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망각의 성녀, 레테Ⅰ (9/21)

8장. 망각의 성녀, 레테Ⅰ

피크닉을 하루 앞둔 저녁이었다. 내일을 고대하며 일찌감치 돌아간 레테와 베스티 덕분에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피크닉…….’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건 문학 작품에나 등장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또래 아가씨들과 함께 피크닉을 가게 된다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하지?’

레테와 베스티 앞에서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과 달리, 사실 나 역시 굉장히 기대하는 중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토대로 열심히 준비하긴 했는데, 아직 무슨 옷을 입을지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옷장에서 두 벌밖에 없는 짧은 기장의 원피스를 꺼내 고민을 시작했다. 오전에 레테와 베스티 앞에서 갈아입어 보았지만, 두 사람은 나의 선택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노란색 원피스도 예쁘고 하늘색 원피스도 예뻐요! 클로이는 어떤 옷을 입든 가장 예쁠 거예요!’

‘진짜야! 둘 다 예뻐! 아무거나 입어도 될 거 같아! 아니, 그냥 둘 다 입어 버려!’

‘캐롤라인 공녀는 참 바보 같은 말씀을 당당하게 하시네요. 그보다 클로이는 어떤 색깔을 선택할 거예요?’

내가 한 마디를 꺼내면 열 마디를 주고받는 그녀들의 모습에 어느덧 익숙해져 버렸지만, 그 순간만큼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 가는 피크닉에 어떤 옷을 입고 가면 좋을지 끝내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방 안에서 두 벌의 원피스를 노려보고 있을 적에 밤바람이 살랑거리며 창문을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예의 나뭇가지 위에 앉아 나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녹 경이 보였다.

“좋은 밤이에요, 레이디 클로이.”

“오랜만이에요, 에녹 경.”

그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 빙긋 웃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오늘은 무슨 일로…… 아, 혹시 레테를 만나러 온 건가요?”

“네. 내일 레이디 클로이와 함께 피크닉을 간다며 상당히 들떠 있답니다.”

나는 피크닉을 가기로 결정한 뒤로 매일 피크닉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레테를 떠올렸다. 겉보기에는 열다섯 가량의 성년을 앞둔 소녀였는데, 가끔 하는 행동들은 정말 어린 아이 같았다.

레테를 생각하니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에녹 경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녹 경?”

“……레테가 레이디 클로이를 귀찮게 하더라도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짧은 헛웃음을 내지으며 말했다.

“레테는 정말로 레이디 클로이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요.”

“미워하지 않아요.”

비록 레테와 함께 보낸 시간은 짧았지만 그녀가 내게 품고 있는 호감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레테를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상당히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레테를요.”

“레테가 들으면 굉장히 좋아할 이야기네요.”

에녹 경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순간 어두운 밤하늘이 그의 주위만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꼭 착시 현상 같아서 나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뒤에야 다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녹 경은 여전히 바드라운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에녹 경은 레테를 정말 아끼나 봐요.”

“네,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요.”

“레테와는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거예요? 분명 레테가 아주 어릴 때부터라고 했던 것 같은데…….”

“…….”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에녹 경은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대신 꺼질 듯이 아스라한 미소를 띠운 채 두 눈을 살풋 접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사적인 것을 물었지요?”

“죄송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디 클로이가 제게 관심을 가져주어서 기쁜걸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레테에 관한 건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에녹 경은 도리어 내게 사과를 하며 미안해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나 레테에게 불우한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괜히 마음이 착잡해져서 두 눈을 내리까는데, 문득 귓가로 옷깃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팔이 내 얼굴을 지나쳤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 두 눈을 끔뻑거리자 그의 고요한 웃음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두리번 고개를 돌리자 열려 있는 유리창 위로 내 얼굴이 살짝 비쳤다.

“예쁘네요.”

화르륵, 얼굴 위로 열이 올랐다. 흐릿한 유리 위로 작은 꽃송이를 머리 위에 달고 있는 내가 비쳤다.

“당신은 노란색이 잘 어울려요. 특히 화사한 봄날에는.”

“고, 고마워요.”

어둠에 반사된 잔상은 색깔까지 완벽히 그려 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내 머리 위에 매달린 꽃송이가 노란색인가 보다.

힐끔 그를 다시 바라보니, 에녹 경은 꽃을 꽂고 있는 내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길게 휘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 서서 말없이 나를 보는 그 고혹적인 얼굴은 꼭 레이몬드의 것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이, 이래서 다들 에녹 경을 칭송했던 거구나.’

에녹 경은 찬찬히 몸을 뒤로 무르며 나무 기둥을 붙잡았다.

“이제 가시려고요?”

“네, 벌써 늦었으니.”

그가 캄캄한 밤하늘을 흘깃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레이디 클로이도 이만 자러 가야지요. 그래야 내일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겠습니까.”

“네, 감사해요.”

“그럼 좋은 밤 되길.”

에녹 경이 나를 향해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곧바로 사라졌다. 그는 매번 이렇게 소리 없이 다가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진 자리엔 풀벌레의 울음소리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 여운에 빠져, 멍하니 창 아래만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안 오나?’

아쉽게도, 오늘은 레이몬드를 만나지 못했다. 오전에 그의 시종장으로부터 아침 편지를 받은 게 전부였다.

‘상당히 바쁜 것 같아.’

혹시나 그와 마주칠 수 있을까 기대를 하며 책을 읽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레테와 베스티를 이끌고 도서관에 가 보았지만 그를 만나지 못했다.

왠지 아쉬운 기분을 뒤로한 채 나는 창을 닫고 돌아섰다. 아까 펼쳐 놓은 원피스 두 벌이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봄에는 노란색이 잘 어울린다고 했던 에녹 경의 말이 생각났다. 그럼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어울리는 색들이 다 따로 있다는 걸까?

무의식중에 뻗어나간 손이 노란색 원피스를 집었다. 내일 있을 피크닉이 정말 기대되었다.

* * *

“클로이! 클로이도 노란색 원피스를 입었군요!”

아침 일찍 황후궁 앞에 나와 있던 레테는 나를 발견하곤 신이 나 폴짝폴짝 뛰어왔다.

조금 있으면 다른 영애들이 모일 텐데 그들의 앞에서도 이렇게 아이 같은 모습만 보이면 어쩌나 조금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정말 예뻐요, 클로이! 역시 봄의 클로이는 노란색이 잘 어울리네요!”

“에녹 경이 레테에게 그런 것까지 말했나요?”

“물론이요! 클로이에 관한 모든 건 에녹에게 들어 알고 있는걸요?”

레테는 상당히 뿌듯한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나온 베스티를 향해 음산한 비소를 지었다.

“캐롤라인 공녀는 아직 클로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나 보군요. 겨우 그 정도로 클로이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자처했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무슨 소리예요? 전 처음부터 클로이랑 똑같은 색깔로 맞춰 입을 생각이 없었다고요!”

“클로이, 나 클로이랑 팔짱 껴도 돼요?”

베스티가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했으나 레테는 그녀를 살포시 무시하며 내 옆에 섰다. 이미 질문을 하기 전부터 그녀의 자그마한 손가락은 내 팔뚝을 향해 꼼지락거리는 중이었다.

‘레테가 레이디 클로이를 귀찮게 하더라도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레테는 정말로 레이디 클로이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요.’

한 번도 동성과 이렇듯 살가운 접촉을 해 본 적이 없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지난 밤 에녹 경이 해 주었던 말이 떠올라 그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네, 그렇게 하세요.”

“가, 감사해요!”

레테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팔짱을 꼈다. 순간 느껴지는 폭삭하고 따스한 감각에 나도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

나는 멍하니 레테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로 내 팔에 매달려 있었다.

어쩐지 지금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설렘을 과거에도 꼭 느껴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한 번도, 이런 온기를 느꼈던 적이 없는데.

양 옆에서 헤실거리는 레테와 뾰루퉁해진 베스티를 두고 기다리니 초대한 이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제가 성녀님과 함께 피크닉을 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영광이에요!”

격하게 감동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 글로아 영애는 레테의 직분보다는 예쁘장한 얼굴에 더욱 영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성녀님. 저는 케니스 가의 아멜리아예요.”

“밀러 가문의 로델입니다. 성녀님과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저는 트라비아 가문의…….”

물론 다른 영애들은 은근한 격식을 갖추어 레테에게 인사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조금 더 조심스러운 모습들이었다.

“모두 반가워요.”

레테는 여전히 내게 팔짱을 낀 채로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이 성녀라기보다는 황족의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오늘의 피크닉 장소는 황궁 뒤편의 후원이었다. 베스티는 황궁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으나, 다리아가 허락하지 않았다.

휴가 기간인데도 나가지 못하냐는 베스티의 반항은 당연하게도 가볍게 무시당했다.

이제 보니 베스티는 다리아에게도, 레테에게도 무시당하고 있구나……. 나는 새삼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우리는 얼마 걷지 않아 황궁 뒤편의 후원에 도착했다.

제국에 귀빈이 방문했을 때만 개방한다는 이 후원은 성녀의 일행이 머무는 동안에는 계속 개방될 예정이었다.

“황후궁의 후원도 굉장히 아늑한 분위기였는데, 이곳은 훨씬 더 크고 멋있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손님이 올 때만 개방한다니, 정말 너무해요.”

하나도 웃기지 않은 이야기였는데, 케니스 영애의 그 말에 모두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어느 부분에서 웃었어야 했을지 고민하는 동안 베스티가 돗자리를 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는 가져온 바구니에서 간식들을 꺼냈다.

“레이디 가넷슈의 바구니는 굉장히 크네요?”

한 영애의 말에 그녀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바구니가 반짝거리는 것 같아요.”

“그야 당연하지. 바구니에 황금이 칠해져 있으니까.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보내 주셨어.”

“폐하께서요?”

베스티가 자랑하듯 꺼낸 말에 모두가 놀람과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레이디 가넷슈는 폐하와 가까운 사이인가 보죠?”

내내 말없이 앉아 있던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가 내게 물었다.

“피크닉을 손수 준비해 주실 만큼이라면 굉장한 친분이 있는 것 같은데요.”

여자의 목소리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생김새는 전혀 달랐으나 은발에 적안까지 어쩐지 나와 비슷한 특징을 지닌 여자였다. 엘로이즈 자작 영애라고 했었나.

얼마 전부터 캐롤라인 공작 저택에 머무르는 손님인 그녀는 공작부인의 부탁으로 오늘 함께 초대받았다고 했다.

“성녀께서 함께해 주신 자리이니 신경 써 주신 거겠지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에둘러 말하자 엘로이즈 영애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흐음, 혹시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니고요?”

“엘로이즈 자작 영애는 의심이 많은 성격인가 보군요.”

내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레테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순식간에 엘로이즈 영애의 얼굴이 붉어졌다.

“의심이라니요. 그런 게 전혀 아닙…….”

“그럼 다들 가져 온 간식들을 꺼내 볼까요?”

아주 짧은 순간 서늘하게 느껴졌던 것은 착각이었는지, 레테는 부드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엘로이즈 영애의 질문에 난처했던 것도 잠시, 나는 곧바로 레테가 건넨 빵을 받아먹으며 어색했던 기분을 떨쳤다.

“……그래서 우리 오라버니가 또 그런 못된 장난을 했지 뭐예요?”

“케니스 경 같은 오라버니의 장난이라면 백 번을 당해도 좋아요.”

“정말 멍청한 소리! 저는 오라버니랑 같은 성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걸요!”

케니스 영애는 부들부들 떨며 케니스 경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으나 어느 누구도 공감해 주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레이디 가넷슈도 저번 행사 때 케니스 경을 보았겠네요?”

“어때요? 케니스 경과 브란스 경 중 누가 더 멋있던가요?”

“당연히 브란스 경이죠! 우리 오라버니가 어떻게 감히 브란스 경의 외모를 따라가겠어요!”

“우리는 케니스 영애에게 물어본 게 아니라 레이디 가넷슈에게 물어본 거예요.”

“레이디 가넷슈! 어서 제국 최고의 미남이 누구인지 결판을 내 주세요!”

씩씩거리는 케니스 영애를 두고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는 굉장히 난감해졌다.

케니스 경도 나름 준수한 외모였고, 에녹 경 또한 굉장히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하지만 어떻게 레이몬드를 두고 제국 최고의 미남을 고를 수 있다는 거지?’

아무리 생각하여도 레이몬드를 제외하고 두 사람을 제국 최고의 미남자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차마 분위기를 깨뜨릴 수 없어 에녹 경의 이름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지금 제국 최고의 미남을 논하는 자리인가요?”

다소곳하니 앉아 쿠키를 집어먹던 레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레이몬드를 제외하고 제국 최고의 미남자를 논할 수 있는 거지요?”

“레이몬드라면…… 혹시 황제 폐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레이몬드. 아스타 제국의 황제요.”

레테가 무심하게 지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폐하께서도 굉장히 준수하시지만 그래도 케니스 경이나 브란스 경만큼은 아니지 않나요?”

“우리 둘째 언니 또래의 아가씨들에겐 폐하의 인기가 엄청났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결혼도 하시고 나이도 많으신 폐하보다는 케니스 경이나 브란스 경이 훨씬 더…….”

“게다가 폐하는 조금 무서운 인상이잖아요. 멀리서 보기엔 좋지만 가까이 있으면 손발이 달달 떨려서 인사도 감히 못 하겠어요.”

나는 차마 그녀들에게 그 브란스 경도 사실은 레이몬드와 비슷한 또래이며 무려 성녀님을 자식처럼 길러 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맞아요. 이왕이면 황금 마차라고, 저는 결혼도 하고 정부도 많이 두셨던 폐하보다는 조신한 케니스 경이 더 멋있는 것 같아요.”

“우리 오라버니는 전혀 조신하지 않아요! 저택에 있으면 얼마나 사람이 경박한데요! 조신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브란스 경이지요!”

어느 틈에 이야기는 다시 케니스 경과 에녹 경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 틈에서 쏙 빠져 버린 레이몬드의 이름이 속상해서 나는 남몰래 남은 쿠키를 모두 집어 삼켰다.

“클로이, 클로이.”

나와 마찬가지로 대화에 더 이상 끼지 않고 쿠키만 집어 먹던 레테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클로이도 정말 레이몬드보다 케니스 경과 에녹이 더 잘생겼다고 생각하세요?”

“음, 글쎄요. 아무래도 이곳에서 제대로 된 시력을 갖춘 사람은 레테와 저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요? 다들 눈이 정말 이상한 거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몬드가 가장 멋있는데. 대체 왜 레이몬드가 무섭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레이몬드가 얼마나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우리가 그렇게 둘이서 속닥거릴 때였다.

“성녀님과 레이디 가넷슈는 정말 닮은 것 같아요.”

“어머나, 정말이요?”

글로아 영애의 말에 내내 어른스럽게 행동하던 레테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반짝였다.

“네, 분위기는 조금 다르지만…… 굉장히 닮았는걸요. 성녀님이 조금 더 자라면 딱 레이디 가넷슈가 될 것 같아요.”

“최고의 칭찬이에요, 글로아 영애.”

나는 수줍어하는 레테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하긴 나도 레테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나와 레테가 상당히 닮은 모양이다.

“정말 기쁘네요. 내가 클로이와 닮은 걸 알아봐 주다니…….”

“게다가 닮은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꼭 자매 같아 보여요.”

“네? 자매요?”

방금 전까지 기뻐하던 레테가 자매라는 말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덩달아 옆에 있던 나까지 당황하고 말았다. 줄곧 내게 호감을 보였던 레테니까, 당연히 자매 같다는 말에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잘 살펴봐 주세요, 글로아 영애. 정말 나와 클로이가 자매처럼 보이나요?”

“네? 네……. 정말 자매 같아 보이는데…….”

“그럴 리가 없어요! 겨우 자매 정도로 보일 리가 없어요!”

결국 레테는 잔뜩 흥분해 버리고 말았다. 글로아 영애는 자신이 실수한 건 아닌가 걱정되는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끝까지 원하는 답을 얻어내지 못한 레테가 침울해진 사이, 밀러 백작 영애가 새로운 화두를 꺼냈다.

“다들 그 이야기 들었나요? 최근 수도 내에 퍼지고 있는 괴담 말이에요.”

“괴담이요?”

“제가 영애들께만 특별히 알려 드리는 이야긴데…….”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밀러 영애는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으스스한 말씨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지금 수도에 매일 밤 유령이 나타난대요.”

“에이, 세상에 유령이 어디 있어요.”

“정말이에요. 밤마다 유령이 나타나서 아가씨들을 납치해 간대요. 그 유령은 원래는 십 년 전에 서쪽 성문 아래에 살던 애나라는 처녀였는데, 결혼식을 사흘 앞두고 약혼자가 귀족 아가씨랑 바람이 나서 도주를 했다지 뭐예요? 그런데 애나는 약혼자를 잊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다가 결국 병을 얻어 죽고 말았대요. 그런데 그 애나가 유령이 돼서 약혼자를 빼앗아 간 여자에게 복수를 하려고 그 여자와 닮은 귀족 아가씨들만 찾아온다나 봐요.”

“그 귀족 아가씨가, 어떻게 생겼는데요?”

밀러 영애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케니스 영애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 귀족 아가씨가…… 음…… 아, 그래. 꼭 성녀님처럼 은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대요. 그래서 매일 밤 은발의 아가씨들이 하나, 둘씩 유령에게 납치를 당하고…….”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야.”

잠자코 밀러 영애의 이야기를 듣던 베스티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복수를 할 거면 바람난 약혼자한테 해야지, 왜 그 귀족 여자한테 하는데? 그리고, 세상에 유령이 어딨어?”

“캐롤라인 공녀, 조심하세요. 지금도 이 근처에서 유령이 공녀의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서 당장 오늘 밤 찾아올지도 몰라요.”

“흥.”

모두가 잔뜩 겁에 질렸으나 베스티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래도 베스티는 유령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유령의 존재를 썩 믿는 건 아니었지만, 꺼림칙하기는 했다. 하필이면 은발 머리의 여자만 잡아 가는 유령이라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서히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다들 아쉬워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마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데, 반대편에서 낯익은 이의 모습이 보였다.

“레이몬드!”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한 레테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가리켰다. 차마 황제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성녀의 모습을 쳐다볼 수가 없어서 모두 시선을 돌려야 했다.

“제국의 주인된 자가 라나 신의 딸에게 무한한 영광을 바치오.”

“아스타 제국과 제국의 주인에게 라나 신의 축복이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평이한 목소리로 레테에게 인사를 건네는 레이몬드와 달리, 레테는 생글생글 웃으며 화답했다.

