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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3. 다시, 봄 (15/21)
  • 외전3. 다시, 봄

    어느덧 겨울의 끝물이었다. 봄의 축제, 성 플로라의 축일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봄의 축일을 준비하는 것은 황후인 클로이의 몫이었다. 게다가 이번 축일에는 지난 신년제 이후로 새로이 국교를 튼 신생국가 보르타의 사신단이 방문하는 터라 더욱 준비할 것이 많았다.

    성 플로라의 축일은 백 년 전에 출현하였다는 꽃의 성녀 플로라를 기리는 날이었다. 원래는 사 년에 한 번씩 열리는 것이었으나, 작년의 축제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파토난 탓에 올해 다시금 준비하게 되었다.

    책상 앞에 앉아 축일을 준비하던 클로이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땅에 마지막으로 다녀갔다던 꽃의 성녀 플로라……. 그 이후로 백 년 간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성녀…….

    성녀는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

    성녀…… 라…….

    ‘……언젠가 후대의 사람들이 ……를 기리며 축일을…….’

    분명 그때…….

    ‘그럴 리가요. 난 ……인걸요.’

    누군가와…… 어떤 대화를…….

    지끈. 머리가 아파 왔다.

    과로를 한 탓일까. 클로이는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쥐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가만히 몸을 등받이 위로 기대자, 창밖의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꼭 누군가가…….

    ‘나는 지금 누구를…… 생각하고 있던 거지…….’

    정신이 멍해졌다.

    봄의 축일을 준비하며 문득 누군가가 생각나려 했으나 그녀는 끝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 * *

    성 플로라의 축일을 맞이하여 각지에서 귀빈들이 몰려들었다. 아직 축일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귀빈들을 위한 환영 무도회로 인해 정신이 없었다.

    클로이는 새로이 국교를 튼 보르타의 사절을 비롯한 외국의 손님들을 맞이한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구석으로 물러났다.

    “이번에 보르타 국과 국교를 튼 게 황후 폐하의 공이라면서? 내가 뭐랬어, 외교에 있어서는 네가 레이몬드보다도 더 뛰어날 거라고 했잖아.”

    예정된 날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다리아가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지난 신년제 이후, 클로이와 다리아는 사석에서만큼은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직 황후가 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클로이는 외교적인 방면에서 나름의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운이 좋았지.”

    클로이는 민망한 마음에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며 대답했다.

    하필이면 지난 신년제 때 제국을 방문하였던 젊은 남자가 신분을 숨긴 보르타 국의 왕세자였다니. 하필이면 그 보르타 국의 왕세자가 그녀에게 반해 버리기까지 했으니…….

    레이몬드는 그것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르타 국과 국교를 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미모도 능력이니깐, 뭐.”

    “그건 좀 속상한데……. 레이몬드의 옆자리에 있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고작 외모가 조금 뛰어난 여자로만 생각되는 것 같아서.”

    “걱정 마, 클로이. 네 능력은 단순히 미모뿐만이 아니니까. 단순히 그뿐이라면 왜 여자 귀족들마저 네게 호감을 표하겠니?”

    다리아가 깔깔 웃으며 놀리듯이 말했다.

    “설마 아스타 제국의 황후 폐하께서는 스스로의 외모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유혹할 만큼이라 여기는 거야?”

    “레이몬드를 연적으로 두었던 다리아가 할 말은 아닌걸.”

    클로이는 한때 제게 청혼을 하겠다면서 장난을 쳤던 다리아를 생각하며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무슨 소리! 난 이성애자야! 내년 가을엔 결혼식도 올릴 거라고!”

    다리아가 발끈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클로이는 다리아의 연인, 윌터 루카스를 힐끔 보았다. 불 같은 성정의 다리아와 달리 그는 선한 인상을 지닌 남자였다.

    캐롤라인 공작위에 등극한 이후, 다리아는 선대 공작의 반란으로 어수선하던 공작령을 빠르게 안정시켜 갔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지난 신년제 때 황궁에 방문했을 때까지만 해도 루카스 경은 그녀의 곁에 없었다.

