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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1. 망각 (13/21)
  • 외전1. 망각

    헤어짐은 소리 없이 빠르게 다가왔다. 나의 결혼식 직후 곧바로 수도를 떠났던 대주교를 비롯한 다른 사제들과 달리 며칠 더 황궁에 머물렀던 레테였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늦은 여름날의 이른 새벽, 나와 레이몬드에게 이별을 고했다.

    “꼭 떠나야 하나요?”

    “클로이의 결혼식이 끝나면 떠나기로 했으니까요.”

    “그래도 성녀가 있어 나도, 황후도 즐거웠는데.”

    “제가 떠나도 두 사람 앞에 즐거운 일들이 가득할 거예요.”

    우리는 아쉬워하며 붙잡았으나, 레테는 부드럽게 눈매를 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이 희미한 옛 기억 속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정말 많이 아쉬워요.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성녀라면, 언제든지 환영할 테니 꼭 다시 방문해 주오.”

    “…….”

    레테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우리의 미래를 축복해 주었다.

    “클로이와 레이몬드, 두 사람이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마치 울듯이 서러운 미소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아스라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표정이 무엇과 닮았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나의 행복을 빌어주었던 레이몬드의 것과 닮아 있었다.

    ‘아…….’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씨익 말려 웃던 입꼬리. 황족처럼 오만한 태도.

    그래, 모두가 나와 닮았다고 입을 모아 말하였던 레테는, 레이몬드와 닮았다.

    “그럼 두 사람 모두, 안녕히.”

    나는 그녀의 작은 두 손을 가만히 맞잡았다.

    내 손목과 그녀의 손목, 그리고 내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레이몬드의 손목에 같은 모양의 가죽팔찌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맞잡은 손이 떨어지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레테!”

    나도 모르게 내게서 멀어지는 그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조금씩 멀어지던 그녀가 이내 그 자리에 멈추어선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도 사실 떠나고 싶지 않아요.”

    “레테……?”

    “클로이랑 레이몬드 곁에 남고 싶어요.”

    희미한 중얼거림이 언뜻 울음 속에 섞여 흘러나왔다.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뻗으려던 찰나, 그녀의 잇새로 알 수 없는 소리가 새나왔다.

    “한 번만…… 정말 딱 한 번만 나를 알아봐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

    “왜 나를 못 알아봐요?”

    “레테, 그게 무슨…….”

    레테는 손을 뻗어 내 옷소매를 붙잡은 채 아이처럼 웅얼거렸다.

    “나는 보자마자 두 사람을 알아봤는데…….”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한가득 차올라 있었다.

    ‘에스델……?’

    아주 우스운 소리이지만 그 순간, 나는 레테를 보며 내가 떠나보내야 했던 나의 작은 에스델을 떠올렸다.

    그 이름을 떠올림과 동시에 내 몸이 돌이 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내 몸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함께 그 자리에 박제되었다.

    소슬소슬 불어오던 늦여름의 새벽바람도, 하늘하늘 흩날리던 가지 위의 나뭇잎도, 상쾌하게 지저귀던 아기 새의 노랫소리도. 모두 함께 멈춰 버렸다.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오직 레테만이 서럽게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이제 그만 나를 알아봐 주면 안 되나요? 어머니, 엄마, 아빠…….”

    “……!”

    “꼭 한번 이렇게 불러 보고 싶었어요. 나, 에스델이에요. 당신이 죽는 순간까지 사랑해 주었던.”

    하지만, 하지만 에스델은…… 그 아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나와 닮은 얼굴을 하고, 레이몬드와 닮은 얼굴을 가진 이 아이가, 나와 레이몬드의 행복을 누구보다 빌어 주었던 이 아이가. 나의 작은 에스델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제발, 제발 한 번만 내 이름을 불러 주세요, 엄마…….”

    그녀를 안아 주고 싶었으나 딱딱하게 굳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고 싶었으나 뻣뻣하게 굳은 혀 또한 움직이질 않았다.

    “나 여기 있잖아요. 당신들의 에스델이 여기 있잖아요. 그런데 왜 날 몰라보나요…….”

    말해 줘야 하는데, 에스델에게.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혼자 남겨 두어 얼마나 미안했는지, 말해 줘야 하는데.

    “사랑해요, 어머니. 아버지, 정말 많이 사랑해요. 그리고 당신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나도 알아요. 절대 모르지 않아요.”