“후원에서의 피크닉은 즐거웠소?”

“네, 굉장히 훌륭했습니다. 이런 기회를 마련해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이상하게 머리에 박혔다.

레테의 미묘한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꼭 나와 단둘이 있을 때처럼, 상대에 대한 호감을 잔뜩 드러내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찬찬히 시선을 빗겨 그 옆에 서 있던 나를 바라봤다. 여러 사람들 속에서 눈이 마주치니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슬쩍 시선을 피하자 그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주위가 술렁거렸다. 어쩌면 아마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레이몬드야말로 제국 최고의 미남자란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모쪼록 조심히 돌아가길.”

그가 나와 영애들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지나쳐갔다. 하필이면 그가 있는 방향으로 발을 헛디딘 엘로이즈 영애만 아니었더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꺄악!”

난데없는 비명에 모두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봤다.

“괜찮아요, 엘로이즈 영애?”

“…….”

엘로이즈 영애는 참담한 몰골로 흙바닥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흰 원피스가 잔뜩 더럽혀졌다.

다른 영애들이 엘로이즈 영애를 일으키는 사이, 레이몬드는 무심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옷을 털었다. 나는 짧은 순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몰라 두 눈만 깜빡였다.

“괜찮은가?”

레이몬드가 엘로이즈 영애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엘로이즈 영애는 새빨개진 얼굴로 간신히 일어섰다.

잠시 그 꼴을 응시하던 레이몬드는 뒤따르던 라트 후작에게 한마디 던지며 곧바로 돌아섰다. 라트 후작은 엘로이즈 영애에게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곤 곧바로 레이몬드의 뒤를 쫓아갔다.

“……역시 폐하는 정말 무섭고 냉정하신 분이야. 충분히 붙잡아줄 수 있었을 텐데.”

누군가의 읊조림에 모여 있던 영애들이 ‘맞아 맞아’하고 맞장구를 쳐 댔다.

* * *

밀러 영애의 유령 이야기 때문일까. 이제는 익숙해진 내 방인데도 밤이 되니 조금 무서웠다.

불을 끄고 막 침대 위에 누우려 할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불을 켜니, 창을 타고 넘어오는 인영이 보였다.

“레테……?”

“아, 아하하……. 클로이,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레테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 방 안으로 사뿐히 발을 디뎠다. 나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이 시각에 제 방엔 어떻게 찾아온 건가요?”

부쩍, 사람들이 이 창을 통해 드나드는 일이 많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저 내 기분 탓일까.

“유령이 나타날까 봐 너무 무서워서 찾아왔어요. 클로이랑 나처럼 예쁜 사람만 노린다잖아요.”

글쎄, 내 생각엔 이 야심한 시각에 2층 높이의 창을 타고 넘어오는 게 더 무서울 것 같은데.

“같이 자면 안 돼요, 클로이? 오늘 밤만이라도요.”

그러나 나를 향해 반짝거리는 저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면 곧바로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나는 결국 그녀에게 져 주며 침대 쪽으로 안내했다.

“대신, 딱 오늘 밤만이에요.”

“네!”

레테는 활짝 웃으며 폭신한 침대 위로 엎어졌다.

“이불에서 클로이의 냄새가 나요!”

킁킁거리는 모습에 잠시 내 결정을 후회했지만, 곧바로 피식 웃고 말았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은 레테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오늘만큼은 혼자 있기 꺼려졌기에 나 아닌 다른 존재가 고맙기도 했고 말이다.

“으음, 너무 좋아요. 항상 꿈꿔 왔어요. 클로이랑 같은 침대에서 클로이의 품에 안겨서 잠드는 거요.”

품에 안겨……? 그 대목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나는 애써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항상이라기엔 저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셨잖아요.”

“말씀 드렸잖아요! 에녹이 클로이 얘기를 정말 많이 해 줬다고요!”

레테가 양 볼을 잔뜩 부풀리며 도끼눈을 떴다. 사랑스러운 적색 눈동자를 세모꼴로 치켜뜨며 화난 시늉을 하는 게 썩 귀여웠다.

“왜, 왜 웃어요!”

“아니에요. 그냥 레테가 귀여워서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베스티는 놀리지 말라며 더 화를 내곤 했다. 그러나 레테는 화를 내는 대신 별안간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수줍게 눈치를 살폈다.

“저, 정말요? 내가 귀여워요?”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그 모습에 도리어 내가 당황하고 말았다.

“어서 말해 줘요, 클로이. 나, 정말로 귀여워요?”

“……네, 귀여워요.”

“클로이도 귀여워요!”

레테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날 껴안았다. 그 무게에 못 이겨 그만 둘이 함께 침대 위로 쓰러졌다.

“레, 레테! 잠깐만……!”

“있지요, 클로이! 나는 클로이가 진짜 좋아요!”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스러워하는 나와 달리 레테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 꼬옥 매달렸다 타인과의 접촉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 쿵, 쿵, 쿵, 쿵. 심장이 뛰었다. 느리게 전해지는 온기에도 긴장된 몸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가까스로 레테를 옆으로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불을 끌게요.”

밝혀 두었던 촛불을 끄자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란 걸 인지한 탓인지 아까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이불 속에 몸을 눕히자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레테가 느껴졌다.

“아까 그 엘로이즈 영애란 여자, 기분 나빴어요.”

나는 미묘하게 레이몬드 쪽으로 엎어지던 엘로이즈 영애를 떠올렸다.

“불쾌한 냄새가 났어요. 카일로스의 냄새였어요.”

“카일로스의……?”

덜컥,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카일로스가 보낸 사람일까? 나를 빼내려고? 혹은 레이몬드를 위협하기 위해? 하지만 그 여자는 캐롤라인 공작부인의 부탁으로 초대받은 여자인데?

“게다가 그 여자 때문에 레이몬드가 괜히 욕을 먹었잖아요. 레이몬드는 정말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인데. 그 이상한 여자가 혼자 엎어지는 바람에 매정하다고 욕을 먹었어요.”

레테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엘로이즈 영애의 험담을 했다. 이런 식의 대화를 좋아하지 않은 나였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그건 아마 나도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클로이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레이몬드가 무섭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아니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절대, 절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알겠지요?”

레테의 쓸데없는 걱정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 가슴 안에서 하루하루 커져 가는 레이몬드를 향한 마음의 크기를 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걱정이었다.

“네,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할게요.”

“그럼 약속의 의미로 팔베개를 해 주세요!”

“……그게 어떻게 약속의 징표가 되지요?”

말도 안 되는 그녀의 요구에 반문하자, 레테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팔베개는 안 되는 거예요?”

“팔베개를 해 주기엔 레테가 너무 큰 걸요.”

“내가 너무 커서 부담스러워요? ……역시, 아이의 모습이 더 낫지요?”

레테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알쏭달쏭한 말을 중얼거렸다. 왠지 달래 주어야 할 것 같아 어둠 속에서 몸을 돌렸을 때, 그녀가 다시 기운찬 목소리로 부탁을 해 왔다.

“그럼 노래를 불러 줘요. 그, 아기들한테 잘 자라고 불러 주는 노래 있잖아요.”

“요람가 말인가요?”

“네! 요람가…….”

노래를 불러 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요구가 아니었지만, 내가 아는 요람가가 한 곡 밖에 없는 게 문제였다. 그러나 레테는 한 곡이라도 상관없으니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 천사들의 성이 있어요.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나를 향해 웃어 줘요. 꽃과 나비와 함께 춤을 추고, 행복의 노래 부르며 잠에서 깨어나면 어머니가 나를 안아 주지요.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여요, 나를 사랑한다고…….”

몇 소절 부르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스르륵 잠이 들어 버렸다.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꼭 아이처럼.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내 두 눈이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조심스럽게 뻗어 나간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결 좋은 은빛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나고 있었다. 손 안에서 사르륵 흐트러지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니 잊고 있던 누군가가 생각났다.

‘에스델…….’

한 팔에 안기던 그 자그마한 아이가 생각이 났다. 이 요람가는 나의 어머니가 나를 위해, 그리고 내가 나의 작은 에스델을 위해 불러 주었던 노래이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 아이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은 밤이었다.

* * *

젬마 부인이 새롭게 전한 소식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베스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의 아랫배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요? 이 안에 아가가 있는 거예요?”

“그럼.”

“하지만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몇 달 지나면 배가 부를 거야.”

나 또한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아직 납작한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험한 일을 하지 않아 부드러운 손끝이 옷감 위를 스쳤다.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띤 채 아랫배를 쓰다듬는 그녀의 모습에서 과거의 나를 겹쳐 보았다.

“정말 축하해, 엘리.”

다리아는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를 건넸다. 그러자 젬마 부인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고마워, 다리아.”

울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젬마 부인은 간신히 대답했다.

“저런, 엘리. 이렇게 기쁜 날 왜 우는 거야?”

다리아의 달래는 말에 결국 그녀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어버렸다. 결국 당황한 다리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기가 생기면 좋은 일 아냐? 왜 우는 거지?”

“너무 기쁘고 벅차서 우는 걸지도 몰라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베스티에게 잔잔하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럼 클로이도 아기가 생겼을 때 젬마 부인처럼 기뻐서 울었나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흠칫 몸을 굳히고 말았다. 어젯밤부터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 있던 레테의 질문이었다.

“성녀님,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클로이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라고요!”

“아, 맞다. 그렇지요.”

혹시 그녀가 무언가 아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나는 뻣뻣해진 몸을 추스르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레테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오렌지 주스를 홀짝일 뿐이었다.

“그런데 성녀님은 성녀님이 머무를 처소도 있으면서 왜 자꾸 황후궁에 나타나는 거예요?”

“상관 말아요, 공녀. 나는 공녀가 아니라 클로이를 만나러 온 거니까요.”

레테는 새침한 목소리로 베스티에게 쏘아붙이곤 내게 살가운 목소리로 웃었다.

“클로이도 어린 아기를 좋아하나요?”

“네, 뭐…….”

“몇 살 정도 되는 아기가 좋아요?”

“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다.

대공성에서는 한 번도 어린 아이를 본 적이 없어서 내 기억 속 아이는 작은 에스델이 전부였다. 그 아이가 조금 더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작은 입술로 내 이름을 불러 주고, 날 어머니라 칭해 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끝내 상상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글쎄요. 아이들은 몇 살이든 모두 사랑스러울 것 같아요.”

“오, 그래요?”

내 대답에 레테가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클로이, 방금 성녀님의 눈빛이 이상했어. 음흉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거 같아.”

“어머나, 모함이에요, 캐롤라인 공녀. 한 번만 더 클로이에게 나에 관한 안 좋은 소리를 전했다간 신성 모독죄로 엄벌에 처할 거예요.”

옆에서 베스티가 성녀면 다냐고 작게 구시렁거리는데 다리아가 돌아왔다.

“젬마 부인은요?”

“마차에 태워 돌려보냈어. 눈물이 많은 녀석이라 걱정이야.”

“원래 아이를 가지게 되면 감정이 들쑥날쑥해지잖아요.”

“호오, 잘 알고 있네, 클로이?”

다리아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공연히 뜨끔해진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려야 했다.

“그보다 황후 폐하께서는 젬마 부인과 정말 친한 것 같아요. 이렇게 같이 기뻐해 주시고…….”

“내가 아이를 잃고 힘들었을 때 곁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던 게 엘리였거든.”

이제는 굳이 숨길 것도 아니라는 듯 다리아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들끼리 절친한 사이라 덩달아 친했어. 생각하는 거며, 어지간한 취향도 죄다 비슷한 덕분에 더 쉽게 친구가 되었지. 내가 황궁에 오게 되었을 때 흔쾌히 내 시녀가 되어 함께해 주었던 엘리가 아니었더라면 나 혼자 여기서 버티기 힘들었을 거야.”

“그러고 보니 다리아 언니와 젬마 부인과 윌터 경은 어렸을 때부터 삼총사였지요?”

“…….”

베스티의 말에 다리아가 무언갈 회상하는 듯 먹먹해진 눈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윌터 경이 누구예요?”

“……내가 사랑했던 남자. 아, 물론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이야. 이래봬도 아스타 제국의 황후인데 과거에 다른 남자를 사랑했단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잖니.”

다리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문득 예전에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 생각이 났다.

‘사실 그 아이는 레이몬드의 아이가 아니었는데도 말이야.’

어쩌면 그녀가 잃어야 했던 아이의 아버지가 방금 말한 윌터 경이라는 남자인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윌터 경이라는 남자는 아마도…….

‘자기 부모가 갑작스레 비명횡사하고, 사랑해 죽겠다던 연인이 실종되고,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잃었을 때마저도…….’

아마도,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인지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 없었다. 베스티라면 대강의 상황을 알려 줄지도 몰랐으나, 굳이 그녀에게 묻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다만, 그녀가 밝히지 않은 이야기들을 동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그녀에게 굉장한 실례일 테니까.

* * *

내가 한참이나 어려진 모습의 레테와 마주친 것은 꼭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

“폐하……?”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레이몬드가 웬 어린 아이를 앞에 두고 쭈그려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아, 클로이!”

레이몬드는 유난히 반가운 얼굴로 화색을 띄며 나를 돌아봤다.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옆으로 가니, 세 살에서 네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아이가 그의 앞에 훌쩍이며 서 있었다.

“아, 그게…….”

레이몬드는 도서관 앞을 지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 아이가 나타나 혼자 넘어졌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변명하는 그는 조금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최근에 그와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던 터라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에 함께 쭈그려 앉았다.

“성녀의 일행인 것 같아. 황궁엔 이렇게 어린 아이가 드나들 일이 없으니까.”

성녀의 일행이라는 아이는 성녀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와 레테가 그저 닮은 정도의 얼굴이라면, 레테와 이 아이는 그대로 찍어 낸 것처럼 같은 얼굴이었다.

“성녀님의 일행이니?”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자세히 보니 무릎과 팔꿈치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아프지 않아?”

“……조금, 아파요.”

“굉장하구나. 아픈데도 이렇게 참고 있는 걸 보면.”

그 말에 아이가 양 볼을 수줍게 붉혔다. 묘한 기시감이 드는 찰나, 레이몬드가 내게 말을 붙여왔다.

“이제 어떡하지, 클로이?”

“일단 치료를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음…… 그럼 일단 내 집무실로 가는 게 좋겠군. 여기선 네 방이나 성녀 일행이 머무는 곳보단 그곳이 더 가까우니까.”

“바쁘지 않으셔요? 제가 그냥 제 방으로 데려가서…….”

“겸사겸사 너와 함께 있는 시간도 늘리고 말이야.”

이번엔 내 얼굴이 아이의 얼굴처럼 수줍게 붉어졌을 것이다. 나는 화끈거리는 열기를 떨치기 위해 고개를 세게 내저으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어때? 걸을 수 있겠니?”

“아니요…….”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레이몬드를 힐끔 올려다봤다. 간절한 그 눈빛에 당황한 레이몬드가 주춤하며 뒷걸음질을 했다.

“저 애가 왜 날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걸까?”

“아마도 폐하께 안아 달라는 것 같아요.”

“으음…….”

레이몬드의 미간 위로 옅은 주름이 생겨났다. 아마도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꼭 어린 에스델을 처음 대하던 그의 모습과 겹쳐 보여서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웃느냐.”

“폐하께서 곤란하시면 제가 안을게요.”

“아니야. 무거울 텐데 내가 할…….”

“나 하나도 안 무거워요!”

아이가 레이몬드의 말을 자르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 행동에 레이몬드보다 내가 더 놀라고 말았다.

상대는 무려 아스타 제국의 황제다. 아무리 성녀의 일행이라 해도 이렇게 함부로 말하는 건 명백한 황족 모독에 해당했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몬드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폐하, 아이가 아직 어려서 실수를 한 것 같아요. 그냥 제가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할 테니…….”

“그다지 화난 게 아니니까 아이를 위해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를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게 신기해서 놀란 것뿐이야.”

레이몬드는 오해를 종식시키며 아이를 한 팔로 가뿐히 안아 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폐하를 보면 무서워하나요?”

그를 따라 복도를 걸으며 나는 신경 쓰이던 것을 물었다.

“음, 아무래도. 내 얼굴이 아이들이 보기엔 조금 험악하게 생겼다고 그러더군.”

“누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레이몬드처럼 상냥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라트 후작이.”

레이몬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내려놓은 그가 손수 약통을 꺼냈다.

“이 나이대 아이들이 나만 보면 울기에 이유를 아냐고 물었거든.”

“전혀 아니에요!”

레이몬드의 소파 위에 앉은 아이가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며 외쳤다.

“레이몬드는 전혀 험악하지 않아요! 레이몬드는 세상에서 가장 상냥하고 다정한…… 헙!”

큰 소리로 외치던 아이는 돌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양손으로 작은 입을 가렸다. 그 순간 아이를 향한 나와 레이몬드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레테……?”

“아, 아니, 난 레테가 아니에요!”

혹시나 싶어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허둥지둥하며 제 얼굴을 숨겼다.

“하지만 말투가 꼭 레테였는데…….”

“이 황궁에서 그런 얼굴을 하고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이는 성녀밖에 없다만.”

레이몬드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모이자 아이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그, 그게…… 제가 실수를 했어요. 저는 레테 님을 모시는 종인데, 그, 레테 님의 말투를 따라하다 보니 실수로…….”

“그럼 지금 당장 성녀와 신관들을 불러 확인을 부탁해야겠군.”

“안 돼요!”

결국 아이는 울먹이며 실토하고 말았다.

“죄송해요. 제가 레테예요.”

소파 위에 앉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부모에게 혼나는 어린 아이의 모습 같았다.

레이몬드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맞은편에 철썩 앉았다.

“그 모습은 무엇이오, 성녀?”

“레이몬드랑 클로이가 자꾸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바꿨어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외양을 바꾼다는 게……?”

“저는 라나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랍니다. 그런 제게 나이는 의미 없어요. 이건 그냥 시간을 초월하는 것뿐이에요.”

“시간을 초월한다고요?”

레테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시간을 초월한다……. 시간의 초월……. 나는 문득 시간을 거슬러 온 나와 레이몬드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내가, 그리고 레이몬드와 카일로스가 어떤 원리로 시간을 거슬러 왔는지 알지 못했다. 이제까지 무심코 받아들였던 현실이 새삼 기이하게 다가왔다.

“그럼,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가능한가요?”

“글쎄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으나 레테는 대답을 회피했다. 나는 레이몬드가 내버려 둔 약통을 들고 레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폐하의 앞에서 넘어진 건 일부러 그런 거예요?”