    신년제 행사가 치러지기 전날의 밤, 그러니까 그해의 마지막 밤. 클로이는 다리아의 손님방에 숨어 레이몬드 몰래 와인을 홀짝이며 다리아와 회포를 풀었다.

    빈 와인 병이 슬슬 쌓일 즈음, 클로이가 먼저 윌터 루카스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도 루카스 경을 만나지 못한 거야, 다리아?’

    ‘음, 그게…….’

    ‘내게는 용기를 내겠다고 했으면서!’

    술기운 탓인지 클로이의 목소리가 굉장히 커졌다. 베스티가 종종 그러는 것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치자, 다리아 또한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용기! 용기가 부족하단 말이야!’

    그렇게 외친 다리아는 돌연 새 와인 병의 마개를 따더니, 그 자리에서 한 병을 그대로 비우고 말았다.

    ‘고마워, 클로이. 네 덕에 용기가 생긴 것 같아.’

    그리고 그대로 그 밤에 말을 타고 홀연 사라져 버렸다.

    캄캄한 밤중에 말을 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술을 잔뜩 마시고 말을 타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일이라 제국법상 금기시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닌 밤중에 제국법을 어기고 음주 승마를 하고 만 다리아를 붙잡기 위해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음주 승마라니. 어릴 적 습관을 전혀 못 버렸군. 범칙금을 제대로 물려줄 거야.’

    ‘어떡해요, 레이? 이러다가 다리아가 사고라도 나서 크게 다치면…….’

    ‘지금 그 여자를 걱정할 땐가?’

    클로이는 걱정되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렸지만, 레이몬드는 한숨만 포옥 내쉬며 클로이의 이마를 검지로 꾸욱 눌렀다.

    ‘술을 마실 땐 와인 한 병 이상은 마시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레이몬드는 다리아가 걱정되지도 않아요?’

    ‘공작가의 기사들이 뒤따르고 있을 텐데 별일이야 있겠어. 그 여자가 모는 말이 애꿎은 기물들을 파손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취기에 정신이 없어 그녀를 따르고 있을 기사들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클로이는 뒤늦게 안심을 하고는 레이몬드의 품에 몸을 기댔다.

    다음 날, 신년제 행사 때에 다리아 캐롤라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새 공작이 밤중에 저지른 만행이 수도 곳곳에 퍼졌다.

    그리고 열흘 가량의 시간이 지났을 적, 신년제를 위해 모여든 귀빈들이 하나둘 황궁을 떠나던 와중, 그녀가 다시 등장했다. 말끔한 얼굴의 웬 남자를 제 말의 뒤에 태우고서.

    ‘인사해, 윌. 아스타 제국의 황후 폐하셔.’

    다리아는 그녀답지 않은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며 남자에게 속삭였다. 남자는 그런 다리아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는 말에서 내렸다.

    ‘아스타 제국의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윌터 루카스입니다.’

    ‘……!’

    클로이는 충격 받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다리아도 놀라웠지만, 그녀가 말하던 윌터 루카스는 더욱 충격이었다. 다리아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 못지않은 굉장히 강렬한 성정의 소유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후 폐하께서 다리아에게 좋은 조언들을 많이 해 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직접 만나게 된 윌터 루카스는 상당히 온유한 성정을 지닌 남자였으며, 동시에 불같은 다리아를 순한 양처럼 다루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다리아는 연인의 지난 이야기를 짤막하게나마 설명해 주었다.

    다리아의 숙부였던 아놀드 캐롤라인의 음모로 제국 밖으로 쫓겨났던 윌터 루카스. 아놀드 캐롤라인은 다리아의 목숨을 빌미로 그를 협박하였다고 한다.

    그는 가족들에게마저도 자신의 생사를 알리지 못하고 대륙 동부의 작은 왕국에서 소소한 삶을 연명했다. 간간이 들리는 다리아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다리아와 윌터 루카스의 잃어버린 십 년의 시간이 너무나 안타까워 클로이는 눈물이 났다. 정작 당사자인 두 사람은 이미 모든 눈물을 짜낸 뒤라 더 이상 울지 않았지만.

