다.
“고마워요.”
나는 짧게 감사를 표한 뒤, 이제 막 잠에서 깼다는 아기 황자들의 요람으로 다가갔다. 칭얼거리던 아기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내 쪽으로 짧은 팔을 허우적댔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니?”
“아우, 아우우!”
“아부으!”
아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언어라고 보기 힘든 닿소리와 홑소리의 결합들뿐이었지만, 나는 꼭 그들과 소통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어머니도 엘리엇과 이브가 보고 싶었어.”
두 아기의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추며 토닥거려 주자, 차츰 칭얼거림이 잦아들었다.
나는 요람 앞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그림책 한 권을 꺼내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간간이 꺄르륵, 하고 터지는 웃음소리가 내 기분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책을 모두 읽고 한쪽으로 치운 나는 두 아기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엘리엇, 이브. 어머니가 꼭 너희를 위해 황금 사자의 모피를 타 올게.”
물론 높은 확률로 우승을 하지 못해 황금 사자 대신 하얀 토끼나 갈색 다람쥐의 모피를 들고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상상으로나마 두 아기에게 황금 사자의 모피를 입혀 보았다. 벌써부터 올 겨울 두 아기가 황금 사자의 모피로 만든 옷을 입고 아장거릴 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 * *
마침내 사냥제의 날이 왔다. 아침부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이몬드가 말 위에 오르는 내 옷깃을 붙잡았다.
“정말 꼭 나갈 생각이야?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는 건…….”
“걱정 마세요! 꼭 우승할 테니까요.”
나는 은근한 자신감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내게 활을 가르쳐 줄 적에 그의 기사들이 입을 모아 내 솜씨를 칭찬했기 때문이다.
‘대단하십니다, 황후 폐하!’
‘살아생전 이렇게 뛰어난 활솜씨는 처음입니다!’
나의 솜씨에 놀란 그들은 격양된 어조로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칭찬이 과하셔요. 설마 그럴 리가…….’
‘아니요, 정말입니다! 하루하루 늘어나는 속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십니다!’
‘정말이요……?’
‘이번 사냥제에서 우승자는 반드시 황후 폐하가 되실 겁니다!’
두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기사는 목까지 붉어진 채 핏대를 세우며 대답했다.
비록 근래에는 기사도의 정신이란 것이 빛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자고로 진정한 기사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법이 아닌가. 게다가 매일같이 무예를 단련하는 그들의 눈에도 내가 그토록 뛰어나다니……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자꾸만 나를 추켜세워 주는 기사들 덕에 내 마음에는 혹시나 싶은 기대감이 피어났다.
“내 기사들이 곁을 지키겠지만 그래도 조심하도록 해.”
“당연하지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내내 근심에 가득하였던 그의 얼굴이 작게 씰룩였다.
레이몬드가 내 뒤에 선 그의 기사들에게 무언가 눈짓을 했다. 아마도 나를 잘 지켜 달라는 신호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활을 챙겼다.
레이몬드는 이번 사냥제에도 참가하지 못한다. 열두 살에 처음 사냥제에 참가했던 이후로 매 해 우승을 휩쓴 탓에 많은 이들의 원성을 사 결국 사냥제를 주최하는 헤지스 공작가로부터 참가를 금지 당했다고 들었다.
레이몬드의 응원을 뒤로한 채 막 사냥터 안으로 진입하려는 찰나, 반가운 얼굴이 나를 멈춰 세웠다.
“황후 폐하!”
“빈센트 영식, 아니, 이제는 빈센트 백작이라고 불러 드려야겠네요. 반가워요.”
오래 전, 몇 번의 무도회에서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던 남자가 말에서 내려 인사를 올렸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이번 사냥제에 참석하시는 겁니까?”
“네. 이번 사냥제에 우승을 해서 꼭 황금 사자의 모피를 타 낼 거예요.”