“그냥…… 며칠 전에 엘로이즈 영애가 한 걸 따라해 봤어요. 조금 짜증나잖아요! 레이몬드는 이렇게 친절한 사람인데, 다들 몰라주니까!”

머뭇거리고 대답하던 레테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제 걱정 없어요. 아까 시종들이 우리의 모습을 봤으니까요. 분명 레이몬드는 다친 어린 아이를 손수 돌봐주는 상냥한 황제 폐하라고 소문이 날 거예요.”

“…….”

“…….”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제법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래 봤자 혀가 짧아 아이 같은 말씨였지만 말이다.

나와 레이몬드는 말문이 막혀서 그저 그녀를 쳐다만 보았다.

“……그렇다고 자기 몸에 직접 상처를 내면 어떡해요. 아프잖아요.”

“음…….”

나는 레테의 상처 위에 묻은 흙을 닦아 낸 뒤 약을 발라 주었다. 다행히도 붕대를 감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중에 꼭 의사를 찾아가 제대로 치료 받으세요. 흉터가 남으면 속상할 테니.”

“걱정해 주는 건가요?”

“걱정할 일을 일부러 만들었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나요?”

“헤헤…….”

나름대로 쏘아붙인 거였는데, 레테는 기쁜 듯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외양이 네 살짜리 아이의 모습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와의 사이에 있던 거리감이 훌쩍 줄어든 느낌이었다.

“레이몬드랑 클로이랑 이렇게 셋이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성녀는 정말 그 생각을 따라잡을 수 없군.”

레이몬드의 말에 속으로 동감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레테.”

“네? 돌아가야 한다고요?”

“여긴 폐하의 집무실이잖아요. 다리를 다쳤으니 내가 데려다줄게요.”

“하지만……!”

잠시 안절부절못하던 레테가 레이몬드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날 내쫓지 말아 주세요! 클로이랑 같이 레이몬드가 일하는 걸 구경 할래요!”

레테는 어지간히 돌아가기 싫은 모양이었다.

“네? 레이몬드, 제발요. 나 이렇게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귀엽지 않아요? 옆에 두고 계속 보면 일의 능률도 더 오를걸요?”

“으음, 뭐…….”

두 눈을 가늘게 좁힌 레이몬드가 레테에게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듯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클로이도 함께 있겠다면.”

“저도요……?”

나는 뜻밖의 말에 다시 물었으나 레이몬드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녀의 말마따나 널 옆에 두고 계속 보면 일의 능률이 오를 것 같아.”

“…….”

고백처럼 들리는 그 말에 갑자기 주변이 더워졌다. 나는 레테의 앞에서 이런 말을 들은 게 부끄러워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정작 레테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아이답지 않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는 중이었지만.

* * *

레이몬드가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소파 위에 앉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는 머리를 땋아 달라는 그녀의 부탁에 열과 성을 다하여 노력했으나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양쪽 귓바퀴 뒤쪽으로 한 가닥씩 땋은 머리카락들은 지나치게 울퉁불퉁했고, 그 아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위로 붉은 리본이 추하게 늘어졌다.

“미안해요, 레테. 아무래도 이건…… 조금 이상하지요?”

“아니에요. 너무 예뻐요. 딱 내가 원하던 모양이에요.”

그러나 레테는 싫어하지 않고 거울을 보며 좋아했다. 아무리 보아도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모양이었는데. 나는 절망한 나머지 내 양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한숨 쉬지 말아요, 클로이. 정말 예쁜 걸요? 레이몬드에게 물어볼까요? 레이몬드! 내 머리 어때요? 클로이가 땋아 줬어요! 정말 예쁘지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읽고 있던 레이몬드가 흘깃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봤다. 레테의 우스꽝스러운 머리 모양을 발견한 레이몬드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소. 정말 예쁘게 땋아 줬군. 정말 대단한 솜씨야.”

“들었지요, 클로이? 레이몬드도 정말 예쁘다잖아요.”

레테는 키득키득 웃으며 거울을 내게 건넸다.

“이번에는 레테의 차례예요. 레테가 클로이 머리를 예쁘게 땋아 줄게요. 뒤돌아 봐요, 클로이.”

혹시 내게 복수를 하려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지만, 지은 죄가 있기에 순순히 몸을 돌려 앉았다. 그리고 조금 뒤 레테가 완성한 내 머리는 놀랍도록 완벽했다.

“이렇게 예쁘게 땋아 주면 제가 미안해지잖아요.”

“클로이가 예뻐서 머리도 예쁘게 땋아진 거예요.”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아기 종달새처럼 사랑스러웠다. 저 꼬물거리는 작은 손이 나보다 더 완벽한 솜씨로 내 머리를 땋아 주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클로이랑 나랑 이러고 있으니까 꼭 가족 같지 않아요?”

레테는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이 한 번에 담기도록 짧은 두 팔로 거울을 쭈욱 내밀었다.

팔이 짧아 힘들어 보이는 그녀 대신 내가 거울을 받아 팔을 쭉 뻗었다. 그러자 정말 그녀의 말대로 꼭 가족 같은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겼다.

“그쵸? 진짜 가족 같지요?”

“가족, 이라.”

책상 앞에서 지그시 쳐다보던 레이몬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 위로 떠오른 잔잔한 미소를 바라보자니, 덩달아 내 마음도 평온해졌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레이몬드는 내내 보고 있던 서류철을 덮었다. 내 옆에 앉아서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손장난을 하던 레테가 벌떡 일어나 그의 책상 앞으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레이몬드! 일은 다 끝난 거예요?”

“음, 뭐…….”

레이몬드는 가늘게 좁힌 눈으로 레테를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이제 같이 놀아요! 레이몬드는 혹시 피크닉을 가 본 적이 있나요? 나랑 클로이는 얼마 전에 피크닉을 다녀왔지요. 돗자리를 펴고 간식을 먹고 재미난 이야기도 나누었어요. 레이몬드도 함께 가면 너무 즐거울 것 같지 않나요?”

“그보다 성녀, 아까 분명 다리를 다쳐서 제대로 걷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소?”

상상만으로도 신난다는 듯 제자리에서 깡총깡총 뛰는 레테를 향해 레이몬드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 촐싹거리던 레테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아, 하하……. 내, 내가 그랬나요?”

레테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레이몬드를 올려다봤다.

나였다면 그 자리에서 모든 거짓말을 용서했을 것 같은 사랑스러운 표정에도 레이몬드는 눈가를 한번 움찔했을 뿐, 동요하지 않았다.

레테의 눈동자가 데구르륵 굴렀다. 내게 도와 달라는 듯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슬쩍 그녀를 외면했다.

“걷지 못한단 건 거짓이었군.”

“……라나 신의 축복을 받은 성녀니까요. 육신의 아픔은 느끼지 않아요.”

결국 레테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실토했다.

“왜 거짓말을 했소?”

“레이몬드랑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고? 교단에서 아스타 제국을 상대로 불순한 일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이 되는군.”

“아니에요! 진짜예요! 믿어 주세요!”

레이몬드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레테를 쳐다보았다.

의심받아 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테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나와 가까워지고 싶다며 벌였던 허무맹랑한 일들이 생각났던 까닭이다.

“정말인데…… 라나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요. 절대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흠……. 성녀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어야겠지만.”

자신의 턱 아래를 매만지며 레이몬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힐긋 바라본 레테의 얼굴은 곧 울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성녀를 믿어 달라며 그녀를 도우려던 때, 레이몬드의 입가에 머물러 있는 작은 웃음을 발견했다.

‘성녀를 놀리고 있는 거구나.’

의외의 짓궂은 모습을 발견하자, 가슴이 콩닥 뛰었다.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 매일 새로운 그의 모습에 반하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상대를 짓궂게 놀리는 그의 모습은 새삼 더 멋있었다.

눈가에 피어난 짧은 주름도, 냉담한 눈동자와 달리 개구지게 웃고 있는 입술도,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으면서 속으론 즐거워하고 있을 그의 머릿속도. 모두모두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매일같이 내게 나를 사랑하는 이유들을 속삭여 주는 그의 마음 또한, 나의 마음과 닮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가 내게 쏟아 주는 사랑을, 이제는 그만 믿어야 할 것 같았다.

“아, 아무튼 피크닉 정말 안 갈 거예요? 레이몬드랑 클로이랑 나랑 셋이 가면 진짜 즐거울 것 같은데.”

레테는 울상이 되었어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클로이! 클로이도 레이몬드와 함께 피크닉 가고 싶지요?”

“네? 아니요, 전…….”

나는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레이몬드와 함께 가는 피크닉이라니, 가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실은 굉장히, 가고 싶다. 하지만 그런 나의 욕심이 레이몬드를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렇잖아도 바쁜 사람인데, 나까지 그를 귀찮게 할 순 없었다.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클로이도 레이몬드와 피크닉 가고 싶은 거예요. 클로이는 원래 원하는 게 있을 때 곧바로 말하지 않고 말끝을 흐리거든요.”

나도 모르는 나의 특징을 이야기하며 레테가 기쁜 듯 웃었다. 나를 쳐다보는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변화했다.

“너도 원하나? 나와 피크닉을 가고 싶어?”

“아, 그게…….”

나를 응시하는 짙은 시선에 얼굴 위로 열이 올랐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또다시 말끝을 흐리자 그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군.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너도 가고 싶은 거야.”

속마음을 들킨 탓에 양 볼이 화끈거렸다. 레이몬드는 들고 있던 만년필을 책상 위로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급한 일들도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으니 나가지. 피크닉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클로이. 간식이나 돗자리 같은 것쯤이야 직접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아.”

“맞아요, 클로이. 황제가 그런 걸 직접 준비하는 거 봤어요? 원래 황제는 명령하는 자리라고요.”

레이몬드와 레테가 서로 비슷한 표정을 하고서 나를 향해 턱 끝을 젖혔다.

‘표정이 닮았네…….’

두 사람은 황제와 성녀라는 높은 지위에서 비롯된 당당한 오만함이 닮아 있었다.

* * *

레이몬드와 레테와 나.

세 사람의 조합이 괴상할 법도 한데, 돗자리를 깔아 주고 간식 바구니를 가져다주는 시종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뻘쭘하게 눈치를 살피며 쭈뼛거리는 나와 달리, 레이몬드와 레테는 시종들이 깔아 준 돗자리 위에 자연스레 올라가 앉았다. 그러고는 뭐 하냐며 나를 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정말 닮아 있었다.

“눈치 보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클로이.”

“수줍어하지 않고 내 옆에 앉아도 돼요, 클로이!”

나는 어정쩡하게 웃으며 그들의 사이에 앉았다. 레이몬드가 손짓하자 시종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클로이와 벌써 두 번째 피크닉이에요!”

세 사람만 남게 되자, 레테는 곧바로 내 치맛자락 위에 고개를 파묻으며 외쳤다. 작아진 그녀의 몸은 내 품에 포옥 안길 것만 같았다.

“정말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문제없네요.”

나는 슬며시 웃으며 바구니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를 꺼냈다. 아직 점심을 먹지 않은 탓에 배가 꽤 고팠다.

“폐하께서도 이런 음식을 즐겨 드시나요?”

“가끔은. 일이 바쁠 땐 점심을 건너 뛴 적도 허다했으니까.”

레이몬드처럼 커다란 사람이 고작 빵 몇 조각을 먹고 배를 채운다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신기한 생물 보듯이 쳐다보지 마. 전장에 나갔을 땐 식은 빵 부스러기도 종종 먹었어.”

“식은 빵 부스러기라니!”

내 치마 위에 고개를 파묻으며 뒹굴거리던 레테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가 레이몬드에게 그런 조악한 음식을 바쳤지요? 내게 말해요! 레테가 가서 혼내 줄 테니까!”

레테는 몸이 어려진 탓에 혀까지 짧아져, 위협적인 눈빛으로 외쳐도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레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우스꽝스럽게 손질해 준 그 머리카락 말이다.

“화내지 말고 레테도 먹어요. 배가 고프잖아요.”

“아, 감사해요, 클로이.”

씩씩거리던 레테는 곧바로 태세를 바꾸어 내가 내민 샌드위치를 양손으로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양 볼이 터질 것처럼 빵빵해진 모양으로 오물거리는 게 썩 귀여웠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레이몬드가 샌드위치를 먹다 말고 나와 레테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두 사람의 모습이 뭐랄까, 진짜 자매처럼 보여서.”

“자매 아니에요!”

레테가 발끈 외쳤다.

“어떻게 나랑 클로이를 고작 자매 사이에 비유하는 거예요?”

“레테, 입 안에 있는 건 다 삼키고 말해야지요.”

“아, 죄송해요, 클로이.”

잔뜩 성질을 내던 레테가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대답했다. 입 안에 있는 것을 우물우물 모두 삼켜 낸 레테가 다시금 팔짱을 끼고서 레이몬드 앞에 섰다.

“잘 생각해 봐요, 레이몬드. 나와 클로이가 고작 자매 사이로밖에 안 보이나요?”

레테의 몸이 어려진 탓에 그녀가 빳빳하게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아 있는 레이몬드보다 눈높이가 낮았다. 레이몬드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매란 말이 별로인 건가?”

“네, 별로예요. 아주 별로예요.”

레테는 내 쪽으로 다가와 양팔을 활짝 벌려서 나를 껴안았다. 그녀의 몸이 지나치게 작아진 탓에 그녀가 나를 안은 게 아니라, 내 목덜미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이 되었다.

“나랑 클로이는 자매보다 훨씬 더 진한 사이라고요.”

“…….”

레테가 레이몬드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레이몬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가를 잔뜩 찡그리며 우릴 보다가, 돌연 그녀를 따라 피시식 웃고 말았다.

“성녀와 상대하다 보면 내가 조금 유치해지는 것 같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은 샌드위치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봄바람이 하늘하늘 불어 오고,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레테의 이야기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차츰 붉어지는 하늘을 발견하곤 그제야 시간이 꽤 지났음을 알게 됐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일까. 레이몬드와 마주 앉아 양팔을 크게 휘저으며 무언갈 설명하는 레테의 모습에 이상하게 가슴이 시큰해졌다.

진지한 자세로 레테의 말을 경청하다가도 인자한 웃음을 터뜨리는 레이몬드는 어쩌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생의 내가 그토록 미련한 짓만 하지 않았더라면.

“아, 잠시만요!”

벌떡 일어난 레테가 우리를 두고서 어디론가 오도도 뛰어갔다. 둘만이 남게 되자 묘한 긴장이 흘렀다.

“피크닉이란 것도, 나쁘지 않아. 꽤 즐거웠어.”

그가 날 보며 고혹적인 웃음을 흘렸다. 쿵, 쿵. 심장이 뛰었다.

“너는 어땠느냐, 클로이?”

“저도 즐거웠어요.”

“벌써 해가 저물기 시작했어. 성녀가 돌아오면 일어나야겠군.”

“…….”

“아쉬워?”

성큼, 내 앞으로 다가온 그가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물었다. 낮은 울림을 지닌 음색이 귓가에서 감미롭게 맴돌았다.

“네가 원한다면 종종 이런 시간을 함께 가질까?”

“폐하께서는 바쁜 분이시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너를 위한 시간마저 내어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귓가에서 터지는 낮은 웃음소리가 내 심박을 더욱 빠르게 조였다. 그의 시선이 마치 나를 쓰다듬듯 찬찬히 훑었다. 시선이 닿은 부분 하나하나가 일제히 뜨겁게 열을 올리며 존재를 과시했다.

“클로이.”

문득 이 순간이 굉장히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뉘엿뉘엿 저무는 하늘 아래, 오직 그와 나 둘만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본 채 앉아 기묘한 긴장감을 숨기지 않았다. 짙은 열기가 감도는 붉은 눈동자 안에 내가 담겨 있었다.

입, 맞추고 싶어.

그를 사랑하는 내 안의 나는 그에게 죄의식을 지닌 나를 밀어내며 그렇게 생각했다. 짙은 호선을 그리고 있는 붉은 입술이 내 시야를 온통 차지했다.

“폐하.”

나는 숨을 가볍게 삼키며 그를 향해 떨리는 입술을 뗐다. 그러자 그가 화답하듯 나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

“…….”

내가 미친 것 같았다. 쉼 없이 쿵쿵거리는 심장 때문에 정말로 미쳐 버린 모양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아니요, 저는…….”

느릿하게 두 눈을 내리깔며 그에게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클로이! 레이몬드!”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레테가 우리를 부르며 뛰어왔다. 레이몬드와 나는 동시에 화들짝 놀라며 한 발짝씩 물러나 앉았다.

“이것 봐요! 내가 꽃을 꺾어 왔지요!”

레테는 양팔에 한 아름 그러안은 꽃송이들을 자랑하며 돗자리 위로 올라섰다.

“어? 두 사람 왜 그래요? 설마…… 싸운 건 아니지요?”

“그럴 리가.”

“그럴 리가요.”

나와 레이몬드는 동시에 대답했다. 레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얼굴이 빨간데…… 화난 사람처럼.”

“더워서 그렇소.”

“더워서 그래요.”

레테가 여전히 꽃송이를 그러안은 채로 우리 두 사람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그럼 왜 이렇게 서로를 외면하는 것처럼 앉아 있어요? 게다가 레이몬드는 지금 마음의 색깔이 아주 새까매요. 나쁜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나쁜 생각이라니! 전혀 아니오!”

“클로이는 뭔가 새빨간 생각을 하고 있었네요. 무슨 생각을 하면 이렇게 마음이 새빨개질 수 있나요?”

“새빨간 생각……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나와 레이몬드는 시치미를 뚝 떼며 고개를 돌렸다.

레테는 갸웃거리며 이해가 안 간다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별안간 방싯 웃으며 품에 안은 꽃송이를 위로 날려 보냈다.

“짜잔!”

빨갛고, 노랗고, 하얀 가지각색의 꽃송이가 우리 세 사람의 머리 위로 꽃비처럼 흩날렸다.

“꽃비예요! 정말 예쁘지요?”

“…….”

“…….”

그녀의 말마따나 정말 아름다운 꽃비였지만, 아직 당황한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우리는 아무런 말도 뻥긋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것을 쳐다만 봤다.

“치, 힘들게 꺾어 왔는데 왜 아무런 칭찬도 없어요?”

“……정말, 예쁘네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대답하자, 그제야 레테는 만족한 듯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살랑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꽃송이 하나가 레이몬드의 머리 위에 앉았다. 새하얀 꽃송이는 그의 붉은 머리카락 위에서 수줍게 노닐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오늘도 나와 함께 자겠다던 레테를 간신히 그녀의 처소로 돌려보냈다. 그녀를 보낸 건 나인데, 이상하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나였다.

