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그러니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말아라
도무지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카일로스를 지켜볼 수 없었다. 그가 가여웠기 때문이 아니라 역겨웠던 탓이다.
그 어렸던 에스델을 그렇게 앗아가 놓고서, 더 이상 내가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 놓고서. 이제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수없이 많은 시간 속에서 그에게 농락당해 왔다.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복도를 지나 바깥으로 나왔다. 카일로스가 남아 있는 내 방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부디 내가 다시 돌아갈 적에는 그가 없길 바랐으나, 이 대공성의 모든 곳이 그의 것인지라 내 방마저도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가 아린 살갗을 에웠다. 더 이상 그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는데, 주인의 의지를 벗어나 흘러내린 눈물 탓에 온 얼굴이 따끔따끔했다.
“공기가 찹니다, 레이디 가넷슈.”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어깨 위로 두터운 망토가 내려앉았다. 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시간을 거슬러 온 이후 세 번째로 마주치는 에녹 브란스 경이었다.
“브란스 경…….”
한 발짝 물러서며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의 잔잔한 시선이 내 앞섶으로 향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얇은 원피스 차림으로 나온 것을 깨달았다. 뒤늦은 추위가 느껴지며 몸이 오돌오돌 떨렸다.
“잠시 실례를.”
나붓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섬세한 손길이 망토의 앞섶을 단단히 여미어 주었다. 그러곤 곧바로 물러난 그가 내게 말했다.
“그런 차림으로 바깥에 오래 있는 건 레이디 가넷슈의 건강을 해치는 일입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아직은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희미하지만 단호한 내 대답에 브란스 경은 상당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브란스 경은 진심으로 나를 염려하고 있다.
어째서 그는 매번 내게 이런 호의를 보내 주는 걸까…….
“그럼 방이 아닌 다른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조금만 더 이곳에 있다가 들어갈게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궁금했다.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던 걸까. 어떻게 내가 바깥에 나온 때에 맞춰 내게 다가온 걸까.
“……그럼 그때까지 곁을 지켜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내게 들어가라고 한 번 더 권유하는 대신, 내 옆에 있어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바닥에 난 길을 따라 걷자 몇 걸음 뒤에서 따라 걸어오는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분명 내 눈이 발갛게 부은 것을 보았을 텐데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가 고마웠다.
에녹 브란스 경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는 사람.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 그의 존재는 내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두운 후원의 입구가 나타났다. 희끄무레한 등불 하나가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내가 잠시 걸음을 멈추자 브란스 경은 입구에 걸려 있는 등불을 내려 내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잔잔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유독 시야를 어지럽혔다. 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후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간을 거슬러 온 후, 처음으로 발을 딛는 곳이었다. 내가 카일로스를 위해 가꾸었던 이곳에서 그는 보란 듯이 다른 여자를 무릎에 앉히고서 입을 맞추었다. 나의 노력과 정성을 모두 짓밟으면서.
느릿하게 뻗어 나간 손끝에 서늘한 겨울나무 이파리가 바스락거리며 닿았다. 아릿한 통각이 손끝을 타고 가슴을 적셨다. 이제와 나는 무엇이 그리도 아픈 걸까.
손을 움켜쥐자 파릇하던 겨울나무 이파리가 손아귀 안에서 그대로 짓뭉개졌다. 그것으로는 답답한 감정이 풀리지 않아서 나는 세게, 더욱 세게 손을 움켜쥐었다. 말아쥔 손등 위로 얇은 핏줄이 섰다.
“레이디 가넷슈.”
몇 발짝 떨어져 있던 브란스 경이 다가와 내게 손수건을 건넸다. 나는 그가 건넨 손수건과 말아 쥔 내 주먹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끈기 있게 나를 기다려 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말아 쥔 주먹을 폈다.
겨울나무의 가시는 차가운 만큼 또한 날카로웠다. 가시에 긁힌 손바닥이 낭자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미쳤나 보다. 살점이 찢어졌는데도 아프다는 생각보다 시원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
내가 여전히 그의 손수건을 건네받지 않고 두 눈만 깜빡이자,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자 아까와 같이 난처한 표정으로 눈꼬리를 흩트린 브란스 경이 있었다.
“레이디 가넷슈는 손이 많이 갑니다.”
“브란스 경께 손을 내밀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요.”
그의 말이 꼭 나를 원망하는 것처럼 들려서 나는 방어적인 태도로 대꾸했다.
“맞아요. 그러니 이것은 모두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저의 탓입니다.”
부드럽게 뻗어 나온 손이 나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잘못 건드리면 깨지는 유리 인형을 대하듯이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 상처를 닦아 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얼룩덜룩한 피로 물든 내 손을 내려다보며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신기해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는 지니고 다니던 연고를 꺼내 내 손에 발라 주었다. 그의 손수건이 내 손에 칭칭 감겼을 때, 나는 내 손에 감긴 손수건과 이 상황이 상당히 낯익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치료를 마친 그가 고개를 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당황하여 내 손을 놓았다.
“레이디 가넷슈……?”
“아, 죄송해요. 너무 빤히 쳐다보았지요.”
잇새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것 또한 신기했다. 인상을 쓰고,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는 브란스 경이라니.
“그냥 브란스 경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처음이라서…….”
말끝을 흐리며 그가 감아 준 손수건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흰 손수건 사이로 군데군데 옅은 핏물이 묻어나 있었다. 깨끗이 세탁을 한다 해도 원래의 모양으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손수건은 꼭 더 좋은 것으로 보답을…… 브란스 경?”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한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브란스 경이 있었다. 덩달아 내 얼굴도 붉게 물들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그저…….”
브란스 경은 자신의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며 말을 더듬었다.
“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네?”
“…….”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브란스 경은 이제껏 내가 알아 왔던 것보다 더 수줍은 사람이었나 보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는 과묵한 기사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인 그의 모습에 그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제가 너무 말이 많았습니다. 지나친 참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너무나 진지한 태도로 사과하는 그의 태도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입가를 가리며 키득키득 웃자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
소리 내어 웃던 나는 불현듯 밀려오는 민망함에 웃음을 멈추고 뻘쭘하게 고개를 돌렸다.
“레이디 가넷슈.”
“…….”
“저는 당신이 웃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문득 나는 그의 말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웃었다.
시간을 거슬러 온 뒤, 처음으로 편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아…….”
작은 탄성과 함께 멎었던 눈물이 다시금 터져 버렸다.
“레이디 가넷슈?”
그가 당황하여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그를 두고서 나는 훌쩍훌쩍 울었다. 히끅거리며 흐느낌이 새어나왔으나 울음소리는 나지 않았다.
문득 레이몬드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원래 이렇게, 소리를 삼키듯이 울었냐고 묻는 거야.’
나도 몰랐던 나의 습관이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으로 소리를 내서 울어 본 게 언제였을까.
희미한 기억 속의 나는 어린 아이였다. 아버지라 불렀던 남자는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오래전에는 내게 참 따뜻했던 남자라는 점만 기억이 난다.
그랬던 남자가 내 울음소리에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던졌다. 물건에 맞은 것은 그 여자였다. 어머니. 마지막까지 내 손을 놓지 않았던, 그리고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주었던 여자.
머리에 피를 흘리며 흐느끼는 여자를 보며, 나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울던 것을 멈출 수 없어서, 그렇게 입을 틀어막고 눈물만 흘렸다.
나는 아주 오래전의 소리 내어 울던 감각을 다시 찾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저 끅끅거리는 흐느낌만이 듣기 싫게 공기 중으로 울려 퍼졌다.
* * *
차가운 밤공기 속에 오랫동안 노출된 손끝이 얼얼해졌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 할 때임을 안다.
카일로스는 여전히 내 방에 있을까? 부디 그가 이제 그만 돌아갔기를 바랐다. 물론 내일이 되면 또 마주쳐야겠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또다시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카일로스는 무슨 생각인 걸까. 무슨 생각으로 내게 그런 거짓을 말하는 걸까. 사랑한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
나는 이제 더 이상 순진했던 어린 클로이가 아니었다. 진실한 애정과 기만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카일로스를 떠올리자니 또다시 머리가 아파 왔다.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간신히 나아진 기분을 다시 그로 인해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덤덤한 표정으로 뒤를 따라오는 브란스 경이 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포근해졌다.
실내로 들어서자 대번에 따뜻한 공기가 주변을 감쌌다.
“고마웠어요.”
나는 그의 망토를 돌려주며 말했다. 브란스 경은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원래의 브란스 경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확실히, 아까의 브란스 경은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그게 싫은 것은 아니었다.
“방까지는 혼자 갈게요.”
“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레이디 가넷슈.”
그렇게 브란스 경과 작별하고서 홀로 복도를 걸었다. 문득 복도 오른편의 큰 손님방이 눈에 들어왔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나는 저 방에서 레이몬드와 몸을 맞댔고, 레이몬드는 내게 자신의 넘치는 마음을 토해 냈다.
어떻게든 나를 자신의 곁에 붙여 둘 방법을 찾겠다고 약속한 곳이기도 했다.
아마 지금도 그는 저 방에 머무르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가 머무르고 있을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조심스럽게 방문 위로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레이몬드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끝없이 아파 왔다.
나 때문에 죽은 남자다. 내가 죽인 남자다.
‘그래도 나를 위해 울어 주는 네가 있어.’
그는 죽음 앞에서도 나를 원망하는 대신, 나를 염려했다.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몰골인 채로 나의 눈물에 미소 짓던 남자였다.
이제는 안다. 당신이 나를 정말로 사랑했음을. 나 때문에 죽어 가면서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던 당신. 내 손으로 죽였던 남자. 나는 그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레이몬드…….”
오래전에 나왔어야 할 것이 이제야 뒤늦게 흘러나온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전해지지 않을 사과가 허공에서 맴돌다 흩어진다. 내가 당신에게 이 말을 제대로 전하는 날이 올까. 아마도 그때가 된다면, 나는 그에게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레이몬드.
