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나는 황제를 위한 아름다운 미끼였다 (1/21)

1장. 나는 황제를 위한 아름다운 미끼였다

남자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창가에 서서 성문을 통과하는 남자의 마차를 발견하고서는, 벌컥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다시피 걸어 나갔다.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 카일로스 루드비히 3세. 이 고성의 주인이자 나의 후견인, 그리고…….

‘그 이상은 내게 허락된 감정이 아니겠지.’

나는 쓰게 웃으며 경망스럽게 뛰쳐나가려던 두 다리를 멈추었다. 남자는 언제나 내게 숙녀의 몸가짐을 강조하곤 했다. 가슴 위로 손을 얹으며 느리게 심호흡을 한 다음, 남자의 기척을 찾아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이복형제인 남자는 이따금씩 영지를 벗어나 수도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오랫동안 황제가 후사를 보지 못한 상황에서 황제를 제외한 황실의 유일한 남자이기도 했던 그는 굉장히 공사다망한 이였다.

지금은 죽고 없는 그의 어머니는 선황제의 정부이면서 동시에 제국 유일의 대공녀였다.

제국민들은 외국에서 시집 온 정실 황후보다 제국 최고의 가문 출신인 아름다운 정부를 더욱 사랑했다.

황후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졌던 여자의 아들은 조금 더 자라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이 되었으나, 성년이 되지 않은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어야 했다.

그의 이복아우인 현 황제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혼자가 된 그를 가엾게 여겨 황족의 지위를 인정해 주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황실에 남자가 단 한 명도 없던 까닭이다.

비록 황족의 지위를 인정받는 대가로 귀족 의회에 참가할 자격을 박탈당하였지만, 준수한 외양과 유려한 언변을 가진 그는 사교계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남자였다.

무수히 많은 곳에서 그를 찾았고, 그는 언제나 바빴다.

이번에도 근 석 달 만에 돌아오는 그였다. 수도에서 영지까지는 말을 달리면 고작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기에, 내심 서운한 마음이 컸다.

그러나 그 서운함보다도 더 큰 기쁨이 앞선 탓에 나는 수줍게 웃으며 남자를 맞이할 수 있었다.

후원의 입구에서 몰려 있는 기사들을 보며 나는 귀환한 그가 곧장 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후원에 들렀음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없는 동안 남자를 생각하며 가꾸었던 장소였다. 전보다 더 아름다워진 후원을 보며 즐거워할 남자를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레이디 가넷슈.”

후원 안으로 들어서려는 나를, 남자의 기사가 가로막았다.

“브란스 경.”

에녹 브란스 경은 출중한 실력으로 남자의 기사들 중에서도 꽤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내 또래의 아가씨들은 그의 실력보다도 그림에서 걸어 나온 듯한 아름다운 외양에 술렁거리고는 했다. 나는 그를 향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루드비히 성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해요. 숙부님께서는 안에 계신가요?”

브란스 경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에 나는 재차 물었다.

“숙부님께서 안에 계신 게 아닌가요?”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말을 잇지 못했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하며 두 눈을 올려다보자 그가 얼굴을 슬쩍 붉히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내렸다. 확실히, 무언가를 회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제가 들어가면 불편할 이유라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묻던 나는 문득 그가 나를 막은 이유를 깨달았다. 동시에 저 안쪽에서 들려오는 도란도란한 말소리가 나의 두 뺨을 화끈 달아오르게 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예쁜 후원이에요. 오지 않았더라면 후회할 뻔했어요.”

“그렇습니까. 그렇지만 제 눈에는…….”

브란스 경의 어깨 너머로 낯선 이를 제 무릎에 앉히고 속닥거리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베티의 사랑스러움에 가려 후원의 아름다움은 보이질 않는군요.”

먼 발치였지만 마주 보는 여자의 얼굴을 다정하게 응시하며 쓸어내리는 남자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두 눈에 박혔다.

여자를 유혹하는 손짓과 음성은 내가 사랑하는 이의 것이었으나, 꺄르르 터지는 웃음소리는 내가 아닌 낯선 이의 것이었다.

“아이참, 칭찬이 지나치셔요.”

“저런, 어찌해야 제 말을 믿어 줄까요.”

웃음소리는 점차 가라앉았고, 두 사람의 얼굴이 서서히 서로에게 기울었다.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 로잘라인 후작 영애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의 입술이 여자에게 닿기 직전, 브란스 경이 다시 한 번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두 눈을 깜빡였다.

“……그렇군요.”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나는 애써 웃으며 몸을 돌렸다.

수도에 머무르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영지로 귀환하는 일은 종종 있던 일이기에 새삼스럽지 않았다. 이렇게 서러워할 이유 또한 없었다.

그러지만 굳이 내 눈으로 남자가 낯선 여자와 입 맞추는 것을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다.

방까지 에스코트해 주겠다는 브란스 경의 목소리가 얼핏 귓가를 스친 것도 같았지만, 대답할 여유조차 없던 나는 그대로 내 방까지 달리듯 걸었다.

그 와중에도 남자가 중요시하던 숙녀의 몸가짐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 내가 우스웠다.

* * *

귀환한 지 사흘이 지나서야, 남자는 나를 찾아왔다. 같은 날 새벽 마차를 타고 여자가 돌아갔다는 사실은 사용인들이 떠드는 말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안녕, 클로이.”

삐딱하니 문가에 서 있는 그는 조금 피곤한 기색이었다. 잠시 두 눈을 비비며 멍하니 그를 쳐다보던 나는 뒤늦게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실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숙부님?”

“서운하군. 이제 나를 반겨 주지도 않는 건가?”

“그럴 리가요!”

나는 화르륵 얼굴을 붉히며 남자의 손짓에 따라 다가갔다. 그러자 남자가 씨익 웃으며 나를 품에 안아 빙글 돌리더니, 곧바로 방문을 닫아 버렸다.

“여전히.”

덕분에 방문과 남자 사이에 갇힌 꼴이 된 나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감추기 위해 숨을 참아야 했다. 그런 나의 고역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의 굵은 손가락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름다워, 클로이.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요정의 여왕도 너를 보면 샘이 나서 숨어 버릴 거야.”

고혹적인 입술 사이로 나의 외모를 칭송하는 달콤한 말들이 쏟아졌다.

남자와 나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물러설 공간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남자는 내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했다. 고약한 남자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나를 피할 생각이니?”

“……사흘 전에 이미 보았는걸요.”

비록 남자는 나를 보지 못했겠지만, 나는 남자를 보았다. 약간의 투정 섞인 내 말에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후작 영애를 본 모양이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포스스 두 눈을 휘며 내게 몸을 밀착했다.

“여러모로 괜찮은 여자지. 옆에 두기에 가장 적합한 여자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 그녀의 미움을 받을 일은 만들지 말아. 그녀가 화가 나면 나는 너를 지켜 줄 수 없으니까.”

되도록 그 여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경고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남자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내 앞에서 다른 여자의 이야기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너는 현명한 아이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남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기실 남자에게 나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대답은 언제나 ‘네’ 아니면 ‘알겠어요’ 둘 중 하나였으니까.