    클로이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뒤늦게 나타난 레이몬드가 다리아에게 범칙금을 내라고 닦달하지만 않았더라면 분위기는 완벽했을 것이다.

    ‘너무해요, 레이! 다리아는 이제 막 연인과 십 년 만에 재회한 거라고요!’

    ‘저 여자 때문에 잃어버린 나의 십 년도 소중해.’

    레이몬드는 도리어 뻔뻔하게 말했다. 다리아는 클로이에게 그런 레이몬드를 나무라지 않아도 괜찮다며 웃었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건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려는 거라고.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언제나 그렇듯 무심한 척하면서 상대를 배려해 주는 사람이니까.

    물론 클로이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레이몬드에게 맞장구를 쳐주며 다리아를 몰아붙이는 것은 클로이의 성격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남자를 십 초 이상 쳐다보지 마!”

    불현듯 들려오는 다리아의 목소리에 클로이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질투가 너무 심하잖아, 다리아.”

    클로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놀렸으나 다리아는 상당히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얼굴은 위험해. 여자들의 적이야.”

    “적이라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클로이는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에 레이몬드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레이몬드, 나 너무 속상해요. 다리아가 나에게 아주 심한 말을 했어요.”

    다리아가 제게 했던 말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그러자 레이몬드가 다리아 못지않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남자를 십 초 이상 쳐다보지 말아.”

    그러더니 결국 하는 말이 다리아와 똑같은 억지였다.

    “그게 대체 무슨 억지예요!”

    “억지라니. 정말 위험해서 하는 말이야.”

    “……!”

    클로이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레이몬드도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위험한 건 네가 아니라 저 짐승 같은 눈빛들이지!”

    그가 씩씩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남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미치겠군. 다들 너만 쳐다보고 있어.”

    “그럴 리가요. 아무도 저를 쳐다보지 않아요.”

    클로이는 이 질투심만 가득한 남자의 망상을 달래 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들 레이몬드만 쳐다보고 있는걸요.”

    “나를? 누가?”

    레이몬드는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레이몬드의 눈에는 아까부터 그를 쳐다보던 아가씨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나 보다고, 클로이는 남몰래 투덜거렸다.

    그렇게 그들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적에 문을 지키던 병사가 라미에 교단의 손님들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클로이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걸어 나갔다.

    “다시 방문해 주어서 감사해요.”

    교단을 대표하여 방문한 젊은 대주교는 지난 해 황제와 황후의 결혼식을 주관해 주었던 남자였다. 남자와 인사를 나누고 있으려니, 오랜 그리움을 담은 흐릿한 기억이 아른아른 피어났으나 끝내 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때, 대주교의 뒤편에 시립한 기사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브란스 경……. 루드비히 대공성의 기사였지요?”

    “저를 기억하나요?”

    “제국의 많은 아가씨들이 선망하는 브란스 경을 어떻게 모르겠어요.”

    밝은 백금발을 지닌 기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푸스스 흩트리며 아름다이 웃었다.

    사실 클로이에게 루드비히 대공성에서 지냈던 기억은 꼭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굉장히 희미했다.

    그녀의 후견인이었다는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 또한. 그저 그가 아주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것만이 어렴풋이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성기사가 된 건가요?”

    “정신을 차려 보니 라나 신을 섬기는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에녹 브란스 경……. 그에 대한 기억 또한 굉장히 희미했다.

    그저 그가 그녀에게 굉장히 호의적인 사람이었다는 것과 수도의 많은 아가씨들이 그를 선망하였다는 것만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억이 희미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그 시절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희미해서요.”

    에녹은 그렇게 말하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묘하게 시선이 가는 목걸이였다.

    “소중한 분의 물건인가 봐요.”

    “글쎄요.”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그의 목걸이에서 시선을 뗀 클로이는 잔잔하게 웃고 있는 그와 마주보았다.

