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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의 이야기Ⅰ (5/21)
  • 5장.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의 이야기Ⅰ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태어난 순간부터 제국의 후계로 나고 자란 그는, 오직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레이몬드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의 부모가 죽었다. 독이 든 차를 마신 게 원인이라 했다. 세상 어느 곳보다도 경계가 굳건한 황궁에서, 황제와 황후가 동시에 죽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몬드는 부모의 장례식까지 미뤄가며 범인을 찾아내고자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같은 날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모를 잃어야 했던 이복형제와 서로를 위로하며 버텨내야 했다.

    열네 살의 어린 레이몬드는 황제가 된 직후, 캐롤라인 공작가의 장녀인 다리아 캐롤라인을 아내로 맞이해야 했다.

    기실 레이몬드는 자신보다 세 살이나 많은 다리아 캐롤라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스로 레이몬드를 업어 키웠다고 주장하는 다리아 역시 레이몬드 못지않게 선황과 캐롤라인 공작 사이에 오간 혼약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걱정하지 마, 레이. 너와 내가 결혼하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내가 미쳤니, 너 같은 코흘리개와 결혼을 하게? 심지어 넌 나보다 키도 작은데.”

    어린 시절의 다리아 캐롤라인은 언제나 콧대를 높이며 말하곤 했다. 그것은 은근히 레이몬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그녀와의 결합을 거부하는 것은 레이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 조심해, 캐롤라인 가의 마녀. 네가 황후가 된다면 황실의 기강이 얼마나 떨어질지 안 봐도 뻔한데, 부황도 참 너무하시지. 어떻게 이런 마녀를 황태자비로 내정하셨을까.”

    둘은 어린 시절부터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는 앙숙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서로 소원해지며 둘은 마주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런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 건, 황제가 된 열네 살의 레이몬드가 선황의 유지에 따라 캐롤라인 공작가를 방문했을 때였다.

    끝내 부모를 죽인 범인을 색출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차마 선황의 유지를 저버릴 수 없었던 레이몬드는 무거운 마음으로 캐롤라인 공작가를 방문했다.

    어린 황제를 얕잡아 보는 귀족들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져 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다리아와의 혼사가 이루어진다면 귀족 의회의 수장인 캐롤라인 공작을 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선황께서 그대와 결혼하라고 유지를 남기셨지만, 그대가 원치 않는다면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어.”

    레이몬드는 아주 당연히, 다리아가 자신을 거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또한 자신을 거부하는 여자와 강제로 결합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가 거부한다면 어떻게든 그녀의 의지를 존중해 주고자 하였다.

    “……정말 미안해, 레이.”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레이몬드가 귀족들의 압박 속에서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다리아는 한껏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께는 내가 어떻게든 잘 말씀드릴게. 캐롤라인 공작가가 네게 등 돌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자신보다 훌쩍 컸던 다리아가 어느덧 자신을 올려다보며 죄책감에 젖은 얼굴로 사죄하는 모습에 레이몬드는 마음이 약해졌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본디 그런 남자였다. 강자에겐 강하지만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남자. 그는 캐롤라인 공작에게 선황의 유지를 따를 수 없다 말하였다.

    캐롤라인 공작은 오랜 약속을 깨뜨린 두 사람으로 인해 상당히 언짢아했으나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혼담이 일단락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캐롤라인 공작이 급사했다. 공작의 장례식에서 다시 만난 다리아 캐롤라인은 독기가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선황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황가와 캐롤라인 가의 혼약을 약조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레이몬드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 이는 죽은 캐롤라인 공작의 아우이자 곧 공작가의 작위를 계승하게 될 남자였다. 다리아 캐롤라인에게 숙부가 되는 남자이기도 했다.

    “제 질녀가 부족한 점이 많지만 폐하께서 큰 은혜로 맞이해 주신다면 캐롤라인 공작가는 영원히 황실의 편에 설 것을 약속드리지요.”

    “다리아의 뜻도 그대와 같나?”

    레이몬드는 숙부의 옆에 고요히 앉아 있는 다리아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물론이죠. 그렇지, 다리아?”