서서히 다가온 남자의 입술이 내 위로 내려앉았다.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깊은 입맞춤을 남기는 남자의 몸짓에 나는 몸을 맞추며 매달렸다.

달뜬 뺨을 쓸어내리던 손끝이 턱선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쇄골이 드러나는 디자인의 얇은 네글리제는 남자의 손짓 한 번에 가볍게 흘러내렸다.

덕분에 드러난 둥근 어깨를 지나친 손이 보다 은밀한 곳을 지분거릴 적에, 나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 나의 반응이 재미있기라도 한 걸까. 남자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술을 뗐다. 입맞춤이 끝난 것에 아쉬워할 찰나, 허리를 구부린 그가 곧바로 내 가슴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수, 숙부님, 잠시만……!”

“쉬이, 착하지, 클로이.”

남자는 어린 아이를 어르듯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남자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더운 숨이 살결에 닿을 적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양 손을 꽈악 움켜쥐어야 했다.

“흐읏…….”

“여전히, 사랑스러운 몸인데…….”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나른한 시선으로 내 몸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보지 못한 사이 가슴살이 빠진 것 같아.”

나는 빨개진 얼굴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마른 여자는 좋아하지 않아.”

나는 그 말의 주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남자는 마른 여자를 좋아했으나, 남자의 취향에 맞게 몸을 가꾸는 일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 카일로스 루드비히 3세, 그리고 그의 이복형제인 황제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나는 그가 황제에게 던져 줄 아름다운 미끼였다.

* * *

어린 날, 나를 구해 준 것은 카일로스였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나와 다섯 살 터울의 먼 친척인 대공 카일로스 루드비히 말이다. 나는 본래 그의 방계 가문인 가넷슈 가의 사생아였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녀라 불리었던 어머니는 이미 남편이 있던 평민 여자였다.

어느 날 여자는 아이를 낳았고, 아이는 어미를 닮아 어린 나이에도 아름답게 자라났다. 여자의 남편 또한 아이를 어여뻐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무렵의 어느 날, 여자의 남편에게 생식 기능이 없음이 밝혀지며 불행이 들이닥쳤다.

어느 추운 겨울 날, 남편은 여자와 아이를 쫓아냈다. 겉옷조차 제대로 껴입지 못하고 거친 눈보라를 맞으며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 가넷슈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부디 아이만 받아주세요, 나리. 나리의 아이예요.’

여자는 눈물로 호소하였지만, 가넷슈 가의 주인은 냉담하게 모녀를 내쫓았다.

물론 그는 여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남편이 있는 여자란 걸 알면서도 억지로 탐하였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다만 자신의 가문에서 일어날 분란을 없애고 싶었을 뿐.

몇 날 며칠 저택의 앞에서 울부짖던 여자는 가넷슈 가의 하인들에게 붙들려 가 매질을 당했다. 여자의 몸이 무너지고, 여자의 뼈가 부러지고, 여자의 살점이 스러지고, 여자의 핏물이 흘러내리고…….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나는 한때 내 어머니였던,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 여자가 처참하게 죽어 가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아야 했다.

‘부디…… 아이만은…….’

여자가 남긴 마지막 말은 끝내 전해지지 못한 채 허공에서 바스라졌다. 나는 나를 담던 그 초점 없는 눈동자가 두려워서…… 그만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나를 향해 뻗어 있던 여자의 손이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지며 동시에 여자의 눈이 감겼다. 내 삶의 유일한 온기가 떠나간 순간이었다.

뒤늦게 달려갔지만 형체가 이지러진 사늘한 시신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외면하고 뒷걸음질 쳤던 스스로를 저주했다. 그러나 아무리 울어도 여자는,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가 된 뒤에야 나는 그녀의 존재를 더욱 절실히 그리게 되었다.

어머니, 아름다웠던 나의 어머니……. 내 삶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 죽음의 순간까지 오직 나만을 걱정해 주었던 사람…….

그런 그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슬픔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가넷슈 자작, 그러니까 내가 세상에 나게끔 씨를 뿌려 준 생물학적 아버지는 죽은 어머니의 시체를 들판에 버리라 명했다.

마지막까지 내게 ‘가넷슈’의 성을 주지 않았던 자작 대신 나를 거두어 준 이는 그의 아들이었다.

‘멍청한 계집애, 개처럼 기어서 내 발을 핥아 보렴.’

가넷슈 가의 작은 주인은 아랫사람을 ‘개’처럼 다루는 재능에 타고난 사람이었다.

‘바보 같은 것, 지금 누굴 노려보는 거야?’

소심하게 반항하려 해 보았으나 아픔에 길들여진 어린 육체는 자그마한 채찍질에도 쉬이 허물어지곤 했다.

‘옳지! 잘하는구나, 클로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고막을 찔러 댈 때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럴 때면 가넷슈 가의 작은 주인은 나의 고통을 더욱 즐거워했다. 나는 어째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걸까.

그 시절, 사고방식이 짐승에 가까웠던 그때의 나는 감히 가넷슈 가의 주인들을 원망할 생각조차 못하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가넷슈 가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짐승이 있었다.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주인의 발등을 핥고, 냄새나는 거적을 걸친 채 재롱을 부리는, 이따금 주인의 채찍질에 목숨을 구걸하는 짐승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소소한 유흥이었다.

‘어서 와요, 숙부님. 가넷슈 가는 첫 방문이지요? 재미있는 걸 보여 드릴게요.’

어느 날, 어린 주인이 그와 동년배의 소년 앞에 나를 내보였다. 소년의 매끄러운 잿빛 머리카락과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에 깃든 것은 어둠이었다.

소년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무심한 말씨로 툭 내뱉었다.

‘가넷슈 가의 사생아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소년이 내게 관심이 없자 가넷슈 가의 작은 주인은 크게 실망했다. 내가 소년의 관심을 끌지 못해서인지 그날의 매질은 유독 심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방에 돌아와 밤새 홀로 끙끙 앓을 적에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찾아왔다.

‘안녕.’

검은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바닥에 배를 붙인 채 등을 구부리고 덜덜 떨고 있는 버러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던 가엾은 나를 담았다.

‘아프지 않아?’

소년이 내 몸에 난 상처를 보며 물었다. 자비 없는 채찍질에 울긋불긋 돋아난 상처들은 제때 치료받지 못해 이리저리 짓물러 덧나 있었다.

느릿하게 다가온 손끝이 내 상처 위를 스쳤다. 그와 동시에 따끔한 통각이 몸을 관통했다.

‘쉬이, 괜찮아. 아프게 하려는 게 아니야.’

어금니를 바드득 갈며 노려보자, 소년이 푸스스 웃으며 내 더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육 년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사람의 온기였다.

‘약을 바르려는 거야. 그러니 힘을 풀어.’

‘…….’

나는 멍하니 내 상처 위로 약을 발라 주는 소년의 얼굴을 쳐다봤다. 소년은 가넷슈 가의 남자들과 함께 있을 때 보였던 냉엄한 표정이 아닌, 온화하게 풀어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얼굴은 어린 나로 하여금 기묘한 감각이 들게 했다.