    안아 줘야 하는데,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작은 몸을. 가녀린 몸을. 안아 줘야 하는데…….

    소리를 내려 할 때마다 목구멍이 타오르듯 뜨거워지며 고통이 나를 덮쳤다. 손끝을 움직이려 할 때마다 생살이 갈라지듯 날카로운 통각이 내 몸을 할퀴며 지나갔다.

    “그러니까 두 분은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델.”

    굳어 있던 목청에서, 어렵사리 소리가 흘러나왔다. 간신히 쥐어짠 에스델, 나의 작은 아이의 이름자가.

    “에스…… 델…….”

    “……!”

    간신히 입 밖으로 나온 소리에 레테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곧바로 푸스스 두 눈을 휘었다. 포근한 그 눈웃음에 가슴이 미어졌다.

    “나를 알겠어요?”

    그렇다고, 너를 알아보겠다고 대답해 주어야 하는데.

    “아, 어떡해…….”

    레테가 울었다. 아니, 나의 작은 에스델이 양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었다. 에스델의 얼굴은 작은 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한 번쯤은 나를 알아봐 주길 바랐어요. 그런데 이렇게 그 소원이 이루어졌잖아요. 너무 기뻐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도…….”

    에스델은 씩씩하게 눈물을 훔쳐내고서 다시금 고개를 들어올렸다. 발간 눈가가 서럽게 부어 있었다.

    “미안해요. 나는 두 사람과 함께하지 못해요. 라나 신과 약속했거든요.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기로.”

    돌아가다니. 대체 어디로.

    “나는 죽는 게 아니에요. 사라지는 것도 아니에요. 라나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두 분 모두 울지 마세요.”

    거짓말. 이건 거짓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의 에스델이 이토록 서럽게 울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나를 낳아 줘서, 사랑해 주고 아껴 줘서, 이렇게 아직까지 잊지 않고 결국엔 알아봐 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어머니, 아버지…….”

    “레테, 이만 떠나야 합니다.”

    그때, 단정한 목소리가 레테를 불렀다.

    “당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짧은 사이 레테의 몸은 점점 작아지고 희미해졌다. 꼭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아스라이.

    에녹 경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안아들었다.

    “클로이, 그리고 레이몬드.”

    레테는 에녹 경에게 안긴 채로 우리의 눈물 젖은 뺨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지친 듯이 그의 품에 몸을 기대어 서글픈 눈으로 우리를 향해 웃었다.

    “망각은 내가 두 사람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에요. 에스델은 이제 잊고, 두 사람을 축복할 새로운 생명과 함께 행복해지세요.”

    잊다니. 싫어. 절대 그럴 순 없어.

    에스델…….

    한때 나의 유일한 온기였던 너를, 내가 어떻게 잊는단 말이니.

    “모두 잊을 거예요. 고통스러웠던 과거도, 거슬러 올라와야 했던 한차례의 죽음도, 두 분을 괴롭혔던 남자도…… 그리고 나의 존재로 인한 슬픔도, 모두.”

    어떻게…… 잊는단 말이니…….

    “사랑해요. 그리고 정말 많이 감사합니다, 두 분. 나의 어머니…… 아버지…….”

    그 말을 끝으로 레테는 에녹 경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레테의, 나의 작은 에스델의 얼굴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안 돼, 에스델……. 에녹 경, 부디 에스델을 내게서 데려가지 말아요. 안 돼요, 안 돼……. 제발…….

    나의 애타는 부르짖음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매정하게 몸을 돌렸다. 저 멀리 그들이 사라져 갔다. 나의 작은 에스델이 영영 떠나갔다.

    …….

    …….

    영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깜빡 깜빡.

    나는 촉촉한 속눈썹을 깜빡이다가 문득 젖어 있는 소매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소매가…… 왜……?”

    “클로이? 눈이 빨개. 운건가?”

    내가 울었다고?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지르자 말간 눈물이 묻어났다. 눈가뿐만 아니라, 온 얼굴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클로이?”

    재차 나를 부르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가 역시 꼭 운 것처럼 붉었다.

    “……그러는 레이몬드도 눈가가 붉어요.”

    마치 유령이 다녀간 것처럼 정신이 붕 떠 있었다. 가슴이 허전했다.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들어가지. 새벽 공기가 쌀쌀해. 곧 가을이 오겠군.”

    “그러게요, 가을이…… 다가오네요.”

