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그는 내게 영원한 행복이었다
마차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불어오는 바람결에 얼굴을 맡겼다.
“조심해, 클로이. 머리가 망가지겠어.”
“뭐 어때요. 어차피 잘 보일 사람도 없는걸요.”
“어머, 나는 아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니?”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는 다리아를 향해 나는 배시시 웃으며 돌아봤다.
“다리아는 자꾸 나를 보며 음흉한 생각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론 계속 못난이 같은 모습만 보여 줄 생각이에요.”
“이제는 대놓고 나를 치한 취급하는구나?”
“아주 틀리지도 않은 것 같은걸요?”
“아무래도 넌 지금 네가 납치를 당하는 중이란 사실을 깜빡한 모양이야. 나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제국 서쪽 국경에 있는 캐롤라인 공작령은 수도에서 가장 빠른 말을 타고 달려도 무려 사흘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가기에 도착하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방금 막 공작령에 들어섰으니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캐롤라인 공작성에 도착할 테지만, 나는 닷새째 보지 못한 레이몬드가 생각나서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다.
“일탈을 하는 기분이에요. 두근거리는데, 마냥 그걸 즐기지는 못하겠는.”
“원래 처음 일탈을 하는 어리숙한 아이들은 그걸 즐기지 못하는 법이지. 너도 이런 것들에 조금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클로이.”
“이런 것에 익숙해져서 어디다 써먹지요?”
“물론 써먹을 데는 많지. 레이몬드를 골탕 먹일 때라든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보다 폐하께 제 소재를 확실히 알려 준 것 맞지요?”
일탈을 하는 와중에도 레이몬드가 나를 걱정하지는 않을까, 역으로 걱정이 되었다. 다리아는 그런 나를 보며 새가슴이라고 혀를 끌끌 찼다.
“그렇잖아도 레이몬드가 오늘 아침에 내게 협박 편지를 보냈어. 곧 너를 찾으러 올 테니 조금이라도 다치게 하면 내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살벌하게 위협하더구나.”
“폐하께 편지가 왔나요?”
두 눈을 반짝이며 묻자 다리아가 별수 없다는 듯 픽 웃으며 레이몬드의 편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레이몬드의 정갈한 글씨체가 다리아를 향해 무시무시한 폭언을 내뱉고 있었다.
“정말…… 살벌하네요.”
하지만 그마저도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나는 레이몬드의 편지를 품속에 꼬옥 안았다.
“정말이지 눈꼴이 시려서 못 참겠어, 클로이. 레이몬드가 그렇게 좋니?”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얇은 종잇장에서 그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다리아는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히 물어봤어. 기분이 나빠졌어.”
토라진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다리아를 보며, 나는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이건 별로 주고 싶지 않았는데.”
다리아가 품속에서 또 다른 편지 한 장을 꺼내 내게 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편지의 수신인을 보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폐하께서…… 제게 보낸 거네요.”
“나를 협박하는 레이몬드가 괘씸해서 별로 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네가 이렇게 좋아하니.”
나는 허둥지둥 편지봉투를 뜯다가 봉투 끄트머리가 살짝 찢어져서 울상이 되어 버렸다. 그 뒤로 조심조심 심혈을 다해 최대한 봉투가 찢어지지 않게 뜯은 나는 그 안의 편지지를 꺼내 펼쳤다.
[클로이에게.]
아, 어떡해. 그 첫마디만으로 가슴이 울컥해 버렸다.
[안녕, 클로이. 이 편지가 도착할 즈음에 너는 그 여자와 함께 서쪽 끝으로 향하는 중이겠지.]
그 여자, 라고 다리아를 지칭하는 대목에서 글씨체가 살짝 흐트러진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이겠지?
[네가 내게 많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나는 아직도 네가 왜 화가 났는지 제대로 알지 못해.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지. 그래서 그런 나에게 무척 화가 난 상태야.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약속해. 나는 절대 너의 사랑을 가벼이 여긴 게 아니야.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더 크다고,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 내가 먼저 너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이후로도 결코, 너의 사랑을 가벼이 여기지 않을 거야.
나는 네가 떠난 황궁에 남아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해 볼 참이야. 너를 소중히 여기듯,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소중히 여길게. 나를 버리지 않고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너를 떠나보내지 않고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다시 네게 갈 거야.
사랑하는 클로이, 그러니 부디 그 때까지 몸 조심히 날 기다려 줘. 곧 다시 만나.
너를 사랑하는 레이몬드가.]
눈살을 찌푸리는 다리아를 무시하며 나는 그를 닮아 상냥한 편지에 입을 맞추었다.
레이몬드는 어쩜 이렇게 편지만으로 나를 따스하게 만들어 주는 걸까. 당장에라도 마차를 돌려 다시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안 돼.”
“……?”
“방금 레이몬드에게 달려가고 싶다고 생각했지? 절대 안 돼.”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정확한 지적에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레이몬드에게 달려가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었지만, 그가 나를 찾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덜고 나니 지금의 일탈을 즐기고픈 마음이 커졌다.
“퍽이나.”
다리아는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말이다.
* * *
황궁을 떠난 지 꼬박 일주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풍스러웠지만 쓸쓸한 느낌이 들었던 대공성과 달리 캐롤라인 공작성은 굉장히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적은 수의 사용인들이 성문 앞까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대 공작의 사람들은 모두 갈아치웠지.”
다리아는 굳이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숙부였던 전대 공작 아놀드 캐롤라인은 세 번의 재판 직후 처형을 당했다고 들었다. 그의 직계 가족들도 법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었고, 다만 베스티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고…….
“베스티도 이곳에 있나요?”
“……캐롤라인 가의 별장이 있는 남쪽 땅에 있어. 나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상당히 껄끄러울 테니.”
“아…….”
겉보기와 달리 마음이 여린 베스티가 가족들의 비극에 얼마나 슬퍼하고 있을지 생각하자니 마음이 아파 왔다.
“이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는 거야. 그 아이가 자신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무너지든, 혹은 나처럼 딛고 일어나 복수를 하든. 그건 모두 온전히 그 아이의 몫이지.”
“……다리아의 말이 옳아요.”
나는 베스티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슬퍼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공작에 의해 사랑하는 부모와 연인과 십 년의 시간을 모조리 잃어야 했던 다리아였기에 차마 그녀를 냉정하다고 평할 수 없었다.
공작성의 나이든 사용인들은 다리아가 어렸을 때부터 알아온 이들인 듯 그녀를 반기며 눈물을 흘렸다.
개중엔 전대 공작이었던 아놀드 캐롤라인을 욕하며 과거 다리아가 공작성의 유일한 공녀였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다리아 또한 그들을, 그리고 공작성을 상당히 그리워하였는지 누그러진 얼굴로 그들과 인사했다.
나는 멀찍이 그 광경을 구경하다가 뒤늦게 손님방으로 인도받았다.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한 덕분에 짐이 거의 없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피로가 몰려 왔다.
무려 일주일이나 마차를 타고 달렸는데 아무리 편한 마차라고 해도 여독이 없을 리 없었다.
‘다리아도 오늘은 정신이 없을 테니 일단은 조금 쉬었다가…….’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 위에 몸을 묻으려 할 때였다.
“……?”
가만히 창가를 응시하는 내 두 눈에 익숙한 은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나의 것과 닮았지만 내 것은 아닌…….
“레테?”
혹시나 하고 불러 본 이름에 그녀의 얼굴이 빼꼼 창 안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열 살 가량의 어린이 모습을 한 레테가 배시시 웃으며 나를 향해 인사했다.
“들켜 버렸네요, 클로이.”
당황한 나는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체 이곳엔 어떻게…… 에녹 경……?”
그리고 레테의 옆에서 함께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에녹 경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클로이.”
“에녹 경까지…… 여긴 대체 어떻게 온 거예요?”
“클로이가 납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하러 왔어요.”
레테가 내 눈치를 흘깃 살피며 대답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그만 벙 찐 채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폐하께는 분명 행선지를 남겼는데…….”
“네, 맞아요. 그런데도 다들 클로이를 찾으러 가지 않잖아요. 레이몬드는 너무 바쁘고. 그래서 내가 대신 클로이를 구하러 왔지요!”
레테는 마치 칭찬을 해 달라는 듯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며 설명했다.
“구하러 와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보다시피 난 무사하고, 폐하께서도 그걸 알고 계셔요. 딱히 곧바로 돌아갈 생각도 없고요.”
나는 그 바람에 응하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 그럼 레테랑 같이 레이몬드에게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폐하께서 바쁜 일이 끝나면 직접 구하러 와 주시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러니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만 돌아가셔도 괜찮아요, 레테.”
싱긋 웃으며 대답했지만 레테가 원한 답은 그게 아니었는지 그녀의 표정이 추욱 늘어졌다.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던 에녹이 마지못해 웃음을 터뜨리며 끼어들었다.
“레테는 레이디 클로이가 보고 싶어서 일주일간 쉬지 않고 뒤쫓아 왔답니다. 납치당한 레이디 클로이를 구하러 왔다는 건 모두 핑계입니다.”
“……?”
정말이냐는 듯 돌아보자 레테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클로이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레테도 클로이의 옆에 남을래요.”
“하지만 그러려면 다리아의 허락을 먼저…… 아니, 그보다 정말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예요? 황궁은 아니지만 못지않게 경비가 삼엄했을 텐데.”
“몰래 성벽을 넘어 왔어요!”
“성벽을 넘어 왔습니다.”
레테와 에녹 경은 너무나 당당하게 성벽을 넘어 온 것을 말하고 있어서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다리아는 알고 있나요?”
“…….”
“…….”
내 물음에 두 사람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허락 없이 성벽을 넘어 오는 건 범죄예요.”
“클로이를 위해서라면 범죄도 불사할 거예요!”
“범죄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요즘 따라 내 주위에 범죄를 불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두 사람이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창을 활짝 열어 주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다리아에게 부탁하면 두 사람이 머물 공간을 내어드릴 거예요.”
“잠깐만요!”
그대로 돌아 나가려던 내 옷깃을 레테의 자그마한 손이 붙잡았다.
“……?”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세요, 레테?”
“저, 저는…… 클로이와 함께 방을 쓰고 싶어요.”
“그건 조금 불편할 수도 있을 텐데요.”
혹시나 나의 거절에 기분이 상하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곧바로 레테는 풀죽은 얼굴을 했다.
“부탁이에요.”
“…….”
“어차피 저는 이제 곧 떠나야 해요.”
떠난다고? 그녀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떠난다니요?”
“어…… 음…….”
레테는 답지 않게 소심한 얼굴로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렸다. 어쩐지 대답을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언제까지 제국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교단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정확히는 라나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상했다. 그녀가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지.
“그러니까요, 클로이. 제발 레테를 클로이의 방에 함께 머물게 해 주세요, 네?”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서 어린 아이의 말투로 부탁하는 레테의 눈빛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다.
“좋아요.”
“꺄, 정말이요?”
내가 대답하자 레테는 눈에 띄게 좋아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떠오르게 하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대답하고 난 뒤에 너무 쉽게 허락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장 얼마 뒤에 떠난다고 해서 영영 못 만나게 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러나 지나치게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차마 다시 무를 수가 없어서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에녹 경이 머물 손님방만 따로 부탁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레이디 클로이.”
에녹 경은 잔잔하게 웃으며 나와 내 옷깃을 붙잡고 깡총거리는 레테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는 분명 웃는 얼굴로 나와 레테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슬픔이 내 마음을 잠식했다.