    남자는 다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 다정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위화감에 레이몬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더, 생각해 보도록 하지.”

    황궁으로 돌아가려는 레이몬드를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다리아였다.

    “숙부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숙부는 다른 귀족들과 합심하여 너를 압박할 거야.”

    “그래서?”

    스산하게 가라앉은 두 눈동자를 보며 레이몬드는 반문했다.

    “나를 황후로 들여.”

    “원하지 않았잖아.”

    “어차피 나한텐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다리아는 느릿하게 두 눈을 내리깔며 속삭이듯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비의 장례식 내내 울지 않았던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드는 모습에 레이몬드는 내심 당황했다.

    “너를 위해 하는 제안이 아니야. 나도 네가 필요해, 레이.”

    아비의 죽음이 그토록 충격적이었나. 그렇게 질색하던 자신과 결혼을 결심할 정도로.

    객관적인 상황을 놓고 보자면 레이몬드에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예기치 못한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그에게는 힘이 필요했으니까.

    결국 레이몬드는 캐롤라인 공작가의 절대적인 지지를 조건으로 다리아를 황후로 들이게 되었다.

    한 가지 비극이 있다면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가 냉혈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순수한 사랑을 꿈꾸던 소년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준비 없이 황제가 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영역이라 생각했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 놓인 것에 책임을 다하고자 할 뿐이었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 결합한 우리가 굳이 이런 의미 없는 짓거릴 벌일 필요가 있니?”

    힘들고 지루했던 결혼식을 치른 첫날밤, 그를 먼저 거부한 것은 다리아였다.

    “어차피 이건 형식적인 의식 절차야.”

    “아니, 레이몬드. 나는 네가 성년이 된 후에도 너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거야.”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레이몬드는 삐딱하니 문에 기대어 선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지금은 피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언젠간 자손을 보아야 할 텐데. 황가의 의무를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어차피 나도 천년만년 네 부인 노릇을 할 생각은 없어. 정 후사가 걱정되면 정부를 두어도 좋아. 정부에게서 아이를 낳으면 내 아이라 생각하고 성심껏 키워 줄 테니까 말이야.”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대꾸하는 다리아를 보며 레이몬드는 역시 싫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비록 형식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럭저럭 잘 지내는 부부 사이로 보였을 것이다. 캐롤라인 공작가는 약속대로 레이몬드를 향한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 왔고.

    그렇게 점차 황권이 안정되어 간다고 여겨질 무렵이었다.

    “임신입니다!”

    한 번도 관계를 맺은 적 없는 황후가 아이를 임신했다. 심지어 아이를 가진 시기는 미묘하게 그와 결혼을 하기 전으로 추정되었다.

    “누구의 아이지?”

    “미안해, 레이. 나는…… 나는…….”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나와 결혼한 건가?”

    “아니야! 나도 몰랐어! 알았더라면 절대…… 나는 정말…….”

    아비의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던 다리아가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이의 아비는 어디에 있어?”

    “……죽었어.”

    “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조금 전에…….”

    “하…….”

    기가 찬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레이몬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아이의 아비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대신 공표했다. 황후 다리아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성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열일곱의 다리아 또한 어렸지만, 열네 살의 레이몬드는 아직 아이를 갖기에 지나치게 어린 나이였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던 후사였다.

    사람들은 모두들 레이몬드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새 황제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색을 밝히는 호색한이란 소문이 소리 없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소문을 접한 레이몬드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무어라 쑥덕거리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레이몬드에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리고 얼마 뒤, 레이몬드는 다리아의 유산 소식을 접해야 했다. 이번에도 범인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은연중에 다리아를 유산시킨 범인과 부모를 죽인 자가 동일인물일 것이라 생각했다.

    황제는 황후의 유산에 분노하였으나, 슬퍼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레이몬드를 보고 냉정하다고 평하였다. 그래 봤자 어차피 황제인 그의 앞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 * *

    무려 일 년 반에 걸친 정복 전쟁을 끝내고 귀환한 레이몬드는 더 이상 앳된 느낌을 찾아 볼 수 없게 훌쩍 성장해 버렸다.