‘클로이. 그게 네 이름이라고 들었는데.’

‘…….’

‘구해 줄까?’

소년은 하루 종일 굶은 내게 반쯤 식은 스프를 건네며 물었다. 허겁지겁 먹을 것을 위장 안으로 밀어 넣는 나를 보며 소년이 다시 물었다.

‘나와 함께 갈래?’

‘……왜 그런 걸 묻는 거예요?’

실로 오랜만에 목구멍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탁하게 쉬어 있었다.

‘네가 마음에 들어서.’

내게 내밀어진 손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챙그랑. 들고 있던 스프 그릇과 숟가락이 바닥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소년의 손끝을 붙잡았다.

‘착한 아이네, 클로이.’

소년은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며칠째 제대로 감지 못해 떡져 있는 그 더러운 머리카락을 말이다.

그날 밤, 가넷슈 저택에 큰 불이 났다. 어두운 밤하늘을 시뻘겋게 물들인 괴물과도 같은 화마는 내 생물학적 아버지였던 가넷슈 자작과 그 일가족을 모두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나 홀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가엾은 클로이, 혼자가 되었네.’

시커먼 잿가루를 묻힌 얼굴로 멍청하게 불탄 저택을 올려다보노라니, 귓가에 울리는 다정한 목소리 한 자락이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돌아갔다는 소년,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는 처음부터 혼자였어요.’

‘그럼 이제 나와 함께 가자.’

새까맣게 가라앉은 저택 위로 차가운 눈송이가 뿌려졌다.

그 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새하얀 눈송이가 마차 위로 소복소복 내려앉는 소리와 나를 태운 마차 바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만이 들리우던 어느 겨울 날.

나는 카일로스의 손을 잡고 루드비히 대공성에 발을 디뎠다.

* * *

가넷슈 가의 사생아였던 나는 카일로스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넷슈 자작의 사후에 이르러서야 나는 내 친부의 이름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저기…….’

‘나는 ‘저기’가 아니야. 굳이 족보를 따지자면 ‘숙부’라 부르는 게 옳지. 너의 친부였던 가넷슈 자작이 나의 아주 먼 친척 형제가 될 테니까.’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는 내게 그가 웃으며 말했다.

배운 게 없고 세상에 무지했던 나는 ‘숙부’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루드비히 대공성의 어느 누구도 그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기에, 나는 그 ‘숙부’라는 호칭이 굉장히 특별하다고 여겼다.

‘숙부…… 님?’

어색하게 그를 부르자, 카일로스는 굉장히 즐거워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클로이.’

귓가에 내려앉는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낮은 웃음소리가 내 고막을 울리고는 찬찬히 멀어져 갔다.

‘이리 씻겨 놓으니 훨씬 낫군.’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뜯어보듯 유심히 응시했다. 동시에 나는 그와의 첫 만남에서 보였을 나의 과거를 상기했다. 이복 오라비의 앞에서 짐승처럼 네 발로 기고 그의 발등을 핥으면서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수치감이 두 뺨 위로 떠올랐다.

그런 내 모습에 카일로스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쁘다는 뜻이야. 칭찬이지.’

‘…….’

루드비히 대공성의 카일로스는 가넷슈 가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웃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이제부터 이곳이 너의 집이야. 너의 뒤에는 언제나 루드비히 대공가가 있다는 걸 잊지 마. 사랑스러운 클로이.’

그렇게 카일로스는 하루아침에 가족을 모두 잃은 나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덕분에 나는 비록 ‘한미하지만 루드비히 대공가의 방계로 알려진 어느 귀족가의 아가씨’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즈넉한 대공성에서 기름진 음식과 고급스러운 의복을 입으며 그의 후원을 받았다.

카일로스가 나를 거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폐하께서는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시지. 시들면 그뿐일 겉모습에 집착하는 모양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아름답게 낳아 준 어머니에게 감사했다. 그녀를 닮은 얼굴은 매번 가넷슈 자작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독이었으나, 그것으로 인해 나는 카일로스를 만날 수 있었다.

‘기억해, 클로이. 황제의 주위에는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아. 그저 아름다움만으로는 황제를 붙들 수 없어.’

카일로스는 내게 여러 가지 공부를 할 것을 종용했고, 그에게 어여쁨 받고 싶었던 나는 그의 명에 따라 착실하게 공부를 했다. 공부를 잘 끝낼 때마다 잘했다고 쓰다듬어 주는 카일로스의 손길이 좋았다.

그렇게 조금씩 세상을 알아 가며 나는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카일로스가 황제에게 던져 줄 아름다운 미끼였다는 것을.

‘폐하께서 너를 본다면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고 버티실까. 이토록 사랑스러운데 말이야.’

카일로스는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여자들에게 그러했다. 그리고 때론 그 상냥함이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고는 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상냥함에 빠져든 나 역시 맹목적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또한 카일로스의 계획 중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카일로스가 황제의 옆에 심어 두기 위해 정성스레 키워 낸 화초였고, 그를 사랑하는 나라면 비록 황제의 곁을 차지할지언정 결코 그를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숙부님이 좋아요.’

카일로스를 따라 루드비히 대공성에 발을 디딘 지 근 다섯 해가 되었을 때. 열일곱의 나는 그만큼 어리고 미숙해서, 갈수록 커져 가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랑하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사랑이라.’

느른하게 턱을 괴고서 내 몸을 훑어보는 카일로스의 눈길에 몸이 쭈뼛거렸지만 나는 용기를 내며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일순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소리에 긴장은 배가 되었다.

‘너도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느릿하게 팔을 뻗은 그가 그대로 내 손목을 낚아챘다. 순식간에 그의 무릎 위로 올라탄 꼴이 된 나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막연한 기대감에 젖어들었다.

‘오랫동안 기다렸어, 클로이. 네가 여자가 되기를 말이야.’

그의 손끝이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턱선을 타고 느릿하게 내려간 손이 내 어깨를 아프게 움켜쥐었다. 카일로스는 그대로 열일곱의 내게 입을 맞췄다.

용기 내어 고백했던 것과 달리 나는 당황하여 얼어붙었고, 나의 예기치 못한 고백에도 그는 지나치게 여유롭고 능숙했다.

‘아직은 어설퍼.’

구석구석 내 입 안을 탐하던 혀가 떨어져 나가고, 나는 그와 키스를 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글썽였다.

그는 그런 날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내 입술과 얼굴 위로 자잘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숙부님, 저는…….’

‘나도 네가 좋아, 클로이. 사랑하고 있지.’

그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너는 이 루드비히 성에 남은 내 유일한 가족이잖니.’

‘유일하다’는 말은 어린 나의 가슴을 더욱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토록 설레고 달콤한 언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하다는 것은.

‘게다가 장차 내게 아우님의 목을 가져다줄 너를, 내가 어떻게 어여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은 나의 설렘을 와장창 무너뜨려 버렸다.

그의 아우,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나는 그의 아우를 유혹해 제거하기 위해 길러진 여자. 오로지 그뿐인 가치를 지닌 여자였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는 너무나 다정해서 더욱 잔인한 남자였다. 열일곱의 나는 그 한마디에 깨달았다.