* * *
나와 다리아가 공작성에 도착한 직후에 그녀의 결혼이 무효화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와 동시에 다리아는 자연스럽게 캐롤라인 공작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아직 공작위에 오른 지 만 하루가 되지 않은 그녀는 벌써부터 발견된 공작성의 문제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공작성의 정문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내부로 들어온 것이군요.”
다리아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레테와 에녹 경을 쳐다보았다.
“공작성의 경비가 생각보다 허술했던 모양이에요. 앞으로는 경비를 더 강화하라 일러야겠어요.”
“미안해요, 캐롤라인 공작.”
레테는 뻔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리아의 입술 사이로 아까 내가 내쉬었던 것과 비슷한 소리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이 들어온 곳이 어느 경로지요?”
“동북쪽 성벽이요. 성벽 위의 병사들이 낮잠을 자고 있어서 들키지 않고 넘어 왔지요. 하지만 동북쪽 성벽 말고도 숲으로 둘러싸인 서쪽 성벽의 경비도 강화해야 할 거예요. 병사들은 열심히 보초를 돌고 있지만, 정작 성벽 아래에 샛문이 나 있거든요.”
분명 다리아의 두 눈이 매섭게 번뜩이는 걸 봤을 텐데도 레테는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뭐, 아무튼…… 귀한 분이 오셨으니 대접해 드려야지요. 덕분에 공작성의 경비가 얼마나 허술한지도 알게 되었고요.”
만약 성녀가 아닌 다른 이가 공작성의 성벽을 넘었더라면 필히 사달이 났을 것이다.
“머무는 동안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씀해 주세요. 캐롤라인 공작성에서는 성녀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혀 환영하지 않는 표정으로 다리아가 말했다.
“그것 참 감사해요.”
그러나 레테는 시종일관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눈치가 없거나 뻔뻔한 행동이었지만 다리아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레테에게 차마 뭐라 하지 못하고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공작성의 집사가 다가와 저녁이 준비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령에 도착한 직후 줄곧 정신이 없던 터라 배가 고픈 것도 잊고 있었다.
저녁 만찬을 즐기고 돌아온 레테는 바닥에 엎드린 채 종이 위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저러고 있으니 정말 아이 같아.’
아마도 레테는 평민 출신의 여자였을 것이다. 귀족 출신이었더라면 성력이 발현되는 때부터 대륙 전역에 유명해졌을 테니.
그러나 아무리 평민 출신이라 하여도 아주 어린 나이대의 아이가 아닌 이상 바닥에 배를 붙이고 엎드리는 일은 없었다.
가넷슈 가의 짐승으로 살기 이전의 나는 평민이었던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랐기 때문에 평민들의 생활 방식에 관해서도 무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민 출신이면서 어떻게 그런 표정과 목소리를 할 수가 있지.’
여러 귀족들 앞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던 그녀의 모습은 꼭 태어날 때부터 황제였던 레이몬드와 닮았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내 방에서 아이의 모습으로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됐다!”
무언가를 완성한 그녀가 펜을 내려놓으며 종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게 뭔지 궁금하지 않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뭔데요?”
반짝이는 그 눈동자를 무시할 수가 없어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클로이와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에요!”
그녀의 말마따나 번호가 찍힌 몇 가지의 목록들이 아기자기한 서체로 쭈욱 적혀 있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들이네요. ‘같은 방에서 일주일 간 생활하기’는 이미 지금 시작 중이고, ‘클로이가 해 주는 음식 먹기’는 당장 내일이라도 할 수 있겠는걸요. ‘손톱에 꽃물 들이기’는 다리아에게 물어보고 적당한 꽃이 있는지 내일 정원에 가 봐요. 그리고…….”
천천히 목록을 읽어 내리던 내 눈에 조금 힘들어 보이는 것들이 띄었다.
“레테, 가을이 오기 전에 떠난다고 하지 않았나요? ‘함께 첫눈 맞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레테는 금세 시무룩해져서 표정을 어둡게 가라앉혔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내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 버린 것만 같았다.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레테. 이번 겨울이 아니더라도 해마다 겨울은 찾아오잖아요.”
“…….”
“영영 못 만나는 것도 아닐 텐데, 언젠간 함께 첫눈을 맞을 날이 오겠지요.”
“…….”
그러나 나의 달래는 말에도 그녀의 표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이거는 정말 재미있겠네요! ‘함께 시가지 구경하기’요! 아주 어렸을 때 말고는 저도 시가지 구경을 해 보지 못했거든요!”
“그냥 ‘함께 시가지 구경하기’가 아니에요. ‘손잡고 함께 시가지 구경하기’예요.”
“네, 맞아요. ‘손잡고 함께 시가지 구경하기’예요. 이건 언제 할까요?”
내가 그녀의 말에 화답하며 적극적으로 나오자 어둡던 그녀의 얼굴이 점차 다시 밝아졌다.
“그럼 내일 점심엔 손톱에 꽃물을 들이고, 저녁에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아기 새처럼 재잘거리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나는, 문득 이상한 목록 하나를 발견했다.
“레테, 이건 좀…….”
“왜요?”
레테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게…… 아직…….”
나는 두 뺨 위로 올라오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적은 마지막 목록은 무려 ‘클로이와 레이몬드의 결혼식에 축가 부르기’였던 것이다.
“클로이는 레이몬드랑 결혼 안 할 거예요?”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어색하게 웃자 레테는 더욱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레이몬드는 클로이랑 결혼할 거라고 했는데…….”
“폐하께서 성녀님께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나는 놀라 물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교단에 알렸지요. 원래는 황제의 결혼식엔 대주교의 승인이 필요하지만 내가 마침 수도에 있으니 내 권한으로 승인해 드리기로 했어요.”
그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교단의 승인이 났다고……?
“교단에서는…… 저를 싫어하지 않나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클로이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레테는 펄쩍 뛰며 강경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야…… 저 때문에 폐하께서 교리를 무시하고 다리아와 결별을 감행했으니까요.”
“레이몬드의 결별이 왜 클로이 탓이에요? 애초에 그 결혼은 무효였다는 게 밝혀졌는걸요. 교리에도 전혀 어긋나지 않아요. 오히려 교리에 어긋나는 건 레이몬드와 캐롤라인 공작의 계약 결혼이었지요.”
아, 다리아가 굳이 사람들 앞에서 계약 결혼을 입에 담은 건 이를 위함이었나.
“있지요, 클로이. 클로이만 괜찮다면 클로이와 레이몬드의 결혼식 때 레테가 노래를 불러 줘도 되나요?”
레테의 말에 잠시 멍해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아직 귀족 가문들의 반응을 알지 못해요. 그들이 강경하게 반대를 한다면 결혼은 불가능할 거예요. 혹시 가능하다 하더라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요. 레테는 가을에 떠나야 하잖아요.”
내 근심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던 레테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벌써 두 곳의 가문에서 황실의 결정에 지지한다는 내용을 보냈대요. 뭐, 귀족 가문의 수장인 캐롤라인 공작가에서 황실을 지지한다는데 굳이 반대할 이들이 있을까 싶지만.”
“……!”
“그러니까 클로이는 너무 걱정 말아요. 레이몬드가 클로이와의 결혼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요.”
지난 시간에서는 그토록 힘들었던 일이 이렇게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황궁에 남아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해 보겠다던 레이몬드의 말은 바로 이것이었나 보다.
“그러니까 레테가 두 사람의 결혼식 때 축가를 불러도 되는 거지요?”
“정말 레테의 말대로 가을이 오기 전에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면, 얼마든지요.”
밀려오는 감동에 눈가가 뜨거워지려는 것을 억누르며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무려 성녀님의 축가인데 아주 감사한 일이지요.”
“다른 사람의 축가는 절대 안 돼요! 꼭 레테의 축가여야만 해요! 약속해요, 클로이!”
“네, 약속해요.”
그러자 곧바로 신나서 깡총거리는 레테의 모습에 기분이 오묘해졌다. 나는 따스한 가슴 위로 가만히 두 손을 얹으며 한참동안이나 레이몬드를 떠올렸다.
* * *
나와 레테는 그녀가 떠나기 전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주 소소한 것부터 말이다.
요리를 하고 싶다는 내 말에 다리아는 흔쾌히 주방을 사용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가넷슈 가의 짐승으로 살았던 시절은 물론이고, 대공성에 살았을 때조차 주방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어린 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곳에 발을 내딛으며 한껏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잠깐만요, 클로이. 방금 계란 껍데기가 거기 들어간 것 같은데…….”
“아, 고마워요, 레테.”
“잠깐 맨손으로 건드리면 뜨거워요!”
“어머, 큰일 날 뻔했네요.”
“클로이, 아무래도 요리는 무리…… 수프가 타고 있잖아요!”
레테의 외침에 나는 화들짝 놀라 수프를 끓이던 냄비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이미 냄비는 새까맣게 타 버리고, 수프는 모두 냄비 바닥에 눌러 붙어 버린 뒤였다.
“으음…….”
어쩐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때문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말 이상하네요. 분명 책에 나온 방법대로 따라한 건데…….”
나는 속상한 마음을 감추고서 몇 분 사이에 엉망이 되어 버린 주방을 훑어보았다.
수프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파스타의 소스는 지나치게 짰고, 아직도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닭고기는 손도 대지 못한 채였다.
“주방은 처음이라서요.”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하자 레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요. 그럼 오늘은 ‘레테가 해 주는 음식을 함께 먹기’로 바꾸지요. 대신 내일은 꼭 클로이가 해 줘야 해요.”
앞치마를 두르는 손길이 굉장히 능숙했다. 아무래도 아이의 모습으로 요리를 하기에는 높이가 맞지 않았는지, 그녀는 몇 걸음을 내딛으며 스무 살 가량의 여인으로 변모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앞에 앉아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레테는 엉망이 된 주방 위를 누비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기억 속 아득히 묻어 두었던 누군가의 잔영이 되살아나 눈앞에 아른거렸다.
내게는 아주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이의 그림자였다.
레테는…… 꼭 오래전 세상을 떠났던 나를 낳아 준 여자를 생각나게 했다.
“아주 맛있어요.”
레테가 만들어 준 수프를 한 스푼 떠먹은 나는 두 눈이 동그래진 채로 중얼거렸다. 레테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감돌았다.
“에녹에게 배웠어요.”
“에녹 경이요?”
나는 잠시 요리를 하는 에녹 경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 했으나 영 상상이 안 갔다.
“요리와 에녹 경이라니. 썩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네요.”
“에녹이 날 키워 줬다고 말씀드렸지요? 언제나 에녹과 둘이었어요. 나는 요리를 할 줄 몰랐고, 그건 자연스럽게 에녹의 몫이었죠. 조금 지난 뒤에는 그에게 요리를 배울 수 있었지만요.”
레테는 내 앞에 앉아 비스듬히 턱을 괸 채 내가 먹는 것을 구경하였다. 낮에 함께 꽃물로 물들인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레테는 안 먹어요?”
“난 클로이가 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걸요.”
그녀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포만감이 느껴지는 그 미소가 레이몬드의 것과 닮았다.
‘아마도 폐하와 닮은 저 미소 때문에 그녀에게 더욱 마음이 쓰이는 거겠지.’
나는 그녀의 요리를 향해 포크를 들며 생각했다.
레테는 참 이상한 여자였다. 함께 있으면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나게 했다.
나를 낳아 주었던 어머니와 내가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내가 떠나보내야 했던 작은 온기를 생각나게 하는 여자였다.
* * *
“이 손은 꼭 잡아야 하나요?”
