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아름다운 미끼의 반격
차박, 차박. 어둠 속에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귓가에 울리는 발자국 소리에 가만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카일로스…….”
창살 너머로 그 남자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마침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듯 짙은 미소는 한없이 매력적이었지만, 동시에 역겨웠다.
“이제는 더 이상 숙부님이라 부르지도 않는구나. 물론 나는 이 편이 훨씬 좋지만.”
“…….”
“어때, 내가 말한 것은 더 생각해 보았니? 가엾은 클로이, 그러게 내가 뭐라 했어. 황제는 널 사랑하지 않아. 그가 진실로 너를 사랑했다면 어떻게 이 차갑고 더러운 곳에 널 버려 두었을까.”
그가 품속에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열쇠를 꺼냈다. 곧 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리며 나를 가두던 철문이 열렸다.
“널 도울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나와 함께 가자, 클로이.”
“어떻게 도와 줄 건데요?”
나의 물음에 그가 소리 없이 두 눈을 휘며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한 발짝, 두 발짝…… 내가 묶여 있던 의자 앞까지 다가온 그가 상냥하게 웃으며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살결이 상했구나.”
턱선을 타고 내려온 손끝이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꼭 그때가 생각이 나. 나는 네게 손을 내밀었고, 너는 내 손을 붙잡았지. 시뻘건 화염 속에 불타 새카만 재가 되어 내려앉은 가넷슈 저택. 하얀 눈을 맞으며 내 손을 붙잡은 너.”
“…….”
“다시 내 손을 잡아, 클로이.”
그가 내 어깨를 쥐지 않던 반대편 손으로 내 손을 꾸욱 붙잡으며 속삭였다. 나는 승리감에 한껏 고취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옳았어요. 폐하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요.”
레이몬드가 내게 주었던 것을 모조리 부정하는 입술 사이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날 사랑할 수 있는 건 당신뿐이란 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힘주어 대답하자, 그가 흡족한 듯 웃으며 두 눈을 가늘게 휘었다.
“방황은 짧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나를 여기서 꺼내 줄 건가요?”
“방황이 끝났으니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클로이.”
의자에 결박되어 있던 내 몸을 해방시킨 그가 나를 안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오랜 세월 내가 갈망했던 그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며 말했다.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 * *
카일로스와 나를 태운 마차는 빠른 속도로 황궁 밖으로 달리다가, 서서히 속도를 줄여 나갔다.
차츰 느려진 마차 안에서 무심하게 창밖만 내다보자니, 맞은편에서 지긋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힐끔 고개를 돌리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우아하게 다리를 꼬아 앉은 카일로스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팔짱을 풀고서 느슨하게 웃었다.
“너와 함께 있으니 자꾸 예전 생각이 나.”
“……?”
“마차를 처음 타고서 멀미를 했었잖아. 하지만 넌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 내게 미움 받기 싫어서.”
“그걸, 알고 있었어요?”
“물론.”
카일로스는 빙긋 입꼬리를 말며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그가 내 얼굴을 소리 없이 쓰다듬었다.
“너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게 있을 리가 없잖니.”
나를 향한 검은 눈동자 사이에 서린 애틋함이 과거의 잔재를 안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불쑥 물었다.
“그런데 왜 힘들어하는 내게 괜찮냐는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으셨나요?”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클로이, 그건…….”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요.”
“…….”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꾸욱 다무는 그를 보며 짧게 코웃음을 쳤다.
사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제게 잘 보이겠다며 행동하던 어린 내 모습이 재미났겠지. 그는 언제나 나의 수줍던 마음을 기만하며 즐기는 사람이었으니까.
“늦었지만 사과할게. 미안해, 클로이. 그때는 나도 어리석어서 너의 소중함을 몰라 봤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젠 절대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아.”
그렇다면 소중하지 않은 이들은 얼마든지 농락하여도 된다는 말인가. 그가 스스로 말하는 ‘사랑’이란 걸 깨닫지 못했더라면, 나를 기만하였던 그의 행동들은 모두 정당화되는 것일까.
둔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의 ‘사랑’은 여전히 그를 닮아 이기적이었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차츰 대공성이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내가 도망친 걸 이제 곧 폐하께서도 알아차릴 거예요.”
나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한 목소리로 스치듯 말했다.
“알아차린다 해서, 별수 있겠니.”
카일로스 또한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다시 돌아왔으니, 루드비히 대공가의 모든 힘을 쏟아 널 보호할 거란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하지 못한 일이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어. 나만이 널 사랑하니까.”
세뇌하듯 반복되는 말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는 구겨진 나의 표정을 보지 못했으리라. 한번 창밖을 향한 나의 시선은 마차가 멈출 때까지 그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마침내 마차가 멈추고, 우리는 대공성에 도착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떠났던 고성 앞에서 나는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들어가자.”
내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웅장하고 고즈넉한 고성이 두 문을 활짝 연 채 나를 반기고 있었다.
좌우로 시립한 기사들이 우리의 도착에 허리를 숙였다. 유난히 화사하게 반짝이는 백금발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으나, 나는 모른 체하며 앞을 보고 걸었다.
“에릭슨이 보이지 않네요.”
“…….”
나는 거슬러 온 시간에서도 끝내 그 서러운 겨울을 넘기지 못하였던 늙은 집사를 떠올리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응당 제일 먼저 나와 카일로스를 반겼을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결국 이번 시간에서도 그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나 보다.
내 말에 카일로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기에 그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사용했던 방으로 향하는 내 걸음을 그가 멈춰 세웠다.
“어디 가니, 클로이?”
“내 방에요.”
나는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긴 더 이상 네 방이 아니야.”
그는 나를 자신의 침실 바로 옆에 있는 대공비의 침실로 데려갔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아마 엘리자베스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사용했을 바로 그 방 말이다.
“싫어요.”
나는 카일로스를 뿌리치며 그 방에서 뒷걸음질 쳐 나왔다.
“클로이?”
그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나는 혐오를 가득 담아 그에게 되물었다.
“지금, 그 여자가 사용했던 방을 내게 쓰라는 건가요?”
“무슨 소리야. 이 방은…….”
“말씀드렸잖아요. 이제 와서 거슬러 온 그 시간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다면, 어떻게 나를 죽인 여자가 사용했던 방을 내게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내가 불쾌할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한 듯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이 방은 그 여자가 사용했던 방이에요. 이 방엔 한 발짝도 들이기 싫어요.”
“그래, 그렇구나…….”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이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 다른 방을 준비할게. 그때까지 내 침실에서 머물면…….”
“아니요. 나는 원래 쓰던 방이 편해요. 당신의 침실에도 그 여자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는걸요.”
“…….”
“사실 이 성 안 어느 곳도 그 여자의 흔적이 머물지 않은 곳이 없지만.”
상처를 받은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나는 짧게 조소했다. 우스웠다. 그 시절 상처를 준 사람이 정작 누구였는지 나도 당신도 모르지 않을 텐데.
* * *
고요한 다이닝 룸에 간간이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새어나왔다. 갇혀 있는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지만, 모처럼 맛본 따뜻한 음식들도 딱히 나를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결국 나는 조금 깨작이다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내가 탈출한 사실은 곧 황궁 전체를 넘어 제국 전역에 알려질 거예요. 어찌 됐든 황후의 시해범이라 누명을 쓰고 있으니 난 자유롭지 못하겠지요.”
묵묵히 나의 말을 듣던 카일로스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그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무엇이든?”
“그래. 대공비의 자리를 원한다면 널 대공비로 만들어 줄 테고,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줄게. 단, 네가 내 옆에 있다는 조건하에.”
“방금 못 들었나요? 난 지금 황후 시해범으로 몰려…….”
“물론 네가 내게 한 말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
카일로스의 온화한 목소리가 내 말을 잘라냈다.
“그리고 난 가능하단다, 클로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어. 너에게 황후의 관을 약속해 놓고서 결국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그 남자와 달라.”
도무지 저의를 파악할 수가 없어서, 나는 카일로스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불가능을 말하고 있었다.
기실, 그는 언제나 불가능을 말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끝내 그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뒤바꿔 온 남자이기도 했다.
그가 불가능을 실현시키기 위해 어떤 방법들을 사용하였는지, 어렴풋이 알 듯 말 듯하였다.
“그 사람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럼 그 사람이 내게 주지 못했던 그 자리를 약속해 줄 수 있어요?”
“황후가 되고 싶니?”
그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입 안이 바싹해졌다. 긴장하지 않은 척 등을 꼿꼿이 세우며 고개를 젖혔다.
“황후가, 되고 싶어요.”
마치 그 대답만을 원했던 듯, 그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그 남자가 네게 주지 못했던 자리, 내가 네게 줄게.”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내게로 걸어왔다. 테이블 아래로 늘어진 내 손을 붙잡아 쥐며 요사스러운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약속해, 클로이. 그 남자를 죽이고 내가 황제가 되어 널 나의 황후로 맞이할 거야.”
또, 죽인다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목적에 따라 아무런 죄의식 없이 다른 이를 해쳐 왔다. 그것이 그가 불가능을 실현하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극악무도한 방법이었다.
아주 오래전, 다리아의 뱃속 아이부터…… 하물며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던 어린 나를 갖기 위해 가넷슈 자작과 그의 일가를 몰살하였고…… 거슬러 온 시간 속의 레이몬드와 자신의 부인이었던 여자까지…….
그랬던 그가 또다시 다른 이를 죽이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유일하게 나를 온전한 나로 존재케 하는 그 남자를, 감히 죽이겠다고.
“불가능을 말하고 계시네요. 당신이 지난 생에 그 사람을 해치기 위해 손에 쥐었던 패를 이제는 모두 버린 걸로 알고 있는데.”
막대한 재력으로 그를 뒷받침해 주었던 로잘라인 후작가와의 결합은 이미 결렬된 지 오래였다.
성녀가 레이몬드에게 상당한 호감을 표하고 있었기에, 황실과 교단과의 관계 또한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귀족 의회가 전부 레이몬드에게 등을 돌렸던 과거와 달리, 레이몬드는 귀족 의회와도 어느 정도 평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 과거와 같이 레이몬드를 제거하고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있다 자신하는 걸까.
“대신, 새로운 패가 손에 있지.”
카일로스는 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찬찬히 이마 위로 입술을 내렸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 나의 클로이.”
* * *
식사를 마친 카일로스는 굳이 나를 방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정말로 오늘 나와 함께 내 침실에서 잠들 생각이 없는 거니?”
그가 내 어깨 너머로 보이는 방 안의 풍경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내키지가 않아. 너를 이런 곳에서 재워야 한다는 게…….”
“하지만 지난 팔 년 동안 당신은 내 거취에 대해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죠.”
“…….”
냉랭하게 받아치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볼게요.”
“클로이.”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내 손목을 그가 낚아챘다.
“네가 내게 돌아온 첫 밤이잖아.”
한 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몸을 바싹 붙여 오는 그의 행동에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지려 했다.
“이대로 널 재우고 싶지 않아.”
그러나 나는 온화하게 웃는 낯으로 그의 가슴팍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의 검은 눈동자 위로 짙은 열망이 감돌았다.
“하지만, 루드비히 대공님.”
더 이상 나의 가족이 될 수 없는 남자의 공식적인 직함을 부르며, 나는 그의 가슴을 살포시 밀어냈다.
“당신은 아직 내게 그 사람과 다르다는 걸 보여 주지 못했잖아요.”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밀어내자, 그가 멈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를 원하기 전에 당신을 제대로 보여 줘야지요.”
그의 팔이 느슨해진 틈을 타, 나는 몸을 돌려 그에게서 벗어나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내게 가르쳐 주었던, 남자를 홀리기 위한 웃음을 흘리며 방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멍하니 선 채로 넋을 놓고 내 얼굴을 쳐다보던 그 멍청한 표정이란.
쯧, 혀를 차며 마음껏 그를 비웃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려 준 이는 다름 아닌 카일로스였다. 그는 레이몬드와 같은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아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다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결국 그토록 스스로 경계하던 거짓된 사랑 놀음에 빠져 버린 꼴이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닫혀 있는 창가로 갔다. 창문을 여니 따스한 저녁 공기가 방 안으로 쏟아졌다.
“그 사이 계절이 바뀌었구나…….”
창밖으로 손을 뻗어 바깥의 공기를 음미하며,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계절이 바뀌기 전에 모든 게 끝나야 할 텐데.”
“물론, 그럴 겁니다.”
잔잔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에녹 경이 방의 중앙에서 나를 향해 걸어왔다.
“언제부터 이 방에 있었던 거지요?”
“당신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을 무렵부터. 미리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선 그가 가볍게 무릎을 꺾으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레이디 클로이, 드디어 제가 당신을 지켜 줄 때가 왔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 서럽도록 추웠던 어느 밤에, 그는 이곳에서 꼭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내게 지켜 주겠다 맹세를 했었다.
나는 더 이상 황망해하지도, 어색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도움은 언제나 제게 영광이지요, 에녹 경.”
“기쁘군요.”
그가 빙긋 웃으며 내 손을 놓아주었다. 몸을 일으켜 마주 선 그를 올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한참 젖혀야 했다.
내 또래의 아가씨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수려한 얼굴을 쳐다보며 나는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문을 그에게 터뜨렸다.
“에녹 경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를 돕는 거지요?”
당신은 왜 나를 돕는 걸까. 과거에는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에녹 경은 대답 대신 흐릿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당신이, 레이디 클로이이기 때문입니다.”
“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할 때,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대로 거두어졌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그는 한없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결례를 범하였군요. 부디 용서해 주시길.”
“…….”
그가 말한 결례가 방금 전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일을 말하는 거라면, 조금 당혹스러웠다.
물론 친밀하지 않은 관계에서 그것은 숙녀에게 결례가 되는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방계의 사생아인 내게 그런 행동을 하는 걸 결례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들의 손길을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지.
게다가 나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와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가 된 것 같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매 순간 마치 나를 성스러운 이처럼 조심스럽게 대하는 그를 보면, 내가 그만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는 여자인가 의문이 솟기도 했다.
에녹 브란스 경은 여전히, 내겐 어렵고 이상한 사람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깨어나셨나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은밀히 회복 중이십니다. 이제는 시중인들의 도움 없이 걷는 것까지 가능합니다.”
“그것 참 다행이에요.”
에녹 경이 전해 준 다리아의 소식에 눈물이 핑 감돌았다. 나는 양손을 가슴 위에 얹으며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다리아가 무사히 회복하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대공성에 있는 내게 크나큰 안도감을 주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에녹 브란스. 대가 없이 내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당신을 마주할 때면 오랜 그리움을 품은 감정이 내 안에서 이토록 날뛴다.
오래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언제나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다.
“감사 인사는…….”
그리고 그런 내게 당신은 언제나처럼 온유한 미소로 화답한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다시 받지요.”
* * *
한때 내가 열성적으로 가꾸었던 후원은 더 이상 관리하는 이가 없어 버려진 채였다. 황폐함만을 안고 있는 후원을 걸으며 마른 나뭇가지를 밟았다.
“조심해, 클로이.”
아까부터 내 뒤를 따라 걷던 카일로스는 마른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나를 붙잡았다.
느리게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자, 카일로스는 내 눈치를 슬쩍 살피며 붙잡던 팔을 놓았다.
“……네가 또다시 내 앞에서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단다.”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말을 무시하며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언젠가 이곳에서 저 남자와 입을 맞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저 남자는 나 외에도 수많은 여자들과 이곳을 함께 거닐곤 했다. 자신만을 쳐다보던 내 앞에서, 보란 듯이 몸을 맞대며.
그 모든 순간들이 내게 상처 주는 일들이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피곤해…….”
어느 순간 걷는 것마저 귀찮아져 버린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서 권태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많이 피곤하니? 이제 그만 쉬러 갈까?”
“…….”
나는 아주 느리게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마음을 열 듯 열지 않을 듯 애매한 나의 태도에 점차 그가 조급해하는 게 느껴졌다.
“제발, 클로이…….”
“…….”
“아무 말이라도 해 봐.”
그가 쓰게 웃으며 내게 애원했다.
“네가 그런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으면 나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카일로스는 내가 레이몬드의 눈을 가릴 수 있게 여러 가지를 알려 주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는 데 굉장히 탁월한 능력이 있는 남자였으나 정작 그 자신은 언제나 메말라 이용할 한 끗의 감정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를 의지 없는 인형으로 키운 건 당신이잖아요.”
그토록 감정을 경계하던 이가 이처럼 환하게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는 것은 칼을 쥐여 주며 찔러 달라고 들이미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게 당신에게 중요했나요?”
“……중요해.”
흐릿한 말끝이 살풋 젖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적신 것이 다름 아닌 죄책감이란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그만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
“…….”
나와 카일로스는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남자가 내 앞에서 절절매는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썩 우스운 모양이었다.
“전하.”
중간에 난입한 불청객만 아니었더라면, 좀 더 느긋하게 그의 우스운 모양을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네, 그…… 응접실에 모셨습니다.”
대공성의 기사가 나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아뢰었다. 손님의 정체를 내게서 숨기려는 눈치였다.
“아, 그래, 손님…….”
카일로스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그의 기사와 마찬가지로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가 보세요. 손님이 왔다면서요.”
뚱한 표정으로 서 있던 나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일로스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내게 조금 뒤에 다시 보자고 속삭이곤 응접실로 가 버렸다.
“에녹 경, 근처에 계신가요?”
나의 부름에 근처 수풀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에녹 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 당신의 근처에.”
에녹 경이 빙그레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하고 계세요?”
“제 표정이 즐거워 보이나요?”
그가 당황한 듯 낯빛을 굳히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네, 무척이요.”
“음…….”
잠시 할 말을 고르던 그가 나와 눈을 맞추며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이디 클로이가 굉장히 멋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루드비히 대공의 앞에서도 당당하고 꼿꼿한 그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즐거워하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요.”
예상치 못한 칭찬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런 내 얼굴을 보며 그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이제 그 남자로부터 완연히 벗어난 거지요?”
“……아마도요. 더 이상 그가 두렵거나 신경 쓰이지 않는 걸 보면.”
나는 곧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에녹 경의 부드러운 녹색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축하드려요, 레이디 클로이.”
“감사해요.”
나는 짧게 화답하고서는 곧바로 그를 찾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공이 누구를 만나는지 알고 있나요?”
“죄송합니다, 레이디 클로이. 대공이 더 이상 저를 신임하지 않아서요.”
에녹 경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 전부터 정체를 숨긴 남자가 대공성에 은밀히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추측컨대 상대는 대공과 비슷한 신분의, 최소한 그가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위치의 남자예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요?”
“……만일 낮은 신분의 남자였더라면 일이 끝난 이후에 곧바로 처리했을 테니까요.”
내내 부드럽게 풀려 있던 에녹 경의 눈가가 작게 찌푸려졌다. 그 모습에 나는 그가 말한 ‘처리’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상대는 카일로스가 사냥이 끝난 뒤에도 함부로 제거할 수 없는 신분의 사람, 아마도 그와 비슷한 지위를 지닌 고위 귀족일 것이었다.
“성 플로라의 축일 이전에 대공이 캐롤라인 공작을 찾아간 일이 있었어요.”
“캐롤라인 공작이요?”
설마 카일로스가 말한 ‘새로운 패’가 캐롤라인 공작이었나?
하지만 그는 다리아의 숙부인데. 어째서 그가 카일로스를 도와 다리아를…….
아니, 아니다. ‘그 여자’가 다리아를 배신했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녀의 혈육이라 해서 그녀를 해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에녹 경.”
“별 말씀을요.”
에녹 경은 구태여 내게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서 방금 전 카일로스가 향한 응접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가 만나는 이가 캐롤라인 공작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응접실의 입구에 다다르자 시립한 채 문을 지키고 있는 대공성의 기사 두 명이 보였다. 나를 발견한 기사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막아섰다.
“이 이상 들어가는 건 안 됩니다, 레이디 가넷슈. 지금 전하께서는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십니다.”
“아…….”
그 말에 내가 풀이 죽은 사람처럼 두 눈을 내리깔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자, 강경하게 막아서던 기사들이 멈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전하께 중요한 손님이 오셨다 하여 인사드리고 싶은데,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기사들은 난처한 얼굴로 거듭 내게 사과했다. 물끄러미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던 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저는 이만…… 아…….”
그대로 돌아서려던 내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차가운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내 몸을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재빠르게 부축해 주었다.
“괘, 괜찮습니까?”
고작해야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기사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내게 물었다. 나는 힘없이 기사의 품 안에 추욱 늘어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까지만 부축을 부탁 드려도 될까요?”
“그 정도는…….”
젊은 기사가 함께 짝을 이루어 응접실 앞을 지키던 조금 더 나이가 있는 기사에게 허락을 구하듯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그의 선배 기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주었다.
* * *
응접실 안에는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캐롤라인 공작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갑갑한 베일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매번 이렇게 정체를 숨기고 새파랗게 어린 대공을 찾아와야 하는 게 그는 무척이나 불만이었다.
그러나 카일로스에게 공작의 불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태도로 어떻게 하면 레이몬드를 제거할 수 있을지에 관해 논의할 뿐이었다.
“암살이나 무력으로 황제를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무골을 당해낼 인재가 있을 리 없으니까.”
