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 특별한 사람
그해의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클로이는 창밖으로 가만히 손을 내밀어 내리는 눈을 느꼈다. 차가운 눈송이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포스스 녹아 내렸다.
‘첫눈…….’
이상했다. 그저 내리는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만으로, 시린 감각이 피어올랐다.
‘기분 탓이겠지.’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굉장히 특별한 날이었다.
“황후 폐하! 방금 막 마차가 도착했대요!”
시녀들은 모두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클로이도 그녀들과 함께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황후궁의 건물 앞에 멈춰선 마차에서 누군가 내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앙증맞은 얼굴을 한 그녀는 다름 아닌 베스티였다. 하얀 눈이 쏟아지던 그 겨울날, 베스티가 돌아왔다.
“클로이……!”
소복하게 쌓인 눈길을 달려온 그녀가 클로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그녀에게 뛰어왔다. 클로이는 제게 달려와 와락 안기는 베스티를 양팔로 포옥 그러안아 주었다.
“어서 와, 베스티.”
“이제는 클로이가 아니라 황후 폐하라고 불러야 하구나.”
그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클로이를 올려다보며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캐롤라인 공녀는 황후 폐하만 보이나 봐요. 우리도 좀 봐 주세요.”
클로이의 시녀들은 모두들 베스티의 친구이기도 했다.
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를 남매로 두었으나 끔찍하게 싫어하는 아멜리아 케니스. 여기저기 재미난 소문을 몰고 오는 사교계의 중심 로델 밀러.
스스로 칭하기를 황후 폐하의 열혈 광신도라는 제이시 글로아. 털털한 성격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두루두루 사랑받는 루나 트라비아.
베스티의 소개로 처음 인연을 가졌던 그녀들은 클로이가 황후가 되기 전부터 황후의 예비 시녀를 자처하더니, 지금까지 황후궁에 남아 주었다.
“이제는 캐롤라인 공녀가 아니야. 그냥 베스티라고 불러 줘요, 다들.”
그리고 클로이의 다섯 번째 시녀가 되어 줄 베스티는 그녀들을 향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을 겪어서일까. 다시 만난 그녀는 한층 더 성숙해진 느낌을 주었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베스티.”
클로이는 그녀의 양손을 꼬옥 맞잡으며 속삭였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아요.”
많이 힘들지 않았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으며 말했다.
“모두 아버지가 잘못한 일인 걸.”
물론, 이따금씩 울적한 표정을 보일 때도 있었다.
“난 그냥…… 다리아 언니에게 미안할 뿐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모두 괜찮노라 씩씩하게 말했다.
“베스티의 도움이 필요해. 내가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줘.”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베스티는 키득키득 웃으며 두 손을 내저었지만, 클로이는 그녀야말로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베스티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황궁에서 지낸 시간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시간들을 황궁에서 보냈잖아.”
처음 다리아를 따라 그녀의 시녀로 황궁에 들어왔을 때, 베스티의 나이는 열 살 남짓이었다. 황후궁의 사람들 중 누구보다 황궁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레이몬드는 베스티가 황후궁에서 함께 지내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다행히도 황후궁의 사람들은 모두들 아무런 편견 없이 베스티를 맞이해 주었다.
“그래도 참 다행이에요. 이제 베스티가 제법 적응한 것 같거든요.”
늦은 밤, 클로이는 레이몬드의 품에 안겨 낮에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렸다.
“오늘은 눈 놀이를 했어요. 아멜리아가 눈을 굴려 사람 모양을 내고, 다 함께 꾸며 주었지요.”
“내게는 매일 바쁘다면서 다른 이들과는 눈 놀이할 시간도 있고. 서운한데, 클로이?”
레이몬드는 부쩍 투덜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결혼을 하면 남자는 아이가 된다던, 그 옛날 엘리야 젬마 부인의 말이 옳았다.