“그럼요! 손이 핵심인 걸요!”
어색해하며 묻는 내 손을 더욱 강하게 붙잡으며 다시금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간 레테가 외쳤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녀와 달리, 나는 정말로 너무 어색했다.
그녀와 함께 나온 시가지는 굉장히 아담했다. 아놀드 캐롤라인 전대 공작이 처형을 당했지만, 스산했던 공작성과 달리 일반 영지민들의 삶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소소한 나날이었다.
“클로이는 시가지가 처음이라고 했지요?”
“아주 처음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방문한 것은 맞지요. 정말 어렸을 때 말고는 와 본 적이 없어요.”
내가 한때 단란한 부모의 품에서 살아가던 때도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시가지에 가는 날은 어렸던 내게 굉장히 특별한 날이었다.
“어렸을 적, 제가 살던 곳은 시가지도 없는 작은 마을이었거든요.”
“…….”
“꼭 지금처럼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시가지에 갔던 적이 있어요. 일 년에 몇 번 오지 않는 날이어서, 굉장히 특별했지요.”
조곤조곤 나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노라니, 레테가 물기 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이에게 듣는 클로이의 어린 시절이라니, 뭔가 묘해요.”
“……대체 어느 부분이요?”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어 갸웃거리자 레테는 생긋 웃으며 나를 근처의 가판대로 이끌었다.
“클로이가 어렸을 때에도 이런 걸 팔았나요? 옛날에는 1골드만 있어도 여기 있는 것들을 다 살 수 있었다는데.”
“물론 그렇긴 하지만…… 성녀님과 내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난다고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자, 레테가 이상한 목소리로 웃었다.
“아하하,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성녀님의 진짜 나이는 몇 살이에요?”
매번 다른 나이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녀라서, 그녀의 본래 나이를 알 수 없었다.
“음, 글쎄요. 시간은, 제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요.”
레테는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기 시작했다. 점점 접히는 손가락의 개수가 많아지는 걸 보며, 어쩌면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년식을 치른 지는 여섯 해가 지났…….”
“저보다 한참 나이가 많잖아요!”
스물여섯이라니, 무려 다리아의 또래였다. 이제까지 은연중에 그녀를 동생처럼 대했는데, 기분이 묘해졌다.
“잠깐 그럼 에녹 경은 어떻게 당신을 키운 거지요?”
“에녹과 처음 만났을 때, 딱 이만큼의 나이였거든요.”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잠시.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니 그녀가 이런 모습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테는 가판대 위에 놓여 있는 가죽 팔찌를 하나씩 들어 보며 내 손목에 가져다 댔다.
“이 색깔은 어때요?”
“그것보다는 붉은색이 더…….”
“붉은색도 잘 어울리네요!”
바스락거리며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낸 그녀가 똑같은 색상과 디자인의 가죽 팔찌를 두 개 구입했다.
“내 건 클로이가 채워 줘요.”
레테는 나와 그녀의 손목에 마치 짝꿍처럼 채워진 팔찌를 보며 기뻐했다. 잠시 가판대를 둘러보던 그녀는 몇 가지 물건을 더 구매했는데, 그중에는 나와 그녀의 손목에 있는 것과 같은 가죽 팔찌가 있었다.
“그건 뭐예요?”
“레이몬드에게 주려고요.”
그녀가 당연한 것을 말하듯 곧바로 답했다.
“레테는 내게도 폐하께도 항상 관대해요.”
“두 사람 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녀가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한다 말하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그저 그녀가 어린 아이의 모습이기 때문일까. 혹은, 내 앞에서 매번 보여 주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맑은 모습 때문일까.
“이건 에녹에게 줄 거예요.”
가판대를 벗어나 사람들이 북적이는 길을 걸으며, 레테는 손에 든 것을 만지작거리며 재잘거렸다.
“어쩌면 에녹은…… 나를 기억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녀가 들고 있는 건 작은 초상화 따위를 보관할 수 있는 조잡한 디자인의 로켓 목걸이였다.
“꼭 에녹 경과 헤어지는 것처럼 말하네요.”
“에녹과도 계속 함께하기는 힘들거든요.”
“교단의 일 때문인가요?”
내 물음에 그녀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라나 신의 뜻이지요.”
한참을 걷던 우리는 광장에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의 함성을 듣고는 그곳으로 걸음을 틀었다.
이국에서 온 사람들이 서커스 공연을 하고 있었다. 책에서만 보았던 불이 타는 고리 안을 통과하고, 뾰족한 가시 위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넋을 놓고 공연을 관람했다.
“세상에, 저건 위험할 것 같은데…… 우와…….”
“저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어요! 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할 걸요?”
사람들과 함께 기립 박수를 치는 나를 힐끔 올려다보며 레테가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자랑했다.
“으음…….”
어쩐지 허풍을 늘어놓는 어린 아이의 모습 같아서 나는 그만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이에요!”
“네, 믿어요.”
선선히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레테는 내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이 아이처럼 천진하고 사랑스럽다가도,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고개를 휘휘 저어야 했다.
공연이 끝날 무렵엔 어느덧 해가 조금 기울어 있었다. 나는 아직도 투덜거리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차츰 석양이 내리깔리는 시가지를 걸었다.
“어? 저건……!”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한참을 걷는데, 돌연 그녀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두 눈을 반짝였다.
“클로이! 나 클로이랑 하고 싶은 목록이 또 한 가지 추가됐어요!”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여러 종류의 값싼 술병이 진열되어 있었다.
“술은 조금…….”
나는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절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술을 마시지 말라 했던 다리아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테는 내가 거절하기도 전에 술병을 하나 골라 들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때요, 클로이? 나, 클로이랑 같이 술 마시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레테의 목소리가 너무나 신나 있어서 뭐라 거절해야 좋을지 망설이던 때였다.
“예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썩 내려놓지 못해?”
뒤편에 서 있던 상인이 레테에게 다가와 버럭 호통을 쳤다. 깜짝 놀란 레테가 당황한 얼굴로 뻣뻣하니 굳어 버렸다.
“아,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아이에게는 술을 팔지 않으니 그만 가 보시오.”
상인이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레테에게 말했을 때보다 조금 더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레테가 하는 말을 모두 들은 모양이었다.
결국 상점 주인에게 잔뜩 혼이 나고 쫓겨난 레테는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나도 충분히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라고요!”
앙증맞은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며 외치는 모습이 썩 귀여웠다.
“네, 알아요, 알아요.”
“분해요!”
“너무 분해하지 마세요. 주인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레테가 너무 어려 보이니까.”
“…….”
무언가를 고심하는 듯 굳게 다물린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던 레테는 돌연 고개를 들고서 빙긋 웃었다.
“뭐, 어쩔 수 없죠. 술이 이곳에만 있는 건 아니니까.”
* * *
웬일로 깔끔히 물러나나 싶던 레테는 며칠 뒤 진짜 술을 들고 찾아왔다.
“짠! 제가 술을 가져왔어요, 클로이.”
“……어디서 난 거지요?”
척 보기에도 값이 나가 보이는 술이었다. 혹시나 또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그녀가 굉장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훔친 게 아니에요. 공작에게 선물 받은 거란 말이에요.”
아마도 선물을 빙자한 강탈이 아니었을까.
“합법적으로 술도 생겼겠다, 우리 같이 술 마셔요, 클로이.”
“안 되는데…….”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다리아가 신신당부했거든요. 절대 술을 마시지 말라고.”
“뭐 어때요. 클로이는 더 이상 그 여자의 아랫사람이 아닌데.”
레테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마개를 땄다. 한 번 맛본 적 있던 향긋한 과실주의 내음에 나는 솔깃해졌다.
“……그렇지요?”
입가에 감도는 군침을 삼키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더 이상 나는 다리아의 시녀가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술을 마시는데 굳이 그녀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작심한 우리는 유리로 만들어진 와인 잔에 각기 술을 채웠다. 찰랑거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진한 자색 빛깔의 액체가 담겼다.
잔을 부딪치고서 나는 그대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술을 입 안으로 털었다.
“멋있어요, 클로이! 그런 방식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아, 이건 다리아가 알려 준 방식이었는데.”
레테의 칭찬에 난 뺨을 긁적이며 웃었다. 아무래도 보통의 사람들은 다리아가 알려 준 것과 다른 방식으로 술을 마시나 보다.
“얼굴이 빨개졌네요. 와인이랑 얼굴 색깔이 똑같잖아요.”
레테는 나를 보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야말로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만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꼭 잘 익은 토마토 같았다.
“음, 더 마실래요. 더 줘요.”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빈 잔을 족족 내밀며 새 술을 받아마셨다.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노곤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웃음이 많아지고 혀가 짧아졌다.
레테는 그런 나를 쳐다보며 가만히 입을 틀어막았다.
“클로이…… 너무…… 귀여워요…….”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괜히 다리아가 원망스러워졌다. 이 좋은 것을 이제까지 먹지 못하게 한 다리아는 정말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마치 어미가 새끼를 보듯 자애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레테를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이 툭 터져 나왔다.
“있지요, 나는 레테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군데요?”
술에 취한 와중에도 자못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녀가 내게 물었다.
“우리 어머니요.”
피식 웃으며, 나는 내내 품던 것을 가볍게 털어놓았다.
“클로이의…… 어머니요?”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지요. 죽는 순간까지 나를 걱정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차가운 흙 위에서 생명을 꺼뜨리는 순간에도, 오로지 나만을 걱정하였던 사람…….
“그런데 난 그녀의 죽음 앞에서 두려운 마음에 그만 외면해 버렸어요.”
어렸던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담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두려워서, 그만 그녀를 피하고 말았다. 그 눈이 더 이상 나를 담지 않은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끔찍하게도.
뒤늦게 그녀에게 다시 달려갔을 때, 남은 것은 생명이 꺼진 여자의 육신뿐이었다.
많이 울었다. 참, 많이 울었다. 그러나 죽은 이가 다시 눈을 뜨는 법은 없었고, 어미의 죽음을 외면했던 더러운 자식은 그 죄로 인해 짐승이 되어 네 발로 기어야 했다.
“나를 많이 원망하고 있을까요?”
허공을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멍하니 뇌까렸다. 죽은 이는 영영 대답해 주지 못할 질문이었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 오면 그랬을 거예요.”
침착한 목소리가 나를 달래듯 은은하게 방 안을 메웠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와 같은 은빛 머리칼, 애정이 담뿍 담긴 보석처럼 붉은 눈동자…….
“레테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이 나요.”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
“완전히 잘못 짚었네요. 난 그쪽이 아닌데.”
레테는 피식 웃으며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의 작은 머리통이 내 어깨 위로 따스하게 닿았다. 나는 내게 기댄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레테는 가족을 잃었다 했지요? 카일로스…… 그 남자 때문에.”
“제 어머니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릿한 숨이 흘러나왔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지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짓말.”
“진짜예요!”
“으음…….”
술기운이 올라오는 와중에도 나는 그녀의 말은 허풍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아까 어머니를 소개했던 말에서 ‘마을’을 ‘대륙’으로 바꾼 것 같았으니까.
“저는 라나 신의 가호를 받은 사람이에요! 절대 거짓말 같은 건 안 해요!”
“하지만 지난번에는 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레테는 나와 레이몬드가 결혼을 해야만 제국이 평화로워진다는 거짓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속이기도 했었다. 왜 그런 거짓을 한 걸까.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거짓이 결코 나쁜 의도가 아니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윽…… 뭐, 아무튼…….”