그를 사랑하는 감정은, 결코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감추고자 하였다. 이미 새어나간 마음이 흥건하게 흘러넘쳐 나를 온통 적셔 버린 줄도 모른 채. 바보처럼.

‘도망치지 마, 클로이.’

카일로스는 제 무릎에서 벗어나려는 나를 다시 끌어 앉히며 부드럽게 내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래, 그 눈으로 나를 쳐다봐.’

‘…….’

‘옳지, 예쁘다.’

뭉근하게 눈가를 짓누르며 아래로 내려온 손끝이 도톰하게 솟은 아랫입술 위로 배회했다. 나른하게 두 눈을 내리깐 그가 다시 한 번 내게 입을 맞췄다. 마치 그의 말마따나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너의 이런 표정이 그를 미쳐 버리게 만들겠지.’

입맞춤이 끝났을 때의 나는 울고 있었고, 그는 흘러내린 내 눈물을 엄지로 훔쳐내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설퍼서는 안 돼. 아우님을 만족시키려면 조금 더 노력해야겠구나, 클로이.’

‘숙부님…….’

‘너무 걱정하지 마. 차근차근 배워 나가면 되니까.’

나의 눈물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세 번째로 입을 맞췄을 때, 나는 양팔을 뻗어 그의 목에 매달렸다.

세 차례의 입맞춤 이후, 나는 조금 기대했다. 혹시나 우리의 관계가 다른 방향으로 바뀌지 않을까.

카일로스는 그 이후로도 종종 나를 찾아와 입을 맞추었고,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했던 나도 곧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의 모습이 오래된 서책에서 읽었던 연인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다른 여자와 입맞춤보다 더한 것을 선보였을 때, 그 믿음은 깨지고 말았다.

어느 여름날, 열린 창문 아래에서 발견한 그와 그의 손님은 나를 비웃듯이 한데 엉켜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여자에게 입을 맞추던 그는 꼭 내게 나의 처지를 일깨워 주는 듯 그토록 잔인했다.

그에게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행위였구나. 나 혼자 들떠 있었구나. 망연자실 깨달으며 나는 창문을 닫았다.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카일로스는 나의 가족을 가장한 채 나를 이용하고자 하는 남자였고, 나는 여전히 그가 황제에게 던져주기 위한 아름다운 미끼였다.

그날 밤, 손님을 돌려보낸 그는 내 방에 찾아왔다. 그러곤 언제나 그렇듯 내게 입을 맞추며 달콤한 밀어를 속삭였다.

‘너는 아름다워, 클로이. 너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절대 세상에 없을 거야. 까다로운 아우님도 널 보면 분명 참지 못할 거야.’

나는 그가 쏟아내는 말 속에서 헤엄치며 애절하게 매달렸다. 비록 그의 입맞춤에 내가 원하는 애정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싫지 않았다. 나는 그만큼 그의 애정에 굶주린 어리석은 여자였다.

* * *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방문이 부쩍 잦아졌다. 그녀는 카일로스가 최근 공을 들이는 여자였다. 카일로스는 내게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 명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여자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그리고 오늘, 하필이면 카일로스가 없는 때에 그 여자가 찾아왔다.

그를 찾아온 손님을 혼자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카일로스를 대신해 손님을 맞이했다.

“따뜻한 애플 티예요. 이것을 마시며 잠시 기다리시면 숙부님께서 곧 돌아오실 거예요.”

“전하께서 말씀하신 미끼가 너로구나.”

여자는 대놓고 나를 훑어보며 무례하게 말했다.

“신경 쓸 가치가 없다기에 마음 놓고 있었는데, 전하를 대신해 손님을 맞이할 정도면 꽤나 그분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게 아니니?”

“그럴 리가요. 저는 숙부님께서 거두어 준 가엾은 방계의 사생아일 뿐인걸요.”

“방계의 사생아 따위가 전하를 숙부라 부르며 함께 살고 있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지. 루드비히 대공가와 가넷슈 가의 혈연은 이미 오래전에 희미해졌는데.”

나를 낮추는 말에도 여자의 매서운 눈빛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후작가의 아가씨께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비천한 몸이에요. 그러니 부디 경계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 비천한 신분답게 내 앞에 무릎을 꿇어 보렴.”

나는 주저 없이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나를 황제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지만, 그중에 자존심이란 것은 없었다.

촤르륵.

따뜻한 애플 티가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치욕감보다는 차가 조금 식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뜨거운 차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면 카일로스가 아끼는 이 얼굴에 흉이 졌겠지.

카일로스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가치가 이 얼굴이라고 말했다. 얼굴이 상한다면 카일로스는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 뿐 아니라 나는 당장 대공성 밖으로 내쫓길 것이다.

“정말이지, 지독하구나.”

여자는 반응 없는 나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여자의 손이 내 턱 끝을 들어올렸다. 내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는 그 눈동자에 내 못난 꼴이 비쳤다. 나는 차마 여자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눈동자를 데루룩 굴렸다.

그때였다.

“재미있는 광경이군요.”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목소리 한 자락이 응접실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돌아본 곳에는 아침 일찍 대공성 밖을 시찰하고 돌아온 카일로스가 두 눈을 둥글게 휘며 응접실 안의 광경을 관찰하고 있었다.

“전하……!”

순간 당황한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따끔한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자그마한 생채기 사이로 고롱고롱 핏방울이 맺혔다. 그 순간, 언제나 다정하던 카일로스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서둘러 상처를 가렸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좋아하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고개를 드니, 여자를 품에 안고 다독이는 그가 보였다. 내게 보이던 독기는 온데간데없이 지워 버린 여자가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으며 흐느꼈다.

“죄송해요, 전하. 제가…… 실수를…….”

“울지 말아요, 베티.”

그가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여자에게 속삭이며 여자를 달랬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는 그의 손끝에 시선이 머물렀다.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도 쉽게 해 주는 손짓이었구나.

깨닫는 순간 벌어진 상처가 따끔거리며 아파 왔다.

“클로이.”

사늘한 음색이 나를 질타했다.

“내 손님께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죄송합니다, 숙부님.”

그토록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대하는 카일로스는 처음이라서, 어쩐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먼저 부르기 전까지 한동안 방에서 근신하고 있어. 심약한 후작 영애께서 너와 또 마주칠까 몹시 걱정이 되는군.”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후작 영애를 데리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등을 돌려 나가는 순간까지 내게 닿지 않았던 그의 시선이 야속하기만 했다. 칼 같은 징벌이었다.

“방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내게 손을 건넨 것은 기사 에녹 브란스 경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지 않습니다.”

예기치 못한 그의 말에 나는 당혹스러워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가만히 내가 내게 내밀어진 그의 손을 잡아 주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얹었고, 브란스 경은 필요 없다는 나의 거절에도 굳이 방까지 에스코트를 해 주었다.

축축하게 젖어 버린 머리카락만큼이나 나의 기분도 축축하게 늘어졌다.

“이제 정말 괜찮아요.”

