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클로이 가넷슈에게 면죄부를 주는 자 (4/21)

4장. 클로이 가넷슈에게 면죄부를 주는 자

다리아는 그 고고하고 우아한 생김새와 달리, 굉장히 소탈하고 장난기가 많은 여자였다. 이따금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내가 들었던 그녀의 잔혹한 소문들이 모두 거짓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곤 했다.

‘그런데 왜 다리아는 레이몬드와의 이혼을 막아 주려 했던 귀족들을 적대시한 거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다리아는 그 당시 ‘황후파 귀족’이라 불리던 집단들의 수장인 캐롤라인 공작을 처단하고 그 지지 세력들을 모두 적대시한 거니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아리송해서 나는 결국 더 이상 지난 시간의 일을 추측하는 걸 포기했다.

“어머,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박수를 치며 깔깔 웃는 다리아의 앞에서 나는 어색하게 그녀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굉장해, 클로이. 자, 그럼 이제 그 모습 그대로 저 쪽을 쳐다보고…… 옳지, 그 다음에 두 손끝을 이렇게 모아서…….”

다리아의 시녀가 된 이후로 내가 하는 일이라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을 찌우기, 외국에서 들여온 차를 마시며 그녀와 담소를 나누기, 피부에 좋다는 화장품을 하루에 하나씩 꺼내어 그녀보다 먼저 시험해 보기…….

그리고 가장 최근 들어서는 예쁜 옷을 입고 그녀의 모델이 되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이렇게요?”

“그게 아니야.”

내가 자세를 잡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자 다리아가 들고 있던 화구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 내게로 다가왔다.

“두 손은 이렇게…… 그리고 시선은…….”

다리아는 내 손끝을 모아 가슴 위로 얹어 주었다. 그러고는 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시선을 고정시켜 주었다. 썩 편한 자세는 아니었는데, 조금씩 흔들리는 내 고개를 보며 다리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으음, 클로이. 시선이 흐트러지고 있잖니.”

다리아가 양손으로 내 두 뺨을 감싸 쥐고 다시 시선을 고정시켜줄 때였다. 바스락, 소리와 함께 우리의 시선이 갑작스러운 불청객을 향해 옮겨졌다.

“레이?”

“…….”

나로서는 다리아를 소개 받은 날 이후 처음으로 다시 마주치는 레이몬드였다. 다리아가 반가워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레이몬드는 어쩐 일인지 입술을 꾸욱 다문 채 얼굴을 붉혔다.

“이곳까진 무슨 일…… 어머, 대체 무슨 엉큼한 생각을 했기에 얼굴이 빨개진 거니?”

엉큼한 생각?

그녀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문득 나와 다리아의 사이가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내 얼굴도 레이몬드의 것처럼 귓불까지 새빨갛게 익어 버렸다.

“큼, 크흠.”

레이몬드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정말로 클로이를 정부로 삼을 생각은 아니겠지?”

레이몬드는 자신이 말해 놓고서도 말이 안 된다는 듯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다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저런, 내가 아직 말하지 않았니? 사실 나와 클로이는 이미 동침을 즐기는…….”

“황후 폐하!”

다리아의 짓궂은 장난기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걸 알아챈 나는 대뜸 그녀의 말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 그런…… 이상한 말씀은 하지 마셔요. 폐하께서 오해를 하시겠어요.”

나의 소심한 변명에 다리아는 호탕하게 웃으며 나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슬쩍 때렸다.

“오해라니, 클로이. 어젯밤에도 우리가 한 침대에서 잔 건 사실이잖아? 조금 서운해지려 하는걸?”

“그건 황후 폐하께서 갑자기 찾아 오셔서 자고 있던 저를 깨운 거잖아요!”

“맞아. 굉장히 ‘야심한 시각’에 너를 깨우고 말았지.”

우리의 대화를 엿듣던 레이몬드의 표정이 점점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정말, 인가?”

레이몬드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물론 지난밤에 다리아와 함께 잠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밤에는 내가 레이몬드에게 말할 수 없는 진실 하나가 더 있었다.

‘클로이, 아직 안 자고 있는 거 알아!’

대뜸 방문을 열고 들어온 다리아는 자고 있는 나를 억지로 깨웠다. 나는 방금 전까지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노라고 소심하게 대꾸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녀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것 보렴. 타르타에서 들여온 와인이야.’

‘하지만…… 저는 방금까지 자고 있었는데…….’

‘어머, 클로이! 주인의 술 상대를 하는 것도 훌륭한 시녀의 덕목인 걸 아직 안 배웠나 보구나?’

‘시녀가 술 상대도 해야 하는 건가요?’

‘물론.’

다리아는 특유의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마개를 땄다. 뽕,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달달하면서도 알싸하게 퍼지는 술 내음에 잠시 넋을 놓았다.

거슬러 온 시간 속의 나는 한 번도 붉은 와인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붉은 와인은 레이몬드의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일로스는 내게 술을 마실 거라면 달달한 과실주 대신 레이몬드가 좋아하는 독한 위스키를 먹으라 강요하였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한번 머금었던 위스키는 곧바로 뱉어 낼 만큼 맛이 없어서 그 뒤로는 한 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했다. 오롯이 나를 레이몬드의 취향으로만 키웠던 그가, 어째서 그날 이후로는 내게 다시 위스키를 강요하지 않았을까.

‘자아, 쭈욱 들이켜 보렴.’

다리아가 알려 준 술을 마시는 방법은 파티장에서 보았던 다른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는 방법과 사뭇 달랐으나 나는 의심 없이 그녀의 말에 따랐다. 달콤한 향내가 입 안 가득 퍼졌다.

‘맛이 어떠니?’

‘맛있어요.’

‘그래?’

내가 대답하자 다리아는 방금 내가 비운 잔에 와인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역시 타르타의 와인이야. 레이몬드는 왜 이 좋은 걸 금지시켰는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 내며 씨익 웃는 그녀를 보며 나는 놀라 되물었다.

‘네? 이게 금지된 술이라고요?’

‘그럼.’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와 달리, 다리아는 너무나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오늘 일은 비밀이야.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클로이.’

‘잠시만요, 황후 폐하. 금지된 술을 먹은 사실이 알려지면…….’

‘목이 잘리겠지. 물론 나는 이래봬도 명색이 황후니까 봐주겠지만, 고작 내 시녀인 너는 정말 죽을지도 몰라.’

다리아는 여상스럽게 말하며 다시 와인을 한잔 따라 내게 내밀었다.

‘어서 마시렴, 클로이.’

‘저, 저는 이제 더 이상 못 마시겠어요.’

‘마시지 않으면 네가 타르타의 와인을 먹었단 사실을 널리 알릴 테야.’

‘하, 하지만……!’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마셔야지, 클로이.’

나는 결국 울먹이며 다리아가 건네는 술을 몽땅 마셔야 했다. 중간에 기억이 뚝 끊겼다가 눈을 뜨니 늦은 아침이었고, 나는 망극하게도 다리아와 함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나보다 조금 더 늦게 일어난 다리아는 내게 두 번 다시 술을 마시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말을 했다. 정 술을 마시고 싶다면 꼭 레이몬드의 앞에서만 마시라는 의뭉스러운 덧붙임과 함께.

아무튼 그런 연유로 나는 레이몬드에게 차마 지난밤의 진실을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려야 했다.

“그…… 폐하께서 오해하실 일은 없었어요.”

“…….”

레이몬드는 다시금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나는 그의 오해가 점점 짙어지는 것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황후 폐하…….”

다리아를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당연하게도 다리아는 나의 간절한 시선을 모른 체하며 상황을 즐겼다.

한참 뒤에 레이몬드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다리아가 네게 짓궂은 장난을 하는 모양이군. 미리 경고했지만 조심해야 해, 클로이. 다리아는…… 여러 면에서 굉장한 여자니까.”

이제는 나도 어째서 레이몬드가 다리아를 조심하라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다리아는 정말 굉장한 여자였다.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리고 혹시 네가 싫다는데도 다리아가 억지로 너를 취하려고 한다면,”

레이몬드는 사뭇 심각해진 표정으로 나와 다리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언제든지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게 무슨 소리니, 레이? 마치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를 겁탈하는 파렴치한 여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네?”

“아니었나?”

“절대 아니야!”

다리아가 도도하게 팔짱을 끼며 고개를 슬쩍 젖혔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보다 레이, 이 시각에 황후궁 후원에는 무슨 일이야?”

뾰루퉁한 표정이 된 다리아가 의자 위에 다리를 꼬아 앉았다. 잠시 아주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아.”

뒤늦게 탄성을 저지른 레이몬드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

“으음?”

레이몬드를 응시하는 다리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고?”

“그래.”

나는 한쪽 구석에 서서 미심쩍어하는 다리아와 단호하게 답하는 레이몬드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두 사람이 이걸 가지고 말다툼을 벌이다가 나에게 누구의 말이 옳은 것 같냐고 묻는 상황이 올까 두려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리아가 먼저 레이몬드의 말을 납득함으로써 그런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다시 가던 길을 계속 가렴, 레이몬드.”

“……그러지.”

레이몬드는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나를 한 번 더 힐끔 쳐다보더니 나와 다리아 사이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다리아는 조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레이몬드를 향해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우리를 지나쳐 가던 레이몬드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클로이.”

감정을 알 수 없는 담백한 목소리였다.

“얼굴에 살이 올랐군.”

“네……?”

두 눈만 끔뻑이며 그를 쳐다보자, 레이몬드가 푸스스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러니까, 더 예뻐졌다는 소리야. 훨씬 보기 좋아. 표정도, 목소리도.”

“아…….”

예고 없이 치고 들어온 한마디에 가슴이 쿵덕거렸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말을 더듬는 내 모습이 멍청하게 보이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레이몬드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잠깐, 레이. 너 지금 부인인 나를 두고 당당하게 다른 여자에게 예쁘다고 말한 거니?”

다리아가 과장된 목소리로 놀리듯 외쳤지만 레이몬드는 한마디 대꾸 없이 그대로 우리를 두고 그냥 가 버렸다. 점점 빨라지는 그의 걸음을 보며 아쉬운 마음이 가득 들었다.

“흥.”

레이몬드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다리아는 콧방귀를 꼈다. 아마도 더 재미나게 놀리지 못한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이럴 때 그녀의 짓궂음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내가 되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클로이?”

“무엇이요?”

“레이몬드 말이야. 아무래도 수상하지 않아? 이 시각에 굳이 이곳을 지나쳐 갈 필요가 뭐 있다고.”

나는 오랫동안 황궁에 살았던 다리아와 달리, 레이몬드의 일상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도 그저 그가 마련해 준 보금자리에서 어린 에스델을 돌보며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던 나였다.

그래서 나는 선뜻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줄 수가 없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게다가 저 길로 가면 막다른 길이 나오는걸?”

“네? 그럼 왜 폐하께 알려 주지 않으셨어요?”

내가 깜짝 놀라 묻자 다리아는 음산한 표정으로 후후후, 하고 웃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몬드가 잔뜩 빨개진 얼굴로 다시 걸어왔다.

“안녕, 레이? 또 그냥 지나가는 길이니?”

“…….”

레이몬드는 그녀의 인사에 화답해 주지 않고 대신 무서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그 위압감에 나는 몸을 움찔 떨며 움츠렸다.

그러자 레이몬드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우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다리아의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 * *

다리아에게는 나 말고도 두 명의 시녀가 더 있었다.