“바쁜 건 정말이었어요. 곧 다가올 신년제 때문에 모두가 정신이 없어요. 잠시 짬이 났던 것뿐이에요.”
“안 되겠어. 네 궁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내가 대신 그 자리에…….”
“말도 안 되는 말씀 말아요, 레이몬드.”
클로이가 정색하며 말하자 레이몬드는 곧바로 울상이 되었다.
“정말 너무하군. 이렇게까지 바쁠 건 없잖아. 업무가 많다면 네 사람들과 일을 나눠 해. 그러라고 네 시녀들이 녹을 받아먹는 거야. 예전 다리아가 어떻게 황후궁의 업무들을 네게 넘겼는지 기억나지 않아?”
“그녀는 애초에 황후의 자리에 미련이 없었으니까요. 내게 일을 가르쳐주겠다는 명목도 있었고요.”
물론 다리아가 사교 활동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세를 불리는 것을 꺼려했던 그녀의 숙부 아놀드 캐롤라인의 겁박 때문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황후의 자리에 미련이 없었던 그녀는 그녀가 해야 했던 최소한의 일만을 했었다.
어쩌면 그녀는 황궁에 처음 들어오던 순간부터 언젠가 레이몬드와 다시 결별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최소한의 활동만을 해 왔던 덕분에, 클로이는 보다 수월하게 이 자리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이몬드. 나는 정말 잘 하고 싶어요.”
클로이는 잔뜩 속상해 보이는 레이몬드의 눈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여 주었다.
“황후의 자리는 레이몬드에게 받았지만,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내 몫이니까요.”
“속상하군. 너를 빼앗긴 느낌이야. 제국에게.”
“레이몬드야말로 아스타 제국 그 자체잖아요.”
하다못해 제국에게마저 투기를 하고 있는 레이몬드가 귀여워 클로이는 웃음이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에도 레이몬드의 표정은 쉬이 펴지질 않았다.
“이번 주말엔 반드시 시간을 비울게요. 하루 종일 함께해요.”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레이몬드가 심통이 난 표정으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지난 주말에도 함께 보내기로 했는데 못 했잖아.”
“아, 그야 헤지스 공작이 방문해서…….”
“망할 늙은이. 틀림없이 의도적이었던 거야.”
아드리안 헤지스 공작은 종종 클로이를 찾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갔는데, 자신의 철학 이외에도 제국의 내치와 관련된 많은 가르침을 주곤 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언제나 그를 탐탁지 않아 했다.
“감히 황제의 신혼 생활을 이렇게 방해하다니. 그 늙은이가 겁을 상실한 거지.”
“이번 주말에는 헤지스 공작이 방문하더라도 돌려보낼게요.”
잔뜩 뾰로통해 보이는 그를 달래기 위해 클로이는 양 팔을 그의 목에 감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이러다 내가 사랑하는 클로이는 사라지고 황후 클로이만 남을 것 같아서 걱정이야.”
“레이몬드가 사랑하는 클로이와 아스타 제국의 황후 클로이는 둘 다 나인걸요.”
클로이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아랫입술 위로 입을 맞추었다.
* * *
그러나 약속했던 것과 달리 돌아온 주말에도 레이몬드는 클로이와 함께할 수 없었다. 그 전날, 귀족 의회에서 새로 제출한 법안을 검토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법안은 황궁의 내부 살림과 관련된 것이라 명백하게 그녀의 영역이었다.
결국 레이몬드는 끼어들지 못하고 홀로 분노를 삼켜야 했다. 세상이 전부 손을 잡고 자신의 신혼 생활을 방해하는 기분이었다.
결국 주말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주일이 시작되었을 때, 레이몬드의 불만이 최고조에 다다랐다.
그토록 사랑하던 그녀와 드디어 결혼을 했건만, 매일 공부와 업무에 치이느라 신혼조차 제대로 즐기지 못하다니!