방문 앞에 다다르자마자 나는 브란스 경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브란스 경은 잠시 내 손끝을 응시하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상처에 바르는 연고였다.

“잠시 실례를.”

도타운 손바닥이 내 손을 잡아끌더니 상처 위로 하얀 연고를 발라 주었다. 매일 검을 잡는 투박한 손이 세심하게 상처를 치료했다.

나는 그가 푸른 빛깔의 손수건을 찢어 내 손가락 끝에 감아 줄 때까지 멍하니 서서 이를 응시했다. 치료를 마친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에게 고맙단 인사를 하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 * *

한동안 내 얼굴을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 달리, 카일로스는 저녁이 되자 곧바로 나를 찾아왔다. 내 손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브란스 경의 치료를 발견하곤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이미 경고하였잖아. 나는 그녀에게서 너를 지켜 줄 수 없다고.”

그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몸에 상처를 내면, 내가 속상하지 않겠어?”

아아, 이어지는 뒷말만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낭만적이었을 텐데.

“아우님께 드릴 귀한 보물인데.”

천천히 고개를 수그린 그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브란스 경이 감아 주었던 손수건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그는 볼품없는 천 조각을 가볍게 지르밟으며 파스스 웃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조심해, 클로이.”

아릿한 손끝에 닿는 말캉한 감촉에 나는 나지막이 신음했다. 그가 내 상처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느릿하게 입술을 벌렸다가 내 손가락을 감으며 핥아 올리는 농염한 움직임에 전율이 일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입맞춤이 점차 온몸으로 퍼져갔다.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위해 상처가 드러난 손끝이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나의 초라한 방어는 카일로스의 공격을 막아 내기에 역부족이었다.

“올해로 네 나이가 몇이더라.”

아찔한 흥분 속에서 그가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조차 잊고 그가 주는 쾌감에 매달렸다.

“열아홉입니다.”

대신 답한 것은 그의 뒤에 시립하던 브란스 경이었다. 그는 흡족한 얼굴로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이제 슬슬 때가 되었구나.”

그가 말하는 ‘때’가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서러웠다.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그와 달리, 나는 ‘때’가 오지 않기를 그다지도 바라고 또 바랐으니까.

* * *

해가 바뀌고 신년이 되었을 때, 카일로스는 나를 황제의 무도회에 데려갔다.

“안타깝지만, 클로이.”

카일로스가 나의 뺨을 쓰다듬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

“오늘 밤 나는 네 곁에 있지 못할 거야.”

어째서요? 내가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답했다.

“내가 옆에 있으면 우리 아우님께서 네게 다가가지 못할 테니 말이야.”

“저는 괜찮아요, 숙부님.”

애매하게 당겨진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막연하게 생각해 왔다. 언제가 되든 나의 데뷔탕트는 당연히 그와 함께일 것이라고.

“대신 에녹이 널 에스코트해 줄 거야. 많이 아쉬워?”

이미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으면서, 그는 짓궂게 물었다.

“……아주, 조금이요.”

나는 흐릿하게 웃으며 답했다.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려온 손끝이 내 턱을 쥐었다. 부드럽게 맞춰 오는 입맞춤은 언제나 그렇듯 감미로웠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눈동자야.”

입술을 뗀 그가 내 두 눈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그 어여쁜 눈빛은 아우님을 위해 남겨 두어야지.”

“…….”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구나.”

그의 손바닥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다가온 입술이 귓가에 멈추어 속삭였다.

“착한 아이에게는 상이 있을 거야. 그러니 기대해, 클로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잠시 숨을 멈추자 그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리며 멀어졌다.

망연자실 홀로 남겨진 나는 얼마 뒤 들어온 에녹 브란스 경으로 인해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레이디 가넷슈, 마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브란스 경이 내 앞에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가르침대로 우아하게 손을 뻗어 그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루드비히 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무도회장까지는 함께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차가 출발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겨우 용기를 내어 맞은편에 앉은 브란스 경에게 물을 수 있었다.

“숙부님은요?”

“전하께서는 로잘라인 후작가로 출발하셨습니다.”

오늘 밤 그의 파트너는 그 여자였나 보다.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팠다.

나는 속상한 감정을 감추기 위해 가만히 창가를 내다봤다. 잠시 나를 응시하는 것 같던 브란스 경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곧 사라졌다.

* * *

나의 등장에 무도회장 전체가 술렁였다. ‘루드비히 대공의 후견을 받는다는 가넷슈 가의 어여쁜 아가씨’에 관한 소문은 카일로스가 부러 부풀려 낸 것이었다.

그만큼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카일로스는 철저하게 나를 세상으로부터 차단했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나의 첫 등장인 셈이었다.

“이리 와, 클로이. 폐하께 인사를 드려야지.”

나보다 먼저 무도회장에 도착해있던 카일로스의 옆에는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새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팔 위로 자연스럽게 걸쳐진 여자의 손목에 절로 시선이 갔다.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잠시 여자에게 양해를 구한 그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황금 의자에 앉아 아래를 관망하듯 내려다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저 남자가 필히 황제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이복아우이자 대륙의 주인, 그리고 아스타의 전쟁광.

열네 살의 소년 황제 시절부터 직접 검을 들고 전장으로 향했다던 그는 수십 명의 병사들과 홀로 대치한 상황 속에서도 한번 져 본 적이 없는 아스타 제국 최고의 전사이기도 했다.

아스타의 제국민은 언제나 앞장서서 적들을 섬멸하는 저희의 황제를 사랑하였으나,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그를 가리켜 피에 굶주린 야수라 하였다.

“폐하, 일전에 말씀드린 아이입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가넷슈 가의 클로이입니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럼에도 나를 훑어보는 적나라한 눈빛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아, 형님께서 후원하고 있다는.”

권태롭던 음색이 반 박자 늦게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어 봐.”

다정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삐뚜름히 웃고 있는 저 얼굴이 바로 내가 유혹해야 하는 이의 것이었다. 섬뜩한 시선이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언제나 자애롭고 온화하던 나의 카일로스와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열넷이라는 이른 나이에 선황을 여의었으면서도 지난 십 년간 한 번도 흔들리지도 그 머리 위에 얹은 관의 무게를 두려워하지도 않는 남자였다.

가까이서 마주친 황제는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두려운 상대였다.

“과연, 소문대로.”

낮은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황제가 씨익 웃었다. 몸을 갈기갈기 찢을 듯 강한 위압감에 버티기가 힘들었다. 황제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는 카일로스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사실 황제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오래전, 카일로스를 따라 간 어느 행사에서 황제를 보았다.

‘저 사람이 황제야, 클로이. 네가 유혹해야 할 상대지.’

유난히 큰 체구와 먼발치에서도 확연하게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시선을 앗아갔다.

‘옆에 있는 여자는 황후 다리아야. 황제와는 정략혼으로 맺어진 형식적인 관계지만 욕심이 많지. 나중에 네가 모습을 드러내게 될 때, 너를 어떻게든 이용하려 들 여자니까 경계해야 해.’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가 우아한 자태로 황제의 옆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찬찬히 응시하노라니 어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사근사근 울러 퍼졌다.

