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네가 너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망치듯 카일로스에게서 벗어난 후작 영애의 장례식 날 이후, 나는 한동안 내 방에 틀어박혀 나가지 않았다.
그 안에서 나는 오랫동안 카일로스와 로잘라인 후작 영애, 그리고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나는 내가 카일로스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오랜 기간 그의 옆에 있었고, 그 역시 내게 자신의 계획에 관해 서슴없이 알려 주곤 하였다. 그는 레이몬드를 죽였지만, 그것은 그가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불가피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죽음 이후, 그가 자신의 부인이었던 후작 영애를 죽인 사실은 알지 못했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후작 영애는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어쩌면 태어나지 못했던 다리아의 아이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새삼 그가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사람의 생명이란 게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너무나 쉽게 누군가를 죽였노라 말하는 그가 무서웠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평온한 목소리 때문에 꼭 그의 말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살인은 아스타 제국법으로 금하고 있는 엄연한 중죄였다. 설사 그 주체가 귀족이라 하더라도 지엄한 제국의 법을 피해 갈 수는 없다.
“클로이!”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리고 베스티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색을 깨뜨린 그녀의 무례한 행동에 나도 조금 화가 났다. 방에 들어오기 전에는 노크를 해 달라고 한마디 하려 할 적에, 그녀는 내게 불쑥 무언갈 내밀었다.
“너 또 아침을 걸렀다며? 자꾸 식사를 굶으면 없던 병도 생기겠어!”
“아…….”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따뜻한 옥수수 빵과 단호박 수프가 담긴 쟁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거 다 먹는 거 보고 갈 거야! 이번에도 안 먹으면 다리아 언니에게 다 일러바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아래 감추어진 걱정 가득한 베스티의 눈동자에 나는 그만 마음이 풀려 버렸다.
“고마워요, 베스티.”
“고, 고맙긴. 이거나 어서 먹어. 네가 애도 아니고 일일이 챙겨 줘야 하니 귀찮아 죽겠어.”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나는 귀찮다는 그녀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아서, 작게 웃으며 쟁반을 받아들었다. 달콤한 수프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따뜻해지는 배를 느끼며 천천히 빵을 씹었다.
베스티는 양손으로 턱을 받친 채 나의 식사를 구경했다.
“너도 참 마음이 여리구나.”
“제가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먹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장례식을 다녀온 이후로 마음이 불편해서 이러는 거 아냐? 난 네가 꽤 덤덤해 보여서 괜찮은 줄 알았거든.”
딱히 후작 영애의 죽음 때문에 심란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아주 관계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나는 베스티를 향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베스티만 하겠어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베스티 때문에 침대 커버를 세 번이나 바꿨는걸요.”
“하지만…… 난 진짜 무서웠단 말이야.”
베스티는 추욱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후작 영애가 싫다고 말하고 다녀서, 그래서 꼭 나 때문에 죽은 거 같아서…… 그 소식이 들리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 여자를 엄청 싫어했는데…….”
죄지은 사람처럼 우물쭈물하는 베스티를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정작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아하는데, 어째서 아무런 죄도 없는 이들이 슬퍼하고 후회하는 걸까.
“정말 괴한의 습격을 받은 걸까? 그날 장례식장에서도 그 여자가 마차 사고를 당한 거라고 말하긴 했는데, 몰래 들리는 소문들이 너무 흉흉하잖아.”
“……글쎄요.”
나는 그 죽음의 배후를 알고 있으면서도 대답할 수 없었다. 난처하게 입술을 깨무는 나를 보며 베스티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하긴,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그래도 난 그냥 마차 사고라고 생각할래. 괴한이 습격했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섭고…… 또, 너무 불쌍하잖아. 갑자기 괴한이 들이닥쳤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어.”
나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중얼거리는 베스티를 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베스티는 정말 친절하네요.”
“응? 내가?”
그녀는 처음 듣는 말이라는 것처럼 눈가를 찌푸렸다. 나는 구태여 덧붙이는 대신 잔잔하게 웃으며 남은 음식을 먹었다.
“아, 참. 클로이, 내일 성녀님이 수도에 도착한다는데.”
성녀, 잊고 있었던 화두가 다시금 나를 일깨웠다.
“같이 구경 갈래?”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며 쟁반을 한쪽으로 치웠다.
“왜? 넌 안 궁금해? 무려 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님이라고!”
베스티는 성녀의 방문을 꽤나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직 얼굴도 모르는 성녀를 동경하는 기색이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마주칠 일이 생기겠지요.”
“피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민 그녀가 귀여워 나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뻗어나간 내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뭐야!”
“고마워서요.”
발끈한 그녀를 향해 나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녀가 대체 무슨 소리냐며 어리둥절했지만 한번 입가에 머문 미소는 거두어지지 않았다.
투덜거리는 그녀를 지켜보며 나는 잠시 머리 아픈 것들을 잊어 나갔다. 카일로스도, 죽은 후작 영애도, 그리고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녀도…….
* * *
베스티 덕분에 모처럼 기운을 차린 나는 오랜만에 도서관을 찾아갔다. 한동안 쏟아지던 다리아의 업무와 후작 영애의 장례식장을 방문한 이후 뒤숭숭한 기분 탓에 찾지 못한 곳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아…….”
도서관의 입구에서 실로 오랜만에 마주치는 레이몬드의 얼굴을 본 순간, 나직한 탄성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느리게 선을 그으며 인사하자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던 그가 이내 짧은 한숨을 터뜨렸다.
“들어가지.”
레이몬드가 손수 문을 열어 주며 내게 눈짓했다. 나는 놀라 펄쩍 뛰며 그가 붙잡고 있는 문의 손잡이를 함께 쥐었다.
“아니요, 폐하. 폐하께서 먼저…….”
“황명이야. 먼저 들어가.”
“제가 어찌…….”
그를 만류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던 순간, 내 손끝에 그의 손등이 스쳤다.
“아…….”
“음, 흠…….”
나와 레이몬드는 동시에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힐긋 훔쳐본 그의 얼굴이 화가 난 사람처럼 붉으락푸르락 변해 있었다.
“죄송해요, 폐하.”
“…….”
“제가 먼저 들어갈까요?”
“그래.”
심기가 불편한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나는 얌전히 내 손으로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짧게 스쳤던 손끝이 위로 저릿한 감각이 맴돌았다.
“오늘도 제국법전을 읽으러 왔나?”
손끝을 문지르며 서가 쪽으로 걸어가는데, 어느 틈에 뒤따라온 그가 내게 물었다.
“아니요.”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정면의 서가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문학을 읽으려고요.”
“흠, 문학이라. 어떤 내용을 찾고 있지?”
나른하게 쏟아지는 목소리에 홀린 듯이 그를 올려다봤다. 지그시 내게 향한 눈빛이 부드럽게 나를 감싸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늘 그랬다. 누구보다 타오르는 정염을 감추고서 봄볕처럼 따스하게 나를 감싸 주는 남자였다.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뿐이지.’
무심코 스치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레이몬드가 자신 또한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고백해 온 그날 이후로, 나는 내내 그를 의식하면서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꾸만 단단한 마음이 허물어질 것 같았다.
다행히 상냥한 레이몬드는 그 후로 지난 시간의 일을 대놓고 꺼내지 않았다. 나를 위해서 모른 척해 주는 그의 배려를 어떻게 알아채지 못하겠는가.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 말하는 그였지만, 그의 사랑은 내가 감히 받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를 볼 때면 느슨해지는 내 마음 또한 불경한 것이었다.
안 된다고, 레이몬드를 사랑하면 안 된다고.
나는 머리와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었다.
“가벼운 문학 작품을 읽고 싶어요. 복잡한 생각 없이 술술 읽을 수 있는.”
“그래? 가벼운 문학이라…….”
레이몬드는 나를 지나쳐 서가로 걸어가 책 몇 권을 골라 냈다. 너무나 당연한 듯이 자신의 용무를 뒤로하고 내가 책 고르는 일을 도와주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일렁였다.
‘황제의 사랑은 거짓이야.’
또다시 조롱하는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리며 지나갔다.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손에 든 책과 서가에 꽂힌 책을 번갈아 보며 이맛살을 찌푸리는 레이몬드의 옆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나는 그의 용모가 참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케니스 경이 잘생겼다고 말하는 귀족 영애들이 이해 가지 않았다.
어째서 레이몬드가 케니스 경보다 인기가 없다는 걸까. 단순히 그가 유부남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레이몬드와 다리아의 관계는…….
“네가 읽을 만한 걸 적당히 추려 봤어.”
레이몬드가 양 팔에 한 아름 서책들을 쌓고서 내게 눈짓했다. 나는 그를 따라 서가 앞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그가 서책들을 한 권씩 펼쳐놓고서 내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이건 동대륙의 신화를 엮은 건데, 두께에 비해 내용이 쉬워서 아이들도 술술 읽을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이건 아스타 제일의 거장 클라인 밀러가 쓴 영웅 도서이고…….”
한 권씩 짚어 주며 설명해 주는 그는 조금 신이 나 보였다. 잠자코 그의 설명을 듣던 나는 조금 난처해진 얼굴로 볼을 긁었다.
“그리고 이건 여류 작가 아멜리아 베니가 쓴…… 왜 그런 표정이지?”
“이렇게 많은 책은 한 번에 읽을 수가 없어요.”
나는 나를 위해 책을 골라 준 레이몬드가 최대한 기분 상하지 않도록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
그가 짧게 탄식하며 입술을 닫았다. 기분이 상한 걸까, 신경이 쓰인 나는 서둘러 그가 추천해 준 책들을 품에 담았다.
“하지만 폐하께서 추천해 주신 것들이니까 모두 읽어 볼게요.”
“아니야, 클로이. 네 말대로 책이 너무 많…….”
그가 나를 만류하려는 찰나, 품에 쌓던 책들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황급히 책들을 붙잡던 그의 손가락이 다시금 내 손끝을 스쳤다. 또 다시 저릿, 하며 손끝을 타고 느껴지는 감각에 나는 들고 있던 남은 책들마저 그대로 테이블 위에 쏟아 버렸다.
“죄, 죄송해요……!”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이리저리 엎어진 책들을 정리했다.
내 맞은편에서 미동 없이 있는 그의 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차마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잔뜩 열이 오른 내 얼굴을 들킬 것만 같았으니까.
“괜찮아.”
한참 뒤에야 그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조금 울상이 된 채로 그를 몰래 힐끔 훔쳐봤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돌린 채, 짧은 헛기침을 해 댔다.
“이건 다 내가 너무 많은 책을 추천해 줘서 널 곤란하게 만든 거니까…….”
그가 느리게 손을 뻗어 녹색 표지의 책 한 권을 집었다.
“모두 가벼운 것들이니 아무 거나 먼저 읽어 봐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레이몬드는 정작 자신이 건넨 책의 제목조차 제대로 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공손하게 양손으로 그가 건넨 책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폐하.”
“그다지.”
그제야 그가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 짧은 웃음소리에 쿵쿵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나는 녹색 표지의 책을 품에 꼬옥 안았다.
* * *
레이몬드가 추천해 준 책은 가벼운 사랑 이야기였다. 요정의 축복을 받은 인간과 인간을 사랑해 버린 요정의 이야기.
작은 역경을 딛고 끝내 이루어지는 그들의 사랑의 결실을 보며 나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니?”
다리아는 내가 읽던 책의 표지를 힐끔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사람이 된 요정 클라라』잖아? 꼭 너처럼 풋풋한 사랑 이야기구나, 클로이.”
“전혀요. 저는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한 클라라처럼 풋풋하지 않아요.”
“네가 내 나이가 되면 그땐 인정하게 될 거야. 지금의 네가 얼마나 풋풋한지.”
고작 일곱 살밖에 차이가 안 나면서, 다리아는 세상 다 산 늙은이의 말투로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내일은 책을 읽고 감상을 들려줘.’
자리를 떠나며 짧게 덧붙이던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생각이 났다. 급한 일이 생긴 것인지, 그는 도서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다시 나갔다.
바쁜 그가 내 책을 골라 주느라 정작 자신이 읽을 책은 빌리지도 못한 채 그냥 나가는 걸 보며 괜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감상이라…….’
나는 가만히 책의 표지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 속의 요정 클라라와 인간 왕의 사랑은 너무나 따뜻하고 간지러웠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풋풋한 사랑이었다.
“그런 유치한 사랑 이야기를 읽을 시간에 나랑 같이 성녀님을 보러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어제 황궁 밖 광장에 다녀온 뒤부터 성녀에 대한 칭송을 늘여놓던 베스티가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베일로 꽁꽁 싸매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실루엣만으로도 굉장했다고.”
아스타의 제국민들은 무려 백 년 만에 등장한 성녀의 존재를 환영했고, 베스티 또한 성녀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어제 점심을 먹고 성녀의 행렬을 보고 온 그녀는 성녀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들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성녀고 뭐고, 귀찮은 일만 잔뜩 생겨 버렸어.”
베스티와 달리 다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당장 열흘 뒤에 성녀를 위한 환영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파티를 준비하는 것은 다리아의 일이었는데, 다리아는 그것을 굉장히 귀찮아했다.
성녀의 출현을 유일하게 반기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리아일 것이다.
짜증스럽게 서류를 넘기던 다리아가 돌연 좋은 생각이 난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봤다.
“흐음…… 그래, 클로이! 너의 역량을 시험해 볼 아주 좋은 기회야!”
“네?”
“성녀를 위한 환영 파티를 네가 이어서 준비해!”
“열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어받아서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내 탄신 무도회도 훌륭하게 준비했잖니.”
그녀의 말에 나는 묘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쩐지 내 능력을 인정받은 기분이 들어 뿌듯해졌는데, 베스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세상에, 다리아 언니!”
가볍게 일거리를 내게 넘기는 다리아를 향해 베스티가 소리쳤다.
“이럴 바에야 그냥 클로이에게 황후 자리를 넘기지 그래요?”
“무능한 사촌 동생은 가만히 있어. 너는 맡기는 일마다 다 망쳐 버리니 하나도 도움이 안 되잖아.”