결국 참다못한 레이몬드는 조금이라도 클로이와 함께하겠다며, 자신의 업무들을 잔뜩 들고 그녀의 집무실에 찾아왔다.
“이게 다 뭐예요?”
“오늘부터는 이곳에서 업무를 볼 거야.”
“네? 레이몬드의 집무실은 어떡하고요?”
“내 부인께서 어찌나 바쁘신지 자꾸만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잖아.”
누가 들으면 클로이가 그를 독수공방시켰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다. 비록 낮에는 서로의 업무를 보느라 바쁘지만 그래도 매일 밤 함께했는데 말이다.
클로이는 작게 웃으며 물었다.
“이러면 불편하지 않아요?”
“전혀.”
레이몬드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떡하니 소파 앞에 앉아 자신의 업무들을 쌓았다. 하긴, 그는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불편함은 황제를 찾아 헤맬 그의 보좌관들의 몫일 테니.
자신의 공간 안에 레이몬드가 머무르고 있다는 의식이 들자, 클로이는 몰아치는 과로에 힘들었던 몸이 조금씩 평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클로이는 레이몬드를 향해 작게 눈웃음을 쳐 주고는 다시금 서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막 완성된 계획안에는 이제 황후의 인장만 찍으면 되었다.
“잠깐, 클로이. 도장을 거꾸로 찍고 있잖아.”
“어? ……그러네요.”
막 종이 위에 인장을 찍던 그녀는 퍼뜩 놀라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로 저었다. 레이몬드는 그 모습이 썩 사랑스럽다고 여겼다.
“집중이 흐트러졌나 봐요. 아이참, 이 서류는 다시 작업해야겠네.”
시무룩하니 내려가는 입꼬리도 사랑스럽다. 입 맞추고 싶어. 슬금슬금 피어나는 감각에 레이몬드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게 참 문제였다. 그녀와 같은 공간에만 있으면,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입 맞추고 싶어지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그녀의 책상 위를 짚었다.
“레이몬드?”
도장을 잘못 찍어 우울해하던 그녀는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레이몬드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녀의 얼굴 위로 자신의 그림자가 졌다. 꼭 입 맞추고픈 붉은 입술 위에도. 그것이 레이몬드의 음습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서류만 보지 말고.”
금방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듯 느른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깔렸다.
“나도 좀 봐 줘, 클로이.”
느릿하게 뻗어나간 손끝이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순순히 자신의 손길에 따라 턱 끝을 들어 올리는 그녀의 모습이 그를 들끓게 만들었다. 그대로 입술을 맞대려는 찰나였다.
툭, 투욱. 손끝 위로 뜨겁고 촉촉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피……?”
“네?”
클로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인중을 타고 코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 피가 나잖아, 클로이!”
경악한 레이몬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자신의 소매로 그녀의 코를 막았다.
“레, 레이몬드? 답답해요…….”
“의사를 불러! 당장!”
그가 바깥을 향해 외쳤다. 하얀 소매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클로이는 몽롱한 표정으로 그에게 붙잡힌 채 두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황후 폐하!”
놀란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재빠르게 하얀 수건과 물이 담긴 대야를 가져왔다.
“폐하, 소매를 떼 주시면…….”
시녀의 말에 레이몬드는 소매를 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주르륵 흘러내리는 그녀의 코피 때문에 그는 공황상태가 되어 버렸다.
“피,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어릴 적 레이몬드는 전장에서 그 많은 사람들의 피를 보았는데도, 단 한 번도 피가 무섭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얼굴에서 흐르는 이 작은 코피가 레이몬드를 미치게 만들었다.
“페하, 소매를 떼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옷이 더 더러워집니다.”
“하지만 황후의 코에서 피가 계속 나고 있질 않더냐.”
이미 그의 옷은 얼룩덜룩하니 피에 젖어 망가진 지 오래였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와중, 황궁 의사가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황후 폐하!”