    “제가 황후 폐하께 선물을 하나 드려도 좋을까요?”

    “물론, 기꺼이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그가 무도회장 곳곳에 장식되어 있던 꽃무더기 틈에서 노란색 꽃 한 송이를 뽑아 그녀에게 건네었다.

    “봄의 당신은 노란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순간 클로이는 당황하여 두 눈을 깜빡였으나 이내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가 건넨 꽃을 받았다.

    “고마워요.”

    그렇게 클로이는 그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돌아섰다.

    “세상에, 브란스 경이 성기사가 되었다니……!”

    “이건 말도 안 돼요.”

    클로이의 시녀인 제이시와 루나가 울상이 된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에게 남은 건 케니스 영식뿐이에요!”

    “그렇다면 내겐 이제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은 것이로군요.”

    로델이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자 아멜리아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 사이에 있던 베스티는 저 멀리 빈센트 영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케니스 영식을 힐끔 쳐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로이는 짓궂은 표정으로 베스티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베스티는 케니스 영식을 좋아하지?”

    “무, 무슨 말씀을! 저, 전혀 아니에요!”

    베스티는 깜짝 놀라며 양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 케니스 영식을 싫어한다는 거야?”

    “수도의 영애치고 케니스 영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녀는 새침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슬쩍 시선을 내리니 옷소매 사이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보였다.

    “그러지 말고 자신 있게 다가가 봐.”

    클로이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격려해 주었다.

    “다가가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 지금 케니스 영식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꺄악!”

    베스티는 클로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며 다른 곳으로 쌩하니 도망가 버렸다. 클로이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렇게 도망가기만 해서는 안 될 텐데…….”

    어쩌면 이건 이미 사랑을 이룬 자의 자만일지도 모른다.

    “안녕하십니까, 황후 폐하.”

    “멋진 무도회입니다.”

    “어서 와요, 케니스 영식. 그리고 빈센트 영식.”

    클로이는 두 남자를 환영하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시는군요. 황제 폐하께서 저리 무서운 표정으로 저희를 노려보실 만합니다.”

    빈센트 영식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클로이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레이몬드를 발견하고는 웃음을 꾸욱 눌러 참았다.

    ‘정말이지, 귀엽다니까.’

    물론 이게 감히 황제를 상대로 느끼기엔 불경한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눈엔 레이몬드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황후 폐하.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레이디 베스티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는데…….”

    ‘레이디 베스티’는 더 이상 캐롤라인 공녀가 아니게 된 그녀를 일컫는 호칭이었다. 빈센트 영식이 다소 근심스러운 얼굴로 아직도 저 멀리 도망치고 있는 베스티의 뒷모습을 힐끔거렸다.

    ‘어라?’

    베스티를 걱정하는 빈센트 영식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어쩐지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아가 나와 레이몬드를 구경하며 느꼈다는 재미가 이런 거구나.’

    클로이는 속으로 키득키득 웃으며 베스티와 빈센트 영식, 그리고 케니스 영식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갈지 기대했다.

    ‘어떻게 되든, 베스티가 행복해지면 좋겠는데.’

    이제는 어두운 그늘이 상당히 사라진 베스티였다. 클로이는 그녀가 다시 옛날처럼 화사하게 웃기를 바랐다.

    그리고 아마도 이 두 남자 중 한 명이 그녀의 웃음을 되찾아 줄 수 있지 않을까.

    * * *

    봄의 축제가 끝난 직후, 클로이와 레이몬드는 황실의 업무를 잠시 라트 후작에게 맡겨 놓고는 휴양을 떠났다.

    오랫동안 클로이와 함께 휴양지로 떠나는 날만을 벼르며 기다리던 레이몬드는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국 남부에는 이름난 휴양지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베넷은 황실 소유의 작은 소도시였다.

    “그러고 보니, 네가 태어난 곳도 제국의 남부라 했었지.”

    부드럽게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레이몬드가 물었다.

    “네. 소도시 아스란타에서도 가장 작은 마을이었지요.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이 나면 함께 들러 보지.”