    가을, 이라는 낱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굉장히 슬픈 기분이 들었다. 가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안으로 모시지, 나의 황후.”

    그러나 나의 불안은 곧바로 내게 다가오는 레이몬드의 따스한 온기로 인해 사그라들었다.

    * * *

    “왜 하필 난 ‘망각’인 걸까. 다른 거면 좋았잖아. ‘행복’이라거나, ‘희망’이라거나…….”

    레테는 에녹의 품 안에서 불평했다. 그러나 발랄한 목소리로 불평하는 것과 달리 그녀의 두 눈에선 끊임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그들의 앞에서 정체를 밝혔나요, 에녹은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깎아 가면서까지 그들의 앞에서 정체를 밝힌 이유를 모르지 않았으니까.

    “있지, 에녹. 에녹은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당신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는 곳으로 가려 합니다.”

    “피이, 거짓말. 그런 곳이 어딨어.”

    뾰족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는 레테의 모습에도 에녹은 웃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얼굴에 머물렀던 웃음을 더 이상 지을 수가 없었다.

    “있습니다, 그런 곳.”

    “말도 안 돼. 나는 ‘망각’이라고.”

    “…….”

    레테를 안은 그의 두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 힘들다…….”

    “내가 당신을 놓치지 않고 있을게요. 그러니 쉬어요, 레테.”

    “으응…….”

    레테의 몸이 점차 투명해져 갔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워진 그 몸을 억지로 끌어안으며 에녹은 하염없이…… 정처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또 걸었다.

    “레테. 마지막으로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 줄래요?”

    “뭔데?”

    “……을, 망각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레테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에녹의 행복이라면.”

    “…….”

    에녹의 녹색 눈동자가 혼잡하게 흔들렸다.

    “노래 불러 줘, 에녹.”

    “…….”

    “요람가, 듣고 싶어. 내가 편히 잠들 수 있게.”

    에녹은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러고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벌렸다.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 천사들의 성이 있어요.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클로이가 불러 주는 거랑 같은 노래네.”

    “……같은 노래를 들으며 자랐으니까요.”

    “으응, 그렇구나…….”

    “…….”

    “계속 불러 줘…….”

    레테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

    …….

    정처 없이 걷던 에녹 브란스는 문득 걸음을 멈추어 섰다.

    “뭐지…….”

    정신이 몽롱했다. 방금 전까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어딜 가고 있었는지, 그리고……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가 않았다.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고개를 내리자 목에 매달린 작은 로켓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언제부터 지니고 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가만히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물건이었다.

    로켓을 열어 보았으나 그 안에는 흔한 초상화 하나 없었다.

    에녹 브란스는 한 손으로 목걸이를 꼬옥 쥐었다. 무엇이라도,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좋으니 기억나길 바라며.

    그러나 기억나는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 * *

    ‘누구라도 브란스 경의 얼굴을 한번 보게 되면 잊지 못할걸요.’

    그녀는 아름다이 웃으며 말했다.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던 에녹 브란스는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누구라도 잊지 못할 거라고? 정작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에녹 브란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에녹은 남쪽의 소도시 아스란타에서 태어났다. ‘브란스’라는 성은 본디 그의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그저 에녹이었다.

    특출난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그에게 딱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옆집에 살던 작은 소녀였다.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어미로 둔 작은 소녀는 어린 에녹에게 굉장히 특별한 존재였다.

    ‘그럼 약속할래? 나중에 자라면 우리…….’

    화사한 봄날, 샛노란 원피스를 입은 그녀에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어린 아이들의 흔한 소꿉장난이었다. 평민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소꿉장난이 미래의 언약이 되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어린 에녹과 작은 소녀는 형편도 나이도 사는 곳도 비슷했기에 별다른 이변만 없었더라면 그들 또한 평범하게 어른이 되어 선량한 부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리 없이 다가온 비극은 작은 소녀와 그녀의 어미를 그대로 덮쳐 버렸고, 어린 에녹은 그렇게 힘없이 소녀를 잃어야 했다.

    ‘가넷슈 자작가로 갔다고…….’

    들려오는 풍문 속에서 어린 에녹은 그녀의 자취를 쫓았으나, 어린 그의 눈에는 한없이 웅장하게만 보이는 가넷슈 저택의 규모에 기가 죽고 말았다.