의사가 도착한 뒤에야 레이몬드는 간신히 그녀를 의사에게 맡기고 한 발짝 물러났다.
의사는 능숙한 솜씨로 그녀의 콧구멍에 자그마한 솜을 말아 넣고, 깨끗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황후의 몸에서 피가 나다니!”
“아무래도 과로를 하신 듯합니다.”
의사는 시녀들이 가져다준 차가운 얼음으로 클로이의 콧대를 꾹꾹 눌러 주며 답했다.
“과로?”
레이몬드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가늘어졌다.
“과로라니, 그런 것으로 피가 난단 말이냐? 누군가 위험한 독을 썼다거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폐하께서는 원체 건강하신지라 이런 경우가 없으시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피로가 중첩되면 더러 코피를 흘리기도 합니다.”
“피로가 중첩…….”
레이몬드는 가만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의 말마따나 최근의 클로이는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매일 공부와 업무에 빠져 있었다. 저 가녀린 몸이 피로를 참지 못하고 끝내 피를 흘리다니……!
“클로이…….”
레이몬드는 그녀의 옆으로 가 무릎을 꺾었다. 그러고는 비슷해진 눈높이의 그녀를 애절하게 바라보며 작은 손을 덥석 붙잡았다.
“고작 피로 따위가 네 몸을 위협하도록 내버려 뒀다니. 나 스스로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어.”
“레이몬드? 왜 그러세요? 이건 그냥 코피일 뿐이에요.”
당황한 클로이가 그를 만류하려 하였지만, 이미 절망에 휩싸인 레이몬드는 음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몸에서 피가 날 정도라면 굉장히 고통스러운 상태란 거겠지. 내가…… 어떻게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너를 지켜줘야 할 내가…… 그것도 모르고…….”
그가 너무나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기에, 그녀의 시녀들 또한 덩달아 심각한 분위기가 되었다.
‘아니, 이건 고작 코피인데…….’
클로이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어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 레이몬드는 끝내 자신의 입술을 짓씹으며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엾게도…… 이젠 몸까지 떨고 있구나. 클로이, 어째서 내게 힘들단 걸 말하지 않았어? 내가 못 미더웠나?”
“그런 게 아니…….”
“하긴, 못 미더울 만도 하지. 네 몸 상태 하나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레이몬드!”
결국 참다못한 클로이가 목소리를 높이며 그를 밀어냈다.
“나는 괜찮아요! 이건 정말 그냥 흔한 코피일 뿐이라고요! 이제 그만하세요!”
그녀의 일갈에 마지못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레이몬드가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거구의 사내가 기운 빠진 모양을 하고 있으니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클로이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어떻게든 클로이를 저 업무의 파도에서 꺼내 주어야 해.’
하지만 그런 클로이를 보며 레이몬드는 속으로 그녀 몰래 의지를 불태웠다.
코피 사건이 일단락된 뒤, 클로이는 코피에 젖어 엉망이 돼 버린 서류들을 하나하나 다시 훑어보았다.
‘아이, 속상해. 여기랑 여기는 다시 해야겠네. 오늘은 잠을 자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클로이가 서류를 훑어보는데 끔뻑끔뻑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허물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책상 위에 엎어진 채로 잠들고 말았다.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던 그녀를 응접실 소파에 앉은 채 지켜보던 레이몬드는 가만히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자박자박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제가 다가온 것도 모른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레이몬드는 조심스럽게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로 걸쳐 주었다.
“클로이, 너는 어째서 이토록 모든 일에 열심인 걸까.”
그녀가 조금만 더 약은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다못해 황후로서의 공부를 마칠 때까지라도 좋으니 최소한의 업무만 한다면…….
그녀를 가르치는 학자들은 모두들 그녀의 빠른 배움에 감탄했다. 그러나 아무리 배움이 빠르다 하여도 레이몬드가 황제가 되기 위해 십 년이 넘도록 배워 온 것들을 단기간에 익혀 내기란 어려웠다.