그녀가 레이몬드와 결혼을 하기 훨씬 이전부터 친구였다는 엘리야 젬마 후작부인과 그녀의 사촌 동생인 캐롤라인 공작가의 베스티였다.

변덕이 심한 다리아는 자신의 시녀를 종종 갈아치우곤 했는데, 그 두 사람은 근 십 년 가까이 그녀의 시녀 자리를 지켜 온 사람들이었다.

젬마 후작부인은 결혼을 한 여자이기 때문에 나처럼 황궁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수도의 저택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다녀가곤 했다.

그러나 다리아의 사촌동생인 베스티 캐롤라인 공녀는 나와 같이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였음에도 황궁에 머무를 때보다 그렇지 않은 때가 더 많았다.

“못 보던 얼굴이네?”

내가 황궁에 온지 딱 이 주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베스티는 인사도 없이 황후궁에 들이닥쳤다. 다리아를 지나쳐 그 맞은편에 놓인 소파에 몸을 파묻은 그녀는 나를 힐끔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이스는 어딜 간 거야? 다리아 언니, 그새 또 시녀를 갈아치운 거예요?”

거침없는 그녀의 태도에 다리아는 눈가를 찌푸렸다.

“루이스는 이제 없어. 이 아이는 클로이야. 클로이, 여기 이 버릇없는 아이가 사랑하는 나의 사촌 동생이자 캐롤라인 공작가의 고명딸 베스티 캐롤라인이란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기며 베스티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캐롤라인 공녀님. 클로이 가넷슈입니다.”

“클로이 가넷슈? 아, 그 루드비히 대공의 후원을 받는다는! 그러고 보니 신년 무도회 때 멀리서 널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베스티가 환해진 얼굴로 박수를 치며 몸을 들썩였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네 욕을 어찌나 하고 다니는지. 그래서 항상 궁금했었어. 기껏해야 대공가의 방계 정도인 여자애가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질투하는 걸까. 그런데 이제 보니 왜 후작 영애가 너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아!”

그다지 내가 바라지 않는 주제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난처함에 눈동자를 데루룩 굴리자, 베스티가 덥석 내 얼굴을 붙잡았다.

“멍청한 로잘라인 계집애가 널 경계하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스스로가 바보라는 걸 인정하는 거겠지.”

베스티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얼굴을 놓아주지 않았다. 대뜸 상대의 얼굴을 붙잡고 매만지는 것은 캐롤라인 공작가의 가풍인가 보다.

“그런데 왜 다리아 언니의 시녀로 들어온 거야? 루드비히 대공의 후원이라면 충분히 좋은 신랑감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설마 너도 황제 폐하의 정부가 되고 싶은 거니?”

“베스티!”

점점 격이 없어지는 베스티의 말에 다리아가 언성을 높였다. 화난 표정의 다리아는 처음 보았기에 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나 베스티는 내 얼굴을 놓으며 심드렁하니 코웃음을 쳤다.

“왜,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이제까지 언니가 갈아치운 시녀 중 절반 이상은 폐하를 유혹하는 데 실패해서 쫓겨난 거잖아요.”

다리아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으나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스티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너무 기대하진 않는 게 좋을 거야. 황제 폐하는 생각보다 심미안이 까다로우시거든. 다리아 언니가 그렇게 많은 시녀들을 갈아치우면서 어떻게든 폐하의 아이를 갖게 하려고…… 아, 너도 알지? 다리아 언니는 아이를 한 번…… 꺄악!”

세상 두려울 것 없다는 태도로 무례한 말을 이어 가던 베스티는 날아오는 손찌검에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튀어 올랐다.

“지금, 지금 날 때린 거예요?”

두 눈을 부릅뜨며 다리아를 노려보는 베스티의 눈가에 눈물이 아롱아롱 맺혀 있었다.

다리아는 대답 대신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연이어 베스티의 반대편 뺨을 내리쳤다. 철썩, 피부를 때리는 마찰음이 생각보다 더 둔탁하게 방 안을 울렸다.

다리아는 짜증스러운 손놀림으로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바닥에 던지면서도 입꼬리는 우아하게 말아 올렸다.

“그러게 누가 함부로 입을 놀리랬니?”

“다, 당장! 당장 아버지께 말씀드릴 거예요!”

“말해 봐, 잘난 네 아버지에게.”

베스티가 울먹이며 외쳤으나, 다리아는 그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옅은 살의마저 느껴지는 그 시선에 지켜보는 내 몸이 오싹해졌다. 나는 문득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들었던 다리아에 관한 풍문을 다시금 떠올렸다.

숙부인 캐롤라인 공작과 그의 식솔들을 모조리 죽이고 스스로 공작이 되었다는……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잔혹한 방법으로 그들을 죽였는지…….

어쩌면 그녀의 사촌 동생인 베스티 또한 그녀가 죽인 이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진 나는 괜히 양손을 꼬옥 맞잡았다.

“어떻게 다짜고짜 손찌검부터 할 수가 있어요? 이, 이러니 바보같이 아이도 잃고 남자도……!”

쨍그랑!

집기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베스티가 기겁을 하며 밖으로 뛰쳐 나갔다.

정작 유리잔을 던진 다리아는 흥분하는 기색 하나도 없이 베스티가 나간 방문만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나는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후우…….”

다리아의 입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새어나온 뒤에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황후 폐하?”

“그래. 아니, 그다지 괜찮지가 않구나.”

다리아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썼다.

“아비와 오라비들의 애정만 지나치게 받고 자라 방자하게 컸지. 이따금씩 내 속을 긁는데, 오늘은 수위가 지나쳤어.”

“…….”

“베스티가 한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단호하게 말한 다리아는 문득 내 표정을 보고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러지?”

“아니요, 저어…….”

“설마 처음 들었니? 내가 아이를 한 번 유산했다는 이야기.”

“…….”

“그리고 그 뒤로 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되었지.”

“아…….”

황망히 짐작만 하던 베스티의 뒷말을 다리아의 입으로 듣고서 소심하게 탄식했다.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리아를 만난 뒤로 한동안 흐르지 않던 눈물이었다.

나는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것만을, 그리고 그녀를 그렇게 만든 이가 카일로스라는 것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카일로스를 만나기 전의 일이라, 나는 카일로스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그런 몸으로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유산…….

에스델을 잃은 적이 있던 나는 그 잔인한 두 음절에 그만 양손으로 붉어진 눈시울을 가렸다.

카일로스, 당신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토록 아프게 만든 걸까. 나는 그 한 사람을 망가뜨린 것만으로도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당신은 대체 그 죗값을 어떻게 치르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상에 퍼진 소문이고.”

흘깃 고개를 들자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다리아가 있었다.

“내가 그 후로 아이를 갖지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고 소문이 났지. 하지만 황궁 주치의의 말로는 내 몸엔 아무런 이상도 없다더구나.”

“네……?”

“그렇게 소문이 나자 놀랍게도 나를 향하던 은밀한 공격들이 사라졌어. 누군가 나와 레이의 아이를 반기지 않는 이가 있다는 거겠지.”

다리아는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길쭉한 다리를 꼬았다.

“사실 그 아이는 레이몬드의 아이가 아니었는데도 말이야.”

“……!”

“애초에 당시의 레이는 고작 열네 살이었는데, 코흘리개 때부터 보아 왔던 그 아이와 내가 무엇을 했겠니.”

나는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다리아는 스산하게 웃으며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건 비밀이야. 그러니 절대 어딜 가서도 말하면 안 돼, 클로이. 다른 곳에 말을 하면 너를 죽일 거야.”

낮게 위협하는 목소리에 털끝이 쭈뼛 섰다.

“물론 너는 딱히 말할 사람도 없어 보이지만.”

“황후 폐하,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와 두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런 엄청난 비밀을 이렇게 제게 알려 주시면…… 제가 어떤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건데, 너무 위험하잖아요.”

물론 나는 그녀의 비밀을 어디 가서도 누설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을 하는 이유는 거슬러 온 시간 속의 레이몬드가 생각난 까닭이다. 바보같이 나를 사랑해 버리고 모든 것을 내어주었던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고 믿었던 이유로 레이몬드는 결국 죽고 말았다.

나는 이미 한 번 레이몬드를 죽인 여자였다. 그런 나를 믿고 비밀을 말해 주는 다리아가 그와 같은 전철을 밟을까 두려웠다.

“내가 네게 이걸 알려 주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야.”

다리아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너라면 레이몬드와 맺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야. 그리고 난 네가 그 과정에서 내 눈치를 보지 않길 바라고 있어.”

“그런 말씀 마셔요, 황후 폐하. 저는…… 제가 감히 그럴 순 없어요.”

“레이몬드를 기만하라는 말이 아닌 걸 알잖아. 비록 레이몬드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나는 내 나름의 방식대로 레이몬드를 아끼고 있어. 어린 나이에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된 아이야. 오직 선황제의 유지 때문에 마음도 없는 나와 결혼을 했지. 거기에다 다른 남자의 아이마저 품어 주려 했던 다정하고 책임감 있는 남자야. 그런 남자가 지금까지 마음 붙일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어.”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사람…….

예전의 나는 레이몬드를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엾지 않다고. 가엾은 쪽은 그에게 밀려 아무것도 갖지 못한 카일로스라고. 어리석은 감정에 도취되어 그토록 아둔하게 카일로스의 말만을 맹신했다.

묘하게 술렁이는 가슴을 억누르며 나는 다리아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요, 폐하께서는 분명 저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어요.”

그러자 다리아가 피식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너도 느끼고 있지 않아? 레이몬드가 너를 보는 시선이 평범하지 않다는 거.”

나를 보는 시선이 평범하지 않다고? 나는 알 수 없었다.

거슬러 온 시간에서의 그와 지금의 그가 내게 보이는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비록 과거의 시간에서 그가 내게 보였던 그 애정 어린 눈빛이 지금도 이따금씩 느껴졌지마는,

……그래도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달라야 했다. 똑같은 과오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은근히 고집이 센 아이구나, 클로이.”

“……죄송해요, 황후 폐하.”

“전에도 말했지만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다리아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내 손을 놓았다.

“쓸데없이 마음이 약한 것 같아 걱정이 되네.”

“마음이 약하지 않아요.”

“그래.”

눈가를 문지르는 손길은 동성 친구가 없던 내게 무척이나 낯설고도 그리운 느낌을 주었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가 생각이 나서, 나는 다리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말했다시피 내 몸은 지극히 정상이니까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몸이 정상이라 해서 마음까지 정상일 순 없잖아요. 아이를 잃은 슬픔이 그토록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도 이렇게 슬픈데, 세상의 빛조차 보지 못하고 떠난 아이를……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나는 안다. 아이를 잃어 본 적이 있는 어미에게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걸. 도리어 해묵은 슬픔을 캐내어 애써 참고 있는 마음을 아프게 난도질할 뿐이라는 것도.

“잠시 무례를 범할게요, 황후 폐하.”

그래서 나는 예전에 브란스 경이 나를 위로해 주었을 때 했던 말을 따라하며 그녀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 다리아가 태연함을 잃고 잠시 멈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레이몬드를 유혹해 달랬더니, 나를 유혹하고 있네.”

다리아가 푸스스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나는 다리아를 따라 작게 웃었다.

“죄송해요, 황후 폐하. 저는 황후 폐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널 두고 레이와 경쟁하고 싶지는 않거든.”