말 위에 앉아 그의 인사를 받으며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럼 황후 폐하께서는 제 라이벌이로군요. 저도 이번 사냥제에서 반드시 우승을 해서 황금 사자의 모피를 타 낼 거거든요.”
“어머?”
나는 그 말에 두 눈을 반짝이며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다.
대개 사냥제의 우승자가 받는 황금 사자의 모피는 가족이나 연인에게 바쳐지기 마련이었다.
“레이디 베스티에게 약속했습니다. 황금 사자의 모피로 만든 겨울 망토를 선물해 주겠다고요.”
“그럼 드디어 베스티와 교제를 시작한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
“이번 사냥제에서 우승을 해 오면 한번 재고해 본다고는 말씀하셨지요.”
빈센트 백작은 짐짓 속상한 듯 마치 희곡 배우처럼 두 눈꼬리를 추욱 내려뜨렸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도 속상해 보이지 않아서 나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유쾌한 남자는 겉으로는 저리 말하지만, 사실은 베스티의 마음이 그에게 상당히 기울었음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베스티가 빈센트 백작 부인이 되는 날이 멀지 않아 보였다.
“그럼 오늘 아주 노력하셔야겠네요, 빈센트 백작. 비록 제가 두 사람이 어서 교제를 시작하기만을 가슴 깊이 응원하고 있지만, 그래도 절대 황금 사자의 모피를 양보할 생각은 없거든요.”
나의 장난스러운 엄포에 그가 키득거리며 무어라 대답하려 할 때였다.
쇄애액. 갑자기 날아온 화살 한 촉이 빈센트 백작의 뒤쪽을 지나쳐 반대편 나무에 꽂혔다.
물론 상당히 간격을 두고서 날아온 화살이기에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예고 없이 날아온 화살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괜찮으세요, 백작?”
“네, 괜찮습니다…….”
빈센트 백작은 숨을 한번 삼키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화살이 날아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레이몬드가 붙여 준 기사 중 하나가 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요?”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방금 굉장히 위험한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위험한 기척? 그 말에 흠칫 놀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위험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분명 들짐승의 기척을 느꼈는데…… 금세 사라져 버렸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후 폐하는 저희가 꼭 지켜 드릴 테니까요.”
기사는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 세심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 그렇군요.”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빈센트 백작을 돌아보았더니 그의 얼굴이 꼭 무서운 것을 본 사람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빈센트 백작? 괜찮나요?”
“황후 폐하, 저는 이만…….”
그는 인사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한 채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왜 그러지……?”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레이몬드의 기사들이 평소와 같은 상냥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백작께서도 위험한 짐승의 기척을 느끼셨나 봅니다. 아무래도 숲은 위험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시는 게…….”
“아니요, 괜찮아요. 또다시 위험한 짐승이 나타나면 그대들이 지켜줄 텐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나는 가볍게 대꾸하고는 다시 숲 안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었을 때, 나는 슬슬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여자 귀족들과 대화를 나눌 때는 잠잠하다가, 남자 귀족을 만나기만 하면 어김없이 위험한 들짐승의 기척이 느껴진다며 화살이 날아왔다.
그 기묘한 위화감은 보르타 국의 왕세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되어서 절정에 달했다. 세 촉의 화살이 연달아 왕세자의 뒤를 지나 반대편 나무 기둥에 꽂혔다.
이쯤 되면 누군가 장난질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감히 아스타 제국의 황후에게 이런 장난질을 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나는 보르타 국의 왕세자를 먼저 보낸 뒤, 방금 전 화살이 날아왔던 방향을 향해 외쳤다.
“레이몬드!”
나의 외침에 한결같이 몇 발짝 떨어진 채로 나를 지키던 레이몬드의 기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
고요한 수풀 사이로 바스락거리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곧이어 레이몬드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의 기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클로이, 들켰나?”
“이제까지 날아온 화살들, 모두 레이몬드의 짓인가요?”
“음, 뭐…….”
그가 꼭 알아봐 줘서 고맙다는 듯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턱을 쓸었다.
“어떻게 이렇게 위험한 짓을!”