지금 이렇게 하루하루를 소화해 내는 것만으로도 대견한데, 쓸데없이 책임감이 강한 그녀는 황후의 업무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행여나 자신이 제 몫을 하지 못해 레이몬드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하는 모습이 그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조금은 내게 기대고 쉬어 가면 좋을 텐데.”
레이몬드는 그녀가 다시 작성하다 만 서류들을 힐긋 살펴보았다.
* * *
이튿날 아침, 클로이는 레이몬드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내가 왜 여기에……?”
분명 잠이 든 기억이 없는데 그의 침대 위에 있으니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그러던 차에 이불 속에서 굵은 팔뚝이 삐져나와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조금 더 누워 있자, 클로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레이몬드가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잠시만요, 레이몬드. 저 어제 분명히 책상 앞에 앉아서 서류를 훑고 있었는데…… 꺄악!”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클로이는 곧바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에 작은 비명을 지르며 이불 속으로 미끄러졌다. 단단한 가슴과 두 팔이 그녀를 가득 그러안았다.
“네가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기에 내가 이곳으로 데려왔어.”
그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를 스윽 쓰다듬었다.
“아…….”
클로이는 민망한 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혹시…… 레이몬드가 나를 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래. 여전히 가볍더군, 내 여자는.”
“으아…… 그럼 시녀들이나 복도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본 건…….”
“다들 봤지.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얼굴로 내 품에 안겨 새근거리는지.”
“이럴 수가…….”
두 눈을 질끈 감아 내리는 그녀의 이마 위로 촉촉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놀라 다시 눈을 뜨자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 레이몬드가 씨익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앞으로는…… 그런 일이 있을 땐 그냥 저를 깨워 주세요.”
“깨울 수 없었어. 너무 곤히 자고 있었으니까.”
“다들 속으로 욕했을 거예요. 체통도 없는 황후라고요.”
“그럴 리가. 다들 속으로 너를 우러러 봤겠지. 잠든 모습마저도 미칠 듯이 사랑스러웠으니까.”
“그건 레이몬드의 눈에나 그렇고요!”
한참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잠이 깬 클로이는 어제 살피다 잠든 서류를 다시 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가려고?”
“어제 보던 서류들, 오늘 오후까지는 다시 검토해야 해요.”
“네가 말한 서류가 이것들을 말하나?”
레이몬드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탁자 위에서 서류뭉치를 들고 흔들었다.
“이건……?”
그것을 받아든 클로이는 레이몬드가 자신을 대신해 서류들을 다시 작성한 걸 알아챘다.
“레이몬드! 어째서 이런……!”
“너를 도와주고 싶었어.”
“하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을 레이몬드에게 미뤄 버린 꼴이 되어버렸잖아요. 정말 죄송해요.”
“미안해할 것 없어. 나를 위해 한 거니까.”
“네?”
“내 부인의 건강에 문제라도 생기면 모두 내 피해잖아. 안 그래, 클로이?”
레이몬드는 제게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클로이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으며 팔을 뻗었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몸을 끌어안은 채 얼굴 위로 촉, 촉, 입을 맞추며 속닥거렸다.
“오늘 하루는 함께 쉬자, 클로이.”
“쉬, 쉬다니요. 그럴 순…….”
“황명을 내렸어. 오늘만큼은 황궁의 어느 누구도 업무를 할 수 없다고.”
여상하게 나간 그의 말씨에 클로이가 돌연 몸을 굳히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런 게 어딨냐고 따지려던 클로이는, 곧바로 그가 황제라는 것을 상기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권력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오늘은 네가 제일 하고 싶은 걸 하자.”
“업무를 보고 싶어요.”
“그건 안 돼.”
“그럼 도서관에서 책을…….”
“또 그 지루한 제국법전이나 회의록 따위를 읽을 생각은 아니겠지?”