“대공가의 기사 중에 실력이 출중한 이가 있다고 들었소.”
캐롤라인 공작이 떠보듯 묻자 카일로스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에녹 브란스 말인가?”
확실히, 에녹 브란스는 평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실력만으로 곁에 둘 만큼 실력이 출중한 이였다.
‘하지만 그 자는…….’
그러나 카일로스는 어쩐지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에녹 브란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카일로스는 그를 꽤나 신임했다. 그러나 그는 카일로스를 배신하고 클로이가 그녀의 아이를 빼돌리게 도와주었다. 결국엔 제게 덜미가 붙잡혀 끔찍한 고문 속에서 한쪽 눈을 잃게 되었지만.
그가 왜 자신을 배신하고 클로이를 도왔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뭐, 굳이 자세히 캐묻지 않아도 뻔한 이야기였다.
비극적인 처지에 놓여 있는 미녀를 돕기 위해 뛰어난 능력의 기사가 등장하는 것은, 오랜 전설과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온 이야기니까.
되돌아 온 시간에서는 아직 그가 어떠한 배신도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꺼림칙한 마음은 남아 있었다. 때문에 돌아온 이후로 줄곧 그를 멀리 해 왔다.
“에녹 브란스의 실력이 출중한 건 맞으나, 정면으로 황제와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정면으로 맞서는 게 아닌 다른 방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소.”
캐롤라인 공작은 다소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꽤나 흘렀음에도 여전히 다리아의 생사 유무가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그는 굉장히 조급했다.
황제는 황후의 시녀였던 클로이 가넷슈를 황후의 시해범으로 인정하였으나, 황후와의 이혼 절차는 변함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차라리 이대로 황후가 영영 눈을 뜨지 못한다면 좋으련만, 만에 하나 그 여자가 살아서 황궁 밖으로 나온다면…….
“황제든, 황후든. 모두 없앨 수만 있다면 캐롤라인 공작가의 모든 힘을 걸고서 대공을 도울 것이오. 이번에 황후에게 독을 먹이는데 도움을 주었던 그 여자를 다시 이용하는 건 어떻겠소? 그 여자라면 황궁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지 않소?”
“그 여자가 우릴 도우리라 생각하는가?”
“지은 죄가 있으니 잘만 협박한다면 우리에게 힘을 실을 법도…….”
“으음…….”
카일로스는 이맛살을 구기며 작게 신음했다. 클로이에게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클로이 가넷슈가 없는 레이몬드는 델 아스타로트는 더 이상 사랑에 빠져 사리분간 못하는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과거와 달리 교단 또한 황제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도 안 된다면 이번에 대공이 빼낸 그 계집을 미끼로 삼는 건? 클로이 가넷슈라고 했던가. 황제를 사로잡은 그 요부 말이오. 보아 하니 황제는 아직 미련이 철철 넘치는 것 같은데.”
“그건 안 된다.”
카일로스는 냉랭한 목소리로 칼같이 잘라 말했다.
‘그때처럼 또다시 클로이를 미끼삼아 그를 협박할 수는 없어. 그랬다간 그 아이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릴 테니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이미 오늘 오전에 황궁에서는 죄인이 사라진 이유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했다. 황제 또한 자신을 의심하고 있겠지만, 아직 그가 가진 것은 심증뿐이기에 성급히 나서지 못하고 있겠지.
“그녀가 황제에게 노출되거나 위험해지는 것은 어떤 목적으로도 불가하다.”
“그럼 그 계집의 이름만 빌리는 건?”
캐롤라인 공작이 절박한 얼굴로 카일로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계집을 황제에게 노출시키자는 게 아니오. 그냥 소문만 흘리는 거지. 계집이 대공성에 있다고. 그럼 황제는 사랑하는 정부를 되찾기 위해서든, 혹은 범죄자를 빼돌린 대공가를 응징하기 위해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병사들을 보내지 않겠소? 이왕 병사를 보내는 김에 황제가 직접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뭔가 뾰족한 수가 없을지…….”
“…….”
확실히 공작의 말마따나 황제와 겨루기 위해서는 황궁이 아닌 이곳 대공성으로 장소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카일로스는 쉽게 그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거슬러 온 시간에서도 그는 이미 한 번 자신의 이복아우를 대공성으로 꼬여내 붙잡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와 마찬가지로 이복아우의 머릿속에도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가 그렇게 쉽게 또다시 붙잡혀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단 황제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방법을 강구하고서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를 논의합시다. 독을 쓰든, 암살을 하든, 무력으로 제압을 하든…….”
“…….”
“황제만 제거하면 끈 떨어진 황후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닐 테니.”
* * *
조용한 복도 위로 어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젊은 기사는 또래 여자에게 면역이 없는 모양인지 내내 뻣뻣하게 긴장한 채였다.
“대공성의 기사 일이 힘들지는 않으신가요?”
“네? 아, 네. 하하,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성함이…….”
“리암 해리슨입니다, 레이디!”
잔뜩 군기가 잡혀 있는 그 모습에 야트막한 웃음을 터뜨리니 젊은 기사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해리슨 경이로군요.”
“아, 아직은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 지금은 견습 기사인 건가요?”
그의 옷차림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부러 모른 척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예상대로 술술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늘어놓았다.
“네, 그렇지요. 대공성에 오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레이디 가넷슈의 이야기는 익히 들었답니다. 루드비히 대공성을 오랫동안 지켜 온 아름다운 아가씨라고요.”
말을 끝낸 그가 헛기침을 하며 내 눈치를 힐끔 살폈다. 나는 그와의 대화가 퍽 즐겁다는 듯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수줍게 두 뺨을 감쌌다.
“모두 헛소문이에요. 부끄럽네요.”
“아닙니다! 물론 저도 어제 전하와 함께 마차에서 내리는 레이디를 보지 못했더라면 조금 과장된 소문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만나 본 레이디는…… 음, 그,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돌연 열을 내며 언성을 높이던 해리슨 경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다시 목소리를 진정시켰다.
“훨씬, 아름다우신 것 같아요…….”
“칭찬이라 생각하고 기쁘게 받아들일게요. 고마워요.”
귓불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젊은 기사의 모습은 어쩐지 놀려주고픈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내가 다리아에게 못된 장난질만 배운 모양이다.
“그런데 해리슨 경은 전하의 신임을 굉장히 많이 받나 봐요. 아직 견습 기사인데도 중요한 일을 함께 하시는 걸 보면 말이에요.”
물론 카일로스가 자신이 벌이는 은밀한 일에 이 어리바리한 젊은 기사를 대동하는 건 절대 그를 신임해서가 아니었다.
아마 훗날 일을 끝마쳤을 때 처리하기 편해서겠지.
카일로스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다. 이따금 은밀한 일들을 처리할 때엔 매번 곁에 두는 이들을 갈아치워 왔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신임하는 이는 평민 출신의 기사인 에녹 경이었지만, 그마저도 시간을 거슬러 온 이후에는 가까이 두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대공성의 기사들은 유독 평민이나 고아 출신이 많았다. 모두가 쉬쉬하지만 도망 노예 출신도 있었다. 그들은 대개 과거의 나와 같이 카일로스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곤 했다.
그리고 그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인해 아주 가끔씩 카일로스가 벌이는 위험한 일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이들이 생겼다.
지금 와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어쩌면 그들 또한…….
“과분하게도 전하께서 부족한 실력을 눈여겨 봐 주셨지요.”
젊은 기사가 뽐내듯이 대답했다. 나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간간이 맞장구를 쳐 주며 은근하게 그를 치켜세워 주었다. 점점 기사의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해요. 그렇지만 높으신 분들을 상대하는 건 정말 힘들지 않나요?”
“하하, 뭐…… 제가 상대해 본 분들이야 몇 분 되지 않아서요. 레이디께서는 그간 전하께서 공석일 때마다 대공성에 방문하시는 손님들을 모두 맞이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높으신 귀족분들은 대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친절하신 분들도 물론 많으셨지만…… 특히 캐롤라인 공작님은 정말 무서웠어요. 제국에 몇 안 되는 공작이기 때문일까요?”
“동감이에요.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도 여전히 눈빛만 스쳐도 어쩐지 벌을 받는 것처럼 몸이 쭈뼛거리던걸요. 게다가 황후 폐하의 숙부님이라니……. 그래도 우리 전하는 그 지위에도 불구하고 아랫사람들에게 굉장히 친절하신 편이지요. 출신에 차별을 두지도 않으시고…… 굉장히 훌륭한 분을 모시게 되어 언제나 영광이라 생각해요.”
“그건 모두 해리슨 경의 능력이 그만큼 빼어나기에 전하께서도 옆에 두시는 거겠지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내 방 앞에 도착했다. 해리슨 경은 나와 헤어지는 걸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그런 그의 마음은 전혀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절뚝거리던 내 두 다리는 곧바로 중심을 찾고 곧게 움직였다.
‘캐롤라인 공작이구나.’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카일로스의 손님이 캐롤라인 공작임을 확신했다.
본디 레이몬드를 지지해 왔던 캐롤라인 공작과 카일로스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대공성에 온 지 얼마 안 된 이 견습 기사가 공작을 만났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대공성을 비운 굉장히 최근의 일일 터.
캐롤라인 공작은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의 질녀인 다리아와 척을 지려는 걸까.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보았던 다리아와 공작의 파괴적인 관계가 생각이 났다.
캐롤라인 저택에서 보았던 모습으로 추측하건대, 이미 그 관계는 오래전부터 정상적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캐롤라인 공작이 카일로스와 손을 잡고 레이몬드를 공격한다면…… 그럼 베스티는…….’
나의 결백을 주장하다가 공작의 기사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던 베스티를 생각했다. 이 다툼 속에서 그녀가 다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책상 앞에 앉은 나는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 주저 없이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그리고 글씨로 가득 채운 종이를 곱게 접어 편지봉투 안에 넣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저녁이 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곧 약속된 시간이 오자 에녹 경이 창문을 두드렸다.
“이 편지를 폐하께 전해 주세요.”
에녹 경은 곧바로 편지를 건네받지 않고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럼 레이디 클로이의 곁을 비워야 합니다.”
“저는 괜찮아요. 이 편지의 내용을 폐하께서 미리 아셔야만 해요.”
그가 고민하는 얼굴로 나와 편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결국 얕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건네받았다.
“제가 없는 동안 대공을 너무 자극하진 마십시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생긋 웃으며 대답하자 그도 안심한 듯 피식 웃음을 흘리곤 뒤돌아 떠났다. 나는 한참 동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부디 레이몬드에게 나의 편지가 무사히 전해져야 할 텐데…….
나는 조금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러 댔다.
다리아와 함께 차를 마시고 의식을 잃었던 레이몬드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범인을 찾았다, 클로이. 그 여자가 자백을 했어.’
‘범인은 역시…….’
‘그래,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 나의 이복형님께서 아주 재미난 일을 벌이셨어.’
‘…….’
어렴풋이 예상하였으나 그것이 실제로 다가왔을 때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말을 잇지 못하던 내게 레이몬드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가 쓴 독이 십 년 전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독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황궁의가 그러더군.’
‘네? 하지만……!’
‘맞아. 그 자리에는 내 이복형님의 어머니도 함께 있었지. 부황의 정부로 이름을 알렸던 아멜리 루드비히 대공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카일로스는 다리아의 태중 아이와 엘리자베스 로잘라인 후작 영애를 죽이고 이번 성 플로라의 축일에 다리아와 레이몬드를 죽이려 한 것뿐만 아니라, 오래전 선황 부처와 자신의 생모까지 스스로 죽인 살인마였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야. 증거는 없어. 다만, 온 대륙을 뒤져도 찾지 못했던 그 독이 십 년의 시간을 걸쳐 다시 등장했다는 게…….’
레이몬드는 말끝을 흐리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애써 분기를 삭이는 그의 모습에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분노가 일었다.
십 년 전의 일이 정말 그가 벌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죽음들은 이런 개인적인 원한 관계 때문이 아닌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희생된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화가 났다. 한때 그의 수단 중 하나였던 사람으로서.
‘그가 선황 폐하를 죽였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어요. 그리고 이번 사건 역시 그는 교묘히 법망을 피해 가겠지요. 이미 이번 사건의 범인은 폐하의 눈을 가린 요부 클로이 가넷슈라고 소문이 파다하니까요.’
‘너의 결백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 그런 음해 따위에 널……!’
‘하지만 우리에겐 가지고 있는 패가 없어요. 비록 그 여자가 폐하께 범행을 실토했다고 하지만 제국법상 증거가 없이는 자백만으로 유죄가 성립되지 않지요. 그리고 이미 곳곳에서 제가 수상한 행동을 했다는 목격담이 속출하고 있고요.’
아닌 게 아니라, 모든 정황과 증거들이 나를 범인이라 몰아가고 있었다. 카일로스는 철저한 남자니까, 이번 일을 꾸미기 위해 부단히도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목적은 레이몬드가 아닌 아마도 나, 클로이 가넷슈일 테고.
‘어차피 그가 이미 저지른 일들의 증거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어요. 만약 가능하다 하더라도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 테고, 그 과정에서 먼저 지치는 건 그가 아닌 우리가 될 거예요.’
‘그래서, 네 생각은?’
‘그렇다면 그가 같은 죄를 다시 저지르게 해야죠. 그가 다시 폐하께 위해를 가하는 순간을 덮쳐야 해요.’
현장을 덮치는 것만큼이나 명백한 증거 확보는 없었다.
‘그가 언제 다시 내게 칼끝을 겨눌지 어떻게 알고?’
‘가장 쉬운 방법이 있어요, 폐하.’
회의적으로 묻는 레이몬드를 향해,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미끼가 될 거예요.’
미끼. 오래전부터 나는 카일로스 루드비히의 미끼였다. 레이몬드를 해치기 위한. 그 미끼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차례의 시간을 거스르며 얼마나 힘차게 몸부림쳐 왔던가.
그러나 그런 내가 이제는 다시 미끼가 되기를 자처한다. 레이몬드를 살리기 위한. 미끼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던,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살리기 위한.
‘그게 무슨 소리냐?’
‘말씀 그대로예요, 폐하. 루드비히 대공이 무엇을 원하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그걸 역으로 이용하자는 거예요.’
‘그럴 순 없어!’
레이몬드는 격분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 사이사이에 나를 향한 애정이 깃들어 있어서 나는 그를 향해 웃을 수 있었다.
‘걱정해 주시는 거라면 굉장히 감사해요, 폐하. 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오랫동안 미끼의 운명으로 살아 왔는걸요. 누구보다 잘할 수 있어요. 게다가 제가 위험하지 않도록 폐하께서 돌봐 주실 거잖아요.’
‘물론 너를 절대 위험에 처하게 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단순히 너의 안위 때문만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그러나 레이몬드는 나의 미소에도 안심하는 대신 보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남자와 똑같아지고 싶지 않아.’
‘네……?’
‘그 남자가 어린 너를 주워와 오랜 기간 너의 의지를 없애고 자신의 도구로, 수단으로 삼아 왔잖아. 그로 인해 네가 얼마나 불행했는지를 아는데, 날더러 그 남자와 같은 짓을 하라고?’
‘아…….’
그건 정말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의 절절한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모두가 냉혈하고 잔혹하다 말하는 레이몬드, 당신은 이토록 섬세하고 다정한 남자였다. 단순히 내 육신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정신에 새겨진 해묵은 영혼의 상처까지 보듬어 주는 남자였다.
그런 당신을, 내가 대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그만 그를 양 팔 가득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당황해하는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며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내 열렬한 애정 표현에 레이몬드는 마치 사춘기 소녀처럼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의 모습은 평소 그를 아는 이들이 보았다면 놀라 펄쩍 뛸 정도로 큰 괴리감을 갖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나는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잠깐만, 클로이. 진정을…….’
‘사랑해요.’
짧은 고백에도 그 큰 몸이 흠칫거리며 굳었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입을 맞추었다. 당황해하는 입술을 느슨하게 공략하며 팔로는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그의 입술이 곧바로 부드럽게 풀리는 게 느껴졌다.
‘하아, 클로이…… 지금 내게 미인계를 쓰는 거라면…….’
불과 조금 전까지 함께 입을 맞대 놓고서 금세 밀어내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절대 넘어가 줄 생각 없어. 나는 그 남자와 달라. 절대 너를 나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을 거야.’
‘넘어가 줄 생각이 없다고요?’
그래서 나는 두 눈을 야릇하게 휘며 유혹하듯이 그의 가슴팍을 매만졌다.
‘정말로요……?’
짐짓 속상한 듯 속눈썹을 파르르 떨자 그가 야트막한 신음을 터뜨렸다. 성 플로라의 축일 이후로 내내 무겁고 심란하였던 머릿속이 그로 인해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클로이, 제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러니 그런 표정은…… 음…….’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잘근 깨무는 그의 행동에 나는 대놓고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이에요, 폐하. 곤란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었어요.’
‘장난…… 아, 그래, 장난…….’
레이몬드는 허탈한 표정으로 연신 같은 낱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폐하. 제가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 말씀드린 것은 진심이에요.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사랑에 빠진 남자가 얼마나 아둔한지 또한 알려 주었죠. 이제는 우리가 그 남자를 속일 때예요.’
나는 한 손을 뻗어 꿈틀거리며 치솟으려는 그의 눈썹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리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무엇을 근심하시는지 알아요. 그렇지만 폐하와 그 남자는 달라요. 거슬러 온 시간에서 그 남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저를 미끼로 삼아 이용했지만, 이번 시간에서는 제가 스스로 미끼가 되어 그 남자를 공격하려는 거예요.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네. 클로이 가넷슈가 스스로의 의지로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당신을 지키려고.’
진지하게 내려앉은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가가 찡그려지면서 잔주름이 잡혔다.
‘멍청한 소리. 난 네 보호가 필요할 만큼 연약하지 않아.’
‘제가 폐하를 보호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
‘시간을 돌아온 이후로 폐하께서는 언제나 제게 제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라 하셨지요.’
어느덧 내 얼굴 위에 머물렀던 미소 또한 사라져 있었다. 이것만큼은 나 또한 물러날 수 없다고 그에게 알려 주듯.
‘제가 찾을 행복을 존중해 주시겠다고, 무엇이든 도울 거라고 폐하께서는 이미 약속하셨어요.’
‘그래, 그랬지. 하지만, 클로이…….’
‘제가 찾은 행복은 폐하의 등 뒤에 숨어서 아기 새처럼 보호받는 삶이 아니에요. 저도 폐하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싸우고 싶어요.’
‘…….’
‘나 스스로를 도구로서 사용하려는 게 아니에요. 의지를 가진 주체가 되기 위해 싸우겠다는 거예요. 폐하께서 내내 제게 말씀해 오신 것처럼요.’
‘하…… 정말이지…….’
레이몬드는 못 당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그것이 곧 승낙의 표시임을 알아보고는 기쁘게 웃었다.
‘절대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반드시 그래야지.’
사실 그가 허락해 줄 거라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나의 의지를 가장 우선으로 존중해 주는 남자였으니까.
‘그럼 시기는?’
‘황후 폐하께서 깨어난 직후요. 그분이 깨어나는 것까지만 보고 갈게요.’
그리고 다리아의 의식이 한차례 깨어난 직후, 미리 말을 맞춘 바와 같이 레이몬드가 보낸 그의 친위대장이 나를 잡으러 왔다.
나는 가만히 양손으로 창틀을 짚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레이몬드,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지 못한 지 벌써 닷새가 훌쩍 지나고 있었다.
* * *
오랫동안 삭막하기 그지없었던 루드비히 대공성에 클로이 가넷슈, 대공이 사랑한 여자가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황폐한 대공성에는 자그마한 생기가 감돌았다. 몇 달가량 대공의 주위에서 피어나던 매서운 살기가 사그라들었으므로.
카일로스는 그녀의 방 앞에서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녀는 아침 식사도, 점심 식사도 건너뛰고 방을 나오지 않았다.
황제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결국 다시 자신의 손을 잡아야 했다. 하지만 카일로스는 아직 그녀가 제게 마음을 열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 미미한 감정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황후가 되고 싶다는 것도 어쩌면 나를 시험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 남자와 정말 다른지 확인하려는 걸지도.’
클로이 가넷슈는 굉장히 영리한 아이였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고요히 제 비위를 맞춰 왔다. 어떻게 해야 제게 어여쁨을 받으며 옆에 남을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아는 아이였다.
그녀가 조금만 더 멍청했더라면 이미 오래전에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고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카일로스는 손수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작은 응접실과 욕실까지 딸린 자신의 방에 비해 한참이나 작은 그녀의 방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던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희미하게 사라져 버릴 듯, 창틀 위에 걸터앉아 바깥쪽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언제부터 창틀 위에 걸터앉는 습관이 생긴 거지.’
기억 속의 그녀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부끼는 은색의 머리카락과 하늘하늘 흩날리는 새하얀 옷자락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 여전히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은 다분히 아름다웠다.
클로이 가넷슈. 아름답고, 나른하고, 유혹적이고, 영리한 여자.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느리게 고개를 돌린 여자가 그를 보며 턱 끝을 슬쩍 젖혀 올렸다.
과연,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정부답게 오만하기까지 한 아름답고 요사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래, 저런 얼굴도 갖고 있었지.’
