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다정한 개새끼의 목을 비틀겠습니다 (2/21)
  • 2장. 다정한 개새끼의 목을 비틀겠습니다

    깜빡깜빡. 몇 번을 다시 감았다 떠 보아도, 내 앞에 있는 것은 그 남자였다.

    카일로스, 나를 진창에서 구원해 놓고서 모든 일이 끝난 뒤 다시 그 진창에 나를 박아 버린 그 남자. 내가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그 남자.

    방금 전까지 과거의 그를 보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그 연장선이라 여겼다. 그러니까 흔히 ‘주마등’이라 부르는 그것 말이다.

    “클로이……!”

    그의 잘생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도 두 눈을 가늘게 뜨니, 식은땀에 젖어 이마 위로 눅진하게 달라붙은 잿빛 머리칼이 보였다.

    꼭 아픈 사람 같은 그 모습에 나는 어쩐지 고소해졌다.

    고소하다니?

    순간 나도 모르게 느낀 감정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번 죽어 버린 심장이 다시 뛰어 댈 만큼 깜짝 놀랐다.

    카일로스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나의 성역이었다. 가넷슈 가에서 짐승보다 못한 비참한 생을 살아갈 뻔했던 나를 구출해 준 나의 구원자이자, 은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는 그의 말마따나 어딘가 고장이 나 있던 내게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란 것을 가질 수 있도록 알려 준 사람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이맛살을 살풋 찌푸렸다. 조심스레 내게 다가오던 카일로스가 화들짝 얼음이 되었다.

    “클로이…… 아직, 아픈 거니?”

    묻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고작 나 따위에게 조심스러워하는 카일로스라니. ‘주마등’이라는 이름의 내 과거는 어딘가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열은 상당히 내렸습니다, 전하.”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흰 수염이 희끗희끗한 나이든 남자를 나는 안다. 에스델…… 내가 그 아이를 잉태했음을 알게 됐을 때, 당시 나를 진찰했던 의사였다.

    그럼 이건 내가 에스델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인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나의 임신 소식에 누구보다, 심지어는 아이의 부모인 황제나 나보다 더 기뻐했던 이가 다름 아닌 카일로스였다. 나는 아직도 내 임신 사실을 확인했던 그 저녁의 일을 기억한다.

    ‘임신입니다.’

    ‘세상에, 클로이!’

    의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와락, 나를 끌어안는 단단한 가슴팍이 있었다. 카일로스는 나름의 방식대로 나를 굉장히 귀여워해 주었지만, 그의 품에 덥석 안긴 것은 단연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를 비롯해 수많은 여자들이 거쳐 갔을 그의 품은 그다지도 황홀하여서, 나는 그와 함께 기뻐했다.

    ‘정말, 정말 해냈어!’

    그는 상당히 들떠 있었고, 평소의 여유롭던 호흡을 잃은 채였다.

    ‘나는 항상 너를 믿었단다. 네가 이렇게 성공할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어.’

    나를 품에 안고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카일로스가 말했다. 나는 터질 것만 같은 심장을 억누르며 그를 간신히 올려다보았다.

    ‘숙부님께 도움이 되어서 정말 기뻐요.’

    수줍은 나의 답변에 다시 한번 그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팍 위로 그의 심장이 나와 같이 뛰고 있었다. 내가 황제의 아이를 잉태한 일이 카일로스에게는 그만큼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 열은…… 내린 것 같군.”

    그의 차가운 손등이 내 이마에 닿았다.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어느 틈에 또렷해진 시야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지만 아직도 안색이 안 좋아.”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혹시 잘못된 건 아니겠지…….”

    카일로스가 말끝을 흐리며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상하다. 분명 의사는 진료를 마쳤는데. 아직 나의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걸까?

    그럴 리 없다. 의사는 루드비히 가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그의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공들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는 의사가 나의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 리 없다.

    “클로이…….”

    나를 보며 머뭇거리던 카일로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등이 내 이마에 닿았다.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어느 틈에 또렷해진 시야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래, 열은…… 내린 것 같군.”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 보았다.

    “어째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거지? 아직 아픈 곳이 있다면 말을 해 줘.”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동자는 꼭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아플까 봐 걱정을 하는 걸까? 무척이나 달콤한 가정이었으나, 그럴 리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의 ‘아우님’께 드릴 귀한 몸에 흠집이 날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품 가치의 하락을 걱정하는 장사치의 셈법과 비슷한 종류였다. 나의 아픔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질 못했다.

    아주 오래전,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때의 나는 아팠다. 너무 아팠다. 얼마나 아팠냐면 열이 너무 심해 밤새 헛것을 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고, 목이 다 헐어 묽은 수프마저도 삼키기 힘들었다.

    약을 먹기 위해 간신히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게워내는 통에 약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아 그토록 사랑하는 그의 이름마저 부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심하게 앓으면서도 가장 서러웠던 것은 그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카일로스는 시간이 날 때면 병상 위에 누워 있던 가엾은 나를 찾아왔으나, 점차 그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 여자, 로잘라인 영애가 그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거니? 클로이, 아무 말이라도…….”

    그의 손바닥이 내 손등 위를 부드럽게 덮었다. 순간 느껴지는 거북한 감각에 나는 화들짝 손을 털어 냈다. 그 바람에 나를 붙잡고 있던 카일로스의 손이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클로이……?”

    “아…….”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에 당황한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의 살갗이 닿았던 손등을 다른 손으로 벅벅 문지르며 그를 쳐다봤다.

    “이건…….”

    잠시 말을 하다 말고, 나는 숨을 크게 멈췄다.

    미묘하게…… 아니,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이상한 부분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내 기억에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나 바란 나머지 기억이 왜곡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죽음과 맞바꾸어가면서까지 바랐던 일이 ‘고작’ 이것이었나?

    나의 임신 사실에 안절부절못하는 이 남자를 보는 것?

    깜빡깜빡, 멍청하게 두 눈을 깜빡이자 뒤늦은 충격이 나를 강타했다. 죽음 이후의 단계라기엔 너무나 생생하지 않은가!

    “나가…….”

    잘게 떨려나온 내 목소리는 살풋 잠겨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의 것과 같았다.

    “나가 주세요…….”

    “클로이!”

    양 손으로 머리를 싸매자 카일로스가 내 이름을 외치며 한 발짝 다가왔다.

    “당장 나가 주세요!”

    “…….”

    단언컨대, 나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이런 식으로 불손하게 소리쳐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결코 죽음 직전에 보이는 ‘주마등’ 따위가 아닌 것이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달달달 떨렸다. 급격한 추위가 밀려 왔다. 손끝으로 피어나는 감각이 점점 생생해졌다.

    고개를 들자 안절부절못하고 나를 바라보는 카일로스가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 움찔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끝없는 공허함이 밀려 왔다.

    툭, 툭, 후두둑.

    아래로 낙하한 눈물이 반쯤 덮고 있던 이불을 적셨다.

    “왜…… 왜 우는 거야, 클로이. 많이 아픈 거야? 그래서 그래?”

    나야말로 궁금했다. 왜 자꾸 내게 이런 것을 묻는 거지. 나가라잖아. 내가 나가 달라잖아.

    “클로이?”

    “……죄송해요, 숙부님.”

    간신히 감정을 진정시킨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혼자 있고 싶어요.”

    “…….”

    카일로스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담담하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의사를 먼저 내보내고 그 뒤를 따라 나가려던 카일로스가 방문 앞에서 멈칫하며 나를 돌아봤다.

    “조금 이따 다시 오마. 혹시 불편한 게 있으면 종을 울리도록 해.”

    “네.”

    나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황후의 독을 먹고 죽었어야 할 나를, 카일로스가 다시 살린 것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마지막 기억은 그가 나를 자신의 침실에 가둬 두고 방치한 이후, 독약을 들고 찾아온 황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의사가 곁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 여겼다.

    그러나 어딘가 석연찮은 점들이 많았다. 첫째로, 황궁에 있어야 할 카일로스가 대공성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황후가 나를 싫어하니까, 황후의 눈을 피해 나를 살린 것이라면 내가 대공성에 머무르는 게 어느 정도 이해갔다.

    하지만 그는 황제다. 그것도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장 바쁜 시기의 황제. 그런 그가 고작 나 때문에 황궁을 비우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대공성의 의사가 자꾸만 카일로스를 ‘전하’라고 부른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과거 그가 대공이었을 적에 불리던 칭호였다.

    비록 내게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예전의 ‘숙부’라는 칭호를 사용하라 했지만, 그토록 황제란 자리에 집착했던 그가 여전히 ‘전하’라 불린다는 것은 그의 권위에 흠집이 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드럽고 다정한 인상과 달리 카일로스는 자신의 명예를 굉장히 중시하며, 조금이라도 그것에 흠이 생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였다.

    그런 그가 황제가 되더니 새삼 관대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먹기 싫어도 약은 먹어야 해. 그래야 얼른 낫지.”

    침대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은 카일로스가 내게 약을 건네며 바드랍게 웃었다.

    독을 먹고 죽을 뻔했던 그 직전, 귀찮음과 경멸–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나를 보던 것과 달리, 다시 오래전의 상냥한 카일로스로 돌아가 있었다.

    왜 그러는 걸까? 다시 내가 필요해진 걸까?

    손에 힘이 없어 양손으로 그가 건넨 컵을 붙잡았다. 밀려오는 쓴 냄새에 코끝이 절로 씰룩거렸다.

    “클로이, 너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심한 열병에 시달렸어. 네가 또 아플까 봐 걱정되는 내 마음을 부디 이해해 주렴.”

    아이를 어르는 듯 다정다감한 말씨였다. 나는 그가 날 필요로 할 일이 무엇일지 가늠하며 컵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는 내게 쓸모 있는 건 오직 예쁘장한 얼굴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쁜 걸 좋아하는 또 다른 정적이 생긴 걸까. 그래서 이번에도 그 정적에게 나를 보내려는 걸까.

    또 다시, 누군가를 유혹하고…… 몸을 섞고…… 아이를…….

    “욱!”

    갑작스레 밀려온 구토감에 막 머금었던 약을 모조리 뱉어 내고 말았다. 그마저도 끝이 아니라 빈속에서 헛구역질이 계속되어 위액만을 반복해서 게워 내야 했다.

    “클로이, 괜찮니? 클로이!”

    카일로스가 다급히 내 등을 두드리며 소매로 내 입가를 문질렀다.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온 더러운 것들이 그의 소매에 묻어났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러운 것은 내가 아니라 이 남자였다. 어지러운 두 눈을 부릅뜨고 나는 카일로스를 노려봤다. 하지만 카일로스는 내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도 모른 채 우왕좌왕하며 의사를 찾아 댔다.

    ‘개새끼.’

    소리 없는 욕설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나를 아껴 주는 척, 다정하고 상냥한 척 가면을 쓰고 있는 저 남자는, 나를 기만하고 짓밟은 남자였다. 내 사랑을 이용해서 자신의 아우를 나락으로 이끌도록 종용케 하고, 끝내는 내 아이마저 앗아 간 남자였다.

    ‘다행이군. 형님이 너만은 죽이지 않을 테니까.’

    다 죽어가는 몰골로 나를 보며 안심하듯 웃던 그의 아우가 생각났다. 내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 남자를 떠올린 순간.

    ‘어서 가렴. 네 아이가 기다리잖니.’

    에스델, 걸음마도 떼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야 했던 가엾은 나의 에스델을 떠올린 순간.

    와르르-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괜찮아, 클로이. 괜찮아. 울지 말고 심호흡을 천천히 해 봐.”

    다정한 손길이 내 등을 어루만졌다. 나를 걱정하는 척, 위하는 척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시금 속이 메스꺼워졌다.

    쨍그랑.

    이불 위에 엎어졌던 컵이 데구루루 굴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산산조각이 난 컵 조각을 치우는 사용인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보았다. 여전히 매혹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개새끼였다. 다정함을 가장한 아름다운 개새끼.

    미련한 나는, 그것을 너무도 늦게 깨달았다.

    * * *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의사가 내 몸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약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고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 냈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체온도, 맥박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래도 몸이 아닌 다른 곳에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

    이어진 의사의 말에 카일로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의사가 나가고 방 안의 사용인들마저 모두 내보내자 카일로스와 나만이 남은 방 안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카일로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려서 그를 피해 시선을 내렸다.

    “많이 힘들었니?”

    잠깐 사이에 상당히 수척해진 낯으로, 카일로스가 물었다.

    “몸과 마음이 다 상할 만큼, 넌 이렇게 힘들었구나…….”

    내가 그렇게 힘들다고, 에스델이 보고 싶다고 애원할 적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그였다. 이제 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 판단한 거였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애틋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습관적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뻗는 그의 행동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

    내게 손을 뻗던 그가 잠시 그대로 굳어 버리더니, 그대로 손을 거두었다.