잔잔한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울린 순간, 나는 레이몬드를 언급한 그녀의 농담에도 부담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그저 웃을 수 있었다.

* * *

곧바로 캐롤라인 공작에게 달려가 다리아와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할 것이라고 생각됐던 베스티는 의외로 꿋꿋하게 황후궁에 남아 있었다.

당당하게 내 방에 찾아와 주인처럼 버티고 앉아 있는 그녀의 눈치를 힐끔 보자, 베스티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니, 그 눈빛은? 내가 여기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아, 아니요.”

나는 황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캐롤라인 공작성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공작성으로 꺼지라는 거야?”

베스티는 앙칼지게 외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떨떠름해진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내 침대였고, 나는 이만 취침할 시간이었다.

“저…… 어째서 공녀님의 방을 두고 제 방에…….”

“다리아 언니랑 그 난리를 피웠는데 창피하게 어떻게 내 방으로 바로 가겠니?”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베스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까 보았던 베스티는 창피함을 모르는 오만한 귀족 영애 같았는데, 지금 이 모습은 어쩐지 나와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며칠 동안 여기 숨어 있을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

거침없이 다가와 비밀을 만든 뒤 발설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것 또한 캐롤라인 공작가의 가풍인 듯했다.

물론 이미 여러 차례 다리아에게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받은 나는 더 이상 그 말이 무섭지 않았다.

“차라리 황후 폐하께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건 싫어!”

베스티는 무릎을 모아 세우며 그 위로 고개를 푹 파묻었다.

“다리아 언니에게 사과를 하느니 콱 창밖으로 뛰어내려 죽어 버릴 거야. 애초에 내가 없는 말을 지어 낸 것도 아니고…….”

“하지만 공녀님의 말이 황후 폐하께는 상처가 되는 말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사과를 하는 게…….”

“그 여자가 상처를 받는다고?”

베스티가 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자기 부모가 갑작스레 비명횡사하고, 사랑해 죽겠다던 연인이 실종되고, 심지어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잃었을 때마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독한 여자야. 그런 여자가 겨우 내 말 몇 마디로 상처받을 리 없잖아?”

나는 잠시 멍하니 생각이 비워진 채로 베스티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엄청난 뒷이야기를 엿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한마디가 가슴에 박혔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슬프지 않을 수가 있나요?”

“뭐?”

내가 자신의 말에 반박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베스티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공녀님은 겪어 보지 못했잖아요. 아이를 잃고도 슬퍼하지 않는 어미는 없어요.”

나는 내가 잃어야 했던 나의 작은 에스델을 떠올렸다. 나를 두고 먼저 떠났던,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하다못해 대공성에서 기르던 품종 좋은 암말마저도 자신의 새끼를 잃고 사흘간 곡기를 끊었다.

비록 나의 세상은 좁았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그러했다. 그러니 다리아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그녀의 모정마저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그리고…….

“정말 황후 폐하께서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공녀님께 화를 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 그건 그냥 그 여자가 나를 괴롭히려고 그런 걸 수도 있지! 다리아 언니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베스티는 고집을 부리면서도 내 눈치를 슬그머니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그 위세 높은 캐롤라인 공작가의 아가씨가 내 눈치를 살피는 게 신기하면서도 한숨이 포옥 새나왔다.

“아무튼 공녀님이 여기 계신 건 비밀로 해 드릴게요.”

“물론, 당연히 그래야지!”

다짜고짜 내 방을 차지하고 앉은 베스티였지만, 그럼에도 은연중에 내 허락을 기다렸나 보다. 순식간에 밝아진 얼굴을 한 그녀가 구석으로 살짝 비키며 침대 옆 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어서 올라와, 클로이! 같이 자자!”

그녀는 나와 함께 자는 게 불편하지 않은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얼결에 그녀의 옆 자리에 올라가 누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랑 같이 자는 게 불편하지 않으세요?”

“딱히. 나는 원래 다른 사람이랑 자는 거 좋아해. 그런데 다리아 언니는 날 싫어하고, 공작성에 가도 오라버니들은 이제 다 컸다고 같이 안 자 주는걸.”

아주 오래전부터 항상 혼자 자는 습관을 지녔던 나는 베스티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한 침대를 공유했던 이는 그나마 레이몬드뿐이었다.

레이몬드…….

그러고 보니 당신은 그 짧은 기간 동안 참 많이도 내 삶에 관여했구나.

“게다가 미인과 함께 잠을 잘 수 있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니까.”

“네?”

어딘가 위험한 느낌이 드는 베스티의 발언에 나는 파드득 놀라 그녀와 간격을 벌렸다. 그러자 베스티가 낄낄 웃으며 나를 놀렸다.

“장난이야. 넌 그렇게 안 생겼는데 엄청 귀엽다. 다리아 언니가 좋아할 성격이야.”

“황후 폐하께서 좋아할 성격이라니요?”

“딱 놀려 먹기 좋은 성격인걸. 조심해, 다리아 언니는 성격이 고약해서 너 같은 앨 한번 물면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고약하다느니, 문다느니…… 모두 제국의 황후에게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말들이었다. 그보다 놓아주지 않을 거란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베스티는 조심하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늦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어쩌다 언니의 시녀가 된 거야?”

“아, 음, 그건…….”

꽤 난처한 질문이었다. 나도 안다. 카일로스를 피하기 위해 레이몬드의 소개로 다리아의 시녀가 된 내가, 다른 이들이 보기에 얼마나 괴상한 모양새인지 말이다.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

내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베스티는 픽 웃으며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그러나 나는 불을 끈 지 한참이 지나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레이몬드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다리아는 정말로 레이몬드가 내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가 이만큼이나 관심을 표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다리아가 한 번 아이를 가졌다고 하였을 때. 그녀와 레이몬드의 아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 한구석에 애매한 감정이 깃들었다.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했다. 더 이상 엮여서는 안 되는 레이몬드와 나를 도와주는 다리아를 생각하면 더욱 가져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몇 번이나 뒤척이던 나는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전히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는 베스티를 두고서 밖으로 나왔다.

다리아의 후원은 밤중에도 곳곳에 불을 밝혀 놨기에 어둡지 않았다. 차가운 밤공기가 정신을 깨웠다. 입술을 벌리자 하얀 입김이 뭉실뭉실 쏟아져 나왔다. 곧바로 흩어져 사라지는 모양이 재미있어서 연신 입김을 불어 댔다.

홀로 키득키득 웃던 나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뻣뻣하게 몸을 굳히고 말았다.

“…….”

“…….”

맞은편 나무 아래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나는 단박에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화끈, 열이 오르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며 몸을 돌렸다.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던 걸까? 설마, 또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던 걸까?

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자박자박 공간을 울렸다. 그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은 더욱 세차게 쿵쿵 뛰었다. 다 큰 처녀가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웠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상대가 레이몬드라는 사실이 더.

“클로이.”

등 뒤에서 그의 굵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긁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몸을 돌렸다.

“좋은 밤이에요, 폐하.”

“……그래.”

조심스럽게 숙였던 허리를 펴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 앞에 서 있는 레이몬드가 있었다.

“흠, 나는 그냥…….”

그가 헛기침을 살짝 하며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황궁의 경비를 살피는 중이었다.”

“네에…….”

굳이 물어 보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말해 주는 레이몬드의 모습에 괜히 기운이 빠졌다.

그렇게 딱 잘라 말하지 않아도 그가 나를 보기 위해 이곳에 발걸음 했을 거란 생각은…… 아주 조금, 나 혼자서만 아주 조금 하다 말 텐데.

클로이 가넷슈는 분수를 아는 여자였다. 카일로스는 나의 그러한 점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분수를 아는 클로이 가넷슈는 절대 섣부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다리아와 함께 지내는 건 괜찮나? 지난번에 언뜻 보니 그 여자가 너를 꽤 괴롭히는 것 같던데.”

“황후 폐하께서는 아주 잘 대해 주셔요. 모두 폐하의 덕분이에요.”

“음…….”

레이몬드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너무 그 여자를 신뢰하지는 마. 어떻게든 널 이용해 내게서 더 많은 것을 얻어 내려 하는 여자야. 예전부터 어떻게 하면 날 구슬릴 수 있을까 연구하던 여자이기도 했고……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그 여자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새삼 주위에서 다리아를 보는 시선이 굉장히 박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다리아는 레이몬드를 상당히 좋게 평가하였는데 말이다.

“게다가 오늘은 캐롤라인 공녀가 돌아오면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는데.”

“아, 네에…….”

잔뜩 인상을 쓰며 내 얼굴과 몸을 살피는 레이몬드의 시선에 괜히 등이 꼿꼿해졌다. 한참 동안 나를 훑던 레이몬드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친 곳은 없는 건가?”

“네, 전혀요.”

“다행이군.”

그제야 딱딱하던 그의 얼굴이 풀리며 자그마한 바람을 닮은 웃음소리가 피시식 새나왔다.

그 작은 웃음에 또다시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나는 나직하게 웃고 있는 그를 향해 불쑥 물었다.

“저를 걱정하셨나요?”

“뭐?”

그리고 나는 곧바로 그에게 물은 것을 후회했다. 그의 얼굴에 만연해 있던 잔잔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으니까.

“죄, 죄송해요, 폐하.”

나는 당돌하게 묻던 것과 달리 곧바로 소심해져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의 한숨 소리에 나는 더욱 위축되고 말았다.

“으음…….”

작게 앓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두툼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네가 더 이상 주눅 들지 않을까.”

“…….”

“일일이 내 기분을 살피며 눈치를 보지 않아도 돼.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앞에서도 위축되지 마.”

“죄송…….”

“죄송해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투박하지만 섬세한 손길이 내 얼굴을 들어올렸다. 마주치는 붉은 눈동자에 내 몸이 그대로 불타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게 네게 어려운 일이라면, 강요하지는 않을게. 어디까지나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니까.”

그의 입술이 진한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순간 또 다시 두근, 심장이 뛰었다. 두려움은 아니었다. 놀란 것도 아니었다.

늘 그를 생각할 때면 함께 고개를 내밀던 죄의식과는 미묘하게 다른 감정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클로이 가넷슈의 짧은 인생에 이만큼이나 나의 행복을 빌어 주는 사람이 있었을까. 기억조차 희미한 어머니를 제외한다면, 단연코 없었다.

“어째서 폐하께선 이렇게까지 제 행복을 빌어 주시는 거예요?”

“말했잖아. 나는 책임을 지는 거라고.”

더 물어 보았자 같은 대화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다리아는 내게 그가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책임감 있는 남자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어쩌면 레이몬드는 사랑 없는 결혼을 해야 했던 자신의 부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내게도 그저 책임을 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 이상의 망상은 말아야지, 바보 같은 클로이.

“대공성에서 보았을 때의 너는 항상 울기만 했는데, 이제는 간간이 웃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 주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

낮은 웃음소리가 따스하게 나를 감쌌다. 나는 멍하니 그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브란스 경만큼은 아니지만, 레이몬드 또한 굉장히 준수한 외양으로 그 무서운 분위기와 위압감에도 불구하고 수도의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정작 내가 좋아했던…… 나의 이상형이었던 카일로스와는 정반대의 생김새 때문에 한 번도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는 더 많이 웃어 줘. 아니, 너는 틀림없이 더 많이 웃게 될 거야.”

그가 내 머리칼을 한 손으로 헤집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 말에 나는 화끈,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잠시 허공에 놓인 자신의 손끝을 쳐다보던 레이몬드가 나붓하게 웃었다.