레이몬드가 눈썹을 단호하게 치켜뜨며 물었다. 클로이는 내심 뜨끔해져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나요?”
“이 황궁에서 내가 모르는 건 없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하듯이 말했다. 그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결국 클로이는 오늘 하루만큼은 그의 말대로 다른 일을 해 보자고 마음을 놓았다.
‘내가 해 보고 싶은 것…….’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레이몬드의 눈치를 스윽 살폈다. 하고 싶은 것을 찾은 눈치였다.
“뭔데? 무엇이든 말해.”
“거리를 걸어 보고 싶어요.”
“뭐?”
뜬금없는 그녀의 요구에 레이몬드는 조금 당황했다.
“얼마 전 읽었던 책에서 황제와 황후가 손을 잡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장면이 있었어요. 제국민들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해 시찰하는 거긴 했지만…… 나도 레이몬드랑 같이 손잡고 거리를 걸어 보고 싶어요.”
“대체 무슨 현실성 없는 책을 읽은 거야?”
“아, 그게…….”
클로이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아멜리아가 가져온 책인데, 요즘 유행하는 소설이래요. 평범한 귀족 영애가 정체를 숨긴 황제를 위기에서 구해 주고 서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긴데…… 저도 시간이 없어서 전부 읽어 보지는 못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군. 애초에 황제가 위기에 빠질 일이 어디 있지? 나 정도 되는 실력이 아니라면 친위대가 항상 뒤따를 텐데.”
“……역시 안 되겠지요? 위험하기도 할 테고.”
클로이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것을 보자 레이몬드의 마음이 약해졌다.
“내가 함께 간다면 위험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가 클로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 외모를 가리지 않는다면 모두들 너를 알아보고 몰려들 거야.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편하게 거리를 걷지는 못할 테고.”
“그럼 변장을 할까요?”
순간 클로이의 두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변장?”
“네, 다른 사람들이 저희를 알아보지 못하게 가리는 거예요!”
아무래도 그 ‘변장’이란 걸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레이몬드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건 또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책에서요!”
“음…….”
레이몬드는 잠시 불안한 얼굴을 하였으나 곧바로 생각을 정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뭐. 내가 옆에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려고.”
어지간한 호위 기사들을 대동하고 다니는 귀족들보다도, 자신과 함께 걷는 클로이가 훨씬 더 안전할 것이리라. 그렇게 확신한 레이몬드는 오늘 하루만큼은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침 식사를 한 후 각기 변장을 하고서 다시 만났다.
“어때요, 레이몬드?”
“음…….”
레이몬드는 변장을 시도한 클로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갈색 가발을 쓴 그녀는 무늬 없는 회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변장을 하였어도 그녀의 미모만큼은 가려지지 않았다.
“얼굴을 조금 가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걱정 마세요! 안 그래도 베스티가 좋은 걸 챙겨 줬어요!”
클로이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두툼한 망토를 걸쳤다. 후드가 달려 있었기에 얼굴을 조금 가릴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모자 사이로 언뜻 비치는 얼굴이 완전히 가려지지 않아 레이몬드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 레이몬드의 것도 있어요.”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남성용 망토였다. 레이몬드는 군말 없이 그것을 받아 걸쳤다.
예상과는 달리 황제가 호위 없이 황궁 밖에 나간다는데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특히나 황제의 보좌관인 라트 후작은 냉담한 얼굴로 애꿎은 제국민들을 괴롭히지나 말라며 충고하곤 사라졌다.
“이상하네요. 소설에서는 황제와 황후가 밖으로 나갈 때 보좌관들이 모두들 반대해서 밤에 몰래 변장을 하고 나갔었는데…….”
“그야 나는 보통의 황제들과 다르기 때문이지.”
레이몬드는 거만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잠시 그를 올려다보던 클로이도 결국 그를 따라 피식 웃으며 황궁 밖으로 나갔다. 거리에 나가자 쌀쌀한 공기 속에서도 들뜬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모두들 즐거워 보여요.”