    전장에서 열여섯이 지나 버린 그는 아직 성년식을 몇 달 앞두고 있었는데도 어지간한 성인 남성은 엄두도 못 낼 만큼 큰 키와 굵은 골격으로 주위를 압도했다.

    어린 황제의 이와 같은 성장은 수도 내의 수많은 귀족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비록 그 안에 든 것이 열여섯 살 어린 소년의 영혼이라 하여도 개의치 않았다.

    이미 그의 외양은 완벽한 남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긴 전쟁으로 인해 사나워진 분위기는 평범한 남자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세간에는 그가 오래전부터 여자를 알아 왔다고 소문이 나 있지 않았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몬드가 성년이 된 이후로 매일같이 무수한 미녀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중 일부는 황후 다리아가 보낸 여자들이었다.

    “어젯밤의 그 여자, 황후궁의 시녀라던데.”

    “황후의 시녀가 황제와 눈이 맞는 게 드문 일도 아니잖아.”

    짜증스럽게 따지는 레이몬드에게 다리아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왜,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었니? 꽤 예쁘장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허……!”

    레이몬드는 기가 차서 다리아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무엇을 위해 자신에게 여자를 붙여 두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대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어디가 별로였는지 말을 해 줘, 레이몬드. 그래야 나도 네 취향에 맞는 아이를 찾아 준비하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별로였어.”

    레이몬드는 비소를 머금으며 삐딱하게 대답했다.

    “정말 까다롭네, 레이몬드.”

    다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레이몬드의 취향에 맞는 여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다리아는 주기적으로 시녀를 갈아치우며 레이몬드에게 접근시켰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레이몬드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다리아가 보낸 여자들을 돌려보냈다.

    “이번엔 또 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거야! 은발의 미녀가 좋다 해서 힘들게 찾아 보낸 아인데!”

    씩씩거리는 다리아를 보며 레이몬드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다 보니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제국에서 가장 찾아보기 힘든 머리색이 은색이었기에.

    다리아가 보낸 열일곱 번째 여자 앞에서 보란 듯이 은색 머리의 귀족 영애를 가리키며 그런 뉘앙스의 말을 흘렸던 기억이 겨우 났다.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어. 귀족적이면서도 오만하지 않은 목소리가 좋은데.”

    “세상에, 귀족적인 목소리와 그렇지 않은 목소리가 따로 있다는 말이니?”

    레이몬드는 자신의 까다로운 취향에 분개하는 다리아를 보며 고소해했다. 그것에 상당히 재미를 들린 레이몬드는 점차 말도 안 되는 단서를 붙여 가기 시작했다.

    눈동자 색, 걸음걸이, 웃을 때의 표정, 인사를 할 때의 손 모양까지…….

    그 수많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딴지를 걸다 보니 어느덧 그는 호사가들 사이에서 굉장히 까다로운 심미안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취향에 걸맞는 여자들을 데려와 선보이곤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여자도 레이몬드가 제시한 조건에 부합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애초에 그의 조건은 레이몬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세상에 존재하기 힘든 것들의 나열일 뿐이니까.

    ‘정말로 그런 여자가 세상에 존재할 리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몬드는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들고자 애쓰는 이들을 속으로 비웃었다.

    적당히 그들이 선보이는 여자들과 어울리는 시늉을 하다가도, 까다로운 심미안을 이유로 선을 그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꽤나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스물넷이 된 그는 제국에서 가장 방탕한 남자로 소문나 있었다. 비록 사실과는 달랐으나 반쯤은 의도한 것이었기에 그다지 억울하지는 않았다.

    황제의 여성 편력이 제국 안팎으로 워낙 유명해진 덕에 사람들은 십 년이나 후사를 보지 못한 황후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혈기왕성한 황제가 언젠가 제정신을 차리면 어련히 적자를 보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을 뿐.

    그러나 그가 전쟁에서 귀환하고 맞이한 일곱 번째 신년 무도회에서, 그는 자신의 ‘믿음’을 산산조각 낼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의 까다로운 취향에 부합하는 여자는 세상에 절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믿음 말이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가넷슈 가의 클로이입니다.”

    클로이 가넷슈는 그의 이복형제가 후원하고 있다는 방계의 여자였다.