한참 작아진 모습 때문일까. 한 품에 쏘옥 안기던 작은 몸과 온기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녀를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피곤하지는 않으냐?”

불쑥 귓가에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돌아봤다.

“전혀요. 선물을…… 받은 것 같은 시간이었어요.”

레테가 첫 피크닉을 가게 되었을 때 그런 말을 했다. 깜짝 선물을 받은 느낌이라고.

레이몬드와 함께 시간을 보낸 오늘의 나도 꼭 그런 느낌을 받았다. 레테가, 성녀가 내게 준 선물 같은 날이었다.

“오늘 폐하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거예요.”

“그것 참 기쁘군. 나도, 그렇거든.”

걸음을 멈춘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앞에 마주섰다. 그의 머리 위에는 아직도 하얀 꽃잎 하나가 홀로 남아 달빛에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나와 레테는 그것을 보며 한참이나 소리 없이 키득키득 웃었지만, 절대 그에게 머리 위 꽃잎의 존재를 알려 주지 않았다.

“다음에는 둘이서만 가자.”

레테가 정성스럽게 땋아 준 내 머리카락을 굵은 손끝이 스윽 훑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네가 원한다면.”

머리카락을 훑던 손이 내 귓바퀴 위로 닿았다.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열이 올랐다. 잔뜩 붉어져 있을 내 얼굴을 보며 낮은 웃음을 터뜨리는 그가 조금 얄궂다고 생각됐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내려다보는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 나른한 시선을 받으면 나는 가슴 벅찬 착각을 하곤 만다.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

아니, 이게 정말 착각인 걸까.

‘황제는 널 사랑하지 않아.’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매일 빠뜨리지 않고 알려 줄 테야.’

나는 그의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은연중에 그의 사랑 또한 착각이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에 대한 나의 죄의식과 부채감을 덜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내가 만들어낸 너의 모습을 사랑하는 거야.’

‘틀렸어. 널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해.’

그랬던 내가 대체 언제부터 그가 주는 애정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그는 나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그의 애정을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나를 설득이라도 하듯이.

‘네가 아니더라도 어떤 여자든, 내가 만들어 내보였을 여자를 사랑했을 거야.’

‘내가 나를 아주 잘 아는데, 널 사랑하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야.’

레이몬드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카일로스는 그의 사랑이 거짓이라고 했다.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내게, 레이몬드는 결코 자신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였다.

“폐하.”

나의 부름에 그가 두 눈을 나른히 휘었다. 정확히 나의 두 눈동자 위로 내려앉는 시선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도무지 착각이라 생각할 수 없는 그 짙은 애정 속에서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말해, 클로이.”

레이몬드는 언제나 내게 확신을 주려 하는 사람이었다. 오랜 기간 나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카일로스도 그만큼의 신뢰를 주진 못하였다.

‘사랑해, 클로이.’

시간을 거슬러 오기 이전에도, 그는 종종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백을 합한다 하더라도 다리아의 탄신 무도회 때 그가 내게 터뜨렸던 고백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나의 모든 과오를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의 사랑을, 이제는 믿어도 되지 않을까.

“궁금한 게 있어요.”

“뭐든. 말해.”

어쩌면 나는 지금 자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향한 눈빛이, 표정이, 애정 담긴 목소리가 모두 그의 착각인 것이라면. 그건 굉장히 슬플 것 같았다.

“엘로이즈 영애가 넘어질 땐 도와 주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성녀님은 도와 준 거지요?”

“엘로이즈? 그게 누구지?”

“기억 안 나시나요? 그때, 피크닉을 함께 하러 왔던 영애들 중 폐하의 앞에서 넘어진 아가씨 말이에요.”

“그런 일이 있었나?”

레이몬드는 정말 기억이 안 나는 듯 미간을 찌푸려댔다.

“누가 봐도 폐하의 취향인 여자였어요.”

“내 취향이라니.”

“은발에 적안을 지닌 여자였죠. 폐하께서는 예전부터 은발의 미녀들을 곁에 두셨잖아요.”

“…….”

순간 레이몬드의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꼭 내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시선을 돌리던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오해야. 네가 말한 은발의 미녀들은 모두 다리아가 날 유혹하라며 보낸 여자들이었고, 한 번도 곁에 둔 적 없었어. 나에 대한 소문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 너까지 나를 오해하는 건 굉장히 기분 나빠.”

“한 번도 없었다고요……?”

“그래. 네가 처음이야. 곁에 둔 것도, 입을 맞춘 것도. 사랑한다고 낯간지러운 고백을 뱉어 낸 것도.”

오랫동안 내가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 상반된 내용의 진술이었지만 어쩐지 거짓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또다시 두근거리며 벅차올랐다.

“애초에 그런 취향 따위…….”

“그날, 폐하의 집무실 앞에서 폐하를 발견하곤 뒤돌아 뛰쳐나갔잖아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카일로스의 말대로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걸지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그가 주는 것이 오롯이 나를 위한 사랑이라 착각하는 걸지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나를 발견한 순간, 그 모든 게 나의 어리석은 착각이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몬드를 사랑한다. 그 사실이 내게 조악한 용기를 주었다.

“그때, 왜 그렇게 놀랐는지 물어보셨지요? 폐하의 너머로 언뜻 보이던 성녀의 외양이 꼭 폐하의 취향에 부합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이제는 폐하께서 제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뭐? 어째서 그런 생각을……?”

“저는 폐하의 취향에 맞게 만들어진 여자잖아요. 그러니까 원래의 제 모습은 지금 폐하께서 좋아하는 제 모습과 다를 수도 있어요. 숙부님이 제가 아닌 다른 여자를 데려와 키웠더라면, 폐하께서는 제가 아닌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을지도 몰라요.”

“말도 안…….”

“하지만, 폐하. 주제를 넘는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언가 항변하려는 그의 말을 나는 감히 잘라 냈다.

“그럼에도 폐하께서는 지금의 저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도 될까요?”

나는 꼭 마법에 홀린 듯, 그에게로 한 발짝 더 다가가며 말했다.

‘두 사람은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해요.’

이건 마치 성녀가 부린 요술 같았다.

그의 사랑을 나의 것으로 믿게 만드는 요술, 그리고 나 또한 그를 사랑하게 되어 버린 요술…….

“…….”

그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예전 같았더라면 그의 침묵에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설사 그가 이 자리에서 ‘다시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라고 나를 거부한들,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클로이.”

내가 좋아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내가 매일같이 네게 알려 주고 있잖아.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의 손끝이 내 얼굴 위로 닿았다. 뜨거운 눈가를 오뚝한 코끝을 도톰한 입술 위를 차례로 훑으며 그가 속삭였다.

“너를 이루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정말로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하나? 내가 그동안 네게 알려 준 너의 사랑스러운 부분들이 모두 루드비히 대공이 만들어 낸 거라고 생각해?”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으나,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내 귓가를 감쌌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바드랍게 눈꼬리를 휘었다.

“……아니요.”

나의 입술 사이로, 마침내 온전한 나를 인정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카일로스는 나를 가리켜 자신이 만들어 낸 인형이라고 했다.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은 그가 덧칠한 요소들이고, 나는 그의 실패한 작품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에게 달려가 소리 내어 외치고 싶다.

나는 당신의 인형이 아니라고. 나는 나 자체로 살아 숨 쉬는 클로이 가넷슈라고. 레이몬드가 사랑하는 나의 섬세함도, 수줍음도, 당돌함도 모두 당신이 내게 가르친 게 아니라 태초에 내가 지니었던 것이라고.

그러니까 더 이상, 내 앞에서 그의 사랑을 모독하지 말라고.

“그래, 클로이. 너는 루드비히 대공이 만들어 낸 인형이 아니야. 너 자체로 의미를 가진 존재야.”

그의 굵은 손바닥이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주 닿은 살갗을 타고 전해진 온기가 나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너는 나와 함께 지내면서 ‘알려진’ 나의 취향에 맞추겠다고 부단히도 노력했지. 살을 찌우겠다고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다 새벽에 모두 게워 낸 걸 알고 있었어. 흰 살 생선에 알레르기가 있으면서도 내가 좋아한다는 그 음식을 함께 먹고서 온종일 앓아누운 적도 있었지.”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려던 나는 곧 입을 다물었다.

이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 중 그에게 보고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다고, 바로 얼마 전에 그의 입을 통해 들었지 않는가.

“피아노 치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내 취향에 맞추기 위해 너는 종종 내 앞에서 피아노를 즐겨 연주했잖아. 사실은 내가 없을 때면 늘 어린 에스델을 위해 하프를 연주했으면서.”

“…….”

“물론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의 너를 사랑했어. 네가 루드비히 대공이 만들어 낸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너의 모습을 사랑했지.”

잠시 입을 다물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온 너는 더 이상 억지로 살을 찌우지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으려 노력하지도, 내가 좋아하는 악기를 연주하지도 않았지. 너를 압박하는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네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했지. 그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는데.”

내가 달라졌다고? 내가 달라졌었나? 매일 아침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이전의 삶과 다름없이 똑같은데.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어, 클로이. 네가 나의 취향이라 여겼던 이전의 모습도, 그리고 그 구속에서 벗어난 지금의 모습도. 모두 사랑해.”

아니, 정말 똑같다고 생각해?

카일로스의 도구로 살았던 클로이 가넷슈의 음울한 얼굴과 퍼부어지는 레이몬드의 사랑 속에서 편안하게 미소 짓는 클로이 가넷슈의 얼굴이 정말로 똑같다고 생각해?

정말 그 둘을 똑같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레이몬드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이토록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 나는 어떻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가 있었지.

“네가 내 취향이라서 사랑하는 게 아니야. 단순히 네가 아름다워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처음 너와 만났을 때 그 외양에 잠시 끌리긴 했지만, 그게 내 사랑의 전부가 될 수 없어.”

이렇게 변했는데.

어리석었던 나의 과거를 미워하되 더불어 긍휼히 여기게 되었고, 그가 내게 주는 사랑을 온전히 나의 것이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런 나도 감히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다고 그를 향해 움직이는 마음을 인정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냥 너를 사랑하는 거야. 네 존재를, 살아 숨 쉬는 너의 존재를 이다지도 사랑하는 거야.”

그렇구나. 레이몬드는 그의 취향에 온전히 맞추려 애를 썼던 그 시절의 나도, 확연히 달라진 지금의 나도. 모두 사랑하는구나. 그냥, 나를 사랑하는구나.

내가, 그를 사랑하듯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착각이 아니듯, 나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 또한 착각이 아니었구나. 시간을 거슬러 오기 훨씬 이전부터.

“너는 취향 따위와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스러운 여자야, 클로이.”

그는 언제나 내게 진심이었구나.

| 목 차 |

8장. 망각의 성녀, 레테Ⅱ

9장. 아름다운 미끼의 반격

10장. 그는 내게 영원한 행복이었다

외전1. 망각

8장. 망각의 성녀, 레테Ⅱ

“내 말이 그리도 감동적이었나?”

훌쩍훌쩍 우는 나를 향해 그가 놀리듯 말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예의 짓궂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어리어 있었다.

“예전엔 제가 울면 난처해하며 달래 주셨으면서…… 변하셨어요.”

“너도 변했잖아.”

그가 피시식 웃으며 내 눈가를 닦아 냈다.

“네가 진실로 괴로워 우는 것과 다른 이유로 우는 것쯤은, 이제 충분히 가늠할 수 있어.”

“그럼 이제 달래 주지 않으실 건가요?”

흘깃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굵은 팔뚝이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팍 위에 기대어 선 나를 그가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말랐는데, 계속 울다가 살이 더 빠져 버리면 큰일이잖아. 그러니 달래주어야지.”

“살이 빠질 정도로 많이 운 적은 없어요.”

“네가 흘리는 건 눈물 한 방울마저도 아까운걸.”

이 화끈거리는 열기는 얼굴을 잔뜩 적신 눈물 때문일까, 아니면 나를 안고서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이 남자 때문일까.

“사랑해, 클로이.”

그가 내 머리카락 위로 짧게 입을 맞추며 고백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너를 사랑해 왔는데. 너는 이제 너를 사랑할 준비가 된 거니?”

세상에서 가장 권위적인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말투를 흉내 내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얼굴로 묻는다.

“제게 그러셨지요. 제가 저를 사랑하는 데 성공한 뒤에는 폐하의 마음을 돌아봐 달라고.”

물론 그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흐릿하게 끝맺지 못한 뒷말이 무엇인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고 그저 잔잔한 미소를 띠우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어. 네가 준비가 될 때까지.”

굵은 손바닥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조금씩 차오르던 간지러운 감각이 이제는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부터, 늘 기다려 왔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내게로 흘러왔다.

아아.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부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정말 상관없었다. 착각이든 뭐든.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든. 혹은 카일로스가 만들어낸 내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든.

내가 어떻게 이 남자의 사랑을 감히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클로이……?”

당황한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양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서슴없이 다가간 입술이 그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멈추고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싫으면, 말씀하세요.”

언젠가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나와 같은 것을 떠올린 그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싫을 리가.”

짧은 허락에 나는 그대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거슬러 온 시간 속, 언제나 함께 입을 맞추고 몸을 맞춰 왔지만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에게 진심을 담았다.

감히 나 따위가, 하는 생각은 더 이상 없었다. 설사 탐하여서는 안 될 것을 탐한 죄로 신의 징벌을 받아 재가 되어 흩어진다 하더라도, 그와 입술을 맞댄 이 순간을 영원토록 기억할 수 있다면.

오직 그 하나의 갈망만을 안고서 난 그에게 더욱 바싹 매달렸다.

길고도 긴 입맞춤의 끝에 우리는 간신히 몸을 떨어뜨렸다. 가쁜 호흡을 추스르며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 둘은 결국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홍당무가 되었군, 클로이.”

“폐하께서도요. 머리색과 얼굴색을 구분할 수가 없어요.”

“저런. 그것 참 고약한 농담인데?”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쓸어내렸다. 레이몬드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황족이면서 손가락 끝에 박인 굳은살이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쥐고서 내 입가로 가져갔다.

“크, 클로이……?”

내 입술이 그의 손가락 위로 닿는 순간, 그가 잔뜩 당황하여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를 힐끔 올려다보고는 생긋 두 눈을 휘었다. 동시에 더욱 붉어지는 그의 얼굴이 아이처럼 천진했다.

“…….”

레이몬드는 입술을 꾸욱 다물고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의 다섯 손가락에 차례로 입을 맞춘 뒤에야 그의 손을 놓아 줬다.

“손 키스는 처음인가요?”

“……그래.”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다는 게 정말인가 보군요.”

“여자와 손을 잡는 것도.”

그가 내 손을 펼쳐 깍지를 끼며 말했다.

“네가 처음이야, 클로이.”

힘주어 맞잡은 손가락 사이로 짙은 열기가 전해졌다. 나는 자유로운 반대편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짚으며 빙긋 웃었다.

“그럼 신년 무도회 때의 키스도, 첫 입맞춤이었나요?”

“영광스럽게도.”

“어쩐지. 굉장히 거칠다고 생각했어요. 폐하께 첫 입맞춤일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술에 잔뜩 취하신 것 같다 생각했지요. 혹은 원래 거친 걸 좋아하는 성향이거나.”

“너는 지나치게 여유로웠지.”

그의 손바닥이 가슴팍 위에 얹어 있던 내 손을 덮었다. 양손이 모두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부끄러웠어. 사춘기 소년처럼 조급한 나와 달리, 너는 굉장히 능숙해 보였거든.”

“설마. 폐하께서 부끄러우셨다고요?”

“그럼. 나도 사람인데. 부끄러움을 느껴. 내 앞에서 그저 미소만 짓는 너를 보며 안달을 낸 적도 있고, 네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웃을 땐 강샘을 내기도 해.”

“신기해요.”

그의 얼굴을 만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꼼지락거리는 내 손을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어 내는데 실패한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의 얼굴을 눈으로 훑었다.

부끄러워하는 그의 얼굴도, 안달을 내는 그의 얼굴도, 강샘을 내는 그의 얼굴도 모두 사랑스럽겠지.

레이몬드가 쥐고 있던 나의 양손을 차례로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열 손가락 모두에 입을 맞춰 주었다.

촉, 촉, 촉, 촉, 촉, 촉, 촉, 촉, 촉, 초옥.

마지막 왼손 새끼손가락에 입을 맞출 땐, 조금 느리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나는 아까 굉장히 부끄러웠는데, 너도 내가 이러면 부끄럽나?”

“네, 부끄럽지요.”

나는 레이몬드를 향해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입을 맞추는데, 어떻게 부끄럽지 않고 설레지 않고 떨리지 않겠어요.”

“클로이…….”

나의 대답에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내 이름을 읊조렸다. 레이몬드는 나의 손목을 꼬옥 움켜쥐며 말했다.

“그럼 부끄러워하는 네 얼굴을 잔뜩 보여 줘.”

한 층 낮아진 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요?”

그렇게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짙은 정염으로 일렁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내 침실로 가자, 클로이.”

“아…….”

그 말에 나는 정말로 부끄러워져서 잠시 말을 잊고 말았다.

레이몬드의 침실. 예전엔 그토록 익숙한 공간이었는데 이제 와 새삼 부끄럽다니. 사랑을 깨달아 버린 여자의 마음은 이토록 얄궂었다.

“물론 네가 부담스럽다면…….”

“아니요.”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사르르 두 눈을 휘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도 내가 이렇게 웃을 때면 그는 늘 멍청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그래, 꼭 지금처럼.

“대신 오늘 밤은,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 * *

그는 내게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보여 달라고 말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그의 바람과 같이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잔뜩 보여 주고 말았다.

카일로스의 명으로 그를 유혹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그의 앞에서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두 뺨 위로 열꽃이 피어났다.

결국 나는 그의 가슴팍 위로 얼굴을 와락 묻었다.

“폐하, 잠깐만…….”

“왜 그러지, 클로이? 혹시 불편하다거나, 마음이 바뀐 건…….”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향해, 나는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부끄러워서요…….”

“……!”

그 말이 신호탄이 된 건지, 그는 곧바로 내 몸을 끌어안은 채 체중을 실었다. 한데 얽힌 몸이 침대 위로 폭삭하니 쓰러졌다.

“사랑해, 클로이.”

그가 다급하게 입을 맞추며 귓가에 속삭였다.

“각오하라며. 그래서 나 지금 잔뜩 각오했어.”

맞닿은 하체에서 그의 부푼 각오가 느껴졌다.

과거, 황제와 정부라는 신분 차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늘 나였는데…….

사랑을 깨달은 탓일까. 나는 더 이상 그의 앞에서 여유롭지도, 능숙하지도 못했다. 이래서야 그에게 각오를 하라며 호언장담하였던 게 서투른 허세 같지 않나.