부디 이번 생에는, 당신이 나와 엮이지 않기를.
* * *
날이 밝은 뒤에도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침대 구석에 쭈그려 앉아 생각에 생각을 더했다.
밤새 곱씹었다. 나를 기만하고 에스델을 앗아 간 남자와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 아무리 그 남자가 과거의 나를 구원해 준 유일한 빛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모든 것을 되돌리겠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에스델이 없는 이 시간 속에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내게 빛이 아닌 어둠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짓밟고 앗아 갈, 질척질척한 어둠.
그 남자의 공간 속에서는 단 1초라도 더 머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래서 난 카일로스를 찾아가 이제 이곳을 떠나겠노라 말할 생각이었다. 당장 이곳을 떠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남자가 있는 이곳에 한 시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내 방문 앞에는 그가 서 있었다. 레이몬드,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나 때문에 죽었던 남자…….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나는 멍청하게 눈물만 흘렸던 어제와 달리 예법을 갖추어 인사했다. 그러자 곧바로 수그러진 내 고개를 들어 올리는 굵은 손이 있었다.
“…….”
레이몬드는 말없이 내 두 눈을 쳐다봤다. 그의 눈썹이 작게 꿈틀댔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보이는 레이몬드의 습관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이 형형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얼핏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화가 난 걸까.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내려는 찰나, 내 눈가를 어루만지는 투박한 손길이 느껴졌다.
“무엇이 널 힘들게 하는 거지?”
고요한 복도 위로 낮게 내려앉는 목소리는 화를 내는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건 없어요.”
나는 느릿하게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거슬러 온 시간 속의 내가 한 번도 그에게 내 본 적 없는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 시간 속의 나는 오로지 카일로스를 위해 어떻게든 레이몬드를 유혹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언제나 그의 앞에서 화사하게 웃고, 사근사근 속삭였으며 아름다운 정부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비록 지금이 내가 그와 하룻밤을 보낸 이후라 할지라도, 아직까지 나는 고작 하룻밤의 여자일 뿐이었다. 이 이상 그가 나와 엮이지 않도록, 그를 밀어내야만 했다.
“클로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내게 사랑을 속삭였던 그 시간 속의 그가 겹쳐져서, 나는 한 발짝 물러나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폐하. 이만 돌아가 주세요. 이곳은…… 폐하께서 있으실 만한 곳이 아니에요.”
“내가 어디에 있을지는 내가 정해.”
레이몬드가 내게 한 발짝 다가오며 무섭게 쏘아붙였다. 그 형형한 기세에 어깨를 움츠리자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말했잖아. 네가 다 나을 때까지 이곳에 머무를 거라고.”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여전히 무서운 목소리라고 느끼겠지만 나는 안다. 이것은 겁먹은 아이를 어르듯 다정한 음성이다.
미숙한 부모였던 우리는 이따금씩 에스델이 울 때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어 당황해했다. 그럴 때면 레이몬드는 꼭 지금과 같은 목소리로 에스델을 달래려 했다.
안타깝게도 레이몬드의 시도는 매번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나는 에스델을 달래는 레이몬드를 볼 때면 언제나 기묘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와 같은 목소리로, 그때와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는 레이몬드는 자꾸만 나를 울컥하게 한다.
“어째서요?”
그러나 그런 내 마음과 달리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그를 뾰족하게 밀어 내는 것들뿐이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는 폐하께 그만한 가치가 없는 여자예요.”
“……책임, 이라고 해 두지.”
하룻밤이다. 지금의 나는 그에게 있어 고작 하룻밤의 인연이었다. 몇 달 동안 전력을 다해 그를 유혹하던 옛 시간 속의 클로이가 아니라, 그저 하룻밤을 함께 데운 여자.
“이제껏 함께 밤을 보내 온 모든 여자들을 이렇게 책임지셨나요?”
그의 눈썹이 또다시 꿈틀거렸다. 위험 수위였나. 아무리 옛 시간 속 그가 나를 아꼈다곤 해도 제국의 황제에게 건네기엔 지나치게 무례한 언사였다.
“그렇다면?”
레이몬드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막 그의 마음속에 싹트고 있을 나를 향한 호감이 이대로 꺾이길 바랐다.
“굳이 저까지 책임져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고작 하룻밤의 인연에 책임이란 무게를 지우는 것은 너무 가혹하잖아요.”
“고작 하룻밤?”
“네, 고작 하룻밤이요.”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이몬드가 거칠게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시뻘게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레이몬드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어금니만 바드득 갈았다.
“젠장…….”
그는 낮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저러다 피가 날 것만 같아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제 몸이 필요하신 거라면…….”
“아픈 사람을 억지로 취하는 변태는 아니야.”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말을 잘라냈다.
제국의 황제인 그가 단순히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대공성까지 찾아왔다. 고작 하룻밤을 함께 보낸 인연일 뿐인 내게 몸을 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이지, 완벽해. 하나부터 열까지 내 취향이야.’
문득 그가 나를 훑어보며 중얼거리던 말이 생각났다.
카일로스는 아주 오랫동안 나를 황제의 취향에 부합하는 여자로 만들어 왔다. 오래전의 그 신년제 무도회에서 처음 마주쳤던 순간, 어쩌면 그때부터 레이몬드는 내게 첫눈에 반한 걸까?
“폐하, 혹시…….”
주제넘은 것일 수도 있지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게…….”
그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묻는 내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건 아니야.”
“…….”
“낯선 여자에게 첫눈에 반할 만큼 낭만적인 사람은 아니니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 건방진 생각 말고 어서 나아, 클로이.”
레이몬드는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남자였다. 그러니 지금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저 내게 책임을 지려 했을 뿐인 그의 마음을 앞질러 곡해해 버렸다.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부끄러운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더 부끄러워질 것 같았으니까.
“네가 다 괜찮아졌다는 확신이 들 때까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이미 다 나았어요. 믿지 못하겠다면 의사를 불러 확인시켜 드릴게요.”
당당하게 말하는 나를 내려다보는 레이몬드의 눈꼬리가 느른하게 휘었다.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에 나는 멈칫했다.
“아직, 울고 있잖아.”
내가 울고 있다고? 당황한 나는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러나 눈물은 묻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내 앞에서 울음은 보이지 말았어야지.”
“울지 않았어요.”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자 레이몬드는 잠시 동안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꼭 내 속을 꿰뚫을 것만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잠시간의 대치 후에 레이몬드는 피식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 넌 울지 않았어.”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긁으며 지나갔다.
“하지만, 클로이.”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나는 숨을 흡, 하고 멈추었다.
“네가 행복해지기 위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말해.”
예기치 못한 말에 일순 정신이 혼미해졌다. 행복, 이라니. 나 따위에게.
“그것마저 거부할 텐가?”
“……아니요.”
스르륵, 멀어져 가는 그의 손끝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좋아.”
레이몬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점심 식사 때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네가 오지 않아서 아침은 형님과 둘이 먹어야 했거든. 그다지 즐거운 상황은 아니었지.”
나는 아주 짧은 순간, 말없이 마주앉아 식사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래도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의 그들은 겉으로나마 우애 있는 형제의 모습을 보였는데, 지금의 그들 사이엔 미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아마도 카일로스가 한차례 레이몬드의 마차를 그대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리라.
“그럼 조금 이따가 다시 봐, 클로이.”
레이몬드는 더 이상 다른 목적은 없다는 듯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뒤돌아갔다. 남겨진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행복, 나의 행복…….
카일로스를 만나러가는 내내 레이몬드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행복을 알지 못한다. 기쁨과 즐거움은 알지만 행복은 모른다.
내가 카일로스를 위해 레이몬드를 유혹할 미끼로 자라야 했을 때, 그를 위한 모든 것이 나의 기쁨이었지만 그럼에도 행복은 알 수 없었다. 그를 위할수록, 나의 가슴을 채운 것은 기쁨과 함께 번지는 알싸한 통증이었다.
나는 아주 짧았던 시간 속에서 내 품에 안기었다 떠나 버린 나의 작은 에스델을 생각했다. 그 아이와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끝내 내게 닿은 온기를 외면하지 못하고 받아들였을 때를 생각했다.
에스델은 유일하게 내게 오직 기쁨만 주던 존재였다. 어쩌면 행복이란 건, 그 작은 아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레이디 가넷슈, 일어났군요! 몸은 괜찮습니까?”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집사 에릭슨이 나를 발견하곤 반갑게 말을 걸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에릭슨.”
아침이라기엔 많이 늦은 시간이지만, 달리 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에릭슨은 내 말에 개의치 않으며 빙긋 웃었다.
“주인님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까?”
“네.”
나의 대답에 그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아침 식사 자리에 레이디 가넷슈가 나오지 않아 주인님이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그렇게 삭막한 아침 식사는 처음 봤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고성만 오가지 않았다 뿐이지, 주인님과 폐하의 분위기가 말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주인님께서 먼저 일어나셨는데, 아무래도 기분이 많이 언짢으신 것 같아요.”
“숙부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요?”
“아침 식사 이후로 집무실에 들어가셔서 나오시질 않고 계십니다. 레이디 가넷슈가 주인님을 위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에릭슨은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나는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방향을 틀었다.
어느 틈에 도착한 곳은 카일로스의 집무실이었다. 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이 없었다. 나는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여전히 조용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고리 위에 손을 얹었다. 문을 지키던 이들이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으나, 나는 가볍게 그들을 무시하고는 문고리를 돌렸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문을 열자 음산하게 질책하는 목소리가 삭막한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나예요.”
“……!”
내내 책상 위에 놓인 종잇장만 노려보던 그가 벌떡 고개를 들어올렸다.
“클로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살풋 떨리고 있었다.
“…….”
“…….”