레테는 굳이 지난 거짓을 해명할 의도는 없는지 뻔뻔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가엾은 여자였어요. 비록 그녀와 헤어졌을 때의 난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의 슬픔은 알았지요.”
“……?”
혼자서 걷지도 못하는 나이였다고?
“그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겠네요?”
“기억은 없지만, 그녀의 그림자가 내게 남아 있었죠. 축복인지 저주인지, 라나 신의 가호가 나를 그녀의 그림자로 이끌었어요.”
그녀가 늘여놓는 아리송한 말들을, 나는 가만히 곱씹었다.
“라나 신의 가호…….”
“어머니가 나를 정말 사랑했다는 걸 알아요.”
레테는 나를 돌아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찡해졌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떠나보내야 했던 나의 작은 에스델이 생각났던 탓이겠지.
에스델, 가엾은 나의 에스델.
어미를 잃은 새끼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는 굳이 멀리서 찾지 않고 나의 어린 시절만 되돌아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카일로스는 말했다. 에스델은 죽지 않았다고.
‘물론 살아 있었지. 그 이후로도, 아주 오래오래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남았다고.
더 이상 다시 만날 수 없는 나의 에스델이었지만, 나는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울고 있네요, 레테.”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레테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클로이도 울고 있잖아요.”
“그런가요?”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나와 함께 있던 일은 다 잊어버릴 거니까.”
민망해하는 나를 보며 레테가 부드럽게 두 눈을 휘었다.
“왜 내가 다 잊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레테잖아요.”
“……?”
의미를 알 수 없어 두 눈을 끔뻑였으나 레테는 그저 수줍게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레테는 가끔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해요.”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술을 찾았다.
* * *
정신을 차려 보니 아침이었다. 내 눈앞에는 잔뜩 한심하단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다리아의 얼굴이 있었다.
“되도록 술은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
나는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젯밤 함께했던 레테가 내 시선을 힐금 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내가 실수를 한 건가? 걱정이 되어 묻자 레테가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공작의 말대로 클로이는 앞으로 술을 마실 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절대 혼자서는 마시지 말고, 아,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도 마시지 말고…….”
혼자서도, 다른 사람과도 마시지 말라니. 그건 영영 술을 마시지 말라는 소리였다.
“간밤에 너를 본 공작성의 기사 하나가 상사병에 빠져 버렸단다. 가엾게도.”
“……?”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탓인지 다리아의 말을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는 간밤에 이 방 안에만 있었는데 어쩌다 공작성의 기사와 마주친 거죠?”
“…….”
“…….”
나의 물음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말이다.”
다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어서 씻고 손님맞이할 준비를 하렴.”
아무래도 그 이상은 내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던지 그녀가 말을 돌렸다.
“레이몬드가 찾아올 거란다. 국혼의 동의를 받기 위해.”
“……!”
레이몬드가 온다는 소식에 머리를 어지럽히던 술기운이 싸악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기뻐하며 몸을 일으키자 다리아는 피식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아직 그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나는 서둘러 단장했다.
그가 여기까지 오는 명목적인 이유는 국혼을 위해 십 대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캐롤라인 공작가의 찬성을 받기 위함이겠지만, 굳이 서편으로 대신해도 될 일임에도 직접 찾아오는 건 나를 데려가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예뻐요, 클로…… 으윽…….”
“괜찮아요, 레테?”
“네, 괜찮, 우으윽…….”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단장을 구경하던 레테는 속이 메스꺼운지 계속해서 헛구역질을 했다.
“아무래도 저는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안색이 상당히 나빠 보여서 나는 의사를 불러주었다. 의사에 따르면 레테는 ‘술병’이 난 거라고 했는데, 약을 먹고 몇 시간 푹 자고 일어나면 금세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성녀님도 술병이란 게 나는구나.’
나는 새삼 신기해하며 고롱고롱 잠든 그녀의 가슴께까지 이불자락을 끌어올려 주었다.
의외로 그녀와 함께 술을 마셨던 나는 멀쩡했다. 비록 지난밤의 기억이 한 모퉁이 잘려 나갔지만 말이다.
설레는 기분으로 레이몬드가 어서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곧바로 정문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막 말에서 내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근 일주일 만에 다시 보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클로이!”
내게 거침없이 다가오던 그가 문득 몇 발짝을 앞에 두고 멈칫거렸다.
“폐하……?”
“그, 혹시…… 아직 나에게 화가 풀리지 않은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답지 않게 소심한 얼굴로 물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나는 푸스스 눈매를 흩뜨리며 웃었다.
“폐하께서 먼저 제게 말씀해 주셨잖아요. 제가 폐하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소중히 여겨 주시겠다고.”
“그래, 그랬지.”
그가 내게 보내 주었던 편지의 내용을 언급하자 그제야 그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사랑하는 너무나도 다정하고 상냥한 그의 미소였다.
“너를 보지 못한 시간이 고작 열흘도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언제는 폐하의 곁을 떠나도 좋다고 하셨으면서.”
“아, 그건…….”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이자 그가 당황한 낯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지요?”
“물론.”
“그럼 약속해요. 앞으론 두 번 다시 그런 말씀 마셔요. 설령 제가 먼저 폐하의 곁을 떠나겠다고 주장하더라도, 절대 저를 놓지 말아 주세요.”
그의 손을 힘껏 붙잡으며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직 폐하만이, 제 행복이니까요.”
“……나도.”
그 말에 흠칫 어깨를 떤 그가 살풋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너만이 내 행복이야. 너와 함께 있을 때만이 내가 행복할 수 있어.”
마치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듯 결연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나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폐하.”
보드라운 입술이 그의 살갗 위로 닿았다가 촉, 하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떨어졌다.
“못 본 새 더 대담해졌군, 클로이.”
레이몬드는 웃음을 터뜨리며 나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 바람에 한껏 공들인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그의 두터운 손바닥이 주는 온기에 너무 벅차서, 나는 새끼 짐승처럼 그의 손바닥에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대담해진 만큼, 애교도 늘었고.”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 여자가 너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이요. 귀빈 대우를 받고 있었지요.”
“다행이야. 그 여자가 너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납치라니. 도대체 그 여자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건지.”
다리아의 흉을 보는 레이몬드의 미간 위로 희미한 주름이 졌다.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주름을 부드럽게 펴 주었다.
“찡그리지 말아요, 폐하.”
“그 여자 때문에 화가 나서 그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자꾸 제 앞에서 다른 여자의 이야기만 하면 조금 샘이 나는걸요. 그것도 폐하의 전 부인 이야기를요.”
“잠깐. 전 부인이라니, 끔찍한 소리.”
레이몬드가 펄쩍 뛰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와 나는 명백히 이혼이 아닌 결혼 무효화 판결을 받아 냈어. 그러니까 전 부인이니 뭐니 그런 말은 하지 마. 그 여자 따위 신경 쓰지도 말고,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은근히 내 심기를 살피는 눈치였다. 사랑스럽게도. 그러나 나는 짐짓 그런 그의 태도를 모른 체하며 뾰로통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폐하께서 자꾸 다리아의 이야기만 하잖아요. 그러니 저는 속상할 수밖에요.”
“크, 클로이, 그게…….”
급기야 그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장난을 치고 싶었으나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장난이었어요, 폐하.”
“하아, 정말…….”
레이몬드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얼굴을 감쌌다. 그의 손에 의해 고개가 들린 나는 그와 두 눈을 마주하고서 싱긋 웃었다.
“날 이토록 안달 나게 하는 건 온 대륙을 통틀어 너뿐일 것이다.”
“폐하도, 마찬가지예요.”
그가 짧은 웃음을 터뜨리며 내 이마 위로 입을 맞추었다. 그 작은 애정 표현에 얼굴 위로 열기가 몰려왔다.
“클로이.”
아마도 잔뜩 발그레해졌을 내 얼굴을 잔잔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가 불쑥 내게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겠나?”
나는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정한 눈동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워 보였지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아마 지금 내 앞에서 여유를 가장하고 있는 이 남자는 속으론 굉장히 조급한 상태일 것이다.
“네게 청혼하는 거야. 감히 욕심을 부리는 거야. 설령 내가 가진 지위 때문에 네가 힘들어지는 날이 올지라도, 너를 내 곁에 두고 싶어서. 아니, 내가 네 곁에 있고 싶어서.”
“폐하가, 제 곁에요?”
“그래. 내가, 네 곁에.”
내 곁에 있고 싶다는 그의 말에 가슴 위로 작은 파문이 일었다.
대륙에서 가장 큰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고작 나의 곁에 있기를 간절히 청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다고 했었지. 황제인 자신마저도. 그렇기에 이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너만이 내 행복이니까. 혹 네가 내 곁이 싫증이 나 떠난다 하더라도, 내가 네 곁을 찾아 쫓아갈 테야. 아주 집요하게 쫓아갈 테야. 이렇게 말하는 나를 너무 이상하게 쳐다보지 마. 네가 내 집착을 일깨운 거니까.”
“이상하게 쳐다볼 리가요. 내내 바라 왔던 걸요.”
“그럼 나와 결혼해 줄래?”
빙긋 웃는 그를 향해 나는 두 팔을 벌려 와락 안겼다.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너와 끝까지 함께하고 싶어.”
“그 말을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나의 대답에 그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조금 더 확실하게 대답해 줘.”
“결혼, 해요.”
사르륵 두 눈을 휘자, 동시에 내 몸이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놀란 나는 허공에서 버둥거리다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갑자기 들어 올리면 놀라잖아요!”
“사랑해, 클로이.”
질책하는 나의 말에 아랑곳 않고, 그가 자신의 사랑을 거침없이 토해 냈다.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정말 사랑해.”
“아이 참…….”
어쩐지 민망해져서, 나는 수줍게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봤자 내가 그보다 위쪽에 있었던 탓에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지만.
“클로이…….”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읊조리며 내 몸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조금씩 닿아 오는 그를 느끼며 나는 두 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서는 속삭였다.
“저도 많이 사랑해요, 폐하.”
우리는 한참 동안 마주선 채로 서로를 응시하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런 근심 없이 함께 웃고 있는 이 평화가 믿기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흩어져 버리는 찰나의 행복은 아닐까.
그러나 느리게 눈을 깜빡여 보아도, 여전히 그는 내 앞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벅찬 행복이 나를 감쌌다.
사박사박, 함께 걷는 걸음이 따사로운 여름날의 여유를 품고 있었다. 나와 레이몬드는 굳이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두 손을 맞잡은 채 성벽을 따라 느리게 걸었다.
“다리아에게는 국혼의 찬성을 받기 위해 온 거지요?”
“벌써 들었나? 일반적으로 황제의 국혼은 귀족 의회에 속한 열 귀족 가문 중 일곱 귀족 가문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지. 물론 귀족단의 승인이 필수 요건은 아니지만, 앞으로 너의 황궁 생활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들의 동의를 받아 낼 생각이야.”
그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했다.
“그리고 이미 벌써 열 가문 중 네 가문의 찬성을 받아 온 참이야. 캐롤라인 공작가까지 포함하면 다섯 가문이 되겠군.”
“……신기해요. 지난 삶에서는 그토록 나를 반대하던 사람들이었잖아요.”
“너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미 성녀가 교단을 대표해 승인을 내어준 참이고, 이제 두 가문만 더 설득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않을게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의 손에 단단히 깍지를 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히며 맞닿는 열기가 나를 들끓게 했다.
“그러고 보니 성녀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술병이 나서 누워 있는 레테가 생각나 킥킥 웃었다.
“몸이 좋지 않아 누워 있어요.”