“어서 내 각오를 확인해 줘야지, 클로이. 응?”

그가 씨익 웃으며 불긋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정말 짓궂으셔요.”

나는 괜히 심통이 날 것만 같아서 얽혀 있던 그의 몸을 슬쩍 밀어뜨렸다. 그리고는 상반신을 일으키며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내가 싫어졌나?”

나직한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침실 안을 울렸다. 덩달아 입꼬리를 끌어올린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어헤쳤다.

내 손가락이 단단하게 채워져 있던 그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는 사이, 나 또한 어느새 그에 의해 가벼워진 몸이 되었다.

“묻잖아, 클로이. 내가 싫어진 건지.”

“상당히 여유로워지셨네요.”

나는 장난스럽게 그를 흘겨보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여기는 그러지 못하면서.”

“아…….”

짧은 신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에 오묘한 성취감을 느낀 나는 즐겁게 웃으며 그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싫어지지 않았어요. 폐하가 싫어졌다면, 이렇게 부끄러울 리가 없잖아요.”

“부끄러워한다기보다는…… 상당히 즐기는 것 같은, 윽…….”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나 정말, 정말로 부끄럽단 말예요.”

점점 작아지는 내 목소리를 느낀 건지, 레이몬드가 피시식 웃음을 흘리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 그런 것 같군.”

쿵, 쿵, 쿵, 쿵. 맞닿은 살결 사이로 나와 그의 심박이 한데 섞여 강하게 울렸다.

“예전의 너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내 시선을 피한 적이 없는데.”

굵은 손가락이 내 턱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담긴 내 얼굴이 꼭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폐하…….”

당신을 사랑하노라, 꼭 그렇게 외치고픈 순간이었다. 레이몬드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내 입술을 머금으며 안으로 침투했다.

그도, 나도…… 우리는 꼭 한 번도 몸을 섞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그토록 서툴고 조급하게 서로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밤이 깊어 가는 시간에도 우리는 잠들지 않았다. 팔베개를 하고서 그에게 몸을 기댄 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함께였는데, 여전히 나눌 대화가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성녀는 굉장히 특이한 사람인 것 같아. 어제는 불쑥 찾아와 왜 너를 사랑하지 않느냐며 울더군.”

“레테가요?”

“황후가 무서워 그러는 거라면 자신이 도와준다고 그랬어. 그냥 내버려 뒀다간 다리아와 한 판 싸움이라도 벌일 기세라서 말리느라 애를 썼지.”

“제게는 폐하와 제가 서로 사랑을 해야만 모두가 행복해지고 제국이 평화로워진다고 주장하던걸요.”

“정말?”

레이몬드가 솔깃한 얼굴로 나를 봤다. 정말로 그 말을 믿는 것 같은 그의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물론 괴상한 거짓말이에요. 레이몬드까지 그런 말을 믿으면 어떡해요?”

“하지만…….”

그가 조금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괜히 믿고 싶잖아. 너와 내가 서로 사랑을 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싶은데, 넌 아니야?”

“믿고 말고 할 문제인가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자,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춥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맞닿은 그의 품이 포근하게 나를 감싸 주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건 중요하지 않지. 내가 너를 이미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그가 나를 재우려는 듯 내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나른하게 풀린 몸이 슬슬 밀려오는 졸음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려 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몰라. 그냥, 성녀에게 계속 눈길이 가. 보고 있으면 안락한 느낌이 들어.”

“으음…….”

“아, 절대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나보다 열 살은 훌쩍 어린 아이에게 그런 취향은 없으니까. 아니, 진짜 나이는 몇 살인 건지 이제는 가늠도 되지 않지만.”

“폐하를 오해하지 않아요.”

“하지만 방금 날 빤히 쳐다봤잖아.”

내가 자신을 오해한다 생각했는지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는 그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폐하께서 느끼는 게 제 감정이랑 비슷해서, 그래서 신기하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비슷하다고?”

“네. 저도 성녀님을 볼 때면 굉장히 포근한 느낌이 들거든요. 라나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힘이 있나 봐요.”

“분명 굉장히 이상하고 독특한 사람인데 말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레이몬드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생긋 웃는다.

“어쩌면 너와 닮아서 그런 걸지도 몰라.”

“…….”

“물론 네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폐하의 눈에도 저와 성녀님이 많이 닮았어요?”

이미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었고, 나 또한 생각하던 것을 다시 물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네게 어린 동생이 있었다면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았을까.”

“자매 같다는 말, 질색하던데요.”

나는 발끈해 외치던 레테를 떠올리며 킥킥 웃었다. 레이몬드는 그런 내 입가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속삭였다.

“이혼을 할 거야.”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였다. 담고 있는 무게와는 달리.

“너도 알고 있겠지만 다리아와 나는 철저히 정략적인 관계지.”

“저 때문인가요?”

“그 여자에게 미안해할 필욘 없어. 이혼도 그 여자가 먼저 제의한 거니까.”

레이몬드는 과거의 어느 지점을 떠올리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그래도…… 혹시 황후 폐하께서 갑작스럽게 이혼을 제의하신 게 저 때문이라면 조금…….”

“십 년 전에 결혼식을 올린 날에 그 여자가 그랬지. 천년만년 부인 노릇 할 생각은 없다고. 물론 내가 이혼을 결심한 건 네 영향이 크지 않다고 할 순 없지만, 처음부터 서로의 필요에 의해 결합한 관계야.”

“…….”

“그러니 클로이, 너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마. 네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여자와 이혼했을 거야.”

그럼에도 여전히 찝찝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내게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굳이 이 이야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다리아와 나의 거래는 네 보호와 이혼을 두고 한 거였어.”

“네?”

이건 조금 당황스러웠다.

“루드비히 대공으로부터 너를 보호해 주고 싶었거든. 내가 직접. 하지만 네가 나와 엮이길 바라지 않아하는 게 한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그래서 다리아에게 부탁을 했지. 너를 보호해 달라고.”

그의 말마따나 막 시간을 거슬러왔을 때의 나는 그를 굉장히 부담스러워했다. 무엇보다도 나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더 이상 그와 얽히지 않기를 바랐다.

“다리아는 단박에 승낙했어. 동시에 거래를 제안했고.”

“그럼 그 거래의 조건이…….”

“이혼. 그리고 캐롤라인 공작령을 웃도는 크기의 땅을 위자료 명목으로 요구했지. 내가 그랬잖아. 꿍꿍이가 많은 여자라고. 물론 그 여자가 네게 호감을 가진 건 분명하지만, 처음엔 어떻게든 너를 이용해 나를 더 뜯어먹으려 안달이 난 여자였어.”

“……전혀 몰랐어요.”

“이미 한 번 해 봤으니까 두 번째는 더 쉽겠지. 이혼 절차와 관련된 준비는 모두 마련되었어. 루드비히 대공으로부터 너의 안전이 확보되는 때에 터뜨릴 예정이었는데, 이제 내가 직접 너를 보호한다 해도 네가 날 거부하지 않을 테니까.”

굵은 손바닥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있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정수리 위에 닿는 그의 입술이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아닌가? 여전히 날 거부할 건가, 클로이?”

“…….”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나직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은은하게 채웠다.

“오래전에도 말했지만, 너만이 나의 유일한 부인이 될 거야, 클로이.”

“하지만, 그래선 과거의 반복일 뿐이잖아요.”

그의 말은 굉장히 로맨틱했으나, 나는 불안했다. 결국, 레이몬드의 몰락은 나를 곁에 둔 것으로 인하지 않았나.

“정말 과거의 반복이라고 생각해?”

“저를 옆에 두는 건 결국 폐하의 힘을 꺾는 일이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마. 그때는 교단과 귀족들이 모두 내 뜻에 반대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있어.”

레이몬드의 입꼬리가 자신 있게 씨익 말려 올라갔다.

“카일로스 루드비히의 속내를 모두 알게 되었는데, 같은 수에 두 번 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굉장히 오랜 옛날부터 폐하의 몰락만을 바라던 남자예요.”

“기다리던 네가 드디어 내게 왔는데, 내가 못할 건 없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보는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망설이지도, 겁먹지도 않을 거야. 네가 내게 온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그 말이 이상하게 나를 울릴 것만 같아서, 나는 울지 않기 위해 그를 양팔로 거세게 껴안았다.

바보 같은 레이몬드. 그러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텐데.

“안아 주세요.”

“왜 갑자기 어린 아이가 되었을까?”

장난기 가득한 물음에 나는 그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더 안아 주세요. 무서워서 그래요. 요즘 수도에 유령이 나타난다잖아요.”

“유령?”

“폐하는 유령 이야기 못 들었어요?”

그의 가슴팍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령을 무서워하는 클로이라. 이건 지나치게 귀여운데.”

“이건 헛소문이 아니라 진짜래요. 오래전 죽은 여자가 자신의 약혼자를 훔쳐 간 여자에게 복수하려고 은발 머리 여자들만 잡아간대요.”

“뭐……?”

“폐하께선 못 들으셨나요? 벌써 몇 사람이나 실종되었다는데…….”

잠자코 유령 이야기를 듣던 레이몬드의 얼굴이 심각해지는가 싶더니 무섭게 가라앉았다.

“폐하? 괜찮으세요?”

“……아, 그래.”

반 박자 느리게 그가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유령을 무서워하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잠시 고개를 젓던 레이몬드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네가 이야기해 준 유령 이야기가 단순한 괴담이 아니라 그래.”

단순한 괴담이 아니라니? 설마, 그럼 진짜로……?

반쯤은 장난이었던 내 얼굴에 핏기가 싸악 가셨다. 그것을 본 레이몬드가 쓰게 웃으며 내 얼굴을 쓸었다.

“여자들의 실종과 관련한 보고는 이미 받았지. 하지만 네 말처럼 유령의 짓은 아니야. 명백한 사람의 짓이지.”

“사람의 짓이요? 대체 왜 그런 짓을……!”

“글쎄. 목적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야겠지. 너는 너무 무서워하지 마, 클로이. 내가 네 곁에 있으니까.”

전혀 무섭지 않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나를 안심시켜 주는 레이몬드의 목소리에 나는 마음을 조금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그는 언제나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던 남자가 아닌가. 죽음의 순간마저.

“무서워하지 않을게요.”

“그래, 예쁘다.”

그가 빙그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뭐예요, 꼭 어린 아이를 다루는 것 같잖아요.”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나의 소심한 투정에 그가 짓궂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다시 제대로 알려 줘야겠군.”

내가 좋아하는 그의 굵고 투박한 손바닥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너를 향한 내 감정이 절대 어린 아이에게는 나올 수 없는 감정이란 걸.”

“어머, 잠시만요, 폐하! 그냥 말로 하셔도…….”

마주친 두 눈에서 보이는 짙은 열망에 나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 틈을 기다려 주지 않은 그가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베어 물었다.

“음…….”

내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콧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가 내 몸을 바싹 당기며 더욱 깊게 입을 맞춰 왔다.

“사랑해, 클로이.”

잠시 입을 뗀 그가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감정이 절대 가벼운 게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홀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향해 나는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어서 알려 주세요.”

밤이 지나가기 전에, 하고 덧붙인 말에 그가 참지 못하고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꽤 오랜 시간 그와 함께 노닥거리던 나는 어슴푸레한 새벽이 다가오기 직전에 그의 침실을 나섰다. 레이몬드는 굉장히 아쉬워하며 나를 돌려보내기 싫어했지만, 아직은 밝은 시간에 그의 침실에서 나오는 게 부담스러웠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방문을 여는데, 문득 들려서는 안 될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진짜로…… 유령?’

쭈삣, 공포감에 털끝이 선다. 그러나 곧바로 레이몬드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유령은 없다고 단언했었다.

일단은 불을 켜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내게 돌격했다.

“……!”

“클로이!”

내 품으로 와락 안겨든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베스티였다. 나는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그녀를 찬찬히 떼어 냈다.

“잠시만요, 베스티. 일단 불 좀 켜고요.”

“왜, 왜 이제 왔어! 어젯밤엔 어디 있었던 거야?”

환한 불빛 아래 그녀의 얼굴이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무슨 일 있나요, 베스티?”

“그, 그게…….”

그녀의 낯빛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해져 갔다. 그 모습에 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엘로이즈 영애…….”

베스티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시, 실종 됐대……!”

“……!”

“어, 어떡해? 정말로 은발의 여자들에게 복수하는 유령이 있는 거 아닐까? 나, 난 그래서…… 혹시나 네가 잘못 되었을까 봐…… 밖은 어두운데 너는 방에 없고, 그래서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깜빡 잠이 들어서…….”

“괜찮아요, 베스티. 나 여기 멀쩡히 있잖아요.”

나는 울먹이는 그녀를 달래 주며 생각했다.

레이몬드는 최근 있었던 은발 여자들의 실종이 괴담이 아닌 실제 사건이며 유령이 아닌 사람의 짓이라 말했다.

그리고 엘로이즈 영애가 황궁을 다녀갔던 날, 레테는 그녀에게서 카일로스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카일로스와 관련된 일인 걸까?’

아주 조금 엉뚱한 면이 있지만, 성녀가 근거 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실종됐다던 여자들도 모두 카일로스의 짓인 걸까. 그는 필요하다면 자신의 형제와 연인마저 죽일 수 있는 남자였다. 하물며, 사교계에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귀족 영애쯤이야…….

‘하지만 왜……?’

카일로스가 그 여자를, 그리고 그 여자들을 납치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 * *

“드디어 레이몬드의 마음을 받아준 거니?”

언제나 그렇듯 직설적인 다리아의 물음에 나는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아셨어요?”

“이혼 절차를 서두르자고 하더구나. 루드비히 대공으로부터 네 안전이 아직 확보된 게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드디어 네가 레이몬드의 마음을 받아줬구나 싶었지.”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그래, 너는 조금 더 죄송해해야 해.”

다리아가 새침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의 청혼은 그렇게 거절해 놓고, 고작 레이몬드 따위의 마음을 받아주다니.”

장난스러운 질책에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죄송해요, 폐하. 하지만 분명 폐하께도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지 마. 정말로 내가 차인 기분이잖아.”

그렇게 진지한 표정은 아니었는데. 나는 억울했지만 항변하는 대신 뜨거운 찻물을 홀짝였다.

“아무튼 나는 되도록 빨리 꺼져 줄 테니 행복하렴, 두 사람.”

“꺼, 꺼지…… 어떻게 그런 말씀을…….”

막 찻물을 한 모금 넘기던 나는 사레가 들어 캑캑거리며 그녀를 흘끔 올려다봤다. 정작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은 다리아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찻물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아이는 레이몬드 말고 너를 닮은 아이로 낳아. 세상에 그런 재수 없는 상판이 둘이나 되는 건 제국의 저주 아니겠니.”

“재, 재…….”

연달아 이어진 상스러운 말에 나는 결국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뜩 당황한 나를 보며 다리아가 짓궂게 웃었다.

“어차피 나는 곧 황후 자리에서 물러날 텐데, 상스러운 말 좀 쓴다고 뭐 문제 있니? 내가 그 동안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껏 하지 못해 얼마나 괴로웠는데. 하지만 클로이, 너는 이제 레이몬드의 부인이 되어야 하니까 말을 곱게 쓰렴. 제국의 황후로서 모범을 보여야지. 후후후.”

다리아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즐거워했다.

괴로웠다기엔 그간 다리아의 언행을 돌이켜봤을 때 썩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콧김을 뿜어 대는 다리아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다리아는 정말로 내가 그 자리에 오르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몰락한 가문의 사생아 출신인데다가 그녀처럼 카리스마가 있지도, 능력이 있지도 않은데. 무엇보다…… 지난 생에서도 끝끝내 반대에 부딪쳐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물론 너는 아주 훌륭한 황후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다리아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가끔 너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의 일침에 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엇보다 네게 필요한 황후의 소양은 내가 모두 직접 가르쳤잖니.”

“네……?”

황후의 소양이라니. 대체 언제 그녀가 내게 그런 것들을 가르쳤단 말인가?

“내일부터는 황궁의 예산 관리를 모두 네게 맡길 거야. 그러니 긴장해, 클로이.”

“자, 잠시만요! 저는 아직 휴가 기간 아니었나요?”

“후후후.”

물밀 듯이 밀려오는 당황스러움에 목소리를 높였으나 다리아는 잔인하게 웃으며 턱을 괬다.

“내일 오전 열 시에 비공식적인 인수인계를 할 테니 늦지 않고 내 집무실로 찾아오렴.”

하지만 내일은 레이몬드와 함께 황제궁 후원을 산책하기로 했는데…….

그렇게 나는 잔뜩 시무룩해진 채로 응접실을 나서야 했다.

그렇잖아도 임신한 젬마 부인이 당분간 시녀 일을 관두게 되면서 내 앞으로 넘어온 업무들이 늘어나던 참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불어 황궁의 예산 관리까지 모두 내게 맡길 거라니.

‘이러다가 축일 때도 놀지 못하고 일만 하게 되는 거 아니야?’

점점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정말 내가 레이몬드의 부인이 될 수 있을지도 아직 미지수인데! 이렇게 일만 떠안게 되다니!

‘억울해서라도 꼭 레이몬드의 옆에 붙어 있고 싶어.’

물론 그건 굉장히 어렵고 힘든 길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하얀 예복을 입고 레이몬드의 옆에서 그의 손을 잡은 채 나란히 걷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정말 가족…… 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가슴이 뜨겁게 일렁거렸다. 내가 품은 것은 ‘욕심’이었다. 그와 나란히 서고 싶다는 욕심.

카일로스는 내게 욕심이 없는 아이라며 늘 칭찬했다. 어린 나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따금씩 치솟는 욕심을 모두 짓눌러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고개를 빼꼼 내민 이 욕심을 결코 외면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내게 그런 용기를 심어 준 이는 다름 아닌 레이몬드,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야.’

단순히 황제를 유혹하기 위한 아름다운 미끼였던 과거의 내가 아닌, 황제의 곁에 나란히 설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를 위해선 굉장히 많이 공부해야겠지. 그간 카일로스가 내게 교육해 온 것 이상으로.

많이 노력해야겠지. 다리아가 내게 맡기던 자잘한 일들은 아무렇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공부’와 ‘노력’은 내게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러니 나는 부단히 공부하고 노력할 것이다. ……훗날 그것이 끝내 부질없는 몸짓으로 남게 될지라도.

“클로이.”

건물 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레이몬드가 잔잔하게 웃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앞까지 뛰듯이 걸어갔다. 그리고 나를 향해 내밀어진 포근한 손바닥 위로 내 손을 겹쳤다.