‘기억해 둬, 클로이. 네가 전력을 다해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남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나는 그때 이미 황제를 보았다. 비록 황제는 나를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겠지만.

황제와 카일로스는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으나, 나는 단 한마디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정신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를 걱정하는 브란스 경이 있었다. 나는 괜찮다며 애써 싱긋 웃었다.

음악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춤 신청이 쏟아졌고, 나는 그때마다 거절하지 않았다.

난 춤을 추는 와중에 틈틈이 황제가 있는 곳을 흘깃거렸다. 정작 이 무도회를 개최한 황제는 따분한 표정으로 술잔만 들이켜고 있었다.

몇 번의 춤을 추니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조금 쉬는 게 어떻습니까?”

나는 다가오는 브란스 경을 뿌리치고 홀로 걸었다. 사실 어지러운 것은 춤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무도회장에서 사라진 그와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행방 때문에 정신이 사나웠을 뿐이다.

“역시 루드비히 대공님과 로잘라인 후작 영애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 같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두 분이 곧 약혼을 올릴 거라는데…….”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정말 부러워요. 후작 영애를 바라보던 대공님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걸요.”

“그렇게 멋있고 다정하신 대공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연회장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어지럽던 와중에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비어 있는 테라스로 나오니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때, 테라스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안에 사람이 있다고 표시했는데도 이곳에 들어올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카일로스의 계획대로였다.

“또 보는군.”

“제국의 태양을 뵙…….”

그 이상 내 인사는 이어질 수 없었다. 황제의 거친 손바닥이 우악스럽게 내 턱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나는 숨을 꿀꺽 삼키며 황제를 응시했다. 술에 젖은 몽롱한 눈동자가 나를 담고 있었다.

“싫다면, 거절해.”

황제는 카일로스에게 들은 것보다 훨씬 더 순진한 남자였다. 인사를 끊으며 거칠게 달려든 주제에 혹시나 내가 아프지 않을까 힘 조절을 하느라 바르르 떨리는 굵은 손이 순진했다.

이 자리에서 나를 범하여도 책망할 이는 없을 텐데, 거절당할까 걱정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도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거절할 리 없었다. 나는 술에 젖어 있는 황제를 향해 유혹하듯 눈꼬리를 접어 내렸다.

“싫지 않아요.”

그 말이 신호가 되어 황제는 그대로 내게 입을 맞췄다. 마치 집어삼킬 듯 강렬한 입맞춤에 숨이 부족했다.

알코올 향이 그득한 입맞춤을 남기고서, 황제는 내게 물었다.

“따라오겠나?”

“…….”

나는 불경스럽게도 황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연신 입에서 토해지는 가쁜 숨결 때문에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긍정으로 받아들인 황제는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으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나는 가만히 황제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나는 황제와 밤을 보냈다.

* * *

이튿날 아침, 황실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를 타고 대공성으로 돌아왔다. 입구에 있는 카일로스의 마차를 발견하고 그가 돌아왔음을 알게 됐다.

“숙부님은 어디에 계시죠?”

다소 지친 목소리로 하녀 하나를 붙잡고 묻자,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황제와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 위해 그의 침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가벼운 노크 끝에 문을 열고 나온 것은 그가 아닌 로잘라인 후작 영애였다. 흐트러진 가운의 앞섶으로 보이는 곳곳에 남은 성애의 흔적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내가 그의 명에 따라 황제와 밤을 보낸 동안, 그는 이 여자와 함께 있었구나.

“전하를 만나러 왔나 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주눅이 들었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복도로 나갔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옷차림은 예의에 맞지 않았지만, 이미 이 대공성의 안주인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 있는 그녀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카일로스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베티, 어딜 다녀오는…….”

“숙부님.”

사박거리는 내 발소리를 그 여자의 것과 착각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서러워서,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그를 불렀다.

“클로이……?”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카일로스가 뒤늦게 나를 알아보고서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일어났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반라의 몸으로 나를 반기는 그의 모습에 두 뺨 위로 열이 올랐다.

그나마 얇은 가운이라도 걸치고 있던 로잘라인 후작 영애와 달리, 그는 제대로 옷도 갖춰 입지 않고 있었다.

그의 탄탄한 가슴팍 위로 남은 불긋한 흔적 위로 시선을 두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가슴이 시큰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그가 선택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를 내가 질투한단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틀림없이 내게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주춤거리지 말고 이리 가까이 와.”

가시지 않은 정사의 내음에 머리가 아파 왔으나, 나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의 앞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아름다운 나의 클로이.”

카일로스는 나의 턱 끝을 잡아 내리며 물었다.

“어젯밤, 황제가 너를 안았니?”

“……네, 숙부님.”

“그래.”

카일로스가 기뻐하며 간밤의 일을 상세히 물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다른 남자와의 밤을 하나씩 떠올리며 설명하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웠으나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의 손길에 나는 성실하게 답했다.

“훌륭해.”

그의 엄지가 내 입가를 은근하게 쓸어내렸다. 입맞춤의 신호였다.

“이 입술 위로 입을 맞추었겠구나.”

그가 내 허리를 홱 잡아당김과 동시에 그의 무릎 위로 엎어진 나는 그대로 그와 입술을 맞대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다른 여자와 살을 맞대고 있었을 남자와 입을 맞추는 것은 생각보다 잔인한 일이었다. 뭉근하게 입 안을 헤집는 그의 입맞춤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사랑스러운 몸뚱이를 잔뜩 껴안았겠지. 우리의 바람대로 말이야. 황제는 곧 너를 다시 찾게 될 거야.”

카일로스가 날 무릎에 앉히고서 싱긋 웃었다. 장난스럽게 내 몸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이 유독 원망스러웠다. 처음으로 그의 손을 거절하고 싶다는 생각이 치솟았다.

“이미 한 번 맛보았으니 이토록 사랑스러운 몸을 어떻게 잊을까.”

그가 내 목덜미 위로 입술을 파묻으며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글쎄,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왜 당신은 그토록 쉽게 나를 다른 남자에게 보낼 수 있었던 걸까. 서늘한 살갗 위를 지분거리는 그를 느끼며 나는 속으로 반문했다.

“황후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어. 그러니까, 클로이.”

카일로스는 보다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나와 눈을 맞췄다.

“황제의 아이를 낳아.”

“……!”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거지?”

“…….”

뱀처럼 간교한 속삭임에 자그마한 소름이 돋아났다. 황제의 아이…….

그의 최종 목표는 황제를 제거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것이다. 내가 황제의 아이를 낳는다면, 그가 황제를 없앤 다음에는. 그때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나 나는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고민을 지워 냈다. 그의 명령을 두고 고민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날 오후부터 나는 심하게 앓았다. 한동안 침대에 누운 채 일어나지도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이따금씩 그가 나를 찾아왔으나, 점차 그 횟수가 줄어들 무렵이었다.

얼마 뒤, 카일로스의 말대로 황제는 내게 마차를 보내 왔다.

* * *

한동안 앓아 수척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나는 진한 화장을 하고 풍성한 드레스를 입었다. 그래도 꾸미고 나니 그럭저럭 볼만한 모양새가 나왔다.