다리아는 그런 베스티를 무섭게 째려보며 타박했으나, 베스티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들었지, 클로이? 차라리 이번 파티를 망쳐 버려! 그럼 언니도 더 이상 네게 일을 시키지 않을 거야!”
“하지만 성녀를 위한 환영 파틴데 망치면 안 되지 않을까요?”
베스티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내게 외쳤으나, 곧바로 이어진 나의 질문에 두 손을 스르륵 아래로 내려놓았다. 가지런히 무릎 위에 포개어진 그녀의 두 손이 작게 꼼지락거렸다.
“그, 그럼 이번 파티까지만 열심히 하고, 다음 파티부터…….”
“아, 참. 그리고 혼자 준비하기 벅찰 테니 얼마든지 베스티를 부려 먹어도 좋아.”
“네? 나, 나도요?”
다리아가 덧붙인 말에 베스티가 울상이 되어 펄쩍 뛰었다.
“왜 그러니, 베스티. 네가 그렇게 동경하는 성녀를 위한 파티인데, 즐겁지 않아?”
결국 나와 베스티에게 모든 일을 떠넘긴 다리아가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났다.
“어디 가니, 클로이?”
“도서관에요.”
당분간 또 바빠질 예정이니 어제 빌린 책을 미리 반납할 생각이었다. 나는 녹색 표지의 책을 품에 꼬옥 안고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늘도…… 왔을까?’
언젠가부터 그곳에 갈 때면 늘 보였던 남자의 실루엣이 떠오르자 이상하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책을 쥔 손끝에 힘이 가득 실렸다. 그와 함께 책에 대한 감상을 나눌 생각을 하니, 조금 설레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설렘을 비웃듯, 도서관에는 그의 작은 흔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책에 대한 감상을 들려주기로 했는데.
‘바쁜가 보구나…….’
그 순간 아쉬운 마음이 드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느린 걸음으로 책을 반납하고 나오는 내 머릿속에 온통 그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레이몬드는 뭘 하고 있을까.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 틈에 황제궁 근처에 다다른 것을 깨달았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는 그처럼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는데, 돌아온 시간에서는 감히 걸음 할 생각도 하지 못하던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레이몬드를 만났고, 에스델을 만났다. 그리고 카일로스에게 감금당해 내 삶의 마지막을 장식한 곳 또한 이곳이었다.
분명 좋지 않은 기억이 남아 있는 곳임에도 꺼려지지 않는 것은 아마 지금은 여기가 레이몬드, 그 사람이 머물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걸음을 돌리려던 나는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잠깐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그에게 책에 대한 감상을 말해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 이 시각이라면 틀림없이 집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집무실을 찾아가는 건 시종들의 도움 없이도 충분했다. 웅장한 복도를 걷다 보니 저 멀리 레이몬드의 집무실이 보였다.
‘아……!’
눈앞에 보이는 인영에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화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상했다. 그의 뒷모습만으로도 다시 가슴이 뭉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머무르려는 찰나, 그의 앞에 마주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한 내 얼굴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레이몬드가 좋아한다는 은색의 머리칼이 하늘하늘 흩날리고 있었다. 나보다 조금 작았지만 호리호리한 체형을 지닌, 나와 비슷한 실루엣의 여자였다.
나를 발견한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레이몬드의 어깨 너머로 마주친 자수정처럼 붉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너를 대신할 대용품을…….’
죽은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강타했다.
카일로스는 나의 대역 같은 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저기, 레이몬드의 앞에 나와 닮은 여자가 서 있었다.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내가 만들어 낸 너의 모습을 사랑하는 거야…….’
나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부터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나의 존재 자체가 그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네가 아니더라도 어떤 여자든…….’
그러니 내게 쏟아졌던 레이몬드의 해일 같은 사랑 또한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었다. 모두 카일로스가 빚어 낸 모래성이었다.
‘……황제는 널 사랑하지 않아…….’
레이몬드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가 만들어 낸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거야.
머릿속에 각인된 명제가 진득한 공포심에 달라붙어 내 몸을 감쌌다.
“클로이……?”
여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내내 여자를 향해 있던 레이몬드의 몸이 나를 향해 움직였다. 레이몬드는 내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몰랐던 듯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황제의 사랑은 거짓이야…….’
나도 알아! 그만 말해!
‘……너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야…….’
싫어!
“클로이?”
레이몬드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려 할 적에, 나는 몸을 돌리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카일로스의 저주와도 같은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아서 미칠 것 같았다.
시간을 돌아온 직후, 나는 줄곧 생각했다. 더 이상 레이몬드와 엮여서는 안 된다고. 나의 불행에 그를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그러니 나는 감히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한차례 죽음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레이몬드를, 나는 어떻게든 밀어내고 외면하고자 했다.
그리고 레이몬드, 그 눈물 나게도 다정한 남자는 내가 의식하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모른 척해 주었다.
그래서 나 또한 모른 척했다. 나를 향하던 그의 마음은 너무나 크고 부담스러워서, 회피하는데 급급했다.
그러나 무심하게 마주칠 때마다 언뜻 내게 닿는 시선들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사람이 없는 외진 담장 아래에 쭈그려 앉아 몸을 웅크렸다. 나와 닮은 실루엣을 지닌 여자…… 레이몬드는 이제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걸까?
그의 어깨 너머로도 얼핏 느껴지던 당당한 태도가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였다. 예쁘장한 얼굴과 몸 외에는 가진 것도 없고 우울하기만 한 나와는 달랐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도 못났구나. 그는 나를 사랑해선 안 된다고, 나 역시 그를 사랑하여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그를 외면하였으면서, 막상 그가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꼴이란.
아니야, 나는 레이몬드를 걱정해서 그래. 만약 그 여자가 정말로 카일로스의 대역이면 어떡해?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여자잖아.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레이몬드를 말려야…….
아니, 아니야. 이건 결국 다 그를 기만하는 거야. 그에게 나와 엮이지 말라고 당부했으면서, 결국 그가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게 두려워서, 그래서…….
“클로이!”
밭은 숨소리와 함께 나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놀라 무릎 위에 파묻혀 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내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레이몬드였다.
“무슨 일이냐? 왜 그렇게 놀란 얼굴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쭈그려 앉은 그가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쥐었다. 내 얼굴을 쓸어내리는 두터운 손바닥에 말간 눈물이 묻어났다.
“어디가 아픈 건…….”
걱정이 가득한 눈동자가 내 심장을 쿡쿡 찔러 왔다.
레이몬드, 당신은 대체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예요? 묻고 싶은 것은 한가득이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뿐이었다.
“클로이?”
“폐하…….”
나는 그것이 욕심인 걸 알면서도 물었다.
“그 여자는 누구예요?”
“여자? 성녀를 말하는 것이냐?”
“성녀, 라고요?”
“그래. 올봄의 축일을 위해 라미에 교단에서 보낸 성녀야.”
성녀…… 라는 말에 긴장이 탁 풀렸다.
그러니까 레이몬드는 성녀를 만나고 있었던 거구나. 나를 대신할 여자를 찾은 게 아니라, 아스타 제국의 황제로서…… 성녀를…….
“혹시나 그 여자가 네게 무슨 짓을 했나?”
“아니요.”
금방이라도 그 여자에게 뛰어가 화를 낼 것 같은 그를 보며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시켜 드려 죄송해요.”
“클로이, 너를 힘들게 하는 게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내게 말해. 그 상대가 대공이든, 교단이든, 혹은 어느 누구든. 너의 적은 모두 나의 적이니까.”
레이몬드는 내 어깨를 단단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외면하던 진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두 손바닥 위로 얼굴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차마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이건 단순히 나와 닮은 여자의 존재로 인한 상실감이 아니었다. 카일로스가 대역을 마련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오로지 분노와 허무였다.
그러나 방금은 달랐다.
레이몬드가 나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 내 정신을 잠식한 것은 미묘한 두려움, 공포, 그리고…… 질시.
그 조악한 감정들을 직면하며 나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나.
“클로이? 클로이……?”
그가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천천히 손을 떼고 고개를 내밀었다.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매가 미세하게 늘어져 있었다.
“너, 얼굴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입을 떼며 그가 내 얼굴을 쓸었다.
“지나치게 뜨거워.”
“…….”
“열꽃이 핀 것처럼 뺨이 붉어. 아무래도 의사를…….”
“아니에요.”
개미처럼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를 만류했다. 의사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지금 나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막 그를 사랑한단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염치없게도.
* * *
“그…… 성녀에게 다시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마냥 가볍지만은 않을 내 몸을 가뿐하게 안아 든 남자를 향해 소심하게 물었다. 사실은 그가 다시 성녀에게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네 상태가 이런데, 내가 어떻게 널 두고 가겠어.”
“…….”
주인을 닮아 염치없는 심장이 쿵쿵거리며 존재를 알려 댔다. 그의 다정한 면모들을 발견할 때마다, 나의 심장은 마치 인간 왕을 사랑했던 요정 클라라의 것처럼 풋풋한 내음을 풍겨 대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감히, 어떻게 감히 이 남자를 사랑한단 말인가. 주제도 모르고, 염치도 없는, 뻔뻔한 클로이 가넷슈.
“표정이 나아지질 않는군. 역시 의사를 불러야겠어.”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거듭되는 나의 만류에 그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꿈틀 솟았다.
“지금 어딜 봐서 네가 괜찮다는 거지? 이런 식으로 자꾸 사람을 속이는 건 곤란해.”
“……제 상태가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어서 그래요.”
그의 시선을 피해 두 눈을 내리깔았다. 몰아치는 감정에 힘을 잃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유?”
그가 대답을 바라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아마도 당신을 사랑해서 그러노라고,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쿵쿵 뛰는 심장의 울림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 내게 닿았던 작은 온기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 결국 이름을 지어 주고 마음을 내어주었던 그때처럼 말이다.
대체 언제부터? 나는 언제부터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거지?
슬쩍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음에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를 볼 때면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는 알아채지 못했던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숨이 벅차곤 했다.
그의 눈부신 외모와 다정한 면모를 알아보지 못하는 다른 귀족 아가씨들이 미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모든 걸 나만이 알고 싶다는 욕심이 불쑥 치밀 때가 많았다.
‘너조차도 너를 용서할 수 없다며. 그럼 나라도 너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거잖아.’
불현듯 다리아의 생일날, 내게 쏟아지던 그의 고백이 떠올랐다.
‘내가 나를 아주 잘 아는데 널 사랑하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야.’
그는 그토록 절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사랑해, 클로이.’
한차례 배신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다행이군. 형님이 너만은 죽이지 않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그는 항상 그런 남자였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나를 더 걱정해 주던 남자였다.
‘그래도 나를 위해 울어 주는 네가 있어.’
나를 안심시키듯 미소 짓던 그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여전히 나를 걱정하며 찌푸리고 있는 그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너는 나와 엮이면 안 돼.’
자신이 아닌, 나를 위해 자신과 엮이지 말라 했던 남자다. 이 남자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클로이 가넷슈가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를 사랑하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코 내가 사랑해서는 안 되는 남자는, 늘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얼굴로 내 앞에 있었으니까.
“폐하.”
그를 부르는데 이상하게 목이 멨다.
“폐하는 어째서 저를 사랑할 수 있는 거지요?”
내 물음에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가 시간을 거슬러 왔음을 밝힌 이후로, 우리 두 사람이 줄곧 외면했던 화두였다.
“저는 폐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예요.”
“그 자격을 정하는 사람이 누구지?”
“제가 폐하께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시잖아요.”
“이미 너를 용서했다고 했어.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지.”
레이몬드는 조금 언짢은 표정으로 말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정면을 보며 걷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나는 안다. 그건 어쩌면 그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나는 그가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여자였다. 만약 카일로스가 선택한 여자가 내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레이몬드는 그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다리아의 생일날 보았던 카일로스와 함께 있던 나의 ‘대역’이라던가. 혹은, 아까 전 그와 마주서 있었던 교단의 성녀라던가.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나는 그의 팔을 꼬옥 붙잡았다. 내내 정면만 보던 그가 나를 힐끔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러느냐, 클로이.”
목소리는 딱딱했지만, 그 안에 어렴풋이 담겨 있는 애정은 여전히 깊었다. 나는 흐리게 웃으며 그의 팔을 붙든 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그냥, 붙잡고 싶었어요. 그러면 안 되나요?”
“물론,”
레이몬드가 피식 웃자, 그의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사라졌다. 그 자그마한 변화에도 내 심장은 거세게 들썩였다.
“내 모든 것 중 네게 허락되지 않은 건 단 하나도 없어.”
“참 이상한 확신이네요.”
“확신하지 않을 수 없지. 말했잖아,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남자라고.”
“…….”
조금씩 내 방이 가까워지려 했다. 나는 이제 그만 그에게 내려달라 말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이 모습을 다리아나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게 부담스러웠다.
“너는 자꾸 사랑의 자격을 논하는데, 세상 어디에도 그런 자격은 없어. 사랑을 하는 것도, 사랑을 받는 것도.”
“저 같은 사람에게도요?”
“너 같은 사람?”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친 그가 내 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빈 침대 위에 나를 내려 주고서 그가 비싯 입술을 말아 올렸다.
“너처럼 작고,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일컫는 건가?”
“네?”
“그렇다면 충분히 의문을 품을 수 있겠군. 너처럼 사랑스러운 여자를 감히 내가 사랑해도 되는지, 나도 가끔은 내 자격을 의심하게 되거든.”
“그,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서 외쳤다. 이제 갓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은 상대에게 듣기에는 지나치게 치명적인 대사였다.
“네가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학대, 받으며 자랐다고 들었어.”
그가 생각하기 싫다는 듯 어금니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흠칫 놀랐을 법한 표정에도, 나는 더 이상 그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섹시하고 매력적이라 느껴졌다.
다만,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그가 안다는 게 조금 창피했다.
“그리고 네가 오랫동안 사랑해 왔던 남자는, 음…….”
이번에는 말도 꺼내기 싫었는지 이를 악물며 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클로이.”