내가 아무 말도 없이 문가에 가만히 서 있자 그 또한 고요히 내 얼굴만 올려다봤다. 초췌한 그의 몰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잃은 게 없는 그가 나와 같이 힘든 척하는 게 같잖게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올래?”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평상시 그의 성격과 달리 난잡하게 어질러진 집무실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어수선해. 신년이라 업무가 쌓였거든.”
흘깃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으나, 그의 집무실이 얼마나 잘 정돈되어 있는지의 여부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왔어요.”
“그래, 무엇이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책상에 기대어 선 채 내게 소파 위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그와 대화를 오래 끌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용건을 꺼냈다.
“대공성을 떠나려고요.”
“뭐……?”
순간, 그가 몸을 홱 비틀며 내게 되물었다. 그 바람에 책상 위로 삐져나와 있던 서류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우리 중 누구도 그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떠나고 싶어요. 떠나게 해 주세요.”
“지금 그게…… 무슨 말이지?”
핏기가 싸악 가신 얼굴로, 카일로스가 내게 물었다.
“내가 당신과 계속 함께 지낸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어째서.”
흐릿한 눈동자 속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그 눈 속에 담긴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네가 내 곁을 떠나는 게 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천천히 내게 다가온 카일로스가 나를 설득하려는 듯 차분하게, 그러나 감출 수 없는 떨림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떠나는 게 더 말이 되지 않는다고요?”
잠자코 그를 쳐다보던 내 눈가가 옅게 찡그러졌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 진심으로 이 남자가 미쳐 버린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를 짓밟고 기만하던 남자다. 그런 이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할 순 없었다.
“생각해 봐, 클로이. 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린 쭉 함께였잖아. 다른 이들과는 공유할 수 없는, 그런 세월과 신뢰가 있었잖아.”
“있었지요, 과거에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 세월과 신뢰를 기만한 것은 당신…….”
“클로이.”
낮게 내려앉은 음색이 내 말을 잘라냈다. 불현듯 그의 검은 눈동자가 빛깔을 달리했다. 스산하게 가라앉은 시선에 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가 네게 무슨 말을 한 건가?”
“네?”
나는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남자가 네게 무어라 꼬드긴 거야! 그렇지, 클로이?”
그런 나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그가 격분하며 내 허리를 낚아챘다. 갑작스레 가까워진 거리에 가슴이 울렁거리며 토기가 밀려 왔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말해, 클로이! 황제가 네게 무슨 말을 했지? 설마 그가…….”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얼굴 위로 닿는 그의 숨결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내 허리에 둘린 그의 팔뚝도, 코끝이 스치는 거리에서 다그치는 얼굴도. 모든 것이 역겨웠다.
“저리 비켜요!”
나는 악을 쓰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카일로스는 허망한 표정으로 비틀비틀 밀려났다.
“클로이…….”
“폐하와는 관련 없어요. 나는 그저 당신을 떠나고 싶은 거예요, 카일로스.”
“…….”
“말했잖아요, 당신이 증오스럽다고.”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이제는 곧 죽을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줌의 연민도 들지 않는 스스로가 잔인하다 느껴질 정도로, 남자는 그토록 비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클로이, 제발…….”
제발 그런 말 말아, 희미하게 새어나온 목소리는 정확하게 내 귓가에 닿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자, 그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자신을 드러내는 남자였나.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카일로스는 그 누구보다도 감정을 다루는 데 능숙한 남자였다. 타인의 감정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감정까지. 필요하다면 경멸하는 여자마저 사랑하며, 목적을 위해서라면 더럽고 보잘것없는 어린 여자아이에게도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남자였다.
그래서 나는 당장 이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이 아슬아슬한 그의 얼굴에도 냉담할 수 있었다.
“당신을 증오해요.”
“……그래.”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이마 위로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기만…… 기만이라.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만이겠지. 그럼 내가 널 기만했다고 하자꾸나. 그것으로 인해 내게 화를 내는 거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어. 계속해서 날 증오하고 미워해도 좋아. 그렇지만…… 날 떠나는 것만은 안 돼.”
증오하고 미워하면서도 자신의 곁에 남으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의 그와 나는 결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함께 있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독이 될 뿐이다.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나의 행복을 바란 적이 있었나요?’
‘……바라고 있어. 지금, 미치도록.’
줄곧 생각했던 것이 복잡한 머릿속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행복……. 나의 행복……. 그래, 어쩌면 이것은 어린 날 그 지옥에서 나를 꺼내 주었던 남자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면죄부였다.
“나의 행복을 바란다고 했었지요? 그럼 날 보내 주세요.”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카일로스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그럴 순 없어.”
“어째서요?”
“제발, 클로이. 무엇이든 다 들어줄게. 원한다면 나를 욕하고 때려도 좋아. 얼마든지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해. 하지만 그것만은 안 돼. 네가 날 떠나는 것만은.”
마치 벽에 대고 말을 하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떠날 수 없다’는 대답밖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당신을 떠나는 것만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에요.”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내 옆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그러니까 클로이, 응? 나를 떠나겠다는 그런 무서운 말만은 하지 말아. 네가 없으면 클로이, 나는…….”
끝까지 내가 떠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그를 보며 비릿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입으로는 나의 행복을 바란다고 했으면서 결국 그는 나의 행복보다도 그 자신의 행복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끝까지, 날 놓아주지 않겠다는 건가요?”
“……어떻게 우리가 서로 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거야.”
“…….”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사랑해, 클로이. 널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떠난다는 말은 그만 둬.”
거슬러 온 시간 속의 내가 그토록 갈구하였던 사랑……. 그의 사랑…….
나의 행복보다도 그 자신의 행복이 우선인 남자가 내게 사랑을 말하고 있다. 추욱 늘어진 눈꼬리는 잠시나마 내 마음이 흔들릴 만큼 서러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자박자박, 내게 걸어온 그가 내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작 네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던 그 세월 때문에 그래? 그래서 이제라도 네게 사랑을 주겠다고 하잖아. 아니면 아직도 그 남자의 아이 때문에 나를 원망하는 거야?”
내가 무언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서,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굳어 있는 틈을 타 조심스럽게 한 손을 들어 올린 그가 내 뺨을 뭉근하게 쓸어내렸다.
“이번에야말로 너를 행복하게 해 줄게. 정식으로 가족이 되자. 너와 나, 둘이…… 아니, 네가 원한다면 너를 닮은 아이도 낳자. 아이의 이름은…… 에스델. 그래, 에스델이 좋겠지?”
그의 입에서 감히 나의 작은 에스델의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와장창-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내 묵은 감정마저 모두 깨져 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아이를 만들어 줄까? 그럼 우는 걸 그만둘래?’
에스델을 잃고 울던 나를 더욱 처참하게 만들었던 사라진 시간 속의 그의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결국, 그는 변한 게 없었다. 그의 무엇이 나를 짓밟았는지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짜악!
작은 파열음과 함께 그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클로이……?”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정정할게요.”
더 이상 말을 섞을 가치가 없는 남자였다. 그러나 이 말만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증오를 넘어서, 당신이 혐오스러워요.”
* * *
점심 식사 때 다시 보자던 레이몬드의 기대를 나는 또다시 배반해야 했다. 밤새도록 뜨거웠던 머릿속이 이제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이 더욱 중요한 남자. 그런 주제에 감히 사랑을 입에 담는 남자.
설사 나를 사랑한다는,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나는 결코 그 남자를 사랑할 수 없었다.
‘아이의 이름은…… 에스델, 그래, 에스델이 좋겠지?’
그 한마디로 에스델의 존재마저 짓밟아 버린 끔찍한 남자였다. 남자가 증오스러웠다. 혐오스러웠다. 나의 작은 에스델을 짓밟은 그 남자를 무너트리고 싶었다. 내 손으로, 무너트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를 무너트리기는커녕 그에게서 달아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나의 분노를 티끌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카일로스의 태도로 보아하니 그는 결코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행복해지기 위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말해.’
나의 행복을 우선시해 주었던 다른 남자가 생각이 났다.
레이몬드는 내게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라 했지만, 선뜻 그를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가슴을 가득 메운 죄의식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이지. 그래도 나를 위해 울어 주는 네가 있어.’
하지만 나로 인해 비참하게 죽어야 했던 그의 마지막을 떠올린 순간,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왔다.
더 이상 카일로스의 미끼 노릇을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니더라도 레이몬드를 무너트릴 패가 남아 있었다.
에스델을 잃은 것은 돌이킬 수 없지만 또다시 그때처럼 레이몬드를 죽게 둘 수는 없었다. 벌떡 일어난 나는 곧바로 레이몬드가 머무르고 있을 손님방으로 뛰어갔다.
“폐하.”
가쁜 숨을 고르고 그를 올려다봤다. 열린 문 사이로 삐뚜름히 기대어 선 레이몬드가 느른하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클로이.”
굵은 손바닥이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제 찾은 건가, 네가 행복해질 방법.”
“…….”
순간 북받쳐 오른 감정에 무턱대로 그를 찾아왔으나,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되지가 않았다.
일단은 그를 카일로스로부터…… 그가 지난 시간 속에서처럼 그토록 허무하게 당하지 않도록……. 그러니까 카일로스가 그를 해치고 황제가 되고자 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아무리 황제라 해도 아무런 증거 없이 카일로스를 쳐낼 수는 없을 텐데…… 그럼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그 남자를……. 아니, 그보다…… 어떻게 해야 그가 내 말을…… 믿어 주지……. 어떻게 해야…….
“클로이.”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들 속에서 헤맬 적에 레이몬드가 내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숨을 천천히 내쉬고 흥분을 가라앉혀 봐. 그래, 그렇지.”
그의 손바닥이 나를 달래듯이 내 뺨을 어루만지며 아래로 내려와 내 어깨를 찬찬히 토닥여 주었다. 나는 나를 다독여 주는 그의 손길을 따라, 찬찬히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었다.