    “좋아요.”

    클로이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비록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태어난 곳에 다시 걸음 한다는 건 묘한 설렘을 주는 일이었다.

    레이몬드와 함께 한참을 재잘거리던 클로이는 짧게 하품을 했다.

    “졸려요…….”

    그녀는 눈가에 핑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요즘 들어 유난히 졸음을 자주 느낀다고 생각했다.

    “내게 기대서 자.”

    클로이는 레이몬드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댔다. 너른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어트렸다. 그 느낌이 썩 좋아서 클로이는 더욱더 그에게로 몸을 붙였다.

    “요즘 부쩍 잠이 늘었군.”

    “춘곤증인가 봐요.”

    “도착하면 깨워 줄게. 푹 자.”

    그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클로이는 제 어깨를 토닥거리는 레이몬드의 손길을 느끼며 스르륵 잠에 들었다.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일어나자, 언제 도착한 건지 낯선 방 안의 풍경이 그녀를 맞이했다.

    “레이몬드? 내가 어떻게 여기에…… 분명 도착하면 깨워 준다고 하셨잖아요.”

    “너무 곤히 자기에 차마 깨울 수가 없었지.”

    “그럼 레이몬드가 나를 이곳까지 들고 온 건가요?”

    “살을 더 찌워야겠어. 너무 가볍잖아.”

    클로이는 매번 자신이 잠들 때마다 직접 안아서 옮기는 그 때문에 민망해했지만, 레이몬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가 씨익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쟁반을 손수 들고 왔다. 클로이는 침대 위에 앉은 채로 그가 건네주는 케이크 조각을 보았다.

    “치즈 케이크, 좋아하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클로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포크를 들었다.

    ‘내가 그에게 치즈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안개 속에 숨어 버린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클로이가 미간을 모았다. 그때,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그냥 알아.”

    “……?”

    “너에 관한 건 무엇이든, 그냥 알아.”

    “……신기해요.”

    “어서 먹어.”

    “레이몬드는요? 치즈 케이크를 싫어하잖아요.”

    클로이가 묻자, 그가 멈칫하며 두 눈을 끔뻑였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나도 그냥 알아요.”

    클로이는 배시시 웃으며 포크로 케이크를 한 입 떠올렸다. 케이크 조각을 입가로 가져다 대는데, 문득 속이 좋지 않았다.

    “우읍…….”

    “클로이?”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하자, 레이몬드가 놀라 접시를 치우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클로이? 뭔가 탈이 난 건…….”

    그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속이 더부룩한 와중에 클로이는 두 달째 월경이 끊긴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건…….

    “확실해요, 레이몬드. 이건…….”

    클로이는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갑작스레 안겨 오는 작은 몸을 마주 안아 주며 레이몬드가 불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클로이……?”

    “레이몬드……!”

    그녀는 벅차오르는 감각을 차마 감추지 못하고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이를 갖게 된 것 같아요.”

    “아이?”

    “네, 나와…… 레이몬드의 아이를…….”

    잠시 눈동자를 흔들던 레이몬드가 약간의 의혹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알 수 있어요, 나는.”

    그러게, 그녀는 무얼 근거로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걸까. 꼭 아이를 가져 본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던 레이몬드는 곧바로 의사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를 진찰하던 의사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회임하셨습니다!”

    “아……!”

    회임, 아이가 생겼다는 그 말에 클로이는 탄성을 터뜨렸다.

    “왜 울어, 클로이.”

    레이몬드가 그녀의 몸을 꼬옥 끌어안으며 눈가를 문질러 주었다.

    “그냥…… 갑자기 슬퍼졌어요. 참 이상하지요? 분명 기뻐해야 하는데.”

    클로이는 푸스스 웃으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기뻤다. 기쁘면서도 슬펐다. 무엇이 슬픈지도 모른 채, 그녀는 모호한 감정 속에서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다 문득, 그와 자신의 손목에 걸려 있는 한 쌍의 가죽 팔찌를 발견했다.

    ‘이건 언제부터 지니고 있었던 거지?’