    처음 레이몬드를 사로잡은 것은 우아하게 흐르는 목소리였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은색 머리카락으로 그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고개를 들어 봐.”

    명령에 따라 순순히 들어 올린 얼굴이, 순간 레이몬드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제법…….’

    레이몬드는 여자를 느리게 훑어보며 숨을 삼켰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아니, 꽤…….’

    여자는 예뻤다. 이제까지 그의 주위를 맴돌던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여자들이 있었지만 이만큼이나 그의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이는 없었다.

    레이몬드는 난생 처음으로 여자의 두 눈이 오직 제게만 고정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는 갈증에 목울대가 절로 움직였다.

    “…….”

    “…….”

    레이몬드는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소문대로.”

    여자의 얼굴 위로 작은 홍조가 번졌다. 레이몬드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고자 애를 쓰며 이복형제와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에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무도회는 한창 절정을 향해 치달았고, 그 화려한 공간 속에서 레이몬드는 홀로 무료하니 술잔을 들이켰다.

    이상했다.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자꾸만 시선이 절로 그 여자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레이몬드만의 일이 아니었다. 무도회장 내의 수많은 남자들이 은근슬쩍 여자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수려한 백금발의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가는 순간, 레이몬드는 들고 있는 잔을 부술 듯이 움켜쥐었다. 옆에서 말리는 시종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잔을 부숴 버렸을지도 몰랐다.

    남자를 뿌리친 여자는 어딘가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아마 테라스로 향하는 것이리라. 여자의 뒷모습에서, 그 사뿐한 걸음걸이에서 레이몬드는 한참 동안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것 참, 말도 안 되지.”

    레이몬드는 실소를 머금으며 몸을 일으켰다.

    고작 인사 한번 나눈 것이 전부인 여자 때문에 이토록 목이 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큰 보폭으로 그녀가 있을 테라스 앞까지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밤공기를 쐬고 있던 여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 자그마한 몸짓 하나마저도 레이몬드를 미치도록 전율케 했다.

    “또 보는군.”

    “제국의 태양을 뵙…….”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의 귓가를 두드리는 순간, 레이몬드는 참지 못하고 여자의 턱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여자의 눈동자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한평생 기대했지만, 정말 찾아올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이 감각은, 아마도…….

    “싫다면, 거절해.”

    짓씹듯이 내뱉은 말에 놀랍게도 여자는 아름다이 두 눈을 휘었다.

    “싫지 않아요.”

    유혹하는 듯한 그 야살스러운 눈짓에, 요요한 손짓에, 고아한 몸짓에 레이몬드는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그대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오직 타는 듯한 갈증만을 안고서 맞춰 가는 성급한 입맞춤에 여자는 느리게 따라왔다. 점차 여자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레이몬드는 느리게 물러났다.

    “따라오겠나?”

    “…….”

    여자는 대답 대신 그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레이몬드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긍정의 뜻임을 알아채고는 씨익 입꼬리를 말았다. 먼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는 그의 뒤로 여자의 사뿐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이 클로이 가넷슈와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의 첫 만남이었다.

    * * *

    클로이 가넷슈는 굉장히 묘한 여자였다. 적어도 레이몬드가 이제껏 만나 본 사람들 중에는 가장 그러했다.

    소심하면서도 도발적인 그녀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외양을 지녔음에도 거만하지 않았다. 제게 우아하게 안겨드는 몸짓은 침대 위에서도 천박하지 않았다.

    충동적이었던 하룻밤 이후, 레이몬드는 끊임없이 클로이 가넷슈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흥미라 생각했다. 자신이 지어낸 취향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여자가 정말로 실재한다는 게 그를 놀라게 했다. 절로 시선이 가고 몸이 움직였다. 사춘기 소년처럼 성급했던 지난밤을 떠올리자니 얼굴 위로 열이 뻗쳤다.

    ‘어쩌면 정말, 내 취향인지도.’

    레이몬드는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생각했다. 클로이 가넷슈는 마치 자신을 위한 선물 같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자신을 위해 태어난 여자 같았다.

    “레이몬드! 그날 네 침실에 여자가 머물렀다는데, 정말이야?”