“저런.”
레테의 명예를 위해 술병이 났다는 이야기는 쏙 빼고 둘러대자 레이몬드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너를 그 여자에게서 구출해 달라 했더니, 무리한 부탁을 했나 싶군.”
“네? 그럼 레테를 보낸 게 폐하셨어요?”
“그래. 필요하다면 내가 책임질 테니 그 여자와 분쟁을 일으켜도 좋다고 했지.”
레이몬드는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테에게 범죄마저 불사르라 부추긴 게 레이몬드였다니,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를 샐쭉하니 쳐다보았다.
“제가 안전하다는 걸 알고 계셨으면서.”
“맞아. 하지만, 클로이. 사랑하는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편지 하나만 남기고 사라졌을 때의 기분은 굉장히 두려운 공포를 동반해. 게다가 그 편지를 남긴 이가 내가 경계하는 이라면.”
그가 가만히 깍지 낀 손을 들어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 해 줘. 우린 이제, 부부잖아.”
“아직은 예비부부지요.”
“그게 그거잖아.”
나는 걸음을 멈추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폐하의 말씀대로 말없이 편지만 남기고 사라진 건 정말 죄송해요.”
“토라져서 훌쩍 사라지는 건 어디서 배운 거지?”
“……엘리야 젬마 부인에게요. 남편과 싸운 뒤엔 친정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알려 줬거든요. ……이젠 다시 만나기 힘든 사람이지만요.”
젬마 부인을 떠올리자 급격히 기분이 우울해지려 했다. 내 기분을 감지한 그가 곧바로 대화의 주제를 틀며 짓궂게 웃었다.
“그래서, 효과가 있었나?”
“물론이요. 무려 폐하의 청혼까지 받아 냈는걸요?”
“큰일이군. 효과를 봤으니 앞으로 또 이렇게 훌쩍 사라져 버릴까 걱정인데.”
“이젠 그러지 않을게요. 사실은…… 제가 버티기 힘들었어요. 폐하가 너무 보고 싶어서.”
나는 그와 맞잡지 않은 반대편 손을 들어 머리카락 끝을 돌돌 감았다.
“있지요, 폐하. 사실은 전 그날 폐하가 제게 고백…… 내지는 청혼을 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게 아니어서 조금 많이 토라졌었어요. 참 유치했지요?”
“괜찮아. 그 모습도 사랑스러우니까.”
청량한 여름 바람이 살갗을 스치며 지나갔다. 천천히 그의 그림자가 내 얼굴 위로 기우는 것을 느끼며, 나는 느릿하게 두 눈을 내리감았다.
* * *
한숨 푹 자고 일어나 숙취에서 벗어난 레테는 레이몬드의 청혼을 보지 못해 억울해하며 다시 내게 청혼하라고 억지를 부렸다. 물론 레이몬드는 아주 가볍게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나는 나를 기다리는 레이몬드를 옆에 두고서 다리아와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
“당분간 수도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영지에 머무르면서 공작위를 탄탄히 하는데 힘쓸 생각이니까.”
“아쉬워요. 엄청 보고 싶을 거예요.”
사실, 어느 정도 그녀를 당분간 보지 못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레이몬드에게 토라진 채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지만.
고작 일주일 머물었나. 손님으로서 다른 이의 영지에 머물기 적당한 시간이었으나, 이상하게 짧게만 느껴졌다.
“자꾸 그러면 레이몬드가 질투하잖아.”
그녀가 키득키득 웃자, 옆에서 레이몬드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조심해서 가, 클로이.”
다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무슨 짓이야!”
동시에 펄쩍 뛰며 내 손을 낚아챈 레이몬드가 무서운 눈으로 다리아를 노려보았다.
“인사한 건데.”
“누가 인사를 이딴 식으로!”
“다른 공작이니 후작이니 하는 자들도 다 이렇게 하던데 뭐.”
레이몬드는 마치 더러운 것을 닦아 내듯 손수건을 꺼내 내 손등을 거칠게 문질렀다.
“결혼식 땐 시간을 낼 테니 꼭 청첩장 보내렴.”
그녀가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네, 꼭 보낼게요.”
해사하게 웃으며 답하자 그녀가 레이몬드를 힐끔 쳐다보더니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이상 내게 말을 높이지 말아야 해. 네가 내 시녀 출신이란 걸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옆에서 자꾸만 재촉하는 레이몬드 덕에 이만 돌아서야 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존대도, 하대도 아닌 마지막 인사는 생각만큼 어색하지 않았다.
인사를 끝낸 나는 레이몬드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지금 그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 그의, 신부가 되기 위해.
“고작 그 여자와의 작별 따위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썼어.”
“다리아는, 제게 정말 좋은 친구니까요.”
“……기분 나빠.”
“어느 부분이요?”
“그 여자를 생각하면서 예쁘게 웃지 마.”
진심으로 다리아를 질투하며 투덜거리는 레이몬드의 모습은 이다지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와 앞으로 함께할 나날들 역시, 그를 닮아 아름다울 것이다.
* * *
캐롤라인 공작령에서 클로이를 데려온 지 어느덧 나흘째. 레이몬드는 집무실에 앉아 하얀 종잇장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한참 무언가를 고민하는데, 톡톡거리는 자그마한 소리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소리 나는 곳을 돌아보니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성녀가 창틀 위에 앉아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 성녀.”
레이몬드는 무례하게도 황제의 집무실에 침투한 이 불경한 손님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레이몬드를 찾느라 황궁을 온통 뒤졌어요. 집무실에 있는 줄도 모르고.”
성녀가 배시시 웃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아이의 모습을 한 그녀는 레이몬드가 보기에도 썩 귀여웠다. 아마도 성녀가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 닮은 탓일 것이다.
“나를? 무슨 일로?”
“클로이와 결혼식이 얼마나 진행됐는지 궁금해서요.”
“뭐, 나름.”
레이몬드는 방금 전까지 노려보던 종잇장을 다시 보며 중얼거렸다.
“네 사람이 아직도 강경하게 버티고 있지만, 뭐 어떻게든 조금만 더 설득하면…….”
“그 네 사람이 누구지요?”
“헤지스 공작과 리스 후작, 그리고…… 잠깐.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지?”
무심코 대답하던 레이몬드가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저는 클로이가 행복하길 바라요. 레이몬드도 마찬가지고요.”
“……?”
“그러니까 내가 두 분을 도와줄게요.”
“딱히. 성녀의 도움은 없어도 괜찮아.”
뒤늦게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레이몬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음만 고맙게 받지.”
그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성녀의 호의를 거절하며 생각했다.
‘마지막 방법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그의 입술이 음산하게 호선을 그려 냈다.
* * *
올해로 딱 예순 살이 되는 아드리안 헤지스 공작은 제국 내에서 가장 박식하다는 평을 받는 현자이기도 했으나 다소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그는 며칠 전 황제가 제게 보낸 서신을 생각하며 혀를 쯧쯧 찼다. 모두가 암암리에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 가넷슈 가문의 여자를 황후로 맞이할 것이니 동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공작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반대하는 입장의 답신을 보낸 터였다.
“사생아 출신의 황후라니, 내가 살아 있는 한 어림도 없지.”
“그렇다면 그대의 목숨을 우선 취해야겠군.”
서늘한 감촉과 함께 그의 목덜미에 차가운 쇠붙이가 스쳤다.
“폐, 폐하!”
아드리안 헤지스 공작은 놀라 파리해진 얼굴로 외쳤다.
분명 그의 방에는 그 혼자만 있었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황제가 그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하하. 농담일세. 내 성정에 대해서는 그대가 누구보다 더 잘 알잖은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정말 장난이었다는 듯 웃으며 검을 거두었다.
“나는 피를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
“…….”
어째서 그 말이 꼭 당장 이 자리에서 피를 보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는지. 아드리안 헤지스 공작이 누구보다 황제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다시 한번 그대를 설득하러 왔네.”
“폐하의 구, 국혼 문제 말씀입니까.”
“그래.”
황제는 간결하게 대답하고는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도, 그대의 생각은 변함이 없는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상대를 집어 삼킬 듯 맹렬한 기세로 응시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공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짧은 정적이 흐르는 동안 황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그저 공작을 응시했다.
차츰 공작의 등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릴 무렵, 황제가 무심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내일 다시 찾아오지.”
황제는 괜히 자신의 칼자루를 툭 치며 밖으로 나갔다. 그 명백히 협박을 취하는 듯한 황제의 모습에 공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 늙은이의 뜻을 꺾을 순 없을 겁니다, 폐하.”
공작이 황제가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꺾다니, 뭐를요?”
“당신은……!”
갑작스럽게 뒤에서 나타난 여자로 인해 공작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안녕, 공작.”
“성녀……?”
“공작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군요?”
“지난번에 인사도 나누지 않았습니까.”
공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성녀를 쳐다보았다.
“이곳은 어떻게…… 마치 제 집무실이 공유지가 되어 버린 것 같군요…….”
“공작이 국혼을 반대하고 있다면서요?”
“찾아온 용건이 그것입니까?”
“네, 그것 때문에 찾아 왔지요. 두 사람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거든요.”
이미 성녀가 교단을 대표하여 황제의 국혼을 승인해 주었다는 사실은 공작 또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건 지나친 간섭인데.’
성녀를 바라보는 공작의 눈가에 미묘한 주름이 잡혔다.
“교단에서는 두 사람의 결합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공작이 지금 방해가 되고 있지요.”
“흠…….”
“공작의 생각엔 변함이 없나요?”
고개를 슬쩍 젖히며 내려다보는 성녀의 오만한 목소리는 은근히 위협적이었다.
“변함없습니다.”
“라나 신의 뜻이 두 사람의 결합에 있다는데도?”
“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문득 성녀의 붉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헤지스 공작가에서 교단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두 사람의 결합을 반대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저, 적이라니요.”
“그렇잖아요? 지금 공작은 교단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으니까.”
어쩐지 그 위압적인 표정과 말투는 방금 전 자신을 찾아온 황제의 것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그게 어째서 교단의 뜻에 반하는 겁니까? 제국의 황후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공연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이한 감각을 느끼면서도 공작은 꿋꿋하게 자신의 할 말을 했다.
“공작이 자꾸만 이렇게 나오면 교단 역시 헤지스 공작가를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지요. 물론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허…….”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요. 나는 내일 다시 찾아올 테니까.”
성녀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황제와 성녀가 동시에 나를 찾아와 협박을 일삼고 가는 건지, 원.’
* * *
레이몬드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온 나는 황제궁과 조금 떨어져 있는 루비궁에 머물게 되었다. 예비 황후들이 사용했다는 그 궁은 레테가 머물고 있는 곳과도 가까워서 그녀는 굉장히 기뻐했다.
나는 간단한 아침 식사 후 홀로 황궁 후원을 거닐었다. 오늘따라 레이몬드도, 레테도 보이지 않았기에 늦은 오전의 여유를 즐기던 참이었다.
그런 내 눈에 저 멀리서 다급히 움직이는 밝은 백금색의 머리카락이 띄었다. 평소와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빠르게 걷던 남자가 나와 마주쳤다.
“아, 레이디 클로이.”
나를 발견한 에녹 경이 걸음을 멈춰 서고는 우아한 동작으로 내게 인사했다.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성녀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레이디 클로이와 함께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군요.”
에녹 경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입니다. 꼭 질 나쁜 장난을 치러 나가는 모습이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정말 아이를 걱정하는 아비의 모습이라서,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 걱정 말아요. 그래도 성녀님인데, 위험한 일이라도 당하려고요.”