“……저희는 서로 엮이면 안 되는 사이잖아요.”

“맞아. 그래서 최대한 노력하고 있지. 하지만 네가 충분히 안전해져서 걱정 없이 웃을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때까지는 나도 다리아를 이용해 너를 이곳에 묶어 둘 생각이야.”

“…….”

나는 입술을 꾸욱 다문 채 그의 발끝만 내려다봤다.

“그럼, 나는 다시 황궁의 경비를 살피러 가지.”

레이몬드가 그렇게 말하며 멀어져갔다. 이번에는 막다른 길이 아닌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의 모습이 완벽히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미묘한 두근거림이 아직도 가슴 위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던 내 시야에 화려한 황후궁의 건물이 들어왔다. 불 꺼진 내 방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퍽 신기한 우연이라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한동안 줄곧 황후궁에 박혀서 그림만 그리던 다리아는 돌연 바깥 활동을 시작하겠노라 선포했다. 신년 무도회 때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다리아의 그러한 선언은 모두 나 때문이었다.

‘루드비히 대공이 너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면 네 존재를 과시할 필요가 있어.’

다리아는 내게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다시 말했다. 이미 그만큼 상응하는 대가를 레이몬드로부터 받아내기로 했다는 말과 함께.

이쯤 되니 레이몬드가 약속한 대가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벌써 긴장되니?”

넓은 화장대 앞에 앉아 내게 머리를 손질 받던 다리아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네, 조금…… 이요.”

나는 긴장한 기색을 최대한 감추기 위해 노력하며 고개를 살풋 끄덕였다.

내가 오늘 다리아와 함께 가게 될 오페라 하우스는 수도의 귀족 아가씨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 했다. 카일로스가 오래전에 만나던 아가씨들과 종종 그런 곳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카일로스는 내게 남자를 대하는 데에 필요한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여자를 대하는 법은 단 하나도 알려 주지 않았다.

남자를 ‘대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성적인 접근이었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화하는 법은 배울 수 없었다. 애초에 황제를 유혹할 미끼였던 내게 그러한 것들을 배우는 건 불필요한 낭비일 뿐이었다.

게다가 루드비히 대공성에서 외따로 자란 나는 카일로스 이외의 사람과는 많은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과 마주치게 될 일이 조금 두려웠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무엇보다 내가 함께 가잖니.”

오만하게 턱 끝을 살짝 젖히는 다리아를 보니 조금은 긴장이 풀려서 나도 그녀를 따라 웃을 수 있었다. 하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가 함께 가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정말 영광이에요, 황후 폐하.”

그러자 삐딱하니 팔짱을 끼고서 내 옆에 앉아 있던 베스티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영광은 무슨.”

베스티는 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다리아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리아도, 베스티도 모두 그날 일은 없던 일처럼 행동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언제까지 준비만 할 거예요? 이러다가 늦겠어요.”

“자꾸 툴툴거리면 두고 갈 거란다, 베스티.”

다리아의 엄포에 베스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얼굴 가득 담긴 불만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함께 가겠다고 버티는 베스티가 귀여워서 나는 작게 웃었다.

‘오페라 하우스? 재밌겠다! 나도 갈래!’

‘베스티는 오페라를 좋아하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거기 가면 엘리자베스 로잘라인도 올 거 아냐. 그 멍청한 계집애가 너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지 않아?’

베스티의 말에 따르면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정신을 죽인 것은 카일로스였지만 나의 육신을 죽인 것은 그 여자였다. 그만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나를 싫어하는 여자인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클로이. 우리 가문이 걔네 가문보다 더 잘나가. 그리고 뭣하면 다리아 언니 뒤에 숨으면 되지, 뭐.’

베스티는 내가 로잘라인 후작 영애와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할까 봐 걱정하며 내 손을 꼬옥 붙들어 주었다.

그 모습에 다리아가 베스티를 가리켜 ‘생각이 없고 머리가 비어서 나오는 말은 다 입 밖으로 내뱉지만 그것만 아니면 그럭저럭 귀여운 사촌 동생’이라 했던 게 생각이 났다.

베스티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가 다리아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더욱 안타까웠다.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황궁 사용인이 다가와 이제 출발해야 할 시간임을 알려 주었다. 다리아가 앞장서서 걸었고, 나와 베스티는 그 뒤를 따라갔다. 카일로스와 함께일 적에도, 그리고 그를 벗어나 황궁에 온 뒤에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바깥 나들이였다.

우리를 태운 마차는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풍스러운 양식으로 건축된 오페라 하우스는 웅장하고 화려했다. 우리는 그 안에서도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황족들을 위한 공간으로 안내되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하우스 관리인이 커튼을 쳤다. 우리를 위한 좌석 세 개와 함께 멋들어진 핑거 푸드와 붉은 와인이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었다.

“클로이, 너는 절대 저 와인을 마실 생각 하지 마.”

다리아는 엄하게 말하며 혼자 와인 잔을 들었다.

“베스티, 너도.”

“왜, 왜요? 저도 마시고 싶어요!”

“우리 둘만 먹으면 클로이가 속상하잖니. 그러니 너라도 마시지 말아야지. 관리인에게 주스를 준비해 달라고 하렴.”

“세상에, 어쩜 이렇게 심보가……!”

나는 베스티가 차마 잇지 못한 뒷말을 최대한 상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다리아의 손에 들린 와인 잔을 쳐다보았다.

와인이란 게 얼마나 맛있는지 기억하고 있는 내 몸이 절로 반응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저…… 황후 폐하, 그래도 한 잔만 마시면 긴장도 더 풀리고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긴장을 풀긴 왜 푸니? 더 긴장하고 있어!”

분명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면서 다리아는 소심한 나의 제안을 단칼에 잘라냈다. 나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관리인이 가져다준 오렌지 주스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노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막이 올랐다. 황족들을 위해서만 특별히 마련된 공간답게 공연을 관람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극의 내용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였다. 다리아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라며 맹렬히 비판했고, 베스티는 진부한 스토리라고 혀를 쯧쯧 찼다.

셋 중 오직 나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을 붙잡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 냈다.

내가 운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남들이 진부하다 말하는 저 흔한 사랑 이야기를 보며 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뿐이었다.

‘사랑이란 상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지. 그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심지어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도와주는 게 바로 사랑이야.’

오랜 옛날, 카일로스는 내게 사랑에 대해 알려 준 바가 있었다. 나는 점차 자라며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말에 따라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그가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루어 주고자 했다.

그를 위해 다른 남자를 유혹하고, 다른 남자와 자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굳게 믿어 왔었다. 그러나 저 흔한 사랑 이야기 어느 곳에서도 내가 행했던 사랑은 없었다.

어쩌면 나는 남들과 다른, 조금 특별한 사랑을 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대 위의 배우가 말했다.

‘그걸 사랑이라 하지 마오. 오롯한 희생으로 그대가 느낀 것이 행복이 아닌 절망뿐이라면, 그걸 어찌 사랑이라 한단 말이오.’

단 한 번도 행복하지 못했던 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처절했던 걸까. 사랑도 아니었는데.

“어머나, 클로이! 눈이 빨개졌어!”

첫 번째 막이 끝났을 때, 베스티가 나를 보며 놀라 말했다.

“저는 원래 눈이 빨개요.”

“지금 네 눈동자 색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너, 울었던 거야? 이걸 보고?”

베스티는 나의 놀라운 감수성에 감탄했다. 사실 나는 그다지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 아니었는데, 왠지 머쓱해졌다.

“조금 씻고 오는 게 좋겠구나. 그래서는 다음 막은 제대로 관람하지도 못하겠어.”

한결 차분한 다리아의 조언에 따라 나는 눈가를 씻기 위해 세면실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극단의 올해 첫 공연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복도에는 얼굴은 모르지만 스쳐보기에도 굉장히 위엄 있어 보이는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무슨 후작 부인이니, 백작 영애니 하는 이들을 피해 걸었다. 어쩐지 이 공간에서 나만이 홀로 이질적인 존재 같았다.

세면실에 도착해 꼭지를 돌리자 쏴아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응시했다. 차가운 물에 적신 손끝으로 화끈한 눈가를 두드렸다. 거울을 보니 눈이 조금 부은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극을 보며 운 건 나만이 아닌 듯, 나처럼 부은 눈가를 찬물로 진정시키는 어린 귀족 영애들이 두엇 더 보였다.

“넌 클로이 가넷슈……?”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거울에 비친 여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최악이라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로잘라인 후작 영애.”

“네가 왜 여기에……? 아니, 일단 자리를 옮겨서 잠시 이야기를 하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나를 두고서 먼저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따라오라는 신호인 것 같았다.

주위에서 나를 향한 웅성거림이 들려 왔다. 개중에는 신년 무도회 때 나를 보았다며 아는 척을 하는 자들도 있었고, 내가 황후 폐하의 마차를 함께 타고 온 걸 들먹이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나직한 한숨을 쉬고는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사라진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뵈어요.”

인적이 드문 테라스는 휴게 용도로 마련된 공간인 듯싶었다. 새삼 없는 게 없는 오페라 하우스에 속으로 감탄하며 나는 담담하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 너는 지금 내게 오랜만이라는 말이 나오니?”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내게 화가 나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화가 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서 무거운 눈꺼풀만 깜빡였다.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네가 사라진 이후로 대공성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데! 전하께서 얼마나 큰 상심에 빠지셨는데!”

상심에 빠졌다고? 그가?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상상하려 애를 써도 상심에 빠진 카일로스를 상상해 낼 수 없었다.

“황제를 유혹하라고 애지중지 길러 주었더니 주인을 배신하고 달아난 꼴이라니. 정말 천박해! 오늘 이곳에 올 정도면 상당히 이름 있는 가문의 영식이라도 꼬셔 낸 모양이지? 아니면 어느 지체 높으신 귀족 나리의 정부라도 된 거니?”

신랄하게 악의를 내비치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어떻게 하면 네가 더 이상 주눅 들지 않을까.’

얼마 전 밤중에 우연히 마주쳤던 레이몬드가 내게 해 준 말이 생각났다.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앞에서도 위축되지 마.’

나는 언제나 나를 위축되게 했던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와는 달리 그의 옆자리에 당당하게 설 수 있던 여자. 그 위치에서 그의 그림자 아래에 숨어 있던 나를 조롱하고 비웃던 여자.

그러나 나는 이제 그녀의 앞에서 위축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더 이상 그녀가 부럽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차지한 그의 옆자리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항상 제가 사라지기만을 바라지 않으셨나요?”

“뭐……?”

“제가 떠난다면 누구보다도 후작 영애께서 가장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지금 이게 어디서 큰소리니?”

나는 한순간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는데, 잔뜩 약이 오른 후작 영애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전하께 필요한 아이라 해서 봐주었더니, 정말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후작 영애의 손바닥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저것이 내 얼굴을 때리겠구나,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세상에, 저 막돼먹은 계집애! 지금 못생긴 게 누구를 때리려는 거야?”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베스티가 로잘라인 후작 영애를 보며 소리쳤다. 순간 허공에서 멈칫한 후작 영애의 손이 바르르 떨리며 그대로 아래로 내려왔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짧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 베스티를 쳐다봤다.

“무슨 일입니까, 캐롤라인 공녀. 이 아이와 아는 사이였던가요?”