    뒤늦게 소식을 접한 다리아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필히 무슨 꿍꿍이가 있는 표정이라, 레이몬드는 그녀의 말을 가뿐히 무시했다.

    “상관하지 마.”

    “내가 어떻게 상관을 안 하겠어? 하나뿐인 남편이 드디어 여자를 알게 되었다는데. 다행히 황가의 대가 끊기는 일은 없겠어.”

    노골적인 언사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다리아는 배꼽을 잡고 깔깔 웃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니, 레이? 네 지위와 나이를 생각하면 정부를 두세 명쯤 두어도 아무도 욕하지 못할 텐데.”

    “허튼 소리.”

    레이몬드는 사늘하게 일갈하며 다리아를 지나쳤다. 돌아서는 레이몬드의 뒷모습에 다리아가 외쳤다.

    “잘 생각해, 레이몬드. 지금과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만은 없잖아!”

    그녀의 말에 그는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물론 다리아의 말이 옳았다. 그녀와의 이혼을 감행하지 않는 이상, 황실의 적자를 볼 일은 평생토록 없을 것이다.

    국교인 라미에 교의 교리에 따라 제국의 모든 남성은 일부일처제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니 혹 그가 다른 여자를 취하게 되더라도 그 여자는 ‘정부’ 이상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느릿하게 걷고 있던 레이몬드의 걸음이 멈추었다.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상하군.”

    복도에 난 커다란 창을 바라보자, 앙상한 나뭇가지가 겨울바람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을 응시하는 레이몬드의 붉은 눈동자도 함께 흔들렸다.

    “왜…….”

    그는 느리게 눈꺼풀을 감았다 떠올렸다. 너울거리던 은색 머리칼과 자신을 향해 상냥하게 휘던 붉은 눈동자가 감은 눈 위로 아른거렸다. 사르르 웃으며 양손을 뻗어오던 그 작은 몸짓이 머릿속에서 수십 번 재생되었다.

    레이몬드는 가만히 두 눈을 떠올리고는 시종장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마차를 보내.”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

    “루드비히 대공성으로.”

    * * *

    근 이 주 만의 만남이었다.

    침대 위에 비뚜름히 앉아 있던 레이몬드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를 보았다. 자신을 다시 찾을 줄 알았다는 듯 고고한 얼굴 표정과 달리, 어쩔 수 없이 긴장을 숨기지 못해 말아 쥔 두 주먹에 시선이 갔다. 비싯,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클로이,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이미 그녀가 없는 시간 동안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입 안에서 홀로 굴려 보았던 이름을 그는 애써 모른 척하며 읊조렸다.

    피와 여자에 굶주렸다고 끊임없이 호사가들 사이에 입에 오르고 있었지만, 실상은 처음으로 여자를 알게 된 스물넷 남자의 치기였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앞에서 깊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여자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술에 젖어 그녀를 안았던 그 밤과 달리, 또렷한 정신으로 마주한 그녀는 훨씬 더 작고, 연약하고…….

    “고개를 들어.”

    찬찬히 들어 올린 시선이 그의 것과 맞부딪쳤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새빨간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레이몬드는 나직이 탄식했다. 또렷한 정신으로 마주한 그녀는 훨씬 더 작고, 연약하고, 또한 사랑스러웠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미친 건가.’

    레이몬드는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피와 살육이 난무하던 전장에서도 이처럼 심장이 뛰어 본 적 없었다.

    “신기하군.”

    그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턱끝을 살풋 들어 올리며 사뿐사뿐 다가오는 그녀의 몸짓에 또다시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클로이 가넷슈는 그가 앉아 있던 침대 바로 앞까지 걸어 왔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어떻게 이리도, 하나부터 열까지 내 취향일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얄팍한 환상을 버무린 취향의 집합체가 눈앞에 실재하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묻고 싶었다. 자신이 입 밖으로 꺼낸 문장들 그대로 눈앞에 실재하는 너는 어쩌면 나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냐, 하고.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다정해 본 적이 없었기에. 사랑에 막 눈을 뜬 남자는 심장이 몸 밖으로 뛰쳐나갈 듯이 뛰어 대는 순간에도 황제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넌 신기하지 않으냐?”