    “가엾은 클로이.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카일로스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갈 곳을 잃은 손이 파르르 떨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이렇게 소중한 널…… 내가…….”

    그래, 나를 망가뜨린 것은 바로 당신이다. 에스델을 앗아간 개새끼. 이런 말을 할 시간에 당신은 내게 에스델을 돌려주어야 했다. 하다못해 그 가엾은 아이의 시신이라도.

    자책 어린 말씨로 중얼거린 그는 나릿한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곤 두 눈을 추욱 늘어뜨리며 나를 향해 흐릿하게 웃어보였다.

    “이제는 모두 그만두자꾸나.”

    “……?”

    그는 점점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그만두자니. 무얼?

    “그래, 이제는 정말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나도.”

    조심스럽게 내 침대 앞에 무릎을 꿇어앉은 카일로스가 다시 한 번 내게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움찔하지 않은 나의 손을 잡아 꼬옥 쥐고서 속삭였다.

    “너무 많이 아프잖아.”

    “…….”

    이건 또 무슨 수작일까. 그의 속을 알고 싶어서, 나는 잠시간 그의 얼굴을 빤히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국 그의 생각 읽기를 포기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숙부님.”

    여전히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원래의 목소리를 되찾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깨어난 직후로 내가 그를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카일로스는 무엇이든 말해 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바싹 다가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의도하지 않아도 날카로운 말씨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내 손을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감각에 손을 놓아 달라 말하려던 참이었다.

    “더 이상 황제를 유혹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거야.”

    ……?

    잠시 내가 들은 말이 이해가지 않아 두 눈만 끔뻑였다.

    “나는 정말 몰랐어, 클로이. 나는 정말…….”

    잠시 이를 악물며 말을 멈춘 그가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황제와의 하룻밤이, 널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정말 몰랐어.”

    “네?”

    카일로스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점점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그가 지금 일컫는 ‘황제’가 꼭 이미 죽은 그의 아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내저으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그때, 작은 노크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내 얼굴은 삽시간에 창백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 사람이…….

    루드비히 대공성의 나이 든 집사 에릭슨은 내가 카일로스의 아우와 하룻밤을 보낸 후 심하게 앓았던 차가운 그 겨울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에겐 숨기고 있었으나 오랜 지병으로 인해 각혈을 하던 그는 결국엔 그 차가운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주인님, 로잘라인 후작 영애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사 에릭슨의 말에 카일로스의 표정이 사늘하게 굳었다.

    “분명 이만 돌아가시라 전한 걸로 아는데.”

    “주인님을 뵙기 전까진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군요. 신년제가 끝난 이후로 주인님을 만나지 못해 신경이 예민해져 있습니다.”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여자로군. 다시 한번 돌아가라 전해 드려. 지금은 몹시 바쁘니 말이야.”

    말씨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그러나 나는 카일로스가 짜증을 낸다는 사실보다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명 죽었던 사람이 생전의 모습으로 살아 있고, 황궁에 머물러야 할 사람이 대공성에 머무르고 있다. 게다가 황제였던 그는 ‘전하’가, 황후였던 그 여자는 ‘후작 영애’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뒤늦은 기시감이 나를 덮쳤다. 딱 한 번, 지금처럼 몸 상태가 삐걱거리며 아주 많이 아팠던 때가 있었다.

    신년제. 황제였던 그의 아우. 로잘라인 후작 영애…….

    그래, 내가 카일로스를 위해 그의 아우와 하룻밤을 보냈던 그다음 날의 일이었다. 지금의 나는 꼭 그때처럼 앓은 상태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엔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나를 찾지 않았던 카일로스가 지금은 내 앞에 있다는 점이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여자의 독을 먹고 난 뒤 한바탕 앓은 것이 아니었나? 아니, 애초에 나는 죽은 것이 아니었나?

    그럼 내가 겪은 것들은?

    그의 강요 아닌 강요로 인한 황제와의 동침. 황제의 정부라 손가락질 받던 나. 그리고 에스델…… 작고 소중한 나의 에스델…….

    고통스러운 열병 속에 앓았던 악몽인 걸까? 일어나지 않았던,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그런 환상인 걸까?

    그럴 리가! 에스델, 가엾은 나의 아이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기듯 아파 오는데 이게 모두 거짓일 리 없었다.

    “……!”

    벌떡 일어난 나는 그대로 카일로스의 손을 뿌리치고 욕실로 뛰어갔다. 나를 부르는 카일로스의 목소리가 내 뒤를 쫓았다. 욕실의 거울 앞에 선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거울 속의 나를 바라봤다.

    흉터가 사라져 있었다. 카일로스,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내 목덜미에 남겼던 흉측하고 선연하였던 그 아픔이 사라져 있었다.

    “대체 왜 그러니, 클로이?”

    창백한 얼굴로 뒤따라온 카일로스가 나를 품에 그러안았다.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였는데, 이제는 불쾌한 두근거림만이 남아 음습하게 나를 옭아맸다.

    이토록 선연한 감각이 꿈일 리 없었다. 환상일 리 없었다.

    그래, 이것은 역행.

    시간의 역행이었다.

    * * *

    과거로 돌아온 것을 깨닫고 나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뒤늦게 이해가지 않던 상황의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한 차례의 죽음, 그리고 회귀.

    여자가 건넨 독을 먹고 죽은 나는 어쩐 이유에선지 죽기 전의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정확하게는 황제, 레이몬드와 신년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의 어느 날로 말이다.

    ‘왜 하필 지금일까.’

    고민한다 해서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조금씩 상황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시간을 돌아왔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시간을 두고 주위를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은 지금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탓이다. 과거의 나는 어떻게 행동했었나, 한참을 머릿속으로 떠올려야 했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에게 가 보셔야지요.”

    여전히 나를 그러안고 있는 카일로스에게 말했다. 응당 그 시절의 내가 했을 법한 말이었으나 그의 눈썹이 불쾌한 듯 꿈틀거리며 치솟았다.

    “네가 이렇게 아픈데, 어째서 그 여자에게 가 보라는 거야?”

    “저와 함께 있는 것을 알면 후작 영애께서 언짢아하실 거예요.”

    “지금 그게 중요해?”

    분명 내가 돌아온 곳은 이미 경험한 과거의 시간대였는데 지금의 내 상황은 내 기억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클로이, 잘 모르고 있겠지만 어젯밤 너는 굉장히 많이 아팠어. 하마터면 송장을 치우는 줄 알았다고.”

    “…….”

    “그리고 지금의 네 상태도 썩 괜찮다고 볼 수 없지.”

    일단은 오직 나만을 쳐다보며 걱정하고 있는 저 눈동자가 그러했다.

    “후작 영애는 숙부님께 꼭 필요한 사람이잖아요.”

    “너만큼은 아니야.”

    “조금 아팠을 뿐이지, 죽은 것도 아닌걸요.”

    “그만.”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나의 말을 막았다.

    “후작 영애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란다.”

    카일로스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며 눈을 맞추었다.

    “어여쁜 나의 클로이, 부디 머리 아픈 것들은 생각하지 말고 몸의 회복을 우선시해.”

    내가 겪은 시간들이 모두 거짓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의 엄지가 창백하게 갈라진 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내리 눌렀다. 언제고 나와 입을 맞출 때면 보내던 그와 나만의 신호였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몸에 성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내가 황제와 밤을 보낼 동안, 그가 그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증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제와 처음을 보냈을 때, 나는 딱 죽기 직전까지 아팠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팠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팠던 것은 그런 내가 아픈 것도 모른 채 기뻐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나는 양손으로 카일로스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뒷걸음질 쳤다.

    “클로이?”

    카일로스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방금 내가 보인 것은 과거의 나와는 굉장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의 흔적을 달고서 나와 입을 맞추려는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졌다.

    “죄송해요, 하지만…….”

    나는 말끝을 흐리며 그의 목덜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카일로스가 얼굴을 굳히며 옷깃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아무리 옷깃을 끌어당겨도 그의 목덜미에 남은 붉은 자국은 감춰지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개새끼.”

    “클로이?”

    이런,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지?”

    “헛소리가 튀어나왔나 봐요. 심하게 앓았더니 정신이 혼란스럽네요.”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사태를 수습했다.

    “……네 말마따나 정말 많이 혼란스러워 보여. 내가 뭐랬어, 정말 많이 아팠다고 그랬지?”

    “숙부님 말씀이 옳아요. 아무래도 저는 안정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좀 꺼져 줬으면 좋겠어.

    “그러니 제발 혼자서 쉴 수 있게 해 주세요. 로잘라인 후작 영애를 만나고 오면 되겠네요. 그동안 저는 심신을 회복하고 있을게요.”

    “널 혼자 두고 싶지 않지만, 네가 정 원한다면.”

    카일로스는 사뭇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몸의 긴장이 풀어진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레이디 가넷슈, 괜찮습니까?”

    의사로부터 약을 받아 온 집사 에릭슨이 바닥에 허물어져 있는 나를 보고 놀라 물었다.

    “네, 괜찮아요, 에릭슨.”

    “누워 있는 동안 주인님께서 레이디 가넷슈를 많이 걱정했습니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주인님의 모습은 스무 해가 넘는 동안 처음 있는…… 쿨럭, 쿨럭.”

    에릭슨이 잔기침을 하며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쳤다. 나는 차마 그에게 괜찮냐고 물을 수 없었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그가 실은 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 것을 내가 거슬러 온 미래, 혹은 내가 보았던 환상 내지는 악몽 속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추한 꼴을 보였군요.”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지요?”

    나는 조금이라도 확실히 하기 위해 물었다.

    “1월 1일 날 신년제가 있었고, 그 다음날 저녁부터 꼬박 하루를 앓아 오늘은 1월 3일이지요.”

    황제와 밤을 보내고 온 다음 날, 나는 심각한 열병에 시달렸지만 굳이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후작 영애와 함께 있을 그 남자에게 관심을 끄는 것처럼 비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앓았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지금의 나는 만 하루를 앓고 일어났다.

    아마도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온 시점으로 추정되는 그 사이에 무언가 틀어진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앓고 난 뒤에 황제의 마차가 대공성에 당도했다. 내가 거슬러온 시간이 사실이라면, 대략 이 주의 시간 뒤에 또다시 황제의 마차가 대공성에 도착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조금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정말로 황제가 마차를 보내온다면, 그때의 나는 어떡해야 하는 걸까.

    그러다 문득 나는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시간을 거슬렀다는 것은 또 하나의 사실을 뜻했다.

    내가 거슬러 온 이 시간은 에스델, 그 남자가 앗아 갔던 나의 아이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

    “레이디 가넷슈? 괜찮나요?”

    에릭슨의 목소리가 한참 동안 얼어 있던 나를 깨웠다.

    “아, 네. 그럼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에릭슨의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혼자 있고 싶노라 양해를 구하는 내게 에릭슨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슨.”

    불현듯 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어쩌면 그것은 어린 날 낯선 대공성에 발을 들였던 나를 반겨 주었던 그를 위한 마지막 배려일 것이다.

    “힘이 들면 무리하지 말고 고향으로 내려가 쉬는 건 어떠세요? 올 겨울은 굉장히 추울 거예요.”

    “이 늙은이에겐 루드비히 대공성이 마음의 고향이지요.”

    안타깝게도 그는 나의 배려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로잘라인 후작 영애와 마주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머나, 이게 누굴까.”

    나를 발견하곤 성큼성큼 다가온 후작 영애가 눈살을 잔득 찌푸리며 내 몸을 훔쳐봤다. 원래부터 나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였지만, 유독 노려보는 눈매가 매서웠다.

    ‘그녀의 미움을 받을 일은 만들지 말아.’

    언제고 내 귓가에 속닥이던 카일로스의 경고가 메아리치듯 울렸다. 그가 내 앞에서 직접적으로 다른 여자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 목소리는 꽤나 오랜 충격으로 내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 여자와 마주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작아지던 것은.

    카일로스에게 중요한 여자니까, 카일로스가 선택한 여자니까. 그래서 나는 최대한 여자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자의 미움이 아니라 그의 미움을 받을까 두려웠던 탓이다.

    “황제와 밤을 보내더니 황후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지?”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가 내게 시비를 걸었다.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는 내 모습이 불쾌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데 대체 어디가 아프다는 건지. 전하의 마음을 끌고 싶은 건 알겠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니?”

    시간을 거슬러 온 탓일까. 고약한 반항심이 불쑥 샘솟았다.

    그에게 미움을 받으면? 혹은 미움을 받지 않으면?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결국 그는 나의 에스델을 앗아 갔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우는 거니? 누가 보면 내가 널 괴롭히기라도 하는 줄 알겠구나. 어서 그치지 못해?”

    당황한 여자가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여자와 가만히 서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내 모습은 누가 보아도 그녀가 나를 괴롭히는 모양일 것이다.

    “그만두십시오.”

    문득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단정한 뒷모습이 내 앞을 막았다.

    ‘어……?’