그가 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내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투박하고 거친 손은 딱 그와 어울리는 온도를 갖고 있었다. 모든 것을 태울 듯이 끓어 넘치는 뜨거운 온도.
“나의 사랑이 네게 부담이 될 거란 걸 알아. 그러니 네게 그것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렇지만…….”
곧은 눈동자를 직시하며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짧은 숨을 삼켰다.
“네가 너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어. 이제까지 몰랐다면, 내가 그걸 가르쳐줄게.”
“내가…… 나를 사랑해도 될까요?”
그것은 에스델이 나왔던 꿈속에서 지쳐 있는 나를 보며 줄곧 내가 바라 왔던 일이다.
“그럼.”
그가 진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신이 없어요. 그렇지만 폐하가 허락해 준다면…….”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오직 그의 허락만이 필요했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내게 사랑을 논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
“나도 나를 사랑해 볼래요.”
그렇게 말하는 내 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훌륭해, 클로이.”
그가 칭찬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리고 네가 너를 사랑하는 데 성공한 뒤에는…….”
레이몬드는 뒷말을 삼키며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가 삼킨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나, 차마 아는 체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기에는 아직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던 탓이다.
* * *
아침햇살을 받으며 들어 올리는 눈꺼풀이 어쩐지 유독 무겁지 않은 날이었다. 나를 사랑해 보기로 결심한 탓일까,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거리고 내딛는 발끝이 경쾌했다.
작은 노크 소리에 문을 여니, 황제궁의 시종장이 편지를 건네주었다. 겉면에 찍힌 인장이 발신인을 짐작케 해 주었다.
나는 감사를 표한 뒤 문을 닫고 돌아섰다. 느리게 심호흡을 하며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그를 닮아 미려한 글씨체가 나를 반겼다.
[안녕, 클로이. 너는 지금쯤 혹시나 종이가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세심한 손길로 겉봉을 뜯었겠지. 나는 너의 그런 세심함을 사랑해. 처음 너를 황궁 마차에 태워 보내던 날, 마차를 이끌 말의 머리 위에 내려앉아 있던 차가운 눈을 털어주던 너의 세심함을 기억해. 언제나 너보다는 다른 생명을 배려하고 살피던 너의 세심함을 사랑해. 그러니까 오늘은 그 세심한 손길로 전해 줄 너의 답장을 기다리며 행복한 하루를 보낼게.]
그와 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었나. 새삼 그의 기억력에 감탄하며 그가 보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 내용을 모두 곱씹을 수 있게 되었을 즈음에야, 나는 반복하여 읽던 것을 멈추고 그의 편지를 가슴에 품었다.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매일 빠뜨리지 않고 알려 줄게. 내가 클로이 가넷슈를 사랑하는 이유를 꼽으라면 백 가지, 아니, 천 가지도 넘게 늘어놓을 수 있으니까.’
설마, 정말 이런 식의 편지를 천 통 가량 보낸다는 건 아니겠지. 미심쩍어하면서도 입가에 감도는 미소를 지울 길이 없었다.
잠시 고심하던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종이와 펜을 꺼내들었다. 사각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 * *
종교를 믿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스타 제국은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라미에 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으나, 카일로스 같은 귀족들에게 교단은 종교라기보다 하나의 정치 세력이었다.
순수하게 종교를 믿는 이들은 대다수의 가난한 평민들이었지만, 가난보다 더 큰 불행을 감내해야했던 내게는 그만큼의 순진함조차 없었다.
카일로스는 내게 종교를 믿지 말라 말했다. 내가 믿어야 할 것은 오로지 카일로스였다. 그 외의 것을 신봉하는 것은 그에 대한 죄악이었다.
“폐하께서는 종교를 믿나요?”
그가 나를 사랑하는 일곱 번째 이유를 알려 주겠다며 불러낸 황궁의 온실에서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레이몬드는 나의 눈동자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를 담으며 아름다이 휘는 내 눈동자를 사랑한다고 했고, 이따금씩 마주칠 때면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하는 수줍은 눈동자를 사랑한다고 했다. 보석처럼 붉은 빛깔의 눈동자를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사랑스러운 것은 내 것이 아닌 그의 눈동자였다. 언제나 짙은 열망을 담으며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마주 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 곧은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나도 그의 눈동자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글쎄. 딱히 신의 존재를 믿은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조금 믿고 싶어.”
그가 화염처럼 붉은 두 눈을 잔잔하게 휘며 답했다.
“왜요?”
“널 다시 만나게 해 주었으니까.”
굵은 손가락이 내 머리끝을 매만졌다. 그의 손이 닿은 머리카락이 간지럽다고 느껴진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말이 안 되는 소리겠지. 신경도 없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울 리 없으니까. 아마도 간지러운 것은 내 마음일 것이다.
“정말 신이 계셔서 시간을 다시 되돌려 주신 걸까요?”
“신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널 다시 만나게 해 준 주체가 있다면, 설사 그것이 이단의 신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에게 내 믿음을 바칠 거야.”
낯간지러운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는 그는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의 그와 닮아 있으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내게 쏟아지는 과분한 찬사들에 가끔은 쥐구멍을 찾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쁜 모양이군. 나를 만나러 오면서까지 서류들을 놓지 못하는 걸 보니.”
그가 내 손에 들린 서류 뭉치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황제인 나보다도 바쁜 것 같아, 클로이. 아무래도 다리아가 너를 혹사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드는군.”
“그렇게 많이 힘들지 않아요. 저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기쁘고요.”
변명이 아니었다. 정말로 다리아가 맡긴 일들을 처리할 때면 나도 가치가 있는 인간이란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더 이상 고장 난 인형이나 쓸모없는 체스 말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당당해지는 나를 느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조금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던 레이몬드가 불쑥 내게 서류를 달라했다.
“나름 제국 최고의 결재권자야. 서류를 검토하는 데는 이골이 난 몸이니까, 내가 살펴 주는 게 네게도 썩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럼 부탁드려요.”
나는 사양하지 않고 그에게 서류들을 내밀었다. 내가 완성한 계획안을 그가 읽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강해졌다.
“으음, 훌륭해.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한 계획안이야. 그런데 이 부분.”
그가 계획안의 몇몇 페이지들을 짚으며 고쳐야 할 부분들을 세심하게 일러주었다. 묵직하게 깔리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그의 모습을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내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세심함을 사랑한다고 했던가. 모호하던 문장들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도 그의 세심함에 반해 버렸으니까.
“클로이?”
“아…… 죄송해요. 듣고 있었어요.”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그가 설명해 준 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열성을 다해 귀 기울였다.
“고마워요, 폐하.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돌려받은 서류들을 품에 안았다. 잠시 멍하니 나를 보던 레이몬드가 이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초안이 훌륭해서 그다지 손볼 부분도 없었어.”
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렇게 있으니 정말로…… 사랑받는 느낌이 들었다.
열이 올랐다. 아마 지금쯤 내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붉어진 얼굴로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크흠…….”
잠시 멈칫한 그가 손을 거두며 헛기침을 한번 했다.
“뭐, 기대되는군. 네가 준비한 행사…….”
“네, 꼭 기대에 부합하는 멋진 행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레이몬드는 알까. 그가 무심코 건넨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 * *
성녀를 환영하기 위해 개최된 행사였다. 백 년 만에 출현한 성녀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귀족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성녀를 보며 그녀의 존재에 한 번 감탄하고, 하나의 부족함도 없이 완벽한 환영 행사에 두 번 감탄하였다.
클로이는 한구석에서 그 모습을 감상하며 알코올이 들어 있지 않은 달달한 샴페인을 홀짝였다.
“드디어 레이디 가넷슈가 샴페인의 맛을 알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로군요.”
“안녕하세요, 빈센트 영식.”
나는 어느 틈에 내게 다가와 샴페인 잔을 부딪치는 남자를 보며 빙긋 웃었다.
“어째서 성녀께 가 보지 않고 이쪽으로 오셨나요?”
“성녀님께 말을 한번 걸어 보고 싶었는데, 보이는 것처럼 경쟁자들이 만만치 않아서요.”
그의 말마따나 성녀의 주위를 에워싼 귀족들로 인해 이곳에서는 그녀의 반짝거리는 머리카락 몇 올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마주친 성녀는 잠시나마 그녀를 여자 대 여자로서 견제했다는 사실이 우스울 정도로 앳된 외양을 지닌 소녀였다. 열넷, 혹은 열다섯. 많이 보아야 열여섯?
그러나 앳된 외양과 달리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는 황후 다리아 못지않았다. 아니, 그녀의 위압감은 다리아보다는 오히려 레이몬드의 것을 닮아 있었다.
“정말 굉장하지요? 이 사람 많은 사교장에서도 주눅 한번 들지 않는 모습이라니.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듯한데 말예요.”
다른 젊은 귀족들이 모두 그러하듯, 빈센트 영식 또한 성녀가 있는 곳을 향해 동경이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게요. 정말, 굉장해요.”
나는 성녀가 처음 연회장에 발을 들였을 때를 떠올리며 맞장구쳤다.
성녀의 도착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을 때,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입장하는 성녀를 바라봤다.
무심하게 주위를 훑어보는 시선과 그 끝에 떨어지는 작은 웃음소리,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걸어가는 우아한 걸음걸이까지. 그녀의 모든 동작은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당기기에 충분했다.
‘성녀 레테, 라나 신의 뜻을 받아 걸음 했습니다.’
황제의 앞에서도 허리를 숙이지 않으며 성녀는 당당한 자태로 서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아스타 제국과 제국의 주인에게 라나 신의 축복이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권태로운 표정으로 황금 의자 위에 앉아 있던 레이몬드는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제국의 주인된 자가 라나 신의 딸에게 무한한 영광을 바치오.’
짙게 깔리는 저음에 먼 곳에서도 가슴이 술렁거렸다.
혹시나 다른 이들이 그의 모습에 반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 둘러보았으나, 다행히도 모두들 성녀에게 정신이 팔려 그를 보지 않았다.
기실 성녀는 이 자리에서 레이몬드만큼, 아니, 레이몬드보다 더 주목받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연회장 구석에서 홀로 샴페인을 홀짝이며 레이몬드를 감상할 수 있었다.
간간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두 뺨 위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으나, 상관없었다. 누군가 물어보면 샴페인 탓이라고 둘러 댈 생각이었다. 비록 내가 마시는 샴페인엔 알코올이 없었지만.
그렇게 나는 오직 나만이 느끼는 은밀함을 즐기는 중이었다. 빈센트 영식이 말을 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성녀님께 말을 붙여 보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 음? 성녀님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 그러게요.”
시선이 마주쳤다고 생각되던 순간, 성녀가 주위를 물리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순식간에 나와 빈센트 영식은 당황하여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클로이!”
성녀가 내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며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레이몬드의 집무실 앞에서도 꼭 저렇게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정말 보고 싶었어!”
내내 사람들 위에 군림하듯 위엄 있는 모습만 보여 주던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친근감이 느껴지는 그 행동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경이로운 시선을 보내 왔다.
“저를…… 아시나요?”
그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서 나는 성녀에게 붙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성녀는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욱 강하게 붙잡으며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응, 물론이지! 아주 잘 알지!”
“네……?”
나는 성녀를 몰랐다.
나보다 조금 작고 가느다란 실루엣에 긴 은발과 붉은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적안까지. 나와 닮은 외양을 지녔으나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여자는 한 번 보았더라면 결코 잊지 못했을 법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레이몬드나 다리아나 에녹 경 같은…….
“아…… 클로이는 나를 모르지요…….”
“그럴 리가요. 라나 신의 축복을 받은 성녀님이잖아요.”
성녀는 어쩐지 씁쓸하게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한결 침착해진 얼굴로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제 환영 파티를 준비해 주신 분이 클로이라고 들었어요. 아, 클로이라고 불러도 괜찮지요?”
“성녀님이 그리 불러 주신다면 제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지요.”
나는 어색하게 답하며 주춤거렸다. 그러나 성녀는 내가 뒷걸음질 치지 못하게 내 손을 꼬옥 붙들며 잡아당겼다.
“내 이름은 레테예요.”
조심스럽게 내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어 낸 그녀가 내 손바닥 위로 손가락을 내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름자를 손끝으로 한 글자씩 천천히, 써내려 갔다.
“레테(L-e-t-h-e-s).”
손바닥 위로 내려앉는 그녀의 알파벳에서 알 수 없는 그리움의 향기가 느껴졌다. 물끄러미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불쑥 고개를 들어 올리자 뿌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가 있었다.
“내 이름, 불러 주지 않을래요?”
나보다 조금 앳된 얼굴이 한껏 기대를 품은 채 살짝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입술을 뗐다.
“레테……?”
내 입 안에서 완성된 이름에 레테는 흐드러진 함박웃음을 걸치며 기뻐했다. 웃는 얼굴이 지나치게 예뻐서일까. 나와 닮은 얼굴에 거부감보다는 이상하게도 묘한 애틋함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읊조렸다.
“……레테.”
“정말이지, 너무 행복해요!”
레테가 양손으로 깍지 끼며 내 오른손을 꼬옥 붙잡았다. 두 눈을 글썽이며 양 볼을 붉히고 있는 그녀는 글로아 백작 영애보다도 훨씬 더 부담스러웠다.
“클로이는 어쩜 이렇게 친절하지요? 딱 제가 상상했던 그대로예요!”
“저는 이름을 불러 드린 것밖에 한 일이 없는데…….”
“제 손을 잡아 주고 계시잖아요!”
나는 뻘쭘해진 얼굴로 그녀에게 붙잡힌 내 손을 쳐다봤다. 이건 아무리 보아도 그녀가 일방적으로 나를 붙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저를 이전부터 알고 계셨나요?”
“네.”
내내 미심쩍었던 것을 묻자, 그녀의 눈이 푸스스 흩어졌다. 누군가를 닮은 듯한 눈웃음이었는데, 누구인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 중에 클로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클로이의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어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
나는 점점 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 카일로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를 알던 사람은 카일로스 밖에 없는데.