    ‘귀족인 아버지를 두었으니 그 아이도 이제 귀족이 되는 걸까.’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들었던 귀족이라는 존재를 어린 에녹은 한 번도 만나 보질 못했다. 그렇기에 귀족이란 존재가 더욱 신성하게 여겨졌다.

    매일 저를 따라다니던 옆집의 작은 소녀는 이제 너무나 먼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에녹은 소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어린 에녹은 평민으로 귀족의 옆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찾았다. 그는 기사가 되기로 다짐했다.

    이따금씩 그의 동네에 찾아오곤 하던 방물장수는 실력만 출중하다면 평민이어도 기사가 되어 귀족의 곁을 지킬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 아이의 기사가 되고 싶었다. 그녀를 지키는 기사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결심한 에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스승을 찾는 일이었다.

    에녹은 소도시 아스란타의 제일가는 유지이자 한때 수도의 이름난 기사였으나 이제는 퇴역한 늙은 남자를 찾아갔다.

    그의 스승이 되어 주었던 퇴역 기사는 굉장히 괴팍한 성정의 소유자였지만, 에녹은 기쁘게 그의 수발을 들며 조금씩 배워 나갔다.

    에녹은 그에게서 검을 드는 법을 배웠고, 상대의 눈을 피해 몸을 운신하는 법을 배웠으며, 기사에게 필요한 예법과 소양을 배웠다.

    적당한 수련 끝에 가넷슈 자작가의 기사단에 입단할 계획이었다. 그의 실력이 조금만 모자랐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너무나 실력이 출중났던 에녹은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의 눈에 띄어 버리고 말았다.

    ‘스승님이 말씀하신 평민 아이가 너로구나, 고작 일 년 만에 스승님의 검술을 모두 해득했다는.’

    어느 날 예고 없이 나타난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는 고작 그보다 서너 살 많은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 고아한 행동거지와 위압적인 말투는 에녹과 남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이번엔 너를 내 손에 넣을 생각이란다.’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에녹이 태어나 처음 만나 본 귀족이었으며, 동시에 힘을 가진 귀족들이 어떤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지 알려 준 남자였다.

    ‘네가 손해 볼 일은 없어. 네 능력에 걸맞게 최고의 기사로 대우해 줄 테니까.’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러나 만약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주인을 섬기겠다면, 나는 너를 살려 두지 않을 참이야. 이 실력을 갖고 다른 이의 수족이 된다면 장차 내게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제아무리 실력이 출중난들, 어린 평민 소년이 제국에서 제일가는 귀족의 뜻에 정면으로 부딪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에녹은 대공성의 기사가 되었다. 귀족 출신의 기사들은 쉬이 하기 힘든, 온갖 더럽고 추악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며. 대공은 그에게 ‘브란스’라는 성을 사 주었다.

    ‘너의 미래에 투자하는 거지.’

    그는 평민 출신의 출중한 어린 기사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고, 어린 기사의 미래를 위해 귀족 사회에 편입시켜 주는 수고까지 마다않았다.

    그러나 에녹은 대공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제가 아닌 대공 스스로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어느 겨울날, 차가운 대공성에 작은 소녀가 나타났다. 대공의 손을 잡고 나타난 소녀를 발견한 에녹은 까무러치게 놀랐다.

    클로이…….

    그가 처음 기사가 되고자 하였던 이유인, 옆집의 작은 소녀였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러나 기억 속 한편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던 그의 작은 소녀였다.

    오랜 나날들을 대공성의 어느 작은 방 안에서만 머물던 그녀는 차가운 눈이 녹고 봄이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에녹이 그녀를 다시 발견한 곳은 대공성의 후원이었다.

    ‘괜찮습니까?’

    꽃을 꺾으며 돌아다니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그녀를 붙잡아 주었을 때.

    ‘누구세요?’

    그녀는 소심하게 자신을 힐끗거렸다. 육 년만의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그녀를 알아 본 에녹과 달리, 그녀는 에녹을 알아보지 못했다.

    ‘에녹…… 브란스입니다.’

    ‘아, 그럼 브란스 경…….’

    그녀는 수줍게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숙부님이 그랬어요. 기사님들을 부를 때는 이렇게 불러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며 마치 귀족가의 아가씨처럼 양손으로 치맛단을 슬쩍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

    그 순간 에녹은 오랫동안 굳어 있던 심장이 쿵, 하고 소리 내어 뛰는 것을 느꼈다.