애써 화난 기색을 숨긴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우아하게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물었다. 방금 전까지 내게 악의를 품고 쏘아붙였던 여자와 동일 인물이란 게 오싹할 정도였다.

“물론, 알고말고. 아주 각별한 사이지.”

베스티는 싱긋 웃으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곤 들으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클로이는 나랑 같이 다리아 언니의 궁에서 지내고 있거든.”

그 말에 순식간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그제야 베스티가 활짝 열어 놓은 문 사이로 빼꼼 보이는 어린 영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후 폐하의 궁에서……?”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잠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양 주먹을 꾸욱 말아 쥐었다.

“그것 참 놀라운 일이네요. 평생을 대공성에서만 살아 온 저 아이가 황후 폐하와 무슨 인연이 닿아서.”

“나는 네가 더 놀라운데? 고작 후작 영애가 지체 높으신 황후 폐하의 사람에게 손찌검하려 들다니. 불같은 성정의 우리 언니가 알면 몹시 진노할 거야. 다리아 언니가 클로이를 굉장히 아끼거든.”

“…….”

다리아는 베스티에겐 사람의 속을 긁는 말만 쏙쏙 골라 하는 신비한 재주가 있다고 했다. 과연 그 말이 사실인지,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굉장히 분해 보였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베스티에게 짧게 묵례를 했다. 베스티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며 팔짱을 끼고 그녀를 지켜봤다.

내 옆을 지나치던 후작 영애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무슨 수로 황후의 시녀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에 베스티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봤으나, 후작 영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영영 돌아오지 마렴. 어차피 카일은 이미 너를 대신할 대용품을 찾아 두었으니까.”

대용품……?

아주 잠시, 낱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멍하니 굳어 있었다. 그런 나를 짧게 비웃는 소리와 함께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밖으로 나갔다. 베스티는 화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 클로이? 저게 방금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대용품…… 카일로스가 대용품을 찾았다고 했다. 나의 대용품을.

“아…….”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베스티를 바라봤다. 베스티는 씩씩거리며 내 눈가를 손수건으로 벅벅 문질렀다.

“저 망할 계집애! 다음번에 만나면 진짜로 박살을 내주겠어! 울지 마, 클로이!”

이상했다. 슬프지 않은데, 나는 정말 슬프지 않은데 왜 또 울고 있는 걸까.

아니, 이건 그저 조금 화가 난 거다. 지난 생의 나는 정말 모든 생을 다해서 그에게 헌신했다. 그런데 그에게 나는 고작 없어지면 다른 대용품을 찾으면 그뿐인 그런 존재였나 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것이 코앞의 현실로 다가오니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후작 영애가 무슨 말을 했든 신경 쓰지 마! 원래 웃으면서 칼을 꽂는 여자잖아!”

“…….”

나는 문득 나를 향한 거친 목소리가 너무나 따스한 위로로 다가와서, 베스티를 향해 흐릿하니 웃었다. 그러자 베스티가 화르륵 얼굴을 붉히며 성질을 냈다.

“울지 말라고 했더니 왜 바보 같이 웃고 있어? 정말…….”

“정말 이래서는 더 이상 공연 관람도 못 하겠구나.”

투덜거리는 베스티의 목소리를 잘라 내며 다리아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황후 폐하…….”

모처럼 나온 나들이를 내가 망친 것 같아서 나는 죄인이 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 들어.”

그러나 곧바로 내리친 그녀의 엄명에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야 했다. 비록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는 못하고 눈동자를 데루룩 굴렸지만.

“너를 탓하는 게 아니야, 클로이. 너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걸.”

다리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잘못이 아니란 걸 너도 알잖아, 그렇지?”

“……네.”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다리아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어차피 여기 온 목적도 어느 정도 달성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자꾸나.”

다리아가 몸을 돌려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어린 아가씨들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어린 영애들은 곧바로 후다닥 흩어졌다.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 내내 내 머릿속에 하나의 낱말이 사라지지 않고 맴돌았다.

‘대용품’…….

카일로스는 정말로 나를 대신할 다른 이를 찾은 걸까. 그렇다면 나는……. 나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한동안 울적해진 기분을 달랠 길이 없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내내 후작 영애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카일은 이미 너를 대신할 대용품을 찾아 두었으니까.’

나의 존재는 그렇게 쉽게 대체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토록 힘들게 그가 원하는 여자가 되려고 안간 힘을 썼던 나의 노력이 너무나 애처로워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이제는 더 이상 그로 인해 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눈물이 났다.

하지만 이건 그 남자 때문에 우는 게 아니었다. 내 존재가 가엾어서, 불쌍해서, 안타까워서…… 한없이 어리석었던 지난 생의 클로이 가넷슈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곧 저러다 말겠지. 그냥 내버려 둬.’

다리아는 내 기분을 살피는 베스티에게 냉정하게 일갈했다. 나는 차라리 그녀의 무관심이 더 좋았다. 이것만큼은 오롯이 나 홀로 이겨 내야 할 문제였으니까.

창가에 앉아 창을 내다보았다. 거슬러 온 시간 속의 클로이 가넷슈는 한 번도 이렇게 창가에 앉아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가 원하는 여자, 그가 필요로 하는 여자, 그가 바라는 여자가 되는 것 외에는 나 자신의 의지로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딱 한 가지, 내 의지로 품었던 것이 그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제는 사랑이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어째서 그 시간 속에는 내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나릿한 한숨을 쏟으며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저 아래에 유난히 큰 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황궁의 경비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마주쳤던 레이몬드가 생각이 났다.

그는 내게 처음으로 행복을 묻던 사람이었다. 오직 나를 위해서 검을 떨구고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그 남자는 내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나는 나의 어린 에스델이 나보다는 그 남자를 닮길 바랐다. 나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나 한 명으로 족했다.

그러고 보니 그도 에스델을 잃은 거구나, 나처럼…….

문득 스치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비록 그는 모르겠지만, 그 또한 에스델을 잃었다.

“…….”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는 차라리 그 모든 비극이 그에게만큼은 없던 일이길 바랐다. 슬픔은 내가 모두 안고 갈 테니.

‘오늘은 경비를 안 살피나.’

나는 무심코 생각하며 피시식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두운 그림자 사이로 한 발짝, 모습을 드러낸 레이몬드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일 초, 이 초, 삼 초…….

“……!”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나는 곧바로 커튼을 치고 몸을 홱 돌렸다.

쿵, 쿵, 쿵, 쿵.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생각하던 내 마음을 드린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얼마 동안 그렇게 서 있었을까. 나는 나직한 한숨을 터뜨리며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모아 세웠다.

“바보 같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인사를 건넬 수도 있었을 텐데. 또 다시 그와 마주친다면 그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이 됐다. 고작 인사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나의 몽매함에 화가 났다.

다시 일어나 창밖을 보았을 때,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 * *

“울적하다고 해서 언제까지 기다려 줄 순 없어. 이미 사람들 앞에 나서기로 한번 결심을 했잖니.”

다리아는 다가오는 자신의 생일날, 황궁에서 무도회를 열겠다고 한차례 선언했다.

“정말 냉정해요, 언니! 클로이는 조금 더 휴식이 필요하다고요!”

베스티가 나를 위해 항변해 주었으나, 다리아는 가볍게 그녀를 무시하며 내게 물었다.

“시간이 더 필요하니, 클로이?”

“아니요, 괜찮아요.”

다리아의 말이 옳았다. 이렇게 그냥 주저앉아 버리는 것은 모두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것뿐이다.

“무도회는 이미 한 번 참석해 본 적이 있지?”

“네.”

황실에서 개최하는 신년 무도회. 나는 그곳에서 레이몬드와 처음 만났다. 내게는 이제 먼 옛날이 되어 버린 기억이지만, 이들에게는 불과 한 달 전의 일일 것이다.

“이번에 루드비히 대공을 초대할 생각인데 괜찮겠니?”

카일로스의 이름이 나오자 잠시 흔들렸지만 나는 곧바로 힘주어 대답했다.

“네, 얼마든지요.”

“씩씩한 자세야. 아주 훌륭해.”

다리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동안 무도회 준비로 바쁠 것이라 말했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카일로스와 다시 마주치더라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도록,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하게 인사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루드비히 대공령은 수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영지였는데도 카일로스가 대공으로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무도회가 열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도회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신기하기만 했다.

‘무도회 하나를 준비하는데 이렇게나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이번 무도회는 그나마 규모가 작은 편이야. 소수의 인원만 초대할 거니까. 하지만 하나같이 명망 높은 가문들의 귀족들이 귀빈으로 오는 만큼 무엇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

다리아는 나를 옆에 두고서 무도회의 준비 과정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오죽하면 그녀의 또 다른 시녀인 젬마 부인이 나를 너무 혹사시키는 게 아니냐고 물을 정도였다.

‘뭐든 처음 배울 때 제대로 배워 둬야지. 그래야 나중에 언제고 도움이 되지 않겠어?’

이번에 배운 것들이 과연 앞으로 내가 살아가며 도움 될 날이 올까 의아했지만 나는 곧 의혹을 거두어야 했다. 쏟아지는 일거리들이 내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젬마 부인은 내게 배움이 빠르다며 칭찬했다.

돌이켜 보면 난 배우는 건 뭐든 잘 했던 것 같다. 어떻게든 카일로스의 관심을 받고 싶어 했던 지난날의 습성 탓이었다.

이렇듯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카일로스의 잔해는 내가 더욱 마음을 굳세게 먹도록 채찍질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무도회의 날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는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카일로스의 앞에서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인사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만 짓씹던 와중에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일이죠?”

문을 열고 나가니 황제의 시종장이 작은 보석함을 들고 서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폐하께서……?”

조심스럽게 보석함을 받아 뚜껑을 열자, 아주 화려하지는 않지만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알이 달린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투명한 유리알 안에는 붉은 꽃잎 세 장이 고아한 자태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같은 꽃잎을 가진 붉은 꽃송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건…….”

“아스타로트 꽃입니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황궁 온실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꽃이지요.”

나는 푸스스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 아스타로트네요.”

제국의 상징인 붉은 꽃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꽃이기도 했다. 나는 느리게 눈을 감으며 과거의 어느 날을 회상했다.

‘그러니까 클로이. 나는…….’

그와 무슨 말을 나누었더라. 희미한 잔상은 안개처럼 뿌옇고 흐릿해서 잘 생각나지 않았다.

카일로스에게 받은 슬픔은 이토록 하나하나 잊히지 않고 남아 있는데, 어째서 그와의 추억은 이리도 희미한 걸까. 나는 왜 레이몬드와의 기억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나.

‘네가 ……으면 좋겠어.’

다만, 이 붉은 꽃을 들고 어울리지 않게 내 눈치를 힐끔 살피던 레이몬드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나는 잠시 먹먹한 눈으로 꽃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시종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꽃 한 송이가 어지간한 보석들의 값어치를 상회한다는 붉은 아스타로트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마침내 해가 저물고 무도회가 시작될 무렵, 베스티는 그녀를 에스코트하러 온 캐롤라인 소공작과 함께 산책을 하러 나갔다.

나는 젬마 부인의 사촌 동생인 빈센트 백작 영식의 파트너가 되어 오늘 밤 무도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가넷슈. 오늘 밤 영애와 함께할 영광을 주어 감사합니다.”