“정말 아름다워!”

카일로스는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나는 거울로 비친 그의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즐거워하니 나 또한 기뻤다.

내 뒤로 다가온 카일로스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천천히 기울어지는 그의 몸에 또다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촤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덜미 위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행운의 목걸이야.”

붉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나는 수줍게 양 볼을 붉히며 목걸이에 박힌 붉은 보석을 매만져 보았다.

“나는 네가 꼭 성공할 거라고 믿어.”

은근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악마의 그것과도 같았다.

“반드시 성공할게요.”

오직 황제를 유혹하는 것만이 나의 존재 이유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나를 에스코트하는 이는 에녹 브란스 경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일에 매번 그를 딸려 주는 걸 보니, 브란스 경을 향한 카일로스의 신임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모양이다.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당도한 나는 곧바로 황제의 침실로 안내됐다.

밖은 아직 훤한 낮이었는데, 황제는 가벼운 가운 하나만 걸친 채 침대 위에 비뚜름히 앉아 있었다. 먼젓번과 달리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의 황제가 피식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클로이.”

언제나 유려하게 흘러나오던 카일로스의 것과는 달리, 다소 거칠게 갈라진 음성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나는 화답하듯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예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훑는 게 느껴졌다.

황제는 나를 여기까지 안내해 준 시종장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이윽고 침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밖으로 나갔다.

황제와 나, 둘만이 남은 공간에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

그 말에 나는 허리를 펴고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지난 무도회장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강렬한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꼿꼿하게 선 채로 그의 시선을 받아 냈다.

“신기하군.”

황제가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는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사뿐사뿐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어떻게 이리도…….”

침대 앞에 도달한 내 얼굴을, 황제의 손끝이 스치듯 쓸어내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취향일까.”

당연했다. 나는 카일로스가 오직 황제를 위해 오래도록 키워 낸 아름다운 미끼였으니까.

“넌 신기하지 않으냐?”

대답 대신 나는 빙그레 웃으며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똑바로 부딪쳐오는 내 눈동자를 마주 보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순식간에 내게 달려든 그가 허겁지겁 나를 탐했다. 언제나 부드럽게 입 맞추던 카일로스와 달리, 황제는 다소 성급하게 내 입 안을 헤집었다.

키스를 할 때는 눈을 감으라 배웠지만,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태양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기억하기 위해 말아 쥔 양 주먹에 힘을 주었다.

“괜찮다.”

순간, 둥글게 말아 쥔 내 양손을 쓰다듬는 도타운 손바닥이 있었다. 깜짝 놀라 숨을 삼키자, 빙긋 웃으며 나를 응시하는 황제가 보였다.

“격하게 하지 않을 테니, 긴장을 풀어.”

“아…….”

작은 탄성이 내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짧은 순간 발견하고 말았다. 카일로스와 황제는 이복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직 하나, 저 부드러이 휘는 눈웃음만큼은 서로를 꼭 닮아 있었다.

“응? 클로이.”

나직하게 웃은 황제가 나를 달래듯 속삭이며 보다 부드럽게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더 이상 황제를 마주볼 자신이 없어 그의 목에 매달리며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순간 황제가 흠칫, 하고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가 보지 못하는 내 얼굴 위로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내 앞에서 꼭 숫사내처럼 구는 황제가 우스웠다.

“안아 주세요, 폐하.”

내 마음은 황량하기만 한데,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더욱 비참했다.

이러다 황제의 앞에서 나의 속마음을 모조리 들켜 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차라리 쾌락에 몸을 맡기는 걸 선택했다.

그런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지기 직전에, 나는 그만 두 눈을 감아 내렸다.

* * *

“일어났나?”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다. 황제는 여전히 위압적인 자태였지만, 어쩐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나긋해진 느낌이 들었다.

“일주일에 두 번.”

잠이 덜 깬 나는 황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는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부스스하니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마차를 보낼 것이다.”

느리게 황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대로, 나는 그렇게 황제의 정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소문이 세간에 퍼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소문을 부풀린 이는 카일로스 루드비히,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잔인한 나의 남자였다.

* * *

하늘은 화창하고, 날씨는 맑았다. 딱, 약혼하기 좋은 날이었다. 푸르른 꽃 내음 속에서 오늘, 한 쌍의 커플이 미래를 언약할 것이다.

“약혼을 축하드려요, 숙부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으며 카일로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약혼식을 위해 단장을 한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황제와는 하나도 닮지 않은 잿빛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살풋 흐트러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움찔거렸으나, 그의 옆에 있던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한 발 빠르게 까치발을 들어 그의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자연스럽게 후작 영애의 도움을 받은 그가 싱긋 웃으며 그녀의 이마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에 후작 영애는 ‘아이참,’하고 중얼거리며 카일로스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언행과 달리 발그레 달아오른 두 뺨은 결코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고마워, 클로이.”

그들의 애정 행각에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전긍하던 찰나, 카일로스가 내게 고개를 돌리며 뒤늦게 답했다. 그의 두 눈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그의 손끝은 후작 영애의 허리를 느릿하게 지분거리고 있었다.

“루드비히 성에도 안주인님이 오시게 되어 정말 기뻐요. 축하드립니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

가슴이 아릿했다.

나는 카일로스의 옆에 선 후작 영애를 향해서도 방금 전과 같이 축하를 건넸다. 후작 영애는 그와 한 몸인 양 찰싹 붙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릴 필요조차 없었다.

“어머나, 고마워라.”

언제나 나를 경멸과 시기 섞인 눈으로 쳐다보던 여자는, 이날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네가 축하해 주니 더 기쁘구나. 최근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아니니?”

“……모두 두 분 덕이지요.”

후작 영애의 말과 같이 최근 수도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는 바로 나, 루드비히 대공성의 레이디 클로이 가넷슈였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대공성으로 찾아오던 황제의 마차는 점차 그 횟수를 늘려 가기 시작했다. 세 번, 네 번……. 급기야는 나를 황궁으로 불러 돌려보내지 않은 날도 있었다.

평시에는 그토록 입이 무겁던 대공성의 사용인들은 입에 불이 나도록 빠른 속도로 소문을 퍼뜨렸다.

그 효과인지. 루드비히 대공과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약혼식을 보러 온 하객들이 한 번쯤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두 가문의 결속이 견고함을 보여 주기 위한 자리인지라, 오늘 이곳엔 아스타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에 머리가 아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웅성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부터 요란한 등장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를 포함한 모두가 당황했다. 황제가 찾아온 것이다.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형님.”

“어찌 이런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셨습니까, 폐하.”

오직 카일로스만이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황제를 반겼다.

“하나뿐인 형님의 약혼식인데 빠질 순 없지요.”

그럴 리가. 카일로스와 황제 사이에 형제의 우애는 단언컨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는 이런 자리에 일일이 찾아다니는 성정이 아니었다.