“어때, 이제 조금 진정이 되었나?”
“……고마워요, 폐하.”
그의 잔잔한 목소리에 한결 차분해진 나는 간신히 혼란스럽던 머릿속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네가 찾은 행복은 뭐지?”
행복……. 그것은 나와도 너무나 먼 낱말이라서, 감히 쫓을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도움이, 폐하의 도움이 필요해요. 하지만 그 전에…….”
“일단 들어와.”
레이몬드는 그대로 나를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나와 레이몬드, 둘만이 있는 방 안에 나지막한 정적이 감돌았다.
레이몬드는 나를 두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오래전, 이제는 없는 시간 속에서 나와 그가 함께 몸을 맞댔던 그 침대였다.
“계속 말해도 좋아.”
그가 앉아 있는 침대만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그를 마주 보았다.
“폐하께 고백 드릴 게 있어요. 저는 숙부님, 카일로스가 당신에게 보내기 위해 만들어 낸 여자예요. 폐하를 유혹하고 망가뜨리기 위해서요. 그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요.”
간신히 진정시킨 가슴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과연 그가 내 말을 믿어 줄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이복형제인 카일로스를 두고, 고작 귀족의 사생아인 내 말을……?
나는 불안한 마음에 걱정스럽게 그를 힐끗거렸으나 레이몬드는 표정의 변화 없이 가만히 나를 쳐다보며 경청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나는 조금 더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모두 계획된 거였어요. 제가 폐하의 취향에 부합하게 자란 것도, 그 신년제에서 폐하와 만나 밤을 보낸 것도. 모두 카일로스의 계획이에요.”
“그걸 나에게 말해 주는 이유는 뭐지, 클로이?”
레이몬드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칫 내 기분이 뒤틀린다면 너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발언인데.”
너무나 담담해서, 어쩌면 내 말을 믿지 않는 건가 의심이 드는 말투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벌려 다음 말을 꺼냈다.
“……폐하의 도움이 필요해요.”
감히 그에게 도움을 입에 담는 순간, 알싸한 죄의식이 또 다시 가슴을 덮쳐 왔다.
말이 좋아 ‘도움’이지, 어쩌면 이것도 나의 필요를 위해 그를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카일로스를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기만하였던 지난 시간에서처럼…….
“그래서 거래를 하려는 거예요.”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결국 나는 그를 이용하고 만다. 다만, 더 이상 그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대가도 없이 마냥 그의 도움을 받을 만큼의 뻔뻔함은 갖추지 못했던 나는 ‘거래’라는 이름으로 내 자신을 방어하고자 했다.
“거래?”
그가 눈가를 찡그리며 반문했다.
“네, 거래요. 폐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도 폐하를…….”
그를 향한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갈 곳 잃은 시선이 허공에서 맴돌았다. 나는 조금 더 뻔뻔해지기 위해 턱 끝을 치켜들었다.
“건방지군, 클로이.”
레이몬드가 느릿하게 손을 까딱였다. 나는 그의 손짓에 따라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너와 거래 따윈 하지 않아. 이런 정보는 없어도 돼. 이미 너를 도와주겠다고 말했으니까.”
조금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그가 카일로스의 계획에 대해 분노하며 자세히 캐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러지 않았다.
이미 지난 시간 속의 그는 카일로스에 의해 한차례 죽음을 맞이했다. 나는 또다시 그의 죽음이 반복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그것을 너무나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그것이 나를 초조하고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폐하…….”
“그만.”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내 턱 끝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위쪽으로 올라갔다.
“무엇을 원하지?”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 지독한 위압감이 내 몸을 휘감았다.
“……제가 원하는 건 한 가지예요.”
나는 홀린 듯이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뗐다.
“다정한 척하는 그의 목을 비틀고 싶어요.”
카일로스, 그 남자의 몰락.
나를 구원했고, 나를 기만했고, 끝내 나를 죽였던 남자. 그리고 눈앞의 남자를 죽이고, 나의 작은 에스델을 앗아 갔던 남자. 죄 없는 두 생명은 그 남자 때문에, 그리고 나 때문에 죽었다.
이것은 어쩌면 내가 지난 생에서 벌였던 일들의 죗값을 치르는 길이리라 생각했다.
“그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요. 저를 이용하시면 폐하께서도 그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예요. 카일로스가 폐하께 하려 했던 것처럼, 폐하께서는 저를 미끼로 사용하세요. 제가 폐하의 미끼가 되어 드릴게요.”
“아니, 클로이.”
그러나 레이몬드는 나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단박에 내 말을 부정했다.
“너의 행복은 그게 아니야.”
뜨거운 열감이 눈가를 휘감았다. 후두둑,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드레스를 적셨다.
“하지만, 저는…….”
레이몬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행복을 어째서 그가 재단한단 말인가. 나는,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대신 형님의 곁이 싫다면 이곳에서 널 빼내 줄 수는 있어.”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가 번뜩 뜨였다. 내가 바라는 것을 정확히 짚어내는 그의 말에 소리 없는 울음이 흘러넘쳤다.
“자, 그럼 클로이. 이제 다시 한 번 말해 보자. 네가 원하는 게 뭐지?”
그러나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카일로스의 곁을 떠나고 싶어요.”
지금의 내게는 그 끔찍한 얼굴을 보며 복수를 하는 것보다 그의 곁을 떠나 휴식을 취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럼 이제 다시 말해 봐. 거래가 아니라, 도와 달라고.”
“……도와주세요, 폐하.”
레이몬드는 나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어떻게 도와줄까?”
나는 잠시간 말없이 레이몬드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레이몬드가 황제라 해도 합당한 이유 없이 대공가의 여자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
지난 생의 그가 나를 곁에 둘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대공인 카일로스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카일로스는 절대 나를 쉬이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생과 같은 상황을 만들면 된다.
* * *
얼마 뒤, 레이몬드는 쉽사리 회복하지 않는 내 몸 상태가 심히 염려된다며 황궁의 주치의를 불러 왔다.
황궁에서 온 의사는 내 몸을 진찰하고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카일로스는 당연하게도 크게 반발했다.
“대공성에도 의사는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안심이 되지 않아서 그럽니다, 형님.”
레이몬드는 비싯 웃으며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쥐었다.
“어서 나아, 클로이.”
레이몬드는 얼핏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사르르 흐트러지지는 머리카락 위로 입을 맞추었다. 예기치 못한 행각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양 볼이 새빨갛게 물듦과 동시에 카일로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 이후로 레이몬드는 꼬박 열흘을 더 대공성에 머물렀다. 그는 보란 듯이 카일로스의 앞에서 내게 말을 걸고, 자잘한 스킨십을 했다.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쓸어내리거나 어깨를 스치는 그 작은 손짓들에 일일이 의식하고 반응하는 것은 나였다.
이상했다. 과거에는 더한 행위도 오갔는데, 어째서 이 작은 스침에 얼굴이 더워지는 걸까.
“폐하,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왜, 불편한가?”
“…….”
탁 트인 정원에서 보란 듯이 연인 행세를 하는 그의 모습이 불편하다기보다는, 조금 어색했다.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레이몬드가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피식 웃었다.
본디 내가 처음 부탁했던 것은 황궁의 의사를 이곳으로 보내 주는 것뿐이었다.
그저 같은 공간에 머무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쳤는데, 구태여 눈속임을 위한 애정 행각까지 보여 주는 레이몬드 때문에 자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정도는 봐줘. 내가 네게 닿을 때마다 창백해지는 형님의 얼굴이 보기 좋으니까.”
레이몬드가 내 뒤쪽 어딘가를 힐끔 쳐다보며 속삭였다. 아마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카일로스의 집무실이겠지.
카일로스가 집무실 창을 통해 우리를 지켜보는 것을 알면서 레이몬드는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도.”
“네……?”
갑작스레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당황해 두 눈을 깜빡이자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 손이 스칠 때마다 빨개지는 게 재미있거든.”
화끈, 얼굴이 더욱 짙게 달아올랐다.
“짓궂으셔요.”
“불만인가?”
“그럴 리가요.”
그가 물었으나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이렇게 오래 대공성에 머무르는 것은 순전히 나를 위해서니까.
“폐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뭐가?”
“저를 이용하면 보다 쉽게 카일로스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 행복만 생각해.”
레이몬드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담았다. 흔들리지 않는 그 시선에 나는 숨을 삼키며 입술을 꾸욱 닫았다.
“지금의 넌 너무 지치고 힘들어 보이니까.”
푸스스 흩어지는 눈매에 가슴이 요동쳤다.
레이몬드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레이몬드, 당신은 왜…… 어째서 그토록 다정한 눈으로 나를 보는 걸까.
한참 동안 레이몬드와 함께 정원을 걷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음산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클로이.”
나는 내 방의 정중앙에 떡하니 서 있는 카일로스를 힐끗 쳐다보고는 곧바로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가 내 손목을 낚아채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오늘은 또 황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거칠게 갈라진 음성이 추궁하듯 물었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랑한다고 속삭였어요. 웃음을 흘리고 유혹했지요. 당신이 내게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요.”
“그런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잇새로 새어나온 목소리는 무척이나 절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를 알아온 나는 그 안에 고스란히 드러난 감정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배운 것은 오직 그것뿐인걸요. 황제를 유혹해 그의 아이를 갖는 것…… 아니었나요?”
“제발, 클로이…….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 황제와 그만 만나라고.”
“대공성을 떠나지만 않으면 무엇이든 해도 괜찮다면서요?”
“…….”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수한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자 카일로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술만 짓씹었다. 그의 퀭한 눈가와 거칠어진 피부를 보며 나는 고소해했다. 그래 봤자 아무것도 잃은 게 없는 남자인데도.
“내게 화가 나서 그러는 거야? 그래서 자꾸만 내 눈 앞에서 그 남자와 함께 있는 건가?”