천의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물론 그중 구백아흔아홉 가지의 얼굴을 가르친 것은 카일로스였다.
오래전 몰락한 방계 가문에서 짐승살이를 하던 아이를 데려와 귀족으로서 교육했다. 예법과 화술을 가르치고,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법을 알려 주었다.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몸짓을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아무나 꺾을 수 없는 고고한 꽃으로 키워 냈다.
그러니 지금의 그녀를 이루고 있는 대다수의 것들은 그가 준 것이었다. 오직 저를 사랑한다고 어설프게 고백하던 열일곱의 그녀만이 그가 주지 않은 그녀 본연의 모습이었다.
기억 속 그녀는 언제나 제 앞에서 수줍은 소녀처럼 굴었다. 구백아흔아홉 가지의 얼굴을 더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앞에서만큼은 그 어설픈 한 가지의 얼굴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카일로스는 그 이유를 알았다.
사랑.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현자마저 현혹시켜 아둔한 자로 타락시키는 그 아름다운 맹독을 마셔 버린 탓이 아닌가.
그랬던 그녀가 수줍은 열일곱의 얼굴을 버리고 이제는 관능적인 여자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카일로스는 열일곱의 그녀가 그리웠지만, 관능적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고혹적인 얼굴 또한 싫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그가 만들어 낸 구백아흔아홉 가지의 얼굴 중 하나일지라도.
“무슨 일이지요?”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럴 때마다 함께 흔들리며 유혹하듯 너울거리는 속눈썹은 의도한 것일까. 의도하지 않은 것일까.
불쑥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수줍게 눈웃음 짓던 그녀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손에 움켜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녀의 고고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그는 불쑥 그녀에게 복종하고 싶다는 생각이 치솟았다.
불현듯 오래전 그녀의 첫 데뷔였던 신년 무도회 때, 젊은 청년들이 그녀를 두고 떠들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기꺼이 그녀의 노예가 되고 싶다 했었나.’
카일로스는 그 말을 듣고 퍽 우습다고 생각했다. 어지간한 귀족가의 자제들이 출생마저 불분명한 여자에게 홀려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다니.
기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이 흘려들었던 말이었다. 오히려 오랫동안 고대했던 그녀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보며, 황제도 그 청년들처럼 그녀의 노예가 되길 자처한다면 상황이 재미있을 거라고 혼자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그 청년들처럼 그녀에게 복종코자 했다. 그녀의 눈짓 한 번에, 손짓 두 번에, 몸짓 세 번에 자꾸만 이성이 흔들리고 안달이 났다.
자신이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그것도 제 손으로 주워와 기른 여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러나 카일로스는 그런 자신이 전혀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뒤늦게 깨달은 감정에 코끝이 먹먹해졌다.
“……노크를 했는데. 네가 대답하지 않아서.”
“…….”
“내가 네 시간을 방해한 거니?”
담담한 음색 사이로 애틋함이 숨어 있었다. 겉보기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 모습과 달리, 카일로스는 혹시나 그녀가 축객령을 내릴까 내심 두려웠다. 대공성의 주인은 그였으나, 더 이상 그녀의 주인은 될 수 없었기에.
클로이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대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잠시간 그 시선을 받아내던 카일로스는 뒤늦게 자신이 무슨 일로 왔냐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서 왔어.”
카일로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열린 문밖에 시립하고 서 있는 기사를 향해 손짓했다.
“인사해, 클로이. 리암 해리슨이야. 오늘부터 리암이 너를 호위해 줄 거란다.”
카일로스가 데려온 기사는 어제 클로이를 방까지 부축해 주었던 견습 기사 리암 해리슨이었다. 그녀에게 캐롤라인 공작의 정보를 흘려 준 그 앳된 기사 말이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가넷슈.”
해리슨 경은 얼굴을 붉히며 클로이에게 인사를 했다. 하루 만에 다시 만난 그녀가 반가웠던 그와 달리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갑자기 웬 호위지요?”
“만약을 위해서지. 혹시라도 네가 다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건 제게 위험한 일이 생길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물론 절대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널 지킬 거니까.”
“…….”
그녀의 두 눈에 의심이 가득 차올랐다. 물론, 이상하게 생각할 테지. 이제까지 카일로스는 단 한 번도 클로이에게 호위를 붙인 적이 없었으니까.
“감시를 하려는 건 아니야.”
그녀의 의심을 알아챈 카일로스가 재빨리 덧붙였으나, 그녀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영리한 클로이 가넷슈는 호위를 붙인 것만으로도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다. 카일로스의 낯빛이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대공성도 안전하지는 않은가 보군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만은 무사할 테니까.”
입으로는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면서 정작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카일로스였다. 지금의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를 잃는 것…… 그것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우님에게…….
“결국 제 위치가 드러난 모양이지요…….”
그녀의 눈꼬리를 추욱 늘어졌다. 초조한 듯 연신 입술을 깨무는 모습에 카일로스는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황궁의 병사들이 나를 잡으러 올 거예요. 그리고 나는 또 그 감옥에…….”
순간, 그녀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가 돌연 양 팔로 어깨를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클로이……?”
카일로스는 심상찮은 그녀의 반응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놀라 숨을 삼켰다.
“……!”
그녀가 울고 있었다. 차가운 가면을 쓰고 저를 밀어내던 그녀가 아니라, 잔뜩 상처받고 두려워하는 그녀의 맨얼굴이었다.
“당신은 그곳에 갇혀 본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몰라요. 내가 그곳에 갇혀, 혼자, 얼마나, 많이, 무서웠는지…….”
촘촘한 속눈썹 사이사이를 적시며 매달린 눈물에 가슴 위로 따끔한 상처가 피어나고, 오들오들 떨며 속삭이는 음색에 헤집어진 상처에서 발간 핏물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차가운 감옥으로 내몬 것은 모두 카일로스 자신의 짓이었으니.
그녀를 황제와 떨어뜨리고 다시 되찾아오기 위해 꾸민 짓이었다지만, 결국 제가 벌인 일들이 그녀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아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이…… 카일로스 자신의 상처가 되었다.
카일로스는 얼굴을 와르륵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내내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하던 그녀가 그의 품속으로 미끄러졌다.
“날 황궁의 병사들에게 넘기지 말아요. 제발…….”
그녀가 카일로스의 옷깃을 붙잡으며 속삭이듯이 자그맣게 애원했다.
“……살려 주세요, 숙부님.”
쿵. 카일로스의 심장이 끝없는 아래로 낙하했다.
살려 주세요, 라니.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 파리한 얼굴로, 가냘픈 목소리로. 제발…… 살려 주세요, 라니.
그것이 그의 묵은 죄책감을 툭 건드렸다.
“클로이…….”
그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자신의 옷깃을 생명줄인 양 움켜쥐고 있는 작은 손을 단단하게 감쌌다.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너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지킬 거야. 그러니 울지 말아, 제발.”
“……왜 나를 그 감옥에 밀어 넣었어요?”
그녀가 간신히 입 밖으로 꺼낸 소리에는 원망보다는 진득한 공포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녀를 황족 시해범으로 몰고 간 이가 누구인지.
물론 눈치가 빠른 아이니까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히려 알아채지 못하는 척하였다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을 것이다.
이 모든 건 그녀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그 남자는 결코 널 지키지 못할 거라고, 너를 사랑하는 건 나뿐이라고.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도 믿지 않는 그녀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하여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마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는 변명을 애써 삼키며 카일로스는 미미하게 이맛살을 구긴 채 이를 악물었다.
“……미안해.”
그가 참담하게 미어지는 가슴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서늘한 이마 위로 그녀의 뜨거운 살갗이 닿았다.
“미안하구나, 클로이. 내가…….”
“…….”
“내가 모두 미안해…….”
그녀의 육신만 제 옆으로 데려오면 그 뒤는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한때 그토록 오랜 기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그녀였으니까, 그 마음을 다시 되돌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과정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그녀의 감정이 오롯이 자신의 상처로 다가와서, 카일로스는 그녀와 함께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눈물은 그녀에 대한 기만이 될 걸 알기에, 그는 소리 없는 울음을 홀로 삭혀야 했다.
* * *
카일로스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잠이 든 클로이를 내려다봤다.
고된 감옥살이와 더불어 대공성에 도착한 이후로도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아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이 얼굴에 황제도 홀려 버리고 만 거겠지.
그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젖은 눈가를 쓰다듬었다. 이 와중에도 그녀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비집고 그녀의 전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그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가 다섯 살에서 여섯 살 사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황의 정부이자 그의 어머니였던 대공녀 아멜리 루드비히는 어린 카일로스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훈육했다.
‘카일, 이 세상에는 너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단다. 부디 그것들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마렴.’
그날은 어린 카일로스가 하인들의 말을 무시하고 나무 위에 오르다 떨어져 팔을 다친 날이었다.
그의 외조부였던 루드비히 대공은 어린 주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어린 종자들에게 몹시 화를 냈다.
‘그 애들은 저 때문에 외조부님의 진노를 사 당장 쫓겨날 처지인걸요.’
어린 카일로스는 그들이 자신을 대신해 혼나는 게 조금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게 나무에 오르지 말라고 여러 번 말렸으며 그 말을 무시하고 나무에 오른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값싼 동정심뿐. 그 이상은 사치란다.’
‘…….’
‘만약 네가 그들에게 미안해한다면 당장 아버님께선 네게 큰 실망을 하게 될 거야.’
‘어째서요?’
‘그건 네가 루드비히 대공가의 후계자이기 때문이지.’
그 말에 카일로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들이 자신을 대신해 혼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그의 몫이었다.
측은히 여기되, 죄의식은 갖지 마라. 그것이 설사 너의 잘못으로 희생된 이라 할지라도, 네가 루드비히 대공가의 핏줄을 잇는 한.
그것이 어머니와 외조부의 가르침이었으며, 동시에 카일로스 루드비히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클로이. 나는 이제 너를 볼 때면 측은함보다도 강한 죄의식 때문에 매분 매초 몸이 말라 가는 것 같아.”
때로는 그 죄의식이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만큼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 와서, 그녀에게 사랑한다 말하는 것마저도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를 놓지 못하는 건 루드비히 대공가의 핏줄 탓인가. 혹은 그저 그가 못난 남자이기 때문인 걸까.
“그래도 이제는…… 나밖에 없잖아. 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잖아.”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녀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며 굴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한 것은 오롯이 그녀의 겉모습뿐이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건 카일로스가 만들어 낸 그녀의 구백아흔아홉 가지 얼굴 중 하나였다.
오직 카일로스만이 그녀가 태초부터 갖고 있었던 본연의 얼굴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것은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카일로스는 그녀를 향한 죄의식에 몸부림치면서도 어떻게든 그녀를 제 곁에서 떼어 낼 수 없었다.
“사랑해, 클로이…….”
그가 잠든 그녀의 코끝 위로 자신 코끝을 부딪치며 속삭였다.
“너는 내가 지킬 거야, 내 사랑…….”
카일로스는 조심스럽게 잠든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까부터 황망하게 구석에 선 채로 그들을 못 본 척하던 리암 해리슨이 머뭇머뭇 눈치를 보았다.
“전하, 제가 도와 드리…….”
“나가라.”
그러나 이어지는 냉랭한 일갈에 리암 해리슨은 화르륵 붉어진 얼굴을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카일로스는 그대로 그녀의 여윈 몸을 침대 위에 내려 눕혔다.
“앙상해.”
그가 그녀의 팔뚝 위로 손끝을 미끄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어째서인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마른 느낌이었다.
사실 카일로스는 적당히 살집이 있는 것보다는 마른 여자를 선호했다. 그런 자신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열일곱 살의 클로이가 몰래 식이요법을 활용했던 걸 안다.
‘살을 더 찌우렴, 클로이. 황제는 너무 마른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단다.’
물론 그녀의 노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한마디에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때는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그녀가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무심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카일로스의 입가에서 나릿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체 무슨 상처를 얼마나 더 준 건지.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는 기억들에 머리가 아파 왔다.
* * *
해가 불그스름하게 기울 무렵이었다. 클로이의 침대 맡에 앉아 저녁 식사도 건너뛰고 그녀의 잠든 얼굴을 감상하던 카일로스는 움찔 떨리는 작은 몸을 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델.”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드문드문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누굴 부르는 거지?’
카일로스의 미간 위로 짙은 주름이 잡혔다. 내내 고요히 잠들어 있던 그녀가 누군가를 애처롭게 그리며 부르고 있었다.
‘설마 황제를……?’
거기까지 생각하자, 삽시간에 그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제가 바로 옆에 있는데, 저를 두고 다른 남자를 애타게 그리는 그녀의 모습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대체 왜…… 내가 여기 있는데…….’
그의 두 눈 위로 벌건 핏대가 설 무렵이었다.
“에스델…….”
그녀의 입술 사이로 이름이 완성되며, 동시에 붉은 눈동자가 처연한 자태를 드러냈다.
“아…….”
클로이는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의 아이, 아니, 그녀 자신의 아이를 찾고 있었다. 카일로스는 전신을 감싸던 흉흉한 기세를 떨구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피시식 헛웃음을 흘렸다.
“꿈이었구나…….”
허망한 읊조림이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완연히 잠기운을 떨치지 못한 그녀의 두 눈이 잠시 카일로스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멀어졌다.
“클로이…….”
그의 목구멍을 타고 마치 무언가에 긁혀 갈라진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듣지 못한 듯 여전히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일로스는 부쩍 그녀의 이름만을 무의미하게 부르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고 생각했다.
긴 정적이 흘렀다. 카일로스는 밀려오는 울음기를 삼키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네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감히 용서를 바라는 그를 향해, 그녀가 흐릿한 시선을 주었다.
“에스델의 이야기를 해 주세요.”
힘없는 목소리가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에스델을…… 죽이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클로이의 두 눈이 아주 먼 옛일을 그리는 듯 먹먹히 침잠했다.
“제가 죽은 뒤 에스델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클로이는 너무나 담담하게 자신의 사후를 묻고 있었다. 그것이 카일로스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가엾은 클로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분명 잊기 힘든 고통이었을 텐데. 그녀의 죽음이 제게도 여전한 심리적 충격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에스델, 에스델이라…….
“그 아이는…….”
카일로스는 느리게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사후, 그는 도무지 제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토록 원하던 황좌를 움켜쥐었으나, 하루도 행복할 수가 없었다.
매일 밤, 카일로스는 죽은 그녀의 시신을 안고서 황궁을 맴돌았다. 그러던 중, 맞닥뜨린 아이는 그녀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클로이…….’
아이는 ‘전 황제의 유일한 핏줄’이라는 이유로 황궁의 가장 귀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카일로스는 매일같이 아이에게 죽은 클로이를 투영하며 그녀를 찾았다. 사람들이 모두 새 황제가 미쳐 버렸다고 뒤에서 수군거렸으나, 카일로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클로이와 오랜 기간 함께했지만 그녀의 초상화 한 점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는 유일하게 세상에 남은 그녀의 흔적이었다.
카일로스는 아이를 그녀와 동일시하며 집착하다가도 죽일 듯이 미워하며 핍박하길 반복했다.
생전 그녀가 좋아했던…… 아니,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정확하게는 그녀가 좋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디자인의 의상들을 입히며 황궁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어주고, 가장 귀한 음식들을 먹였다.
아이가 잠을 자지 못할 때는 옆에서 노래를 불러 주고, 몸이 좋지 않을 때에는 손수 병간호를 해 주기도 하였다. 값비싼 보석들을 선물하고, 아이의 환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언제나 그를 두려워했다.
그 무렵의 카일로스는 감정의 기복이 상당해서 한 번 수가 틀리면 가차 없이 잔인해지는 사람이었다.
이따금씩 그녀가 생각나는 날이면 웃는 얼굴로 아이의 목을 조르고, 살가죽이 모두 까져 쓰러질 때까지 채찍질을 하기도 했다.
한 달 동안 빛이 들지 않는 어둠 속에 가두어 방치하고, 가장 죄질이 나쁜 죄수들의 소굴에 처박아 아이의 고통을 즐기었다. 그렇기에 아이는 언제나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못내 증오했다.
카일로스는 그런 아이의 눈동자를 싫어했다. 아이의 붉은 눈동자는 클로이의 것과 닮은 듯하면서도, 종종 자신의 이복아우를 생각나게 했다.
아이는 자랄수록 그녀보다는 그 남자를 닮아 갔다. 그녀의 얼굴로 그 남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이를, 카일로스는 진심으로 혐오했다. 점점 아이를 볼 때마다 그녀가 아닌 그 남자를 떠올리게 되었다.
종래에 그녀를 그 남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는 짙은 패배감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되어 정신이 무너졌을 때, 카일로스는 그 어느 때보다 잔혹한 방식으로 아이를 괴롭혔다.
아이는 마찬가지로 전 황제의 유일한 핏줄이라는 이유로 그 위험성을 인정받아 제국의 가장 악질적인 죄인들이 머무는 서쪽 탑에 갇히고 말았다.
아이는 더 이상 그녀의 흔적일 수 없었다. 그녀가 아닌 그 남자의 흔적이었으며, 그녀를 제게서 앗아간 흉물이었다.
세상의 정점에 선 권력자가 상대를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고 괴롭히기 시작했을 때, 그 끔찍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치 포학하고 악랄하였다.
그럼에도 아이는…….
“꿋꿋이 살아남았지.”
“…….”
“온 대륙을 통틀어 가장 고귀한 여성으로 자랐어.”
“그렇군요…….”
카일로스는 어두운 죄악은 감추고 절반의 진실만을 이야기했다.
“어른이 된 에스델을 보았나요?”
“……보았지.”
아이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끝내 살아남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이가 되어 다시 찾아 왔다.
성년이 된 아이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카일로스는 그만 숨이 멎을 뻔하였다.
자신의 목을 비틀고 싶노라 증오하는 아이의 모습이, 꼭 그녀를 생각나게 해서. 정말로 그녀가 다시 살아나,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만 같아서.
“어땠나요? 어른이 된 에스델은 나를 닮았나요? 아니면…… 그 사람을 닮았나요?”
“…….”
카일로스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너를 닮았으니까, 끝내는 죽이지 못하고 휘둘린 거겠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이 맴돌며 가슴이 쓰라리게 아려 왔다.
아이는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모두 그 남자와 닮았다. 그러나 카일로스는 오직 그녀와 닮은 그 껍데기 때문에 아이를 끝내 죽일 수가 없었다.
그 남자의 피붙이를 그토록 지우고 싶었는데, 그럼에도 죽이지 못하고 살려 둔 죄로 시간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다시 너를 만나고.’
비록 그녀는 저를 미워하였지만, 그럼에도 다시 만난 그녀는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네게 용서를 빌고.’
그것은 그에게 징벌이 아닌 포상이었다. 생의 마지막에서 세상으로부터 돌려받은 다시없을 선물이었다.
‘다시 너와 함께할 수 있는 거겠지…….’
그 사실만으로 눈물이 나도록 황홀한 시간이었다.
이제 그녀와의 관계를 돌이키는 일만 남았다. 저를 향해 수줍게 미소 짓던, 어설프게 눈가를 붉히던, 열일곱의 그녀가 사무치도록 그리워졌다.
카일로스는 그녀의 발치에 몸을 웅크렸다. 커다란 남자가 몸을 옹송그리는 모양이 썩 우스웠다.
지하에 묻은 그의 할아버지가 보았더라면 루드비히 대공가의 수치라며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카일로스는 가문의 수치가 되어도 좋았다.
클로이 가넷슈의 용서만 구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다시금 그녀와의 관계를 오래전의 것으로 회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네 치마폭에 휩싸여 만천하의 수치가 되리.’
* * *
황후를 시해하려 한 죄인 클로이 가넷슈가 탈출했다. 황후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였으며 황제의 근심은 날이 갈수록 깊어 갔다.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알 수 없는 죄인의 소재로 황궁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던 때, 캐롤라인 공작이 황제에게 독대를 청했다.
시종장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던 공작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흉흉한 기세에 흠칫 몸을 떨었다.
황금 테두리로 장식된 의자 위에 젊은 황제가 날카로운 두 눈으로 그를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황제의 심기가 썩 불편하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냐.”
낮게 울리는 음성은 금방이라도 상대를 집어삼킬 듯 음산했다. 공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죄인의 소재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순간, 황제의 눈썹 사이가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소재를, 알고 있다고?”
마치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다는 듯, 그의 입매가 짙은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탁, 탁.
굵은 손끝이 테이블 위로 뒤집어진 종이 위를 두드렸다. 누군가 보낸 편지일까.
편지 봉투만큼의 크기로 접힌 자국이 나 있는 종이를 힐끔 쳐다보던 공작은 곧바로 제게 향한 사늘한 시선에 황급히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루드비히 대공성에서, 그 여자를 보았습니다.”
* * *
캐롤라인 공작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카일로스는 어두운 얼굴로 편지의 내용을 훑었다.
“안 좋은 소식인가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클로이가 넌지시 물어왔다. 카일로스는 금세 얼굴을 펴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편지에는 황제가 곧 대공성에 들이닥칠 것이라는 내용과 더불어 그 세세한 시기와 병력의 수가 적혀 있었다.