“곧 있으면 신년제니까.”
그렇게 말하며, 레이몬드가 클로이의 손을 꼬옥 붙들었다. 클로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레이몬드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그랬잖아.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싶다며.”
레이몬드를 올려다보던 클로이의 양 볼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사랑스러웠다. 당장 입 맞추고 싶을 만큼.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느낀 것은 레이몬드뿐만이 아니었다.
망토를 뒤집어썼음에도 언뜻 비치는 그녀의 모습에 마주 오던 남자들이 얼굴을 붉히곤 했다. 일부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힐끔힐끔 훔쳐보기까지 했다.
레이몬드가 슬슬 짜증이 차오르던 차에, 잘 차려입은 남자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실례지만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남자는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레이몬드를 힐긋 쳐다보았다. 그리곤 그가 걸친 밋밋한 망토를 보며 조용히 비웃었다. 기민하게 그 기색을 알아챈 레이몬드가 표정을 무섭게 일그러뜨렸다.
“어디서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상대를 물어뜯을 듯 위협적인 레이몬드의 목소리에 능글맞게 웃던 남자가 퍼뜩 놀라 몸을 움츠렸다.
“수작이라니요? 나는 그저 이쪽의 레이디께 나눌 말이 있었을 뿐…… 그러는 그쪽이야 말로 누구길래 참견하는 겁니까?”
“내가 누구냐고 물었나?”
“레이.”
한 발짝 나서는 레이몬드가 꼭 사고를 칠 것만 같아서, 클로이는 조심스럽게 그를 붙들었다.
‘설마 여기서 자기 정체를 밝히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클로이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레이몬드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대신.
“이 여자의 남편이다.”
당당한 목소리로 클로이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외쳤다.
“남편……?”
그 말에 남자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클로이와 레이몬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니 남의 부인에게 추태 부리지 말고 썩 꺼져.”
뒤집어쓴 망토 사이로 자신만만하게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가 언뜻 비쳤다. 남자를 쫓아 버린 레이몬드는 잔뜩 의기양양해져서는 클로이의 손을 맞잡은 제 손에 힘을 더욱 세게 주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갑자기 정체를 밝히려는 줄 알고.”
“이것도 썩 나쁘지 않군.”
자꾸만 힐끔거리는 남자들의 시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질 뻔했지만, 그런 이들 앞에서 그녀는 제 여자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상당한 쾌감을 주었다.
레이몬드는 또 쫓아 버릴 남자가 없는지 두 눈에 힘을 가득 주고 주위를 홱홱 둘러보았다. 그러자 아까부터 힐끔거리던 남자들이 그의 매서운 시선에 놀라 모두들 줄행랑을 쳤다.
“눈에 힘 좀 빼요, 레이. 누가 보면 싸우러 가는 줄 알겠어요.”
“누구든 덤비라고 해. 내가 모조리 이겨 줄 테니.”
그 말에 클로이는 소녀처럼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간 웃음에 레이몬드도 눈에 힘을 풀고서 함께 미소 지었다.
“거리에 나오니 어때? 소설 속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가?”
“음…… 조금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책에서는 이렇게 걷다가 괴한을 만나기도 하고, 납치를 당하기도 하던데…….”
“납치?”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레이몬드가 돌연 스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감히 네게 그런 짓을 시도하는 이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두개골을 으깨 주겠어.”
“어휴, 참…….”
클로이는 더 이상 말을 더하는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은 느린 걸음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고마워요.”
불쑥, 그녀의 입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를 위해서 이런 불편함도 감수해 주고.”
“불편함이라니?”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잖아요. 시중을 들어줄 시종도 호위하는 기사도 하나 없이 이렇게 저와 둘이서 거리를 걷고 있다는 게.”
“으음…….”