“……성녀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질까 봐 걱정인 거지요.”
나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에녹 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꼭 레테가 누군갈 해칠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이겠지.
“가을이 오면 떠난다고 들었어요.”
에녹 경과 함께 나란히 걷다가, 문득 생각이 나 말을 꺼냈다.
“에녹 경도 레테와 함께 떠나나요?”
대공성의 기사였던 그는 카일로스의 몰락 이후로 줄곧 레테와 함께였다. 그렇다면 이대로 레테와 함께 교단으로 돌아가 성기사가 되는 것도 그의 금욕적인 이미지와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에녹 경은 대답 대신 나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
가만히 그를 향해 두 눈을 깜빡일 때였다.
“클로이.”
자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나를 발견한 레이몬드가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왔다.
“폐하!”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레이몬드는 내 손을 가볍게 그러쥐며 에녹 경을 힐긋 쳐다보았다.
“저 남자와 산책을 하고 있었군.”
“네. 후원을 걷던 중에 레테를 찾고 있던 에녹 경과 우연히 마주쳤어요.”
“에녹…… 브란스 경이었나.”
“네, 폐하.”
에녹 경은 황제의 시선이 닿자 허리를 더욱 깊게 숙이며 예를 갖췄다. 그를 내려다보는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클로이의 적적함을 달래 주어서 고맙다. 이제는 내가 왔으니 이만 가 보도록.”
나를 대할 때와는 달리 위압적인 말투였다. 어쩐지 내 손을 그러쥔 그의 악력이 조금 거세진 느낌이 들었다.
“네, 폐하. 그럼…….”
그가 나를 향해 싱긋 눈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멀어졌다.
“으음…….”
“왜 그러세요, 폐하?”
한참동안 에녹 경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는 레이몬드의 모습에 나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저 남자, 너와 꽤 가까워 보이던데.”
“많은 은혜를 입었지요.”
시간을 거슬러 오기 이전부터 내게는 은인인 사람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온 이후에도 내게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내겐 굉장히 고마운 사람이었다.
“너도 그 남자가 잘생겼다고 생각하나?”
“네?”
불쑥 튀어나온 레이몬드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어 되묻자 그가 이맛살을 작게 찌푸렸다.
“그러니까, 네 생각에도 그 남자가 나보다 더 잘생겼는지 묻는 거야.”
“……?”
“다리아는 그렇게 말하던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레이몬드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해 보여서, 나는 그만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어, 그게…….”
“젠장, 대답하지 마.”
레이몬드가 내 말을 끊으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귓불과 목덜미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잠자코 그를 쳐다보던 나는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리아가 그런 말을 했어요? 에녹 경이 폐하보다 잘생겼다고?”
“됐어. 이 주제는 그만하도록 하지.”
“으음, 다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뭐, 다들 각자의 취향이 있을 테니까요.”
“클로이, 이제 다른 이야기를…….”
“다들 에녹 경의 외양이 준수하다고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나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레이몬드를 살포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제 눈엔 폐하가 훨씬 더 멋있는걸요.”
“……크흠.”
나와 눈이 마주친 레이몬드가 몸을 움찔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거짓말.”
“진짜로요. 조금 억울할 정도예요. 저는 절대 폐하의 외모에 혹해서 사랑하게 된 게 아닌데, 누구든 폐하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게 될 테니까요.”
나는 레이몬드를 살살 달래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풀리는 게 육안으로 보여 웃음이 났다.
“그런데 왜 그 남자는 에녹 경이고 나는 그냥 폐하지?”
레이몬드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나도 이름으로 불러 줘.”
“지금 에녹 경을 질투하는 거예요?”
“그래, 질투하고 있어. 그것도 상당히.”
너무나 심각한 얼굴로 지금 질투를 하고 있노라 말하는 레이몬드의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나는 차마 다시 한번 그를 끌어안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가만히 손을 올려 그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글쎄요…….”
“글쎄요?”
“폐하는 아스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 폐하이시고, 저는 그냥 클로이 가넷슈인데 어떻게 그래요.”
“그냥 클로이 가넷슈가 아니야. 넌, 아스타 제국의 황제인 나조차도 작아지게 만드는 여자야.”
“제가 폐하의 이름을 불러 드렸으면 좋겠어요?”
“응.”
레이몬드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기대하는 눈초리였다.
“정 원하신다면…….”
나는 사르륵 웃으며 그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요.”
“클로이!”
금방이라도 내 입술 사이로 자신의 이름이 나올 것을 기대했던 레이몬드는 속았다는 표정으로 내 이름을 외쳤다.
나는 나를 붙잡으려는 그를 피해 달아나며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몇 걸음 달아나지 못하고 다시금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지만.
“정말 괘씸한데. 나를 아주 제대로 약 올렸어.”
그가 나를 뒤편에서 감싸 안으며 투덜거렸다.
“레이몬드.”
“……!”
“-라고 불러 드릴게요, 결혼식을 올린 뒤에는요.”
“허…….”
이름이 불린 순간 그의 품에 안긴 내가 온전히 느낄 정도로 온몸이 경직되었던 레이몬드는 곧바로 이어진 내 말에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정말이지,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데 재주가 텄어.”
그의 턱이 내 정수리 위에 닿았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만으로도 포근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 왔다.
“사랑해요, 폐하.”
“그래. 나도 사랑해, 레이디 가넷슈.”
레이몬드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삐지셨나요?”
“그럴 리가.”
“삐진 것 같은데…….”
“전혀.”
“그럼 왜 저를 그렇게 부르는데요?”
“그냥 격식을 갖추는 것뿐이야. 결혼 전까지는 나도 이렇게 부르겠어.”
“삐진 게 맞네요.”
“아니라니까.”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랑 같이 걸으시겠어요, 폐하?”
“…….”
잔뜩 토라진 와중에도 내 손을 덥석 잡는 그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끼며 함께 걸었다. 맞잡은 우리의 손이 불어 오는 여름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폐하가 좋아요.”
“그러시겠지, 레이디 가넷슈.”
“정말 좋아요.”
“…….”
“이쪽을 봐 줘요, 폐하.”
“…….”
여전히 토라진 게 풀리지 않은 모양인지, 레이몬드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본 나는, 깍지 낀 손을 들어 그의 손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클로이……!”
“이제야 제 얼굴을 보네요.”
“허, 정말이지…….”
레이몬드는 나를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방금 내가 한 것처럼 깍지 낀 손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조금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의 입술이 맞닿았던 손등도, 그의 입맞춤에 설레는 가슴도. 모두 간지러웠다.
“그런데 저곳은 무슨 용도예요?”
한참을 그와 함께 걷는데,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낡은 탑이 눈에 띄었다. 한 번도 사람이 출입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글쎄.”
레이몬드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도 잘 모르는 곳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그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 * *
아드리안 헤지스 공작은 피곤한 낯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두 남녀를 쳐다보았다.
“…….”
“…….”
벌써 닷새째, 하루도 쉬지 않고 찾아온 황제와 성녀가 제각기 맞은 편 소파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소 껄끄럽고 두려워하던 공작이었으나, 며칠간 반복된 상황에 익숙해진 탓인지 상당히 침착하게 그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했다.
한참동안의 고요가 흐른 뒤,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아직도 생각에 변함이 없나?”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클로이의 매력을 모르다니, 공작은 정말 가엾은 사람이군요?”
“슬프게도 말이지요.”
첫 번째 물음은 황제의 것이었고, 두 번째 물음은 성녀의 것이었다. 황제와 성녀는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뚫어져라 공작을 응시했다. 결국 공작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곳에 찾아와 저를 괴롭힐 생각입니까?”
“그대가 생각을 바꿀 때까지.”
“공작이 생각을 바꿀 때까지요.”
나이든 공작의 이마 위로 신경질적인 핏대가 섰다.
“그러니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제 생각을 돌리고자 하시냔 말씀입니다.”
“…….”
“…….”
“벌써 열 가문 중 아홉 가문이 폐하의 국혼에 지지 의사를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그런 상황에 굳이 저까지 설득하지 않아도 충분히 결혼식을 진행할 수 있을 텐데요.”
공작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국혼을 위해 필요한 건 귀족 의회에 속한 열 귀족 가문 중 일곱 가문 이상의 찬성. 그것마저도 교단의 승인이 난 이상 필수 요건은 아니었다.
이미 아홉 귀족 가문의 지지를 받아 냈는데도 굳이 자신까지 찾아와 협박하듯 시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곱 가문의 지지를 받는 것과 여덟 가문의 지지를 받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아홉 가문의 지지를 받는 것과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는 것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으니까.”
“떠나기 전까진 이곳에 남아서 최대한 클로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할 생각이거든요.”
황제와 성녀는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동시에 대답했다. 공작은 한참동안 앓는 소리를 내며 고심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제국의 위상이 우뚝 서기 위해서는 황실의 안주인인 황후의 위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클로이 가넷슈라는 그 아가씨에게 과연 출생을 뛰어넘을 만한 능력과 인품이 있는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공작……!”
그 말에 황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좋은 생각이에요! 공작도 반드시 클로이의 매력에 빠져 버리고 말 테니깐!”
성녀는 그 자리에서 손뼉을 치며 화사하게 웃었다.
대체 그 여인의 무엇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남자와 영향력 있는 여자의 마음을 빼앗은 것인지, 공작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 * *
종잇장을 넘기는 섬세한 손가락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다. 채광이 좋은 창가에 앉아 서책을 읽노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여유로움에 심신이 평온해졌다.
사브락, 사브락.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 찬 평화로운 황궁 도서관의 오후였다.
“크흠.”
어디선가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만 아니었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을 텐데.
“크흠, 크흠!”
문득 그 헛기침 소리의 근원이 내 머리 위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예순 가량의 노인이 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내게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 눈을 마주쳤으나 노인은 눈동자를 데루룩 굴려 내 시선을 피했다.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다시 고개를 내려 서책을 읽어 내리려 했다.
“…….”
“…….”
그러나 어색한 침묵과 함께 계속되는 노인의 시선에 나는 차마 더 이상 책을 읽을 수가 없어 몸을 일으켰다. 책을 빌려 방에 돌아가 읽을 심산이었다.
“잠깐.”
노인이 나를 붙잡지만 않았더라면 곧바로 도서관을 나갔을 것이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
조심스럽게 묻자 노인은 다시 입을 꾸욱 다물었다. 언뜻 그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서책을 향했다. 곧바로 노인의 의도를 파악한 내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건가요?”
“뭐? 아, 아니, 나는…….”
노인이 말을 더듬으며 대답을 흐렸다. 이제 보니 상당히 낯을 가리는 모양이었다.
“제가 양보해 드릴게요. 저는 이미 스무 번도 넘게 읽어 본 책이거든요.”
“이 책을 스무 번도 넘게 읽어 보았다고?”
“네, 아주 훌륭한 책이에요. 현존하는 아스타 제국 제일의 현자라 불리는 아드리안 헤지스의 책이랍니다. 대륙의 인간들이 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생존해 왔는지 잘 녹아나 있지요.”
“아드리안 헤지스를 알고 있나?”
잠자코 내 설명을 듣던 노인이 돌연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네, 그럼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까지 읽던 책을 노인의 품에 안겨 주었다. 얼떨결에 서책을 건너 받은 노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비록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분이 쓰신 책들은 빠짐없이 읽어 보았거든요. 괜찮으시다면 아드리안 헤지스의 책을 몇 권 더 추천해 드릴까요?”
“……부탁하지.”