나는 분개하며 외쳤으나 그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턱 끝을 치켜 올렸다.
“걱정하지 마. 내 화살은 절대 빗나가지 않으니까.”
“지금 단순히 신변의 위협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비록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상당히 무례한 일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함께 있던 이는 무려 외국의 왕세자였다. 자칫 외교 문제로 번질 뻔한 일을 벌이고서도 이토록 당당하다니.
“내 기척이 고작 그 풋내기에게 들킬 리 없잖아.”
“하지만 제게는 들켰지요.”
정확히는 기척을 들킨 게 아니라 행동 양식을 들킨 거지만.
어쩌면 빈센트 백작도 레이몬드의 짓임을 알아챈 게 틀림없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그렇듯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후다닥 달아났을 리 없다.
“무서운 표정 하지 마. 나 상당히 억울해, 클로이.”
“억울하다고요?”
억울함을 호소하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대체 왜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하신 거예요?”
“……네가 정말 걱정돼서 그랬어.”
그가 눈썹을 추욱 늘어뜨리며 나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그러더니 돌연 양 주먹을 움켜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의 안전을 위해서였어! 그 승냥이 같은 놈들이 네 주위를 배회하잖아!”
“……?”
“기억 안 나? 보르타 국의 왕세자. 작년 봄에 네게 반해 상사병에 걸렸다며 죽니 사니 했던 놈이잖아.”
그는 상당히 억울한 듯 외쳤지만 그의 변명을 듣는 나의 두 눈은 점점 가늘어졌다.
“그래서 이 기회에 그를 죽이기라도 할 참이었나 보죠?”
“어떻게 알…… 아니, 무슨 소리야. 그렇게 생각이 없지는 않아!”
방금 분명 어떻게 알았냐고 반문하려다 말을 돌린 뉘앙스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의 본심을 모두 듣고 말았다. 기가 찼지만 차마 더 이상 그를 나무라지 못하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가요.”
나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을 뻗었다.
“정말?”
그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또 무슨 짓을 하실지 모르니, 이렇게 손이라도 꼬옥 붙들고 걸어야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자 그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꼭 그의 뒤로 눈에 보이지 않는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스무 보 뒤에서 따라오도록.”
그는 기사들에게 아주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제 와서 근엄한 척해 봤자 하나도 멋있지 않았지만, 아주 조금 귀엽기는 했다.
기사들이 물러나자 마치 그와 둘이서만 있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설렜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요, 레이.”
“음…….”
“어머, 앞으로 또 그럴 생각인가요?”
“아니야!”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슬그머니 손을 놓으려 하자, 그가 거세게 내 손을 붙잡았다.
“네 말대로, 앞으로 절대 그러지 않을게.”
“좋아요.”
마침내 나온 만족스러운 대답에 나는 까치발을 살짝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러자 눈에 띄게 좋아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멀지 않은 나무 둥치 아래에서 짹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이! 참새야!”
“아, 참새……!”
“어서, 활을!”
레이몬드는 나보다 더 흥분해서 외쳤다.
날개를 다친 참새 한 마리가 흙바닥 위에 앉아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연습한대로 재빠르게 화살을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좋아, 그대로 시위를 놓으면……!”
레이몬드가 옆에서 열심히 훈수를 두었다. 그러나 나는 새까만 두 눈을 끔뻑이는 갈색 털뭉치를 차마 맞추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클로이……?”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내가 시위를 놓지 못하고 망설이자 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음…… 저…….”
몇 번을 더 머뭇거리던 나는 결국 활을 내려놓고 말았다.
“못 하겠어요.”
“……?”
레이몬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저 새가 가여워서 그래? 하지만 클로이, 너는 사냥을 하기 위해 왔고…… 굳이 네가 아니더라도 날개를 다친 새라 오래 살아남지는 못할 거야.”
“저도 알아요. 그런데…….”
나는 펼쳐지지 않는 날개를 푸드득거리려 애쓰는 참새를 쳐다보다가, 그 위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어미 새예요.”