    무심한 목소리를 흉내 내어 묻자, 여자의 눈매가 사르르 휘었다. 유혹하는 걸까. 그렇다면 얼마든지 저 유혹에 당해 주리라.

    레이몬드는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결국 또 다시 황제로서의 여유는 모두 집어던진 채 그녀를 향해 성급하게 달려들고 말았다.

    레이몬드는 뒤늦게 자신의 아래에서 바르르 말아 쥐고 있는 자그마한 두 손을 발견했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유혹하듯이 흘려 댈 때는 언제고, 뒤늦게 겁먹은 모양이라니.

    그 모순적인 모습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괜찮다.”

    레이몬드는 둥글게 말아 쥔 그녀의 양손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여자는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올려다봤다.

    “격하게 하지 않을 테니, 긴장을 풀어.”

    레이몬드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클로이.”

    어렸을 적,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달래며 쓰다듬었다. 제게 매달리며 안아 달라 속삭이던 그녀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곧이어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아 내렸다.

    눈꺼풀 아래로 묻혀 버린 두 눈동자를 보지 못해 굉장히 아쉽다고 생각하며 레이몬드는 그녀의 목덜미 위로 입술을 내렸다. 연한 살 내음과 은은한 향수 냄새가 한데 뒤섞인 채 그의 후각을 잠식했다.

    * * *

    일주일에 두 번씩 이어지던 만남은 점차 횟수가 늘어 갔다. 일주일에 세 번, 네 번…… 급기야 자신의 침실에 가두고 며칠간 돌려보내지 않는 일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부족했다. 레이몬드는 점차 그녀에게 빠져드는 스스로가 조금 두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클로이…… 클로이 가넷슈.’

    레이몬드는 쉼 없이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그럴 때마다 몽글몽글한 기분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사르륵.

    굵은 손가락 사이로 하늘하늘한 은색 머리칼이 흩어져 내렸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머리끝에 코끝을 내렸다.

    “네게선 언제나 좋은 향이 나는군.”

    그러자 그녀가 느릿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어떤 향인데요?”

    “너는 이 향이 맡아지지 않나?”

    클로이는 자신의 몸에 대고 코를 킁킁거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더니 이내 포스스 눈꼬리를 접으며 레이몬드의 팔에 매달렸다.

    “폐하께서 알려 주세요. 무슨 향인데요?”

    “으음…….”

    레이몬드는 어여삐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작게 신음했다. 저 자연스러운 몸짓은 의도한 걸까.

    레이몬드의 두터운 손바닥이 클로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클로이는 그 다음 이어질 행동을 짐작한 듯이 사랑스러운 홍조를 두 뺨 위로 띠우며 느른하게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 위로 한 번, 코끝 위로 한 번 내려앉았다.

    “클로이.”

    타오르는 눈동자가 체리처럼 붉은 입술을 찌를 듯이 노려보았다.

    “내가 너 때문에…….”

    레이몬드는 느릿하게 뻗은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손끝에 닿은 몰캉한 감촉에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 말에 클로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느다란 두 팔이 레이몬드의 허리를 껴안았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턱 끝을 부드럽게 들어 올리며 고개를 내렸다.

    “믿어지느냐? 내가 널,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한다면.”

    “……믿어요, 폐하.”

    레이몬드는 자신을 향해 휜 사랑스러운 두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그녀의 뺨을 나른하게 긁어내렸다.

    하지만 간지럽다며 키득키득 웃는 그녀의 입술에서 자신과 같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은, 욕심인가.’

    당연히 그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좋아한다고 고백해 올 것이라 기대했던 레이몬드는 내심 실망했다. 그러나 그것을 겉으로 표 내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서 너도 날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녀는 곧바로 그렇다고 대답하겠지. 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울림이 담긴 고백을 억지로 받아 내고 싶지 않았다.

    “네가 좋아, 클로이.”

    대신 레이몬드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 더욱 굳건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고백했다.

    “널, 사랑해.”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된 남자의 입술이 조심스러운 고백을 담으며 그녀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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