“왜 그렇게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지? 다리아가 또 널 괴롭혔나?”

레이몬드가 황후궁 건물을 힐끔 노려보며 물었다.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까운 말이어서 나는 아주 짧은 순간 다리아의 만행을 고자질하고 싶어졌다.

“아니요.”

하지만 나는 은은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폐하를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나쁘지 않군.”

그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나를 생각하며 그토록 비장한 얼굴이라. 나와의 결혼식이라도 상상했나?”

“…….”

어쩌면 정말 그에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묘기라도 생긴 게 아닐까.

내가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쳐다보자, 장난스럽게 웃던 그가 웃음을 거두고는 덩달아 얼굴을 붉혔다.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

“……아.”

그가 짤막하게 탄성을 터뜨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물론 그것으로 새빨개진 귓불까지 가릴 수는 없었지만.

“젠장. 정말…….”

그가 아주 작은 소리로 짓씹듯이 내뱉었다.

“……좋아서 미쳐 버리겠군.”

나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몬드, 나도 당신이 좋아서 미쳐 버린 것 같아. 그러니 이런 욕심도 부리는 거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욕심을 거둘 생각은 없었다.

나는 내 욕심이 죄가 되지 않도록, 내 사랑이 죄가 되지 않도록. 보다 열심히 몸부림칠 것이다.

그러니 레이몬드.

당신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한 나의 몸부림을, 부디 어여삐 여겨 주길.

* * *

사 년에 한 번씩 열린다는 성 플로라의 날은 백 년 전에 출현하였다는 꽃의 성녀 플로라를 기리는 날이자 온 아스타 제국의 축일이었다.

은발 여자들의 실종으로 뒤숭숭한 와중에도 축일은 진행되었다. 불행 중 다행을 꼽자면 엘로이즈 영애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일까.

수도의 중앙 광장에는 무려 삼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귀족, 평민, 노예 할 것 없이 바글바글 모인 사람들은 여자들의 실종을 모르는 듯 즐거운 표정으로 떠들었다.

“나도 클로이와 함께 있고 싶은데……!”

레테는 떼를 쓰는 아이처럼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죄송해요, 레테. 하지만 오늘은 성녀로서 모습을 드러내야지요.”

“억울해! 내가 이렇게 클로이를 캐롤라인 공녀에게 빼앗겨야 한다니!”

레테의 뾰족한 시선이 애꿎은 베스티에게 향했다.

“캐롤라인 공녀! 비록 오늘 하루는 공녀에게 클로이를 양보하지만, 클로이는 내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결국 레테는 눈물을 머금으며 나를 베스티에게 양보했다. ‘양보’라는 표현이 적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차에서 내린 나와 베스티는 모여 있는 군중들 사이에 섞여서 움직였다.

라나 신의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기에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자리였지만, 입고 있는 차림새를 보면 대강의 지위가 드러나곤 했다.

처음에는 몰래 평민들의 옷을 입고 나올 계획을 세웠으나, 다리아에게 들키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최근 수도에서 있었던 실종 사건을 들먹이며 안전을 문제 삼은 다리아의 앞에서 우리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우리는 화려한 봄꽃으로 장식된 가면을 썼다.

이 꽃 가면은 성 플로라의 축일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가면이었다. 사실 말이 가면이지, 얼굴을 제대로 가리는 기능이 부족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 표정까지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저 가면 속에 얼굴을 숨긴다는 사실만으로 아주 짓궂은 장난을 치는 어린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폐하와 다리아 언니야!”

베스티가 저 멀리서 나란히 걷고 있는 레이몬드와 다리아를 가리키며 외쳤다. 황제 부처의 등장에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두 사람은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광장을 가로지르며 높은 단 위에 마련된 그들의 자리에 가 앉았다.

나는 아주 먼 거리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의 옆에 다른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은 썩 즐겁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그 옆의 여자가 일적으로만 얽힌 사이라 해도.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다리아라 해도.

불경스럽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이게 당연한 거다.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축일이 끝나면 다리아와의 이혼을 선포할 것이다.’

어젯밤 레이몬드가 해 주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미 캐롤라인 공작가를 비롯해서 3대 공작 가문과 7대 후작 가문의 가주들에겐 통보를 한 상황이야.’

‘반발이 심하지 않았나요?’

‘의외로 그다지.’

과거에는 둘의 이혼을 어떻게든 막으려 애썼던 귀족들이 이제는 남의 일인 양, 손을 놓고 있었다. 카일로스의 입김이 사라진 탓일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카일로스의 입김이 닿았던 로잘라인 후작보다도 더 강경하게 두 사람의 이혼을 막으려 했던 캐롤라인 공작이 가만있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너는 불안해하지 마. 모두 내가 해결할 테니.’

그는 이렇게 말했지만 거슬러 온 시간과 달라진 상황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난 삶에서는 마지막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 이번에는 다를 거야.’

그때도 혼자서 그 모든 짐을 떠안았던 레이몬드였다. 그가 겪었을 고초를 내게 알려 준 이는 다름 아닌 카일로스였다.

나는 그때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고 싶지 않았다.

‘폐하께서 홀로 힘든 일들을 감당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용기 내어 속삭인 말에 레이몬드는 소리 없이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저기 성녀님이다!”

“성녀님께서 나타나셨다!”

사람들의 호들갑 섞인 소란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그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아이의 모습을 한 레테가 흰색 옷을 입은 사제들을 뒤쪽에 대동한 채 등장했다. 그녀의 작은 몸이 길쭉하게 쌓아올린 단 위로 가볍게 폴짝 내려앉았다.

“저 아이가…… 성녀님?”

“성녀님이라기엔 너무 어린데……?”

사람들이 의아해할 적에, 그녀가 싱긋 웃으며 한 발짝을 내딛었다. 그녀가 깃털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한 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내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성장한 상태의 완벽한 성년의 모습이 되었다.

모두가 감탄하는 와중에 레테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레이몬드의 앞에 섰다. 얼굴에 남은 옅은 웃음기를 지워 낸 그녀가 레이몬드의 머리 위로 손을 뻗으며 축복했다.

“아스타 제국의 주인에게 라나 신의 영원한 축복을.”

군더더기 없는 그 동작과 말씨에 한동안 레테의 성녀 자질을 의심했던 베스티마저 넋을 놓고 박수를 쳤다.

레테는 이어 그 옆에 앉은 다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는 성녀로 인해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성녀는 느리게 입술을 뗐다.

“개척자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네요. 강한 힘이 있어요.”

다리아는 정자세로 앉아 레테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레테의 눈꼬리가 미묘하게 휘었다.

“황후의 관은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요.”

“……!”

“……!”

여기저기서 헉,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레테의 한마디가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을 혼란케 했다.

“원하는 것을 이룰 날이 멀지 않았어요. 당신이 가는 길이 무엇이든, 당신은 최초의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술렁거리는 사람들과 달리 다리아는 자못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레테를 응시했다. 레테의 폭탄과도 같은 발언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하고 말았다. 베스티도 옆에서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발을 동동 굴려 댔다.

“당신의 진짜 짝을 찾으세요, 아스타 제국의 주인이여.”

어느새 다리아에게서 시선을 돌린 레테가 레이몬드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진짜, 짝이라…….”

레이몬드 또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훗, 하고 짧은 웃음을 내지은 레테가 뒤를 돌더니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라나 신의 영광이 언제나 제국과 함께하기를.”

* * *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동안,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레테는 무슨 의도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걸까? 레이몬드와 다리아 사이의 거래를 알고 있을 리 없는데도.

내가 거슬러 온 미래에서 다리아는 유일하게 ‘최초’의 이름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가 스스로 황후의 자리를 걷어찼다는 건 나조차도 얼마 전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레테가 그런 말을 한 건 그저 우연이었을까? 혹은 무언갈 알고 있는 걸까? 그녀만이 지닌 신성한 힘이라든지…….

“성녀님, 공식적인 자리에선 정말 다른 사람 같다.”

베스티의 귓속말이 겨우 내 정신을 돌아오게 해 주었다.

“역시 이중인격인가…….”

가면 사이로 얼핏 비치는 베스티의 눈동자는 심각해 보였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레테의 이중인격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었다. 레테가 단 아래로 사라지자 사람들이 서서히 흩어졌다.

“캐롤라인 공녀! 레이디 가넷슈!”

한 무리의 영애들이 우리를 발견하곤 반갑게 뛰어 왔다.

다들 꽃가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평소와 달리 화려하지 않고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곳곳에 달린 장신구들이 그녀들의 신분을 짐작케 해 주었다.

“역시 두 사람이었군요!”

“멀리서 뒷모습만 보고도 알아봤어요!”

“가면이 별로 쓸모가 없네요.”

“두 사람도 축일을 즐기러 왔나요?”

“네, 황후 폐하께서 오늘만큼은 일할 생각 말고 실컷 즐기라 했거든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자 글로아 영애가 내 머리 위로 화관을 얹어 주었다.

“어머나, 너무 잘 어울려요!”

“역시 축일의 완성은 얼굴이군요.”

“꽃의 성녀 플로라가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오늘의 주인공은 레테님이 아니라 레이디 가넷슈라 해도 믿겠어요.”

축일의 완성은 뭐……? 아무리 그래도 얼굴에 가면까지 쓰고 있는데 대체 무슨 소리람. 나를 두고서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밀러 영애와 트라비아 영애도 잘 어울리는걸요.”

“세상에, 레이디 가넷슈와 같은 미녀에게 칭찬을 받다니!”

부담스러운 시선들에 멋쩍어 슬쩍 화제를 돌리자 그녀들은 기뻐하며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케니스 영애는 어디 있어?”

“글쎄요. 아까부터 한참 찾았는데 보이질 않네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케니스 영애를 내버려 두고서 맛있는 냄새를 따라 걸었다. 곳곳에 즐비해 있는 노점이 우리를 유혹했다.

“우와…….”

“레이디 가넷슈는 성 플로라의 축일이 처음인가요?”

작게 감탄을 하노라니 트라비아 영애가 불쑥 물었다.

“네. 숙부님은 제가 대공성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거든요. 아주 어렸을 때는 남쪽의 소도시에서 살았는데, 길가에서 음식과 물건들을 파는 건 처음 봤어요. 이래서 다들 수도에 살고 싶어 하나 봐요.”

“수도에서도 매일 이런 모습을 보이진 않아요. 길에서 물건을 파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거든요. 사 년에 한 번 찾아오는 축일 때에만 가능하지요.”

“이렇게 즐거운 축일을 사 년에 한 번씩만 기념한다니, 정말 너무해요.”

나는 잔뜩 속상해하며 베스티가 건넨 타르트를 한 입 베어 먹었다. 맛은 황궁에서 먹는 것들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꽃잎으로 장식된 타르트를 먹는 건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레이디 가넷슈는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여요. 얼굴이 빨개졌어요.”

트라비아 영애는 키득키득 웃으며 나를 놀렸다.

“……길에서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배웠거든요. 왠지 일탈하는 기분이 들어서, 조금 설레요.”

“실컷 즐겨요, 레이디 가넷슈. 오늘이 지나면 또 사 년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네!”

나는 그녀들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저곳에 펼쳐진 볼거리를 발견할 때마다 홀린 듯이 내 걸음이 멈추곤 했다.

작은 공터에서 꽃의 성녀 플로라를 주인공으로 한 단막극이 시작된다는 소식에 걸음을 서두르던 때였다.

“레이디 클로이.”

단정한 목소리가 내 앞을 막아섰다. 내 옆에 서 있던 영애들이 그대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특히 그중에서도 글로아 영애는 온 얼굴에 핏기가 가셔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험한 모습이었다.

“에녹 경?”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틀림없는 에녹 경이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백금발과 입고 있는 대공가의 기사복이 이를 증명해 주었다.

“이곳은 어떻게…… 에녹 경도 축일을 즐기러 온 건가요?”

에녹 경은 나를 향해 샛노란 꽃 한 송이를 불쑥 내밀었다.

“봄날의 당신은 노란색이 잘 어울립니다.”

“아…….”

나는 느리게 탄성을 터뜨리며 그가 건넨 꽃송이를 받았다. 그러고는 활짝 웃으며 화답했다.

“고마워요, 에녹 경.”

에녹 경은 그런 나를 보며 소리 없이 푸스스 눈꼬리를 접어 내렸다. 옆에서 글로아 영애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즐거운 축일 보내시길.”

불쑥 나타나 꽃을 건네준 에녹 경은 그대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순식간에 주위가 초토화되고 말았다.

“레이디 가넷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방금 그 사람, 브란스 경 맞지요?”

“브란스 경과는 어떤 사이에요? 설마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지요?”

“말도 안 돼! 우리에게 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에녹 경이 사라지자마자 내 주위를 에워싼 영애들이 그와 나의 관계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조금 난처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요. 에녹 경과, 그,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요.”

“하지만, 방금 이렇게 꽃을 주고 갔잖아요!”

“게다가 두 사람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요? 그것도 아주 다정하게!”

“솔직히 말해 보세요. 두 사람은…….”

“진짜 아니에요!”

쏟아지는 추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어떻게든 에녹 경과의 관계를 해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걸요!”

그러자 그녀들은 이번엔 아까보다 더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일 초, 이 초, 삼 초…… 아주 짧은 정적이 지난 뒤에 그녀들은 가면을 썼음에도 너무나 확연하게 보이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말도 안 돼. 브란스 경을 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요?”

“저, 저, 저 브란스 경을 두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제국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중 한 명인 브란스 경인데!”

“맙소사…….”

에녹 경이 수도의 아가씨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들의 격한 반응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굉장한 사랑을 받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내 그녀들에게 말하지 못해 아쉬웠던 것을 떠올리며 제국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인 레이몬드의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에녹 경도 물론 멋있는 분이지만 제가 좋아하는 분은 그분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멋있는 분이세요.”

“브란스 경보다 더 멋있는 분이라고요?”

“네.”

냉큼 답하자 잠자코 대화를 듣던 베스티의 눈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클로이, 너…….”

베스티가 잔뜩 불안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케니스 경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아니요! 케니스 경이라니, 전혀 아니에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이번엔 도리어 내가 당황했다.

“……휴, 다행이다.”

베스티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릴 때였다.

“제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이번에 불쑥 등장한 것은 케니스 경이었다. 브란스 경에 이은 케니스 경의 등장에 다들 숨을 멈추고 그만 쳐다보았다.

“제 이름이 들린 것 같았는데.”

아무도 대답을 주지 않고 멍하니 쳐다만 보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 잘못 들으신 거예요!”

서로 눈치만 보는 가운데 베스티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쉽네요.”

케니스 경은 얼굴을 긁적이며 민망해했다. 그의 손에도 새빨간 꽃송이로 만든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 꽃은……?”

“아, 멜리에게 줄 꽃인데, 혹시 마주치면 대신 전해 줄래요?”

“네, 네! 제가 케니스 영애에게 꼭 전달해드릴게요!”

베스티는 양손을 공손하게 뻗어 냉큼 꽃다발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캐롤라인 영애.”

케니스 경이 상큼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인사를 하곤 멀어져 갔다.

“후후후…….”

베스티가 음산하게 웃으며 케니스 영애의 꽃다발을 얼굴에 비비적거렸다. 어쩐지 사악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녀의 미소는 다리아와 닮았다.

“일단 케니스 영애를 찾아야겠네요. 꽃다발도 전해 줘야 하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케니스 영애는 필요 없는 쓰레기라며 길바닥에 버릴 게 뻔한데.”

베스티는 케니스 영애에게 꽃을 전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평소 케니스 영애가 자신의 셋째 오빠를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갔다. 하지만…….

“베스티는 케니스 경을 좋아하는 거지요?”

“뭐?”

베스티가 그 자리에서 펄쩍 뛰며 강하게 부정했다.

“무, 무무무무슨 소리!”

……좋아하는 거 맞구나. 혹시나 싶어 찔러 본 건데.

절대 케니스 경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베스티의 모습에 푸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다른 영애들과 어울리며 천진하게 웃었다. 그녀들과 함께일 때의 나는 꼭 평범한 아가씨처럼 느껴졌다.

억울하다며 씩씩 콧김을 내뿜는 베스티를 간신히 달래고서 우리는 함께 레테를 찾아갔다. 성녀님께 축복을 받기 위해 모여든 이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기다린 뒤에야 우리는 레테를 만날 수 있었다. 베스티와 밀러 영애가 차례로 레테에게 축복을 받았고,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다.

“클로이!”

레테는 환하게 웃으며 분홍색 꽃을 건넸다. 에녹 경이 준 노란색 꽃에 이어서 두 번째 꽃이었다.

“혹시나 클로이가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 레테가 클로이에게 축복을 내려 줄게요!”

레테는 나와 엇비슷한 나이대의 외양을 하고서도 아이처럼 재잘거렸다.

“영광이에요, 레테.”

나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레테가 내 머리 위로 손을 얹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끝인가요?”

“네.”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는데 벌써 끝이라니. 뭔가 신기했다.

“나도 클로이랑 같이 축일을 즐기고 싶은데, 이 안에만 있어야 해서 너무 속상해요.”

“대신 언젠가 후대의 사람들이 레테를 기리며 축일을 즐기겠지요.”

“그럴 리가요.”

레테는 시무룩하니 두 눈을 내리깔았다.

“난 ‘망각’인걸요.”

“……?”

“아니에요, 아무것도.”

내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갸웃거리자, 레테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뒤에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기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몸을 일으켜 나가려던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아까는 왜 황후 폐하께 그런 말을 했어요?”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진짜로, 그녀는 개척자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걸요.”

레테가 태연한 얼굴로 내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그저 외양이 성년의 모습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전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황후의 관은 클로이의 머리 위에 있어요.”

“…….”

레이몬드가 그녀에게 다리아와의 일을 이야기했을 리는 없다. 내게도 얼마 전에야 자세한 전말을 말해 주었으니까.

“진짠데. 왜 안 믿어 줘요?”

그녀는 억울해했지만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피……. 믿기 싫으면 믿지 마요. 어차피 클로이의 미래는 이미 굴러 가기 시작했으니까.”

“황궁에 돌아가면 다시 봐요.”

나는 그녀에게 짤막하게 인사를 건넨 뒤 밖으로 나왔다. 베스티와 밀러 영애는 그새를 못 참고 저쪽에서 악사들의 연주에 푹 빠져 있었다. 나도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길 생각이었다.

“오랜만이야.”

내 앞을 가로막고 선 이 남자만 아니었더라면.

“클로이, 내 사랑.”