“……?”
“저기, 둥지에 새끼들이 있잖아요.”
아까부터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던 아기 새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처량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제가 이 새를 사냥해 버리면, 아기 새들은 돌봐 주는 이가 없어 죽고 말 거예요.”
“그렇군.”
그제야 레이몬드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고는 나를 지나쳐 푸드득거리는 다친 어미 새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굵고 투박한 두 손이 다친 새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크기의 새였다.
그가 다친 새를 내게로 가져왔다. 나는 지니고 있던 약을 꺼내 새의 날개를 치료해 주고 하얀 손수건으로 다친 날개를 감아 주었다.
“레이몬드의 말대로 날개를 다쳤으니…… 오래 버티기 힘들겠지요.”
아기를 돌봐야 한다는 공통된 상황 때문일까. 나는 내 일도 아닌데 굉장히 속이 상했다.
“클로이.”
그러한 내 심경을 알아챈 레이몬드가 자상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한다면, 저 새와 둥지의 새끼들을 황궁으로 데려갈까?”
“참새 가족을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황궁에서 키워도 좋고, 혹은 저 조류의 날개가 모두 나을 때까지 데리고 있다가 날려 보내도 좋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황궁 안에서 짐승을 기르다니.
“정말 그래도 돼요?”
그는 반색하는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까지 내가 네게 빈 말을 한 적이 있었나?”
“고마워요, 레이몬드!”
나는 활짝 웃으며 다친 새를 품 안에 꼬옥 안았다.
잠시 후, 레이몬드가 기사를 시켜 나무 위의 둥지를 내려오게 시켰다. 둥지 안의 아기 새들이 큰 소리로 지저귀며 우리를 경계했지만, 내가 둥지 안으로 어미 새를 내려놓아 주자 어미에게로 몰려들었다.
어미 새는 사람들로부터 제 새끼들을 지키려는 듯 다친 몸 뒤로 새끼들을 숨겼다.
“너희를 무섭게 하려는 게 아니야. 여기는 위험하니까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주려는 거야.”
“그렇게 말해도 이 조류들은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은데.”
레이몬드는 참새와 대화를 시도하는 나를 짓궂게 놀려 댔다.
“사냥은 더 하지 않는 건가?”
“이제 괜찮아요.”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잔잔하게 저으며, 참새 가족을 힐끔댔다.
“황금 사자의 모피는 타지 못하겠지만 엘리엇과 이브에게 더 좋은 선물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돌아 나오는 길에 빈센트 백작과 다시 마주쳤다. 그는 내 옆에 선 레이몬드를 보고 흠칫거렸지만, 이내 예법에 맞게 인사를 올렸다. 그의 손에는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토끼네요.”
“네. 레이디 베스티를 닮았지요?”
그가 자랑스럽게 토끼를 내 앞으로 들이밀며 물었다.
“음…….”
그다지 닮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차마 뿌듯해하는 그에게 대놓고 부정의 말을 건넬 수가 없어 망설일 때였다.
“아무래도 올해 우승은 물 건너간 것 같고, 그래서 대신 레이디 베스티와 닮은 토끼 한 마리를 주워 왔습니다.”
“베스티에게 토끼를 선물할 건가요?”
“네. 레이디 베스티와 참 잘 어울리겠지요?”
토끼와 베스티라니. 조금 귀여운 조합 같기도…….
“큼. 크흠.”
빈센트 백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옆에서 레이몬드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빈센트 백작이 재빠르게 인사를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올해 사냥제의 우승자는 다리아의 연인인 윌터 루카스 경이었다. 아드리안 헤지스 공작이 루카스 경에게 황금 사자의 모피를 가져다주었다.
루카스 경은 황금 사자의 모피를 받자마자 기뻐하며 그것을 들고 대기석에 앉아 있던 다리아에게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다리아의 어깨에 모피를 둘러 주었다.