설마 그녀는 지금 내게 경고하는 건가? 자신이 카일로스의 사람이라고? 그럼…… 정말로 레테가 카일로스가 보낸 대역? 하지만 레이몬드를 유혹하기 위한 대역이라기엔 너무 어린데?
“한 번만…….”
머리가 핑핑 도는 의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내게 그녀가 수줍게 말을 붙였다.
“안아 주면 안 돼요?”
“네?”
“아, 아니에요!”
레테는 허둥지둥 손사래를 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었다. 방금 분명 안아 달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미묘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라미에 교의 성녀는 지금 굉장히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 보였던 그 신비롭고 위엄 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수줍은 소녀의 흉내를 내는 것이 보통 심상치 않았다.
더욱 의아한 것은 주위의 사람들이 그런 그녀의 언동에 아무런 의문을 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점이었다.
방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빈센트 영식마저 그렇게 고대하던 성녀와의 만남을 제쳐 두고 저 멀리서 다른 이들과 대화를 주고받지 않은가. 성녀가 무슨 요술을 부린 걸까?
그렇게 의심이 점차적으로 살을 불려 나갈 즈음에 레테가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저어…… 클로이…….”
그녀가 나를 향해 자그마한 정수리를 들이밀며 말했다.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요?”
아주 조금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고개가 추욱 아래로 늘어졌다.
“아무래도 힘든 부탁이지요? 어…… 음……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었거든요. 그래서 꼭 어머니 같은 사람들만 보면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부탁하게 돼요.”
“아…… 그렇군요.”
어머니 같은 사람이라기엔 우리는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았지만. 나는 떨떠름하게 답하며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풀이 죽어 있던 그녀가 금세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저도 클로이의 머리카락을 만져 봐도 되나요?”
“……네. 그러세요.”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레테가 손끝을 바르르 떨며 내게 뻗었다. 마치 성물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그 태도에 나도 덩달아 조심스러워졌다.
레테는 조금 이상했다.
그러고 보면 레이몬드가 추천해 주었던 요정 클라라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성직자도 굉장히 독특한 사고방식을 지닌 남자였다. 어쩌면 신을 모시는 사람들은 모두들 보통 사람들과 살짝 다른 사고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여전히 성녀에 대한 의혹을 지우지 못한 채 내 머리카락을 성스럽게 쓰다듬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 *
줄곧 밤에 치러지던 다른 사교 행사들과 달리, 오전부터 시작된 성녀를 위한 환영 행사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연회장 내의 사람들은 계속 바뀌었지만 그녀를 보기 위해 수많은 귀족들이 지방에서부터 올라온 까닭에 행사는 끝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레테는 아까 내게 보였던 아이 같은 모습이 거짓말인 듯 고고하게 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로 인해 나는 긴장의 끈을 한 시도 놓지 못했다.
그녀가 잠시 연회장 밖으로 사라진 사이, 나는 피곤해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테라스로 나갔다.
바람을 쐴 심산으로 창을 활짝 열고 난간에 몸을 기댔다. 어느덧 다가온 완연한 봄 내음이 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춤을 췄다.
“피곤한가 보군.”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기척 없이 다가온 레이몬드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폐하, 이곳은 어떻게……?”
“네가 나가는 걸 보고 곧바로 뒤따라 왔지.”
그는 턱 끝을 슬쩍 들어 올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지극히 그다워서,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힘들진 않나? 들어가서 쉬어도 될 텐데.”
“아니요. 제가 준비한 행사잖아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켜야지요.”
“그럼 나도 끝까지 함께해야겠군.”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옆을 지나쳐 난간 앞에 섰다. 나도 그를 따라 몸을 돌리며 난간 위로 손을 얹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폐하께서는 먼저 들어가셔도 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나도 그러고 싶지만.”
난간 위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괸 레이몬드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른하게 휘는 눈동자가 나를 잡아먹을 듯 짙은 시선을 보내 왔다. 난간 위로 얹은 내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걱정되어서.”
“걱정이라니요. 황후 폐하도 계시고, 다른 분들도 많은걸요.”
“그래서 더 싫은 거야. 자꾸만 다른 이들의 시선이 네게 닿거든. 아까도 그 성녀라는 여자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던 것 같은데.”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 같은 그의 발언에 나는 숨을 꼴깍 삼켰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날 이후로, 그는 늘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곤 했다.
‘황제는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정말? 정말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이렇게 짙은 애정을 숨기지 않고 내게 주는데?
‘네가 아니더라도 어떤 여자든, 내가 만들어 내보였을 여자를 사랑했을 거야.’
하지만, 나와 닮은 여자를 보고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잖아. 그렇게 걱정하던 내 마음이 우스워질 정도로, 그는 이렇게 굳건한데.
묻고 싶었다. 폐하는 정말 나를 사랑하나요? 혹시 카일로스가 만들어낸 내 모습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닌가요?
그런데 만약 그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 거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혹은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한 거였다고 하면?
나를 사랑하는 그에게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에게도, 나는 어떻게 답해 주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이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걸까?”
나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짧은 시간 동안 넋을 놓은 채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클로이.”
그가 푸스스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또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나?”
“…….”
“다른 건 생각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는 너를 사랑하는 데에만 집중해.”
드문드문 굳은살이 박인 그의 손바닥 위에서 하늘하늘한 머리카락이 은사처럼 흩어졌다. 그가 잔잔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도 몰라보고, 다른 무엇을 사랑할 수 있겠어.”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그거 제게 하는 말씀인가요?”
“물론.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사람인데, 너만 모르고 있잖아. 바보 같이.”
“바보라니요. 그건 제가 아니라…….”
차마 내가 아닌 당신이라고 말할 수 없어서, 나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그런 내 모습을 내려다본 레이몬드가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다리아가 불평하던데. 네가 점점 당돌해져서 놀리는 맛이 없다고.”
“하지만 폐하께서는 지금 저를 놀리고 계시잖아요.”
“나는 네가 여기서 더 당돌해졌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참지 말고 터뜨려.”
“저는 폐하가 아니라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목이 달아날 지도 몰라요.”
“걱정 마. 내 앞에서 하는 말은 모두 비밀로 부쳐 줄 테니까.”
나는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방금 내게 하려던 말이 뭐지?”
그는 꼭 나를 놀리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들으면 후회하실 텐데.”
“후회하지 않아.”
“정말이지요?”
“물론.”
단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말에 나는 잠시 숨을 한 번 몰아 내쉬고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는 제가 아니라 폐하예요.”
이런 말을 들으면 그가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황제로 지내 온 그가 듣기에 상당히 무례한 언사였으니까.
“그 말이 그렇게 하고 싶었어?”
그러나 그는 나의 예상과 달리 피식 웃으며 물었다.
“기분, 안 나쁘세요?”
“나쁘지 않아. 오히려,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어.”
히끅! 그 말에 나는 그만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내내 여유롭게 미소 짓던 그가 멈추지 않는 내 딸꾹질에 놀라 등을 쓸어 주었다.
“괜찮으냐, 클로이?”
“네, 네…….”
나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폐하께서는……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낯간지러운 말씀을 잘 하셔요.”
“음…….”
귓불이 살짝 붉어진 레이몬드가 자신의 볼을 긁적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이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늘 옆에서 일깨워 줘야 한다고. 그래야 너도 널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자연스럽게…….”
레이몬드의 말이 조금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도 내 말에 조금 당황했나 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요?”
“라트 후작이.”
“믿을 만한 조언인가요?”
“아마도……?”
나는 황제의 보좌관이던 단정하면서도 차가운 인상의 남자를 떠올렸다.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전혀 관심 없을 것 같아 보이던 남자였는데, 어쩐지 레이몬드에게 잘못된 방법을 가르쳐 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레이몬드를 보니, 그 또한 나와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나 보다.
“하지만…….”
그가 손끝을 작게 꿈틀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도움이 되는 거라면 무엇이든 다 해 볼 거야.”
나를 피하던 눈동자가 다시금 나를 담으며 마주쳤다. 레이몬드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고마워요, 페하.”
나는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향해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예전 같았더라면 그의 넘치는 마음이 부담스러워 도망쳤겠지만,
“정말, 정말로 고마워요.”
이제는 기꺼이 받아들일 참이었다. 나를 위한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 * *
은은한 봄 공기가 나른하게 감싸주는 테라스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슬슬 들어가 봐야 할 때였다.
사실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건 내 몸을 따스하게 감싸 주는 봄 공기보다도 내 마음을 뜨겁게 데워 주는 이 사람 때문일지 모른다.
“먼저 들어가.”
둘 다 이만 들어가야 함에도 선뜻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미적미적 시간만 보낼 적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는요?”
“나는 곧 뒤따라가도록 하지. 네가 걸은 길을 따라 걷는 건, 내게 굉장히 큰 즐거움이니까.”
“네, 그럼 조금 더 쉬다 오셔요.”
나는 짧게 숨을 참았다 내뱉은 뒤, 천천히 인사를 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 의식하며 반응하는 내 몸이 얄미웠다.
이번에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길 바라며 몸을 돌리는데 바람결에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 하나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그때도 너의 뒤를 따랐었는데.”
그가 말하는 회상하는 ‘그때’란 아마도 신년 무도회일 것이다. 지금의 시간에서는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지만 한차례 시간을 돌아온 우리에겐 아주 먼 옛일일 수밖에 없는 과거였다.
그날도 그는 쉬기 위해 테라스로 몸을 피한 내 뒤를 쫓아왔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나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의 짙은 열망이 섞인 손길에도 당황하지 않았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눈빛 한 줄기 목소리 한 가닥에도 심장이 거세게 뛰어 댔다. 카일로스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과거에도 이처럼 반응하지는 않았는데.
나는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잔영을 지워 내기 위해 애를 쓰며, 연회장 내로 돌아가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외진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는 나를 알아보지 못해.”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내 발길을 붙잡았다.
“전혀 못 알아봐.”
그것은 마치 어린 여자 아이의 울음소리 같아서, 나는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거슬러 온 시간 속, 카일로스에게 빼앗겼던 나의 아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없는 사람인 거야.”
“울지 말아요, 레테.”
레테……? 예상치 못한 성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제야 그 방이 성녀를 위해 마련된 휴게 공간이란 걸 깨달았다.
“그녀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그녀가 레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려 드렸잖아요.”
“나도 알아. 하지만 속상하단 말이야.”
함께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굉장히 익숙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사실은 안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안기고 싶었는데.”
“제가 대신 안아 줄게요.”
잔잔하게 달래는 남자의 목소리에도 서럽게 섞여 있는 울음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를 조금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눈동자에 의심이 있었어.”
“그럴 리가요.”
그 서러운 훌쩍임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나는 노크를 했다.
“이건 다 카일로스 때문이야! 카일로스를 죽여야 해!”
문을 두드리던 내 손이 우뚝 멈추었다. 동시에 나의 노크 소리를 들은 방 안에서도 적막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노크를 하다 말고 문 앞에 굳어 있는 찰나, 삐거덕거리며 문이 열렸다.
“레이디 클로이……?”
“에녹 경……?”
나는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고서 멍청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에녹 경 또한 문을 두드린 이가 나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굉장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 너머로 작은 소파 위에 앉아 있는 나와 닮은 소녀가 보였다.
“크, 클로이……!”
성녀 레테가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울음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노크했어요. 에녹 경이 왜 여기에……?”
“아…….”
에녹 경은 말끝을 흐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언제나 침착하고 단정하던 그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에녹 경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안쪽으로 손짓했다. 내가 발을 딛자 곧바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저…… 혹시 행사에 문제라도 있었나요?”
나는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는 레테의 맞은편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아니요.”
개미 소리처럼 자그마한 목소리로 레테가 대답했다. 목소리 사이로 훌쩍, 하고 콧물 훔치는 소리가 섞였다.
레테는 귀족들 앞에서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직 여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분명 잘못 듣지 않았다. 내가 노크를 할 적에 그녀는 카일로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카일로스가 보낸 나의 대역일까? 에녹 경과 함께 있는 것도 그 이유이고?
나를 알고 있던 것도, 어쩌면…….
미묘하게 내려앉은 방 안의 분위기를 살피며 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레테, 혹시 당신은 카일로스와…….”
“아니에요! 나, 나는 절대 나쁜 말 안 했어요!”
레테가 두 손을 불끈 말아 쥐며 외쳤다. 그 바람에 눈물로 얼룩덜룩 젖은 얼굴이 드러났다. 눈가가 발갛게 부어 있었다.
그녀는 앞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함께 가슴이 시큰해지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절대 나쁜 말은 안 했어요.”
레테는 또다시 훌쩍, 소리를 내며 우물쭈물 내 눈치를 봤다.
“카일로스라는 이름을 들은 것 같았는데…….”
“아, 그게…….”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 레테가 눈동자를 데루룩 굴렸다. 보다 못한 에녹 경이 그녀의 한쪽 어깨 위로 손바닥을 얹으며 대신 답해 주었다.
“의심은 놓아도 됩니다, 레이디 클로이. 성녀는 우리의 아군입니다.”
“아군…… 이라고요?”
“네, 성녀께서는 레이디 클로이가 루드비히 대공 전하로부터 벗어나게 돕고자 하는 우리의 아군입니다.”
“어째서요?”
나는 오늘 처음 통성명을 한 성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레테는 한결 진정이 된 얼굴로 두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카일로스가 내 가족을 죽였어요.”
이번에는 에녹 경이 아닌 레테가 직접 대답했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유독 침통하게 들렸다.
“아…….”
나는 반 박자 느리게 탄식했다.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네요.”
차마 더 캐물을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묵직한 고요가 숨통을 답답하게 억눌렀다. 레테의 어두운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 왔다.
나는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깨고 싶었다.
“그럼 저에 대해 잘 안다는 사람이 에녹 경인가요?”
“아, 네……! 에녹이 클로이의 이야기를 많이 해 줬어요!”
곧바로 전환된 화제에 레테가 표정을 밝히며 답했다.
“클로이를 항상 만나고 싶었어요. 에녹이 말해 준 클로이는 굉장히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사람이었거든요.”
“반짝…… 그럴 리가요.”