    레이몬드와 있었던 일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가죽 팔찌의 존재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원래 임신을 하게 되면 감정이 들쑥날쑥해집니다. 임산부 스스로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지요. 황후 폐하께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의사에 말에 두 사람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널 울리다니, 내 자식이지만 괘씸한 녀석이군.”

    “그렇게 말하는 레이몬드도 꼭 울 것 같은 표정인데요?”

    “내가……?”

    레이몬드는 어색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 모습이 조금 바보 같아서 클로이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사랑해요, 레이몬드.”

    “……나도.”

    그가 그녀의 정수리 위로 자신의 턱을 걸치며 속삭였다.

    “너무 고맙고…… 많이 사랑해.”

    그 포근한 고백 속에서 클로이는 부드럽게 두 눈을 휘며 웃었다.

    * * *

    휴양지에서 돌아온 직후, 레이몬드는 클로이의 임신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여러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클로이와 레이몬드는 따사로운 황궁 온실에서 한가로이 태동을 느끼며 태교에 힘썼다.

    “여기를 만져 봐요.”

    “으음…….”

    레이몬드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바닥을 그녀의 아랫배 위로 올렸다.

    “태동이 느껴지나요?”

    곧바로 움찔하더니 어깨를 바르르 떠는 레이몬드를 보며 클로이는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신기하군…….”

    “아기도 레이몬드를 알아보나 봐요.”

    “아주 힘찬 녀석인 것 같아.”

    “레이몬드를 닮았다면, 아마도 그렇겠지요?”

    “너를 닮았다면, 아마도 무척 연약하겠지.”

    레이몬드가 그녀의 아랫배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그러더니 그녀의 옆에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여기까지 와서도 책을 읽을 참인가?”

    “아기들을 위한 이야기책이에요. 책을 많이 읽어 줘야 한댔어요.”

    클로이가 가장 위쪽에 있던 책 한 권을 들어 올리며 말하자, 그가 살짝 흥분한 얼굴로 냉큼 그녀에게서 책을 뺏어 갔다.

    “이리 줘. 오늘은 내가 읽어 줄 테니.”

    그가 펼친 책은 초대 황제의 건국 신화 이야기였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잔잔하니 이야기를 읽어 내리던 그는 문득 등장한 요정 여왕의 이름에 멈칫했다.

    “요정들의 여왕 에스델은…….”

    “에스델…….”

    클로이는 가만히 그를 따라 그 이름을 읊어보았다.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름자였다.

    “이상해요, 레이몬드. 나 갑자기 기분이 울적해졌어요.”

    “저런, 클로이. 그러지 마.”

    “원래 임신 중일 때는 기분을 종잡을 수 없다고 했잖아요.”

    “이 녀석이 너를 울적하게 만든 게로군.”

    레이몬드가 그녀의 아랫배를 힐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클로이는 그 모습을 보며 장차 태어날 아이와 함께 놀아 주는 레이몬드를 상상해 보았다.

    “태어나는 아이는 남자일까, 여자일까요? 레이몬드는 어느 쪽이 더 좋아요?”

    “둘 다 상관없어.”

    그가 망설임 없이 짧게 웃으며 덧붙였다.

    “다만 너를 닮았으면 좋겠어.”

    “왜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사랑스러울 테니까.”

    “저랑은 정반대의 생각을 하시네요.”

    클로이는 가만히 레이몬드의 손을 맞잡았다.

    “난 아이가 레이몬드를 닮았으면 좋겠어요.”

    “어째서?”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사랑스러울 것 같거든요.”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끼며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든 레이몬드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럼 공평하게 우리 둘을 반씩 닮은 아이가 태어나길 바라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 위로 드리우는 그의 그림자를 느끼며 클로이는 느릿하게 두 눈을 내리깔았다.

    곧이어 이마 위로 촉촉한 그의 입술이 닿았다. 따스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클로이는 그에게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아랫배를 부드럽게 감싸며 은은하게 두 눈을 휘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결에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온실 안을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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