    에녹은 제게서 뒤돌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봄바람에 살랑이며 하늘하늘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대공성에 머무르며 점차 소녀에서 여자로 자라나던 여덟 해 동안, 에녹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녹 이외에도 대공성의 여러 기사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토록 사랑스럽게 자라난 그녀를 감히 사랑하지 않을 수 있던 용기 있는 기사는 드물었다.

    다만, 에녹의 사랑은 다른 이들의 것보다 조금 더 짙은 감정이었다. 어린 날의 풋정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 대공을 향한 그녀의 맹목적인 사랑을 보며 에녹은 그녀에게 거리를 둔 채 그저 지켜만 보았다.

    그것이 에녹 브란스의 사랑이었다. 먼 거리에서 지켜보고, 지켜 주고, 응원하는 사랑.

    ……그러나 그 결과는, 미쳐 버린 그녀였다.

    * * *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오랜 염원 끝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키워 낸 평민 출신의 기사 에녹 브란스를 상당히 신뢰했다.

    하여, 황제의 가장 지근거리에서 황제를 보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에녹 브란스의 몫이었다.

    유난히도 달빛이 어둡던 어느 밤,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짙은 술 내음을 풍기며 명했다.

    ‘오늘 밤, 클로이를 내게 데려와.’

    ‘레이디 가넷슈를…… 말입니까.’

    ‘그래.’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 애에게 아이를 만들어 줄 참이야. 분명 기뻐하겠지.’

    술잔이 기울며 남자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사생아를 만들고 싶진 않았지만, 내 아이를 품은 그 애의 모습은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촉촉한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에녹 브란스는 그 고혹적인 자태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누구보다 찬란하고 빛이 나는 남자였다. 고작 평민 출신의 기사였던 자신 따위는 견주기 힘들 만큼, 위대한 남자였다.

    그래서 에녹 브란스는 감히 그 남자로부터 그녀를 어찌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시 마주친 그녀가 그토록 피폐한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영영 그러했을 것이다.

    ‘아이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그냥, 에스델을 만나고 싶은 거예요.’

    그녀는 오랜 기간 바라던 대로 사랑하는 남자를 황제로 만드는 데 일조했으나,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에녹 브란스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의 앞에 서 있다가, 불쑥 결심하고는 말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황제의 명을 어기고 그녀를 도운 대가는 혹독했다. 한쪽 눈을 잃고, 차츰 다른 한쪽 눈마저 아름답던 빛깔과 함께 시력까지 흐려져 갔다.

    그 와중에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었다…….

    그녀가 죽었다…….

    너무나 애틋하고 소중해서, 차마 다가가 보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았던 그녀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흐릿한 눈가로 뜨거운 울음이 번졌다.

    클로이 가넷슈의 죽음을 알게 된 그날은 에녹 브란스가 기억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눈물을 흘린 날이었다.

    차가운 감옥 안에서도 새 황제가 미쳤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죽은 여자의 시체를 안고 밤마다 광인처럼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는 꾸며 낸 것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에녹 브란스는 소문으로부터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커져 가는 그리움과 허무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축축한 지하 감옥을 벗어나 다시 세상의 빛을 본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푸르른 녹음처럼 아름답던 한쪽 눈과 함께 사랑하는 여자도, 주인의 신임도 모두 잃어버린 에녹 브란스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여자의 딸이 있다지요.’

    ‘서쪽 탑에 갇혀 있대요.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그 낡은 탑 말이에요.’

    ‘폐하께서는 대체 무슨 이유로 그 여자의 딸을 살려 둔 걸까요?’

    ‘듣자 하니 그 딸이 죽은 여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던데…….’

    그녀의 딸…….

    에녹 브란스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는 처참한 몰골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카일로스에게 붙잡혔다.

    그녀의 죽음 이후, 당연히 그녀의 아이도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일로스 루드비히가 그녀의 아이를 살려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이는 살아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더니, 갑자기 탑에 가둔 이유가 뭘까요?’

    ‘사생아이긴 해도 전 황제의 핏줄이잖아요. 불온한 세력이 생겨나기 전에 경계하는 게 아닐까요? 전황제와 각별했던 캐롤라인 공작이 그 아이를 달라고 요구했다잖아요.’

    ‘조금 더 지저분한 소문도 있어요. 그 여자를 못 잊은 황제가 그 딸을 세상과 격리시켜 조금 더 자랄 때까지 기다린다는…….’