캐롤라인 공작은 예의 대공성을 덫으로 삼아 황제를 공격하자는 주장을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대공성을 점령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맞추어 공작성의 병사들을 이용해 황제의 병사들을 포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일로스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최악의 수였다. 대공성 안에 클로이가 있는 한.
‘그전에 클로이만이라도 다른 곳에 피신시키면…….’
그는 평소보다 온화한 낯빛을 띠고 있는 클로이를 보며 생각했다. 언제나 그녀의 주위를 은은하게 휘감던 저를 향한 적대감이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어제 저녁, 함께 그녀의 아이를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낸 덕일까. 카일로스는 그에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아직은 입맞춤마저 어색한 사이였지만, 그는 관계를 회복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은연중 느끼고 있었다.
어제 저녁, 그녀의 입으로 용서를 말했으니까.
‘나를…… 정말로 용서해 주는 거니?’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서요.’
온전히 제게 의지하는 그녀가 이다지도 사랑스러웠다. 카일로스는 시간을 거슬러 온 후 처음으로 완연한 충만감을 느끼며 웃었다.
“……?”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깜빡거릴 때면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카일로스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그녀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잠시 대공성을 떠나 있을래?”
“왜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궁의 병사들이 날 쫓아오기 때문인가요? 내가 있으면 대공성이 위험해져서?”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조금 더 너를 안전하게…….”
“거짓말.”
배신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가 카일로스의 말을 잘라 냈다.
“말로는 나를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 했으면서, 결국은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네요.”
“클로이, 내 이야기를 들어 봐.”
카일로스는 조급해졌다. 다시 되찾은 그녀의 마음을 이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대공성 전체가 덫이 될 거야.”
“……?”
“황제를 이곳으로 유인할 거란다.”
“…….”
클로이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어졌다. 카일로스는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어여쁜 얼굴 위로 머물렀던 분노가 찬찬히 흩어졌다.
“그때처럼, 말인가요?”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카일로스는 그녀가 말하는 ‘그때’가 언제인지 안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사랑에 눈이 먼 어리석은 아우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때.
“그래.”
카일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방법이에요. 지금의 그는 더 이상 사랑에 눈이 먼 남자가 아니니까요.”
“물론, 그렇겠지.”
캐롤라인 공작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을 데려온들, 그 불세출의 전쟁광을 무력으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황제에게 맞서지 않고 다른 방법을 쓸 거야. 하지만 내가 어떤 묘수를 낸들, 네가 이곳에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어째서……?”
“어째서냐고 묻지 마, 클로이. 너도 봤잖아. 사랑에 눈이 먼 남자가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지.”
그러자 클로이는 굉장히 오묘한 눈으로 카일로스를 쳐다보았다.
“꼭 나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나의 전부를 걸 거라고 말했잖니.”
“하지만 당신은…….”
그녀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말고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아직 그만큼의 신뢰는 얻지 못한 건가. 카일로스는 쓰게 웃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과거의 그가 그녀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 황제를 두고 얼마나 조롱하였던가.
“힘들겠지만, 믿어 줘.”
“…….”
믿음을 얻지 못해 애원하는 자의 시선과 믿음을 줄 수 없어 불신하는 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클로이는 느리게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어 냈다. 카일로스는 순식간에 허전해진 양손을 차가운 테이블 위로 떨구었다.
“내게 믿음을 바라나요?”
클로이는 한 손으로 삐딱하니 턱을 괴며 물었다.
“그래. 바라.”
붉은 입술 사이로 무심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카일로스는 깊은 갈증이 느껴졌다. 그가 망설임 없이 냉큼 대답하자 그녀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당신은 정말 욕심이 많아. 어제는 용서를 바란다 해 놓고, 오늘은 또 믿음을 바란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카일로스는 그만 정신이 몽롱해졌다. 무의식중에 존대를 거둔 그녀의 음색에 흠뻑 취해 버리고 말았다. 어제 그녀를 보며 느꼈던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감각이 또다시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믿음을 바란다면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줘야지. 안 그래요?”
그녀가 눈꼬리를 야살스럽게 휘며 물었다.
“……그래. 그렇지.”
쇳소리처럼 거칠어진 음성으로, 카일로스는 간신히 대답했다. 처음부터 귀족이었던 것처럼 고고한 그녀의 모습에 카일로스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클로이 가넷슈는 더 이상 자신의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던 소녀가 아니었다.
새삼 카일로스의 머릿속에 오랜 기간 자리 잡혀 있던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재정립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그와 비슷한 생각이 나돌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귀족으로 태어난 여자 같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클로이 가넷슈는 그 누구보다도 황후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황제의 여자가 되기 위해 수년 간 자라온 여자니까.
실제로 그동안 황후의 이름으로 열었던 대부분의 행사들을 그녀가 주관했다지. 그녀의 일 솜씨는 어지간한 귀부인들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라 했다.
참으로 영특하지. 황제의 여자가 되도록 교육해 왔지만, 황제의 여자가 해야 할 업무들을 가르친 적은 없었는데.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녀의 새로운 면모들이 사방에서 그의 가슴을 옭죄어 왔다.
정말이지, 클로이 가넷슈는 정제되지 않은 원석이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아 본 것은 다름 아닌 저였다.
‘클로이가 황후가 된다면 엘리자베스 로잘라인, 그 쓸모없던 여자보다 훨씬 더 잘 해낼 거야. 비교하는 게 아까울 정도로.’
그녀를 향한 사랑을 깨달았을 때만큼이나 굉장한 짜릿함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황제는 그녀의 가치를 알아봤을까? 아니, 아직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채기에는 황제가 그녀와 보낸 시간이 너무나 짧았으니까.
“그런데 대체 어떤 방법으로 황제를 덫에 빠뜨릴 건가요?”
그녀가 자못 궁금하다는 듯, 그러나 무심하게 지나치는 어조로 물었다.
“음…….”
카일로스는 기분 좋은 콧소리를 흘리며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한순간의 동요. 그걸 노릴 거란다.”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 또한 저의 가치를 알아봐 줄까. 어떻게 해야 제게 온전한 믿음을 줄까.
* * *
차박, 차박. 대공성의 지하로 내려가는 걸음은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았다. 나는 카일로스의 안내를 받으며 그의 손을 붙잡고 계단을 밟았다.
“발밑이 어두우니 조심하렴.”
대공성의 지하는 무려 팔 년이나 이곳에 살았던 내게도 이런 공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선 곳이었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스산한 바람 소리에 오묘한 공포심이 피어났다.
몸이 으슬으슬한 기분에 양손으로 팔뚝을 감쌌다. 바깥은 따뜻한 봄이었는데, 이곳은 홀로 사늘한 겨울이었다.
카일로스가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더니, 걸음을 멈추고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내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고마워요.”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하자 그의 입가에 그린 듯이 고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그다지 내게 감흥은 주지 못했지만.
굳게 잠긴 철문 앞에서 그가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림과 동시에 불쾌한 냄새가 풍겨 왔다. 코끝을 찌르는 이 냄새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도착했구나.”
그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방 안의 불을 환하게 밝혔다. 순간 드러난 광경에 나는 짧은 숨을 삼켰다.
“이곳은…….”
군데군데 얼룩진 피와 나뒹구는 썩은 시신들. 박제된 짐승들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도구와 정체불명의 약재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루드비히 대공성의 각종 어두운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지. 내 친부와 전대 대공이었던 외조부도 이곳에서 죽었어.”
“친부, 라니요?”
그의 말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내 물음에 나를 돌아본 그가 파스스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이름도 없고 권력도 없고 재산도 없는, 가진 것이라고는 그저 반반한 얼굴뿐인 남자였지.”
“하지만 당신의 아버지는……?”
“황제와 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어.”
그러니까 선황의 사생아로 알려져 있던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은 사실, 황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남자였던 것이다.
“…….”
그 놀라운 비밀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방 안의 광경들만 훑어보았다.
“당신이 죽였나요?”
“친부를 묻는 거라면 내가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외조부는 내가 죽였지. 아우는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라 칭송받으며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자리를 약속받았는데, 나는 고작 대공의 후계자였거든. 그걸 참을 수 없었단다.”
혈육의 죽음을 입에 담으면서도 그는 마치 오늘 저녁 만찬에 나올 식단에 대해 읊는 것처럼 여상한 목소리였다.
불쑥 레이몬드의 말이 생각이 났다. 선황 부처의 죽음에 사용된 독이 이번에 다리아의 목숨을 위협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는.
“그럼 혹시…… 선황 부처와 당신의 어머니는…….”
“이곳에서 죽이진 않았지.”
“…….”
그는 항상 내게 유일한 ‘가족’을 운운했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나를 가족처럼 대한 걸지도 모른다.
그에게 가족이란, 타인과 별 다를 바 없이 그저 그의 이득을 위해 언제든 살리고 죽일 수 있는 존재일 뿐인 것 같으니까.
충격에 충격이 꼬리를 물고 이어갈 때, 그가 덩그러니 놓여 있던 관 앞에 서더니 단조로운 동작으로 뚜껑을 열었다.
“어떻니?”
오래전 가넷슈 저택에서 맡았던 죽음의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켜 왔다. 그러나 나는 그 불쾌한 냄새보다도 관 속에 누워 있는 여자의 모습에 놀라 숨을 삼켰다.
“황제를 속일 만한 미끼로 꽤나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여자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봤다. 엘로이즈 자작 영애. 한동안 수도를 휩쓸었던 유령 소동의 희생자이기도 했던 그 여자였다.
“황제를 유혹하라 했지만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지. 그래도 죽기 전에 한 가지는 제대로 해 주었는데, 입막음이 필요해 어쩔 수 없이 죽였단다.”
그녀의 시신은 수많은 시신들 중 유일하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나를 황후 시해범으로 만들기 위해 가면을 쓰고 내 행세를 했을 여자가 바로 이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들의 실종사건도 모두 카일로스의 짓이었구나…….’
나는 두려운 기색을 최대한 숨기며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실종된 여자들은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니, 이곳에 시신이 되어 방치된 이들 이외에 보이지 않는 이들도 대부분 죽었을 것이다. 엘로이즈 자작 영애처럼.
조금, 소름이 돋았다. 하필이면 그가 나와 닮은 특징의 여자들을 죽인 이유가 뭘까.
그러나 나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죄를 캐는 것은 재판장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보다 더 우선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황제를 속일…… 미끼라고요?”
“그래.”
그가 썩어 문드러진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얼굴만 적당히 훼손하면 감쪽같겠지.”
“…….”
아무래도 카일로스는, 아마도 죽은 이의 시신을 ‘나’로 속이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와 엘로이즈 영애는 머리카락의 색과 체형이 비슷하다는 것 외에는 닮은 곳이 하나도 없었는데. 대체 얼마나 끔찍한 방법으로 레이몬드를 속이려는 걸까.
나는 차마 그의 잔혹성을 짐작하기가 어려워서, 그저 입 안의 여린 살만 잘근 깨물었다.
“그러니 클로이, 내가 황제를 속이기 위해서라도 너는 대공성에 있으면 안 돼.”
“굳이 황제를 속이는 게 목적이라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나를 미끼삼으면 되잖아요.”
그 말에 카일로스의 한쪽 눈썹이 화가 난 듯 꿈틀거리며 치켜 올라갔다.
“내 협업자도 너와 같은 말을 했지. 하지만 말했잖아. 네가 위험해지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과거의 그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내 전부를 포기하게 될 거야.”
“…….”
“아주 잠시만 숨어 있으면 된단다. 리암이 널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줄 거야.”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 희미하게 짓고 있는 미소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오래전의 나는 저 미소를 보며 그가 참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
사실 나도 저 관 속에 누운 여자처럼 쓸모가 다한 뒤엔 언제든지 쉽게 죽일 수 있는 체스 말이었는데.
“오래 기다릴 것 없어. 한 열흘 정도만…….”
자박, 자박. 내게로 다가오는 그에게서 뒷걸음질 치지 않기 위해 나는 발끝에 힘을 꾸욱 주어야 했다.
내 앞에 멈추어선 그가 여전히 입가에 띠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가만히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시 휴식을 가진다고 생각해.”
턱 선을 타고 내려온 손끝이 내 어깨를 아프지 않게 움켜쥐었다.
“네가 돌아올 때엔 모든 일이 끝나 있을 테니.”
그가 양 팔을 벌려 내 몸을 그러안았다. 나를 잠시 떼어놓아야 한다는 게 퍽이나 아쉬운 듯이. 나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부딪치며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 * *
이튿날 새벽, 나는 카일로스가 미리 언질한 시간에 깨어나 그를 기다렸다. 곧 작은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가 해리슨 경과 함께 나타났다.
“리암, 클로이를 부탁하마.”
“네, 전하!”
해리슨 경은 카일로스가 준 임무가 무척이나 영광이라는 듯 기합이 바짝 들어간 얼굴이었다.
“레이디 가넷슈를,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어요.”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럼 목숨까진 아니더라도…… 제 긍지를 걸고…….”
그가 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이 정도는 괜찮냐고 묻는 듯이.
“네, 충분히 감사해요.”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카일로스와 나란히 서서 정문까지 함께 걸었고, 그 뒤를 해리슨 경이 뒤따랐다.
“네가 말했었지. 믿음을 바란다면 먼저 행동으로 보여 달라고.”
그가 내게 짧은 작별의 인사를 건네며 속삭였다.
“이 다음에 네가 돌아올 곳은 이 대공성이 아니라 그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곳일 거야.”
“그것 참, 굉장히 기대가 되는 말씀이네요.”
나는 느른하게 입매를 당겨 웃으며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는 얼굴이었지만 나를 붙잡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한 번 더 응시한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루드비히 대공가의 문양이 없는 작은 마차 위에는 해리슨 경이 마부석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일로스의 배웅을 받으며 올라타자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말 울음 소리와 함께 작은 마차가 삐걱삐걱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어디로 가는 걸까. 카일로스는 내게 목적지를 알려 주지 않고 그저 ‘안전한 곳’이라고만 언급하였다. 나 역시 부러 그에게 캐묻지 않았다. 이미 내게 많은 것을 알려 준 그에게 나 또한 신뢰한다는 느낌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해리슨 경, 마차를 잠시 세울 수 있을까요?”
나는 짐짓 어지러운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멀미가 난다고 말했다.
해리슨 경은 재빠르게 마차를 길가로 세우고 나무 그늘 아래에 내가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우왕좌왕하며 움직이던 그가 내게 물병을 건넸다.
“무, 물을 마시면 멀미가 조금 가라앉을 겁니다.”
“고마워요.”
짧은 눈웃음을 흘리며 물병을 건네받았다. 의도적으로 스친 손끝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한쪽으로 고개를 틀고 물을 마시는 내 옆얼굴을 그가 넋 놓고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물병을 내리고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목덜미 옆으로 차가운 검날이 겨누어져 있었다.
나는 해리슨 경의 어깨 너머로 서 있는 검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를 발견한 내가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기다렸어요. 에녹 경.”
“네?”
해리슨 경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틀다가, 뒤늦게 자신의 목에 드리워진 날카로운 검끝을 발견했다.
“이, 이게…… 무슨……!”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온전히 고개를 돌린 그가 검의 주인을 확인했다.
“브란스 경……! 어째서 당신이……!”
“안녕하세요. 리암.”
에녹 경은 우아하게 웃으며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엾은 견습 기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카일로스가 그를 소개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에녹을 제외하곤’ 가장 실력이 기대되는 기사, 라고 했던가.
“당신은 운이 좋습니다.”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 채, 에녹 경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고 있는 무기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럴 수는 없……!”
“어서.”
“…….”
작게 반항하려던 해리슨 경은 이어진 에녹 경의 단호한 말씨에 주춤거렸다. 미묘하게 에녹 경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서늘히 가라앉았다.
그 모습에 압도당했는지 해리슨 경은 허리춤의 검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잘 했습니다. 그럼 이제 움직여 볼까요?”
결국 모든 무장이 해제된 해리슨 경은 에녹 경에 의해 외딴 곳에 갇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머무른 흔적이 없는 오두막에 그를 결박해 둔 에녹 경은 해리슨 경의 소지품을 뒤졌다.
“레이디 클로이, 이걸…….”
에녹 경이 해리슨 경의 품속에서 카일로스가 캐롤라인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 내용을 읽어 내리는 나의 두 눈이 미묘하게 가늘어졌다.
그가 말한 ‘안전한 곳‘은 캐롤라인 공작성이었나 보다.
“죄송해요, 해리슨 경. 이곳에서 한 열흘 정도만 쉬고 있으세요.”
편지를 곱게 접어 다시 에녹 경에게 건네준 나는 해리슨 경을 향해 허리를 수그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움찔거리며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짧은 휴가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모든 일이 끝난 뒤에는 당신의 처지를 감사하게 될 거예요.”
나는 해리스 경에게 카일로스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말해 주고는 에녹 경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에녹 경의 물음에 나는 편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기다려야지요, 막이 오르길.”
* * *
그저 한 사람이 들었다 놨을 뿐인데, 카일로스는 유독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으면 영원토록 그녀와 함께할 나날들이 펼쳐질 것이리라.
마차에 오르기 직전, 저를 향해 느슨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몸 조심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입이라도 한번 맞춰 줄 걸 그랬나. 헛헛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카일로스는 대공성의 경계를 강화하라 명하고서는 황제가 오기를 기다렸다. 캐롤라인 공작이 편지를 통해 일러주었던 시일이 다 되었다.
힐끔, 시간을 확인한 그는 성벽 위의 망루로 올라갔다. 따분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점차 인내심이 흐트러지려 할 때, 멀리서 흙먼지와 함께 일군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걱, 철걱. 무장한 병사들의 행진 소리가 고요한 대공성을 에워쌌다. 높다란 망루 위에서 카일로스는 자신의 대공성을 포위하는 병사들과 선두에서 하얀 말을 달리는 황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국의 태양이시여!”
카일로스는 망루 아래를 굽어보며 외쳤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오만한 자태로 말 위에 앉아 고개를 젖힌 황제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와 눈이 마주쳤다.
“카일로스 루드비히 3세.”
황제는 눈가를 살풋 찡그리며 표정을 굳혔다.
“무슨 속셈이지?”
“폐하, 신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황실을 기만한 죄인을 바쳐 폐하께 묵은 과오를 용서받고자 하는 바입니다.”
“뭐라?”
황제가 한 손을 들어 펼치자 팽팽하게 시위를 겨누며 대공성을 포위하던 궁병들이 한 발짝씩 물러났다.
“죄인을 바치다니. 죄인은 지금 어디 있는가.”
황제를 태운 흰 말이 다각거리며 앞으로 몇 발짝 걸어 나왔다. 카일로스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한층 더 수그렸다.
“죄인은 죽었습니다.”
“……?”
“황궁을 도망쳐 대공성으로 찾아왔더군요. 황실을 기만하고 중죄를 저지른 악녀를 황족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살리겠습니까.”
“그대가 황궁의 감옥에서 빼돌려 숨긴 게 아니라, 제 발로 찾아온 죄인을 죽였다고?”
옅은 의심이 깃든 황제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카일로스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죄인의 관을 폐하께 선물로 바치옵니다.”
카일로스의 손짓에 그의 병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고 황제를 위한 길을 마련했다. 황제는 스산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으며 카일로스가 기다리고 있는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 위에는 딱딱한 관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 카일로스가 죄인처럼 무릎을 꿇어앉았다.
“이게…….”
“클로이 가넷슈, 황족을 시해하려한 무도한 죄인의 관입니다.”
“…….”
말에서 내린 황제는 가만히 관 위를 손으로 쓸었다.
“의심이 든다면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모두, 열 발짝 물러나라.”
황제의 명에 모두가 물러나 뒤를 돌았다. 비록 황족시해의 죄를 지은 무도한 죄인이었으나 한때 황제의 총애를 받던 여자이다.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내려야 함이 마땅했다.
황제는 손수 관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미미하게 이맛살을 굳혔다.
“음…….”
무언가를 참는 듯한 신음소리, 그리고 곧바로 관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대의 말대로.”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스르륵, 그의 옷자락이 관 위를 스쳤다.
“그 여자가 확실하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는 기쁨도 분노도 괴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가 허공을 향해 두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동시에 그의 기사들이 일제히 황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은 다른 이들보다 한 박자 느린 동작으로 여유롭게 몸을 돌려 황제와 마주보았다.
“죄인의 관을 황궁으로 보내 드리지요.”
“아니.”
황제의 말에 관을 향해 다가오는 대공성의 기사들이 걸음을 멈췄다.
“죄인의 관은 내 사람들이 관리하겠습니다.”
그가 내내 매서웁던 음성을 누그러뜨리며 피식 웃었다.
“형님.”
* * *
황제의 등장 이후로 대공성을 에워싸던 살벌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모두가 즐거이 만찬을 누렸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형님께서 죄인을 직접 처단하였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황제는 푹신한 등받이 위로 느슨하게 몸을 기대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부디 이것으로 그간의 앙금을 잊어 주시길 바랍니다, 폐하.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까지의 과오까지도…….”
카일로스는 황제의 앞에 더욱 고개를 숙이며 낮게 조아렸다.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욕심이었는지 깨달은 바, 신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이후로 황가의 종이 되어 언제나 폐하의 든든한 검과 방패가 될 것입니다.”