그의 입술이 내 이름과 함께 사랑을 읊는 순간, 온몸의 털들이 삐쭉 일어섰다. 소름이 돋는 듯한 감각에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많이 보고 싶었어.”

그가, 카일로스 루드비히가 뒷걸음질 치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축제를 즐기러 온 것이 아닌지, 그는 이 광장에서 유일하게 홀로 가면을 쓰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을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내가 안 보고 싶었니?”

“미친 소릴!”

나는 그의 손을 쳐내며 내가 아는 가장 나쁜 말을 쏟아냈다.

“내가 왜 당신을 보고 싶어 하나요? 정신 나간 말씀은 그만두세요. 미친 놈 같으니까.”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입에 담은 적이 없는 상스러운 표현이었으나, 카일로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많이, 반성했어.”

그가 비척비척 내게 걸어왔다.

“너무 늦게 깨달았단다. 네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지.”

나는 그를 피해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서인지 점점 군중들로부터 멀어졌다. 베스티도, 밀러 영애도, 어느덧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다가오지 말아요!”

차가운 벽이 등에 닿았을 때, 더 이상 도망칠 곳을 잃은 내가 그에게 외쳤다.

“……가엾은 클로이.”

그는 내가 이제 사랑하지 않는 그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서.”

내 얼굴을 쓰다듬으려는 듯 다가오는 그의 손을 다시 한번 쳐냈다.

“만지지 마세요! 이곳은 당신의 대공성이 아니에요. 치안대를 부르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면 추문에 휩싸이게 해 드릴 거예요.”

“내가 많이 원망스럽지? 모두 다 사과하마. 널 고통스럽게 한 죄는, 평생에 걸쳐 사과할게. 그러니 클로이, 그만 밀어내렴.”

“당신의 사과는 바라지 않아요. 사과를 하기엔 너무 멀어진 사이잖아요, 우리.”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그가 파스스 눈매를 휘었다.

“너도 알잖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너를 사랑할 수 있는 남자야, 내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화가 치밀었다. 그의 발언은 레이몬드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이제 그만 착각에서 헤어 나오세요.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할 수 없는 남자예요.”

“……어리석은 클로이.”

카일로스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긴장을 놓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 너도 알게 될 거야.”

마치 혼잣말처럼 희미한 목소리로, 그가 웅얼거렸다.

“널 사랑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미친 놈.”

뭔가 더 나쁜 말들을 하고 싶었지만 잔뜩 열이 받은 내 머리는 그보다 더 나쁜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미친 사람, 정신 나간 사람, 저주 받을 사람.”

“…….”

“개새끼.”

카일로스는 그저 더 해 보라는 듯 애틋하게 웃으며 날 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언젠가 술 취한 가넷슈 가의 주인이 했던 욕설을 떠올리며 똑같이 말했다. 그러고는 닿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 그에게서 몸을 돌려 사람들이 모인 곳을 향해 걸어 나왔다.

‘붙잡지 않는 건가?’

문득 선연한 감각에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나를 향해 스산하게 웃는 카일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어째서…… 아직도 저기에…….’

그는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으며 그저 같은 자리에 서서 나를 비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지 못한 척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쁜 욕을 하고 당당하게 돌아 나왔음에도 소심하기만 한 나는 그가 더 이상 쫓아오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어딘가 미묘하고 불길한 기분에 나는 곧바로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기가 꺼려졌다. 한동안 멍하니 서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기분 나쁜 상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클로이! 클로이!”

베스티의 외침과 함께 불안한 공포가 온몸을 헤집고 지나갔다. 방금 전까지 활기차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평화롭던 세상에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뛰어와 내 앞에 멈춰선 베스티가 숨을 헥헥 골랐다. 그녀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베스티……?”

“크, 큰일…….”

주위의 소란은 아스라이 멀어지고, 베스티의 목소리만 남아 멍멍한 귓가에 박혔다.

“다리아 언니가…… 폐하께서…….”

나는 울먹이는 베스티를 위로해 줄 수 없었다.

“쓰러지셨…… 의식이…….”

그녀의 말 곳곳이 섞인 울음기, 아니, 울음 속에 곳곳이 섞인 소리들을 인지한 순간.

툭.

내내 내 얼굴을 뒤덮고 있던 가면이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가면을 장식하던 화려한 봄꽃들이 바닥에 짓눌리며 더럽혀졌다. 나는 베스티를 그 자리에 버려두고서 미친 듯이 뛰었다.

숨이 차오르고, 높은 굽에 발목이 꺾이며 결국 넘어져 치맛단이 찢어지면서도. 살갗이 터지고, 무릎이 깨지고, 뿌연 시야에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도.

나는 그를 향해 뛰어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

베스티로부터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뒤 곧바로 달려갔으나, 이미 신하들과 의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두 사람에게 한 발짝도 다가갈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나를 쫓아와 발만 동동거리며 훌쩍이는 베스티의 옆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레이몬드와 다리아의 모습에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황제의 수석 보좌관인 라트 후작과 친위대장이 기사들을 지휘하여 레이몬드와 다리아를 옮기기 시작했다.

커다란 들것 위에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내 심장을 철렁이게 만들었다.

‘살아…… 계셔…….’

그와 다리아의 생존을 확인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하였다. 그러나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사람들을 비집고 나갔다.

쓰러진 레이몬드와 다리아를 싣고 있는 마차 앞에 다가갔을 때, 두 명의 기사가 기다란 창을 교차하며 나의 접근을 막았다.

“저는 황후궁의 시녀예요. 두 분께 접근하는 걸 허락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레이디 가넷슈.”

레이몬드와 함께 있을 때 몇 번 보았던 왼편의 기사에게 간곡한 목소리로 청했으나,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원칙상 불가합니다.”

“…….”

그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불과 몇 달 전, 황궁 도서관에서 레이몬드와 마주 앉아 읽었던 제국법전의 내용을 떠올렸다.

황족의 시해, 그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황제 시해의 상황에서 황제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은 굉장히 한정되어 있었다.

황제의 배우자인 황후, 황제의 수석 보좌관과 귀족 의회의 수장, 라미에 교단의 대주교, 그리고 황제를 호위하는 친위대의 대장만이 황제의 신병에 접근할 수 있었다.

황제의 직계 가족이라 해도, 그리고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자라 해도…… 접근할 수 없었다.

울컥,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레이몬드의 공식적인 연인이 아니라는 데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슬러 온 시간 이전에도, 그를 사랑하게 된 지금의 시간에서도.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쓰러져 실려 가는데도, 그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다니……!

내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과 떳떳하게 그에게 다가갈 수 없는 나 자신과 무엇보다도 그가 쓰러졌다는 이 끔찍한 상황이…… 그의 안위를 내 눈으로 확인조차 할 수 없다는 이 무서운 상황이……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허망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나는 점차 시야가 뿌예지는 것을 느꼈다. 내 눈을 뒤덮은 것은 뜨거운 눈물이었다.

기사들은 울고 있는 나를 내버려둔 채 말에 올라 레이몬드와 다리아를 실은 마차를 호위하며 황궁으로 떠났다.

“……로이! 클로이……!”

막연한 상실감 속에서 멍하니 있던 나는 아주 뒤늦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는 삐걱이며 고개를 돌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베스티가 내 손을 꼬옥 붙잡으며 말했다.

“우리도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자!”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

그러나 황궁의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우르르 몰려온 레이몬드의 친위대가 나와 베스티를 에워쌌다.

“죄송하지만 폐하께서 깨어나 정확한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방으로 돌아가 외출을 금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이는 다름 아닌 황제 직속의 친위대장이었다. 지금쯤 황제와 황후를 시해하려 한 범인을 찾아 구속해야 하는 그 자가 우리를 향해 명령조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지금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는 거예요?”

나와 베스티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동시에 물었다.

“난 다리아 언니의 사촌이에요! 내가 두 분을 해칠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클로이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공녀께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친위대장의 시선이 나를 힐끗거렸다.

“두 분이 쓰러지신 원인은 독이 든 차 때문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찻잎이라고 속이고 항아리에 담겨 있던 독초가 원인이지요.”

“……!”

독이 든 차라니!

“폐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해독은 한 건가요? 의식은……!”

나도 모르게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순간 그의 몸이 흠칫거리며 뻣뻣하게 굳었지만, 당장 치솟는 레이몬드를 향한 걱정에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제발, 폐하께서는 지금 어떤 상태이신지 아주 작은 언질이라도…….”

“크흠…… 이제 막 의사들이 해독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아직은…….”

“아직은 의식을 되찾지 못하셨습니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요.”

“아…….”

그 말에 내 입에서 절망스러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새까매지기를 반복했다.

축제가 시작될 무렵에 나와 베스티를 먼저 내보냈던 다리아가 생각이 났다. 그녀는 내게 오늘만큼은 축제를 즐기라고 했었다. 찻물을 우려내는 것 정도야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시중 들 생각 말고 어서 나가 축제를 즐기라며 웃음 짓던 그녀였다.

그 말에 나는 아주 조금 설렜었다.

대공성은 수도와 조금 거리가 있었고, 그곳에서 지냈던 팔 년 동안 단 한 번도 축제에 참가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호의를 완강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어떻게든 그녀의 곁에 붙어 있어야 했다.

물론…… 그렇다하여 내가 찻잎과 독초를 구분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그 순간에 함께 있을 수라도 있었다면…….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찻잎이 독초로 둔갑된 거지?’

휴게 공간의 물건들은 모두 나와 베스티가 함께 준비한 것들이었다. 찻잎이 들어 있었을 항아리 또한 원래부터 황후궁에서 써 오던 것을 그대로 옮겨간 것이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는데, 친위대장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찻잎을 준비한 곳이 황후궁이기 때문에 진상이 규명될 때까진 두 분 또한 용의자 선상에 오르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일단은 방으로 들어가 주시지요.”

* * *

베스티는 정문 앞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했다. 나 또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무력감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카일로스야. 틀림없이 카일로스의 짓이야.’

나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카일로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굉장히 나쁜 일을 벌일 것처럼 흡사 광기에 젖어 있던 그 얼굴을…….

애초에 그는 오래 전부터 레이몬드를 해치고자 했던 남자가 아닌가. 게다가…… 마지막에 그가 웅얼거리던 의미심장한 말들…….

‘하지만 정말 어떻게 한 거지?’

내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서일까. 병사가 말해 준 약간의 정보로는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준비했던 찻잎 항아리에 독초가 섞여 있었고…… 다리아가 손수 그것을 우려내어 레이몬드와 함께…….

“아…….”

문득 알싸한 감각이 심장을 엤다.

“세상에, 독초라니.”

나는 그대로 양 손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얼마나 아팠을까. 지금도 의식을 깨지 못하고 있는 그는…… 얼마나 아플까.

“나 때문이야…….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조금만 더 찻잎에 신경을 썼더라도……. 아니, 더 이상 황좌에 욕심을 내지 않을 테니 돌아와 달라던 카일로스의 말을 들었더라면…….”

정신이 사나워졌다. 마치 사고가 마비된 것처럼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받았는데. 이제야 곁에 서겠다는 용기가 생겼는데.

“조금 더 빨리…….”

모든 것이 다 나의 잘못만 같았다.

“조금 더 빨리 마음을 전할 걸…….”

이대로 그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영영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렇게 내가 몇 시간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스스로를 탓하고만 있을 때였다.

“……클로이.”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순간 내가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또 울고 있군. 그때처럼 서럽게.”

“폐하……?”

뒤를 돌아본 나는 반쯤 열린 문가에 간신히 기대어 있는 레이몬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폐하……!”

그게 환각이 아닌 진짜 레이몬드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나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폐하, 어떻게 된 거예요? 몸은, 몸은 괜찮아요? 해독은, 해독은 모두 끝난 거예요?”

“물론, 이제 괜찮아.”

괜찮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그는 힘겹게 입꼬리를 당겼다.

무려 독을 먹고 쓰러졌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가 해독 작업을 하였다 한들, 이렇게 빠르게 회복을 마쳤을 리가 없다.

이 미련한 남자는 아직 몸이 모두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정신이 들자마자 나를 찾아온 것이다.

까칠한 손끝이 내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너는 참 마음이 따뜻한 여자야, 클로이.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위해 매번 눈물을 흘리잖아.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결코 나의 아픔을 냉정하게 지나치지 않잖아.”

생기가 사라진 창백한 입술이 미련하게도 내게 사랑을 말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스물일곱 번째 이유가 방금 막 생각났어. 이처럼 마음이 따뜻한 너를 사랑해.”

“나, 나 때문이에요. 나 때문에 폐하가 다친 거예요. 카일로스가…… 나 때문에…….”

“쉬이, 울지 마.”

굵은 손바닥이 내 얼굴을 감싸 쥐며 달래 주었다. 펑펑 쏟아진 울음이 그의 손을 적셨다.

“폐하는 대체 왜 그러세요? 사경을 헤매다 방금 막 일어난 거잖아요. 그런데 왜…… 어째서 이런 상황에조차 내게 사랑을 말하시는 거예요?”

“……말했잖아.”

느리게 나를 쳐다보던 그의 입가 위로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라고. 그 어느 순간에도.”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도, 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 그를 속였을 때도, 나로 인해 죽음을 앞두었을 때도.

그 모든 순간에 사랑을 말하는 남자였다.

“내가, 내가 어떻게…….”

거친 손끝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눈물에 젖어 까끌까끌한 피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가 어떻게 감히 폐하의 사랑을 의심했던 걸까요.”

끊임없이 그의 사랑을 거부했다.

그는 날 사랑하면 안 된다고, 우리는 얽혀서는 안 된다고.

그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그저 착각하는 것뿐이라고.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내가 감히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레이몬드는 그런 내게 끊임없는 사랑을 퍼부었다.

“이렇게 고귀한 사랑인데…….”

한때 그를 보며 나는 사랑에 눈이 먼 어리석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내게 쏟아 준 눈부신 사랑이 이제 나의 눈을 멀게 했다.

“나 같은 여자도 세상에서 가장 풍족한 기쁨을 누리게 해 주는, 신성한 사랑인데…….”

레이몬드의 사랑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라나 신의 사랑과 닮았다. 순수하고, 맹목적이었으며 헌신적이었다. 성역과도 같은 그의 사랑 앞에서,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너를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그가 나를 보며 버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폐하의 말씀은 틀렸어요. 누가 폐하를 사랑하지 않는대요?”

미안한 마음과 원망 섞인 마음이 한데 섞여 튀어나왔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위해 매번 우는 여자라고? 아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한 것처럼 마음이 따뜻한 여자가 아니야.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장례식에서 유일하게 울지 않았던 냉정한 여자가 바로 나다.

피로 이어진 가문의 몰락에도 난 한 방울의 슬픔도 흩뿌리지 않았다. 내 생에 단 하나뿐이었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조차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가 당신의 죽음 앞에서 울었던 것은, 카일로스의 명을 어겨 가면서까지 눈물을 흘렸던 것은,

당신이니까.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그 모든 순간에 사랑을 말하는 당신이니까.

그런 당신을, 나는 이다지도 사랑한다.

“아직 내게 네 입으로 말해 준 적 없잖아. 사랑한다고.”

“입을 맞춰 드렸잖아요.”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도 너는 내게 입을 맞췄지.”

“…….”

그의 반박에 나는 차마 대꾸할 수가 없었다. 전혀 상처 받지 않은 얼굴로 말하고 있었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걸 이제는 알고 있기에.

“입을 맞추는 것만으론 부족해. 나는 항상 네가 고파. 내가 얼마나 너의 사랑을 갈망하는지, 너는 짐작도 못할 거야.”

레이몬드가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폐하…….”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부르며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폐하.”

눈물이 마르면서 피부가 땅기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지금의 내 모습은 눈물이 말라붙어 꽤 못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마주 보는 눈동자가 잔잔하게 나를 담고 있었다.

“폐하께서 부족하시지 않도록, 채워 드릴게요. 사랑해요. 정말 많이 사랑해요.”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리었다.

“나도.”

“…….”

“나도 널 정말 많이 사랑해, 클로이.”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충동에 휩싸여, 나는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당겼다. 그는 순순히 내게 입술을 내주었다.

깊고도 진한 입맞춤이었다. 나의 모든 마음을 담아, 그렇게 입을 맞추었다.

“이래도,”

입술을 떨어지는 순간, 촉촉한 소리가 우리 사이에 머물렀다.

“여전히 부족하세요?”

“더 원한다고 하면, 울 건가?”

나의 물음에 그가 씨익 입꼬리를 말며 웃었다.

“울지 않을게요.”

“그렇다면 여전히.”

이번에는 그가 나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너를 갈망하고 있어.”

느리게 다가오는 입술을 보며 나는 천천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 * *

황후를 위해 마련된 휴게 공간에서 황제와 황후가 쓰러졌다.

이 사건은 선황 부처의 죽음과 매우 흡사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공간에서, 독이 든 차를 마시고 동시에 쓰러졌다는 점이 그러했다.

사람을 죽일 만큼 강한 독이었다. 의사는 레이몬드가 유달리 빨리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체 조건이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다리아는 하루가 지났는데도 깨어나지 못했다.

다리아가 독을 먹고 쓰러졌다는 소식에 놀란 젬마 부인은 실신을 하였다고 했다. 그녀 또한 뱃속에 아기를 품은 몸이었는데…….

다리아와 젬마 부인, 그리고 그녀의 뱃속 아기까지.

수많은 생명들이 생사를 오가는 와중에 나는 내게로 쏟아지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레이몬드와 다리아가 독을 먹고 쓰러진 곳은 성 플로라의 축일에 다리아를 위해 마련된 휴게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드나들 수 있는 이들은 오직 다리아의 측근 시녀인 나와 베스티뿐이었다.

물론 젬마 부인 또한 다리아의 모든 공간에 출입할 수 있는 출입증을 갖고 있었지만, 오랜 난임 끝에 아이를 갖게 된 그녀는 꽤 오랫동안 자신의 저택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황제의 기사들마저도 바깥에서 기다려야 했으니, 당연히 용의자는 다리아의 나머지 측근 시녀인 우리 두 사람으로 좁혀졌다.

그러던 와중, 모두가 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성 플로라의 축일 직전, 레이몬드가 3대 공작 가문과 7대 후작 가문을 불러 다리아와 이혼하겠다고 말한 것과 내가 레이몬드의 침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는 시종의 증언이 그러한 의심을 뒷받침했다.

어느 순간 나는 질투에 눈이 멀어 황후를 시해하려 한 죄인이 되어 있었다. 황제의 정부가 된 황후의 시녀가 감히 황후의 자리를 탐내 황후를 시해하려다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불러 황제까지 다치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드러난 정황 증거일 뿐, 그러한 가설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너는 어째서 루드비히 대공의 짓이라 생각했던 거지?”