    순간 눈물이 멎을 정도로 놀라 굳어 버렸다. 나는 저 뒷모습을 알고 있다. 이제는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아득한 미래 속에서 내 손을 붙잡고 앞서 가던 단단한 남자의 등이 있었다.

    그 등에 몸을 맡긴 채, 나는 하염없이 펼쳐진 어둠을 따라 걸었다. 그 길의 끝에 빛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서.

    달조차도 희미한 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희끄무레한 달빛에 부서지던 반짝이는 작은 빛이 있었다.

    “에녹 브란스 경.”

    여자가 새빨간 입술을 잘근 베어 물었다.

    “뭘 그만두라는 거죠? 난 억울해요.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저 애가 혼자 날 나쁜 여자로 만들려고…….”

    “레이디 가넷슈에게는 안정이 필요합니다.”

    나를 막아선 이 때문에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저 밝은 백금발 뒤로 가려진 여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디가 아픈 여자라는 거죠? 이 날씨에 이곳까지 나와 잘만 걸어 다니는데. 저게 다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란 걸 남자들은 정말 모르나 봐요?”

    “…….”

    비록 에녹 브란스 경이 카일로스의 신임을 잔뜩 받는 기사라 하지만 여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내가 브란스 경을 말리기 위해 그의 등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때였다.

    “클로이!”

    저 멀리서 사색이 되어 걸어오는 카일로스의 목소리가 우리 세 사람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언제나 황족으로서의 몸가짐을 최우선하던 카일로스가 뛰다시피 걷는 모습에 그의 뒤를 따르던 사용인들이 더욱 놀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빠른 보폭으로 걸어온 그는 브란스 경을 향해 뻗어지던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의사는 아직 네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그랬는데, 왜 이곳까지 나온 거야? 침대 위에 누워 있어야 할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불편한 곳은 없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목소리에 잠시 머리가 아팠다.

    시간을 거슬렀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카일로스와 대화하는 게 굉장히 거북했다. 그 메스꺼운 상황에서 나를 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로잘라인 후작 영애였다.

    “카일!”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카일……?

    절로 동그래진 눈이 그와 후작 영애를 번갈아 보았다. 카일로스는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내심 조소가 일었다.

    카일, 카일이라……. 나로서는 감히 한 번도 담을 수 없던 그의 애칭이 아닌가.

    “방금…… 날 어떻게 부른 겁니까?”

    그가 눈가를 찡그리며 묻자, 여자가 실수를 했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사과를 했다.

    “아, 미안해요. 그 이름은 침실에서만 부르기로 약속된 거였는데. 신년제 때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실수를 해 버리고 말았네요.”

    여자가 보란 듯이 나를 힐끗 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의도된 실수였을 것이다.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내게 타격을 주리라 생각했겠지.

    내 손목을 움켜쥔 카일로스의 손에 힘이 가득 실렸다. 아팠다.

    “쓸데없는 소리는 삼가 주셨으면 좋겠군요. 대공성이 좋지 않은 일로 분주하니 다음에 다시 보자고 전해 드렸는데.”

    몸이 오싹해질 만큼 서늘한 목소리는 적어도 그에게서 처음 듣는 종류의 것이었다.

    좋지 않은 일? 나는 미간을 좁히며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기로 이 시기의 대공성에는 얼마 뒤 일어날 집사 에릭슨의 죽음을 제외하곤 좋지 않은 일은 없었다. 오히려 황제가 내게 관심을 보이면서 카일로스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지요? 우리, 무려 사흘 만에 다시 보는 건데!”

    여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어제 저녁에 로잘라인 후작 영애께 간 게 아니었나요?”

    불쑥 튀어나온 내 말에 카일로스가 나를 돌아봤다.

    “바빴어. 신년이니까.”

    하지만 당신은 계속 내 방에 머무르지 않았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그의 뒤편으로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히고 있는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보였다.

    “그런데 에녹,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뒤늦게 돌아보니 우리에게서 세 발짝 물러나 고개를 숙인 채 시립해 있는 브란스 경이 보였다.

    “…….”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브란스 경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문득 그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던 게 너무나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분명 수도에 다녀오라고 보냈던 것 같은데.”

    “이제 막 다녀온 참입니다. 기사 에녹 브란스, 루드비히 대공성으로의 귀환을 보고합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꺾으며 보고하는 브란스 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귀환한 너에게 또 일을 시켜 미안하군. 로잘라인 후작 영애를 저택까지 모셔다 드리도록 해.”

    “네, 전하.”

    브란스 경은 군말 없이 대답했다. 카일로스는 뒤에서 무어라 항변하는 로잘라인 후작 영애를 내버려 두고서 나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 * *

    “클로이, 네가 원한다면,”

    나를 억지로 침대 위에 눕힌 카일로스가 하얀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려 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내 이름을 불러도 좋아.”

    “네?”

    “내 이름을 허락해 줄게. 그러니까 나를 카일, 이라고 불러도 괜찮다는 거야.”

    그는 조금 뜬금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후작 영애가 내 이름을 불렀잖아. 그것 때문에 뚱해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뚱해 있었다고? 딱히 별 생각이 없었는데, 카일로스는 그렇게 여겼나 보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숙부님의 이름을 부르겠어요.”

    “왜 안 되지? 실상 대공가와 가넷슈 가 사이의 혈연이 옅어진 지도 오래인데, 오히려 네가 나를 숙부님이라 부르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

    “그럼 저는…… 숙부님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방금 말했잖아. 카일, 내 이름을 부르라고.”

    “후작 영애도 아닌 저 따위가 숙부님의 이름을 부르라고요?”

    나는 진심으로 놀라 물었다. 그러자 그가 조금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카일로스의 손바닥이 내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너는 내게 고작 후작 영애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소중한 존재야, 클로이.”

    “하지만 이제까지 그런 말씀 한 번도 없으셨잖아요.”

    나는 순전히 카일로스의 필요에 의해 거두어진 존재였다. 카일로스가 아우를 제거하기 위한 체스 말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나는 카일로스를 사랑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감히 바랄 수 없었다. 열일곱의 서툴렀던 내게 그 사실을 각인시켜 준 이는 다름 아닌 카일로스였으니까.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눈가를 살풋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네가 조금 변한 것 같아.”

    신기하게도, 카일로스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나 또한 그가 조금 변한 것 같다고 느끼는 중이었으니까.

    “그럴 리가요.”

    나는 의식적으로 싱긋 웃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크게 앓았잖아요. 그래서 평소와 다르다고 느껴지는 거겠죠.”

    “그래. 네가 이렇게 많이 아픈 줄 알았더라면 더 관심을 기울이는 거였는데.”

    속상한 듯 추욱 늘어진 눈매가 내 시선을 끌었다.

    거짓된 다정함으로 나를 기만했던 그였다. 저 늘어진 눈매 또한 거짓된 것은 아닐까.

    “공사다망하신 분이잖아요, 숙부님은요.”

    “카일로스.”

    그가 내 손을 잡아끌며 단단하게 읊조렸다.

    “내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했어.”

    “명령인가요?”

    나의 물음에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너한테 단 한 번이라도 명령을 한 적이 있었니?”

    “……아니요, 그런 적은 없었지요.”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직접적인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그저 그를 사랑하는 내가 그를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긴 시간에 걸쳐 세뇌해 왔을 뿐이다.

    심지어 황제를 유혹하고 황제의 아이를 낳았던 일마저도 모두 ‘그를 위한다’는 명목을 빙자한 교묘한 종용이었다.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한참의 침묵 뒤에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야.”

    그의 손안에 붙잡힌 내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싶어서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댔다. 그럴수록 내 손을 붙잡은 그의 손힘은 더 강해졌다.

    “정정하마, 클로이. 네게 내 이름을 불리도록 허락해 줄 수 있을까?”

    “…….”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는 카일로스의 모습에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이 이상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내뱉었다간, 그가 이상함을 감지할 것 같았다.

    아직은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비밀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 상대가 한때 내가 사랑했던 카일로스라고 해도 말이다.

    “알겠어요, 숙부님.”

    그래서 나는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의 내가 어떻게 웃었는지를 떠올리며 최대한 그때와 비슷하게 웃으려 노력했다.

    “아니, 카일로스…… 님.”

    도무지 그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부를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여자, 로잘라인 후작 영애 같은 사람에게나 허락된 이름이었다. 카일로스는 조금 아쉬운 기색을 보였지만, 더 이상 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주인님, 에릭슨입니다.”

    단정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 에릭슨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집사를 대하는 담담한 말투는 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에릭슨은 여상한 표정으로 답했다.

    “황실에서 마차를 보내 왔습니다.”

    그 말에 나와 카일로스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황제의 마차는 거슬러온 미래에서보다 무려 열흘이나 빨리 당도했다.

    시간을 거스르기 전의 나는 이 시기에 훨씬 더 오래 아팠다. 어쩌면 너무 아파 일어날 수 없던 사이에 지금처럼 황제의 마차가 이미 한 번 왔다 간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카일로스라면 왠지 아픈 나를 억지로 일으켜 황제의 마차에 태워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억지’는 아니겠지. 나는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바보 같은 여자였으니까.

    아무튼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나는 상당히 병이 나아 쌩쌩해진 상태였으나, 막상 황제의 마차가 당도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황제와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카일로스가 먼저 단호하게 말했다.

    “돌려보내.”

    “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부름인데…….”

    “클로이는 지금 몸이 좋지 않아 외출을 할 수 없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에릭슨은 그대로 황제의 마차를 돌려보내기 위해 나갔다.

    황제와 다시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 두려웠지만 그것과 별개로 당황한 나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째서 마차를 돌려보낸 거지요?”

    “네가 몸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잖아.”

    “외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의사는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

    뒤틀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츰 기분이 나빠졌다.

    “제 몸 따위가 숙부님의, 카일로스 님의 미래보다 더 중요하다는 건가요?”

    역행 전의 시간대에서는 나의 몸 따위 신경 쓰지 않았던 그였는데.

    “서운한 말을 하는구나. 내 미래 못지않게 소중한 게 바로 너야.”

    이건 조금, 말도 안 되는 전개가 아닌가.

    “클로이?”

    당혹감이 가득 찬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서늘한 손끝이 내 눈가를 매만졌다.

    “어째서 우는 거지.”

    탁. 나는 그의 손을 쳐내고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황제에게 가 볼게요.”

    당신은 그러면 안 된다. 이렇게 내 몸이 상할까 애지중지하며 자신의 미래마저 망각하고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지금 당신의 행동은 마치, 내가 거슬러 온 시간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만 같지 않은가.

    내가 겪었던 상실과 아픔, 그리고 에스델…….

    걸음 한번 떼지 못하고 바스러졌던 그 아이의 존재까지도 모두 다.

    “클로이, 너는 아직…….”

    “지금 가나 몸이 더 낫고 난 뒤에 가나 똑같아요. 그러니 지금 가겠어요.”

    “클로이!”

    나는 나를 붙잡는 그를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멈춰, 클로이! 똑같지 않아! 너는 지금 정말로……!”

    “어차피 황제를 유혹해야 하는 게 저의 일 아니었나요?”

    나를 막아서는 그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만둬도 된다고 했잖아! 내가, 모두!”

    세상에, 그가 화를 내고 있었다. 거슬러온 시간 속에서도 말을 듣지 않는 내게 끝끝내 화를 내지 않았던 그였다.

    짜증을 내고 귀찮아할지언정 황족의 위엄을 가장 중시하던 그는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

    “숙부님, 지금 굉장히 이상한 거 알고 있나요?”

    그는 거슬러 온 미래뿐만 아니라 지나 온 과거의 행보와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살을 더 찌워야겠어. 잘나신 아우님께서는 마른 여자를 좋아하지 않으니.’

    ‘황제의 생모는 에브란 국에서 온 왕녀였지. 에브란어를 익혀 둬. 쓸모가 있을 거야.’

    ‘향수를 뿌린 건가? 네게 어울리지만 그의 취향은 아니야. 좋은 것을 선물해 주마. 아우님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만큼.’

    ‘머릿결이 좋구나, 클로이. 내가 말한 적 있을까? 내가 널 이토록 아끼는 건 구 할은 네 머리카락 덕분이란다. 황제는 은발의 미녀를 좋아하거든.’

    ‘이렇게 몸에 상처를 내면 내가 속상하지 않겠어? 아우님께 드릴 귀한 보물인데.’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황제의 취향에 맞게 길러 온 카일로스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가 내게 보였던 지원들이 모두 대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나도 네가 좋아. 장차 내게 황제의 목을 가져다줄 너를, 내가 어떻게 어여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열일곱, 수줍은 나의 고백에 바드랍게 입을 맞춰 주며 비수를 꽂은 것도 카일로스였다. 그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나의 성역이었고, 나는 카일로스를 위한 하찮은 미끼였다.

    내가 그 주제를 잊지 않도록 매번 각인시켜 준 것 또한 카일로스였다.