    ‘세상에, 전 황제의 핏줄이라면 현 황제에게도 혈육일 텐데요.’

    ‘뭐,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니까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아이를 두고 지저분한 소문을 퍼뜨렸다.

    ‘어미를 닮았다면 틀림없이 요사스럽겠지요.’

    ‘아무렴요, 어미가 전 황제와 현 황제를 동시에 쥐고 흔든 희대의 요부잖아요.’

    ‘궁금하긴 하네요. 대체 어떤 미모길래…….’

    아니다. 그녀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한 남자의 욕심으로 희생당했던, 가엾고도 가엾은 평범한 여자였다.

    에녹 브란스는 클로이 가넷슈의 삶을 떠올렸다.

    참으로, 박복한 운명이었다.

    그는 그녀의 딸이 갇혀 있다는 탑으로 향했다. 황실의 경비는 예전만큼 삼엄하지 않았다. 황제가 미쳐 버린 뒤로 국력이 쇠함과 동시에 황궁의 위엄도 상당히 무너져 있었다.

    그 탑의 가장 꼭대기 층에서, 에녹 브란스는 어린 에스델을 만났다.

    ‘……!’

    그가 기억하는 어린 날의 그녀와 너무나 닮은 아이가 차가운 돌바닥 위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에스델.’

    아이는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을 도우러 왔습니다.’

    ‘누군데요?’

    ‘에녹…… 성은 없고 에녹입니다. 그렇게 불러 주면 됩니다.’

    에녹은 오래 전, 그가 사랑했던 클로이 가넷슈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린 그녀의 딸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 빙그레 웃었다.

    ‘날 이곳에서 꺼내 주는 건가요?’

    ‘네.’

    ‘그럼 따라 갈래요.’

    어린 에스델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 따스한 온기에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에녹은 어린 에스델과 함께 황궁을 탈출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일로스의 병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들을 피해 도망치는 나날들이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이게 뭐야. 맛없어요, 에녹. 이건 에녹이나 먹어.’

    ‘미안해요, 에스델. 그래도 조금은 먹어야지요. 저녁엔 진짜 맛있게 해 줄게요.’

    ‘피이, 거짓말…….’

    함께 맛없는 음식을 먹으며 식탁 앞에서 웃던 날들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거울 앞에 앉아 어설픈 솜씨로 그녀의 머리를 빗어 주던 그가 어느덧 능숙하게 긴 머리카락을 묶어 줄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에스델은 점차 아름다이 자라났다. 클로이 가넷슈의 살아생전 모습을 고스란히 닮은 채로. 어느 샌가 불혹의 나이를 앞두게 된 에녹은 흐뭇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망자의 신세를 벗어나 대륙 끝의 한적한 마을에 둥지를 튼 지도 어언 다섯 해가 다 되었다. 더 이상 황제의 병사들은 그들을 쫓지 않았고, 곧 제국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아무런 근심 없는 하루하루였다.

    곧 성년을 앞둔 아이는 마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처녀였다.

    아이를 훔쳐보며 얼굴을 붉히는 마을의 사내들을 보며 에녹은 이제 곧 아이가 짝을 만나 제게서 떠나갈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아이가 떠난다는 사실에 짙은 허무가 밀려왔으나, 아이와 함께했던 십여 년의 나날들이 썩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에녹은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처럼 평화롭던 어느 날, 아이가 짙은 열병에 시달렸다. 온몸에 붉은 반점이 오르고, 불덩이처럼 끓어오른 열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는 꼬박 열흘을 앓았다.

    그리고 열흘간의 긴 열병에서 깨어났을 때, 아이의 머리카락은 발끝까지 자라나 있었다.

    ‘괜찮습니까, 에스델?’

    ‘…….’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이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클로이…….’

    문득 아이의 잇새로 흘러나온 이름이 오랜 그리움을 품은 채 그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에녹은 클로이가 누군지 알아?’

    ‘그 이름은 어디서……?’

    에녹은 가슴을 뒤흔드는 동요를 애써 감추며 되물었다.

    ‘카일로스가 나를 보면서 항상 중얼거리던 이름이잖아. 그런데 내가 클로이를 본 것 같아. 꿈에서 내가, 그 여자였어.’

    아이는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중얼거렸다.

    ‘그 여자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너무 아파. 어떡해, 에녹? 그 여자…… 마지막까지 나를 생각하며 죽었어. 대체 왜…… 그 여자는 대체 누구라서…….’