“그 여자를 바친 것으로 더 이상 형님께 묵은 과오를 묻지 않겠습니다. 허나, 앞으로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할 것이오.”
점차 흥겨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황제는 경고하듯 대공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황제는 관 안의 시신을 확인한 이후, 단 한 번도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것이 카일로스에게는 오히려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겉으로는 클로이를 죄인이라 칭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미련을 품고 있겠지.’
카일로스는 그런 황제를 안타깝게 여기며 혀를 쯧쯧 찼다. 그러나 굳이 그녀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오늘 밤, 황제는 죽을 테니까.
황제의 기사들을 대공성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대공성 안의 병력으로는 황제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때문에 그의 방심을 유도한 뒤, 깊은 밤이 되면 공작이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난입하기로 미리 약조된 터였다.
아무리 황제가 불세출의 전사라 하더라도, 이토록 만취한 가운데에서 평소처럼 몸을 가누지는 못할 터였다. 지금쯤 신이 나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황제의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늘은 이곳에서 주무시고 가는 게 어떠실지.”
“그러지요. 시간도 늦었으니.”
황제는 흔쾌히 승낙했다. 카일로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카일로스의 손짓에 근처에 있던 시종 하나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황제가 머무르기 위한 방을 준비하러 나가는 모양이었다.
이후 둘 사이에선 그다지 영양가 없는 대화가 조금 더 오갔다.
마침내 식사를 마친 황제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가 사용한 냅킨을 곱게 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순간, 돌연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다이닝 룸 안을 에워쌌다.
“……!”
카일로스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노려보았다.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형님.”
황제는 빙긋 웃으며 유유히 몸을 일으켰다. 황제의 눈짓에 가까이 있던 병사들이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격분하여 소리치는 대공을 향해 황제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그의 앞에 와 섰다. 익숙한 종이 한 장이 그의 눈앞에서 팔락거렸다.
“덕분에 그대와 공작을 한꺼번에 재판에 회부할 증거를 얻었지.”
“그 종이는……!”
카일로스가 캐롤라인 공작에게 보내고자 하였던 편지였다. 종이의 정체를 알아차린 그의 얼굴이 대번에 핏기가 가시며 창백해졌다.
“공작과 모략하여 그녀를 빼돌리고 나를 끌어내릴 생각이었나?”
“오, 오해입니다, 폐하.”
카일로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수습하고자 했다.
“폐하께서도 보셨잖습니까. 제 충심의 증거를……. 누군가 음해하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이미 이 손으로 죽여 저 관에…….”
“아, 그래, 물론.”
황제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이 한차례 웃음을 터뜨리고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저 관에 있는 것이 확실히, 클로이 가넷슈란 말인가?”
“분명 폐하께서도 두 눈으로 확인을…….”
“그럼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저 여자는 누구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카일로스는 고개를 홱 돌렸다.
다이닝 룸을 에워싸고 있는 황제의 병사들 사이로 가녀린 인영 하나가 이쪽을 향해 자박자박 걸어오고 있었다.
“……?”
아주 잠시 동안, 카일로스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눈을 비비고 싶었으나 병사들의 위협에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그는 두 눈을 거칠게 감았다 떴다. 그러나 아무리 감았다 떠도 눈앞의 광경은 바뀌지 않았다.
황제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인영을 향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클로이……!”
카일로스가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황제의 병사들 틈에서 걸어 나온 그녀는 클로이 가넷슈였다.
황제와 클로이는 말없이 서로를 마주선 채로 애틋한 눈빛을 교환했다. 괜찮냐고, 괜찮다고, 그렇게 서로 안부를 묻듯이.
황제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 황제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손길이었다.
그러나 카일로스에게는 그러한 두 사람의 미묘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넋이 나가 있을 뿐이었다.
“클로이, 네가 어떻게…….”
나직한 중얼거림에 그녀가 황제에게서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카일로스, 루드비히.”
그녀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힘주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체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그것도 황제의 병사들과 함께? 이게 모두 어떻게 된 일이지? 아니, 그보다…….
그녀의 고운 이마 위로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 먼 길을 달려오기라도 한 걸까. 미세하게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낯빛이 시선을 붙잡았다.
“괜찮니?”
어두운 그녀의 안색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지요.”
그녀가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클로이…….”
카일로스는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 발짝 내딛었으나, 그 순간 그의 목덜미를 스치는 날카로운 검날에 흠칫 멈추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구경하던 클로이가 푸스스 눈매를 접어 내리며 흐드러지게 웃었다.
“드디어 당신에게 복수를 하는 순간이잖아요.”
“클로이……?”
카일로스는 도무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복수라니, 대체 무슨 복수를, 누구에게.
“카일로스 루드비히 3세. 아놀드 캐롤라인 공작과 더불어 내란을 주도하려 한 죄. 선황제 부처를 시해하고 친모였던 아멜리 루드비히 공녀를 살해한 죄. 엘리야 젬마 백작 부인을 이용해 황후 다리아를 유산시키고 그녀를 속여 황족을 시해한 죄. 약혼녀였던 엘리자베스 로잘라인 후작 영애를 살해한 죄. 몇 주 전 수도에서 있었던 젊은 여자들을 연쇄 납치해 살인한 죄.”
황제의 보좌관인 라트 후작이 그의 죄목을 줄줄이 읊었으나 단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공성의 지하실에서 그대가 그동안 벌여 온 범죄들의 증좌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하나 더 있지. 황제를 나를 기만하여 거짓으로 복종한 죄.”
“그대의 거짓을 들은 이가 많으니 그것 또한 결정적인 증거가 되겠군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미 아놀드 캐롤라인 공작과 엘리야 젬마 백작 부인이 사실을 실토하였습니다. 그대의 후원을 받았던 레이디 클로이 가넷슈 또한 증인이 되어 재판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그럼 이상의 죄목으로 그대를 재판에 회부하겠습니다.”
라트 후작은 피곤한 목소리로 덧붙이고는 병사들에게 눈짓했다. 가까이 있던 병사 하나가 굵은 밧줄을 준비했다.
자박자박, 바닥을 울리는 걸음소리와 함께 레이몬드가 그녀의 뒤편에 섰다. 황제의 두 팔이 그녀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클로이는 가만히 레이몬드의 품에 안겨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드디어, 라는 수식어가 그토록 어울릴 수 없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그에게 복수를 하는 순간이다.
그가 죽였던, 죽이려 했던 레이몬드와, 에스델과, 다리아와, 또 그녀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사람들과,
그리고,
어린 날의 클로이 가넷슈의 복수를.
“클로이, 왜…….”
아주 느리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일로스는 조금 더 아둔하지 못한 스스로가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웠다. 그의 두 눈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내 제게 복수를 하고 있었던 거다. 저를 속이고, 이용하고, 기만하였던 거다.
“나를 용서한다고 했잖아.”
머리로는 모든 상황을 이해했으면서도, 어리석은 부정을 해 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사늘한 비소였다.
“사람의 마음을 속이는 것도, 이용하는 것도, 기만하는 것도. 모두 당신이 내게 알려 준 거예요.”
그녀가, 클로이 가넷슈가 원래 이토록 잔인한 얼굴을 가진 여자였나.
“그리고 당신은 사람의 감정을 농락하는 데 으뜸은 죄책감을 이용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었지요.”
카일로스는 그녀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분노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온몸의 기운이 저 차가운 바닥으로 빠져나갔다.
“네가 그간 저지른 모든 죄는 법정에서 심판받게 될 것이다, 루드비히 대공.”
레이몬드가 옆에서 무어라 말했지만 카일로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흐릿해진 눈동자가 그녀만을 쳐다보았다. 일견 후련해 보이기까지 한, 그녀의 얼굴을.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님.”
클로이는 마지막으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당신은 정말 개자식이었어요.”
그녀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황제의 병사들이 굵은 밧줄로 그의 몸을 포박했다.
마치 시간을 거스르기 이전, 그때와 같았다. 같은 장소. 같은 방법으로. 오로지 주연만이 뒤바뀐 촌극이었다.
카일로스는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만을 응시했다. 그녀는 모든 것이 끝났단 표정으로 제게서 몸을 돌렸다. 작은 몸이 황제의 품속으로 미끄러졌다.
“…….”
황제의 옆에 있는 그녀를 보며, 카일로스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이제껏 그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제가 주었다 생각했는데. 그녀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로 황제를 마주하고 있었다.
황제를 담은 그녀의 눈동자는 안락하고 평온하며, 맑았다.
황제를 향한 그녀의 손짓은 간절하고, 애틋하며, 단단했다.
황제에게 닿는 그녀의 입술은…… 뜨겁고, 격렬하며, 부드러웠다.
단 한 번도, 카일로스 루드비히의 앞에서는 보여 주지 않은 것들이었다. 대체 누가, 대체 누가 그녀에게 저러한 눈빛과 손짓과 입술을 가르쳐주었단 말인가.
구태여 한 번 더 자문하지 않아도 금세 답을 알 수 있었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저주해 마지않는 저의 이복아우. 아니, 사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스타 제국의 황제.
“언제나 그랬지. 언제나…… 언제나 너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그토록 쉽게 가질 수 있었어.”
증오에 찬 읊조림에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레이몬드가 고개를 비틀었다.
“어리석구나, 대공. 옆에 두었을 때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건 네가 아니냐.”
레이몬드는 거만하게 대공을 내려다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그리고 난, 절대 쉽게 갖지 않았어.”
레이몬드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녀의 마음을 쉽게 가질 수 있었다고? 우스운 소리. 정작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쉽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저 남자였다.
어렵고, 어렵게 얻은 마음이었다. 귀하고, 귀하게 얻은 그녀였다. 그렇기에 더욱 소중한 연인이었다, 클로이 가넷슈는.
황제의 병사들이 허무하게 서 있던 대공을 끌어냈다.
레이몬드는 잠잠히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그 소중한 연인이 제 품 안에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 * *
레이몬드의 품 안에서 나는 끌려 나가는 카일로스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마지막까지 내게서 거두지 않는 그의 시선을 꼿꼿이 마주보는데 불쑥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치밀어 올랐다.
아주 오랜 기간 나의 사랑을 기만해 왔던 남자의 몰락이었다. 조금 통쾌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클로이.”
다정한 손길이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연스럽게 돌린 시선의 끝에 레이몬드가 있었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남자. 내가 사랑하는 남자.
“다른 곳은 보지 말고, 나를 봐. 오랜만에 다시 만난 거잖아.”
굵은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게 사근사근 귓가를 간지럽혔다.
“보고 싶었어, 클로이.”
그는 꼭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는 듯이 음절 하나하나에 힘주어 소리 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다란 이 남자가 무척이나 귀엽게 느껴졌다.
“저도 많이 보고 싶었어요, 폐하.”
사르르 웃으며 말하자 그의 눈동자가 짙은 열기로 번득이는 게 느껴졌다. 그가 참지 못하고 내 어깨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폐하?”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나와 떨어져 있던 그 기간이 그에게는 굉장히 힘든 나날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입장에서는 나의 안전이 담보로 잡힌 상황일 테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붉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흩어지는 짧은 머릿결이 내 마음까지 덩달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대공이 네게 몹쓸 짓은 하지 않았겠지?”
한동안 내 손길을 느끼던 그가 불쑥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했다가는 당장 카일로스를 찾아가 찢어죽일 것만 같은 음산한 눈빛이었다.
“그럼요. 저는 아주 멀쩡해요.”
그 무서운 눈빛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나는 참 많이도 그를 사랑하고 있나 보다.
뒤늦은 안도감과 함께 나른한 졸음이 밀려오던 찰나, 나의 몸이 허공으로 불쑥 들렸다.
“폐, 폐하……?”
레이몬드가 내 허리와 무릎 뒤쪽에 팔을 넣어 나를 안아들었다.
“내, 내려 주…….”
“꽉 붙잡아. 안 그러면 떨어질지도 모르니.”
“……!”
졸지에 공주님처럼 안긴 나는 당황하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네 몸이 혹사당했어. 안 그래도 가냘팠는데, 더 가벼워진 것 같아.”
레이몬드는 자못 속상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고작 며칠 동안 황궁을 떠나 있었다고 더 가벼워졌다니.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투덜대자, 낮은 웃음소리가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끔뻑이며 레이몬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졸린가 보군.”
“조금이요.”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노곤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 또한 그의 것과 함께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내 여자가 이토록 대담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점차 시야를 덮치려는 졸음 속에서 무언가 굉장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폐하, 방금 뭐라고…….”
방금, 그가 내게…… ‘내 여자’라고…….
“한숨 푹 자 둬, 클로이.”
그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자, 그가 코끝을 내려 내 코끝에 부딪쳤다.
“눈을 떴을 땐 다시 황궁으로 돌아간 뒤일 테니까.”
입술 위로 가볍게 촉,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노곤한 몸을 그의 품에 맡긴 채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 * *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어두운 지하 통로를 가득 울리며 퍼져나갔다. 갈색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장신의 여자는 시중인의 안내를 받으며 보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또각, 또각, 또각, 딱. 여자의 걸음이 어느 죄수가 갇혀 있는 창살 바깥에서 멈추었다.
“왜 그랬어, 엘리?”
담담한 목소리는 마치 안부를 묻는 듯 여상하였으나, 창살 안쪽을 응시하는 여자의 눈동자에는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가 한데 섞여 일렁거리고 있었다.
엘리야 젬마 백작 부인, 황후 다리아가 어린 캐롤라인 공녀였을 시절부터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친우이자 그녀의 측근 시녀이기도 했던 여자가 창백한 얼굴로 달달 떨고 있었다.
“나, 나는…… 그게 널 위험하게 만드는 독이라고 생각 못했어. 네가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약이라고. 그래서, 난 그 말만 믿고…….”
앞니를 딱딱 맞부딪히며 변명하는 친우의 말에 황후 다리아의 미간이 매섭게 찌푸려졌다.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다리아는 친우의 말을 칼같이 잘라내며 있는 힘껏 상대를 노려보았다.
“내 아이.”
한때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품었던 아랫배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다리아는 황후가 된 뒤 처음으로 언성을 높여 소리를 질렀다.
“나와 윌의 아이를 네가 죽였잖아!”
“……!”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양새가 너무나 역겨웠다.
레이몬드로부터 그녀가 성 플로라의 축일날 독을 쓴 공범이노라 자백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순진한 그녀가 요사스러운 자들의 꼬임에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에 이어 오래전 자신의 아이를 유산시킨 이 또한 그녀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래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는 절대 서툰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정보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몇 번에 걸쳐 상대를 심문하고 확신이 든 뒤에야 제게 사실을 전했을 것이다.
“네가, 나와 윌의 아이를 죽였어, 엘리.”
뜨거운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연인을 잃고 아이를 잃었을 때조차도 이렇게 악을 쓰며 분노하지는 않았다.
“위, 윌의 아이였다고……?”
젬마 백작 부인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바닥으로 몸을 허물었다.
“아아, 말도 안 돼……. 나, 난…… 난…….”
후두둑, 툭, 툭. 굵은 눈물방울이 회색빛의 바닥을 적셔 나갔다.
“난…… 네가 황제의 아이를…… 윌을 배신하고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너 때문에 죽은 윌이 너무나 가엾어서…….”
다리아의 사늘한 눈동자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하는 친우의 모습을 담았다.
“설사 윌의 아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황제의 아이를 죽이는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르지 않았을 텐데.”
“위, 윌은 너 때문에 죽은 거잖아! 네가 윌을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그래서 난……!”
무릎걸음으로 창살 앞까지 기어 온 젬마 부인이 양손으로 창살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두고 볼 수가 없었어! 죽은 윌을 금세 잊고 황후가 되어 버린 너를……! 황제의 아이를 가진 너를……!”
“…….”
다리아는 윌터 루카스를 떠올렸다. 다리아 캐롤라인과 엘리야 아벨, 그리고 윌터 루카스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놀며 자란 절친한 소꿉친구였다.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셋은 성장하였다. 다리아 캐롤라인은 아스타 제국의 황후 다리아가 되었고, 엘리야 아벨은 젬마 백작과 결혼하여 젬마 백작 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윌터 루카스는 여전히 어린 시절과 같이 두 사람의 기억 속 ‘윌’로만 남았다. 그 이름을 부를 때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돌아보던 남자의 얼굴이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했다.
다리아는 그 선연한 잔상을 지워 내며 자신의 아래에 만신창이가 되어 주저앉아 있는 또 다른 친구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윌과 엘리와 다리아. 어릴 때부터 세 사람은 함께 놀며 자란 절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그 마지막에 ‘엘리’는 결국 ‘윌’을 위해 ‘다리아’의 아이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윌만 너의 친구였니?”
“…….”
“나는…… 나도 너의 친구, 아니었어?”
물기에 젖은 음성이 파르르 떨리었다. 미친 사람처럼 악을 쓰던 엘리야 젬마 부인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다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네 친구였잖아, 엘리. 윌이 소중했던 만큼 나는 소중하지 않았던 거야? 설사, 설사 내가 정말 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 거였다 하더라도…… 어떻게 네가 내게…….”
“……다리아.”
모든 것을 체념한 젬마 부인이 고개를 아래로 꺾었다. 음울한 목소리가 스스로 목을 조른 오랜 친구의 이름을 읊조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벌써 십 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원죄는 그녀가 친우의 태중 아이를 죽였던 십 년 전, 그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갔다.
“나는 항상 네가 부러웠어…….”
젬마 부인은 오랜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나 두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가던 어린 다리아와 어린 윌터. 그리고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어린 엘리야.
사실은 그녀도 그 손을 잡고 싶었다. 그 품에 안기고 그 어깨에 기대어 수줍은 마음을 속닥이며 꺼내고 싶었다.
‘엘리! 나, 윌이 좋아!’
어린 시절의 다리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밝고 쾌활했으며 솔직한 아이였다.
‘윌을……? 그럼 황태자 전하는?’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코흘리개 따위 신경 쓸 필요가 뭐 있담.’
아무리 듣는 이가 없다지만 당당하게 황태자의 험담을 하는 와중에도 막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양 볼은 풋풋하게 물들어 있었다.
‘다음 윌의 생일날, 고백할 생각이야.’
‘뭐? 하지만 여자가 먼저 고백을 하는 건 평민들이나 하는 일이잖아.’
‘뭐 어때! 귀족 여자는 먼저 고백을 하면 안 된다고 제국법에 나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린 엘리야로서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귀족 여자로 태어나 마음에 품은 남자에게 먼저 고백을 하는 건…….
‘그러니까 엘리, 그날 꼭 도와줘야 해. 알았지?’
천진하게 두 눈을 반짝거리는 친우에게 엘리야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나도 윌을 좋아하고 있노라고. 사실은 내가 너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 애를 좋아해 왔노라고.
어쩌면 당당한 그녀의 모습에 차마 먼저 그 애에게 고백할 생각을 해 보지 못한 알량한 귀족 여자의 자존심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마음 앓이를 했지만 그래도 엘리야는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다. 누가 뭐라 해도 다리아와 윌터는 그녀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고작 어린 날의 외로운 짝사랑이 세 사람의 굳건한 우정을 깨뜨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잔인한 균열은 윌터 루카스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다리아의 부모였던 캐롤라인 공작부부가 갑작스레 비명횡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연인이었던 윌터 루카스가 실종되었다.
실종된 윌터 루카스는 얼마 뒤 사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모두 다 자신 때문이라는 다리아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맺혔다. 오랫동안 다리아의 옆에 있었던 엘리야는 그녀의 불행을 주도한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윌터의 죽음은 엘리야에게도 크나큰 슬픔이었으나, 엘리야는 다리아를 탓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를 탓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해 주었다.
다리아가 돌연 황제와의 결혼을 발표하지만 않았더라면 그 우정이 깨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제게 상의도 없이 결혼을 선언한 그녀는 곧바로 얼마 안 돼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
엘리야는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윌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그것은 억울하게 죽어 간 윌터 루카스에 대한 배신이자, 그녀를 위해 윌터 루카스를 양보했던 어린 엘리야에 대한 배신이었다. 엘리야는 다리아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둠의 경로를 통해 약을 구했다. 아이를 유산시키고 산모를 영영 불임으로 만드는 약이라 했다. 약을 판매한 이는 약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묻지 않았고, 엘리야 또한 상대의 정체를 캐지 않았다.
그렇게 엘리야는 다리아의 차에 약을 탔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 데에 한 치의 죄책감도 없었다.
‘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갖는 건 우리 모두에 대한 배신이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 없이 오열하는 다리아를 보고도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황제의 아이는 유산되었고, 다리아는 영원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엘리야는 가증스러운 얼굴로 슬픔에 젖은 다리아를 곁에서 위로해 주었다.
황제의 아이를 잃은 다리아는 다시 엘리야의 둘도 없는 친우가 되었고, 그렇게 십 년이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점차 그 일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젬마 백작 부인이 된 엘리야가 오랜 난임 끝에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정말 축하해, 엘리.’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다리아를 보며, 오랜 시간 동안 묵혀 두었던 죄책감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날 엘리야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 보냈는지 모른다.
미약하게 태동을 일으키는 뱃속 아이의 존재를 처음으로 느꼈을 때,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는가 알 수 있었다.