    ‘황제의 아이를 낳아.’

    소름끼치도록 간교한 속삭임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거슬러 온 미래와 지나온 과거가 한데 섞이며 자그마한 불씨를 일으켰다.

    “네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클로이.”

    한 번도 나와 동등한 인격체였던 적이 없었던 그가 사람의 가면을 쓰고서 내게 말했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모두가 그대로인데, 오직 카일로스만이 달라졌다.

    “그저 내가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이지.”

    “깨달았다고요? 무엇을요?”

    “너를, 내가…….”

    나를 보는 그의 시선에서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마치 구애를 하는 것처럼, 그가 내 손끝에 입을 맞추며 속닥였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사아악. 머리가 차게 식었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나는 그대로 그를 밀치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클로이! 클로이!”

    뒤늦게 내 이름을 부르며 카일로스가 나를 뒤따라왔다. 다시금 그에게 손목이 붙잡혔을 때,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흘 전까지 후작 영애와 함께 밤을 보내셨잖아요. 나흘 전에는 저를 황제에게 보냈고요.”

    “그건…….”

    말문이 막힌 그가 고개를 수그렸다. 그답지 않은 모습에 나는 냉소를 날렸다.

    “숙부님은 나를 사랑하면 안 돼요.”

    이것은 기만이었다. 그를 사랑했지만 결국 죽어 버린 나의 마음과 그로 인해 스러졌던 가엾은 생명을 두 번 죽이는 행위였다.

    카일로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망연자실 서 있는 카일로스를 내버려두고 저 멀리 보이는 황제의 마차를 향해 있는 힘껏 내달렸다.

    탁, 탁, 탁, 탁.

    저것만 타면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저것만 타면 된다.

    탁, 탁, 탁, 타닥, 탁.

    “클로이를 막아!”

    카일로스의 외침에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기사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요!”

    나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나를 막아선 창검을 밀었다. 자칫 다칠 수도 있는 상황에 기사들이 기겁을 했다.

    “조심하십시오, 레이디 가넷슈. 그러다 잘못하면…….”

    “클로이!”

    홰액, 내 몸을 끌어안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동시에 진한 피 내음이 코끝에 화악 끼쳤다.

    나를 보호하려던 그가 뾰족한 창끝에 팔뚝을 긁히고 말았다. 그의 소매를 타고 흘러내린 핏물이 내 옷자락마저 적셨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전하!”

    기사들이 창검을 떨어뜨리고 그에게 다가왔다. 어수선한 속에서 저 멀리 황제의 마차가 떠나는 게 보였다.

    “괜찮니, 클로이?”

    그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의심은 점점 확신이 되었다. 카일로스가 달라졌다. 그리고 나도 달라졌다.

    “클로이, 너 혹시…….”

    카일로스는 내게 무언가를 물으려는 듯 말을 꺼내다 말았다.

    의심이 확신이 된 순간부터, 나는 카일로스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그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함없는 시간 속에 오직 변한 그와 나. 어쩌면 그 또한, 나와 같이 시간을 거슬러 온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고? 카일로스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망상은 없었다.

    물론 여기에도 의문은 남는다. 시간을 거슬렀다 해서 그가 날 갑자기 사랑하게 될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내게 보이는 애정은 모두 거짓이리라.

    어쩌면 ‘실패작’이었던 나를 다시 완성시키기 위해 보이는 거짓일 수도 있었고, 혹은 내가 그렇게 죽은 뒤 새로 내가 필요해진 일이 생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 뒤의 미래를 모르는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생각을 많이 했더니 머리가 아파졌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먼저 일어났다.

    “어째서 더 먹지 않고?”

    “입맛이 없어요.”

    “하지만…….”

    “먼저 가 볼게요.”

    카일로스는 예의 없는 나의 행동에도 꾸짖지 않았다. 사소한 행동과 말씨가 모여 확신을 이루었다. 그러나 내게는 확신이 아닌 확증이 필요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에게 시간을 거슬러 왔느냐고 묻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다지 좋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 또한 나의 비밀을 알리게 될 뿐더러, 만약 나의 가정이 틀렸다면 나는 그대로 정신 나간 여자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그가 내게 진실만을 대답할 리도 없고 말이다.

    아마 그가 내게 섣불리 물어보지 못하고 뜸만 들이는 것 또한 같은 이유겠지.

    그를 두고 올라온 나는 방문을 잠그고 창가로 걸어갔다. 창을 열자 차가운 밤공기가 물씬 안으로 밀려왔다. 어두운 밤하늘엔 달빛 한 점 없었다.

    나의 확신이 사실이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내 마음을 짓밟고 나를 기만한 것 따위는 어떻든 상관없었다.

    다만 한 가지, 에스델……. 내 아이를 앗아간 그를,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내려 아래를 보니, 사람의 인영이 비쳤다.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도 유독 낯이 익은 그것은 낮에 보았던 반짝이는 백금발이었다. 비록 지금은 빛이 없어 희끄무레했지만.

    에녹 브란스 경이 창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브란스 경?”

    한참 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내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더니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내게 인사했다.

    “좋은 밤입니다, 레이디 클로이 가넷슈.”

    “네, 좋은 밤이지요.”

    상투적인 인사를 주고받았으나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 밤을 ‘좋은 밤’이라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별달리 나눌 것이 없는 우리 사이에 어색한 고요가 흘렀다.

    에녹 브란스, 수도의 아가씨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루드비히 대공성의 기사. 새삼 나는 그의 얼굴이 굉장히 잘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슬러 온 시간에서는 제아무리 주위에서 브란스 경의 아름다운 외양을 칭송하여도 귀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내겐 오직 카일로스만 보였기 때문이다.

    에녹 브란스 경은 황제와 더불어서 내게 굉장히 이상한 마음을 들게 하는 남자였다.

    황제처럼 나와 몸을 섞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말조차 몇 번 섞어 보지 못한 남자인데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밀던, 그리고 나를 도운 죄로 병사들에게 붙들려 끌려가던 그의 마지막 모습은, 내게 굉장히 짙은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날, 에녹에게 무슨 말을 했지?’

    그 뒤로 다시는 브란스 경을 보지 못했지만, 딱 한번 카일로스가 브란스 경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네가 에녹을 유혹했니, 클로이? 아우님께 그랬던 것처럼?’

    차라리 카일로스가 그렇게 여겨 주는 게 브란스 경의 신상에는 더 이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더욱 화나게 할 줄은 몰랐다.

    ‘상당히 불쾌해. 네가 이렇게까지 반항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 몸을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그는 난폭했다. 거짓된 다정함마저 그 난폭함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는 그의 난폭함이 지나가기를 다만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브란스 경이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카일로스는 더 이상 내게 브란스 경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소동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소동? 아, 그렇지. 내가 황제의 마차를 타기 위해 뛰쳐나갔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 과정에서 카일로스가 다쳤다. 당연히 대공성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다치진 않았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낮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브란스 경은 왜 그곳에 안 계셨지요?”

    비록 평민 출신이나 출중한 실력의 브란스 경을 카일로스는 굉장히 신임하고 있었다. 가짜 성까지 만들어 주며 귀족 사회로 편입시키려 했을 정도로.

    그래서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브란스 경이 함께했고, 그의 은밀한 공작들은 모두 브란스 경의 칼끝으로 정리됐다.

    그런데 어쩐 일로 브란스 경이 그의 곁을 떠나 있었을까.

    브란스 경이 미래에 나를 도와주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것은 조금 먼 미래의 일이었고, 카일로스에겐 아직 브란스 경이 필요할 텐데.

    “…….”

    브란스 경은 대답 대신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미소 짓자, 놀랍게도 주위의 공기가 따스하게 데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 꺼질 듯 아스라한 미소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당신은 왜 나를 도왔나. 그의 신임을 저버리면서까지.

    묻고 싶었으나 물을 수 없었다.

    * * *

    이튿날, 아침부터 찾아온 카일로스로 인해 내 기분은 급격히 저조해졌다.

    그 여자와는 잠시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이 바쁘다고 했으면서 그는 나를 찾아와 아무 말도 않고 그저 빤히 내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평소보다 까칠한 눈가를 보니 간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모양이다. 그저 한번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상태를 곧바로 알아차리는 내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하실 말씀이 뭔가요?”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그러자 잔뜩 속상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클로이, 우리가 꼭 할 말이 있을 때만 보는 사이는 아니잖아.”

    “아니었나요?”

    “그냥 네가 보고 싶어 온 거야.”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러신 적 없잖아요.”

    나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뒤늦은 사춘기를 겪는 소녀처럼 삐딱한 말씨는 내가 듣기에도 별로였다. 그러나 카일로스는 나를 나무라는 대신 빙긋 웃으며 다가왔다.

    “앞으로는 더 자주 보러 와야겠어. 네가 익숙해질 수 있게.”

    사르륵 접히는 눈매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가 흔히 다른 귀족 아가씨들에게 ‘유혹이란 이름의 공작’을 걸 때 짓는 눈웃음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내 표정이 더욱 차게 식었다.

    “제게 명령하실 게 있다면 그렇게 하세요.”

    내가 그를 기다리며 가꾸었던 그 정원에서, 그는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저 눈웃음을 지었지.

    그때는 감히 그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저 속으로 쓰라린 감각을 삼켜야 했다.

    그때부터였나. 그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가슴 한편이 욱신욱신 아파 왔던 게.

    “명령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방금 저를 유혹하려 했잖아요. 제게 얻어 낼 게 있어서 그런 것 아닌가요?”

    “잠시만.”

    잔뜩 당황스러운 낯으로 그가 잠시 호흡을 골랐다. 카일로스는 두통이 이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유혹……. 그 말이 아주 틀렸다고 하지는 않으마. 나는 지금 널 사랑하고 있고, 어떻게든 네 마음을 얻고 싶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조금 억울해.”

    “하지만 숙부님이,”

    “카일로스, 내 이름을 불러 주기로 했잖아.”

    “……카일로스 님이 다른 영애들께 종종 짓던 그 눈웃음과 닮았는걸요.”

    “그건…….”

    카일로스는 무언가 말을 더 하려다 말았다.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아주 고소했다.

    이제는 인정한다. 시간을 거슬러 온 내가 카일로스의 불행을 바라고 있음을. 이런 게 증오라는 걸까. 문득 오래전, 그에게 사랑이란 것을 배웠을 때가 생각이 났다.

    ‘어떤 사람이 있어요. 자꾸 그 사람의 시선을 바라게 되고, 그 사람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런데 어쩔 땐 가슴이 답답할 때도 있고, 눈물이 날 때도 있어요.’

    ‘그건 사랑이야.’

    어렸던 나의 말에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서 여상한 말투로 답했다.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 보네.’

    ‘사랑……?’

    고개를 갸웃거리자 책장을 넘기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굳이 네게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한 번쯤은 겪어 보아도 나쁠 건 없지. 너무 심하게만 앓지 마.’

    ‘네, 노력해 볼게요.’

    나름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그가 그제야 빙긋 웃었다. 정수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가슴이 간지러워졌다.

    ‘사랑이란 상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지. 그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심지어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도와주는 게 바로 사랑이야.’

    ‘나를 희생해야 한다고요?’

    ‘그럼, 당연하지.’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희생, 희생……. 나는 그가 말한 것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되새기며 고개를 주억였다.

    ‘음…… 그럼 숙부님은 힐튼 백작 영애를 사랑하는 게 아닌 거네요?’

    불쑥 튀어나온 물음에 그의 얼굴이 옅은 당황으로 물들었었다.

    ‘백작 영애의 앞에서는 사랑한다 말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희생한 게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백작 영애보다는 숙부님이 행복해지길 바라지 않나요?’

    ‘맞아, 그렇지.’

    그는 순순히 인정하며 피시식 웃었다. 바보 같은 나는 그 말에 안도를 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 여자도 마찬가지인걸. 언젠가는 내게도 나의 행복만을 바라는 상대가 나타나지 않을까.’

    뭉근하게 한쪽 뺨을 쓸어내리는 손끝이 나를 설레게 했다. 그때부터였나. 막연하게 좋아하던 감정이 ‘사랑’이란 것으로 발아했던 것은.

    나는 어쩐지 쑥스러워 그의 눈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럼 사랑이란 거 말고 상대가 불행해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나요?’

    ‘물론, 있지.’

    그의 새카만 두 눈이 답지 않게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그건 증오라고 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무서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렇게 그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증오를 배웠다.

    “조금 달라, 클로이.”

    기억 속의 것과는 사뭇 다른 다정한 목소리가 나의 상념을 깼다.

    “나도 설명하기가 참 어렵지만…….”

    카일로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대체 어쩌다 증오밖에 남지 않게 된 걸까.

    “주인님.”

    에릭슨이 다급한 목소리로 문밖에서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황실의 마차가 다시 도착했습니다.”

    “이 시각에?”