“당신이 가르쳐 준 대로 착실히 이행하는 것뿐이에요.”
누가 보아도 훤히 드러나는 거짓말에 그가 잘생긴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하면 네가 화를 풀까. 어떻게 하면 네가 마음을 열까. 알려 줘, 클로이. 내가 어떻게 하면 나를 용서해 줄래?”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대공성을 떠나게 해 주세요. 그럼 당신을 잊고 살게요.”
“그건 안 돼.”
참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피식, 조소를 날렸다.
“그럴 줄 알았어요.”
예전의 나는 몰랐다. 내가 이토록 싸늘한 얼굴과 목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그런데 어떡하지요, 숙부님?”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호칭으로 그를 부르며 나는 느릿하게 그의 손을 내 손목에서 떼어냈다.
카일로스를 바라보는 내 입가에 실로 오랜만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아름답다고 칭찬했던 눈꼬리를 바드랍게 접어 내리며 나는 한 발짝 물러났다.
“이만 대공성을 떠나야 할 것 같아요.”
“……?”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를 응시하는 그를 향해 나는 조심스럽게 내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저, 임신이래요. 폐하의 아이를 가졌어요.”
“……거짓말.”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러 퍼졌다. 나는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젖혔다.
“어째서 거짓이라 생각하세요?”
“그럴 리가 없어. 전에는 분명 지금이 아니라 조금 더 뒤에…….”
“당신이 기억하는 시간이랑은 흐름이 달라졌잖아요.”
“……!”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이 창백했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가를 물끄러미 보았다.
과거에 내가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 마치 세상을 가진 듯 즐거워했던 그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게 놀라웠다.
‘황제의 아이를 낳아.’
레이몬드와 처음 마주쳤던 신년제 이후로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그는 철저하게 나의 월경 주기와 가임 기간을 계산하였고, 레이몬드와 함께 보냈던 그 첫날밤 또한 그의 완벽한 계획 중 일부였다.
‘어떻게 도와줄까?’
‘거짓말을 조금 하려고 해요. 한 번만 어울려 주세요.’
레이몬드가 제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대공가의 여자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내 뱃속에 그의 아이가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건 거짓말이야. 그래, 거짓말이야. 네가 지금 나를 속이고 있는 거야. 내게서 벗어나려고.”
“못 믿겠다면 의사를 불러 확인해도 좋아요.”
황궁의 의사가 가져다준 약초는 월경의 주기를 늦춰 주고 임신한 것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게 해 주었다. 대공성의 의사를 데려와도 쉽게 거짓을 판별하긴 어려울 것이다.
한 번 임신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연기 또한 어렵지 않았다. 나는 한때 내 뱃속에 품었던 작은 에스델을 떠올리며 소매 속에서 양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럴 순…… 너를 황제에게 보낼 순 없어.”
카일로스가 허망한 눈으로 내 아랫배를 보았다. 기실 그가 내 말을 믿든, 믿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게 필요했던 것은 대공성을 떠나기 위한 구실이었으니까.
“왜요?”
나는 아랫배를 양손으로 감싸며 그에게서 한 발짝 더 물러났다.
“이 아이를 죽이기라도 할 셈인가요? 에스델을 죽였던 것처럼?”
“클로이……!”
우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목소리로 그가 내 이름을 외쳤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제발…….”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아니에요.”
나는 그를 지나치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나도, 당신도. 그 시간 속에 분명히 존재했어요.”
* * *
대공성의 의사가 한차례 나를 진찰했다.
“임신인 것 같습니다.”
담담한 진찰 결과에 카일로스는 몸을 허물었다.
레이몬드는 큰 소리로 웃으며 일방적으로 내가 대공성을 떠날 날짜를 카일로스에게 전달했다. 다행히도 카일로스는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았다.
어쩌면 카일로스는 내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거짓을 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제 하룻밤만 지나면 대공성을 떠날 수 있다. 그 사실이 막혔던 숨통을 조금 트여 주었다.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겠군.”
“고마워요.”
나는 레이몬드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대공성을 떠나면, 그 뒤엔 어떻게 할 참이지?”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일단은 수도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 볼 생각이에요.”
“고향?”
“네, 딱히 그리운 곳은 아니지만.”
작았던 내 눈에 그 무엇보다 커 보였던 마을과 화염에 내려앉았던 가넷슈 저택. 내 뒤틀린 인생의 시작점인 그곳에 가 보고 싶었다.
“물론 곧바로 가지는 못하겠지요. 얼마든지 대공성의 기사들이 들이닥칠 수 있는 곳이니까, 한동안은 수도에 머무르며 기회를 살펴야 할 거예요.”
“으음…….”
레이몬드는 눈가를 살풋 찡그리며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실은, 너를 맡아 주겠다는 사람이 있어.”
그는 정말로 내키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에게 너를 보내고 싶진 않은데, 가장 확실하게 널 보호해 줄 수 있는 여자니까.”
“그 사람이 누군데요?”
“…….”
레이몬드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내일, 소개시켜 주지.”
어지간히도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레이몬드는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내가 그의 충고대로 일찍 잠들기 위해 몸을 움직일 때였다. 휘오오, 작은 바람소리와 함께 창가의 커튼이 흔들렸다.
“……?”
문득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에 창가로 걸음을 움직였다.
“브란스 경?”
창문 아래에 나를 올려다보는 브란스 경이 있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브란스 경은 단숨에 창틀 위로 뛰어올랐다. 깜짝 놀란 내가 뒷걸음질을 치자 그가 나를 안심시켜주려는 듯 잔잔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밤입니다, 레이디 가넷슈.”
“……깜짝 놀랐어요.”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다만…… 오늘이 아니면 찾아오기 힘들 것 같아서…….”
브란스 경은 평소와 달리 조금 흐트러진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무슨 일이지요?”
깜짝 놀란 탓일까. 두근, 두근.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정말 황제 폐하의 아이를 갖게 된 겁니까.”
대공성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거짓으로 답했다.
“네, 그래요.”
“……그렇군요.”
브란스 경은 가만히 내 아랫배를 보더니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잠시 실례를.”
짧은 예고와 함께 그가 방 안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왔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놀라지 않았다. 대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브란스 경?”
“레이디 가넷슈.”
그 자리에 선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꺾어 앉았다.
“지켜 드리겠습니다.”
“네?”
갑작스러운 그의 선언에 난데없는 당혹감이 밀려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그를 바라보자, 더없이 진중한 표정을 한 채 나를 올려다보는 브란스 경이 보였다.
“레이디 가넷슈와 뱃속의 아이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
거슬러 온 시간 속에는 없던 일이다. 브란스 경은 내 앞에 고개를 숙이고서 한참 동안 그렇게 있었다. 나는 그의 반짝이는 머리카락만 하염없이 내려다봐야 했다.
시간을 돌아오면서 무언가 달라진 걸까. 나는 그만한 가치가 없는 여자인데. 브란스 경,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이상했다. 모두가 다 이상했다.
이제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카일로스도 이상했고,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서 나의 행복을 묻는 레이몬드도 이상했으며, 갑자기 나타나 지켜 주겠다고 하는 브란스 경도 이상했다.
그중 가장 이상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염치없게도 레이몬드와 브란스 경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나였다. 뻔뻔하게도 어떻게든 카일로스를 떠나 숨을 쉬고 살고자 하는 나였다.
과연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 * *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난 나는 대공성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마차에 오르려는 나를 에릭슨이 붙잡았다.
“레이디 가넷슈, 제발 한 번만 주인님을 보고 가 주십시오.”
늙은 집사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을 했다. 아침에 레이몬드가 카일로스를 찾아가 무언가 말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 살벌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사용인들이 아침부터 웅성거리는 것을 들었다.
“어떡할래, 클로이?”
레이몬드가 옆에서 삐딱하니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갈래요.”
굳이 떠나는 마당에 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집기를 깨부수고 온몸에 상처가 난 채로 치료를 거부한다 하여도, 그것은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상관없는 사이가 되길 바랐다.
“그래.”
레이몬드는 흡족한 듯 낮게 웃으며 먼저 마차에 올랐다. 나 또한 그의 뒤를 따랐다. 에릭슨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눈가를 훔쳤지만, 나는 오직 나만을 생각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마차가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대공성을 보며 가만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열두 살, 그 어렸던 날 카일로스의 손을 잡고 발을 디뎠던 루드비히 대공성. 그날은 새하얀 눈발이 머리 위로 소복소복 쌓이던 날이었다.
그날의 기억을 모두 묻으며 나는 그렇게 대공성을 떠났다.
덜컹 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고요한 침묵만이 흘렀다.
내내 창밖을 쳐다보던 나는 익숙한 광경에 힐긋 레이몬드를 쳐다보았다. 그 역시 나처럼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노려보고 있었다.
시간을 거스르기 전에도 그와 이렇게 단둘이 마차를 탔던 적이 있었다. 그날의 나는 카일로스를 위해 그를 대공성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를 믿었던 순진한 레이몬드는 그날, 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렇게 좋으냐, 클로이?’
자신이 죽으러 가는 것도 모르고, 마차가 움직이는 내내 나만 쳐다보며 웃었던 레이몬드가 생각이 났다.
“왜 그러지?”
문득 고개를 돌린 레이몬드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눈가를 찡그렸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레이몬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착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테니까 눈을 붙여 둬.”
“저, 폐하…….”
말을 마친 뒤 다시 창밖을 내다보는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
레이몬드는 잠시 기묘한 표정이 되어 나를 빤히 응시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에 열이 올랐다.
“굳이 네게 감사하단 말을 듣고 싶어 그런 건 아니야.”
레이몬드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저 네게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니까.”
참 상냥한 사람이다. 겉으로만 다정한 척했던 그 남자와는 달랐다. 레이몬드는 비록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 생김새와 투박한 목소리를 지녔으나, 그 안에 담긴 알맹이만큼은 누구보다도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눈가가 뜨거워졌다.