레이몬드는 그가 의식을 회복한 순간 횡설수설하던 나의 말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심증밖에 없는 의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하였으나, 레이몬드의 계속되는 집요한 추궁에 나는 결국 내 생각을 모두 털어놓았다.

“카일로스와 만났어요. 그가 이상한 말을 했죠.”

나는 레이몬드와 다리아가 독을 마시고 있었을 그 순간, 내게 향했던 카일로스의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이제 너도 알게 될 거야. 널 사랑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달아나는 나를 붙잡는 대신 그저 스산하게 웃으며 지켜보던 카일로스의 얼굴이 생각났다.

마치 모든 게 자신의 계획이었다는 듯, 그토록 여유로운 얼굴…….

“하지만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에요. 그때는 제가 너무 놀라서 속에 든 것을 아무렇게 내뱉는 바람에…….”

“으음…….”

레이몬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쓰러지기 직전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어. 다리아가 직접 찻물을 우려내 권해 주었고, 아무런 의심 없이 그걸 마셨지. 쓰러지면서 테이블보를 당겨 소란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제때 치료받지 못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몰라.”

“이걸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사하셔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그가 내 손을 붙잡으며 씨익 웃었다.

“일단은 다리아가 어서 깨어나길 기다려야겠군. 네가 슬퍼하는 건 싫으니까.”

나란히 복도를 걷던 우리가 멈춰선 곳은 다리아의 침실 앞이었다. 레이몬드의 등장에 문이 열렸다. 안쪽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가 내게 향했다.

“저 여자군요. 소중한 제 질녀를 시해하려 한 여자가.”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레이몬드가 나를 보호하듯이 뒤로 숨기며 남자에게 맞섰다.

“공작, 입 조심해.”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남자를 위협했다. 나는 단박에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캐롤라인 공작. 다리아의 숙부이자, 베스티의 아버지.

“누구 마음대로 클로이가 범인이라 단정 짓는 거지?”

“저 여자가 아니면 누가 황후 폐하를 시해하려 했단 말입니까? 저택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던 황후의 오랜 동무인 백작 부인이? 아니면, 우리 베스티가?”

캐롤라인 공작은 코웃음을 치며 조롱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동기도, 증언도, 모두 확실하지 않습니까!”

증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잡지 못해 의아해하는 내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라도 하듯, 그가 덧붙이며 말했다.

“이미 그날 보초를 서던 병사로부터 축제 때 은색 머리의 여자가 찻잎 항아리를 바꿔치기했다는 증언까지 나왔습니다.”

찻잎 항아리를 바꿔치기했다고? 하지만 다리아의 측근 시녀들 외에는 출입이 통제된 공간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었어! 그 여자가 클로이라고 확정지을 만한 증거가 어디 있나!”

“이 수도에 은색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결코 흔하지는 않지요! 게다가 그 여자가 황후 폐하의 모든 공간에 출입할 수 있는 출입증까지 가지고 있었다면요!”

“그럴 리가 없어요.”

이번에 끼어든 이는 다름 아닌 나였다. 공작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하! 그럴 리가 없다?”

“출입증은 오직 황후 폐하의 측근 시녀였던 저와 베스티, 젬마 부인에게만 주어졌어요. 그리고 세 사람 중 은색 머리를 지닌 여자는 저뿐이지요.”

“그러니 당신이 범인이라는 것이오!”

“아니요, 저는 범인이 아니에요. 저는 축제가 시작된 이후로 줄곧 베스티와 함께였어요. 성녀님께 축복을 받으러 간 뒤로는 잠시 헤어져 혼자 있었지만…… 그래도 제가 그 시각에 다른 곳에 있던 것을 본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카일로스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리고 그를 피해 달아나다가 홀로 거리에 우뚝 멈추어선 채로 상념에 빠졌을 때.

그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다른 이들이 함께였다. 그리고 내가 혼자 서 있던 순간마저, 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었다. 그러니 분명 한 명쯤은 나를 본 사람이…….

“물론 있었겠지. 당신과 비슷한 용모를 하고서 가면을 뒤집어 쓴 여자가, 당신 말고도 한 명쯤은.”

“……!”

“온 제국민이 모인 축제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하지만 당신과 같은 은색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하고서 황후의 공간에 출입할 수 있는 자가 당신 말고 어디 있겠는가!”

가면……. 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모두들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꽃 가면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하필이면…….

아니, 어쩌면 그것을 일부러 노린 것일지도…….

“캐롤라인 공작가의 가주로서 정식으로 재판을 청구할 겁니다, 폐하. 판결이 날 때까지 저 여자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가면으로 얼굴마저 가릴 정도로 치밀한 작자의 짓인데, 그깟 머리색 하나쯤 바꾸지 못하겠느냐. 친족이라 해서 용의 선상에 빼놓을 순 없지. 클로이를 건드린다면 네 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레이몬드가 베스티를 언급하자 캐롤라인 공작의 두 눈이 뱀처럼 길게 찢어졌다.

“저 여자를 아끼는 마음은 이해하겠으나, 폐하라고 해서 십 대 귀족 가문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행하실 순 없습니다. 이미 귀족 의회에서는…….”

“그대가 선동하고 있는 그 아홉 귀족 가문을 말하는 것인가?”

“선동이라니! 말씀이 지나……!”

“입 다물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서늘한 목소리로 레이몬드가 캐롤라인 공작의 말을 끊어냈다.

“지금, 내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건가?”

그가 나를 두고서 캐롤라인 공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공작 따위가.”

캐롤라인 공작 또한 아주 작은 키는 아니었으나, 레이몬드의 앞에 서니 머리 반 개 정도 차이가 났다. 레이몬드가 뿜는 흉흉한 기세에 눌린 캐롤라인 공작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감히.”

“……죄송합니다, 폐하.”

싸늘한 정적이 방 안을 감돌았다. 고요한 분노를 품은 대치가 지속될 무렵이었다.

“아버지……!”

벌컥 문을 열고 뛰어온 베스티가 캐롤라인 공작을 노려보더니 대뜸 나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클로이? 혹시 우리 아버지가 네게 심한 말을 하지는 않았니?”

베스티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지금 이 방 안에 레이몬드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잔뜩 놀란 상태였다.

“클로이를 의심하지 마세요. 클로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에요!”

“…….”

베스티의 외침에 캐롤라인 공작이 방 안에 있던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공작의 기사들이 양쪽에서 베스티를 붙잡았다.

“뭐, 뭐예요? 왜, 왜 이래?”

“마차에 태워. 공작성으로 보내.”

캐롤라인 공작의 명령에 기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끌고 나갔다.

“싫어요, 아버지!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다!”

베스티의 외침이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공작은 마지막으로 레이몬드에게 인사를 한번 하고는 곧바로 방 밖으로 나갔다.

“클로이.”

레이몬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그가 묻기도 전에 대답하며 나는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리아가 침대 위에 고요히 누워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대체 누가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한 걸까. 만약 정말 카일로스의 짓이라면…….

그는 다리아에게 어떤 악감정도 없는 남자였다. 다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상대가 설사 아스타 제국의 황후라 해도 가차 없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남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그가 레이몬드와 더불어 다리아를 해치고, 그 죄를 내게 뒤집어씌울 이유가 있을까?

‘확증이 필요해.’

어쩌면 나는 불필요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실은 범인은 다른 곳에 있는데 나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카일로스를 의심하는 건 아닐까.

그녀가 쓰러진 장소는 오직 그녀와 그녀의 측근 시녀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베스티는 다리아에게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젬마 부인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게다가 그날은 그럴 처지 또한 되지 않았다.

병사들이 보았다는 찻잎 항아리를 바꿔치기한 여자.

대체 그 여자는 누구인지, 그 여자가 어떻게 다리아의 측근 시녀들만이 지닐 수 있는 출입증을 가지고 있었는지…….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머리가 아파 왔다.

나는 레이몬드가 끌어다 준 의자에 앉아 다리아가 깨어나길 기도했다.

* * *

꼬박 하루가 더 지났지만 여전히 다리아는 깨어나지 못했다. 이러다 그녀가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다.

성녀의 방문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레테가 들어왔다.

“클로이의 마음속에 슬픔이 가득 차 있어요.”

레테는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아이의 모습일 때는 그저 동생 같던 그녀는 성년의 모습으로 나타나 오래전 잃어버린 포근함을 생각나게 해 주었다.

어머니,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나를 걱정하던 피로 이어진 여자. 그래, 지금의 레테는 꼭 죽은 어머니 같았다.

“내가 위로해 줄게요. 클로이의 슬픔이 사라질 수 있게.”

“…….”

나는 말없이 레테의 가슴팍 위로 이마를 툭 기대었다. 레테의 손바닥이 나의 등을 토닥였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말고 눈을 붙여요.”

그제야 나는 내가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단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 인지하고 나니 해일 같은 졸음이 밀려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당신의 모든 불행이 사라져 있을 거예요.”

귓가에 희미하게 아스러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라고 믿었던 남자와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녀였던 어머니, 양손에 각각 그들을 붙잡고서 나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곳에는 오랜 기간 나를 농락했던 남자도 없었고, 나를 짐승으로 부리던 피를 나눈 이들 또한 없었다.

매일 같이 들과 산으로 함께 쏘다니던 짓궂은 친구들도 있었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신부가 되어 달라던 상냥한 옆집 소년도 있었다.

평범한 이들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자란 나는 저토록 생기가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탄식할 무렵, 장면이 바뀌었다. 어린 나는 차가운 어둠과 함께 어머니의 품속에서 울고 있었다. 꽃과 나무가 얼어붙고, 매서운 눈보라가 나를 안은 여자의 몸을 덮쳤다.

내가 그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힘겹게 빠져나왔을 때, 차갑게 식은 여자의 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 돼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여자는 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클로이. 이건 모두 꿈인 걸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하지 말아요. 당신이 꿈에서 깨어날 때엔, 당신의 모든 불행이 사라져 있을 거예요. 클로이는 내가 지킬 거니까…….

흐릿한 시야 속에서 여자의 몸이 찬찬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이 되어 흩어진 자리에 몽글몽글한 물방울들이 피어올랐다. 여자의 잔해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으나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린 어느 것에도 닿을 수가 없었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내리니 아직 눈을 뜨지 못한 빨갛고 쭈글쭈글한 아이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닮아 사랑스러운 그 얼굴을 툭 건드리자, 얼어붙은 땅이 아이를 중심으로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다시 찾아온 따스한 봄 속에서 나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를 위한 요람가가 은은하게 주위를 녹였다.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 천사들의 성이 있어요.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나를 향해 웃어 줘요. 꽃과 나비와 함께 춤을 추고…….

마침내 되찾은 봄의 들판 위로 저 멀리 남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나는 남자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자에게 달려가 안기는 순간, 내내 감겨 있던 눈꺼풀이 번뜩 뜨였다.

“아…….”

나는 손등으로 두 눈을 비비며 주위를 살폈다.

다리아의 침실이었다. 여전히 싸늘한 병자의 모습으로 누워 있는 그녀가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 레테가 옆에 있었는데……. 아리송한 기분에 이맛살을 찌푸리던 찰나였다.

“……!”

다리아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 * *

차가운 바닥 위에 자그마한 몸뚱이가 늘어져 있었다. 남자는 다급한 손길로 작은 몸을 일으켰다.

“레테! 레테……!”

다시 어린 아이의 모습이 되어 버린 레테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희미한 시야로 화사한 백금발의 남자가 보였다.

에녹,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남자가 화를 내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습니까! 그건 당신의 시간을 깎는 일이에요!”

“에녹, 화났어……?”

“말 돌리지 마세요. 사람의 생명을 되돌리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해 준 건 레테였어요.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런 짓을……!”

화를 내는 에녹은 처음이어서, 레테는 그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클로이가 슬픈 것보다는 낫잖아.”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던 레테가 자그마한 입술을 우물거리며 변명했다.

“어차피 난 잊힐 사람인걸. 하지만 그 여자는 클로이의 옆에 영원히 남아 줄 수 있어. 나와 달리.”

“그럼 레테는요?”

화를 내며 묻는 에녹의 눈가가 붉게 번져 있었다.

“그녀와 함께하길 바랐잖아요!”

“에녹은 착한 사람이네. 화를 내면서도 결국은 나를 걱정하고 있잖아.”

“대체 당신은……!”

결국 에녹은 레테의 앞에서 고개를 파묻으며 울었다.

“당신도, 그녀도. 어째서 그렇게 안쓰럽나요. 늘…….”

“미안해.”

레테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에녹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이 포근했다. 마치 제대로 느껴 보지 못한 아버지의 품처럼.

“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아. 그 여자가 깨어난 걸 클로이가 알게 됐을 때, 기뻐하는 미래를 봐 버렸거든.”

“당신이 본 미래 속에서 슬퍼하던 나는 없었나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린 에녹이 서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원망하듯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레테는 작은 두 손으로 가려 버렸다.

“응, 없어.”

손바닥 아래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레테를 슬프게 했다. 레테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망각은 라나 신이 인간들에게 준 최고의 행복이야. 모든 일이 끝나면 에녹도 나를 잊어버릴 테니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까 슬퍼하는 사람은 없어.”

클로이도, 레이몬드도, 에녹도…… 레테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은 슬픔을 모른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기뻐해, 에녹. 우리의 미래는 꽉 막힌 해피엔딩이야.”

에녹의 얼굴 위로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 레테의 얼굴을 적셨다. 아이의 모습을 했다 하여 정말 아이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데.

“그래서 나도 슬프지 않아. 모두가 기쁘니까. 레테도 기뻐.”

레테는 아이처럼 울고 있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이튿날 아침.

제국의 병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클로이 가넷슈는 다리아가 차를 즐겨 마시던 황후궁 후원의 테이블 앞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은 아스타 제국의 법을 다루고 있는 제국법전으로, 그녀는 그중에서도 황족 시해에 관련된 부분을 몇 번이나 되새김질하며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찻잔에는 레이몬드와 다리아의 의식을 잃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차가 담겨 있었다.

다리아가 평소 즐기던 찻잎이었다. 다리아를 죽이려 한 이는 평소 다리아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클로이 가넷슈.”

들이닥친 병사들은 황궁을 수호하는 황제의 친위대였다. 클로이 가넷슈는 우아하게 법전을 덮으며 병사들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순간,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병사들이 일제히 얼굴을 붉혔다.

긴 은발을 허리 아래까지 흩날리며 요요한 자태로 앉아 있는 여자는 가히 황제의 마음을 훔치고도 남았을 법한 고혹적인 얼굴로 나른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찾아 왔나요?”

상대를 빤히 응시하며 묻는 목소리는 유혹하듯 치명적이었다. 잠시 넋을 놓은 친위대장이 재빨리 정신을 다잡으며 근엄하게 외쳤다.

“죄인 클로이 가넷슈, 황후 폐하의 시해범으로 연행한다.”

클로이 가넷슈는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녀를 닮아 요요한 속눈썹이 가느다랗게 떨리었다.

“……저는 황후 폐하를 시해하지 않았어요.”

가냘픈 목소리와 처연한 눈동자가 병사들의 가슴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당장에라도 앞에 나서서 그녀의 무죄를 함께 주장하고 싶을 만큼 온 혈관에 뜨거운 피가 감돌았다. 개중 한 병사는 침을 꼴깍 삼키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모두에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황제의 총애를 믿고 그 방자함으로 자신의 주인인 황후를 시해하려 한 극악무도한 죄인이었다.

역사 속에서 얼마나 수많은 요부들이 자신의 미색을 이용해 악독한 짓거릴 해 왔던가.

“황제 폐하께서 직접 명하셨다. 네 죄는 곧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친위대장이 눈짓하자 병사 둘이 여자의 양팔을 속박했다. 클로이 가넷슈는 느리게 두 눈을 내리깔았다. 얕은 숨결이 붉은 입술 사이로 흩어졌다.

끝내 황제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던 탓일까. 여자는 아무런 반항도 않고 순순히 그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렇게 죄인 클로이 가넷슈는 차가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황제 레이몬드는 홀로 갇힌 그녀를 단 한 번도 만나러 오지 않았다.

황후의 시녀이면서 그 본분을 망각하여 황제를 유혹하더니 끝내 황후를 독살하려 했던 황제의 악독한 정부 클로이 가넷슈. 그녀는 그렇게 버림받았다.

* * *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은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방금 전 캐롤라인 공작가에서 보낸 기사가 그에게 즐거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흐음…….”

그가 나른한 콧소리를 흘리며 공작의 편지를 불에 태웠다. 파스스 재가 되어 흩어지는 모양이 무척이나 흡족했다.

양쪽이 모두 만족하였던, 꽤 괜찮은 거래였다.

황후 다리아는 여전히 병상에 누워 깨어나지 못했고, 클로이 가넷슈는 황제에게 버림받았다.

“황제까지 한 번에 해치울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황제가 깨어난 것은 굉장히 아쉬웠지만 애초에 목적은 그가 아니었다. 오히려 의식을 회복한 그가 클로이를 외면한 덕분에 일이 더욱 잘 풀리게 될 것만 같았다.

물론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가 그녀를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정황이 그녀가 범인임을 알려 주었고, 귀족들은 당장 그녀를 잡아들여야 한다고 며칠째 농성 중이었으니.

어리석은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그러기에 무슨 자신으로 귀족들 앞에 그녀를 내보였을까.

저였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기고, 또 숨겨서 오직 혼자서만 영원토록 간직했을 것이다.

온전히 지켜 낼 능력도 없으면서, 그녀를 제 것이라 호언장담하더니. 참으로 꼴좋지 않은가.

이제 버려진 그녀를 다시 제 품으로 데려올 때였다.

“그날도 넌, 혼자 남아 떨고 있었지.”

새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 밤. 빨간 화마가 지나간 자리, 재만 남은 저택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어린 클로이 가넷슈를 떠올렸다.

제대로 먹지 못해 앙상하던 작은 몸과 지저분한 외양에도 숨길 수 없었던 예쁜 눈동자가 눈에 밟혀서. 그래서 어린 카일로스는 그 아이를 지나칠 수가 없었나 보다.

‘……저는 처음부터 혼자였어요.’

생기 한 자락도 찾아볼 수 없던 그 가느다란 목소리가 여전히 그의 귓가에 남아 있었다.

“내가 없는 한, 너는 영원히 혼자야. 오직 나만이 널 가질 수 있어.”

아스라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며,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클로이, 클로이……. 사랑하는 나의 클로이…….”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을 냈다.

“드디어 내가 널 데리러 갈 시간이야,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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