‘내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십 년 전의 사건 이후로 다리아는 여전히 아이를 갖지 못했다. 비록 아직 한창 때의 나이라 하여도 오랜 기간 아이를 갖지 못한 황후의 지위가 훗날 얼마나 위태로워질지 엘리야도 모르지 않았다.
엘리야는 제 손으로 망친 친우의 몸을 다시 돌려주고 싶었다. 어떻게든 다리아가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되길.
그래서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러던 중 그 남자,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이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 약의 효능을 되돌리는 방도를 찾고 있다지?’
‘그 약이라니요?’
‘십 년 전, 내게서 구해 간 약. 아이를 유산시키고 산모를 불임으로 만드는 약을 가져가지 않았나. 설마 그걸 황후에게 사용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
십 년 전 그 약을 판매한 이가 루드비히 대공이란 사실은 굉장히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놀라울 틈마저 없이 괴로워했다. 자신의 치부를 낯선 이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굉장한 고역이었다.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루드비히 대공은 상당히 솔깃한 제안을 하나 했다.
‘그대가 조금만 도와 주면 황후의 찻잎에 십 년 전 그대가 썼던 약의 해독제를 섞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클로이 때문에 황실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쯤은 나도 짐작하고 있어요. 어째서 다리아를 위해 주려는 거지요?’
물론 엘리야 역시 무조건 그를 믿으려 들지는 않았다.
정확히 루드비히 대공과 클로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다리아가 누구로부터 그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지는 그녀 역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적대 관계에 있는 대공이 아무런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 리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때문이야. 클로이를 되찾기 위해서지. 아우님께서 황후와 이혼을 할 거라고 한차례 선언하셨거든. 그 아이 때문에.’
‘……!’
엘리야는 클로이와 레이몬드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그저 다리아의 측근 시녀였던 클로이가 그녀의 남편인 황제를 유혹했다는 생각에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후계자를 잇지 못하는 황후이니, 황제에게도 아주 명분이 없지는 않지. 그래서 황후의 몸 상태를 되돌리려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김으로서 둘의 관계도 개선이 되고, 나는 그 틈을 타 클로이를 되찾아 오고. 그대에게도 썩 나쁘지 않은 거래이지 않은가?’
잠자코 그 말을 듣던 엘리야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전의 사건 이후로 형식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다리아가 다시 황제와 정을 나눌 수 있길 그녀는 누구보다 바랐다. 한 번 잃어야 했던 아이를 다시 갖게 된다면 황제 또한 시녀에게 돌렸던 눈을 다시 다리아에게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된다는 거지요?’
‘이 약재는 불임을 개선해 주고 부부관계를 북돋아 주는 효능이 있지. 이걸 황후의 찻잎 속에 섞어 놓을 것이다.’
루드비히 대공은 품속에서 말린 식물 같은 것을 꺼내 보였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를 낳을 때까지 시녀 일을 잠시 쉬기로 했어요. 불과 한 달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나로서는 다리아의 찻잎 속에 이 약재를 섞을 방도가 없어요…….’
엘리야는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로 답했다.
차마 십 년 전 자신이 벌인 일을 자백할 용기 또한 없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당당하게 사람을 시켜 약재를 선물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황궁 의사가 이 약재를 알아보고 십 년 전 일과 자신을 엮어 의심하게 되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녀는 어렵게 이어 온 우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 약재를 제게 주시면 나중에 제가 다시 황궁에 가게 될 때…….’
‘멍청한 소리. 그때가 되면 이미 황후는 황제에게 이혼을 당한 뒤일 것이다. 황제는 성 플로라의 축일 직후에 이혼 절차를 진행할 거라고 했으니까.’
그 말에 엘리야는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어떡하지요? 아, 내가 조금 더 빨리 이 약재를 찾았어야 했는데…….’
울먹이는 그녀에게 루드비히 대공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게 황후의 측근 시녀들만 갖고 있는 출입증이 있질 않나? 그게 있으면 황후의 모든 공간에 드나들 수 있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황궁의 기사들은 시녀들의 얼굴을 알고 있어요. 황후의 시녀가 아닌 다른 자가 출입증을 갖고 있으면 틀림없이 의심 받을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게 다 좋은 방도가 있으니.’
그렇게 말하는 루드비히 대공은 굉장히 믿음직스러웠다.
그래서 엘리야는 덜컥 그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순진하게도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의 말을 믿은 것이 그녀의 최대 실수였다.
엘리야는 불임이 된 다리아의 몸을 다시 되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성 플로라의 축일, 그 약이 섞인 차를 마신 황제와 황후는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클로이는 황제와 황후를 시해하려 한 범인으로 많은 이들에게 지목받고 있었다.
뒤늦게 엘리야는 자신이 대공에게 속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내 잘못이야…….”
그녀의 잘못이었으니까.
“미안해, 다리아……. 내가…… 내가…….”
후둑, 후두둑, 툭, 투둑.
끊임없이 바닥을 적시는 그녀의 눈물을 다리아는 한참동안 말없이 보았다.
“내일, 법정에서 보겠구나.”
냉랭한 시선으로 옛 친우를 쳐다보던 다리아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정갈한 구두 소리가 다시금 어두운 지하 감옥 안을 잔뜩 울렸다.
사라져 가는 친우의 뒷모습을 넋을 놓은 채 쳐다보던 젬마 부인은 문득 아랫배가 욱신거리는 느낌에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눈물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이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오슬오슬한 추위와 함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양 팔로 야트막하게 솟은 아랫배를 그러안은 채 바닥에 엎드렸다.
“아, 아, 아, 안 돼…….”
오랜 기간 감옥에 갇혀 약해진 몸이 위험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안 돼…… 허억…….”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한 번을 빗나가지 않을까. 허벅지를 타고 미끄러지는 뜨겁고 축축한 감각이 그녀를 덮쳤다.
그럴 순 없다. 무려 팔 년 만에 갖게 된 귀한 아이였다.
“제발…… 제, 제발…….”
고개를 내려 아래를 바라본 그녀는 곧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세탁하지 못해 지저분한 흰색 원피스의 아랫단이 선연한 붉은 빛깔로 젖어들고 있었다.
“아, 아이…… 아이가…….”
시야가 새빨갛게 암전되는 순간, 그녀의 의식이 끊기고 말았다.
* * *
레이몬드는 자신의 품 안에서 고요히 잠든 사랑스러운 연인을 내려다보았다. 색색거리며 숨을 내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고스란히 두 눈에 들어왔다.
“많이 피곤했나 보군.”
낮은 웃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레이몬드의 두 눈에는 차마 감출 수 없는 안쓰러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 작고 여린 몸으로 저를 지키겠다며 스스로 미끼가 되길 자처하였던 그녀가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사실은 그녀가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싫었다. 정말, 끔찍하게도.
“내가 더 많이 지켜 주고 싶었는데, 클로이.”
그러나 레이몬드는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한 발짝 앞을 향해 내딛으며 성장하려는 그녀를, 어찌 그가 감히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하여 그녀의 의견대로 따르기로 했다. 다만, 그녀를 마냥 방관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그녀가 아주 조금이라도 다치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평생토록 스스로를 용서치 못할 것 같았기 때문에.
엘리야 젬마 백작 부인이 그를 찾아온 것은 그녀가 떠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다리아가 쓰러진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는 백작 부인이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오랜 난임 끝에 아이를 가져 저택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서지 않는다는 바로 그 여자가 말이다.
레이몬드는 직감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일이구나, 하고 판단했다.
‘황제 폐하, 제발 다리아를…… 다리아를…….’
백작 부인은 다리아를 제발 살려 달라며 울부짖었다.
‘모두 그 남자의 짓입니다. 카일로스 루드비히…… 그 남자입니다. 찻잎 항아리를 바꿔치기해 다리아를 죽이려 한 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클로이가 그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게끔 수를 쓴 것도……. 그리고 그 남자에게 속은 제가…… 다리아를…….’
‘그게 무슨 소리지?’
‘다리아를 다시 임신할 수 있는 몸으로 되돌려 준다고 했어요. 황후의 측근 시녀들만 갖고 있던 휴게 공간의 출입증만 빌려 주면…….’
레이몬드는 곧바로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여러 번 다시 물어야 했다. 젬마 백작 부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대며 카일로스와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털어 놓았다.
십 년 전, 다리아가 윌터 루카스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여 그녀의 뱃속 아이를 유산시킨 일.
그 부작용으로 영영 불임이 된 그녀를 보며 품어 온 죄책감과 최근 아이를 갖게 된 제게 축하해 주던 그녀의 모습으로 죄책감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의 감정.
그리고 바로 얼마 전, 그녀에게 접근했던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의 이야기까지.
엘리야 젬마 백작 부인의 자백으로 범인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게 되었지만, 문제는 그가 갖고 있는 패가 오로지 백작 부인의 자백뿐이라는 점이었다.
제국법상 증거가 없이는 아무리 명명백백한 자백이라 하더라도 유죄가 성립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곳곳에서 클로이가 범인이라는 거짓 정황들이 속출하고 있었기에, 이를 뒤집기 위해서는 큰 수가 필요했다.
그 ‘큰 수’를 찾기 위해 레이몬드는 덫을 놓았다. 친위대를 보내어 클로이를 붙잡아 황궁의 감옥에 가두었다.
멀리서 그녀가 잡혀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레이몬드는 당장 그녀에게 뛰어가고 싶은 것을 참아야만 했다.
그가 두 번째로 한 것은 카일로스의 협업자를 찾기 위해 범위를 좁히는 일이었다.
엘리야 젬마 백작 부인의 말에 따르면, 카일로스는 자신이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기 전부터 다리아와 이혼할 것이라고 공언한 내용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그 뜻을 알린 이들은 오로지 귀족 의회에 속한 열 가문의 수장들 중에서도 마침 수도에 있던 여섯 명의 귀족뿐이었다. 레이몬드는 그 여섯 명 중에 카일로스의 협업자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피상적으로 다리아와 이혼한다는 것까지는 그가 가진 정보망을 이용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시기까지는 그 여섯 명의 귀족 중 하나가 그와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레이몬드는 여섯 명의 귀족들을 각기 은밀하게 불러내, 모양과 크기는 같으나 서로 다른 종류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열쇠를 내밀었다.
‘황궁 감옥의 열쇠이다. 이것을 내 주변에 두었다간 내가 언제 눈이 돌아가 죄인을 다시 꺼내 내 옆에 두려 할지 모르겠으니, 당분간 그대가 맡아 두어라.’
두 명의 공작에겐 황금으로 만든 열쇠를, 두 명의 후작에겐 은으로 만든 열쇠를, 나머지 두 명에게는 구리를 녹여 만든 열쇠를 주었다. 그리고 친위대 중 은신술이 좋은 이를 부려 대공이 감옥에 침입하는 순간을 은밀하게 지켜보게끔 했다.
‘분명 황금빛이었습니다.’
감시를 마친 친위대가 돌아와 보고했다.
‘그렇다면 대공의 협업자는 두 공작 중 하나.’
레이몬드는 두 명의 공작, 아놀드 캐롤라인 공작과 아드리안 헤지스 공작을 떠올렸다.
캐롤라인 공작은 둘째치고 고지식하기로 소문난 헤지스 공작이 카일로스의 협업자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편견 없이 두 사람을 모두 감시했다.
차츰 캐롤라인 공작 쪽으로 의심이 좁혀지려 할 때, 클로이로부터 편지가 왔다. 편지를 전달해 준 이는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몇 번 보았던 대공성의 잘생긴 청년 기사였다.
그녀의 편지를 통해 캐롤라인 공작이 카일로스의 협업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캐롤라인 공작은 죄인 클로이 가넷슈가 황궁의 감옥을 탈출해 루드비히 대공성에 숨었다고 알려 주었다.
황제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대공성을 공격해야 한다는 캐롤라인 공작의 주장에 레이몬드는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시늉을 하며 거짓된 정보들을 흘렸다.
[폐하께서 출병하실 때, 카일로스는 곧바로 폐하께 투항하는 척을 할 거예요. 죄 없는 여자의 시신을 나의 것이라 속여 폐하께 바친 뒤, 경계를 느슨하게 하려는 속셈이에요.]
클로이가 보내 온 두 번째 서신에는 카일로스의 계획이 자세하게 써져 있었다.
[대공성의 지하에 그의 온갖 죄악들이 잠들어 있어요. 저는 에녹 경의 도움으로 대공의 눈을 피해 탈출했어요. 근방에서 숨어 기다리다가 폐하께서 오실 적에 저도 함께 합류할게요.]
그녀가 대공성의 근방에 숨어 기다린다는 대목에서는 솔직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은 클로이가 그냥 이대로 황궁에 돌아와 제게 남은 일들을 모두 맡기길 바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레이몬드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다만 그녀가 위험해지는 일은 없도록,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녀와 다시 만나길 기약하며.
[대공성에 오실 때에는 반드시 대공의 죄악을 공증할 수 있는 신분의 사람과 함께 와 주세요. 모든 일이 끝나고 재판이 열릴 적에 그 자가 절대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물론 그녀의 당부가 없더라도 그리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레이몬드는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챙겨 주는 그녀의 섬세함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클로이의 도움으로 카일로스가 캐롤라인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를 중간에 가로챌 수 있었던 레이몬드는 가장 먼저 공작을 체포했다. 그 뒤, 공작의 이름으로 카일로스에게 답장을 했다.
대공이 황제의 병사들을 대공성에 끌어들인다면 약조대로 공작성의 병사들을 지휘하여 대공성을 포위하겠다고. 황제의 병사들을 안팎으로 위협하자고.
레이몬드는 카일로스의 대공성으로 출병할 적에 클로이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보좌관이자 귀족 의회의 의원 중 하나인 라트 후작을 대동했다.
철저한 문관이었던 후작은 어째서 자신이 출병에 함께해야 하는지 여러 번 의문을 표했으나, 레이몬드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그를 꿋꿋이 데리고 출병했다.
그리고 대공성에 도착하기 직전, 근방에서 기다렸다는 그녀와 재회했다.
레이몬드는 함께하겠다는 그녀를 말리는 대신, 그녀가 함께 대공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황궁 병사의 갑옷과 투구를 내어주었다.
레이몬드가 카일로스를 상대하는 동안 그의 병사들은 바깥에 있던 대공성의 병사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투구로 얼굴을 숨긴 뒤 병사들과 함께 잠입한 그녀의 도움으로 대공성 지하에 있던 죄악의 증좌들을 모조리 확보할 수 있었다.
회상을 마친 레이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잠든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냥 내게 모두 맡기면 좋았을 것을…….”
가장 좋은 방에서 가장 좋은 음식만 먹이고, 가장 좋은 의복만 입히고, 가장 좋은 것들만 보게 하고 싶은 그녀인데.
그런 저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이제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그런 고생은 못 하게 할 거야.”
잠든 그녀가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하건만, 레이몬드는 꼭 그녀에게 다짐을 받아 낼 듯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여러 번 중얼거렸다.
* * *
대공 카일로스 루드비히 3세와 공작 아놀드 캐롤라인은 내란을 주도하고 황족을 시해하고자 한 죄목으로 법정에 섰다.
절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캐롤라인 공작과는 달리, 루드비히 대공은 비교적 차분한 얼굴 위로 허탈한 빛깔을 띠우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허망한 눈동자가 증인석에 앉아 있는 한 여자만 응시했다.
레이디 클로이 가넷슈, 오랫동안 대공의 후원을 받아 왔다는 사교계의 이름난 아가씨가 이번 재판의 증인이 되어 참석하였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조목조목 흘러나오는 대공의 죄악은 실로 모두를 가공케 하였다. 십 년 전, 선황 부처를 시해한 죄에서부터 불과 몇 주 전 수도에서 있었던 젊은 여자들에 대한 연쇄 살인죄까지.
클로이 가넷슈는 아주 오래전 가넷슈 가를 몰락시켰던 그 일을 제외한 카일로스 루드비히의 모든 죄악을 그 자리에서 발설하였다.
대공성의 지하에서 발견되었다는 목 위쪽으로만 남은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부패한 시신이 도착하였을 때는 그만 그 끔찍함을 견뎌 내지 못하고 재판장을 떠나는 이들까지 생겨났었다.
실신해 버린 후작 부부를 대신하여 후작 저택의 시녀장이 목만 남은 시신의 신원을 확인했다. 오른쪽 귀 밑에 박힌 두 개의 점이 후작영애의 것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이어서 그가 벌인 죄악의 증거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름 없는 시신들과 실종된 여자들의 소지품들, 황후의 찻잔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종류의 불순한 약초까지…….
“숙부님께서는 이 모든 죄악들에 우선하여 아주 오래전부터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스스로 황좌를 움켜쥐기 위한 모략들을 벌여 왔습니다. 제가 바로 그 모략의 증거 중 하나입니다.”
제아무리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나 고작 방계의 사생아인 그녀의 말이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현장에서 발각된 황제 시해의 정황과 루드비히 대공이 오랫동안 숨겨온 죄악들이 밝혀진 탓이었다.
“숙부님은 제게 황제 폐하를 미혹시킬 것을 종용했습니다. 오로지 그것을 위해 저를 거두셨지요. 루드비히 대공성에서 지냈던 지난 팔 년 간, 저는 의지를 가진 인격체가 아닌 숙부님의 도구였습니다.”
클로이 가넷슈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두 눈을 아래로 깔았다. 차마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그녀의 촘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었다. 좌중들의 입에서 다시 한번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래전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고작 ‘방계의 사생아인 클로이 가넷슈’의 말을 어느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 자리에 증인으로 선 이가 ‘오랫동안 그의 보호 아래에 자라온 클로이 가넷슈’라서, 그녀의 증언은 속속히 밝혀진 증좌들과 함께 더욱 굳건한 사실이 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황제마저 미혹시켰던 아름다운 외양과 처연한 음색이 재판을 방청하러 온 좌중들마저 매료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난 신년제의 밤, 저는 숙부님에 의해 황제 폐하를 처음 만나게 되었으나…… 차마 그 명을 이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숙부님께서 명하신 바는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크나큰 중죄였고, 또한 여러 사람을 기만하는 일이었기에…….”
기어이 클로이 가넷슈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카일로스 루드비히가 그대를 통해 하려던 바가 정확히 무엇인가?”
대법관마저도 그녀를 향한 안쓰러움을 간신히 참아 내며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 폐하를 미혹하여 교단과 반목하게 만들고, 귀족 의회의 신임을 잃도록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미인을 이용하는 방법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고전적인 모략이었다. 이미 몇 차례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수법이었기에 그녀는 그 한마디로 모두를 쉽사리 납득시킬 수 있었다.
클로이 가넷슈는 그에 더하여 대공의 생부가 따로 존재하였으며 그는 선황의 핏줄이 아님을 증언하였다.
비록 그것은 증좌가 없었기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그녀가 그것을 언급한 것은 오로지 한 사람 때문이었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잔혹하고 냉정한 황제라는 세간의 평과 달리 다정하고 상냥한 마음씨를 지닌 아스타 제국의 황제가 자신의 핏줄을 법정에 세웠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재판을 관망하던 레이몬드 황제 또한 그런 그녀의 배려를 모르지 않았기에, 날카로운 눈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클로이 가넷슈는 몇 개의 증언을 더한 뒤 재판장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대공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소란 속에서도 루드비히 대공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의 시선은 재판장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그대로 박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달려 나가고자 하였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네게서 먼저 등을 보인 이상, 너는 절대 그녀의 뒤를 쫓지 못할 거야.’
저주처럼 옭아매던 여자의 속삭임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침잠한 허무가 그를 옭아맸다.
* * *
두 차례의 재판을 더한 끝에 죄인들의 처우가 결정이 났다.
엘리야 젬마는 황후가 쓰러진 직후에 먼저 자백을 한 점을 인정받아 황제의 선처로 풀려났으나, 고된 옥살이로 아이를 유산하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 젬마 백작은 작위를 박탈당하였고, 한 번의 유산 이후로 그녀는 영원히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캐롤라인 공작은 재판 과정에서 그간 감춰져 있었던 몇 가지의 죄목이 함께 드러나 처형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를 증언한 이는 다름 아닌 황후 다리아였다.
“아놀드 캐롤라인은 오래전부터 공작의 작위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제 부모님께서는 자식이 하나뿐이었고, 선황 폐하께서 살아 계시던 시절 황실과 공작가 사이에 혼약이 오갔죠. 그렇기에 그는 제가 황후가 된 뒤 부모님을 제거하여 자연스럽게 차기 공작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 있었고, 선황 폐하께서 승하하신 직후 저는 황제 폐하께 혼약을 깨뜨려 주길 요청하였습니다. 그 부분은 황제 폐하께서 증언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대법관이 황제를 바라보자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의 말이 사실이다. 직후 내 보좌관인 라트 후작이 새로이 혼담을 넣을 가문을 추려 보고했던 서류가 황실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저는 윌터 루카스 경과 약혼을 앞두고 있었으며, 제가 그와 결혼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공작가의 작위가 이어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저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제 연인이었던 윌터 루카스 경 또한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숙부는 저를 찾아와 협박했습니다. 황제와 결혼하지 않으면 제 연인이었던 윌터 루카스 경을 죽일 것이라고요.”