노인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노인을 이끌고 서가 앞에 서서 두툼한 두께의 책을 지나 상대적으로 얇은 서책을 서너 권 꺼내들었다.
“아드리안 헤지스의 역사서가 처음이라면 이 책을 먼저 읽어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분이 젊은 시절 쓰신 책인데, 최근에 쓰신 책들이랑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대륙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거든요.”
“아가씨는 아드리안 헤지스를 상당히 신봉하고 있는 것 같군.”
“신봉……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분의 열렬한 추종자이긴 하지요.”
카일로스의 대공성에 갇혀 지냈을 적에, 내게 허락된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리타분한 역사서들 중에서도 아드리안 헤지스의 책들은 그분의 깊은 사유와 철학이 담겨 있거든요. 많은 걸 생각하게 해 주는 책들이었지요.”
“크흠, 그렇게 직설적으로 칭찬하니 부끄럽구먼.”
노인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중얼거렸다.
“네……?”
“아닐세, 아무것도.”
그러면서도 연신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못하는 노인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신사분도 아드리안 헤지스의 추종자로군요?”
“음? 아,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맞지요? 정말 반가워요! 제 주변에는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이가 없어 항상 아쉬웠거든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아드리안 헤지스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지 않을래요?”
“어, 그게…….”
잠시 망설이던 노인은 이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재미있겠구먼.”
* * *
채광이 좋은 넓은 창 너머에서 두 쌍의 붉은 눈동자가 데룩데룩 움직였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거지?”
“잘 안 보여요, 레이몬드! 나도 클로이를 보고 싶어요!”
화염처럼 붉은 머리통 하나와 그보다 조금 작은 달빛처럼 은은한 은빛 머리통 하나가 창가에 달라붙어 도서관 안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젠장,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아.”
“나도 클로이를 보고 싶다고요!”
내내 까치발을 들고 기웃거리던 레테가 결국엔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유리 위로 찰싹 달라붙었다.
“저 노망난 공작 같으니, 왜 남의 부인을 보며 실실 웃는 거야!”
“클로이는 어디…… 어머, 클로이와 공작의 표정이 나쁘지 않은 걸요?”
창문 안쪽을 두리번거리던 레테는 넓은 테이블 위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클로이와 아드리안 헤지스를 발견했다.
“보아 하니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 같아요. 저것 봐요, 두 사람 다 웃고 있어요.”
“음…….”
“내가 뭐랬어요? 공작도 클로이를 만나보면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라고 했잖아요.”
레테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자랑스레 콧대를 높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두 사람의 단란한 모습을 보는 레이몬드의 표정은 점점 험상궂게 변해 갔다.
“잘 봐, 성녀. 저건 단순히 마음에 들어 하는 표정이 아니야.”
레이몬드는 으스스한 목소리로 아드리안 헤지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저 늙은이가 부끄러워할 때 짓는 표정이라고.”
“그러고 보니 공작의 목덜미가 붉네요.”
“저 망할 공작이 클로이에게 흑심을 품은 게 틀림없어!”
“흑심이요?”
그 말에 레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의 마음은 아주 화사한 분홍 빛깔인걸요? 꼭 봄날의 들꽃처럼요.”
“뭐? 분홍 빛깔? 저, 저, 저 노망난 늙은이가……!”
발끈한 음성이 당장이라도 공작을 죽일 듯이 사나웠으나, 레테는 그가 왜 화가 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튼 두 사람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 다행이에요. 클로이도 즐거워 보이지요?”
“…….”
레테는 발랄하게 물었으나 레이몬드는 침통한 표정으로 그들이 대화를 마칠 때까지 우울하게 창밖에서 기다렸다.
마침내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아드리안 헤지스 공작이 먼저 자리를 떴을 때, 레이몬드는 쏜살같은 걸음으로 막 도서관에서 나오는 공작에게 다가갔다.
“아드리안 헤지스!”
아드리안 헤지스는 자신을 향해 사나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황제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멈추어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내 부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지?”
“부인이라니요? 아직 레이디 가넷슈는 황제 폐하의 부인이 아닙니다만.”
“뭐?”
“공작! 어때요? 내 말대로 클로이의 매력에 빠져 버리고 말았지요?”
레이몬드의 뒤를 총총거리며 뒤쫓아 온 레테가 공작에게 상큼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런, 폐하에 이어 성녀님까지. 저를 계속 지켜보고 계셨던 겁니까?”
“클로이와 대화를 나누어 보니 어땠나요?”
“두 분의 말씀대로 참 훌륭한 아가씨더군요. 요즘 보기 드문 박식한 아가씨였습니다. 오랜만에 아카데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지요.”
레이몬드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흡족히 미소 짓고 있는 공작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내가 이 정도로 질투가 심한 남자였나.’
본래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정확히는 다리아의 공작성에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온 마음을 다해 안겨 오던 그녀에게 입을 맞춘 이후로 급격히 투기가 늘어 버렸다.
레이몬드는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아드리안 헤지스를 노려보았다.
“나는 공작이 클로이와 만나게 되면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클로이는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적인 여자니까요!”
“허허허, 성녀님의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내가 지나친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 사과드리지요.”
“어머나! 그러면 이제 공작도 클로이와 레이몬드의 국혼에 찬성해 주는 건가요?”
레테가 손뼉을 치며 붕붕 뛰었다. 그러나 아드리안 헤지스는 쉽사리 대답하지 않고 성성한 수염만 쓸어내렸다.
“으음…….”
“뭘 망설이는 거지, 공작?”
잠자코 지켜보던 레이몬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레이디 가넷슈는 고작 황후 자리에 올리기엔 아까운 인재라서 말입니다.”
“뭐라?”
“나이가 차 아쉬운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아카데미에 입학을 시킨다면…….”
“아카데미?”
뜬금없는 소리에 레이몬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철학적인 사유도 깊고, 대화를 나눌수록 배움이 빨랐습니다. 이해력도 좋고요.”
“지금 무슨 헛소리를…….”
“무엇보다 아드리안 헤지스 철학에 새 획을 그을 수 있는 역량이 숨어 있는 아가씨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클로이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인 거지요?”
레이몬드와 레테는 동시에 두 눈을 깜빡이며 공작을 쳐다보았다.
“흠, 흠…… 그러니까 헤지스 공작가에서는 레이디 가넷슈와 황제 폐하의 국혼에 찬성하지 못하겠다는…….”
“아드리안 헤지스!”
“공작!”
두 사람이 같은 목소리로 버럭 외쳤다. 아드리안 헤지스는 능청스럽게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 * *
‘7월의 마지막 날, 클로이 가넷슈를 아스타 제국의 황후로 맞이할 것이다.’
귀족들이 가득 모인 회의장에서 레이몬드는 나와의 국혼을 발표했다.
‘교단의 승인과 더불어 귀족의회에서도 만장일치로 동의를 하였으니, 그와 관련해 왈가왈부하는 일은 더 이상 없길 바란다.’
만장일치의 찬성이라니.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놀라 멈칫하고 말았다.
“만장일치라고요? 정말이요?”
“그럼. 귀족 의회의 의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찬성 의사를 밝혔지.”
“당연한 결과지요, 클로이!”
누군가 개입된 게 틀림없었다. 아마도 음산하게 웃고 있는 레이몬드, 혹은 나 대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테. 둘 중에 한 사람일 테지.
곧이어 예비 황후를 모시기 위한 시녀단이 꾸려졌고, 젊은 영애들 중에는 익숙한 이들도 있었다.
“레이디 가넷슈! 아니, 이제 황후 폐하라 불러 드려야겠군요!”
“글로아 영애, 밀러 영애, 트라비아 영애, 그리고…… 케니스 영애까지.”
“한동안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다시 만날 수 없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황후 폐하. 제가 황후 폐하의 임시 시녀단에 들어오기 위해 아버지를 얼마나 졸라야 했는지 몰라요.”
“그러고 보니 혹시 그때 황후 폐하가 말씀하셨던 좋아한다는 분이 황제 폐하셨던 건가요?”
“어쩐지 브란스 경과 케니스 경의 앞에서도 꿈쩍 않으시더니…….”
“아무튼 축하드려요, 황후 폐하!”
“저도요, 정말 축하드려요!”
진심으로 나와 더불어 기뻐해 주는 그녀들의 모습에 나는 수줍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고마워요, 다들.”
순간, 방 안에 짧은 적막이 흘렀다. 아기 새처럼 쉼 없이 재잘재잘 떠들던 그녀들은 양 볼을 발그레 물들인 채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혹시 실언을 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때, 글로아 영애가 양손으로 엄지를 치켜들며 외쳤다.
“역시, 황후 폐하는 굉장해요! 역대 황후 중 어느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거예요! 분명 아스타 제국의 보물이 될 거예요!”
“네? 그게 무슨…….”
“부탁이에요, 황후 폐하. 정식 황후가 되신 이후에도 황후 폐하를 곁에도 모시게 해 주세요. 가문 대대로 영광일 거예요.”
“……?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호들갑스러운 그녀를 보며 나는 잠시 의문을 표했으나, 곧바로 잔잔히 웃으며 답했다.
과거, 에스델을 낳았을 때의 나는 정부의 신분이었기에 모두가 나와 에스델을 꺼려했었다.
물론 내 손으로 직접 그 아이를 돌볼 수 있었던 것은 지금에 와 생각하면 내게 굉장한 선물과도 같은 축복이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아이가 받았던 괄시마저 기꺼웠던 것은 아니었다.
나를 향한 세간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내가 달라졌기 때문인 걸까. 레이몬드가 내게 알려 준 것은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이었지만, 그것은 나로 하여금 내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사랑 받게 해 주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레이몬드가 내게 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을 닮은 뜨거운 감각이 가슴 속에서 울컥 튀어나오려 했다.
“황후 폐하, 이제 우리에게 말씀을 편히 낮춰 주세요.”
로델 밀러 영애가 내게 말했다.
“아직은 황후가 아닌걸요.”
“하지만 곧 될 테지요.”
이번에 대답한 것은 아멜리아 케니스 영애였다. 나는 잠잠히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멜리아.”
그리고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대답했다.
“로델, 제이시, 루나.”
그녀들은 내게 이름이 불릴 때마다 꺄르륵 웃다가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모여 있으니까 그때가 생각나네요. 우리 황궁 후원에서 티타임을 가졌을 때랑, 성녀님과 같이 피크닉도 가고…….”
“맞아요, 그때 캐롤라인 공녀가…….”
“…….”
“…….”
베스티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우리 사이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 죄송해요, 황후 폐하. 제가 실언을 했어요.”
그녀의 이름을 꺼낸 장본인인 트라비아 영애가 놀라 양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울먹였다.
“……괜찮아.”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모두 베스티의 친구였잖아. 이렇게 모여 있으니 베스티가 생각나는 건 당연한 일인 걸.”
베스티는 지금쯤 상처를 극복하고 있을까. 씩씩한 그녀니까, 괜찮겠지. 아니, 괜찮기는 힘들 거야. 가족들이 모두 그런 일을 당했으니까…….
비록 괜찮다고 말했지만 베스티의 생각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다른 이들도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혹은 나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는지 함께 조용해졌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나는 나를 위해 초빙된 수많은 학자들에게 제국의 역사와 황실 예법을 비롯한 수많은 것들을 배워야 했다.
도서관에서 만난 노인이 다름 아닌 아드리안 헤지스 공작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그야말로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너무해요! 저를 놀리셨군요?”
그가 바로 그 아드리안 헤지스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의 앞에서 그의 책들을 추천하며 그의 철학을 논하였다니.