    갑작스러운 소식을 접한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위로 치솟았다.

    “놀랍군. 어제 돌려보낸 마차를 이 아침에 다시 보낼 줄이야.”

    카일로스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돌려보내.”

    어제와 같이 가차 없는 대답이었다.

    “저…… 그게, 주인님…….”

    에릭슨이 그의 눈치를 힐끔 보며 말끝을 흐렸다.

    “왜 그러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뭐라고?”

    놀란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왔다고? 에릭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복도 바깥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클로이.”

    카일로스의 손이 나를 붙잡았다.

    “황제에게 널 보일 순…….”

    카일로스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어 댔다. 나는 그의 손을 쳐낼 생각도 못하고 멍청한 얼굴로 열린 문만 응시했다.

    곧이어 등장한 핏빛처럼 붉은 인영은 그 남자였다.

    황제,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카일로스가 그토록 증오하였던 그의 아우. 어리석게도 나를 사랑해 버리고 만 가엾은 남자.

    ‘다행이군. 형님이 너만은 죽이지 않을 테니까.’

    오래오래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던 그와의 마지막이 나를 흔들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뜨거운 눈동자가 나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다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카일로스의 손을 발견하고는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비릿하게 말려 올라가는 입술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클로이.”

    남자의 굵은 저음이 내게 인사했다.

    “어디가 아픈 거지?”

    비록 남자에게는 나흘 만에 다시 만나는 거겠지만, 내게는 수개월 만에 다시 듣는 목소리였다. 그 첫 마디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신년제 때도 아팠던 건가?”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남자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당장에라도 내 멱살을 움켜쥐고 왜 우냐고 소리칠 것만 같은 무서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는 남자를 막아 내는 목소리가 있었다.

    “폐하.”

    카일로스의 음성이었다.

    “클로이는 지금 몸이 좋지 않습니다.”

    “이런.”

    레이몬드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서 나와 카일로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도 압니다, 형님. 그래서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으르렁거리며 쏟아져 나온 목소리는 상대를 물어뜯을 듯 매서웠다. 카일로스 역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레이몬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조금 더 예의를 갖춰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 일단은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지요. 이곳은 폐하께서 머무시기에 적당하지 않은 것 같으니.”

    “어째서?”

    레이몬드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눈으로는 나를 쳐다보면서 입으로는 카일로스에게 되물었다.

    “나는 지금 형님이 아니라 클로이를 만나러 온 겁니다. 그러니 나를 이 방에서 쫓아내려 할 게 아니라 형님께서 자리를 비켜 주어야지요.”

    “클로이는 아직 안정이 필요…….”

    “그만.”

    짜증 섞인 목소리가 카일로스의 말을 잘라냈다.

    “클로이가 아직 우리의 관계를 형님께 알리지 않았나 보군요.”

    “…….”

    “형님도 짐작했을 텐데요? 내가 마차를 보낸 이유를. 설마 몰랐습니까?”

    “…….”

    카일로스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자신의 이복아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우를 향한 부드럽고 싸늘한 시선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내 어깨에 올라간 그의 손은 유난히 아프게 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방에서 나가야 하는 것은 그대다. 루드비히 대공가의 카일로스.”

    “…….”

    순간 방 안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한참 뒤에, 내 어깨에서 그의 손이 떨어졌다.

    “오래는 안 됩니다. 클로이는 정말로, 많이 아팠으니까요.”

    “걱정은 마세요, 형님. 우린 이미 많은 것을 공유한 사이니까.”

    한층 여유롭게 풀어진 말씨로 레이몬드가 느른하게 대꾸했다. 카일로스는 마지못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마침내 둘만이 남게 되었을 때, 내 앞으로 다가온 레이몬드가 굵은 손바닥으로 젖은 얼굴을 닦아 냈다.

    그러고는 카일로스를 대할 때와는 달리 조금 더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안녕, 클로이.”

    다시 한번 전해 오는 인사에 나는 또 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그는 참 이상한 남자였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그는 언제나 내게 이상한 남자였다.

    나보다도 내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남자였다. 어쩌면 카일로스가 말했던 ‘사랑’이란 것에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힘이 들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니까요.’

    ‘그럴 순 없어, 클로이. 절대 너를 그냥 정부로 두지는 않을 거야.’

    ‘정부의 삶도 괜찮아요.’

    아득한 시간 속, 굳이 그의 반려 자리에 관심이 없던 나는 에둘러 웃으며 그를 만류했다.

    ‘폐하께서는 저를 사랑해 주시잖아요. 언제든 원할 땐 함께할 수 있고. 그러니 지금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렇겠지. 하지만 너는 아니잖니. 평생 인정받지 못하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겠지.’

    ‘저는 딱히…….’

    어차피 오래 지속될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당신이 하는 그 걱정은 불필요하다고, 그리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강렬한 시선에 압도된 나는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나는 네가 불행해지는 게 싫어.’

    그는 나의 불행이 아닌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때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서글픈 목소리가 지금 내 머리 위에서 울리고 있었다.

    “네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끄읍, 끄읍 쏟아져 나오는 울음을 달래 주며 그가 이어서 말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 *

    한바탕 울음을 쏟아 낸 후에야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가 있는 곳은 루드비히 대공성의 나의 방이었고, 나는 지금 황제 레이몬드의 품에 안겨 히끅히끅 울음을 그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그와 내가 올라와 있는 곳이 나의 침대 위였다는 사실이다.

    “원래 이렇게 울었나?”

    그러나 레이몬드는 침대 위라는 점은 별반 상관이 없는 듯 내 눈가를 아프지 않게 문지르며 물었다. 아마 지금쯤 내 두 눈은 빨갛게 토끼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울다니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는데, 절로 울음이 묻어났다. 레이몬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 눈을 가느다랗게 좁혀 나를 응시했다.

    “원래 이렇게, 소리를 삼키듯이 울었냐고 묻는 거야.”

    “어…….”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젠장, 미쳐 버리겠군.”

    가벼운 욕설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공연히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왜 운 거지?”

    “아, 그…….”

    “정말 몸이 안 좋았던 건가?”

    “네, 몸이 좋지 않았어요.”

    사실 내 몸은 이제 상당히 쌩쌩해졌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내가 운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렇게 대답했다.

    “언제부터 아팠느냐.”

    “사흘 전부터요.”

    “……나와 밤을 보낸 직후였겠군.”

    맹렬하게 밀어붙이던 것과 대조적으로 씁쓸한 중얼거림이 귓가에 울렸다.

    “나 때문에 아팠던 건 아니겠지?”

    “절대 아니에요, 폐하.”

    “그렇군.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이는 거였어.”

    “폐하?”

    그가 내 눈가에서 손을 거두었다. 사라진 온기에 가슴이 허전해졌다.

    “그래서, 네 몸은 언제 다 낫는 것이냐?”

    “거의 다 나았어요.”

    “그래. 그건 참 다행이구나.”

    나를 두고 몸을 일으킨 레이몬드가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지, 완벽해.”

    “…….”

    “하나부터 열까지 내 취향이야.”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이미 한 번 그에게 들었던 말이다. 그는 제게 꼭 맞추어진 것처럼 완벽한 취향의 집합체였던 나를 두고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그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입꼬리에 냉소가 걸렸다.

    레이몬드는 만사에 권태로워하며 냉소적인 사람이었지만, 나를 사랑할 때만큼은 그토록 불타듯 뜨거웠다. 그래서였나 보다. ‘사랑’이란 이름의 그 화염에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모두 타 버린 것은.

    카일로스는 내게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카일로스를 사랑했던 나도, 나를 사랑했던 황제도. 모두 사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의문이 남는다.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그게, 정말 사랑인 걸까. 황제는, 레이몬드는, 정말로 나를 사랑했던 걸까.

    카일로스를 사랑했던 나와 나를 사랑했던 레이몬드의 끝은 모두 죽음이었다. 보답 받지 못한 사랑은 그토록 비극적인 결말만을 남겼다.

    그런 게 정말 사랑이라면 불필요한 감정이 아닐까, 사랑이라는 것은.

    “클로이.”

    레이몬드가 내게 물었다.

    “행복한가?”

    “……?”

    아주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레이몬드는 그런 나와 두 눈을 마주치며 씨익 웃었다.

    “큰 의미는 없어. 하룻밤을 보낸 여자가 울지 않고 행복하길 바라는 남자의 심리야.”

    “아…….”

    나는 나지막이 웅얼거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자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그래서, 클로이. 너는 지금 행복한 걸까?”

    “…….”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의 행복을 바랐던 그에게, 차마 나는 불행하노라 말할 수가 없었다.

    * * *

    달그락, 달그락.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오가는 대공성의 다이닝 룸은 카일로스와 레이몬드 사이에 느껴지는 기묘한 긴장감으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차를 미리 대기시켜 놓는 게 어떻습니까.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형님. 오늘밤은 대공성에 머무를 생각이거든요.”

    달각. 카일로스가 먹던 것을 멈추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짧은 한숨과 함께 레이몬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공사다망하신 분께서 황궁을 비우겠다고요?”

    “며칠쯤은 일을 손에 놓아도 괜찮겠지요. 이럴 때를 위해 아랫사람들에게 봉록을 주고 있는 것이니까.”

    레이몬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와인 잔을 들어올렸다. 본래 온순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카일로스를 볼 때면 그의 시선이 유독 흉흉하다고 느껴졌다.

    “폐하,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지금 대공성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아픈 아이도 있고…….”

    “그래, 맞아. 클로이.”

    순식간에 두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한 손엔 나이프, 한 손엔 포크를 든 채로 얼어붙었다.

    “클로이가 다 나을 때까지는 이곳에 머무를 생각입니다, 형님.”

    “그게 무슨…….”

    카일로스의 얼굴이 황당감으로 물들었다.

    “아까보단 안색이 더 나아 보이는데.”

    레이몬드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걱정 마라, 곧 황궁에서 의사가 올 테니.”

    “저는 괜찮아요, 폐하. 의사라면 대공성에도 있고, 그 정도로 아프지도 않아요.”

    나는 어색하게 레이몬드를 따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렇다면 의사는 부르지 않으마. 하지만 나는 아직 네 대답을 듣지 못했어.”

    “대답이라니요?”

    나의 물음에 레이몬드의 붉은 눈동자가 빤히 나를 응시했다.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그제야 나는 뒤늦게 그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깨달았다.

    ‘너는 지금 행복한 걸까.’

    나의 행복을 묻는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렇게 묻던 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진중하였던 게 생각이 나서 나는 그만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비록 그는 큰 의미 없이 건넨 물음이라 했지만, 거슬러 온 시간 속 나의 행복을 바랐던 그의 모습이 겹쳐진 탓에 나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대답도 그를 기만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가만히 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카일로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식사가 끝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뒤에 카일로스가 나를 따로 찾아왔다. 막무가내로 대공성에 남겠다고 억지를 부린 레이몬드 때문에 그는 굉장히 머리가 아파 보였다.

    “어여쁜 클로이, 황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어요.”

    그다지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나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아무튼 무슨 이야기를 나누긴 나눴다는 거로군. 어째서 내게 숨기는 거지?”

    “굳이 카일로스 님이 알 필요는 없는 이야기예요.”

    “네 신상과 관련해서 내가 몰라도 되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어.”

    “왜요? 나를 이용해서 황제를 유혹해야 하니까요?”

    “그런 게 아니야!”

    화가 난 그가 씩씩거리며 내 양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살이 닿는 것만으로도 신물이 올라와서 뿌리치려 하였으나, 연약한 내 손목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말했잖아, 클로이.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말씀 그만두셔요! 그럴 리가 없다는 거, 저도 카일로스 님도 알고 있잖아요!”

    “그게 왜 말이 안 되지?”

    “당신은……!”

    여전히 그에게 양 손목이 붙잡힌 채로, 나는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봤다.

    “한 번이라도 나의 행복을 바란 적이 있었나요?”

    “……바라고 있어. 지금, 미치도록.”

    “거짓말.”

    그가 나의 행복을 바란다는 말 만큼이나 우스운 농담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랬다. 정말로 그가 나의 행복을 바랐다면, 그랬다면…….

    “카일로스 님, 당신은 단 한 번도 내 행복을 바란 적 없어요.”

    “…….”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내게 원하는 다른 무언가가 생겼다고.”

    내 손목을 붙들던 그의 양손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카일로스는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너의 마음이야.”

    “그런 분께서 저더러 황제를 유혹하라 한 건가요?”

    “그건…… 명백히 내 실수야, 클로이. 네게 그런 일을 시킨 걸 굉장히 후회하고 있어.”

    가증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나는 조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요? 전 이미 황제와 밤을 보내고 말았는데.”

    “……그래서 지금이라도 모든 걸 되돌리려 하는 거잖아.”

    카일로스에게 붙잡힌 양 손목에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마 내일쯤이면 멍이 들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짜증이 났다.

    “되돌리겠다고요?”