윌터 루카스의 이름을 입에 담을 적에, 황후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닌 명백한 분노였다. 오랜 기간 감추어 온, 짙은 분노.
“그러니까 사실 모두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생각했던 윌터 루카스 경은 사실 제 숙부에 의해 목숨을 위협당하는 처지였던 것이지요. 그의 부친이신 루카스 후작께는 차마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라도 사실을 알리는 순간, 제 연인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숙부는 윌터 루카스를 국외로 추방하여 자신의 감시 아래 둔 뒤, 그와 비슷한 체형의 시신을 구해 와 그의 죽음을 위장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연인은 제국에서 죽은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제껏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재판을 관망하던 레이몬드 황제의 표정 또한 기묘하게 변해 갔다.
“숙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게 황제와 결혼을 하되, 황궁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 연인의 목숨이 위험함은 물론, 제 어린 시절 친우이기도 했던 레이몬드 황제 폐하를 압박할 것이라고 했지요. 당시의 폐하께서 아무런 기반 없이 불시에 선황 폐하를 여의었던 열네 살의 소년 황제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협박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녀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는 폐하께 십 년간 계약 결혼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모두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팔짱을 꼈다. 그들이 서로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결혼을 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십 년간 계약 결혼’을 했다는 것은 당사자인 황제마저도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폐하께서는 저와 숙부 사이에 오갔던 자세한 이야기는 알지 못했으나 오로지 어렸을 때의 인연이었던 저를 위해 제안을 받아주셨습니다. 당시 아놀드 캐롤라인이 제게 써 주었던 계약서의 원본을 증거로 제출합니다.”
대법관이 황후가 제출한 증거를 읽어 내리자 좌중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아놀드 캐롤라인의 계약서에는 ‘다리아에게 황후가 될 것이되 사교계에 진출해 힘을 기르지 말 것’과 ‘캐롤라인 공작가의 어느 것도 탐내지 말 것’이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이를 어기거나 발설할 시 국외에서 간신히 목숨만 보존하고 있는 윌터 루카스의 생명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몇몇은 연인의 목숨을 담보로 잡혀 숙부의 뜻에 따라 황후가 되어 숨죽여 지내야 했던 그녀를 동정하였으며, 또한 몇몇은 그런 황후와의 우정을 위해 지난 십 년간 그녀를 보호해 주었던 황제를 달리 보았다.
‘윌터 루카스라.’
레이몬드는 시간을 거슬러 오기 이전, 딱 한 번 다리아에게서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하였을 때, 그녀가 이혼의 대가로 요구한 것은 오로지 두 가지였다.
아스타 제국과 동쪽 국경선을 맞댄 브리 왕국에 거주하고 있는 ‘윌터’라는 남자의 신원. 그리고 국경을 포함한 제국 동쪽의 땅 일부.
‘그래서 캐롤라인 공작령이 있는 서쪽 땅이 아닌 국경의 동쪽 땅을 요구했던 거군.’
숙부에 의해 십 년간 만나지 못했던 연인을 숙부로부터 지키기 위해.
레이몬드는 자신의 죽음 이후 다리아의 삶을 알지 못한다. 다만 앞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의 그녀가 조금은 원통함을 풀 수 있길 바랐다.
“하여 저는 이상의 증언을 마치며 부디 존경하는 재판장님께옵서 악인에게 어울리는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을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
아스타 제국의 법에 따르면 일반 국민의 증언은 제아무리 고귀한 신분의 귀족의 것이라 하더라도 증거 없이 채택될 수 없었다. 그것이 설사 스스로 저지른 죄에 대한 자백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황족의 증언은 달랐다. 신전의 축복을 통해 황족으로 인정받은 이들의 증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었다.
비록 황후 다리아는 계약에 의해 황제와 결혼하였음을 이 자리에서 밝히었으나, 아직 결혼 무효화 절차를 밟지 않은 이상 여전히 그녀는 아스타 제국의 황후였다.
대법관은 캐롤라인 공작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작위를 탐하기 위해 친족을 살해하고 어린 질녀를 협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루드비히 대공과 공모하여 황제를 시해하려 한 정황들이 너무나 명백하였다.
캐롤라인 공작의 직계 가족 또한 모두 처형을 선고받았으나, 베스티 캐롤라인만은 황후의 측근 시녀였던 점을 인정받아 간신히 처형을 피해갈 수 있었다.
다리아는 끌려 나가는 아놀드 캐롤라인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회한은 감히 어느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짙었다.
두 사람의 죄인은 처우가 결정이 났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이는 모두를 가공케 하였던 희대의 살인마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이었다.
가장 죄질이 악독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이복형제였으며 오랜 기간 제국 제일 가문의 명맥을 이어 온 남자였다. 황제에게 아이가 없는 지금, 가장 높은 서열의 황위 계승권을 가진 남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대공의 처분에 대한 의견이 배심원들 사이에서 분분히 나뉘었다. 캐롤라인 공작과 마찬가지로 즉결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과, 사형 판결을 내리되 그 형의 집행을 조금-정확히는 황실의 후계가 견고해진-뒤로 미루자는 두 가지의 의견이었다.
어느 쪽이든 사형을 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루드비히 대공이 사실은 황실의 핏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더해지며 점차 배심원들의 의견은 전자의 것으로 모아지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성녀의 등장만 아니었더라면 그러했을 것이다.
몸이 좋지 않아 내내 누워 있었다던 성녀 레테는 대공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 * *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의 최후는 비참했다.
역사상 가장 극악한 죄인들이 죽음의 직전 머물렀던 황궁의 서쪽 탑에 갇힌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는 그 비참함에 젖어 늘어져 있었다.
“이곳도 참 오랜만이네.”
어둡고 축축한 공간 위로 앳된 여자의 목소리가 낭창하게 울렸다. 남자는 고개를 흘깃 들어 제게로 걸어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성녀, 레테…….”
“아니지, 내 이름은 그게 아니잖아.”
여자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흐드러지게 웃으며 차가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허리를 수그렸다. 여자의 은빛 머리칼이 사르륵 흘러내리며 남자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텅 빈 눈동자로 멍하니 여자를 올려다보던 남자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에스델.”
“맞아, 에스델이야.”
여자가 활짝 웃자, 붉은 보석을 닮은 한 쌍의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네 손으로 이 탑에 가두었던 에스델이야.”
여자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공간을 둘러보았다. 쾌쾌하고 음습한 내음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여기 있으니 어때?”
“…….”
“차라리 죽고 싶다고?”
남자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으나 여자는 홀로 자문자답하며 깔깔거렸다.
“내가 이곳에 갇혀 그렇게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했을 때, 넌 꿈쩍도 안 했잖아.”
여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공간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손끝으로 더듬던 차가운 돌벽의 끝에 자그마한 창이 걸렸다.
얇은 유리 한 겹마저 없는 창밖으로 화사한 바깥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죽음만을 기다리는 쓸쓸한 공간과 대조적으로, 화창하고 아름다운 바깥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 주었다.
“클로이네.”
“……!”
여자의 희미한 중얼거림에 남자가 벌떡 일어나 여자가 서 있는 창 쪽으로 달려들었다.
“클로이, 클로이는 어디에……!”
“이런, 방금 들어가 버렸어. 이젠 보이지 않는구나.”
“…….”
남자는 절망에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너무 상심하지 마. 그래도 이곳에 있다 보면 또 클로이를 보게 될 날이 오겠지. 물론 클로이는 네가 여기 있는 것도 모른 채 다른 남자의 곁에서 행복하게 웃겠지만.”
“…….”
한때 제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내 중 하나였던 남자의 얼굴은 생기를 잃고 추하게 일그러졌다.
“고통스럽니? 고작 이 정도로?”
여자의 두 눈이 순간 섬뜩하게 빛났다.
“내가 말했지. 네 불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느릿하게 손을 뻗은 여자가 남자의 턱을 우아하게 들어올렸다.
“망각, 내가 주는 선물이야. 너는 이 탑에서 평생 살아가겠지만, 너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서서히 너를 잊어 갈 거야. 종래에는 네가 이 탑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될 테지.”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허망한 두 눈을 보며, 여자는 짧게 조소했다.
“역사조차도 너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나와 함께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자, 카일로스.”
남자에게서 손을 뗀 여자가 마치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허공에 손을 털었다. 여자는 아이처럼 순수한 표정으로 생긋 웃으며 남자에게 속삭였다.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천천히 네 고통을 즐기다 와.”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다.
남자가 저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릴까. 여자는 속으로 셈을 하며 쓰게 웃었다.
우중충한 공간과 달리 바깥의 날씨는 화창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여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남자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에녹 브란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지금보다 훨씬 나이든 얼굴로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다.
‘당신을 도우러 왔습니다.’
단정한 목소리의 그는 오랜 기간 서쪽 탑에 갇혀 황제의 학대를 받아 왔던 가엾은 소녀를 꺼내 주었다.
‘어째서 저를 도와주는 거예요?’
그는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닮았네요.’
그때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지만, 이제는 그가 말한 이가 누구인지 안다.
“있잖아, 에녹. 나는 절대 천국엔 가지 못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레테.”
쓸쓸하게 내뱉은 말에도 그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난…… 너무 나쁜 짓을 많이 저질러 버렸어.”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제가 이제껏 보아 온 어떤 사람보다도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는걸요.”
“거짓말하지 마.”
“제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나요?”
“그래!”
레테는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이따금씩 다혈질적인 성격은 아마도 생부로부터 물려받은 것일 테다. 에녹 브란스는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걱정 말아요, 레테. 당신이 지옥에 가게 된다면, 제가 그곳까지 따라가 지켜 줄게요.”
그 말에 레테가 두 눈을 내리깔며 입 안의 여린 살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꼭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에녹 브란스.
그는 그녀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으며, 오라비이자, 스승이었으며, 친구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로든 그녀의 생에 유일한 존재였다. 그런 그와 이제는 헤어질 날이 머지않았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클로이, 레이몬드,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머리 위를 비추는 따사로운 햇살과 코끝을 간질이는 봄바람, 세상을 뒤덮은 푸르른 초목들과 그 위를 누비는 사랑스러운 생명들.
어린 레테가…… 어린 에스델이 사랑했던 그 모든 것들에 작별을 고할 시간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황궁에 돌아온 뒤, 내가 줄곧 머문 곳은 다름 아닌 레이몬드의 침실이었다. 대공성을 떠나며 그의 단단한 가슴팍 안에서 잠이 들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나는 여전히 그의 곁이었다.
그날, 레이몬드는 나를 자신의 침대에 뉘이고, 황공하게도 노곤한 팔과 다리를 손수 주물러 주었다.
‘폐, 폐하……! 이러지 마세요, 누가 보면……!’
‘황제로서의 위신이 조금 떨어지는 것 말고 별일 있겠나.’
당혹스러워 만류하는 나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그는 석상처럼 굳건히 내 옆에 앉아 내 무릎과 양 팔을 주물러 주었다.
‘제발요, 폐하. 제가 너무 황망해서…….’
‘가만히 있어.’
그의 말씨는 언제나 그렇듯 위압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다정했다.
‘좁은 마차에서 앉은 채로 잠들었잖아. 근육을 풀어 줘야 해.’
‘기껏해야 몇 시간 잠든 것뿐인 걸요. 게다가 한숨 자고 일어난 뒤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큰일이군. 내 여자는 도무지 한 마디도 져 주질 않으니.’
그러는 폐하야말로 고집을 꺾지 않고 계시지 않느냐고 되물으려던 찰나,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내 여자’란 말에 흠칫 굳어 버리고 말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방금, ‘내 여자’라고…….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서 다시 한번 그의 입에서 같은 말이 흘러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나를 놀리듯 그 뒤로 더 이상 같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폐하,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저를 폐하의 여자라고 칭하셨나요?
그렇게 묻기에는 다소 간지러운 감각이 나를 감싸고 있어서, 차마 묻지 못하고 그의 눈치만 힐긋 살펴야 했다.
“분명 그때 ‘내 여자’라고 했는데…….”
나는 황궁에 막 돌아왔던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창틀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까딱거렸다.
“으으음…….”
미지근한 콧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다시 한번 듣고 싶은데. 오늘밤엔 물어볼까? 내가 그 날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그래, 뭐……. 이미 사랑한다고 고백도 한 마당에.”
마침내 옅은 결심을 하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창밖을 돌아보니 따가운 햇볕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햇볕이 따갑습니다, 레이디 클로이.”
“에녹 경.”
불쑥 들려온 에녹 경의 목소리가 이제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나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향해 두 눈을 휘었다. 에녹 경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얼굴로 나뭇가지 위에 두 발을 딛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당신이 궁금해서요.”
“어떤 부분이요?”
“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입꼬리를 싱긋 말아 올리며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뜯었다.
“식사는 잘 하고 있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또 옛날처럼 슬픈 얼굴로 울고 있지는 않은지.”
“정말이지 세심한 관심이네요. 너무나 에녹 경다워요.”
“레이디 클로이와는 나름 좋은 벗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영광이에요. 에녹 경을 흠모하는 수많은 영애들이 저를 부러워할 거예요.”
진심으로 기쁜 마음에 활짝 웃자 그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나를 따라 웃었다. 여전히 내리쬐는 햇볕은 따가운데, 이상하게 시원한 감각이 일었다.
“레이디 클로이는 이곳에 있어도 되나요?”
“……?”
“오늘이 마지막 법정이 열리는 날이라고 들었습니다.”
“아…….”
나는 뒤늦게 그의 질문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카일로스의 처벌이 결정 나는 마지막 법정이 열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앞의 두 차례의 법정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던 나는 오늘 열리는 마지막 법정에는 출석하지 않았다.
“네, 저는 굳이.”
나를 쳐다보던 카일로스의 그 허망한 두 눈동자를 기억한다. 세상의 모든 빛을 꺼뜨린, 오직 어둠으로 남은 검은 눈동자.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의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영혼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안다. 육체의 소멸보다도 더욱 두려운 것은 정신의 붕괴다.
생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겼던 과거의 나는 정신이 붕괴되던 순간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고작 육체의 소멸과는 비교되지 않는 공포와 허무였다.
카일로스는 마치 오래전 정신이 허물어져 살아 있는 육신으로 영혼의 죽음을 맞이했던 가엾은 클로이 가넷슈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미 영혼을 소실한 자의 처벌을 결정하는 자리만큼이나 재미없는 것이 또 있을까.
하여 나는 굳이 그의 마지막을 관람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의 죄악은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이지만, 혹 그가 처벌을 피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참이다.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어린 날 나를 진창에서 끄집어내 주고서 그보다 더한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던 그 잔인한 남자는, 한때나마 내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유일한 남자는, 이제 더 이상 내게 없는 사람이므로.
“에녹 경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카일로스에게 어떤 처벌이 내려지든 간에 대공성의 기사단은 해체될 터였다. 나는 앞으로 이 상냥하고 은혜로운 벗을 전처럼 만나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졌다.
“글쎄요, 저는…….”
에녹 경은 빙그레 웃으며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먼 곳을 응시하며 작게 읊조렸다.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 * *
긴 재판이 끝난 뒤 레이몬드가 돌아왔다. 평소보다 긴 재판에 그는 다소 피곤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전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이몬드는 내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제가 궁금한 건 눈앞의 남자뿐인걸요.”
은근히 도발하자 그가 참지 못하고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까치발을 들며 그의 목에 매달려 입을 맞추었다.
“오늘 재판이 끝난 뒤에 다리아가 결혼 무효화 재판을 청구했어.”
“이혼 재판이 아니라요?”
“그래. 생각보다 훨씬 쉬워질 것 같아.”
레이몬드가 양손으로 내 허리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테이블 위에 나를 앉혔다. 그와 눈높이를 맞추려면 테이블 위에 앉아서도 고개를 젖혀야 했다.
“그 여자가 지난 번 재판 중에 이상한 말을 흘렸거든. 음, 그러니까 십 년 전 있었던 국혼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발언이었지.”
레이몬드는 쓰게 웃으며 손등으로 내 뺨을 쓸어내렸다. 다리아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면 그는 늘 내 앞에서 약자가 되고 만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물론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법적으로 다른 여자의 남편이란 건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제국에서 가장 순결한 남성임을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가 내게 이 이상 미안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튼 내가 다리아와의 결혼이 무효화되면, 그때는…… 음…….”
그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귀여워.’
나도 모르게 올라간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 눈치를 살피는 그의 모습은 꼭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하는 대형견이 생각나게 했다.
“클로이…….”
눈동자를 슬쩍 굴리던 그가 마침내 결심한 듯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말씀하셔요, 폐하.”
나는 싱긋 웃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래전에도 비슷한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어렴풋한 기억 속, 흐드러진 꽃들이 만발한 황궁 온실이었을 것이다. 그래,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 꽃을 내게 건넸다.
‘나는 이미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오랫동안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그의 고백이 새삼 빛깔을 입으며 새록새록 피어났다.
‘너도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 그때 말해 줘. 사랑한다고.’
답지 않게 내 눈치를 힐끔 살피며 성급한 고백을 하였던 오랜 옛일 속의 레이몬드를 나는 너무나 늦게 다시 기억해 냈다.
어째서 이렇게 늦어 버린 걸까.
나는 다시 반복될 그의 고백에, 이제는 늦지 않게 대답하기 위한 의지를 다졌다.
“이제 더 이상 네 안전을 위협하는 대공은 없어.”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시간마저 멎어 버린 듯, 영겁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 다음 이어질 그의 고백이 나를 그토록 설레게 했다.
“그러니까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할게.”
그러나 곧 이어진 그의 말은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
나의 선택이라니? 고백이 아니라?
“너의 행복을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네가 바라는 너의 행복이 무엇이든 나는 그걸 존중할 거야. 설령 그게 내 곁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 할지라도…….”
그가 말끝을 설핏 흐리며 이를 악물었다.
“폐하의 곁이 아닌 다른 곳이요……?”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이라면.”
“그러니까 지금 그 말씀은…… 제가 폐하의 곁이 아닌 다른 곳을 선택해도 괜찮다는 말씀인가요?”
“물론 나는 괜찮지 않겠지. 하지만 네가 어렵게 불행해서 벗어난 걸 아는데, 내 옆에 있다간 또다시 힘들어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강요하지 않으려는 거야.”
“그게 폐하가 원하시는 건가요?”
“…….”
그는 침묵했다. 그가 무슨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과거처럼 또다시 귀족들과 대립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상처 입을 것을 걱정하는 거겠지.
하지만, 하지만…….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뾰로통한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나는 내가 내뱉은 목소리에 당황하였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나도 널 사랑해, 클로이.”
그가 애틋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속삭였다.
“그래서 그러는 거야. 널 사랑하니까, 네가 너무나 소중하니까, 다치지 않기를 바라니까.”
굵은 손끝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귓바퀴 뒤쪽으로 넘겨 주었다.
“물론 나는 절대 너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감내해야 할 것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
“네 선택에 모든 걸 맡길게.”
이 상황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그의 곁이라 속삭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장면이 펼쳐지리라.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뚝 사라졌다.
나를 위해서라지만 나를 보지 않는 것마저도 감수하겠다는 그의 말에 기분이 상해 버렸다.
스스로가 유치하게 느껴졌다. 이성적으로는 그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울컥거리는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책에서 이와 비슷한 감정을 뭐라 명명하는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레이몬드에게 조금 ‘삐진’ 것 같았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도. 그가 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면서도.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차마 옆에 있어 달라고도 말하지 못할 만큼.
그만큼이나 나를 소중히 여기는 그에게 삐져 버리고 말았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했다. 카일로스가 억지로 곁에 두려 했을 때 그토록 그를 경멸했던 나는, 이제 레이몬드가 차라리 나를 다치게 해서라도 그 곁에 나를 붙들기를 바랐다.
“제 마음이 폐하께 전혀 확신을 드리지 못했나 봐요.”
불쑥, 속으로 생각하던 것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폐하를 사랑하는 내 마음에 대한 모독이에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카일로스를 사랑했던 시절의 나는 언제나 버려질까 두려워 내 마음을 어설피 숨기기 바빴는데, 지금의 나는 서운한 내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혹시 이런 나를 그가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되기도 잠시. 그에게 미움을 받게 되는 것보다도 그가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게 더 싫었다.
나는 두 눈에 힘을 주며 그를 쳐다보았다.
“클로이,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레이몬드는 그런 나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지, 조금 당황해했다.
이제 보니, 그는 과거의 나와 비슷했다. 자신의 언행 때문에 내게 미움 받을까 두려워하는 그의 모습에서 어린 날의 클로이 가넷슈가 보였다.
과거의 클로이 가넷슈는 굉장히 어리석은 여자였으나, 그녀가 품었던 마음만큼은 진실된 것이었다.
나는 공연히 울컥해졌다.
‘바보도 아니고! 그렇게 사랑한다고 했는데, 왜 내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거야!’
나도 안다. 확신을 갖기 어려웠겠지.
오랜 기간 그의 옆에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서 기만하였던 나다. 그리고 레이몬드는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단 걸 알면서도, 끝까지 기다려 주었던 남자다.
그는 언제나 그를 사랑하지 않던 나를 사랑해 주었다. 그러니까 그가 내 마음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여도 그건 너무 늦게 그를 사랑하게 된 나의 잘못이지, 그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 있고 싶단 게 훤히 보이는데…….