황후궁의 빈 응접실에서 마주친 빈센트 영식은 굉장히 점잖은 남자였으나, 내 신분으로는 파트너가 될 수 없는 남자이기도 했다. 나는 황망한 마음에 얼굴을 살풋 붉히고선 고개를 저었다.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젬마 부인이 아니었더라면 제가 어떻게 감히 영식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겠어요.”

그러자 그가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처음 마주쳤을 때 이미 예상은 했지만요.”

자못 아쉬워하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놀라 물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요?”

“신년 무도회 때 함께 춤을 추었는데 기억나지 않나요?”

“아…….”

솔직히 말하자면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의 나는 워낙 정신이 없었다. 레이몬드와의 대면, 그리고 무도회 중간에 사라져 버린 카일로스와 로잘라인 후작 영애로 인해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또한 지금의 내게는 이제 아득히 먼 옛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죄송해요, 빈센트 영식. 제가 무례를 범했네요. 그날은 정신이 없어서…….”

“첫 데뷔가 얼마나 정신없는지는 나도 잘 알아요. 게다가 레이디 가넷슈는 그날 정말로 정신이 없었지요. 그날 모여 있던 영식들이 모두들 한 번쯤은 레이디 가넷슈에게 춤 신청을 해 보려고 전전긍긍했으니까요.”

빈센트 영식은 나의 사과에 호탕하게 웃었다.

“다만 레이디는 저를 기억 못 하는데 저 혼자 레이디를 기억하고 있는 게 조금 서운할 뿐입니다.”

“어떡하지요? 제가 어떻게 하면 실수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밤은 레이디의 파트너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내가 반드시 그리 하겠다 대답하자 그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빈센트 영식과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덧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무도회장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였기에 우리는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오래전 신년 무도회 때 한 번 와 본 적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 앞에서 짧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빈센트 영식의 손을 붙잡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에 먼저 도착해 있던 몇몇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본래의 클로이 가넷슈는 이 자리에 초대되기에 마땅치 않은 신분이었으나 대공의 피후견인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클로이 가넷슈는 황후 다리아의 시녀였기에 마땅히 그만한 자격이 되었다.

‘명심해, 클로이. 만일 그곳에서 누군가 널 멸시한다면, 그건 곧바로 나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그러니 절대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걸으렴.’

나는 다리아의 엄한 당부를 떠올리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 상태로 사람들의 시선을 그대로 흘려보내며 당당하게 걸었다.

마침내 레이몬드와 다리아가 나란히 앉아 있는 곳까지 와서야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멀리서부터 보아 온 레이몬드는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언제 표정이 좋지 않았냐는 듯 위엄 있는 얼굴로 거만하게 우리를 내려다봤다.

레이몬드의 시선이 잠시 내 쇄골 근처에 머물렀다. 그가 아침에 선물해 준 목걸이가 그곳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터였다.

“잘 어울리는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유일하게 나만이 그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쩐지 얼굴이 더워졌다.

이어서 다리아에게 인사를 하러 온 귀족들이 줄을 섰기에, 우리는 짧게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비켜섰다.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모두 영식의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빈센트 영식은 섬세하게 내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샴페인을 드시겠습니까?”

“아니요, 술은 괜찮아요.”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도회장에서 술을 마신 사실을 다리아가 알게 되면 틀림없이 무섭게 혼을 낼 것이다.

내가 미련이 가득 남은 눈으로 빈센트 영식의 손에 들린 샴페인 잔을 쳐다볼 때였다.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과 로잘라인 후작 영애 드십니다.”

아까 내가 들어왔던 무도회장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두 사람이 등장했다.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선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숨을 멈추고서 손끝을 잘게 떨었다. 카일로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빈센트 영식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카일로스의 시선을 피하며 빈센트 영식을 돌아봤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데요.”

빈센트 영식은 손수건을 꺼내 내 이마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느릿하게 시선을 내리자 여전히 바르르 떨고 있는 내 양손이 보기 싫어서, 두 주먹을 꾸욱 말아 쥐었다.

속이 조금 울렁거려서 나는 구석으로 물러나 빈센트 영식이 가져다준 차가운 물을 마셨다.

“클로이.”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나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리 감았다 다시 뜨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쿵, 쿵, 쿵. 여전히 심박은 빠른 속도로 울리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가슴 위에 올려 요란스러운 심박을 내리누르며 언젠가 그가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우아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숙부님.”

“…….”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하긴, 그럴 테지.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며 떠난 내가 아무 소식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황후의 시녀가 되어 다시 나타났으니까.

“어째서 네가…….”

어쩌면 그가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그 진위를 파악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건 모두 거짓이었나?”

얼핏 담담하게 들리는 음색과 달리, 그 끝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너, 대체 왜 그런 거짓말까지 해 가며 나를…….”

이상했다. 그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쿵쿵 날뛰던 심장이 점차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그를 만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 순간을 그토록 두려워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한결 차분해진 나는 찬찬히 그를 뜯어보았다.

내가 떠난 이후로 크게 상심했다는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말과 달리, 그는 살이 조금 빠진 것을 제외하곤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버린 것이 없는 루드비히 대공의 모습.

“내가 말했잖아, 클로이. 나는 너를……!”

카일로스는 내 손목을 움켜쥐며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숙부님.”

나는 그가 움켜쥔 내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덤덤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손목이 아픈 것 같아요.”

“…….”

그러자 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아도 이제는 썩 감흥이 일지 않았다.

가슴에 얹혀 있던 과거가 흩어져 날아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를 보아도 동요하지 않았다. 맞닿은 살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분노했다. 차갑게, 더 차갑게 분노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있는데, 계속 붙잡고 계실 건가요?”

“…….”

“후작 영애가 이쪽을 보고 있어요.”

“상관없어.”

분노에 눈이 멀어 이성이 흐트러진 걸까. 카일로스는 그토록 공들이던 여자가 멀리서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데도 움직이질 않았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전하, 레이디 가넷슈는 오늘 제 파트너입니다.”

“클로이와는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감히 루드비히 대공가의 일에 끼어들 생각인가?”

빈센트 영식이 난처해 보이는 나를 도와주려고 나타났지만, 카일로스는 음산한 목소리로 그를 향해 위협했다. 빈센트 영식이 나를 흘깃 쳐다보며 눈짓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괜찮아요. 숙부님께서 제게 꼭 하셔야 할 말씀이 따로 있으신가 봐요.”

빈센트 영식은 영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으나 연신 괜찮다며 웃어 보이는 나로 인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웃지 마.”

낮게 으르렁거리는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자, 여전히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은 카일로스가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다른 남자 앞에서 그렇게 웃지 마.”

“제게 이렇게 웃는 법을 가르쳐 주신 건 숙부님이셨지요.”

이제는 정말 손목이 너무 아팠다.

“대체 제게 무슨 말씀이 더 하고 싶으신 거지요?”

“대공성으로 돌아 와.”

“그럴 순 없어요. 저는 이미 황후 폐하의 시녀가 되었는걸요. 대공성으로 돌아가려면 황후 폐하의 윤허가 필요해요.”

“제기랄.”

아무래도 카일로스가 미쳐 버린 모양이다. 우리가 있는 곳은 구석진 곳이니 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욕설을 중얼거리는 그의 입모양을 누군가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건 잘못됐어. 가문의 주인인 나를 속여서 너를 데려갔으니, 나도 정식으로 황실에 항의를 하면 틀림없이 다시 널…….”

“황실을 상대로 재판이라도 청구하겠다는 건가요?”

이성을 잃어 아무렇게 내뱉은 말이라기엔 그 무게가 남달랐다. 내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묻자 그가 히죽 웃으며 입꼬리를 말았다.

“못할 것도 없지.”

비릿하게 웃고 있는 그를 잠시 쳐다보던 나는 천천히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그의 귓가에 대고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디 한번 해 보세요.”

옅은 분노를 담아 경고하듯 한 글자씩, 작지만 힘을 주어 똑바로 전했다.

“당신이 폐하를 상대로 무슨 짓을 꾸몄는지, 어떤 목적으로 그간 저를 키워 왔는지 알려지는 게 두렵지 않다면, 어디 한번 해 보세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멍하니 보는 그를 향해 나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그가 내게 알려 준, 상대를 유혹하는 가장 아름다운 그 눈웃음을.

“네, 아마도요.”

흘깃 시선을 내리니 바르르, 떨고 있는 그의 주먹이 보였다.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리자 분노를 참고 있는 그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클로이. 고작 방계의 사생아의 말만 믿고 사람들이 루드비히 대공을…….”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나를 위협하듯 몰아붙였다. 전혀 무섭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일 테다. 그를 지나치게 자극한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여차하면 구석에서 벗어나 홀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길 생각을 할 때였다.

“전하.”

단정한 목소리가 나와 카일로스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잠시 바깥으로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카일로스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속닥거리는 기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밝은 백금발이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기사가 무어라 말을 하자, 카일로스는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나를 돌아봤다.

“조금 뒤에…… 다시 이야기하지.”

그리고 그는 나를 두고 그대로 돌아나갔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꽤 다급해 보였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를 감쌌던 긴장감이 사그라들었다.

“레이디 가넷슈.”

허물어지려는 내 몸을 부드럽게 지탱해 주는 조심스러운 손과 함께, 잔잔한 목소리가 내게 속삭였다.

“이제 괜찮습니다.”

* * *

햇살처럼 쏟아지는 금빛 머리카락이 나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어두운 밤중에 보았던 그는 그토록 고고하고 단정한 매력의 남자였는데,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의 그는 이토록 반짝반짝 빛이 나는 남자였다.

“브란스 경.”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부르자, 나를 응시하던 녹색 눈동자가 아스라이 휘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꼭 아주 멀리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

“…….”

눈과 눈이 마주치는 동안, 어떤 소리도 오가지 않았다. 시끄러운 연회장 속, 오로지 우리 둘 사이에서만 소리 없는 정적이 이어졌다.

그 고요한 정적이 조금 부담스럽다고 느껴질 즈음, 나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그의 팔이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건강해 보입니다.”

내게서 한 발짝 거리를 벌리며 물러난 그가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웃는 모습도 훨씬,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연회장의 다른 귀족들처럼 으레 하는 인사치레일까. 평소와 다름없이 잔잔한 눈빛과 담담한 목소리에 이상하게 가슴이 설렜다.

“……고마워요. 그러는 브란스 경도 훨씬,”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화려한 연회장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도 평상시에 입던 단정한 기사복 차림이었다. 아마 그는 연회를 즐기러 온 게 아니라 그저 그 남자를 수행하기 위해 온 거겠지.

“훨씬 멋있으세요.”

진심을 담아 건넨 말에 그가 푸스스 눈꼬리를 흩트렸다. 그다지 내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정말인데…….”

“네, 감사해요. 레이디 가넷슈.”

소심하게 덧붙이자 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억울해졌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멋있었으니까. 화려하게 단장을 한 이 연회장 속 어느 귀족들보다도 더.

나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브란스 경은 언제나 제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나타나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고개를 주억이며 되묻는 그의 말씨는 물음보다는 긍정의 의미를 담은 것 같았다. 그가 내 어깨를 지나쳐 먼 곳을 응시했다.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레이디 가넷슈, 괜찮으시다면.”

에메랄드빛의 부드러운 녹색 눈동자 위로 내 얼굴이 담겼다.

에녹 브란스 경은 사심 없는 시선으로도 가슴을 술렁이게 할 만큼 굉장한 외양과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잠시 저와 함께 바람을 쐬러 갈 수 있습니까.”

“…….”