“웃을 때면 밤하늘에 빛나는 별님들보다 더 예쁜 사람이라고 했어요. 웃는 게 사랑스러워서 지켜주고픈 사람이라고 했어요.”
에녹 경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레테의 옆에 서 있는 에녹 경을 바라봤다.
“에녹 경……?”
“…….”
그가 난처한 듯 한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가려지지 않은 틈새로 보이는 그의 얼굴이 방금 전까지 울어서 얼룩덜룩해진 레테의 얼굴처럼 붉었다. 난감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어…… 음, 고마워요? 저를 좋게 생각해 주어서…….”
“…….”
어색하게 감사의 표시를 했는데도 그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옷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까지 새빨개져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차라리 모른 척하는 것을 택했다.
“레테는 에녹 경과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요?”
“아, 에녹은…… 음…….”
친근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 대던 레테가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손뼉을 치며 답했다.
“제 아버지예요!”
“아버지, 라고요?”
이번에는 정말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에녹 경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얼굴을 가리던 손을 치우고 나를 쳐다봤다.
“사실인가요?”
“그게…….”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뗀 그가 조금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레테를 한번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제가 어렸을 때부터 에녹이 보살펴 줬거든요. 그…… 제가 가족이 없어서 에녹이 가족이 되어 줬어요. 그렇지, 에녹? 에녹이 내 아버지라고 했잖아.”
“그렇지요…….”
“성녀께서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에녹 경을 처음 보았던 대공성에 발을 디딘 날을 떠올렸다. 비록 그는 그때부터 카일로스만큼 키가 컸지만 견습 기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내 또래의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다. 스치듯 보았던 얼굴도 굉장히 앳되었고 말이다.
그런데 에녹 경이 어린 성녀를 아버지처럼 돌봐주었다면…….
“에녹 경은 나이가…… 생각보다 많은가 보군요.”
내 또래일 거라고 생각했던 에녹 경은 어쩌면 카일로스의 또래, 혹은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
새삼 그를 추종하던 귀족 아가씨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나이가 엄청 많고,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딸까지 있는 남자였다니.
“그럼 이제까지 연인을 만들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도 성녀님 때문인가요?”
“네, 뭐…….”
그는 거의 포기한 얼굴로 우울하게 대답했다.
“그런 셈이지요.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에녹 경의 사적인 이야기를 절대 떠벌리고 다니지 않을게요.”
“네, 정말 감사해요. 레이디 클로이…….”
에녹 경은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에녹 경이라면 나이가 아주 많고 아이가 여러 명이 있다 하더라도 그를 좋아한다고 다가올 여자들이 많을 텐데. 아무래도 에녹 경도 나처럼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레테, 기분은 조금 나아졌나요?”
나는 훨씬 밝아진 얼굴로 조잘조잘 떠들던 레테를 보며 물었다.
“네? 아, 네! 클로이와 대화를 하니까 거짓말처럼 행복해졌어요.”
두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던 그녀가 반달 모양으로 두 눈을 접어내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레이몬드가 내게 말하던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어쩌면 이것과 비슷한 건 아닐까. 봄볕 아래에 서 있는 것처럼 온몸이 따스해지면서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전까지 카일로스가 보낸 사람이 아닐까 의심했던 게 미안해질 만큼, 레테는 작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다행이에요. 혹시 불편한 점이 있다면 꼭 바로 알려 주세요. 레테를 위한 환영 행사인데 레테가 좋지 않은 기분으로 보내게 되면 저도 굉장히 슬플 것 같아요.”
“클로이는 어쩜, 말씀도 참 예쁘게 하시는 것 같아요!”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나를 담으며 웃었다. 아직도 눈가에는 섧은 울음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을 모두 상쇄시킬 만큼 밝고 환한 웃음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행사 담당자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울 순 없거든요.”
“아…… 네.”
그 말에 레테는 왠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되시길.”
나는 그녀에게 싱긋 웃어 주며 일어났다. 문을 닫고 나서는데 가슴이 묘하게 간질간질했다.
* * *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탓에 연회장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굉장히 빨라졌다.
연회장 내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레이몬드가 이제 막 연회장 안에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풀었다.
조금 걱정스러운 그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작게 웃어 주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따라 부드럽게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빼곡한 넓은 연회장에서 오직 그와 나 둘만의 비밀을 쌓는 느낌이 들어 나는 수줍게 고개를 돌렸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 조금 걱정했지만 다행히 행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오후가 지나가는 동안 연회장 내를 메꾸던 상당수의 귀족들이 교체되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레이몬드의 옆자리에 심드렁하니 앉아 있던 다리아는 피곤하다며 먼저 들어갔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오후가 되어 다시 돌아온 베스티는 자신이 연회장을 지킬 테니 내게 먼저 들어가 보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행사가 잘 마무리되는 것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루드비히 대공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군요.”
어느 틈에 다가온 남자의 목소리는 캐롤라인 소공작의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한 발짝 거리를 벌리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뵈어요, 소공작님.”
“아무래도 상심이 큰 거겠지요? 사랑하는 연인을 부지불식간에 잃었으니.”
캐롤라인 소공작은 달갑지 않은 주제를 꺼내며 내게 말을 붙여 왔다.
“그런 소문이 돌더군요. 사실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마차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괴한들의 습격을 받은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고 생각해요.”
내게 그 여자의 목이 든 상자를 들고 스산하게 웃던 카일로스의 모습이 떠올랐으나, 나는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하긴, 그렇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가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짧게 중얼거렸다.
“후작가의 기사들이 함께 있었을 텐데. 평범한 괴한이 아니고서야…….”
“하하, 그렇지요.”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치자 소공작이 다시 말을 걸어 왔다.
“듣자 하니 이번 행사가 레이디 가넷슈와 우리 베스티의 합작이라지요? 오늘도 베스티가 레이디 가넷슈의 칭찬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소공작은 내가 벌려 둔 거리를 다시 한 발짝 좁히며 다가왔다.
“베스티 때문에 힘든 점은 없습니까? 그 아이가 많이 어려서 레이디 가넷슈를 곤란하게 할까 봐 걱정이네요.”
“전혀요.”
나는 내 어깨 위로 내려앉은 소공작의 손을 슬쩍 보며 답했다.
“그보다 소공작님도 성녀께 가 보시지 않겠어요?”
“글쎄요.”
캐롤라인 소공작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레테를 한번 힐끔이고는 비릿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저는 어린 성녀보다는 레이디 가넷슈에게 더 흥미가 있는데요.”
“…….”
그 두 눈에 명백히 담긴 애욕에 눈가가 절로 찌푸려졌다. 나는 내 어깨 위에 놓인 그의 손을 떼어 내며 다시금 그와 거리를 벌리려 했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씀이시네요.”
“오해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는 내 어깨를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나를 붙잡았다.
“당신에게 꽤 흥미가 있어요. 단순히 베스티의 친구 이상으로.”
짧은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다리아의 생일날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껴졌던 막연한 거부감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오래 전, 내가 신년 무도회에서 처음 데뷔를 할 적에 카일로스는 내게 경고했다.
젊은 치기에 달려드는 귀족들을 조심하라고. 설사 그들이 사랑을 논한다 하더라도 내 주제로는 고작해야 귀족의 정부 외에는 될 수 없으니 경계하라고.
물론 당시의 나는 오직 카일로스 밖에 없었기에 그가 일러 준 말에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았다.
꽤 귀찮은 일이 생겨 버렸다고 생각될 무렵이었다.
“제가 잠시 클로이를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레테가 서늘한 시선으로 소공작을 쳐다보며 물었다. 분명 나보다도 작은 눈높이를 지닌 레테였는데, 소공작을 향하는 시선은 꼭 그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무어라 반박하려던 소공작이 자신을 낮추어보는 싸늘한 시선에 압도되어 입을 꾸욱 다물었다. 레테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서 있는 소공작을 보며 비싯 입꼬리를 말았다.
“아스타 제국의 신민은 예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성녀님. 캐롤라인 공작가의 윌리엄 캐롤라인이 라나 신의 딸에게 무한한 영광을 바치옵니다.”
캐롤라인 소공작은 자신보다 훨씬 어린 레테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상황을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하긴, 모든 젊은 귀족들이 성녀를 추앙하기만 하는 게 아니란 건 카일로스나 다리아를 보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아마 소공작 또한 카일로스처럼 성녀를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이만 물러나 보세요.”
차가운 목소리가 축객령을 내렸다. 캐롤라인 소공작은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하고 그대로 물러났다.
나는 새삼 놀라운 눈으로 레테를 바라봤다. 아까 전 내 앞에서 훌쩍이던 소녀와 같은 인물이라고는…….
“클로이! 괜찮아요? 혹시 저 사람이 클로이를 귀찮게 했나요?”
그러나 곧바로 내 손을 붙잡으며 바싹 다가오는 레테를 보며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서릿발처럼 냉랭하던 분위기를 지워 낸 그녀는 꼭…….
‘이중인격, 같은 건가?’
……두 가지의 인격체를 지닌 사람 같았다. 카일로스도 종종 대외적인 모습과 대내적인 모습을 달리 보이곤 했는데, 레테는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격차를 지니고 있었다.
“굉장히 곤란해 보였어요. 그래서 도와주려고 한 건데…… 혹시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니었지요?”
제멋대로 내게서 소공작을 치워 놓고선 뒤늦게 눈치를 보는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성녀에게 ‘귀엽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신성 모독은 아닌지 걱정이 됐지만.
“성녀님 덕분에 불편한 상황을 면했어요.”
은은하게 웃으며 답하는데, 돌연 그녀가 내 손을 쥔 손에 힘을 꽈악 주었다.
“레테!”
“……?”
“제 이름, 불러 주기로 했잖아요!”
“아…… 네, 레테.”
고양이처럼 치솟아 있던 눈꼬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곧바로 온순하게 휘었다. 내게 바싹 다가온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조심해요, 클로이. 저 남자한테서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어요. 굉장히 추악하고 불결한 느낌이었어요.”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은밀한 목소리였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레테는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싱긋 웃었다.
“이래 봬도 제가 라나 신의 축복을 받은 성녀랍니다. 제 감을 믿어 주세요, 클로이.”
“네, 조심하도록 할게요.”
나는 그녀를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이 한 꺼풀 벗겨졌기 때문일까. 레테를 볼 때면 묘하게 가슴이 포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라나 신의 축복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그녀의 특별함을 느끼고 있을까.
카일로스라는 같은 적을 두고 있기 때문인지 레테는 내게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녹 경은 그녀가 나를 도와 줄 거라고 했다. 대가 없는 호의를 받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어? 사람들이 춤을 추려나 봐요.”
내 옆에 꼬옥 붙어 선 레테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신기한 듯 두 눈을 반짝이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작게 설명해 주었다.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하면 춤이 시작될 거예요. 레테를 위해 준비된 여흥 중 하나니까 레테도 어서 저쪽으로 가서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춰요.”
“음…… 난 클로이랑 같이 춤, 추고 싶은데…….”
레테는 조금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
“남녀가 짝이 되어 추는 게 일반적이에요.”
나의 거절에 그녀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안 되나요?”
“죄송해요.”
다시 한번 확인 사살을 하자 그녀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짧은 웃음을 터뜨리며 권유했다.
“하지만 레테가 원한다면 다음번에 황후궁에 있는 저를 찾아오세요. 그러면 함께 춤춰 드릴게요. 이 자리에서는 조금 곤란하지만.”
“정말요?”
단박에 그녀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너무 기뻐요! 꼭 찾아 갈게요!”
레테는 마치 제자리에서 껑충 뛰어오를 것처럼 기뻐하며 외쳤다.
“클로이랑 춤이라니……. 그럼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손을 맞잡고 출 수 있는 건가요?”
“네, 그렇지요.”
“어머! 방금 봤어요, 클로이? 방금 저 여자가 춤을 추다가 저렇게 빙글 돌아서 남자 품에 쏙 안겼어요!”
“기본 동작 중 하나인걸요.”
“그럼 저도 클로이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건가요?”
“네, 당연하지요.”
거듭 쏟아지는 질문이 그다지 귀찮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들뜬 그녀의 질문에 부드럽게 화답해 주었다.
“어떡해…… 너무 떨려요.”
레테는 양손을 가지런히 자신의 가슴 위에 포개며 중얼거렸다.
성녀로서 위엄을 보이는 모습도 싫지 않았지만, 나는 이쪽의 레테의 모습에 조금 더 마음이 갔다. 또래의 아이 같은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가고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데 왜 클로이는 레이몬드랑 춤을 안 춰요?”
레이몬드의 이름을 이렇게 서슴없이 부르는 사람은 다리아 외에 본 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갑자기 나와 레이몬드를 한데 묶어 거론하는 그녀의 말에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폐, 폐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가 왜 폐하와…….”
“클로이와 레이몬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 알았는데…….”
“사랑하는 사이라니요!”
나는 양손을 강하게 휘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전혀 그런 사이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레테는 굉장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침울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
“레테야말로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클로이! 그냥 레이몬드를 사랑해 주면 안 돼요?”
불현듯 애원하는 목소리로 매달리는 레테로 인해 나는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왜…….”
라나 신의 축복을 받은 성녀라서, 레이몬드를 향한 내 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걸까?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굉장히 부끄러웠다.
“안 되겠어! 내가 두 사람을 도와 줄게요!”
불쑥 소리친 그녀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레테……?”
그러고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나를 붙잡고서 레이몬드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레, 레테! 잠시만요!”
나는 강하게 만류하며 그녀를 멈춰 세웠다.
“오해를 하고 있나 봐요. 저는…… 절대로 폐하와 그런…….”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변명을 하던 나는 레테가 상당히 상처 받은 눈을 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클로이는…… 레이몬드를 싫어하는 거예요?”
레테는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녀가 왜 내 눈치를 살피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그 모습이 굉장히 안쓰럽게 느껴졌다.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그 대답에 레테가 휴우, 하고 큰 소리로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으며 씩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괜찮아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언제든 좋아할 수도 있는 거니까! 이왕이면 사랑하는 사이까지 발전한다면 더 좋고요!”
“어…… 그러니까 그것도 라나 신의 뜻인 건가요?”