나는 이렇게 그의 마음을 확신하고 있는데…….
그래서 더 속상했다.
* * *
결국 나는 레이몬드에게 잔뜩 삐져 버린 채로 황제궁을 벗어났다. 어딜 가냐고 묻는 그에게 ‘어디든 가도 된다면서요.’라고 아이처럼 투덜대고 말았다.
‘정말 바보는 폐하가 아니라 나야.’
이런 유치한 행동은 아주 어렸을 때에도 해 보지 않았다. 이제 와 사실은 그의 말에 삐진 거라고 이야기하려니 뒤늦은 부끄러움이 밀려 왔다.
‘대체 내가 어쩌자고 그대로 나와 버린 거지.’
나는 울상이 되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화끈 달아오른 두 뺨 위로 잔잔한 열감이 느껴졌다.
‘멍청한 클로이 가넷슈. 폐하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면서……. 고작 투정이나 부리고…….’
차마 다시 그에게 돌아가지도 못하고 터벅터벅 걷던 나는 썰렁한 다리아의 궁 앞에 도착했다.
“클로이? 여긴 어쩐 일이니? 이제 황후궁엔 다시 오지 않는 줄 알았는데.”
집무실에 앉아 마지막 남은 서류들을 처리하던 다리아가 나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집무실이 허전해졌어요.”
“사흘 뒤면 결혼 무효화 재판이 열릴 예정이거든. 어차피 약식으로 처리될 절차라 판결이 나는 즉시 곧바로 떠날 생각이야.”
과연 그녀의 말마따나 곳곳에 짐이 쌓여 있었고, 몇몇 짐들은 사용인들에 의해 마차에 실려 황궁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집무실뿐만 아니라 복도를 비롯한 황후궁 곳곳이 주인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를 굉장히 그리워하게 될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지. 레이몬드와 즐기느라 나를 잊어버리면 두고두고 저주할 생각이었어.”
다리아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깔깔 웃었다.
그녀는 레이몬드와 결혼 무효화 절차를 마친 뒤 새로운 캐롤라인 공작이 될 예정이라고 알려 주었다. 제국 최초로 작위를 계승한 여자가 되는 것이다.
“흐응, 내가 공작이 된다는데도 별로 놀라지 않네. 재미없게.”
“황후 폐하와 너무 잘 어울리는걸요.”
나는 그 소식을 접하고도 그다지 놀랍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거슬러온 시간 속에서 이미 한차례 공작이 된 그녀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부르지 마. 나는 더 이상 아스타 제국의 황후가 아니니까.”
“그럼 캐롤라인 공작님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다리아, 라고 불러 줘.”
“음…….”
내내 나의 윗사람이던 그녀의 이름을 곧바로 부를 수 있을 리 없었다. 애매하게 눈동자를 굴리자 그녀가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황명이야. 어기면 황족의 명을 거역한 죄로 엄벌에 처할 거야.”
“그건 억지예요!”
“억울해도 어쩔 수 없어.”
나는 억울한 마음에 항변했으나 다리아는 근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다리아…… 님.”
“‘님’은 빼고.”
“……다리아.”
결국 어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다리아는 언제 그토록 근엄했냐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세상에, 내가 방금 무슨 짓을……!”
나는 황급히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니?”
혼란스러워하는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다리아는 더욱 웃음소리를 높였다.
“황후 폐하는…….”
“다리아.”
“……다리아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어도 제가 진심을 다해 모신 사람이었어요. 황망한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한 거라고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투정을 부리자 다리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내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봐.”
그녀가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고개를 들자 나를 향해 은은하게 웃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다시 봐도 레이몬드 따위에게 주기는 아까운 미모야.”
내 얼굴을 뜯어보던 다리아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는 순간, 온몸의 털이 쭈삣 섰다.
“저, 저는 여색엔 흥미가 없어요, 다리아.”
“후후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음흉하게 웃지 마세요!”
“하지만 한 번쯤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것도…….”
그녀의 속삭이는 듯한 혼잣말에 놀란 내가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다리아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요란스럽게 열리는 문을 쳐다보았다.
“다리아, 혹시 여기에 클로이가……!”
나를 찾아 뛰어온 것인지, 레이몬드가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다 미묘한 자세로 마주 서 있는 나와 다리아를 보며 눈동자를 잘게 흔들었다.
“……!”
나와 다리아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돌연 다리아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또 클로이에게 못된 장난질을 하고 있던 건가?”
“못된 장난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다리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스럽게 내 얼굴에서 손을 뗐다.
“나는 그냥 클로이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 주려는 것뿐이었다고.”
“뭐……?”
“그렇지, 클로이?”
다리아가 나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나 내 표정은 그녀처럼 좋지 못했다.
“클로이…….”
레이몬드가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잠깐 이야기를…… 아니, 아니야. 조금 뒤에 다시 보지.”
그가 말을 걸면 걸수록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것을 알아챈 것인지, 그가 말을 하다 말고 황급히 물러났다.
“흐응…….”
밖으로 사라지는 레이몬드의 발소리가 점차 희미해질 즈음에, 다리아는 느른한 콧소리를 내며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야?”
“…….”
“사랑싸움인 건가?”
“…….”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레이몬드는 처음인데. 레이몬드가 네게 무슨 실수라도 했니?”
“전혀 아니에요!”
레이몬드는 잘못이 없었다. 이 와중에도 그가 오해받는 게 싫어서, 나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폐하는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제가…….”
속상한 마음에 나는 결국 그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모두 실토하고 말았다. 잠잠히 내 이야기를 경청하던 다리아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망언이네.”
“네?”
“레이몬드가 망언을 했어.”
“아, 아니에요. 제가 유치한 마음에 토라져 버려서…….”
“토라질 만했지, 충분히.”
다리아는 격하게 내게 공감하며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로이, 만약 내가 너였더라면. 그러니까 감히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날더러 내 행복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가도 좋다고 말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멱을 따 버렸을 거야.”
“……!”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당장 실천에 옮길 듯 섬뜩하게 빛나고 있어서, 나는 그녀의 두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아, 안 돼요, 다리아! 폐하는 정말 저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거였다고요!”
“걱정 마렴, 클로이. 레이몬드를 해칠 생각은 없어. 드디어 황궁을 벗어나는 마당에 굳이 황족 시해죄를 덮어쓰고 싶진 않으니까.”
어깨를 으쓱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넌 이대로 있을 거니? 행복을 찾아 떠나라는 그런 망언을 듣고도?”
“정확히는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니라…….”
“그게 그 말이지!”
주먹을 불끈 쥐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다리아가 저보다 더 흥분해 버린 거예요?”
“…….”
의아한 마음에 묻자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고요해진 방 안에서 나는 레이몬드를 생각했다.
‘속상해.’
어쩌면 레이몬드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겠지. 그가 나처럼 속상해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욱 우울해졌다.
‘이번엔 내가 먼저 찾아가야겠어.’
* * *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언제나 내게 사랑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남자였다.
나도 그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자신이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몇 차례 그에게 건넬 편지를 쓰다가 구기고, 새로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만두길 여러 번.
나는 결국 그에게 편지를 쓰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게 주었던 것만큼의 감동은 주지 못하더라도, 그의 얼굴을 보고 직접 말할 심산이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나 또한 그를 굉장히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이렇게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변해 버려 이성적인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그에게 흠뻑 빠져 버렸다고.
그러니 부디 내 마음에 확신을 가져 달라고.
그리고…….
‘굉장히 부끄럽긴 하지만.’
더 이상 그의 고백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해 볼 생각이다. 그 ‘고백’이라는 걸. 부부의 언약을 맺고 하나가 되어 영원토록 함께하자고…….
“아…….”
상상만으로도 부끄러워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후끈해지는 두 뺨을 문지르며 레이몬드의 집무실이 있는 황제궁의 복도를 걸었다.
그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내 손이 평소와 달리 단정하지 못한 노크 소리를 만들어 냈다.
“폐하.”
소심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앞에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레이몬드가 벌떡 일어나 내게 왔다.
“클로이!”
“혹시 바쁘신데 제가 방해한 거라면…….”
“절대 아니야! 일단 여기에 앉아…….”
그가 조심스럽게 나를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뻘쭘하게 그와 마주 앉아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서로 눈치만 힐끔힐끔 살피던 가운데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클로이, 내가…….”
“…….”
“…….”
동시에 말을 꺼낸 우리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먼저 말씀하세요, 폐하.”
“아니야, 네가 먼저 말해.”
어쩐지 이 상황이 어색하면서도 낯간지러운 느낌이라, 나는 머리끝을 손가락에 빙빙 말아 감으며 전에 없던 습관까지 보였다.
“그게…… 죄송해요, 폐하.”
“뭐……?”
“폐하께서 어떤 마음으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충분히 알면서도 토라져 버려서…….”
“아니야! 내가……!”
레이몬드가 내 말을 잘라 내며 외쳤다.
“내가 네 마음을 고려하지 못해서,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이야.”
“…….”
“확신이 없어서 그랬어. 그때처럼 또…… 너를 황궁의 이름 없는 여자로 남기게 될까 봐…….”
레이몬드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자조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제껏 아무런 내색이 없었지만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의 일들은 그에게도 큰 상처였구나, 하고.
“저는 상관없어요. 폐하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이름 없는 여자로 남는다 해도…….”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어! 차라리 내가 황좌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황좌를 버리다니요!”
이번에는 내가 그의 말을 끊으며 놀라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폐하는 그때도 그러셨지요! 왜 저 같은 걸 위해서 자꾸만 폐하를 버리는 거예요?”
“너 같은 거라니, 왜 아직도 너를 비하하는 거야?”
“폐하께서 스스로를 버릴 때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그만큼 네가 귀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네 앞에서는 내 목숨마저도 하찮아져.”
그렇게 말을 하는 레이몬드의 얼굴 위로, 오래전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던 그의 얼굴이 겹쳐졌다.
나를 살리기 위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끝내 손에서 검을 놓았던 레이몬드…….
내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나를 향한 원망보다는 나의 행복을 빌어 주었던 레이몬드…….
그것을, 또다시 반복하겠다고?
이건 더 이상 내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화가 났다.
“그렇게 폐하가 스스로를 버린다 해서 제가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러니 네게 말하는 거잖아. 내가 아닌 다른 너의 행복을 찾아도 된다고.”
그는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폐하는 정말 바보예요!”
결국 나는 씩씩거리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크, 클로이?”
그가 당황한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으나, 나는 단호하게 그의 손을 밀어내고 내 손으로 눈가를 벅벅 닦아냈다.
그와 싸우려고 온 게 아닌데. 사과를 하려고 한 건데.
하지만 내 앞에서는 목숨마저 하찮아진다니, 그것이야말로 다리아가 말한 ‘망언’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제게는 스스로를 더 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하셨으면서, 어떻게 폐하께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나요?”
“그야…… 내게는 네가 그만큼 소중해서…….”
“폐하께 제가 소중한 만큼, 제게도 폐하는 소중해요.”
“…….”
나의 일갈에 레이몬드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이 와중에 그의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어서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폐하가 제게 주시는 사랑이 얼마나 크나큰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사랑을 무시하는 건 저도 너무 속상하다고요.”
“무시라니, 그런 적 없어.”
“그렇다면 저 때문에 폐하를 포기할 생각은 마시고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 보셔야지요.”
“내가…… 네 앞에만 서면 소심해져서…….”
끝까지 내 말에 동의하지 않고 소심한 척을 하는 레이몬드를, 나는 감히 샐쭉해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정말 저를 사랑하신다면, 제가 폐하를 사랑하는 마음도 똑같이 소중히 여겨 주세요. 그러기 전까진 폐하와 말도 섞지 않을 거예요.”
“클로이? 화가 난 거야?”
내가 화가 났다는 걸 이제야 깨닫다니. 나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홱 돌렸다.
“클……!”
“따라오지 마세요!”
나는 뾰로통하게 외치고는 그대로 그의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 * *
“다리아의 말이 다 옳아요! 폐하는 어떻게 그런 망언을 하실 수 있는 거지요? 나를 위해서 황좌든 목숨이든 모든 걸 버리겠다니!”
“뭐, 레이몬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널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을 해선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나는 다리아의 침대 위에 앉아 그녀의 베개를 끌어안고 레이몬드의 만행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진짜 속상해요. 나도 폐하를 사랑하는데, 폐하는 그걸 몰라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이젠 레이몬드와 말도 섞지 않을 생각이야?”
“으음……. 마음 같아서는 어디 먼 곳으로 도망쳐서 꽁꽁 숨어 버리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저는 친정이랄 곳이 없으니 며칠 동안만 이곳에 숨어 있으려고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네?”
“목숨마저 하찮아지다니, 그건 정말 감동이 아니라 화만 주는 말이라고요.”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정말 감동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이는 레이몬드였다. 언제든 자신의 말을 실천으로 옮기는 남자 말이다.
차라리 그가 허울뿐인 말들만 번지르르하게 내뱉는 남자였더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텐데.
“폐하가 먼저 그 말을 무를 때까지, 저도 계속 삐져 있을 참이에요.”
“정말 좋을 때야, 이렇게 피 터지는 사랑싸움이라니. 이거 원, 연인도 없는 나는 차마 눈꼴이 시려서 계속 봐줄 수가 없구나.”
다리아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킥킥 웃음을 흘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클로이, 레이몬드 따위는 버리고 나를 선택하는 건 어떠니?”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싶은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어요.”
정색하며 말하자 다리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네게 차이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구나. 아아, 외로워라.”
“다리아는, 음, 그분을 찾아가지 않을 건가요? 브리 왕국에 계신다는, 그…….”
투정에 가까운 나와 레이몬드의 사랑싸움과 달리, 다리아의 문제는 워낙 민감한 것이라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글쎄.”
다리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기댔다.
“솔직히 말하자면, 레이몬드 못지않게 나도 자신이 없어. 윌은 나 때문에 모든 걸 잃고 쫓기다시피 제국 밖으로 떠나야 했고, 우리는 무려 십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지.”
뒤늦게 알게 된 다리아와 그의 연인에 관한 이야기는 그저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이었다.
“그가 나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게 가능할까?”
나라면, 레이몬드로 인해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더라도 그를 원망하지 않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리아가 사랑했던 윌터 루카스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함부로 속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클로이. 너를 보고 용기를 내기로 했어. 혹시나 그가 나를 원망하고 있더라도, 어쩌면 내가 아닌 다른 연인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지라도. 그래도 한 번쯤은 그를 찾아 보려고.”
쓰게 웃으며 중얼거리던 다리아가 나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어쩌면 윌도 너처럼 내가 확신을 가져 주길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잖아. 비록 그게 먼지 조각만큼의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언제나 다리아를 응원해요.”
나는 그녀를 따라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부디, 그녀가 오래전 헤어져야 했던 연인과 다시 만나 행복해지길 바라며.
“그런 의미에서, 클로이.”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문득 다리아가 음산하게 웃었다.
“널 납치할 거야.”
“네?”
당황한 내가 두 눈만 뻐끔거리던 때, 그녀가 내 양손을 결박하기 시작했다.
“다, 다리아?”
“레이몬드는 조금 더 혼이 나 봐야 해.”
“이건 범죄예요!”
나의 반항에도 아랑곳 않고, 다리아는 종을 흔들어 그녀의 기사들을 불러냈다.
“원래는 결혼 무효화 절차가 완료되면 떠날 생각이었지만, 조금 일찍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녀가 후후후 웃으며 종잇장에 무언가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 * *
어제 클로이와 다툰 이후, 레이몬드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폐하께 제가 소중한 만큼, 제게도 폐하는 소중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말이 아주 틀리지 않았다. 아주 당연하게도 레이몬드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훨씬 더 크다고 여겨 왔다.
‘저 때문에 폐하를 포기할 생각은 마시고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 보셔야지요.’
모든 걸 해 보라고…….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도 모든 걸 해 보았지만, 끝내 그녀를 곁에 둘 수 없었는데.
‘폐하께서 정말 저를 사랑하신다면, 제가 폐하를 사랑하는 마음도 똑같이 소중히 여겨 주세요.’
레이몬드는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 와중에도 제가 소중하다 말하던, 제게 사랑한다 말하던 그녀가 너무나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클로이의 말대로, 내가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여겼어…….”
그저 제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감히 마음까지 바라는 게 욕심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마음은 제 것이 아니었기에. 하여 레이몬드는 더욱 조심스러웠는지 모른다.
“사과…… 해야겠지?”
레이몬드는 제게 따라오지 말라며 뾰로통하게 외치던 클로이를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어쩌면 토라진 모습마저 사랑스러울 수가 있는 거지.”
언제나 침착하던 그녀가 아이처럼 토라진 모습을 생각하자니 가슴이 이상하게 술렁거렸다.
“그나저나, 정말로 나와 말도 섞지 않을 생각인가?”
그건 정말 곤란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아니, 이미 오래전에 그녀를 위해 한 번 버렸던 목숨이니 두 번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진심을 말하였을 뿐인데 대체 그 말의 어느 부분에서 그녀가 화가 난 건지. 레이몬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심하였으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대화를 더 해 봐야 하나…….”
무거운 한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일단은 그녀의 화가 조금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대화를 시도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폐하, 황후궁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다리아 님이 오늘 아침 캐롤라인 공작령으로 떠나셨다고…….”
“오늘 아침? 아직 대법관으로부터 결혼 무효화 판결이 나지 않았는데?”
“시종장이 폐하와 똑같은 말을 해 보았으나 판결이 난 뒤에 떠나나, 나기 전에 떠나나 똑같지 않냐며 호통을 쳤다더군요.”
라트 후작이 툴툴거리며 편지 봉투를 건넸다.
“이건 무엇이냐?”
“다리아 님이 남기고 간 겁니다.”
레이몬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리아가 남겼다는 편지 봉투를 뜯었다. 그러자 대충 휘갈겨 쓴 다리아의 서체가 등장했다.
“…….”
가만히 편지의 내용을 읽어 내리던 레이몬드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 갔다.
“무슨 내용인가요?”
“이 미친 여자가 결국…….”
“폐하?”
난데없이 튀어나온 상스러운 욕설에 라트 후작이 끔벅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다리아가 오늘 아침 떠났다고 했나?”
“네, 그렇…… 폐하? 어딜 가십니까?”
“그 정신 나간 여자가 내 여자를 납치했다.”
레이몬드의 붉은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네? 폐하의 여자라면…… 레이디 클로이 가넷슈 말입니까?”
“당장 황궁의 병사들을 풀어 그 여자를 잡아와.”
“하지만…….”
라트 후작이 머뭇거리며 레이몬드의 눈치를 살폈다.
“다리아 님이 작정하고 레이디 가넷슈를 데리고 떠난 거라면…… 폐하께서 직접 가지 않는 이상 순순히 그분을 내어 주시진 않을 텐데요? 그렇다고 레이디 가넷슈를 위해 캐롤라인 공작가의 마차를 황궁의 병사로 위협하는 건 무리입니다. 아직 레이디 가넷슈는 황실의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럼 공작령으로 병사들을 보내서 마차가 도착하길 기다렸다가 클로이가 마차에서 내리면…….”
“공작령에 황궁에 병사를 들이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직 레이디 가넷슈가 황실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
“그래, 당연히 안 되겠지! 나도 알아! 그만 말해! 젠장,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말도 없이 떠난 거로군!”
바드득 이를 갈던 레이몬드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캐롤라인 가의 마녀,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던 여자가 결국엔 내게서 클로이를 납치해 갔어!”
그의 손아귀에서 구겨진 종잇장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힐끔 그 내용을 훔쳐본 라트 후작이 흠칫 몸을 굳히고 말았다.
[레이몬드, 너는 클로이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클로이는 내가 납치해 갈 테니, 너는 황궁에 남아 클로이의 행복을 빌어 주렴.]
황제를 향한 예의와 격식은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지극히 그를 도발하는 내용이었다.
“공작령에 황궁의 병사를 들일 수 없다 했나?”
“네, 자칫 잘못하였다간 분쟁이…….”
“그렇다면 내가 혼자 가는 건 상관없겠지.”
“네? 황궁을 비우실 생각이십니까?”
라트 후작이 파드득 놀라며 레이몬드를 말렸다.
“안 됩니다, 폐하. 반란을 획책했던 자들의 처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가 어수선하지 않습니까!”
“이번 사건으로 대공과 캐롤라인 공작이 한꺼번에 실각되었다. 아홉 귀족 가문은 저마다 몸을 사리기 바쁘고. 이미 다음 대의 캐롤라인 공작이 황실의 완벽한 우군임을 만천하에 알리며 황권이 공고해졌으니, 자리 조금 비운다고 무슨 문제라도 생기겠느냐?”
“하지만 갑작스럽게 황후 자리가 공석이 된지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잔뜩 쌓였는걸요?”
못마땅한 표정으로 라트 후작을 내려다보던 레이몬드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명했다.
“일주일. 일주일 안에 남은 일들을 모두 처리하고 떠날 것이다.”
“일주일 안에 처리하기에는 그 양이…….”
“종이와 펜을 가져와.”
레이몬드는 주저하는 라트 후작의 말을 매섭게 끊어냈다.
“그 여자, 클로이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하게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