두 사람은 이 경사스러운 자리를 빌려 다리아의 뱃속 아기의 존재와 함께 겨울이 오기 전에 있을 두 사람의 결혼식을 알렸다.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축복의 박수를 쳐 주었다.
“올해 사냥제에는 특별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냥제가 파하려나 싶던 때, 헤지스 공작이 뜬금없는 선언을 했다.
“특별상의 주인공은 바로 황후 폐하이십니다!”
“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만 황후로서의 위엄마저 잃고 반문했다.
“무려 살아 있는 생명을 가져오셨잖습니까.”
헤지스 공작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건 조금 궤변 같은데…….’
나는 상당히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헤지스 공작을 쳐다봤다. 물론 그는 이따금 엉뚱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생명을 가져온 게 나뿐만은 아닐 텐데. 당장 빈센트 백작도 살아 있는 토끼를 가져왔고.
내 옆에 흐뭇한 표정으로 서 있는 레이몬드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설마 레이몬드가 헤지스 공작을 매수한 건 아니지요?”
“매수라니! 절대 아니다!”
그는 얼굴이 시뻘게지며 강하게 부인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저렇게 큰소리를 낸담.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품에는 참새 가족의 둥지를 소중하게 품은 채.
* * *
사냥제의 날, 숲속에서 주워 온 참새 가족은 황후궁에 새로이 둥지를 틀었다. 지지배배 울며 먹이를 받아먹는 것밖에 하지 못하던 아기 새들이 조금씩 날갯짓을 시작하고, 어미 새의 날개가 모두 나았을 무렵.
“꺅! 황후 폐하, 또 참새가 날아다녀요!”
날아다니는 참새들 때문에 황후궁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어미 새가 처음 상처를 회복하고 날갯짓하던 날, 황후궁의 모두가 경이로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어미 새를 응원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다 자란 아기새들이 일제히 날갯짓을 시작하면서 황후궁은 하루하루가 소란스러워졌다.
“아우으! 아브브!’
“아우! 아우! 아우우!”
엘리엇과 이브는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참새들을 잡으려고 잔뜩 안달이 났다. 그러나 아무리 짧을 팔을 열심히 휘둘러 보아도 참새는 도통 잡히지가 않았다.
두 아이 모두 내가 사냥제때 받아 온 황금 사자의 모피로 만든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옷을 입고 바둥거리는 모습이 썩 귀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황금 사자는 내 몫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난 사냥제 이후 나는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중 가장 큰 계기는 기사들이 입을 모아 칭송했던 내 활솜씨가 사실은 아주 평범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일이었다. 어쩜 기사들이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굉장히 화가 나서 한동안 그들의 얼굴을 쳐다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단체로 찾아와 죄송하다며 울먹이는 통에 마음을 풀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모든 게 다 의심되었다. 갑작스러운 특별상도 수상했고, 특별상과 우승상의 상품이 같다는 것도 그랬다.
하지만 어찌됐든 황금 사자의 모피를 입고 있는 엘리엇과 이브가 무척 사랑스러워서, 나는 더 이상 이를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우으으…….”
“어머, 이브 황자님!”
결국 잡히지 않는 참새들에 이브가 먼저 포기하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황자님, 울지 마셔요.”
“착하지요, 황자님?”
이브를 달래는 시녀들의 표정이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웠다.
‘그냥 웃어도 되는데…….’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이브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울먹거리던 아이가 금세 울음을 멈추었다.
“정말 신기해요, 황후 폐하. 이브 황자님은 어떻게 매번 울먹이다가도 황후 폐하만 보면 금세 예쁘게 웃는 걸까요?”
“이브 황자님도 예쁜 여자가 좋은 거예요!”
가만히 내버려두면 또다시 제이시가 내 외모를 찬양할 기세였다. 나는 말을 돌리기 위해 엘리엇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리……엇?”
눈앞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참새를 잡으려고 짧은 팔을 버둥거리다가 잡히지 않아 씩씩거리던 엘리엇이 돌연 요람의 손잡이를 붙들고 몸을 일으킨 것이다.