“네? 아, 네! 그렇죠!”
레테의 눈동자가 데루룩 굴러다녔다.
“시, 신탁 같은 거예요! 두 사람은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해요!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지고 제국이 평화로워져요!”
“…….”
나는 이상하게 그 말이 꼭 거짓말처럼 들렸다. 특히나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자꾸만 시선을 회피하는 저 눈동자가 신뢰도를 대폭 하락시키고 있었다. 빤히 쳐다보자 그녀의 이마 위로 작은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레테.”
“미, 미, 미, 미안해요, 클로이!”
나는 그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그녀가 눈에 띄게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어요. 거짓말 안 할게요.”
“……거짓말이었나요?”
“라나 신의 신탁 같은 거 아니에요. 그냥…… 두 사람이 잘 어울려서, 정말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말했어요.”
거짓말을 한 건 레테인데, 어쩐지 내가 몰아붙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앞으로는 그런 거짓말 하지 말아 주세요. 무엇보다도 폐하께 굉장히…….”
나는 저 멀리 상석에 앉아 있는 레이몬드를 쳐다보며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곤란한 말씀이에요.”
“레이몬드가 곤란하다니요? 어째서요?”
“폐하께는 이미 황후 폐하가 계시고, 황후 폐하가 아니더라도 저는 그분의 옆자리에 있을 수 없는 존재니까요.”
레테와 대화를 하며 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지난 시간을 다시 떠올렸다. 레이몬드는 나를 위해 다리아와 이혼을 감행했지만 나는 끝내 황후가 되지 못했지.
“클로이가 왜, 클로이가 어때서요!”
레테는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얼굴 위로 미묘한 빛깔이 떠올랐다.
거슬러 온 시간 속 누구보다 나를 반대하였던 것이 다름 아닌 라미에 교단이었다. 그리고 레테는 그 교단의 대표로 제국에 방문한 이가 아닌가.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레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더 이상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행사를 구경했다.
* * *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그날은 그대로 뻗어서 잠들고 말았다. 이튿날 일어났을 때는 벌써 아침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후다닥 씻고 밖으로 나온 나는 후원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다리아와 젬마 부인을 발견했다.
“일찍 일어났네, 클로이?”
“죄송해요, 황후 폐하. 늦잠을 자 버려서…….”
“오늘부터 휴가야, 클로이.”
“휴가요?”
다리아를 만난 뒤로 처음 받는 휴가에 기분이 얼떨떨해졌다. 베스티는 휴가를 받으면 수도의 저택이나 공작성에 다녀오는 것 같지만, 나는 딱히 갈 곳도 없었다.
“그래. 오늘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신나게 먹고 놀며 살을 찌우렴.”
“가엾은 클로이. 다리아가 얼마나 혹사시켰으면 휴가의 즐거움도 온전히 누리지 못할까.”
젬마 부인은 다리아를 살짝 노려보고는 내게 손짓했다. 나는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 함께 앉아 함께 차를 음미했다.
“휴가는 좋은 거야, 클로이. 마음껏 늦잠을 자도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돼.”
“하지만 그건 숙녀의 올바른 몸가짐이 아니잖아요.”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지?”
“…….”
“루드비히 대공인가 보구나.”
내가 아무런 대답도 못하자 다리아가 곧바로 정답을 내놓으며 눈가를 찌푸렸다.
“숙녀의 올바른 몸가짐이라니, 대체 그런 딱딱한 규칙은 누가 정했다니. 클로이, 이제 대공이 알려 준 쓸데없는 몸가짐은 모두 집어치워 버려!”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물론이지! 우리에게도 늦잠을 잘 권리가 있다고!”
정작 나는 그렇게 말하는 다리아가 늦잠을 자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자 젬마 부인이 내게 속삭였다.
“베스티는 아직도 자고 있어.”
“네? 하지만 곧 점심시간인데요?”
“클로이, 너 정말 이제까지 한 번도 늦잠을 잔 적이 없었던 거야?”
“몸이 많이 아팠던 때를 제외하곤, 한 번도요.”
나의 대답에 다리아와 젬마 부인이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두 사람은 합심하여 나를 다시 침실로 돌려보냈다.
‘늦잠 자는 법을 터득하기 전까진 휴가가 끝나지 않을 줄 알아!’
나는 침대 위에 앉아 멍하니 다리아의 엄명을 떠올렸다.
“하지만 정말 잠이 안 오는데…….”
카일로스는 굉장히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늦잠이라니. 그와 함께 살 적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호화였다.
이러다 정말 영원히 휴가가 끝나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됐다. 나는 정말 이 휴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막막했다.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더 편한 것 같아.”
포옥, 한숨이 새어나오려는 찰나였다.
“웬 한숨이에요, 클로이?”
이 방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퍼뜩 놀라 일어나니 창틀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레테가 보였다.
“레테? 그곳엔 어떻게……?”
“클로이를 만나러 왔어요! 클로이가 만나러 와도 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만나러 오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가로 걸어가니 나뭇가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위험해요, 레테.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그럼 실례할게요!”
레테는 폴짝 뛰어 창틀을 밟고 방 안으로 착지했다. 가볍고 경쾌한 몸짓이었다.
“나무 타는 법은 에녹 경에게 배운 건가요?”
“응? 아니요? 제가 혼자 터득한 거예요. 클로이도 나무 타는 법을 배우고 싶나요? 내가 가르쳐 줄까요?”
“저는 괜찮아요.”
당장에라도 이 자리에서 나무 타는 법을 가르쳐 줄 기세에 나는 황급히 거절했다. 굳이 위험을 무릅써 가면서까지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레이몬드가 황궁에 지낼 곳을 마련해 줬어요. 교단에서 함께 온 사제들도 다 같이 머물고 있지요.”
가만히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레테가 돌연 두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참 친절하지요? 교단에서 온 사제들과 종자들까지 모두 머물 수 있게 해 주고……. 이렇게 친절하고 상냥한 레이몬드인데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얼마나 잘해 줄지 궁금하지 않아요?”
“글쎄요.”
레이몬드가 자신의 사랑을 얼마나 거침없이 쏟아 붓는 남자인지는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았다. 그것을 생각하자니 괜히 가슴이 뜨거워졌다.
“잘 생각해 봐요, 클로이! 사실은 궁금할 거예요! 레이몬드가…….”
“레테, 혹시 오늘 저를 찾아온 게 저와 함께 폐하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인 건가요?”
“아니, 꼭 그건 아니지만…….”
레테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 무슨 일로 온 거지요?”
딱딱하게 선을 긋자 금세 풀이 죽어서 내 눈치를 살핀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클로이를 만나러 오면 같이 춤춰 준다고 했잖아요.”
“춤을 추려고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거라고요?”
“난 클로이랑 같이 손잡고 춤추고 싶어요.”
레테는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이며 답했다. 약속을 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찾아온 걸 보면, 정말 나와 춤이 추고 싶었나 보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미약한 기대감마저 깃들어 있었다.
“알겠어요.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라서 오늘은 음악이 없는데 괜찮아요?”
“네, 그럼요!”
활짝 웃는 레테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레테는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손을 잡아야지요.”
“손……! 감사합니다!”
1초 정도 멈칫거리던 레테는 덥석 내 손을 붙잡았다. 나를 붙잡은 악력이 너무 세서 나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세게 잡으면 춤을 추기 불편해요.”
“아, 죄송해요…….”
“그렇게 일일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피식 웃으며 힘 빠진 그녀의 손을 끌어 잡았다.
“클로이에게 폐를 끼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난 클로이한테 미움 받기 싫거든요.”
“레테를 미워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몸에 힘을 푸세요.”
레테는 짧게 심호흡을 반복하며 경직된 몸을 풀었다. 우리는 양손을 맞잡고서 기본적인 스텝을 밟아 나갔다.
“오른쪽으로, 하나, 둘, 셋…… 왼쪽으로 하나, 둘, 셋……. 이 동작에서는 발꿈치가 아니라 발끝을 이용해서…….”
“이렇게요?”
“네, 아주 잘 하고 있어요.”
작은 칭찬에 그녀의 얼굴이 수줍게 붉어졌다.
레테는 배움이 굉장히 빨랐는데, 나중에는 춤을 처음 배운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 쉴까요?”
음악이 없어 아쉬웠지만, 꽤 오랜 시간 연습을 한 뒤 휴식을 가졌다.
“내가 클로이와 함께 춤을 췄다니……! 아, 정말…… 나 여기에 온 걸 진짜 잘한 거 같아요. 아주 조금은 무섭고 후회도 됐는데, 정말 이제는 사라져도 여한이 없어요.”
레테는 아무것도 깔리지 않은 딱딱한 바닥 위에 그대로 드러누워 알쏭달쏭한 말을 중얼거렸다.
“있지요, 클로이. 나 날마다 클로이를 만나러 와도 되나요?”
“매일 찾아오겠다는 말씀인가요?”
“절대 클로이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네, 뭐…….”
간절한 음성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레테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우와, 정말이요?”
곧바로 아차, 싶었으나 아이처럼 해맑게 좋아하는 모습에 대답을 바꿀 수도 없었다.
“황궁에 계신 동안에는요.”
“정말 고마워요, 클로이!”
레테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자연스럽게 내 품 안으로 폭삭 안기는 그녀의 행동에 잠시 당황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당황하던 나를 구해 준 것은 베스티를 닮아 시끄러운 노크 소리였다.
“클로이? 들어간다?”
실컷 늦잠을 잔 베스티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다가 방 한가운데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나와 나를 와락 끌어안은 레테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 서, 성녀님?”
“누구?”
레테는 여전히 나를 끌어안은 채로 베스티를 힐끔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그녀 주위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저, 어제 인사드린 캐롤라인 공작가의 베스티 캐롤라인이에요! 클로이와 함께 성녀님의 환영 행사를 준비한…….”
“아, 캐롤라인 공녀?”
레테가 자신을 알아봐 주자 베스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데 공녀는 왜 클로이의 방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나요? 캐롤라인 공작가에서는 자녀들의 예의범절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지요?”
창문을 타고 넘어온 레테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공녀가 클로이를 무시하고 있거나.”
“그런 게 아니에요, 레테. 베스티는 제 소중한 친구인걸요.”
창백해진 얼굴로 새하얗게 질려 있는 베스티가 곧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아서, 내가 대신 나섰다.
“그게 더 기분 나빠요!”
레테는 내 허리에 더욱 매달리며 고개를 파묻었다.
“가족도 아닌 고작 친구 사이에 이렇게 가깝게 지낸다니요!”
“……하지만 레테는 저와 가족도 아니고 친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제 방에 약속 없이 찾아 왔잖아요.”
“……!”
나로서는 레테를 설득시키기 위해 조곤조곤 설명한 것이었는데, 그 말의 어느 부분이 충격이었는지 레테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스르륵, 레테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클로이의 말이 맞아요. 난 클로이에게 가족도 아니고, 친한 친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요…….”
왜 상처를 받은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일단은 달래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레테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그럼 나랑 가족 같은 사이 해요, 클로이!”
레테가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뜬금없는 제안에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베스티를 홱 노려보았다.
“오늘부터 클로이랑 가장 친한 사람은 나예요! 저기 서 있는 캐롤라인 공녀보다도요!”
“서, 성녀님……?”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레테의 열혈한 추종자였던 베스티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황당해하는 베스티에게 레테는 우아하게 두 눈을 내리접으며 말했다.
“캐롤라인 공녀, 오늘부터 당신은 제 라이벌입니다.”
“네? 제, 제, 제가요?”
그런 베스티를 향해 레테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물론, 당신이 감히 내 라이벌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결국 베스티는 세상이 멸망한 것 같은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고 내게 구원을 요청하는 눈빛만 보내 왔다.
그 와중에도 나는 레테의 저 씨익 올라간 입꼬리가 어쩐지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 * *
난데없는 레테와 베스티의 신경전 탓에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두 사람의 신경전이라기보다는 레테의 일방적인 견제였지만.
결국 레테가 돌아간 뒤에야 베스티는 내내 참던 화를 터뜨리고 말았다.
‘성녀님 정말 이상한 사람 같아! 내가 책에서 읽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이중인격’이라고 부른댔어!’
물론 베스티는 그렇게 말한 뒤에도 혹시나 성녀가 자신의 말을 엿듣고 다시 찾아올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연애도 못 해 봤는데 이 젊은 나이에 신성 모독죄로 잡혀 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던 베스티가 이렇게 경계하는 걸 보니, 신성 모독이 굉장히 중죄이긴 한 모양이다.
‘설마, 정말로 황궁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매일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베스티는 자신의 황금 같은 휴가가 박살이 났다며 울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도 온종일 정신이 없던 탓에 그녀를 달래 줄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조용한 창가에 서서 나는 레테를 생각했다. 베스티의 말마따나 레테는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었다. 비록 가넷슈 저택과 루드비히 대공성에 갇혀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진 못했지만, 그런 내 눈에도 레테는 정말 이상했다.
‘어째서 그녀가 속상해할 때면 나도 같이 슬픈 걸까.’
에녹에게 안겨 훌쩍훌쩍 울던 레테의 젖은 얼굴이 짙은 잔상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발갛게 부은 눈가를 생각하면 자꾸만 가슴이 시큰거린다.
그러나 그녀가 웃을 때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입꼬리를 말며 씨익 웃는 그녀의 미소는 꼭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의 것처럼 익숙했다.
톡.
창문 위로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톡, 톡.
연달아 이어지는 소리에 창을 열어 보니 어느덧 내려앉은 어둠 아래에 서 있는 레이몬드가 보였다.
“폐하……!”
“안녕, 클로이. 내가 사색을 방해한 건 아니지?”
나직한 목소리가 적막을 뚫고 내게 다가왔다. 신기했다. 그의 목소리는 저 아래에서부터 울리는데도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게 내 귀에 날아와 박히곤 했다.
“전혀요!”
그를 발견한 내 얼굴 위로 웃음이 번졌다.
“매일 그렇게 혼자 경비를 도시려면 힘들지 않아요?”
“또 걱정해 주는 건가?”