그의 물음에 고개를 비트니, 멀지 않은 곳에서 동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빈센트 영식이 보였다.

힐끔 쳐다보는 시선에 눈짓을 보내자 그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한 뒤 다시 브란스 경을 돌아봤다.

“네, 괜찮아요.”

나의 대답에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자아냈다.

세 발짝의 간격을 두고 나와 브란스 경은 차례로 테라스로 향했다. 겨울밤의 테라스는 고요하고 아늑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꼭 그를 닮았다.

“창을 열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요.”

그의 허락에 창을 열려고 몸을 돌리는 찰나, 내 뒤에서 뻗어 나온 길쭉한 팔이 나보다 먼저 창을 열었다. 동시에 서늘한 겨울밤 공기가 살갗을 스쳐 지나갔다.

“……창을 열어 달라고 부탁한 건 아니었어요.”

“네, 저도 압니다. 레이디 가넷슈.”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붉어진 채로 항변하자 그가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잔잔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이 없어져 바닥만 내려다봤다. 브란스 경 또한 먼저 바람을 쐬자고 청했으면서 한참 동안 말없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시간이 흘러갈 무렵, 그가 내게 물었다.

“혹, 거짓이었습니까.”

고개를 들어 올리니 나를, 정확히는 내 아랫배 부근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브란스 경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뒤늦게 내가 그에게 고했던 거짓을 떠올렸다.

‘정말 황제 폐하의 아이를 갖게 된 겁니까.’

‘네, 그래요.’

그리고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맹세했던 그를 떠올렸다.

‘지켜 드리겠습니다.’

‘네?’

‘레이디 가넷슈와 뱃속의 아이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너무나 숙연하고 경건해서 차마 한마디도 달싹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죄송해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그에게 사과를 전했다.

“브란스 경이 제게 준 진심을 기만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었어요. 저는…… 어떻게든 숙부님을 벗어나야만 했어요. 그래서 모두를 속이게 되었어요.”

브란스 경이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카일로스가 아까 전 화를 냈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그랬군요.”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화를 내는 대신 짧은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보았다. 그런 그의 행동이 내게 더욱 큰 죄책감을 안겨 주었다.

“화를 내지 않으시는 건가요?”

“화를 내다니, 그럴 리가요. 저는 오히려…….”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레이디 가넷슈에게 칭찬을 해 드리고 싶은 걸요. 칭찬이라는 말이 감히 제게 가당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칭찬……이요?”

난데없이 칭찬이라니. 이해하기 힘든 그의 반응에 나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잘생긴 얼굴로 잔잔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였다.

“네, 아주 훌륭했어요.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저는 레이디 가넷슈가 이렇게…… 음, 절대 레이디 가넷슈를 낮추어보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는 내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레이디 가넷슈가 스스로 불행을 이겨내려 한 것 같아서…… 당신의 그러한 몸짓이 무척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행. 그리고 행복.

나는 카일로스 루드비히를 생각했다. 내게 불행일 수밖에 없는 그 남자를 생각했다.

동시에 나는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를 생각했다. 내게 행복을 이야기해 준, 그 남자를 생각했다. 내게 감히 행복해져도 된다고 말해 주었던 그 남자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에녹 브란스 경을 생각했다. 행복의 자격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언감생심 행복을 향해 발돋움하던 나의 욕심을, 그는 지금 대단하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한차례 앓으신 뒤로 한동안 아무런 의욕도 없어 보여 굉장히 걱정했었습니다.”

“제, 걱정을요…….”

“레이디 가넷슈가 거짓을 말하면서까지 얻으려고 했던 것은 불행으로부터의 탈출이었겠지요. 저는 그게 모두 당신 스스로의 의지인 것만 같아, 당신이 보여 준 의지가 굉장히…… 아름다웠습니다.”

“…….”

그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에 울렁거렸다. 카일로스와 마주했을 때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울렁거림이었다.

“저는 그렇게 거창한 생각으로 그런 게 아니에요.”

“원래 행복이란 거창한 게 아니지요.”

행복이 거창한 게 아니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꼬리가 흐릿하게 흐트러졌다.

“하지만 그 행복이 유독 당신에게만큼은 거창한 것 같아서…….”

마치 방금 전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가 말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돕고 싶었습니다.”

“브란스 경…….”

“당신을 지켜 드리겠다는 그날의 맹세는 여전히 유효해요. 그러니 레이디 가넷슈,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움직여 주세요.”

“…….”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복에 가까워지기 위해 그렇게 움직여 주세요. 내가 당신을 계속해서 도울 수 있게.”

브란스 경의 진실된 눈동자 앞에서 억눌러 왔던 죄의식이 또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모른다. 내가 얼마나 추악하고 못된 짓을 벌였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게 감히 행복해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거슬러 온 시간 속의 그는 나를 도운 이유로 카일로스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갔다. 그 이후로 생이 마감되는 순간까지 나는 그의 소식을 더 이상 듣지 못했다.

만약 그가 나의 과거를, 혹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일지도 모르는 그 극악함을 알게 된다면. 그때도 그는 과연 나를 도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거슬러 온 시간을 말할 수 없는 나는…….

“고마워요.”

어리석게도 나의 과오를 숨기며 그렇게 대답하곤 만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브란스 경께는.”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차마 꺼내지 못하는 말은 속으로 삼키며.

브란스 경은 희미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줄곧 보여 주었던 아스라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그 미소다.

“이제 들어가 봐야지요. 낯선 이성과 자리를 오래 비우는 건 파트너분께도 실례가 될 테니.”

브란스 경은 내내 서 있던 그 자리에 선 채로 내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지금 돌아서면 언제 또 다시 만나게 되는 걸까?

나는 문득 그에게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그 흔한 인사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는 게 생각이 났다.

“클로이.”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던 순간, 나도 모르게 불쑥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제 이름은 클로이예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으나, 잠시 두 눈을 깜빡이던 그는 곧바로 내 말을 알아듣고서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네. 다음에는 꼭 그 이름으로 불러 드릴게요. 레이디 클로이.”

오랫동안 나를 ‘가넷슈 가의 아가씨’라 불러 주었던 남자에게서 처음으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굉장히, 설레는 일이었다.

* * *

“제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은 아니지요?”

“괜찮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만난 친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빈센트 영식은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보다 저는 레이디 가넷슈가 걱정되었습니다만. 대공 전하와는 이야기가 잘 끝난 게 맞는 거지요? 아까는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아니요,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흔한 집안일이지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빈센트 영식은 여전히 미심쩍어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내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소개시켜 주었던 젬마 부인의 말대로 빈센트 영식은 굉장히 배려 깊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클로이!”

빈센트 영식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니, 저 멀리서 베스티가 나를 향해 총총거리며 뛰어왔다. 그녀의 경망스러운 몸짓에 그녀의 옆에 있던 남자가 골치 아프단 표정으로 이마를 싸맸다.

나는 또다시 빈센트 영식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마침 빈센트 영식 또한 그를 찾는 무리가 있었기에, 그는 내게 무도회를 조금 더 즐기라고 말해 주고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걸어갔다.

“어디 있었어? 한참 찾았는데!”

혼자 남겨진 내게 껑충 뛰어온 베스티가 내 두 손을 꼬옥 잡고서 걱정스레 물었다.

“잠시 바람 좀 쐬다 왔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사람들 말이 방금 전에 너랑 루드비히 대공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다고 그러던데.”

다들 안 보는 척하면서 은근히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하긴 나라도 그럴 것이다. 오랜만에 모습을 보인다는 루드비히 대공이 파트너인 후작 영애를 내버려두고 나만 붙잡은 채 구석에서 으스스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혹시 그 사람이 널 위협하거나 그랬니? 네게 해코지를 하려 했다던가…….”

“그런 일은 전혀 없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베스티.”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다행히 베스티의 반응을 보니 그와 내가 나눈 대화까지는 아무도 모르나 보다.

그와의 대화가 알려진다면 타격을 받는 것은 내가 아닌 카일로스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대화가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다.

또다시 그와 엮여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다. 카일로스 루드비히라는 사람이 더 이상 내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길 바랐다.

“아 참, 클로이. 이쪽은 우리 오빠야! 오빠, 내가 말했던 클로이가 얘야. 진짜 예쁘지?”

베스티는 자신을 뒤따라온 남자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베스티와 닮았지만 조금 더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클로이 가넷슈입니다. 캐롤라인 소공작님.”

“그 유명한 루드비히 대공가의 방계 아가씨로군요.”

남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상품을 감별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내게 굉장히 익숙한 시선이기도 했다. 카일로스는 언제나 이런 눈으로 나의 모든 것을 관리해 왔으니까.

“루드비히 대공의 취향도 참 대단하지요. 이렇게나 굉장한 미인을 혼자 숨겨 두고 있었다니.”

“……조금 오해가 있는 발언이네요, 소공작님. 숙부님께서는 그저 고아인 저를 가엾게 여겨 후원해 주신 것뿐인걸요.”

“오빠! 방금 클로이에게 실례되는 말을 한 거야?”

베스티가 두 눈을 세모꼴로 치켜뜨며 캐롤라인 소공작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캐롤라인 소공작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절절맸다.

“아니,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

절절매는 모습을 보니 정말 의도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사실 그가 한 말은 충분히 상상 가능한 범주의 것이었다.

젊고 잘생긴 미혼의 대공과 그의 후원을 받고 있는 묘령의 아가씨. 당장 로잘라인 후작 영애만 하더라도 나와 카일로스의 사이를 의심하고 경계했고, 거슬러 온 시간 속의 나는 그와 그런 사이가 되기만을 항상 갈망했으니까.

“괜찮아요.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해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더 이상 이 대화가 오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니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어요.”

“죄송합니다, 레이디 가넷슈.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이대로 그의 사과를 받으며 대화가 끝나리라 믿었다. 이어지는 남자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것을 그저 가벼운 해프닝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다만, 방금 전 바깥에서 대공과 함께 있던 여자가 레이디와 꼭 닮아 있어서 오해를 하고 말았나 봅니다.”

순간 내 몸이 그대로 멈칫하고 말았다. 눈앞이 새하얘졌다가 까매지기를 반복했다. 달달 떨리는 손끝을 간신히 말아 쥐며 나는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숙부님께서 저와 닮은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요?”

나의 질문에 캐롤라인 소공작은 멋쩍게 웃었다.

“네, 분명 다른 사람이지만 비슷한 느낌을 지닌 여자였거든요.”

얼마 전 오페라 하우스에서 만났던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말이 떠올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영영 돌아오지 마렴. 어차피 카일은 이미 너를 대신할 대용품을 찾아 두었으니까.’

대용품. 그러니까 레이몬드를 유혹하기 위한 그의 새로운 미끼가, 나의 대역이 될 여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숙부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부디 내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길 바라면서 나는 캐롤라인 소공작에게 물었다. 그 뒤로 몇몇 사람들이 합류하며 여러 대화가 더 오갔으나, 나는 그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두 번 다시 그와 엮이지 않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나의 작은 에스델을 앗아갔던 이에게 복수마저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는 더 이상 카일로스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가 마련했다는 ‘대용품’이란 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내내 신경 쓰고 있었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에게 그 말을 들은 직후부터 줄곧.

‘건물 동편 정원의 분수대 앞…….’

나는 캐롤라인 소공작이 말해 주었던 장소를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무도회장 밖으로 나왔다. 한참 물이 오른 분위기에 흥이 난 사람들은 내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탁, 탁, 탁탁, 탁탁탁탁.