“……!”
순간 내 방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엘리엇만 바라보았다. 소리를 내는 것은 마치 엘리엇을 응원하는 듯 꺄르륵 웃고 있는 이브뿐이었다.
“아우으!”
엘리엇의 손이 참새를 스칠 듯 말 듯하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우으으으!”
결국 세 걸음을 겨우 떼고 다시 주저앉고 만 엘리엇이 화가 나 소리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 안의 어느 누구도 엘리엇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신경 써 주지 않았다.
“세상에, 방금 엘리엇 황자님께서 첫 걸음을 떼셨어요!”
“황자님, 축하드려요!”
“축하드려요, 황자님!”
모두가 호들갑을 떨며 엘리엣에게 축하를 건넸다. 비록 엘리엇은 더욱 성을 냈지만.
“엘리엇이 첫 걸음을 뗐다고?”
소식을 전하기 무섭게 레이몬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네, 레이몬드. 우리 엘리엇이요.”
뿌듯한 표정으로 엘리엇을 가리키자 그가 기뻐하며 양 손으로 번쩍, 엘리엇을 들어올렸다.
“황자의 첫 걸음을 기념하여 제국의 국경일을 선포……!”
“레이몬드!”
엘리엇 첫 걸음을 뗀 건 물론 기쁘고 기념할 만한 일이지만, 국경일로 선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레이몬드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흠. 그냥…… 난 그만큼 감동스러웠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방금은 너무 지나치셨어요.”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거, 받아요.”
“이게…… 뭐지……?”
그가 상자를 열자 황금 사자의 모피로 만든 망토가 나왔다.
“엘리엇과 이브의 것을 만들면서 레이몬드의 것도 함께 만들어 봤어요.”
“어떻게 이런…….”
레이몬드는 감동받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돌연 와락, 하고 끌어안았다.
“사랑해, 클로이.”
“아이 참, 레이몬드.”
나는 좋으면서 괜히 그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두드리며 밀어냈다. 물론 레이몬드는 그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나를 억세게 끌어안은 채였지만.
마침내 나를 놓아 준 레이몬드가 내가 만든 망토를 가볍게 둘렀다.
“어때, 클로이? 잘 어울리는가?”
“네, 아주…….”
세 부자가 나란히 같은 모피를 입고 있자, 어쩐지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가슴이 뭉근하고, 따뜻해지는…… 꼭 눈물이 날 것 같은…….
“왜 그런 표정이지?”
레이몬드가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런 표정이요?”
“방금 꼭……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잖아.”
역시 레이몬드였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감정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푸스스 눈매를 흩트렸다.
“그냥, 어쩐지 이 순간을 영원히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잠시 두 눈을 끔뻑이던 레이몬드가 이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그런 이유라면 울지 말고 내게 말해.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네?”
어리둥절하며 두 눈을 끔뻑일 찰나, 그가 바깥에 있는 시종에게 외쳤다.
“당장 궁정 화가를 불러 와라!”
레이몬드의 말이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가 허겁지겁 들이닥쳤다.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였다.
“레이, 화가는 왜……?”
“이 순간을 영원히 남기고 싶다며.”
그가 내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우리의 순간을 남기자, 클로이.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나날들의 순간도, 모두.”
“아…….”
“그런 표정 말고 어서 이리 앉아, 클로이.”
나는 뭉클한 감정으로 엘리엇을 안은 채 레이몬드의 옆에 앉았다. 그의 품에는 이브가 안긴 채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어느덧 화구를 모두 꺼내 준비를 마친 화가가 두 손을 모은 채 레이몬드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대는 아스타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남길 초상화를 그려야 할 것이다.”
“네, 폐하.”
궁정 화가는 공손하게 대답하며 하이얀 캔버스 위로 붓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나와 레이몬드와 엘리엇과 이브의, 우리의 순간이 영원토록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아기 참새 세 마리가 우리의 주위를 지저귀며 날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