레이몬드는 부정하는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가 기뻐하는 걸 보는 즐거움이 더 커. 너와 이렇게 여유롭게 걸어 본 것도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고.”
“처음 황궁 밖으로 나올 땐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길 기대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레이몬드와 함께 이렇게 평범하게 걷는 것도 굉장히 특별한 일인 것 같아요.”
레이몬드를 향해 몸을 돌린 클로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내게 특별한 하루를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레이.”
“……나도.”
그 해사한 웃음에 잠시 들끓는 신음을 삼키며, 레이몬드는 간신히 대답했다.
“나도 고마워. 네가…… 나의 특별한 사람이 되어 주어서.”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건, 레이몬드잖아요. 레이몬드가 내게, 사랑을 알려 주었잖아요.”
레이몬드는 그녀에게 참 많은 사랑을 알려 준 남자였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그녀를 사랑해 주고, 그녀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거기에 더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까지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게 이끌어 주었다.
“레이몬드야말로 내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에요.”
“클로이…….”
“사랑해요.”
클로이는 부드럽게 두 눈을 휘며 속삭였다.
오래 전에는 한마디 내뱉는 것조차 그토록 수줍고 조심스러웠던 말인데, 이제는 마치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흘러나왔다.
레이몬드가 좋았다. 그를 사랑했다. 매일, 매순간, 그와 함께 있음으로서 그 모든 시간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정말 많이, 사랑해요.”
“이곳이 밖이 아니었더라면…….”
레이몬드는 뒷말을 삼키며 느리게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나도 사랑해, 클로이.”
맞잡은 두 손에 힘이 가득 실렸다. 나란히 걷기 시작한 그들의 머리 위로 하얀 진눈깨비가 내렸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지만, 단단히 얽혀 있는 손과 손에서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 * *
“오늘 어땠어요, 폐하? 황제 폐하와의 나들이는 즐거웠나요?”
“괴한은 안 나타났나요? 황제 폐하라면 틀림없이 엄청난 솜씨로 괴한들을 물리쳐 줬을 텐데.”
“케니스 영식 급의 잘생긴 남자가 나타나 말을 걸지는 않았어요? 왜 꼭 소설에서 보면…….”
클로이가 황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이것저것 물었다. 반짝거리는 여러 쌍의 눈동자들을 보고 있으려니, 클로이는 차마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음…….”
그녀가 망설이며 대답을 회피하자, 시녀들의 눈빛이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여,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요?”
“혹시…… 변장을 한 외국의 왕자님이라도 만난 건…….”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그녀들도 최근 유행하는 소설 속에 푸욱 빠져 버린 모양이다. 클로이는 푸흡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보다 은밀한 목소리로 그녀들에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비밀이야.”
“황후 폐하!”
“정말 너무해요!”
그녀의 시녀들은 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달라며 아우성을 쳤지만 그녀는 그저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실망하는 것보다는 상상 속에서 기대하는 게 더 즐겁겠지.’
클로이는 그런 시녀들을 내버려두고서 자연스럽게 탁상 위에 올려 있던 서류철로 손을 가져다 대려고 했다.
“이건 안 돼요.”
베스티가 엄한 목소리로 그녀의 서류철을 낚아채며 말했다.
“오늘 하루 동안은 절대로 업무 금지라고요. 황후 폐하라 해도 말이에요.”
“맞아요.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폐하.”
“편하게 주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드릴게요.”
“하지만 아주 조금만…….”
너무나 강경한 그녀들의 반응에 클로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소심하게 말할 때였다.
“절대 안 돼요!”
그녀의 시녀들이 동시에 외쳤다. 시무룩해진 클로이가 두고 보자며 중얼거렸지만 다들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클로이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들의 말에 따랐다. 취침 준비를 마친 그녀는 레이몬드를 기다리며 창가에 앉았다.
낮에 내리던 진눈깨비가 어느덧 굵은 함박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온 세상을 새하얗게 뒤덮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클로이는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