“왜, 또 우는 거지?”
그런 나의 변화를 귀신 같이 알아챈 레이몬드가 다시 한 번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아니에요, 이건…….”
“젠장.”
그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정말, 매번 나를 미치게 하는군.”
“죄송해요. 폐하의 기분을 망치려 했던 게 아니라…….”
“사과하지 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하지만…….”
“네가 우는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걸 보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내 잘못인 거지.”
“…….”
시간을 거슬러 온 이후, 나는 레이몬드의 앞에만 서면 자꾸만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삼키게 된다. 이렇듯 미련하게 구는 건 나인데, 레이몬드는 그마저도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
“저는 폐하께서 저와 엮이지 않기를 바라요.”
“나도 마찬가지야, 클로이.”
이상했다. 그가 나와 엮이지 않는 것,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내가 그토록 바라고 또 바라는 일인데. 그 또한 나와 엮이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에는 왠지 코끝이 시렸다.
먹먹하게 가라앉는 심장을 붙잡으며 그를 쳐다봤다. 나를 보고 있는 그의 눈은 더 이상 웃지 않고 있었다.
“나는 너를 몰라. 네가 어떻게 자랐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내게 다가왔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 하지만, 네 인생이 오롯이 나와 형님으로 인해 뒤틀렸다는 것만은 알아.”
나는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길러진 여자였는데, 그것조차도 레이몬드는 나의 잘못이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그랬다. 나 때문에 카일로스에게 붙잡혀 죽어가면서도, 레이몬드는 끝까지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이미 한 번 나와 엮여 버렸으니까, 앞으로는 더 이상 엮이지 않길 바랄 뿐이야.”
레이몬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내게 화를 내지 않았던 걸까? 나는 그를 죽인 가해자였고, 그는 나 때문에 죽은 피해자였는데.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나를 염려하며 사랑한다 말했던 남자……. 이제는 나의 잘못마저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드는 남자…….
그것은 카일로스…… 그 지옥에서 나를 꺼내 주었던 그 남자도 하지 못한 일인데.
나는 나를 구원해 주었던 카일로스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지만, 결국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그의 정적에게 연민을 가져 버린 나의 죄, 가르치지 않은 감정으로 다른 남자의 아이를 소중히 여긴 나의 죄, 감히 그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 버린…… 나의 죄. 그 모든 죄악들이 숨 쉴 틈 없이 나를 조여 왔었다.
“이해가 안 가요.”
내내 품고 있던 속마음이 툭, 밖으로 튀어나왔다.
레이몬드는 무엇이 이해가지 않냐는 듯 내 두 눈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나는 가만히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저를 비호해 주실 수 있는 거지요? 저조차도 저를 용서할 수 없는데. 당연히 나쁜 마음을 품고 나타났던 제게 화를 내고 벌을 주어야 마땅하잖아요.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폐하께서 유리한 쪽으로 움직이기 위해 저를 써먹으셔야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을 이용하지는 않아.”
“폐하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존재예요.”
“누가 네게 그렇게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역시 네 의지를 갖고 살아 숨 쉬는 존재야. 타인을 위한 체스 말이 아니라.”
“아니요, 저는…….”
“이제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앞으로는 그렇게 살아야 해.”
“…….”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클로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커다란 마차는 건장한 성인 남자가 몸을 일으키기에 무리가 없었다.
거친 손끝이 내 목덜미를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오싹한 긴장감에 몸을 뻣뻣이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너는 나와 엮이면 안 돼.”
“…….”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한참 동안이나 뻣뻣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 * *
“으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레이몬드의 미간에 주름이 늘어났다. 작게 앓는 소리에 힐끔 쳐다보자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다리아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굉장한 여자야. 여러 가지 면에서.”
그가 말했던 나를 맡아 준다는 여자는 황후 다리아였다. 오래전, 그러니까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나는 딱 한 번 다리아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뱃속의 아이가 정말 레이몬드의 아이인지는 중요치 않아.’
레이몬드만큼이나 고압적인 느낌을 주었던 그 여자는 오만하게 턱 끝을 들어 올리며 내 배를 가리켰다.
‘아이를 내게 줘.’
그녀는 내 아이를 원했다. 아이만 넘겨준다면 내게 그녀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부귀를 주겠다고 약조했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아이를 ‘빼앗는’ 것이 아닌, ‘맡는’ 것이라 했다. 게다가 그녀는 내게 원한다면 언제든지 아이와 만날 수 있으며 아이 또한 나를 어머니로 알고 자라게 할 것이라 말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당연하게도,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다. 카일로스는 황후 다리아의 가문인 캐롤라인 공작가와 황가 사이의 결속이 약해지기를 원했으니까.
지금에 와서야 나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한다. 만약 그때 에스델을 그녀에게 주었더라면. 차라리 그리했더라면 나의 작은 에스델은…….
“혹시 그녀가 네게 짓궂은 장난을 하더라도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레이몬드는 진심으로 염려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뒤늦게 납득했다.
그녀는 그의 공식적인 부인이었고, 나는 비록 이번 생에서는 그와 깊은 관계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하룻밤을 함께 보낸 여자였다.
게다가 그는 나를 위해 꽤 오랜 시간 황궁을 비우지 않았나. 만약 사실을 안다면 그녀가 고운 시선으로 나를 볼 리 만무했다.
“괜찮아요, 폐하. 무슨 일이 생기든 모두 제가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여자니까 하는 말이야.”
레이몬드는 끄응 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나 또한 덩달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황후 다리아는 레이몬드와 이혼한 후 제국 최초로 영지와 작위를 수여받은 여성이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자신의 숙부였던 캐롤라인 공작을 제거한 뒤 스스로 공작위에 올랐다.
당시의 나는 카일로스에게 감금을 당한 채 미쳐 가는 중이었지만, 그녀가 얼마나 잔혹한 방법으로 자신의 숙부를 제거했는지에 관한 소문은 간간이 들려왔다.
불현듯 그 당시에는 귀담아 듣지 않았던 소문들이 하나 둘 생각났다. 그중 대부분은 그녀가 자신의 숙부와 그의 자식들을 고통스럽게 죽였는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런, 클로이. 내가 너무 겁을 줬나 보군.”
레이몬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안색이 창백해. 그렇지만 네게 절대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야. 너무 무서워하지 마.”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레이몬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떨떠름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득 품고 레이몬드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응접실의 문을 열었을 때, 우아한 자태로 앉아 있던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 안녕?”
여자는 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정확히 내게로 향하는 그 발걸음에 나는 우뚝 멈추어서 얼어붙었다.
“네가 클로이 가넷슈로구나.”
코끝이 스칠 듯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내 얼굴을 감싸 쥐며 조목조목 뜯어보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따위에게 주기에는 아까운 미모네.”
마치 상품을 감별하는 듯, 단조로운 목소리에 나는 숨을 홉 삼켰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여자는 내 귓불을 쓰다듬으며 작지 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때, 레이몬드는 버리고 내 정부가 될래?”
화끈, 얼굴이 붉어졌다. 이토록 적나라한 말은 처음 들어 보았다. 거슬러 온 시간 속의 레이몬드조차도 내게 이렇게까지 직설적인 제안은 하지 않았다.
“다리아!”
레이몬드가 나와 같이 얼굴이 붉어진 채로 씩씩거리며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는 자신이 만든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소리 높여 깔깔 웃었다.
“레이, 오랜만에 만난 부인에게 목소리부터 높이는 건 어디서 배운 버릇이지?”
장난스럽게 질책하는 말투에도 레이몬드의 표정은 풀리질 않았다. 거슬러 온 시간에서 황후가 황제와 같이 있는 모습은 공식 석상에서밖에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레이몬드를 이렇듯 아이처럼 다루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클로이를 두고 이상한 장난질은 그만둬. 무엇보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도 아니고.”
레이몬드는 어금니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그러자 여자의 표정이 더욱 의뭉스럽게 변했다.
“흐응, 그렇다면 더 상관없지 않나?”
“약속이나 제대로 이행해.”
약속? 그의 말에 귀가 쫑긋해졌다. 여자는 붉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여자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레이몬드가 붉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밖으로 나갔다. 도망치듯 나가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내 귓가에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둘만 남았네.”
순식간에 장난스럽던 말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나는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알고 있기에 침을 꿀꺽 삼키며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클로이. 이렇게 불러도 되지?”
“아…… 네, 인사가 늦었습니다. 클로이 가넷슈입니다.”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여자는 내 인사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대뜸 제안했다.
“클로이, 나랑 거래를 하지 않을래?”
벌어진 거리를 다시 한 발짝, 좁힌 그녀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레이몬드를 유혹해 줘.”
“네……?”
레이몬드가 어째서 그녀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살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이만큼이나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왜, 싫으니?”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드비히 대공으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라 들었어. 그런 거라면 나보다는 레이몬드를 유혹해서 그의 보호를 받는 게 훨씬 확실한 방법일 텐데 말이야.”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건 상대를 기만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게 느껴졌다. 혹시 내가 말대꾸를 했다고 해서 격노하면 어떡하나, 미약한 걱정이 들었다. 나는 여자의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발끝에 힘을 꾸욱 주고서 버텨야 했다.
“그럼 기만이 되지 않도록 진심이 되면 되지.”
“……?”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두 눈을 깜빡이자, 여자는 피식 웃으며 두 손가락으로 내 턱 끝을 들어올렸다.
“레이몬드 정도면 꽤 괜찮은 상대란다. 제국의 유일무이한 황제이니 지위는 말할 것도 없고, 무위에 있어서도 따라올 자가 없지. 얼굴도 내 취향은 아니지만 어린 아가씨들은 꽤 좋아하더군. 비록 성정이 사납고 무뚝뚝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야. 그건 내가 보증하지.”
“이건 굉장히 이상한 제안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최대한 여자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며 조심조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황후 폐하께서는 그분의 반려시고, 그런데 어째서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지…….”