“뭐, 덕분에 미래의 황후 폐하께서 이 아드리안 헤지스의 열렬한 추종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물론, 여전히 나는 레이디 가넷슈가 황궁보다는 아카데미에서 아드리안 헤지스 철학을 연구하는 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헤지스 공작은 껄껄 웃으며 나를 놀려 대기 바빴다.
마침내 다가온 결혼식의 날. 황제와 황후의 결혼식은 황궁이 아닌 수도의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모여든 인파 속에서 나는 레이몬드와 나란히 섰다. 긴장된 탓인지 자꾸만 손에 땀이 차올랐다. 레이몬드는 그런 내 손을 꼬옥 붙잡아 주었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그 말에 비록 긴장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지만, 한결 마음이 평온해졌다.
당연히 우리의 결혼식을 주관하고 싶어할 것이라 생각했던 레테는 의외로 대주교에게 그 역할을 넘겼다.
어젯밤 교단에서 황궁에 도착한 젊은 대주교가 우리의 결합을 만천하에 공고하기 위해 단 위에 섰다. 젊은 대주교의 앞에서 우리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사랑의 맹세를 나누었다.
“나, 아스타 제국의 황제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오직 클로이 가넷슈만을 순수한 마음으로 영원토록 사랑할 것을 맹세하노라.”
레이몬드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황후의 관이 내 머리 위로 얹어졌다. 그가 내 이마 위로 입을 맞춤과 동시에 힘찬 환호성이 온 광장을 뒤덮었다.
레테의 축가가 하늘 높이 울렸다. 무려 성녀의 축가라는 진귀한 광경에 홀린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미성에 감동받아 눈물마저 훌쩍이며 우리의 결합을 축복해 주었다.
“황제 폐하께 영광을!”
“황후 폐하께 영광을!”
“아스타 제국에 영광을!”
황제와 황후의 결혼식으로 인해 온 제국이 축제의 도가니가 된 가운데, 황궁에서는 외국에서 온 손님들과 제국의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피로연이 펼쳐졌다.
나는 레이몬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모여든 귀빈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건넸다.
오늘 피로연에 초대된 이들은 아드리안 헤지스 공작을 포함해 그간 내가 무도회장에서 만나지 못했던 나이든 귀족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피로연장을 누비는 와중에, 문을 지키던 기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다리아 캐롤라인 공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문을 열고 당차게 안으로 들어온 이는 다리아였다.
그녀는 드레스가 아닌 남자 귀족들이 주로 입는 정복 차림이었는데, 그 모습이 황후 시절의 모습과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그녀의 길쭉한 다리가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장내에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확히 레이몬드와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비록 그녀의 결혼이 무효화되었다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레이몬드의 ‘전 부인’이자 아스타 제국의 ‘전 황후’로 기억된 채였다.
게다가 내가 한때 그녀의 시녀였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전 황후와 현 황후 사이에 벌어질 일을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닌 척하면서 이쪽으로 시선을 곤두세우는 게 느껴졌다.
“공작 다리아 캐롤라인이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녀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우아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빙긋 두 눈을 휘었다.
“어서 와요, 다리아. 당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반기자 사람들은 실망한 기색으로 관심을 돌렸다.
“예쁜 얼굴이 뚫어지겠군요. 다들 저리 황후 폐하만 주시하고 있으니.”
“익숙해져야 할 일이지요.”
내가 생긋 웃자 다리아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맛살을 구겼다.
“분명 다시 만날 때엔 말씀을 놓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황후 폐하.”
“그야 방금은 황후로서 제국의 공작인 그대에게 마땅히 어울리는 예를 갖추기 위함이었고.”
나는 양 팔을 벌려 다리아를 끌어안으며 다시 인사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다리아.”
“……이것 참. 또 이렇게 사람을 홀리려 드시니, 원.”
다리아는 피식 웃으며 나를 마주 안았다.
“그런데 다리아는 내게 말을 편하게 해 주지 않을 거야?”
“황후 폐하의 지위가 보다 굳건해질 때까지, 당분간은요. 늘 새로운 가십거리를 찾아 물어뜯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굳이 먹잇감을 던져 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조금 속상한데.”
“원래 그 자리는 외로운 자리지요. 그래도 황후 폐하의 곁에는 사랑하는 이가 있으니까, 외롭지 않을 거예요.”
다리아가 내 옆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레이몬드를 힐긋 보며 속삭였다.
“대체 언제까지 그녀를 껴안고 있을 건가, 캐롤라인 공작?”
“억울하네요. 나를 먼저 끌어안은 건 황후 폐하신데.”
다리아가 툴툴거리며 나를 놓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분명 좋은 황후가 될 거예요. 비록 나는 내 슬픔과 복수심에 빠져 내가 짊어져야 했던 최소한의 책임만을 지려 했지만, 황후 폐하는 다른 이의 무게마저도 대신 짊어 주는 사람이니까.”
“잘 할 수 있을지, 아직도 걱정이 많아. 단순히 서류 작업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보고 이끌어나가야 하는 자리니까…….”
“뭘 걱정하시나요. 사람을 대하는 건 나보다 훨씬 뛰어나잖아요. 외교적인 부분에서는 황제께서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상당히 빛을 발휘할 텐데요.”
“내가……?”
“아무튼 결혼 축하드려요. 여전히 황후 폐하가 더 아깝다고 생각되지만, 오래오래 그 콩깍지 간직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라요.”
다리아는 나를 향해 씨익 웃으며 자리를 떴다. 레이몬드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라고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그녀의 험담을 하며 나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그래 봤자 사생아 출신인걸! 어떻게 그런 여자를!”
한손에 술잔을 들고 있던 젊은 귀족 하나가 주변의 귀족들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공교롭게도 그 귀족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채라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이몬드를 발견할 수 없었다.
“감히.”
레이몬드가 귀족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우선 당장 달려들어 젊은 귀족을 물어뜯을 것만 같은 그를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레이몬드. 화를 내지 말아요.”
나는 일단 그를 진정시키고서 홀로 그 귀족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피로연에 참석해 주어 감사해요.”
“헉……! 아…… 그…….”
“이름이?”
“세르비아 딜런…… 입니다, 황후 폐하.”
“그렇군요.”
그는 바로 뒤쪽에서 내가 자신의 소리를 들었을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나 보다.
나는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젊은 귀족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귀족의 얼굴이 차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가 푹 익은 토마토처럼 터질 듯이 새빨개졌다.
“그럼 연회를 즐기시길.”
나는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방금 뭘 한 거지?”
“다리아가 알려 줬어요. 상대가 출신을 문제 삼아 무시할 때는 화를 내거나 당황하지 말고 그저 미소 지어 주라고요.”
“음…….”
레이몬드는 뭔가 못마땅한 듯 이맛살을 구기고 있었다.
“쓸데없는 걸 알려 줬군. 그런 미소는 내게만 지어. 널 비아냥거리는 자들은 모두 내가 처리할 테니.”
“처리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아주 나쁜 짓을 하려는 악당 같잖아요.”
키득키득 웃자 레이몬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설마 진짜로 나쁜 짓을 할 생각이었어요?”
“아, 아니. 난 그게 아니라…….”
당황해하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바람을 쐬러 갈래요?”
“그래.”
탁 트인 테라스에 들어서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양손으로 난간을 짚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서서히 해가 저무는 것이 보였다.
“클로이.”
나직한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레이몬드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부터는 진짜 부부가 되는 거로군.”
“네, 레이몬드. 진짜 부부예요.”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얼마나 바랐었는지, 너는 모를 거야. 죽는 순간마저, 오직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네가 행복해지는 것……. 그리고 행복해진 네 곁에 내가 함께 하는 것…….”
일순,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올려다본 그의 얼굴에는 차마 감출 수 없는 격한 기쁨이 어리어 있었다.
“너는 지금 행복한가?”
언젠가 시간을 막 거슬러 온 내게 그가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행복해요.”
서럽게 눈물만 흘리던 그때와는 다른, 벅찬 행복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은은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나와 그의 입술이 막 맞닿으려던 순간이었다.
“클로이! 여기 있었…… 어머!”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지붕 위에서 난간 위로 폴짝 뛰어 내리던 레테는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죄, 죄송해요.”
“…….”
“…….”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우리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던 레테가 새빨개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방해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레테는 이만 가 볼 테니 두 사람 즐거운 시간 보내요.”
그 말만을 남기고, 레테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허.”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레이몬드였다.
“이만 돌아가 보세요.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울 순 없으니까요.”
슬슬 초야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신부의 초야 단장은 신랑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요구했기에 나는 레이몬드를 두고 먼저 자리를 떠야 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다시 봐요, 레이몬드.”
아쉬워하는 그를 달래 주며 겨우 돌려보낸 나는 먼저 피로연장을 떠났다.
어느덧 주위는 어두운 밤이었다. 시녀들은 내 모습이 보이자마자 늦었다며 나를 황급히 끌고 갔다. 그들의 손길에 따라 나는 화장을 가볍게 고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도, 후에도 새신부가 되어 초야를 보내는 건 처음이라 굉장히 부끄러우면서도 설레었다.
“황후 폐하, 너무 아름다우셔요!”
“황제 폐하께서도 황후 폐하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말 거예요.”
치장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합궁의 시간이 다 되었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셔야 해요.”
“응원할게요, 황후 폐하!”
그녀들은 나를 향해 요사스러운 응원의 포즈를 취해 주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퍽 귀여워서 나는 살풋 긴장이 풀렸다.
그녀들과 헤어진 나는 조용히 두 주먹을 말아 쥔 채 하얀 비단 위로 붉은 꽃잎이 흩뿌려진 긴 복도를 홀로 걸었다.
마침내 그가 있을 문 앞에 선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한번 하곤 문고리를 돌렸다.
“……!”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굵은 손바닥이 내 손목을 거칠게 붙잡아 끌어당겼다.
“클로이.”
“깜짝 놀랐잖아요.”
눈 깜빡할 사이에 그의 품에 안긴 꼴이 된 나는 밉지 않게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정염이 가득한 눈으로,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 날을, 굉장히 오래도록 기다려 왔어.”
차마 감추지 못하는 열렬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를 향해,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려 매달렸다.
“레이몬드.”
느릿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참지 못하고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이다지도 나를 사랑해 주는 남자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푸스스 두 눈을 휘었다.
“그럼 이제 알려 줘요, 당신이 나를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내가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나를 덮쳤다. 두 입술이 부드럽게 맞물리며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밤 그의 크나큰 사랑 중 어느 한 조각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그를 그러안으며 함께 몸을 맞대었다.
문득 눈물이 날 것처럼 코끝이 시큰거렸다. 물론 그것이 슬퍼서가 아닌, 지나친 행복감으로 인한 것임을 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오래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결국 당신은 내게 행복을 알려 주었구나.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나의 행복을 빌어 주던 남자. 이 남자와 함께라면…… 앞으로의 모든 나날들이 모두 아름다울 것이리라.
그 벅찬 행복감을 느끼며 나는 다시금 내 입술 위로 내려앉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입을 맞추었다.
그는 내게 행복이었다. 그와 함께한 지난날 속에서도, 입술을 맞댄 이 순간도, 그리고 앞으로 그와 함께할 모든 순간에서도. 그는 내게 영원한 행복이었다.
아득히 커다란 그의 사랑에 몸을 뉘이며, 밤의 자락을 흘려보냈다. 오랫동안 나를 아프게 하였던 그 모든 고통과 슬픔도 함께. 모두 흘려보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