“항상 이렇게 늦은 시간에 따르는 사람도 없이 혼자 황궁의 경비를 살피시잖아요. 낮에는 업무도 많으실 텐데, 피곤할 것 같아요.”
이렇게나마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설레고 즐거우면서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냈다. 그러자 그가 씨익 웃으며 입꼬리를 말았다.
“경비를 살피려고 온 게 아니야. 널 보러 온 것이다, 클로이.”
“네……?”
느리게 그 말뜻을 이해한 나는 화끈거리는 두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러니 나를 이곳에 더 세워 두지 말고 내려와 줄래?”
나를 보러 왔다는 그 말에 또다시 내 가슴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계속 젖히고 있으려니 목이 아프거든.”
“지, 지금 내려갈게요!”
장난스럽게 덧붙인 그 말에 나는 서둘러 창을 닫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복도에 발을 디디며 잠시 숙녀의 몸가짐을 떠올렸지만, 곧바로 다시 뛰어 나갔다. 레이몬드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깟 숙녀의 몸가짐 따위에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는가.
게다가 지금은 휴가 중이니까 설령 나의 이런 모습을 다리아가 보았다 할지라도 뭐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폐, 폐하……!”
단박에 건물 밖으로 나와 그가 기다리는 곳까지 뛰어간 나는 그의 앞에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목은 따끔거리고 머리는 어지럽고 심장은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이런.”
내가 좋아하는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레이몬드는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쓸어 주며 나와 눈을 맞췄다.
“나 때문에 너무 급하게 나온 거 아냐?”
“하, 하지만…… 폐하께서…… 기다리시니까…….”
말을 하는 와중에도 진정되지 않은 호흡에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레이몬드는 내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다는 듯 씨익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나와 함께 걷겠어? 오는 길에 보니 봄꽃이 많이 피었던데.”
“네, 영광이에요.”
냉큼 대답하자 그가 흡족한 미소를 띠우며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느른하면서도 다정한 그 눈빛을 도무지 마주볼 자신이 없어서 나는 가만히 두 눈을 내리깔고 꼬물거리는 손끝만 내려다봤다. 계속되는 시선에 이제는 다른 의미로 호흡이 곤란했다.
그가 먼저 몸을 돌릴 무렵에야 나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사뿐사뿐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마치 한 번도 방정맞게 뜀박질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오늘부터 휴가를 받았다던데.”
앞서 걷던 그가 걸음을 늦추며 말을 건넸다.
“어떻게 아셨어요?”
“이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내가 모르는 건 없어.”
레이몬드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다른 이들이 하였더라면 굉장히 오만하게 느껴졌을 법한 말도 레이몬드의 입술을 타고 흐르니 지극히도 그와 어울렸다.
내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깨달은 이후로, 자꾸만 그의 행동 하나, 눈빛 하나, 말씨 하나에 새삼 반해 버리곤 만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무심하게 스쳐 보냈던 것들이 하나씩 되살아나 내 가슴에 박히운다.
이러다 정말 그를 사랑하게 될까 봐, 아니, 이미 사랑하게 된 마음을 드러내고 말까 봐, 걱정이 되었다.
“성녀가 네게 상당히 호의적인 것 같던데.”
자그마한 분수대 앞에서 멈추어 선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분수대 가장자리에 자신의 겉옷을 벗어 깔았다.
“앉아, 클로이.”
“아니요, 제가 어떻게 폐하의 옷을…….”
“황명이야.”
그가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거절할 수 없는 배려에 황망한 마음을 감추고 그의 옷을 깔고 앉았다. 나는 자신의 겉옷 위에 앉으라 해 놓고서, 정작 자신은 딱딱한 돌 위에 그냥 앉는 그의 모습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오전에 내 집무실에 찾아와 줄곧 네 얘기만 하고 가더군.”
“……?”
나는 뜬금없이 흘러나온 문장의 주어가 누구인지 한참 생각해야 했다.
“성녀 말이야.”
“성녀가 폐하의 집무실을 찾아갔어요?”
“그래. 음……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살짝 이상한 사람 같았어.”
성녀를 떠올리는 레이몬드의 미간에 미묘한 주름이 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하던 나는 문득 레테가 레이몬드와의 관계를 묻던 게 생각이 났다.
‘클로이와 레이몬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 아니에요?’
어제 연회장에서 그녀는 마치 내 머릿속을 읽어 낸 것처럼 레이몬드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냥 레이몬드를 사랑해 주면 안 돼요?’
나와 레이몬드의 관계를 추궁하는가 싶더니 심지어 라나 신의 신탁이라는 거짓말까지 하며 내게 레이몬드를 사랑할 것을 종용하지 않았던가.
‘두 사람은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해요!’
설마 그 이야기를 레이몬드에게도 한 건 아니겠지? 슬금슬금 걱정이 되려는 찰나, 레이몬드가 자신의 뺨을 긁적였다.
“너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없었나?”
“딱히 곤란할 것까지는 없었어요.”
오히려 곤란한 건 내가 아니라 베스티였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성녀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라이벌이 되고 말았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음…….”
“편하게 말씀하세요, 폐하.”
레이몬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었다. 얼마나 심각한 일이기에. 그의 딱딱한 낯빛을 보는 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너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
“……?”
“음, 그러니까…….”
그가 돌연 두 눈을 사납게 빛내며 짓씹듯이 대답했다.
“너를 꼭, 사랑하는 것 같았어. 그 여자가.”
아주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내 말이 굉장히 이상하게 들리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째서 그런 생각을……?”
레테가 내게 굉장한 호감을 갖고 있단 사실은 나 또한 느끼고 있었으나, 레이몬드의 말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잘못 생각한 게 틀림없다.
“억측이 심하셔요, 폐하.”
“억측이 아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강경한 목소리로 내 말을 부정했다.
“오늘 내 집무실에 찾아왔기에 나는 당연히 교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러 온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줄곧 네 이야기만 했어. 네가 얼마나 괜찮은 여자인지,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일이라고 하더군.”
설마 했는데, 레테는 정말로 어제 내게 하던 것과 같은 맥락의 말을 레이몬드에게 했나 보다.
“그러면서 네가 사랑스러운 이유를 내 앞에서 하나씩 꼽는데…… 음, 그게…….”
거침없이 말하던 레이몬드가 상기된 얼굴로 슬쩍 나를 쳐다봤다.
“평소 내가 생각했던 것과 굉장히 비슷해서.”
“비슷……이요?”
“그래.”
그가 굉장히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날 두고 어떤 생각을 했기에 그러지? 아니, 그보다 대체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아무튼, 클로이. 네가 여자에게 성애를 느끼는 게 아니라면…….”
“절대 아니에요!”
“다행이군.”
레이몬드의 헛헛한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내리깔렸다.
“그렇다면 조심해. 성녀가 네게 품은 마음이 아무래도 심상찮은 것 같으니.”
“말도 안 되는 말씀이에요. 레테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라미에 교에 몸담은 신자인걸요. 교단의 교리에 따르면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레테? 벌써 이름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나?”
가만히 내 말을 경청하던 레이몬드가 불현듯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네, 어쩌다 보니. 무슨 문제 있나요?”
“……아니야.”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뭔가 더 하고픈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이 달싹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곧바로 하지 않고 참는 레이몬드의 모습이 조금 신기했다. 가만히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웃느냐?”
“아니에요.”
그냥, 당신의 몰랐던 모습들도 한결같이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그냥 웃음이 나온다.
참 큰일이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당신의 크기가 점점 커져만 가서. 이러다가 결국, 내가 당신을 욕심낼 것만 같아서.
안 되는데.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너는 자꾸 사랑의 자격을 논하는데, 세상 어디에도 그런 자격은 없어.’
아, 정말. 당신이 건넨 말들은 어째서 이토록 하나하나 생생하게 살아나 다정한 희망을 심어 주는지.
‘사랑을 하는 것도, 사랑을 받는 것도.’
과욕임을 알면서도 미련한 선택을 하고파 하는 스스로가 두려워, 나는 오늘도 울컥하는 감정을 달래야 한다.
레이몬드.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당신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내가 감히 그 사랑을, 받아도 될까요?
* * *
봄이 왔으나 루드비히 대공성은 홀로 차가운 겨울처럼 음산하기만 했다.
대공성의 주인, 카일로스 루드비히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얼마 전 도착한 성녀를 위한 환영 행사의 초대장이 구겨져 있었다.
“성녀, 레테…….”
백 번을 죽여도 시원찮을 여자라고 생각하며 카일로스는 어둠 속에서 이를 바드득 갈았다.
당연하게도, 그는 성녀의 환영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당히 불쾌해졌다.
그는 클로이 가넷슈를 생각했다. 자신에게 칼을 겨누었던 클로이 가넷슈를.
‘다가오지 말아요.’
손바닥을 파고들던 칼날보다도 차갑게 외치던 그녀의 목소리가 더 날카로웠다.
그녀가 버리고 간 단검이 그의 손 위에서 노닐었다. 시간이 흘렀어도 피를 닦지 않아 검신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 하하!”
울음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은 것이 그의 잇새로 터져 나왔다.
“클로이, 클로이…… 네가 이 작은 검으로 나를 찌르려고 했다고.”
곱씹고, 또 곱씹어도 믿기지가 않았다. 카일로스는 아직 상처가 완벽히 아물지 않은 손바닥으로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이리저리 어긋난 관계가 그의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어긋난 건, 어떻게든 되돌리면 돼.”
황위까지 포기하고서 죽은 예비 약혼녀의 목을 들고 나타났음에도, 그녀는 그의 진심을 몰라주었다.
심지어 차가운 날붙이를 들이밀며 자신을 거부하였을 때, 그가 느낀 상실감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를 한 번 잃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비록 그녀와의 관계가 한 번 비틀어졌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니 충분히 되돌릴 여지가 남아 있다.
‘숙부님이 좋아요.’
다시 한번 그녀의 촉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차갑게 식어 버린 망자의 것이 아닌, 따뜻한 피가 흐르는 싱그러운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
‘사랑하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작고 도톰한 그 입술이 다시 한번 저를 부르며 사랑을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늘한 독설이 아닌.
그 입술에 뜨거운 사랑을 담아 다시 입 맞추고 싶었다.
툭, 툭.
카일로스는 그녀가 두고 간 단검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그녀를 다시 데려와야 하는데, 방해하는 자가 너무 많았다.
감히 사랑을 빙자하여 그녀를 앗아간 이복형제는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보호를 자처하는 황후 다리아, 무엇보다도 갑자기 나타나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성녀 레테의 존재가 거슬렸다.
그러나 카일로스는 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 클로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의 의지였다.
그녀가 제 발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방해하는 자들을 모조리 치워버린들 온전한 그녀를 얻진 못하리라.
그녀가 황제에게 의존하는 게 싫었다. 그렇다면 황제의 사랑이 거짓이란 걸 명명백백히 밝혀 줄 필요가 있었다.
* * *
“그, 그럼 캐롤라인 공녀는 클로이와 함께 잠을 잔 적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레테의 동공이 가느다랗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훗, 물론이죠. 종종 침대를 공유하는 사이인걸요.”
침대를 ‘공유’한다기엔 베스티가 일방적으로 내 침대를 차지하는 관계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베스티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레테는 굉장히 배신감이 느껴진단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성녀님은 클로이와 가족 같은 사이라고 주장하시면서, 정작 함께 잠들어 본 적은 없는 모양이지요? 후후후.”
맞은편에 앉아 있던 베스티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이, 있어요!”
레테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클로이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우린 무려 한 몸을 공유한 사이였어요!”
“네?”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레테를 쳐다봤다. 아니, 대체 언제……?
“잘 기억해 봐요, 클로이. 아주 먼 옛날…… 내가 태어나기 전에…….”
“…….”
“…….”
나와 베스티는 동시에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허황된 이야기를 늘여놓는 성녀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라나 신의 축복을 받은 성녀라지만, 저렇게 대놓고 허황된 거짓말을 일삼고 다녀도 괜찮은 건가?
“휴……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레테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요. 클로이가 우리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라나 신의 뜻일 테니까요.”
“사랑, 이요?”
“네, 사랑이요.”
이어진 레테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들고 있는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너를 꼭, 사랑하는 것 같았어. 그 여자가.’
어젯밤 레이몬드가 내내 품던 의혹을, 레테는 단박에 긍정하고 있었다.
“나와 클로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그렇게 말하는 레테의 입술 위로 수줍은 미소가 자리 잡았다.
“……이번에도 아주 먼 옛날의 일인가요?”
잠자코 있던 베스티가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레테를 보며 물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레테의 열렬한 추종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불손한 눈빛이었다.
“물론 이것도 옛일이지요. 하지만 나는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라나 신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라나 신은 정말 굉장한 분이시네요.”
“맞아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우신…… 아, 아니, 그러니까 클로이 다음으로요!”
비아냥거리는 게 틀림없는 베스티의 말에 갑자기 두 손을 모으고 라나 신을 찬양하기 시작하던 레테는 불현듯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바꾸었다.
“감히 라나 신과 우열을 가리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어요.”
내가 정색을 하며 답하자 레테가 수줍게 웃으며 찻물을 홀짝였다.
“클로이, 나 오늘 밤 클로이랑 같이 자면 안 돼요?”
“안 돼요.”
“어째서요? 캐롤라인 공녀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가 뭐예요?”
“베스티도 아무 때나 함께 자러 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레테는 폐하께서 훨씬 더 좋은 방을 주셨을 텐데요.”
“그, 그럼 내 방에서 같이 자요!”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그녀에게 끝내 안 된다고 하자, 곧바로 체념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도 클로이랑 같이 자고 싶은데…….”
일부러 큰 소리로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나는 다시 차를 마시는 데 열중했다.
“클로이, 이번 주에 다른 영애들을 초대해서 피크닉 가지 않을래?”
“피크닉이요?”
“응! 모처럼 휴간데 그냥 보내긴 아쉽잖아.”
베스티는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테에게도 넌지시 권유했다.
“성녀님도 원하면 함께 가요. 성녀님의 본색을 모르는 애들은 다들 기뻐하며 뛰어올 거예요.”