“상당히 타당한 의문이구나.”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두려워서 그러는 거라면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
믿을 수 없었다. 레이몬드는 이곳에 오는 내내 내게 그녀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은 단순히 나를 떠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하다간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그녀의 숙부와 그 자식들이 당했던 것처럼 나 또한 얼굴 가죽이 벗겨지고 팔다리를 잘린 채…….
그 이상을 떠올리자니 도무지 여자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온몸의 핏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자에게서 고개를 빗겨 내리며 소심하게 대답했다.
“제겐 불가능한 일이에요. 설사 제가 황후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정말로 그분을 유혹하는 게 가능할 리도 없고요.”
물론 과거의 나는 너무나 손쉽게 레이몬드를 유혹해 낼 수 있었다. 카일로스의 손에서 황제의 취향에 맞춰 자라 온 나는 그저 그의 앞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그를 유혹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폐하, 혹시…… 저를…….’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건 아니야.’
비록 나는 그에게 내 물음을 끝맺지 못했지만, 그보다 한 발 앞서 내 물음을 짐작한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답했다.
‘저는 폐하께서 저와 엮이지 않기를 바라요.’
‘나도 마찬가지야, 클로이.’
우리는 더 이상 엮이면 안 되는 관계였다. 그리고 그것을 나도, 그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이미 한 번 그를 배신하고 죽게 만든 여자였다. 그런 우리가 다시 엮이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가 이렇게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인걸. 게다가 너는 굉장히 그의 취향에 부합하고 말이야.”
“그럴 리가요. 폐하께서는 원래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신다고 들었어요.”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을까? 루드비히 대공?”
여자는 다시 한번 내 턱 끝을 단단히 들어 올리며 두 눈을 마주쳤다. 은은한 갈색 눈동자가 내 속을 샅샅이 꿰뚫는 기분이 들었다.
“클로이 가넷슈.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이 불타는 가넷슈 저택에서 데리고 나온 가넷슈 가의 사생아. 열두 살 때부터 쭈욱 루드비히 대공의 후원을 받으며 자라난 아름다운 외모의 아가씨. 그리고 얼마 전 신년회 때 황실의 마차를 타고 레이몬드의 침실에 들었던 여자가 바로 너지?”
“…….”
나에 대해 샅샅이 읊는 여자의 목소리가 나의 지난 과거를 하나씩 꺼내어 옭죄었다. 아마도 지금쯤 창백하게 질려 있을 나를 보며 여자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나를 무서워하는 표정은 짓지 않아도 돼. 처음부터 네 뒷조사를 할 생각은 없었단다. 다만, 어쩌다 보니 네게 흥미가 생겼지.”
“저는…….”
“레이몬드는 너를 가리켜 자신과 루드비히 대공으로 인한 희생양이라 하더군. 물론 그가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아서 나도 내가 가진 정보로 유추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지만, 너도 분명 처음에는 그를 유혹할 작정이었던 거 아니니?”
“…….”
여자의 말에 틀린 부분이 단 하나도 없어서, 나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내가 어디에 있고 무슨 생각을 하든,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유혹했던 지난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제와 마음을 돌린 걸까? 혹시 레이몬드와의 밤이 별로였어?”
“그, 그런……!”
여자의 손가락이 턱 선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거침없는 언사에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여자는 그런 나의 반응을 즐기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고약한 미소를 지으며 키득거릴 리 없지.
“어머, 미안. 스무 살의 아가씨에겐 상당히 부끄러울 수 있는 물음이었구나. 하지만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거야. 애석하게도, 나는 레이몬드가 그쪽으로 어떤지는 알지 못하는걸.”
“네, 네……?”
“가엾은 레이몬드. 어쩐지 그렇게 모든 걸 다 가진 남자가 제대로 된 사랑 한번 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잔뜩 새빨개진 얼굴로 어리둥절한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여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황후 폐하, 저는……! 그,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저 그분의 마음을 기만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폐하께서 왜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요.”
나의 외침에 여자가 중얼거림을 멈추고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비슷한 말을 하네.”
막상 속에 있는 말을 외치고 나니 뒤늦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심장이 쿵쿵쾅쾅 뛰어 댔지만, 그럼에도 방금 한 말에 대해 후회는 들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자니, 여자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렇게 나를 악당 보듯 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구나. 딱히 레이를 기만하기 위해 네게 그런 제안을 한 건 아니야.”
문득 씁쓸하게 가라앉는 여자의 표정을 보며 나는 그녀의 눈치만 힐끔 살펴야 했다.
“레이에게는 굉장히 큰 빚을 졌거든. 뭐, 이건 모두 내 사정이니 네게 그것을 강요할 순 없겠지. 네가 원치 않으니 다시 제안하지는 않으마. 그렇지만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내게 말해 주렴. 정말로 괜찮은 남자거든, 레이몬드는.”
“……죄송합니다.”
“네가 미안해할 건 없어.”
여자는 가볍게 몸을 돌려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앉으렴.”
우아하게 자리에 앉는 그녀의 뒤를 따라 나도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나를 보며 여자가 피식 웃었다.
“정말 신기하네. 어떻게 그렇게 앉아 있는 자세마저도 레이몬드의 취향일까. 이래봬도 나는 레이몬드가 아주 작은 코흘리개였던 시절부터 알아 온 사이란다. 그땐 내가 머리 두 개는 더 컸는데 이제는 한참을 올려다보게 되었지.”
황후 다리아는 굉장히 엄숙하고 무서운 여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듯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는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그녀와 조금 달랐다.
물론 음색 하나하나에 기품이 묻어나는 고아한 여자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관대했고 자비로운 사람 같았다.
소문처럼 잔혹한 방법으로 피붙이를 죽이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조금 뒤틀린다 해서 무자비하게 상대를 도륙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닌 것 같고 말이다.
“레이몬드가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처음 봤어. 그래서 내가 도와주기로 했단다. 물론, 약간의 대가는 받아 내겠지만.”
황후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빙긋 웃었다. 어쩐지 그 자세와 미소가 레이몬드를 생각나게 했다.
“앞으로 너는 황후궁에 머무르며 나의 보호를 받게 될 거야. 제아무리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이라 하더라도 나의 사람을 감히 건드릴 수는 없겠지.”
“제가 황후 폐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 시녀가 된다는 거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잠시 얼어붙고 말았다. 고작 루드비히 대공가의 방계 가문, 그것도 사생아인 내가 황후의 시녀라니.
“그, 그건 황후 폐하의 이름에 흠집이 나게 될 거예요!”
“그렇지만 그보다 확실하게 너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 네가 레이몬드의 정부가 된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그건 너도 레이도 원하지 않은 것 같으니 이 방법밖에 없지 않겠니?”
“…….”
“너무 걱정하지는 마렴. 나는 레이몬드와 달라서 절대 대가 없는 희생은 하지 않아. 그만큼 레이몬드에게 받아 내기로 한 게 있으니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본디 황후의 시녀는 공작가나 후작가, 아무리 낮추어도 백작가 이상의 여성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황후가 작위 하나 없는 몰락한 가넷슈 가의 사생아인 나를 데리고 다닌다면 그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어머, 나는 정말 괜찮단다. 딱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편도 아니고.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레이몬드에게 가져야지. 이 거래로 대가 없이 손해를 보는 건 레이몬드이니 말이야.”
“……이미 결정이 난 건가요?”
“그럼. 나는 절대 이 거래를 무를 생각이 없어. 만약 네가 그걸 방해한다면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라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생긋 눈꼬리를 휘는 여자의 얼굴은 꼭 진심인 것 같았다.
레이몬드가 나를 보호하는 조건으로 무엇을 내주기로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리라. 한층 더 먹먹해진 감정이 나를 덮쳤다.
“레이몬드는 원래 그런 남자야. 자신이 한 번 책임져야 한다고 마음먹은 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끝까지 책임을 지지. 물론 아무나 그 대상이 되지는 못해. 그래서 나는 네가 레이몬드에게 굉장히 특별한 존재일 거라고 생각했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여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가슴이 들어와 박혔다. 먹은 것도 없는데 가슴이 얹힌 듯 답답했다.
“네가 어떤 방법으로 대공성을 빠져나왔는지는 들었어. 조금 더 쉬게 해 주고 싶지만…… 루드비히 대공이 네 거짓말을 알게 되기 전에 너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면 오래 쉴 수는 없단다.”
“저는 괜찮아요.”
“그래. 씩씩하구나.”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도망치듯 나갔던 레이몬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앞으로 내가 지낼 곳이라는 황후궁 내의 처소를 배정받았다.
거슬러 온 시간 속의 나는 레이몬드의 아이를 낳았으나 엄연한 정부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황후 다리아의 부름이 있었던 딱 한 번 이외에는 한 번도 발을 디딜 수 없던 곳이었다.
낯선 궁, 나는 낯선 방에서 낯선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희끄무레한 손톱달을 내다보는 내 마음에 기묘한 불안감과 동시에 설렘이 공존했다.
카일로스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면서 나는 어떻게든 그의 곁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대공성을 떠나고 나니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굉장히 오랜 시간, 나는 오롯이 카일로스만을 위해 살아온 존재였으니까.
동시에 마침내 그에게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미약한 두려움을 동반하면서도 낯선 설렘을 안겨 주었다.
‘네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웃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머릿속에 교차하는 두 개의 목소리가 있었다. 울지 않는 클로이 가넷슈, 웃는 모습이 더 아름다운 클로이 가넷슈…….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켜 드리겠습니다.’
나의 행복을 바라던 사람, 나를 지켜 주겠다던 사람……. 충분히 불행해야 마땅한 클로이 가넷슈를 위해 주는 사람들…….
‘너는 지금 행복한 걸까.’