    우스웠다. 되돌린다니……. 설사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실수였다 하더라도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에스델, 나의 작은 에스델은 이미…….

    “그러니 클로이, 제발 내게 기회를 줘.”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이번엔 정말로 너를 행복하게 해 줄게.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이번엔, 이라는 말이 내게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이번엔 나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요?”

    “그래.”

    “나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 건데요?”

    “그건…….”

    “항상 황제가 되고 싶어하셨잖아요.”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아니,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 않다고요?”

    “그래.”

    “예전엔 중요하게 생각했잖아요.”

    “이젠 아니야. 그 무엇도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클로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절박한 목소리였다. 카일로스는 미쳐 버린 게 분명했다.

    “그럼 어떤 게 저의 행복인데요?”

    뾰족하게 튀어나온 물음에 그가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어떤 게 행복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절 행복하게 해 주신다는 거지요?”

    “……가족.”

    카일로스는 내 옷자락을 움켜쥐며 가까스로 말했다.

    “언제나 가족을 원했잖니.”

    “…….”

    “네게 가족이 되어 줄게.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는, 그런 가족이 되어 줄게.”

    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족이라니, 가족이라니…….

    “제가 원하는 게 가족이라고요?”

    “그래.”

    “왜……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데요……?”

    울음 섞인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흘러나왔다. 내 발밑에 매달린 카일로스가 젖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푸스스 눈매를 흩트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온기를 원했잖아. 절대 놓지 않을 그런 존재를 바라 왔잖아.”

    아아, 당신은 알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를 기만한 당신을, 어떻게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럼 왜 그러셨나요.”

    “클로이…….”

    “왜, 왜 에스델을 내게서 빼앗아 갔어요?”

    “…….”

    카일로스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나를 보며 소리 없는 눈물만 뚝뚝 떨구었다. 가련한 척 울고 있는 저 얼굴을 짓밟고만 싶었다.

    “그 아이가 내게 유일한 존재라는 걸 알고 계셨잖아요.”

    “……너도 돌아왔구나, 클로이.”

    반 박자 늦게, 그가 상황을 인지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하고 덧붙이는 중얼거림을 듣자니 그 또한 나처럼 이미 서로의 회귀를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분이 이제와 제 행복을 바란다고 말하는 건 상당히 우스운 상황이 아닌가요?”

    “클로이, 나는…… 나는…….”

    “당신이 증오스러워요, 숙부님.”

    “…….”

    “당신이 평생 불행했으면 좋겠어요.”

    “…….”

    허망하게 나를 올려다보는 그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쐐기를 박았다.

    “당신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만 싶어요.”

    “…….”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그의 모습에도 안쓰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증스러웠다. 감히 당신 따위가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느냐고, 역정을 내고만 싶었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무엇이든.”

    “에스델은…… 에스델은 어떻게 됐나요?”

    무엇이든 물으라 했던 그는 막상 내가 묻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말로 당신이 에스델을 죽였나요?”

    “…….”

    대답 없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이상했다. 분명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부정적인 것인데, 왜 웃음이 나는 걸까.

    “당신은 정말, 개새끼야.”

    * * *

    전대 아스타 제국의 황후는 에브란 국의 공주 출신이었다. 타국의 공주와 결혼을 한 황제는 이전에도 몇몇 존재하였으나, 국민들은 당연하게도 타국 출신의 황후를 반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부부의 사이가 좋으면 황실의 인기가 떨어진다. 그래서 황제는 정치적인 이유로 정부를 들이는 일이 허다하였는데, 카일로스 루드비히의 어머니도 그와 비슷한 경우였다.

    황제의 정부를 어미로 둔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황제의 사생아였다. 그의 어머니는 루드비히 대공의 외동딸이었고, 슬하에 아들이 없던 루드비히 대공은 제 딸이 낳은 황제의 사생아를 자신의 후계로 지목했다.

    루드비히 대공이 병환으로 죽자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그의 뒤를 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한 남자가 카일로스를 찾아왔다.

    “어머니, 조금 전에 제가 아주 이상한 말을 들었어요.”

    “이상한 말이라니?”

    “웬 남자가 대공성에 찾아와 자신이 제 친부라고 주장했어요.”

    “그런 일이 있었니?”

    그의 어머니는 여상한 말씨로 물었다.

    “지금 그 남자는 어디 있니?”

    그러고는 자신이 카일로스의 친부라고 주장하던 그 남자를 붙잡아 와 그 자리에서 죽였다.

    “이제야 발을 뻗고 자겠구나. 이 남자를 찾기 위해 십오 년 동안이나 제도를 이 잡듯이 뒤졌는데 그런 시골 영지에 내려가 숨어 있었다니.”

    피비린내가 자욱한 공간에서 어머니는 죽은 남자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파스스 웃었다.

    “이 남자가 누군데요?”

    “누구긴. 네 친아버지지.”

    “제 친아버지는 황제 폐하가 아니신가요?”

    어린 카일로스는 자신의 가녀린 어머니가 생면부지의 남자를 망설임 없이 죽인 것보다도 자신이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더 놀라 물었다.

    “생각해 보렴. 폐하와 너 사이에 닮은 구석이 하나라도 있니?”

    카일로스는 이제껏 자신의 친부로 알아 왔던 황제의 모습을 곰곰이 떠올려 봤다. 어머니의 말마따나 발가락의 털 하나도 닮은 부분이 없는 부자관계였다.

    “오래전부터 말했잖니. 네가 황제가 될 일은 없을 거라고.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거든. 네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걸.”

    “그럼 왜 제 존재를 묵인해 주는 거지요?”

    “루드비히 대공가와의 거래 때문이지.”

    슬하에 아들이 없던 루드비히 대공에게는 자신의 피를 이은 후계가 필요했으나, 후계가 될 아이의 아버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너의 친부라 하여도 결혼을 한다면 말이 좋아 부부이고 반려이지, 결국엔 내 몫을 앗아 가는 도적놈이 아니고서 뭐니? 그래서 폐하와 거래를 했단다. 적어도 황실만큼은 루드비히 대공령을 탐내지 않을 테니까.”

    대공가와 황실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카일로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제 이복아우에게는 그토록 상냥하고 다정하던 황제가 제게는 타인을 보듯 냉담했는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죠?”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나, 황제와 황후, 그리고 저기 식어가는 네 친부가 있구나. 이제 그 사실을 아는 건 셋…… 아니, 너까지 넷이야.”

    “그렇군요.”

    어린 카일로스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뒤, 그의 어머니와 황제 부처는 황실에서 열린 티타임을 즐기던 도중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어린 카일로스를 동정했다. 그럴 때면 카일로스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묵묵히 자신의 할 일만 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제 이복아우의 몰락. 그리고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그 자리.

    모든 것을 다 가졌기에 저의 이복아우는 항상 행복해 보였다. 비록 그 스스로는 참 지루하고 재미없는 세상이라며 혀를 차곤 했지만, 적어도 저보다는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우의 자리를 빼앗으면, 그때는 저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우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세상 모든 미녀들을 곁에 둘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정작 그는 사랑에 목말라했다.

    “폐하께서 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사랑? 왜요, 그걸 알려 드리면 형님께서 찾아 주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아우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이번 생엔 사랑은 글렀어요. 그 여자가 내 옆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다른 여자를 만나겠어요?”

    열네 살에 부황을 여읜 어린 아우에게는 자신을 지켜 줄 힘이 필요했고, 선황의 유지에 따라 캐롤라인 공작가의 장녀와 결혼을 했다. 아우는 자신보다 세 살이나 연상인 그 여자를 가리켜 늘 ‘캐롤라인 가의 지독한 마녀’라고 폄하했다.

    “황후께서 계신다 하여도 따로 정부를 둘 순 있잖습니까?”

    “낭만이라곤 전혀 없는 남자군요, 형님은.”

    아우가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내가 사랑하게 될 여자를 정부로 두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정부를 둔다면 누구보다도 그 여자가 기뻐할 텐데, 내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정작 자기 자신은 다양한 감정을 즐기지 못했지만, 타인의 감정은 기가 막히게 잘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카일로스는 어떻게 하면 아우의 감정을 이용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 아이와 처음 만났던 그날은 유독 하늘이 컴컴하고 공기가 습했던 차가운 겨울날이었다.

    가넷슈 가는 루드비히 대공가의 방계 가문이었으나 이미 오래전에 혈연이 끊긴 관계라 보아도 무방했다. 그날 카일로스가 가넷슈 가에 방문한 것은 순전히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부모도 없이 홀로 남은 어린 대공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적당히 달래 가며 비위를 맞추면 부모 잃은 어린 대공을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가넷슈, 카포네, 하디…….

    방계의 것들은 어린 카일로스가 대공위에 오르자 염치없게도 오래전 끊긴 인연을 다시금 잇고자 했다. 스스로 어린 대공의 보호자를 자처하던 그들은 대공가의 이름을 팔아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대공가의 재산을 야금야금 탐내었다.

    “루드비히 대공가는 가넷슈 가의 방만함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아.”

    카일로스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마침내 제국법상 온전하게 성숙한 주체가 된 그는 방계의 것들을 쳐 내기 위해 칼을 뽑았다. 가넷슈 가는 그 본보기였다.

    그의 손짓 한 번에 가넷슈 가의 집사는 목이 떨어졌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핏물을 무감각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카일로스는 스산하게 웃었다.

    “오늘은 경고에 그치지만, 두 번 다시 같은 이야기가 내 귀에 들어온다면 가넷슈 가는 자작의 대에서 끊길 거야.”

    사늘한 일갈에 가넷슈 자작은 모욕을 삼키며 열일곱의 어린 대공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방계의 저택은 생각보다 더 음침하고 불쾌했다. 카일로스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숙부님!”

    두 눈을 반짝이며 동경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방계의 어린 소년이 막아서지만 않았더라면, 그날의 참혹함은 없었으리라.

    “어서 와요, 숙부님. 멀리서도 숙부님의 이름을 여러 번 들었어요. 항상 만나 뵙길 고대했어요.”

    족보를 따지자면 동년배의 소년에게 카일로스는 ‘숙부’였으나, 카일로스는 그 어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넷슈 가는 첫 방문이지요? 재미있는 걸 보여 드릴게요.”

    소년이 네 발로 기는 짐승을 내보이며 깔깔거렸다.

    “자, 클로이. 내 다리 사이로 지나가 봐. 손님이 오셨으니 재롱을 부려야지.”

    짐승의 모양새는 썩 위태로웠다. 앙상한 팔다리가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 떡진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소년을 노려보았다.

    소년은 신이 나서 채찍을 휘두르며 짐승을 조롱했다.

    “가넷슈 가의 사생아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린 대공에겐 사람을 짐승 취급하며 농락하는 저급한 취미는 없었다. 카일로스가 관심을 보이지 않자 가넷슈 가의 소년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카일로스는 대공성으로 돌아가기 직전 발길을 틀었다.

    “안녕.”

    차가운 골방에서 굼벵이처럼 몸을 만 채 바르르 떨고 있는 자태가 썩 안쓰러웠다.

    “구해 줄까?”

    연민이라도 느낀 걸까. 카일로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의 삶에 관여했다.

    “나와 함께 갈래?”

    “……왜 그런 걸 묻는 거예요?”

    가넷슈 가의 사생아는 경계심이 많았다. 흡사 짐승의 새끼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 모습이 그로 하여금 묘한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카일로스는 이 새끼 짐승을 길들이고 싶어졌다.

    “네가 마음에 들어서.”

    아이가 마음에 들었단 것만큼은 카일로스의 진심이었다. 더러운 거적을 걸치고 네 발로 걷는 짐승의 흉내를 내는 와중에도, 아이는 상당히 예뻤다.

    본디 예쁜 것을 좋아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탐미적인 성향의 아우와 달리, 카일로스는 예쁜 것보다 쓸모 있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저 아이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졌다. 쓸모란 언제든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내 손을 잡아.”

    카일로스는 손을 건넸고, 그것을 붙든 이는 어리석은 클로이였다.

    그날 밤, 가넷슈 저택에 큰 불이 났다. 화염은 저택에 남아 있던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그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클로이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엾은 클로이, 혼자가 되었네.”

    처참하게 타 버린 화마의 흔적 앞에 홀로 주저앉아 있는 더러운 소녀의 모습이 꼭 성서 속의 한 장면 같았다면, 그것은 지나친 감상에 젖은 착각일까.

    “……저는 처음부터 혼자였어요.”

    소녀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의 어린 구원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카일로스의 가슴 위로 무언가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

    “…….”

    이상했다. 이 작고 꾀죄죄한 아이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요정처럼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하이얀 눈꽃이 소녀의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았다.

    한쪽 무릎을 꺾어 소녀와 눈높이를 맞춘 카일로스는 장갑을 벗은 손으로 소녀의 머리 위에 앉은 눈송이를 털어 주었다.