    ‘클로이는,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에녹이 종종 이야기해 줬던 내 어머니……?’

    잠자코 아이를 쳐다보던 에녹이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굉장히 많이 사랑했지요.’

    ‘그랬구나…….’

    아이는 곧바로 수긍했다. 어쩌면 에녹에게 확인하기 이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꿈속에서 보았던 그 여자는, 틀림없이 제 어미일 거라고.

    ‘클로이의 삶이 너무 가여워.’

    아이는 맨발로 차가운 바닥 위를 사박사박 걷더니, 가볍게 창틀을 밟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반짝이는 반딧불이들이 아이의 주위를 맴돌았다. 아이의 손끝을 따라 춤을 추었다.

    에녹은 아이의 은빛 머리카락이 일순 빛이 나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레테.’

    어둠 속에서 빛무리와 함께 춤을 추던 아이가 에녹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레테야.’

    ‘……?’

    ‘망각의 성녀, 레테. 그게 내 이름이래. 목소리가 그랬어.’

    언제나 온화하던 에녹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목소리……?’

    ‘응, 목소리가.’

    얼마 안 가 라미에 교에서도 아이가 성녀로 발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라미에 교의 사제들이 아이를 찾아왔다. 아이는 에녹과 함께한다는 조건으로 교단에 들어갔다.

    ‘카일로스에게 복수할 거야.’

    성년이 되어 훌쩍 커 버린 아이가 에녹에게 말했다.

    ‘어째서요?’

    에녹은 아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합니까?’

    비록 풍요롭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웠다. 부모의 사랑처럼 깊지는 못하였을지도 모르나, 제가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 주었다.

    오래 전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던 것처럼, 오로지 아이의 행복만을 바라며 이때까지 키워 왔다.

    그런데 어째서 힘든 길로 돌아가려 하는 걸까.

    ‘카일로스가 죽은 이를 되살리고 싶어 해. 자꾸만 라나 신의 질서를 거역하고 있어. 카일로스를 없애는 게 라나 신의 뜻이야.’

    ‘…….’

    ‘그래서…… 내게 클로이의 그림자를 보여 준 거야. 내가 그녀의 비극에 동화될 수 있게…….’

    아이의 뜻은 확고했고, 에녹은 아이를 말릴 수 없었다.

    성녀가 된 아이는 대륙 내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점차 힘을 키워 갔다.

    에녹은 어느덧 자신의 품을 벗어난 아이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다 찬찬히 시선을 내렸을 때, 이제는 주름진 자신의 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어요. 성녀니, 복수니…… 그런 것들은 평생 모른 체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내가 레테인 이상, 그건 불가능해.’

    ‘나는 이제 늙었고, 더 이상 당신을 말릴 수 없지요.’

    ‘에녹이 나를 위해 희생한 시간들을 알아. 내가 모두 되찾아 줄 거야.’

    레테는 말했다. 시간을 되돌릴 거라고.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든 일이 끝난 뒤엔, 라나 신의 품으로.’

    ‘…….’

    라나 신의 품. 교단의 성직자들이 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결국…… 당신은 스스로의 끝을 선택하는 거로군요.’

    ‘그게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

    ‘레테.’

    에녹은 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라나 신이 원망스럽습니다. 당신을 이토록 복수에 눈이 먼 맹목적인 이로 만들어 버린 라나 신이, 미칠 듯이 원망스럽습니다.’

    ‘너무 속상해 하지 마.’

    레테는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에녹을 양팔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에녹, 나의 유일한 에녹. 모든 일이 끝났을 땐 에녹도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순간 에녹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레테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표정이었다.

    ‘난 레테잖아, 망각이잖아.’

    그런 에녹을 향해, 레테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당겼다.

    * * *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에녹은 희미해진 레테의 몸을 품에 안고 하염없이 걸었다. 목적도, 방향도 없는 허망한 걸음이었다.

    ‘레테. 마지막으로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 줄래요?’

    ‘뭔데?’

    ‘레이디 클로이를 향한 마음을, 망각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것은 그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더 이상 레테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면, 그녀 또한 함께 잊어야 마땅했다. 에녹은 대체 언제부터 자신의 가슴 속에서 클로이 가넷슈의 존재보다 레테의 존재가 더 커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에녹의 행복이라면.’

    레테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에녹은 이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작은 로켓 목걸이만이 그의 목에 힘없이 매달린 채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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