나 또한 묻고 싶었다. 클로이 가넷슈는 정말로 행복해도 되는 걸까. 감히 당신들의 앞에서 웃어도 되는 걸까.
* * *
대공의 후원을 받으며 지냈던 방계의 아가씨, 클로이 가넷슈가 떠났다. 그저 한 사람이 떠났을 뿐인데,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있던 루드비히 대공성은 스산하고 황폐한 고성으로 변하고 말았다.
와장창! 쨍그랑! 탁!
사방으로 던져진 집기가 깨지는 소리에 사용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도망쳤다. 늙은 집사 에릭슨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주인님, 괜찮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이마에 둔탁한 물체가 부딪쳤다. 뜨끈한 피가 흘러내리며 동시에 에릭슨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무도.”
방 한가운데에서 젊은 대공이 음산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부릅뜬 채 상대를 노려보는 두 눈동자에 시뻘건 실핏줄이 서 있었다. 마치 짐승과도 같은 그 모양에 늙은 집사는 숨을 헉 삼키며 얼어붙었다.
루드비히 대공성의 늙은 집사 에릭슨은 젊은 주인이 모태에 있을 적부터 그를 알아 왔지만, 그가 이토록 이성을 잃고 변해 버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아주 어렸던 날부터 항시 온화하고 자애로운 주인이었다. 그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다정하게 눈웃음 짓던 이상적인 주인이었다.
“클로이를 다시 찾아올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던 내 말, 벌써 잊은 건가?”
이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광기를 내비치는 주인의 모습은 실로 낯설었다.
“하지만 주인님, 벌써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잖습니까. 이러다 몸이 상할까 염려되어…….”
“오호라.”
스르륵,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젊은 대공이 걸음을 옮겼다. 입가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는 벽에 걸려 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지금 내게 죽여 달라 외치는 거로구나.”
“주, 주인님……!”
쇄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늙은 집사의 몸이 허물어지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낭자한 피가 바닥을 적셨다.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용인들이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돌오돌 떨며 눈물만 흘리는 그들을 향해 카일로스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저런, 울지 마.”
자박, 자박. 한적한 복도 위로 그의 걸음소리와 사용인들의 흐느낌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우는 건 이제…….”
그들의 앞에 선 카일로스가 히죽 웃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지긋지긋하니까.”
비릿한 쇠붙이가 허공을 가르며 동시에 붉은 피가 그의 얼굴에 튀었다. 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남은 사용인들이 모두 도망쳤다. 복도에 홀로 남은 카일로스는 허망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떨구었다.
쨍그랑-
쇠붙이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하하!”
카일로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어젖힌 그가 돌연 웃음을 뚝 거두고는 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클로이…….”
그녀가 떠났다. 벌써 두 번째로 겪는 상실이었다.
사랑하는 클로이, 다른 남자의 아이 때문에 미쳐 버린 클로이, 그래서 결국 죽어 버린 클로이.
그리고 그 이후에 돌아온 시간 속에서 자신을 증오한다 말하며 떠나 버린 클로이, 클로이, 사랑하는…….
“클로이…….”
설운 음성이 오직 하나의 이름만을 찾으며 울부짖었다. 광기로 물들었던 검은 눈동자가 슬픈 기색을 띠며 눈물을 흩뿌렸다. 추악한 눈물이 시뻘건 핏자국과 뒤섞이며 혼탁하게 흘러내렸다.
“나를 싫어하는 너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더 이상 들어 줄 이 없는 읊조림이 공허하게 퍼져나갔다.
“클로이…….”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려앉았으나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카일로스는 미친 사람처럼 연신 한 사람의 이름만을 읊조리며 방 안을 걸어 다녔다. 신발을 신지 않은 발바닥에는 깨진 집기 조각들이 박혀 곪아 가고 있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카일로스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완벽했다. 시간을 되돌아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눈앞에 살아 있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적만 하더라도.
‘증오를 넘어서, 당신이 혐오스러워요.’
언제나 그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주던 클로이였다. 오로지 저만 보고 자랐던 클로이였다. 그녀를 그렇게 키운 것은 다름 아닌 카일로스 루드비히, 자신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이를, 에스델을 다시 만들어 준다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무엇이든 다 해 준다고 했는데. 대공성을 떠나는 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정말 무엇이든 다 해 줄 수 있었는데. 그 남자처럼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그녀만 사랑해 줄 수 있었는데.
“역시…… 그 남자가…….”
카일로스는 그녀를 데리고 떠난 자신의 이복아우를 떠올렸다. 사실은 이복아우가 아니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인 남자. 그 남자를 죽이면, 그땐 클로이가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돌아올까.
카일로스는 어쩌면 그녀가 사악한 주술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자신이 아닌 그 남자를 선택할 리 없었다.
끼이익, 거친 마찰음이 들렸다. 카일로스는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희미하지만 사람의 기척이었다.
또다시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찾아오는 사용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카일로스는 살기 어린 눈동자로 방문 쪽을 노려보았다.
사박, 사박, 사박.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경쾌하고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꼭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듯한 그 걸음걸이에 카일로스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누구…….”
쇳소리 같은 음색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그러나 카일로스는 가느다란 인영이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숨을 멈추었다. 흐린 눈물이 눈가로 흘러내렸다.
“클로이……?”
탐스러운 은발의 여자, 희미한 달빛이 비치고 있는 것은 분명 그녀였다. 클로이…….
“클로이!”
카일로스는 대번에 그녀에게 다가가 양팔 가득 여린 몸뚱이를 껴안았다. 그녀가 돌아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가 그의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그 순간, 여자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내가 클로이로 보여?”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여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망함에 두 팔을 늘어뜨리던 카일로스는 떨리는 시선을 찬찬히 아래로 내렸다.
“클로이…….”
그의 허리까지 간신히 오는 키에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아이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결치는 은빛 머리칼은 분명 그녀의 것이었는데, 그녀와 닮은 얼굴에는 그를 향한 적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안녕, 카일로스.”
아이가 그를 보며 인사했다.
“넌…….”
“아니지, 내 이름은 그게 아니잖아.”
카일로스는 느릿하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뒤늦은 두통과 함께 시간을 거슬러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여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레테.”
“맞아, 레테야.”
아이가 싱긋 웃으며 그를 지나쳐 걸었다. 난잡한 바닥 위를 거닐면서도, 아이의 자그마한 두 발은 깨진 집기 조각들을 가뿐하게 피했다.
“정말 엉망이구나.”
아이는 조금 즐거운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안 되지.”
폴짝 뛰어 창가 위에 걸터앉은 아이가 카일로스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달빛에 드러난 붉은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휘었다.
“고작 이 정도로 망가져서는 내가 시간을 되돌린 보람이 없잖니.”
“…….”
카일로스는 입술을 꾸욱 다문 채 아이를 쳐다보았다. 먹먹하게 가라앉은 그 표정을 보며 아이가 깔깔 웃었다.
“기대하렴, 엉망진창 카일로스야. 네 불행은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맑은 목소리로 저주를 퍼부으며 아이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상당히 높은 높이였지만, 아이의 작은 몸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바닥으로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 천사들의 성이 있어요.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나를 향해 웃어 줘요.”
아이의 입술 사이로 흥얼흥얼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꽃과 나비와 함께 춤을 추고, 행복의 노래 부르며 잠에서 깨어나면 어머니가 나를 안아 주지요.”
가벼운 걸음걸이로 걷던 아이가 조용한 기척을 느끼며 우뚝 멈추어 섰다.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여요, 나를 사랑한다고…….”
밝은 금발의 기사가 저 멀리 나무 아래에 서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를 발견한 아이는 활짝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녹!”
아이는 기사를 향해 폴짝폴짝 뛰어갔다. 아이가 한 발짝 뛸 때마다 아이의 몸이 점점 더 작아졌다. 점점 더 어려진 아이는 네 살 가량의 아주 작은 아이가 되어 기사의 품으로 깡충 뛰었다. 그러자 기사는 아이를 한 팔로 폭삭 안아 들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레테.”
에녹 브란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아이의 자세를 보다 편하게 고쳐 안았다.
“그는 만났습니까?”
잔잔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아이에게 물었다.
“응. 아주 엉망이었어.”
아이는 신이 나서 그의 귓가에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 망가졌다고 할 순 없잖아?”
“…….”
에녹 브란스는 대답 대신 가만히 아이의 말을 경청해 주었다. 재잘재잘 떠들던 아이가 문득 그의 얼굴을 작은 손으로 더듬었다.
“에녹은 이렇게 생겼었구나.”
조물거리는 작은 손이 싫지 않아서, 에녹은 나직하게 웃었다.
“항상 궁금했어. 에녹의 눈동자, 정말 예쁘다.”
“고맙습니다, 레테.”
아이는 에녹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앙증맞은 두 손으로 박수를 짝 소리 나게 쳤다.
“클로이는? 클로이는 만나 봤어?”
“네.”
에녹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자 아이의 두 눈이 땡그랗게 커졌다.
“좋겠다! 클로이는 어때? 에녹이 말해 줬던 것처럼 여전히 웃는 게 예뻐?”
“레이디 가넷슈는…….”
말끝을 흐리는 에녹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가라앉았다.
“어색하지 않게 웃기 위해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직은…… 많이 울고 있어요.”
그러자 아이의 눈꼬리가 추욱 늘어졌다.
“……그건 너무 슬퍼.”
아이는 서글피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에녹이 한 손으로 아이의 보드라운 은빛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레테가 그녀를 웃게 만들어 줄 거잖아요.”
그 말이 마치 마법의 주문이었던 것처럼, 아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씩씩하게 외쳤다.
“응! 레테가 클로이를 행복하게 해 줄 거야!”
“정말 훌륭해요, 레테.”
에녹은 아이를 한 팔로 안은 채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에녹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그의 어깨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글쎄요.”
부드럽게 맞물려 있던 에녹 브란스의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려 내며 대답했다.
“모든 것은, 레테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