    “그럼 이제 나와 함께 가자.”

    소녀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새하얀 눈송이가 마차 위로 소복소복 내려앉는 소리와 그들을 태운 마차 바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만이 들리던 어느 겨울 날.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클로이 가넷슈를 만났다.

    * * *

    가넷슈 가의 새끼 짐승은 루드비히 대공성에서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깨끗한 물로 몸을 씻고, 부족함 없이 먹으며 살을 찌웠다.

    며칠 사이 혈색이 오른 얼굴을 보며 카일로스는 빙긋이 웃었다.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그 무엇도 이 대공성에서는 쉽게 가질 수 있으니까.”

    “……제가 그래도 되나요?”

    “물론. 너는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지.”

    “제가요?”

    “그래.”

    경계심을 온전히 버리지 못한 클로이가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나를 구해 줬어요?”

    “네가 예뻐서.”

    느릿하게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던 그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예쁜 걸 좋아하세요?”

    딱히 탐미적인 성향은 아니었다. 정작 예쁜 것들을 좋아하는 이는 따로 있었다.

    “나는 아니야. 하지만 내 아우님은 예쁜 걸 좋아하지, 무척.”

    아이는 예뻤다. 가넷슈 저택에서 처음 아이를 보았을 때, 짐승 같은 몰골마저도 아이의 미색을 가리지 못했다.

    “예쁜 것은 독이라고 그랬어요.”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을까?”

    “어머니가요.”

    독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이의 어미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남편이 있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가넷슈 자작의 눈에 띄어 불행을 맞이했다. 이 아이 또한 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녀를 짐승 취급하던 이들에게 어떤 일을 당했을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렇지만 클로이, 이제는 네 옆에 내가 있잖니.”

    카일로스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사르르 흩어지는 은빛 머리칼이 기묘한 포만감을 안겨 주었다.

    “내가 네 옆에 있는 한, 너의 아름다움은 독이 아니라 축복이 될 거야.”

    옆에 있어 준다는 그 말에 클로이의 두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라게 도와줄게. 누구라도 널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그래, 누구라도. 설령 이 제국을 쥐고 있는 그의 아우라 하더라도…….

    “……!”

    순간, 카일로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이 하나 있었다.

    예쁜 것에 무감한 저조차도 이 아이를 보며 이토록 사랑스럽단 감정이 샘솟는다. 하물며 탐미적인 성향에 더불어 언제나 사랑에 목말라 있는 저의 아우가 이 아이와 마주치면 어떻게 될까?

    “저기……?”

    클로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불렀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가 조금씩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얼굴을 쓸어 올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괜찮으세요……?”

    “그래, 나는 괜찮아.”

    열일곱의 카일로스는 아름답게 웃으며 어린 클로이를 꼬옥 끌어안았다.

    “암, 괜찮고말고. 사랑스러운 나의 클로이.”

    * * *

    해를 거듭할수록 아름다워져 가는 클로이는 이토록 사랑스러웠다. 점차 물이 오르는 그녀의 미모를 보며 카일로스는 빙긋 웃었다.

    “아름다운 나의 클로이. 내가 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장차 내게 황제의 목을 가져다줄 너인데.”

    클로이는 이제껏 그가 곁에 둔 그 어느 사람보다도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아이였다.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데에는 누구보다도 능숙했던 카일로스다. 그런 그에게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여자아이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은 식은 수프를 먹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숙부님이 좋아요. 사랑하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그녀에게서 듣는 사랑 고백은 생각보다 달콤하였고, 자신을 볼 때마다 수줍게 내리까는 두 눈을 볼 때면 물밀듯한 즐거움이 그의 마음을 잠식했다.

    그렇게 그녀와 이따금씩 입을 맞출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자신이 원하면 언제고 안을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까지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우를 끌어내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하는 시기고, 제가 원하는 것은 그 이후에 하여도 늦지 않을 터이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 했었지.”

    “네, 숙부님.”

    “그럼 조금 더 노력해 주어야지 않겠니? 나를 위해 말이야.”

    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이 사랑스러웠다. 이따금씩 업무를 보다가 종종 생각이 날 정도로 말이다.

    카일로스는 자신이 그 아이를 꽤나 귀여워한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아이를 낳아.”

    아름답게 자라난 클로이는 자신이 종용한 대로 아우를 유혹하고 아우의 정부가 되어 끝내는 아우의 아이를 낳는 데까지 성공했다. 사랑에 미쳐 버린 아우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갔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클로이가 아이에게 집착하기 전까지는.

    “에스델이에요.”

    품에 안은 아기를 내려다보는 클로이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깃들었다. 자신을 바라볼 때처럼 순수한 그 웃음에 카일로스는 기분이 나빠졌다.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줬니?”

    “네, 언제까지 그냥 ‘아기’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흐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보낸 귀걸이를 하지 않은 그녀도, 황제의 아이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도, 죽어 가는 황제의 앞에서 연민을 내비친 그녀도.

    그녀를 데리고 황제가 갇혀 있던 곳으로 간 것은 아주 단순한 계산이었다. 비참한 몰골의 그 남자를 보고 그녀가 정을 떼길 바랐던 이유였다.

    “다행이군. 형님이 너만은 죽이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아우는 아주 기가 막힌 방법으로 저의 클로이를 뒤흔들어 놓았다.

    아우의 말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는 꼭 고장 난 인형 같았다. 제가 가르쳐 주지 않은 감정만을 안고서 울고 있는 조악한 실패작이었다.

    “에스델을 보고 싶어요. 에스델을 만나게 해 주세요.”

    카일로스는 그토록 바라던 황제가 되었고, 로잘라인 후작가의 영애를 황후로 맞이하여 권력을 탄탄하게 세웠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그녀만은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에스델만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제발…….”

    그 남자의 아이를 만나게 해 달라며 애원하는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불쾌했다. 오래전부터 저만 보고, 저만 알던 그녀였는데. 그 망할 남자와 아이가 그녀를 망가뜨렸다.

    그녀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진저리치게 싫었다. 그 남자를 위해 흘리는 것만 같아 더럽고 경멸스러웠다.

    그가 울음을 싫어하는 걸 알게 된 그녀는 꼭 지금처럼 소리 없이 흐느꼈다.

    “새로운 아이를 만들어 줄까? 그럼 우는 걸 멈출래?”

    그 남자의 아이는 그토록 애틋하게 찾고 있었으면서, 저 말에 사색이 되어 도망가는 그녀는 카일로스를 더욱 더 화나게 만들었다.

    “그래. 클로이, 네게는 아이가 필요한 거로구나.”

    도망치는 그녀를 붙잡아 입을 맞추었다. 사생아를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한 명쯤은 괜찮겠단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다시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저를 숙부님의 정부로 두실 생각인가요?”

    “왜, 싫어? 네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아우를 끌어내린 뒤에는 응당 그녀를 제 곁에 둘 생각이었다. 그녀는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여자였으니까.

    상상 속의 그녀는 자신의 제안에 행복하게 웃으며 안겨들었는데, 지금의 그녀는 전혀 기쁘지 않아 보였다.

    “너무 많이 변해 버렸어, 클로이. 욕심이 없는 착한 아이였잖아.”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아요. 그저 에스델과 만나게 해 주세요. 그게 제 유일한 욕심이에요.”

    에스델, 에스델, 에스델……. 아주 지긋지긋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듣는 것도 이제는 끝이다.

    오늘 밤, 저와 그녀를 닮은 아이를 만들어 안겨 줄 것이다. 저를 굉장히 좋아했던 그녀이니까, 그 남자의 아이보다는 저를 닮을 아이를 더욱 사랑하겠지.

    “오늘 밤에 부를 테니 준비하고 있으렴.”

    조금 들떴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랫동안 울기만 하는 그녀에게 지쳐 있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제 곧 그것이 끝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런 중에 에녹 브란스의 배신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 * *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

    살이 갈라지는 고통 앞에서도 에녹 브란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꿋꿋이 눈을 감고 입을 닫은 채 담담히 서 있는 그의 모습에 화가 났다.

    “클로이가 너를 유혹했나? 아이를 만나게 해 달라고 네게 매달렸나?”

    “…….”

    오랜 기간 대공성에서 저를 위해 일하던 남자는 평민으로선 드물게 황족의 신임을 얻으며 출세한 기사였다. 그런 그가 저를 배신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는군.”

    카일로스는 에녹 브란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신임을 배신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치지직, 불에 달군 인두가 으스스한 소리를 냈다.

    곁에 있던 기사 하나가 카일로스의 턱짓에 뜨거운 인두를 들고 에녹 브란스에게 다가갔다. 한쪽 눈을 지지는 형벌에도 에녹 브란스는 신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기사들은 정말 지독하다며 그를 욕했다.

    고작 그 남자의 아이 때문에 제게서 도망치려 했던 괘씸한 클로이는 며칠째 저의 침실에 감금된 채였다.

    지극정성으로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썼건만, 그녀는 끝끝내 아이 때문에 미쳐 버렸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카일로스는 그녀를 그렇게 가둬 두고 오랜 기간 찾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다시 제게 매달리지 않을까 싶었다.

    예전에도 제가 오랜 기간 대공성을 비울 때마다 더욱 안달을 내며 간절한 눈빛을 숨기던 그녀였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보름 만에 다시 찾은 침실에서 차가운 시체가 된 그녀를 발견했을 때, 카일로스는 그 자리에 무너지고 말았다.

    “클로이? 클로이, 왜…… 대체 왜…….”

    사늘하게 식은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새하얀 드레스의 앞섶을 검붉은 피가 적시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투명한 약병이 굴러다녔다.

    “대답을 해 봐, 클로이. 지금 내가 너를 찾고 있잖아. 내가 너를 부르고 있잖아. 클로이! 클로이……!”

    한참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처음으로 제 앞에 미숙하게나마 여자가 되어 나타났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숙부님이 좋아요.’

    저를 사랑하노라고 말하던 어설픈 클로이를 기억한다.

    ‘사랑하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수줍게 고백해 온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제 무릎에 앉혔다. 끝없는 동경과 사랑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보며 입을 맞췄다. 그녀와 입을 맞춘 것은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물론 클로이는 굉장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일찌감치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가넷슈 가를 버리고 그녀를 선택해 데려왔다.

    그렇지만 저의 계획 중 어디에서도 그녀를 취하는 선택은 없었다. 그녀는 아우를 위해 준비된 아름다운 제물이니까.

    ‘숙부님, 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글썽거리는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이던 붉게 물든 양 볼이, 저의 타액으로 촉촉해진 붉은 입술이…… 그 모든 것이 카일로스를 얼마나 미쳐 버리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날 밤, 카일로스는 몇 번이나 더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느낌을 감추고 짐짓 여유로운 척 가면을 썼다.

    카일로스는 그 지독한 갈망 속에서 희락을 느끼며 울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클로이에겐 눈물마저 사람을 돌게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카일로스는 가슴 가득 채운 포만감을 두고서 생각했다. 저조차도 이토록 충동적으로 만드는 그녀라면 틀림없이 아우의 목을 제게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이 흡족함과 포만감은 장차 제 손에 들어올 황위가 멀지 않았기에, 하여 이토록 저는 즐거운 것이라고.

    그날 제가 느낀 모든 것은 오롯이 그녀 때문이었다는 것을, 오랫동안 하나만 보고 달려 왔던 카일로스는 알지 못했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그래서 제게 울먹이며 사랑한다 말하던 그녀에게 같은 마음으로 답해 줄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 어쩌면 그때 이미…… 나는 너를…….”

    힘없는 손끝이 바르르 떨리며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사랑스럽던 입가가 검붉은 핏물로 얼룩져 있었다.

    툭, 투욱…….

    떨어진 눈물방울이 그녀의 입가로 내려앉아 굳어 버린 핏물에 섞이며 작은 동심원을 그려 나갔다. 카일로스는 소매를 끌어당겨 그녀의 입가를 문질렀다. 그러나 닦으면 닦을수록 그녀의 입가는 더욱 검붉게 물들어만 갔다.

    “어째서…… 어째서…….”

    카일로스는 그녀의 가슴팍 위로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모든 것을 이루었는데…… 어째서 너만은…….”

    한때, 그는 황제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그를 낳아 준 생모는 그에게 황제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카일로스는 단순히 그 이유가 자신이 사생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일로스는 황후를 쫓아내고 자신의 어머니를 황후로 만들고자 했다. 루드비히 대공가라면 타국의 왕족이었던 황후에게 부족하지 않았기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카일로스는 자신이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황후를 쫓아내도 자신은 황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비밀을 알던 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중에는 자신의 어머니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한 점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궁금했다. 황제란 자리.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그 자리가 자신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

    하여, 카일로스는 아우의 행복을 빼앗고자 했다. 그에게 아우는 두려운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칙칙한 잿빛의 자신과 달리 불타는 화염처럼 새빨갛게 빛이 나던 이복아우 레이몬드는 언제나 주위를 압도하였고 카일로스는 아우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그의 강렬한 존재감에 잡아먹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먼저 잡아먹어야 한단다. 제 손으로 죽인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카일로스는 아우를 제거했다. 존재만으로도 두려웠던 아우를 죽임으로써 카일로스는 누구보다 두려운 자가 될 수 있었다.