“클로이가 간다면 나도 함께 가겠어요.”
레테는 새침하게 대답하며 나를 돌아봤다.
“클로이도 같이 가는 건가요? 클로이랑 함께 하는 피크닉, 나도 엄청 기대되는데…….”
“피크닉 가자, 클로이! 피크닉!”
나를 향해 반짝이는 두 쌍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워서 나는 그만 그러마, 하고 대답해 버렸다.
“너무 신나요! 피크닉이라니!”
“당장 편지를 돌려야겠어!”
“피크닉을 갈 땐 어떤 준비물이 필요하지요?”
“돗자리랑, 간식이랑, 편한 원피스랑, 햇볕을 가릴 수 있는 챙이 넓은 모자도 있으면 좋고…….”
“모자! 나 클로이랑 같은 디자인의 모자를 쓰고 싶어요!”
“성녀님, 확실히 가는 거지요? 그럼 다른 영애들에게도 그렇게 전달할게요.”
“클로이는 무슨 색깔의 원피스를 입을 거예요? 비슷한 색상의 옷을 입고 함께 피크닉을 가면 더 즐거울 것 같지요?”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두 사람 때문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깜짝 선물을 받은 느낌이에요. 캐롤라인 공녀는 사실 좋은 사람이었군요.”
베스티는 어느 틈에 편지봉투와 편지지를 가져와 초대장을 쓰기 시작했다. 레테는 초대장을 쓰는데 열중하고 있는 베스티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웃을 때마다 옴폭 패이는 볼우물이 굉장히 사랑스러웠다.
‘예전에도…… 저렇게 볼우물이 예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녀의 볼우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레테가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클로이?”
“아니에요.”
생각이 날 듯 말 듯 희미해서, 결국 나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 * *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자신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꼰 채 시종장의 보고를 들었다.
“……그래서 사흘 뒤에 성녀님을 모시고 귀족 영애들과 함께 피크닉을 갈 예정이라 합니다.”
“피크닉이라.”
레이몬드는 가만히 턱을 쓸며 입꼬리를 말았다.
“제법 귀여운 발상이군.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황궁 요리사에게 피크닉에 어울리는 간식을 잔뜩 만들어 두라고 전해 둬.”
“알겠습니다, 폐하.”
시종장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총총총 바깥으로 나갔다. 그의 보좌관인 라트 후작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지금 피크닉에 집중하실 때가 아닐 텐데요, 폐하.”
“피크닉에 집중하는 게 아니야. 클로이에게 집중하는 거지.”
레이몬드는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폐하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행동은 감시이지요. 결혼을 한 부부간에도 허용되지 않는 죄형 중 하나이며, 제국 형사법상 처벌을 받는 경범죄의 일종으로 지속적 괴롭힘이라고도 부릅니다.”
“지속적 괴롭힘이라니?”
“혹시 그 레이디에게 지속적으로 접근을 시도하여 교제를 요구하거나 지켜보기, 따라다니거나 잠복하여 기다리기 등의 행위를 반복하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
레이몬드는 잠시 말을 잃었다. 보좌관이 열거한 것들이 모두 그에게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난 유일하게 제국법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아스타 제국의 황제가 아닌가.”
“뭐, 그러시겠지요.”
라트 후작은 짜증을 꾹꾹 참으며 들고 있던 서류철을 건넸다.
“오늘 오전에 또 한 건의 실종 신고가 접수되었답니다. 치안대에서 가져온 자료입니다.”
“……소문은?”
“아직 퍼지지 않도록 막고 있습니다만,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서류를 살피는 레이몬드의 표정이 심각한 빛을 띠었다.
그의 집무실 가득 험악한 공기가 내려앉을 무렵,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시종이 들어와 다리아의 방문을 알렸다.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다리아가 레이몬드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네가 나를 먼저 찾다니. 무슨 일이야, 레이몬드?”
“이 여자, 네가 아는 여자지?”
“루이스잖아?”
다리아는 레이몬드가 대뜸 자신에게 건넨 그림 속 여자를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 여자랑 이 여자도.”
“얜 제인이고, 이 아인 마티나…….”
“모두 실종됐어. 최근 열흘 사이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여자들의 이름을 읊는 다리아를 향해 무거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뭐?”
“생사 여부는 확인할 수 없고. 아직 소문이 퍼지지는 않았지만 시간문제지. 이대로 범인을 찾지 못하면 문제가 꽤 커질 거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짐작 가는 사람 없어?”
레이몬드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다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여자들, 모두 네 시녀들이잖아.”
“…….”
그림 속 여자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었다.
빛깔은 조금씩 차이가 났지만 제국에서 흔하지 않은 은발에 적안, 평균을 웃도는 키와 하나같이 빼어난 미모의 여성들.
클로이의 등장 직전까지 다리아는 레이몬드의 취향에 적합한 여자들을 찾아내 자신의 시녀로 고용해 왔다.
그의 취향은 상당히 까다로워서 수도의 귀족들 중에는 적합한 여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다리아는 레이몬드의 취향에 걸맞은 여자라면 신분을 상관하지 않고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비록 모두 레이몬드의 눈에 드는데 실패한 후 다시 황궁 밖으로 나가게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연고가 없는 아이들이야…….”
다리아는 침잠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일각에서는 이 여자들의 외양이 성녀와 비슷해서, 이단을 신봉하는 자들의 교단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고 있어. 교단에 대한 도전이든, 혹은 다른 어떤 이유이든.”
레이몬드의 목소리가 점차 사늘하게 내리깔렸다.
“클로이가 위험해.”
은색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그의 신하들이 모두들 성녀를 떠올릴 적에 레이몬드는 홀로 클로이를 생각했다. 혹시나 그녀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는 없던 일이었는데…….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는 없었던 성녀의 등장 때문일까? 혹은…….
카일로스 루드비히.
자신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돌아온 남자…….
‘아니, 하지만 그 남자가 이런 짓을 벌일 이유는 없어.’
그 남자가 원하는 것은 클로이 가넷슈이지, 그녀와 비슷한 특징을 지닌 은발 머리의 여자들이 아니었다.
차라리 신하들의 해석과 같이 여자들의 실종이 단순히 교단에 대한 도전이길 바랐다. 그러나 그녀들의 실종이 어떤 연유로 비롯되었든, 클로이의 안전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 * *
카일로스는 대공성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 눈가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굉장히 피로했다. 막 아놀드 캐롤라인 공작과 밀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 행사에서 황제가 캐롤라인 공작에게 황후와의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고 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꽤 좋은 정보였다. 카일로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그 길로 캐롤라인 공작을 찾아갔다.
‘공작과 내가 적당히 이해타산이 맞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도 황제의 이혼 선언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던 이가 다름 아닌 캐롤라인 공작이었다.
그때도 카일로스는 황후 다리아의 숙부이자, 귀족 의회의 수장인 그를 구워삶아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는 데 성공했다.
‘어떠한가? 나와 손을 잡는다면 나 또한 황제와 황후의 이혼을 막아 주지.’
‘…….’
늙은 공작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손끝으로 의자의 팔걸이만 툭툭 두드렸다.
기실, 공작은 갑작스러운 황제의 이혼 이야기로 한참 머리가 아플 터였다.
그의 질녀인 다리아가 몇 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였기에 언젠간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지만, 그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황제는 위자료만큼은 확실히 주겠다며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으나, 그것이 더 문제였다. 그렇잖아도 쥐죽은 듯 황궁에 박혀 살던 질녀가 최근 세상에 나오기 시작해서 굉장히 거슬리던 찰나였다.
캐롤라인 공작은 자신의 질녀가 황궁이란 감옥에 영영 갇힌 채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요. 황후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 그게 불가하다면 황후를 그냥 죽여도 좋소.’
‘가장 손쉬운 방법이로군.’
질녀를 죽여도 좋다는 무시무시한 말에도 카일로스는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공작의 바람이 질녀의 행복이 아니라 질녀의 죽음이라는 게 조금 의외긴 했지만, 그 자세한 내막까지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좋아, 돕도록 하지.’
황후의 위치에 있는 자를 죽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이미 오래 전에 한번 해 본 적 있는 일이었다.
카일로스가 한참 공작과의 밀담을 회상하는 동안 마차는 대공성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전하.”
마차에서 내린 카일로스는 삭막한 자신의 성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없는 대공성은 이제 포근하지가 않았다. 더 이상 예전처럼 그의 고단함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대신 곧바로 대공성에서 가장 차갑고 음습한 곳을 향했다. 끼이익 거리는 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어제 새벽 사람을 부려 납치해 온 여자는 클로이가 오기 전까지 황후 다리아의 가장 최근 시녀로 있던 루이스 베로나였다. 잠옷 차림으로 끌려온 여자는 이미 생명을 잃은 두 구의 시신 옆에서 공포에 질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비록 카일로스가 보기엔 클로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탐스러운 은발 머리에 붉은 눈동자까지 황제의 취향에 걸맞은 여자였다.
카일로스는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허리를 숙인 그가 여자의 턱 끝을 억세게 붙잡아 올리며 다른 손에 들린 날카로운 쇠붙이로 위협했다.
“황제를 다시 유혹해. 내가 돕도록 하지.”
“그, 그, 그건 불가능해요.”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칼끝을 쳐다보며 공포에 뒷걸음질 쳤다.
“폐, 폐하께서는 한 번도 제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어요. 황후 폐하도 그걸 아시고 저를 황궁 밖으로 내보내신 거예요.”
“너도, 한 번도 황제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카일로스의 눈가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미 죽은 여자들의 대답과 더불어 벌써 세 번째, 같은 대답이었다.
그 호색한이라 소문이 난 황제가 자신의 취향에 가까운 여자를 황궁 안에 두고서 한 번도 건드린 적이 없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화, 황후 폐하의 명으로 이미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저는 불가능합니다.”
살기등등한 카일로스의 목소리에 루이스 베로나는 앞니를 딱딱 부딪치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너 역시 쓸모없는 말이구나.”
카일로스는 마치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를 보듯 무감각한 눈으로 여자를 향해 들고 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휘둘러진 검은 그대로 여자의 목숨을 앗아 갔다.
또 다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다.
은색 머리의 시신이 벌써 세 구. 황후의 시녀였던 그녀들은 하나같이 레이몬드의 취향이라 알려진 이들이었으나 그중 어느 누구도 그와 동침한 적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한때 레이몬드의 정부라고 소문이 났던 여자마저 실상 그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였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군.”
카일로스는 뻑뻑한 두 눈을 감았다 뜨며 생각했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황제가 클로이에게 대하던 것을 생각했을 때, 그가 남자로서 문제가 있는 이는 결코 아니었다.
“대체 왜……?”
조금 막막해졌다. 그가 죽인 여자들이 검 앞에서 거짓을 말한 게 아니라면, 이복형제를 유혹하기 위해 시도했던 수많은 여자들 중 오직 클로이만이 유일하게 성공했다는 것인데…….
“젠장.”
거친 욕설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 세상에 클로이 가넷슈를 이길 만한 여자가 존재할 리 없잖은가!
황제를 유혹하여 클로이로부터 떼어낼 수 있다면, 그로 인해 클로이가 그 남자의 사랑이 거짓임을 알게 된다면 가장 완벽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때를 대비해 두 번째 계획이 필요했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깨달을까. 그녀는 지금 아주 잠시 그 남자에게 속고 있는 거라고. 그녀의 사랑은 오직 카일로스 루드비히, 자신의 것이라고.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낸 카일로스는 무심하게 제 검날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바깥으로 나왔다.
시린 마음을 숨기고서 냉랭한 얼굴로 걸어가는 그의 눈에 문득 한 남자가 띄었다. 여러 기사들 사이에 섞여 있음에도 유일하게 존재감을 뽐내는 남자였다.
‘에녹 브란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마지막에 그를 배신하고 그녀의 도주를 도왔던 남자. 한쪽 눈을 잃고도 결국 탈출하여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남자.
한차례 시간을 돌아왔기에 이제 그의 배신은 없던 일이 되었으나 그래도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버리기엔 그 능력이 아까운 이라서 쫓아내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일을 맡기지도 않고 내버려 둔 채였다.
카일로스의 시선을 느낀 에녹 브란스가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한참 동안 그의 수그린 정수리만 쳐다보던 카일로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저 하찮은 남자의 처우를 고민하기엔 그가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 * *
카일로스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에녹 브란스는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함께 있던 동료들은 이미 흩어졌다.
어둠이 더욱 짙게 내려깔릴 때까지 기다린 그는 곧바로 대공성 밖으로 나와 성녀 레테를 찾아갔다.
“클로이랑 같이 피크닉을 갈 거야!”
레테는 신이 나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떠들었다.
“너무 모습을 많이 드러내는 건 아닙니까?”
에녹 브란스는 조금 걱정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나는 어차피 ‘망각’이니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릴 텐데, 뭐.”
그러나 레테는 아무것도 걱정되지 않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기민한 에녹 브란스가 그 찰나에 스쳐 지나간 씁쓸한 표정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모른 척 다른 말을 꺼냈다.
“루드비히 대공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피 냄새를 풍기는 날이 점차 많아지고, 오늘은 은밀히 캐롤라인 공작과 접촉을 하였습니다.”
“멍청한 카일로스, 발악을 하는구나.”
레테는 삐뚜름한 표정으로 비소를 흘렸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도록 내버려 둬야지. 그렇게 몸부림치는데도 끝내 클로이를 얻지 못해 절망하는 것을 구경해야지.”
꺄르륵, 아이처럼 순수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녹 브란스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에녹, 클로이는 내일 노란색 옷을 입을까, 하늘색 옷을 입을까? 클로이랑 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싶은데 무슨 옷을 입을지 안 알려 줘.”
“노란색 옷이요.”
“정말? 그걸 에녹이 어떻게 알아?”
레테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묻자 에녹 브란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색입니다. 특히 화사한 봄날에는요.”
그의 녹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회상하듯 잔잔한 빛깔을 띠었다. 잠자코 그를 올려다보던 레테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에녹?”
레테가 재차 물으며 재촉했지만 그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