장소와 가까워질수록 빨라지는 발걸음 소리가 꼭 조급한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건물 동편 정원의 분수대가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잎이 모두 떨어진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에 한차례 멈추어 서서 무겁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분수대 옆, 나뭇가지 사이로 은빛 실타래가 반짝거렸다.

느리게 고개를 돌리던 나는 그대로 나무 기둥을 붙잡으며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한 남자가 있었다. 한 여자가 있었다. 두 남녀가 있었다.

나를 진창에서 구해 주었으면서 다시 그보다 더한 나락으로 빠뜨렸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고, 그의 맞은편에는 나와 닮은 실루엣을 지닌 여자가 그에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아…….’

정말로, 정말로 있었다. 카일로스가 오랫동안 공을 들여 레이몬드의 취향에 걸맞게 키워 온 나와 닮은 존재가.

‘살을 더 찌워야겠어. 잘나신 아우님께서는 마른 여자를 좋아하지 않으니.’

‘황제의 생모는 에브란국에서 온 왕녀였지. 에브란어를 익혀 둬. 쓸모가 있을 거야.’

‘향수를 뿌린 건가? 네게 어울리지만 그의 취향은 아니야. 좋은 것을 선물해 주마, 아우님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만큼.’

‘머릿결이 좋구나, 클로이. 내가 말한 적 있을까? 내가 널 이토록 아끼는 건 구 할은 네 머리카락 덕분이란다. 황제는 은발의 미녀를 좋아하거든.’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는 그렇게 카일로스의 지시에 따라 레이몬드의 취향에 부합하는 여자로 자라 왔다.

그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시절의 나는 오직 그것만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해 왔다. 짐승보다 못한 처지로 살아가던 나를 처음으로 사람답게 살아가게 해 주었던 그를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개처럼 기어서 내 발을 핥아 보렴.’

어린 날, 마지막까지 내게 가넷슈의 성을 주지 않았던 이제는 죽고 없는 귀신들은 나를 짐승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아니다.

‘고장난 인형.’

나는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쓸모를 다하면 버려지는 도구이자, 고장이 나면 언제든 다른 것으로 대용할 수 있는.

‘그러니 그렇게 비참하게 버려지고, 이렇게 쉽게 대체되는 거겠지.’

여자가 남자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역겨움이 밀려왔다. 나와 닮은 실루엣을 가진 여자가 그의 몸에 닿는 것이 끔찍하리만치 싫었다.

파사삭.

나무껍질이 벗겨지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그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 선 여자의 어깨너머로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클로이!”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어두운 밤공기를 차갑게 울렸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이상했다. 가슴 아래 심장은 싸늘하게 식다 못해 굳어 버렸는데, 심박은 온 혈관이 아리도록 세차게 뛰고 있었다.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멈추어 나무 기둥에 매달렸다. 마른 나무 기둥이 우거진 수풀 안쪽은 오랫동안 사람의 때를 타지 않아 고요하고 적막했다.

“하, 하아…….”

가쁜 숨과 함께 내내 참아왔던 울음이 쏟아져 내렸다. 정처 없이 뛰어온 길을 다시 돌아보았지만, 어디에도 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부터 벗어나지 못한 그의 그늘이 여전히 남아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정말이지…….”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내며 나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구나, 멍청한 클로이 가넷슈…….”

분명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도 내 불행의 근원인 그 남자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정말 한심했다. 어째서 매번 이용당하고 버려지는지 스스로 납득이 될 정도로.

어쩌면 애초에 행복이란 건 처음부터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가넷슈 가의 더러운 사생아, 껍질만 그럴듯한 쓸모없는 미끼, 멀쩡한 한 남자를 파멸시킨 추악한 괴물, 제 새끼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린 무능한 여자……. 그런 클로이 가넷슈가 어떻게 감히 행복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 자리에 선 채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까끌까끌한 것이 얼굴 위로 쓸렸다. 그저, 아팠다.

“……이래서 내가 널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순간 내 몸을 뒤덮는 오싹한 감각에 나는 울던 것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클로이, 왜 넌 항상…….”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가 말을 멈추며 입술을 짓씹었다. 남자의 화려한 이목구비가 험악하게 변했다.

“피가 나잖아!”

남자는 내 손목을 움켜쥐며 화를 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릴 만큼 그는 무섭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리니, 나무껍질이 박힌 채 찢어진 손바닥과 갈라진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넌……! 이 상태가 될 때까지……!”

나는 내 상처에 화를 내는 남자를 힘없이 올려다봤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더 이상 나와 엮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는 남자였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관찰했다. 잔뜩 찌푸려진 이맛살의 주름과 애써 감정을 억누르려 짓씹고 있는 아랫입술 위로 맺힌 핏방울이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도 선연했다.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그가 나와 마주치려면 결코 우연한 산책만으로는 불가하다. 그러니까 그는, 나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다. 일부러, 무도회장 내에서 사라진 나를 찾으러.

그것을 인지한 순간, 왈칵 두 눈이 뜨거워졌다.

“그러지 마세요.”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간 가느다란 목소리는 굉장히 희미했다. 하지만 주위엔 오직 둘뿐이 찾아볼 수 없는 적막이 드리웠기에 나의 목소리는 그의 귓가에까지 그대로 닿았다.

“뭐……?”

레이몬드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며 나를 보았다.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가 분명 화를 내고 있는데, 꼭 울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제게 잘해 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더 이상 저를 책임지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고작 하룻밤을 보낸 여자에게 지나치게 과한 책임이에요.”

“그걸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야.”

내 생각을 강하게 피력했지만, 레이몬드는 요지부동이었다. 가슴 끝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이 감정을 안다. 나는 지금 화가 나고 있었다. 고작 나 같은 것을 책임지려하는 레이몬드에게 화가 나고 있었다.

“제가 원하지 않아요!”

나는 처음으로 레이몬드의 앞에서 언성을 높였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그만한 가치가 없는 여자라고……!”

차라리 그가 이 자리에서 나의 무례함에 죄를 물어 목을 치길 바라는 심정으로, 나는 감히 황제인 그의 뜻에 전면으로 반박했다.

“아무것도…… 폐하께선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당신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폐하는 모르잖아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

나의 울부짖음에 레이몬드는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긴 이지러진 나의 모습이 그렇게 볼품없을 수가 없었다.

“폐하는 제게 마음을 열면 안 돼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저를 미워하고 증오해야 해요. 저는 혐오해야 마땅한 여자예요. 제게 면죄부를 주지 마세요.”

“…….”

두서없이 소리치는 나를 레이몬드는 그저 계속 응시했다. 그가 아랫입술을 비틀며 눈꼬리를 흩트렸다.

“클로이.”

언제나 짐승의 것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던 음색이 안타까이 내 이름을 불렀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이 두 뺨을 스치고 그에게 붙들린 손목 위로 낙하했다.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더러운 상처 위로 스며들었다. 따끔, 아팠다.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없는데, 대체 왜 당신이 나를 용서하려는 거예요. 나는, 나는…….”

나는 이미 한 번 당신을 죽인 여자인데. 당신이 내게 주었던 순정을 모두 무참히 지르밟은 여자인데.

꺼낸다 하여도 믿어 주지 않을 이야기였다. 어느 누구도 결코 믿지 못하겠지. 그렇기에 나의 죄악은 더욱 추악하고 쓸쓸한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후회한다고, 온 마음을 다해 당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고, 용서를 바라진 않지만 부디 이 마음을 알아 달라고.

그 흔한 사과 한마디 할 수 없는, 그토록 처절하게 울부짖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었다.

“폐하는 몰라요. 제가 어떤 여자인지, 얼마나 무서운 짓을 했는지, 제가, 당신을…….”

“클로이, 진정해.”

“죽였어요, 죽였다고요.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요!”

“진정해, 클로이! 제발! 제발!”

와락, 그의 두 팔이 내 몸을 끌어안았다. 채 진정되지 않은 몸이 울음을 멎지 못하며 그의 품속에서 바르작거렸다. 딱딱 부딪치는 앞니 소리와 새끼 짐승처럼 낑낑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적막 위로 스며들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의 몸을 끌어안은 그가 달싹거리는 내 어깨 위에 얼굴을 묻으며 신음했다.

“제발, 클로이…… 널 망가뜨리지 마.”

나는 이미 오래전 망가진 사람인데. 레이몬드는 굉장히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다 괜찮다고, 나는 다 괜찮다고. 나를 위해 울어 주는 네가 있어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어지러웠다. 너무 많이 울어서인지, 그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가물가물했다.

“그럼 행복해야지. 보란 듯이 행복해야지.”

굵은 손끝이 얼굴의 젖은 물기를 닦아 내려 했다. 수년간 검을 잡아 까칠하고 딱딱한 손끝이 어울리지 않게 섬세했다.

“……폐하?”

나는 느리게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불렀다. 레이몬드는 내 부름에도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고 눈물만 닦아 내더니 한참 뒤에야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클로이.”

그가 눈물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쓸어 넘겨 주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 고요하고 나직한 음성이 귓가를 두드리며 사방으로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오소소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피어올랐다.

나는 몸을 움찔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더 이상 멀어지지 못하게, 내 어깨를 단단히 붙든 두 손이 있었다.

“너조차도 너를 용서할 수 없다며.”

“…….”

“그럼 나라도 너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거잖아.”

솨아아- 바람이 불어 왔다. 그 시리고도 아득한 겨울바람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지금, 무슨 말씀을…….”

세상이 흔들렸다. 아니,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그리고 레이몬드를 담은 내 두 눈일 것이다.

“네게 잘해 주면 안 된다고 했나?”

레이몬드는 더 이상 내가 그에게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내 양 어깨를 꽈악 움켜쥐고서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마주치는 시선 속에 비치는 나를 향한 온기와 애정과 열망이 내가 기억하던 시절의 그의 것과 고스란히 일치해서, 나는 왈칵 두려움에 숨을 멈추었다.

“더 이상 나와 엮이지 않기를 바란다고?”

서늘한 목소리가 시간을 거슬러 온 후 내가 그에게 했던 말들을 되뇌었다.

“내가 너를 다시 사랑하게 될까 봐, 그게 그렇게 두려워서 너는 계속 내 시선을 피했지.”

무섭게 중얼거리던 그가 돌연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틀렸어.”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너를 몰라. 그렇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아.”

내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버린 손바닥이 내 얼굴선을 쓸어내리며 아래로 미끄러지더니 아프지 않게 내 턱을 감싸 쥐었다. 굵은 엄지가 내 입술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참고 있던 숨이 조용히 터져 나왔다.

“그리고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와 클로이 가넷슈 사이의 일이라면 단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 그것이 설령 네게 중요치 않은 기억들이라 할지라도.”

“폐…….”

꾸욱,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보다 세게 눌렀다.

더 이상 어떤 소리도 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그가 내게 하고자 하는 말을, 그 무엇도 방해하지 않도록.

“사랑해, 클로이.”

이럴 수가. 이건 말도 안 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전개다.

“틀렸어. 널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불가능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주 작은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나를 아주 잘 아는데,”

그가 나를 향해 서글피 웃었다. 서서히 아래로 수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피해 내 시선도 아래로, 아래로,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널 사랑하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야.”

그의 입술이 내 이마 위로 닿았다. 뜨거운 감각이 머리를 타고 전신으로 흘러내렸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현실 앞에서 나는 그만 두 눈을 감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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