    모두가 그를 경외하였고, 아우가 가졌던 모든 것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클로이…… 유일하게 제 뜻대로 되지 않았던 그녀만 제외한다면.

    “클로이…….”

    돌연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죽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내게 토라진 거로구나. 그래서 눈을 뜨지 않는 거야. 그래서 대답하지 않는 거야. 어여쁜 나의 클로이…….”

    더 이상 피가 돌지 않아 파랗게 질린 입술을 어루만지며 카일로스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엇이 너를 토라지게 만든 거니? 엘리자베스 로잘라인, 그 여자 때문이니? 그 여자를 죽여 줄까? 그래, 그 여자를 죽여 줄게. 그리고 또 내게 무엇을 원하니? 너를 황후로 만들어 줄까? 그 남자가 끝내 네게 주지 못했던 그 자리를 네게 주면, 그땐 다시 나를 보며 웃어 줄 테니?”

    마치 살아 있는 클로이를 바라보듯 그의 두 눈에 애정이 담뿍 묻어났다.

    “아니지, 아니야……. 그래, 네가 진정 원하는 건…….”

    카일로스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녀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안았다.

    “나의 사랑을 원했었지. 언제나, 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그녀의 식은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사랑을 줄게, 클로이. 널 사랑해……. 내가 널 사랑해……. 나도 널…… 사랑해…….”

    그러나 이미 죽은 이의 입술은 더 이상 산 자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째서 아직도 눈을 뜨지 않는 거야! 어째서 아직도 내게 대답하지 않는 거야!”

    카일로스는 그녀의 죽은피를 입가에 묻힌 채 울부짖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하잖아! 너를 사랑한다고 하잖아! 내가, 너를……! 클로이, 너를……!”

    화가 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다가 다시 울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다시 깨어나 자신을 향해 웃어 줄 때까지, 하염없이…….

    밤을 비추던 달이 지고 다시 아침 해가 떴을 때, 그제야 카일로스는 인정했다. 클로이가…… 죽었음을.

    범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폐하! 폐하, 놓아주세요, 폐하! 저는 억울해요, 폐하!”

    시끄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여자는 옛날부터 그녀를 싫어하고 괴롭혀 왔다. 알면서도 내버려 둔 것이 실수였다. 저의…… 잘못이었다.

    “그 여자가 잘못한 거예요! 그 여자가 주제를 모르고 폐하의 침실에 앉아서 저를 농락……! 꺄악!”

    내리치는 칼날에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두 눈이 억울함을 가득 담고서 뻐끔거렸다.

    “하, 하하.”

    차가운 웃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하하하! 하하하하!”

    궁전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카일로스는 부패하기 시작한 클로이의 시신을 껴안고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처음 대공성에 왔을 때, 한동안 침대 위를 떠나지 못하고 열병에 시달렸던 어린 그녀를 위해 불러 주던 요람가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매일 밤, 황제가 죽은 여자를 끌어안고 궁전 안을 배회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클로이, 클로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부패한 눈가를 쓸어내리며 그가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눈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서 너는 나를 봐 주지 않는 걸까.”

    그의 삶은 완벽했다. 제국 유일의 대공가의 후계로 태어나 정적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세상 모든 것을 손끝으로 움직이며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 자리 말이다.

    “모든 것은 내 뜻대로 되었는데 너만은 아니구나. 클로이, 클로이…….”

    그 자리에 앉고 나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다. 불행했다. 클로이가 없는 그는 불행했다.

    이제 카일로스는 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졌지만 클로이를 갖지 못하는 자신은 이다지도 불행함을 안다.

    황제의 자리도, 넘볼 수 없는 권력도, 그 어느 것도 클로이를 대신하지 못했다. 단순히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었다.

    흐릿한 과거 속에서 카일로스는 자신의 손을 붙잡았던 자그마한 아이의 손바닥을 기억한다. 언제나 자신을 향한 동경과 애정, 경외로 차 있던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기억한다. 수줍은 목소리로 자신을 사랑하노라 말하던 그 붉은 입술을 기억한다.

    그를 낳아 준 어미조차도 그녀만큼의 사랑을 주지는 못했다. 마치 성역을 대하듯 조심스럽고 다감한 그녀의 태도는 카일로스가 생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그녀를 대공성에 데려와 ‘유일한 가족’이란 말로 기만하였다. 유일하다는 말은 묘한 힘이 있어서, 손쉽게 상대를 유혹했다.

    카일로스는 다섯 살 어린 여자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저만 보고 자라게끔 키워냈다. 그리고 그 업보는 다시 제게 돌아와 자신의 목을 졸랐다.

    클로이, 가족보다도 더 진한 유일무이한 존재…….

    그녀는 저를 가리켜 자신을 구원해 줬노라 말했지만, 정작 그녀에게 구원을 받은 것은 카일로스 자신이었다.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클로이, 나의 클로이…….

    그녀를 잃고 난 회한으로 미쳐 버린 카일로스는 어린 날 저를 향해 수줍게 웃던 그녀를 떠올리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언제부터 내 감정을 쥐고 있었을까. 어째서 그걸 내게 알려주지 않았니.”

    저를 보며 해사하게 웃는 클로이를 보고 싶었다. 행복하게 미소 짓는 클로이를 보고 싶었다. 다른 이의 감정을 다루는 데에는 그토록 능숙했던 그였는데, 정작 자신의 감정에는 무지했나 보다. 너무 늦게 깨달았다.

    저는 행복한 클로이를 원했다. 클로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해, 클로이. 너를 사랑해.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썩어 가는 시체에 입을 맞추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새 황제가 미쳐 버렸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카일로스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더 이상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새로운 아이를 만들어 줄까? 그럼 우는 걸 그만둘래?’

    그녀가 그 남자의 아이를 잃고 망가졌을 때…….

    ‘황제의 아이를 낳아.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거지?’

    그녀를 황제의 침실로 밀어 넣었던 때…….

    ‘숙부님이 좋아요. 사랑하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수줍은 고백을 하던 그날.

    ‘나도 네가 좋아, 클로이. 장차 내게 아우님의 목을 가져다줄 너를 내가 어떻게 어여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의 진심을 잔인하게 짓밟았던 그때…….

    그 모든 순간들을 모두 되돌리고 싶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다시 살아 있는 그녀를 만질 수 있다면…….

    이제는 본래의 형체마저 잃어버린 그녀를 끌어안고 과거를 쏟아내던 어느 밤이었다. 황궁을 배회하던 그의 걸음이 문득 외딴 방 앞에 멈추었다. 안에서 끙끙거리는 작은 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카일로스는 홀린 듯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우으으…….”

    에스델. 그녀가 그토록 서럽게 찾아 대던 그녀의 아이였다.

    아이를 보는 순간 화가 났다. 카일로스는 안고 있던 부패한 시신마저 내려놓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저 작은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릴 참이었다.

    “우으…… 우으으…….”

    그의 손끝이 아이의 목에 닿는 순간,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클로이를 닮은 은색 머리칼이 눈물에 젖어났다.

    “아…… 안 돼, 클로이…….”

    클로이와 닮은 아이의 얼굴이 우는 모습을 보자, 그는 그대로 두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의 울음소리 속에서 그는 후회했다.

    어째서 이토록 뒤늦게 깨달았을까. 어째서 그녀의 행복을 지켜주지 못했을까. 그 어여쁜 웃음을, 사랑스러운 미소를…… 왜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걸까.

    * * *

    카일로스는 한 번의 죽음을 겪었다. 그녀를 불행으로 몰고 갔던 저는 그녀보다 더 불행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느리게 찾아온 죽음이란 것이 그를 불행에서 건져냈다.

    “카일, 왜 그러세요?”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카일로스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눈을 뜬 장소는 오래전 머물렀던 대공성의 침실이었다. 그가 한 번 죽였던 여자가 그의 침대 위에 함께 누워 있었다.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 식은땀이 흐르고 있어요.”

    한동안 카일로스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주위만 홱홱 둘러봤다. 그러다가 곧바로 이어지는 두통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카일! 괜찮아요? 카일!”

    당황한 여자가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야 허겁지겁 뛰어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나요? 전하께서 이렇게 아파하는데!”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공성의 사용인들과 의사를 수족처럼 부리는 그녀는 이미 이 성의 안주인과 같은 태도였다.

    “죄, 죄송합니다. 레이디 가넷슈의 상태가 심각해서…….”

    “지금 그딴 여자애 때문에 전하가 아픈데도 늦장을……!”

    “클로이가 아프다고?”

    여자의 외침을 끊어 낸 것은 카일로스였다.

    카일로스는 사색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이 점점 많아졌다. 여자가 자신의 소매를 붙잡으며 무어라 외쳤지만, 카일로스는 여자를 뿌리치고 클로이의 방까지 뛰어갔다.

    “클로이……!”

    기억 속 그녀의 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침대 위에 끙끙 앓고 있는 이는 다시 보아도 클로이, 그녀였다.

    “클로이, 클로이가……!”

    클로이가 살아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카일로스는 그녀의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세상에, 클로이…….”

    이불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뜨거웠다. 사늘하게 식어 악취를 풍기던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클로이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신년제를 다녀오기 전부터 조금씩 미열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무리를 한 모양입니다.”

    그의 중얼거림을 다르게 파악한 의사가 그녀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년제……?”

    문득 겹쳐지는 기억이 있었다. 오래전, 그녀에게 황제를 유혹할 것을 명령했던 신년제. 황제와 밤을 보내고 온 그녀는 다음 날 저녁부터 심하게 앓았다.

    의사로부터 그녀가 아파 일어나지 못한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당시 카일로스는 로잘라인 후작 영애였던 여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아픈 그녀를 몇 번 찾지 못했다.

    “너는 이렇게나 많이…….”

    후두둑, 굵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나 많이 아팠었는데…….”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고 끙끙 앓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이렇게 아팠던 그녀를, 저는 방치했던 것이다.

    ‘후회를 한다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강하게 울렸다. 동시에 이는 두통에 카일로스는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며 바닥에 쓰러졌다.

    ‘어리석은 카일로스, 시간을 되돌린다고 뭐가 달라지겠니.’

    분명 익숙한 이의 것이었으나, 뜨문뜨문 끊긴 기억은 아득히 먼 곳에서 그를 괴롭혔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니 되돌아간 시간 속에서 어디 한번 후회해 보렴.’

    그것은 증오, 저의 불행을 바라는 이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불행했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불행해졌으면 좋겠구나. 이 손으로 목을 비틀지 못해 안타까운 카일로스야.’

    그 목소리를 끝으로 카일로스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정신을 차린 카일로스는 온갖 기억이 혼란스럽게 엉킨 가운데,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왔음을 알아냈다.

    거슬러 온 시간 속 자신의 마지막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떠올리려 할수록 짙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머리가 아파 왔다.

    카일로스는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해 내는 걸 포기하는 대신, 아픈 클로이를 병간호하기 시작했다.

    “클로이…….”

    기억 속의 그녀는 언제나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웠는데, 정작 지금 제 앞에 누워 있는 그녀는 상당히 야위어 있었다.

    “그래도, 살아 있어…….”

    꿈은 아니었다. 미래를 떠올리려 할 때마다 옭죄어 오는 두통이 알려 줬다. 제가 겪었던 모든 건 현실이라고.

    “살아 있어, 클로이…… 나의 클로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 미친 사람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일로스는 그 어느 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클로이가 살아 있다. 그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돌아온 생에는 절대 미련한 짓을 반복하지 않을 참이다. 열이 떨어지고 그녀가 눈을 뜨면, 그때는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대해 주어야지. 많이 사랑하고 아껴 주어야지.

    그녀가 눈을 뜨기만 하면 다시 저를 향해 화사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으으…… 으…….”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던 카일로스는 끙끙 앓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차가운 수건으로 뜨거운 이마를 닦아냈다.

    “이렇게 아팠는데, 예전에는 어떻게 참았던 걸까.”

    그녀의 아픔을 외면했던 과거의 자신이 미치도록 혐오스러웠다. 의사는 딱히 그녀가 아픈 원인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신년제 때 황제와 밤을 보낸 것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충격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젠장,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다.

    ……아니, 그 남자 때문이 아니다. 자신 때문이었다.

    의사는 그녀가 신년제 직전부터 미열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언제나 제게 잘 보이고 싶어 했으니까. 자신의 계획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아픈 사실을 숨겼겠지.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지는 않으마.”

    카일로스는 아프게 가라앉은 두 눈으로 클로이를 담으며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다짐은 클로이가 눈을 뜬 순간부터 삐걱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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