황제가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봄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러나 곧 나와 황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우스웠다. 황제와 나의 관계를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아무런 관계도 아닌 척하고 있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갑작스레 등장한 황제로 인해 대공성의 사용인들은 부랴부랴 황제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냈다. 약혼을 축하하러 왔다는 황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막 약혼식이 시작되기 직전, 황제가 시종을 불러 귀엣말을 했다. 그 순간, 나와 황제의 눈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황제는 아까와 같이 씨익 웃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황제의 시종이 나를 찾아왔다. 시종의 말을 들은 나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로스는 이제 곧 시작될 예식에 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잠시 그를 한번 쳐다본 나는 곧바로 시종을 따라 식장을 빠져나갔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대공성의 가장 큰 손님방에서 마치 주인처럼 삐딱하니 앉아 있던 황제가 나를 발견하자 빙긋 웃으며 일어났다.

“그런 인사치레는 할 필요가 없다고 했을 텐데.”

“폐하, 지금은 아무래도 때와 장소가…….”

“쉬이.”

황제의 굵은 손가락이 내 입술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느리게 숨을 삼키고서 마주 보자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젠장, 저 웃는 표정은 빌어먹게도 그와 닮았다.

“참으로 큰일이지. 널 보지 않는 게 점점 참기 힘들어지니.”

“…….”

황제가 내게 빠져드는 것, 그것은 그토록 나의 남자가 바라던 일이었다.

“이리 와, 클로이.”

어느 틈에 내 손목을 낚아챈 황제가 나를 안고서 침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졸지에 황제의 무릎 위에 올라탄 모양이 되었다. 붉은 눈동자에 나의 얼굴이 비쳤다. 시큰한 속내와는 달리 나는 다행히 수줍게 웃고 있었다.

“정말, 참을 수가 없었어.”

“저도요, 폐하.”

나는 양손을 단단한 그 가슴팍 위에 얹고서 사근사근 속삭였다.

“그 짧은 사이에 얼마나 폐하를 그리워했는지 몰라요.”

“정말이냐?”

“그럼요.”

황제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로 나를 와락 껴안았다. 어깨 위로 사브락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나는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멍하니 바라본 창밖에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약혼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축포 소리가 들렸다.

“방법을 찾는 중이다. 어떻게든 너를 내 곁에 붙여 둘 생각이야.”

“하지만 폐하께는 이미…… 평생을 약속하신 반려님이 계시잖아요.”

“황후와의 결혼은 선황의 유언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내 뜻이 아니었어.”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 소리가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열려 있는 창을 닫고 싶었으나 황제에게 꼭 붙잡혀서 그럴 수 없었다. 대신 나는 황제를 올려다보며 처연하게 웃었다.

“저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요, 폐하.”

“……클로이.”

잠시간 나를 빤히 쳐다보던 황제가 굵은 엄지로 내 눈가를 문질렀다.

“울지 말아라.”

어쩐지 눈시울이 뜨겁더라니, 나는 울고 있었나 보다.

“반드시, 내가 반드시 방법을 마련할 것이다. 어떻게든 널 내 곁에 둘 수 있도록…….”

“…….”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클로이.”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덩치 큰 사내를 앞에 두고서, 나는 그만 두 눈을 내리감았다. 눈물이 번져 나가는 뜨거운 눈가 위로 거친 입술이 나를 위로하듯 내려앉았다.

그날 황제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하염없이 나를 끌어안은 채 소리 없이 위로해 주었다.

* * *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던 달거리가 끊겼다. 그 사실을 나보다 먼저 알아차린 것은 내가 사랑하는 남자였다.

“폐하께서 생각보다 더 우리 뜻대로 움직여 주고 계셔.”

오랜만에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너를 황비로 들이고 싶다는군.”

“오래전에 없어진 제도가 아닌가요?”

아주 오래전 제국의 황제는 본처인 황후뿐만 아니라 두세 명의 황비를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이백여 년 전 지금의 국교가 된 라미에 교의 교리에 따라 황제뿐만 아니라 제국의 모든 남자들이 일부일처제를 유지해 왔다.

“아주 명분이 없지는 않지. 황후가 벌써 십 년 가까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으니.”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카일로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마주치는 순간 사르륵 휘는 눈동자에 가슴이 요동쳤다. 우아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가 덧붙였다.

“앞으로도 아이는 생기지 않을 테고 말이야.”

황후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 그리고 황후를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카일로스였다.

“황후파의 귀족들과 라미에 교의 교단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지.”

식사를 마친 그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식당 밖으로 나가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따르던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클로이.”

황제가 마차를 보낸 이후로 내 나이는 기억하지 못해도 내 월경 주기만큼은 꿰뚫고 있던 그였다.

“이번 달 월경은 아직인가?”

“아…….”

뒤늦게 나는 벌써 일주일이나 예정일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의사를 보낼 테니 쉬고 있어.”

카일로스는 무심히 말하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황제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되었다.

* * *

카일로스의 바람대로 나는 황제의 아이를 갖게 되었고, 임신 소식을 접한 황제는 귀족들과 교단의 반대를 무릅쓴 채 나를 황궁으로 불러 들였다.

그 사실에 가장 기뻐한 이는 다름 아닌 카일로스였다. 나는 황제의 가슴팍에 기댄 채 나의 임신을 황제보다 더 기뻐하였던 카일로스를 떠올렸다.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내가 그에게 필요 있는 존재라서, 그 사실에 행복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황제의 갸르릉거리는 음성이 나의 사색을 깼다. 나는 내 아랫배를 어루만지는 황제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태어날 아이는 폐하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나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군. 나보다는 너를 닮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째서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사랑스럽지 않겠느냐.”

덜그럭거리는 마차 안은 고요했고, 그렇기에 황제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더욱 짙게 깔렸다.

나는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속으로는 실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남자. 그것이 화초인지 독초인지도 모르고 빠져 버리는 꼴이란.

황제의 결혼을 위해서는 두 집단의 승인이 필요했다. 하나는 아스타 제국의 국교인 라미에 교, 또 하나가 열 개의 귀족 가문으로 이루어진 귀족 의회의 승인이었다.

특히 귀족 의회는 열 가문 중 일곱 가문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는데, 그 콧대 높은 귀족들이 내가 그의 부인이 되는 것을 쉽게 허락할 리가 없었다.

황제는 보란 듯이 나를 황궁으로 불러내었으나, 그 일로 인해 귀족들과의 사이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끝끝내 귀족들과 교단은 황제가 황후 이외에 다른 부인을 두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황제는 원하던 바를 쉬이 이루지 못해 연신 내게 미안해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황제의 부인이 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죽을 남자의 부인이 되어 무엇한단 말인가.

그런 나에게 카일로스는 황제의 죄책감을 이용하라 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는 사람의 감정으로 장난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저보다는 폐하를 닮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황제의 눈동자에 담긴 나의 얼굴은 짐짓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알아주겠지요. 이 아이가 폐하의 아이라는 것을요.”

“그게 무슨 소리냐! 네 뱃속의 아이는 명실상부 나의 핏줄인 것을!”

“그래 봤자 사생아일 뿐이니까요.”

카일로스처럼, 그리고 나처럼 말이다. 거기다 고귀한 핏줄을 타고 났던 그의 어머니와 달리 나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여자였다.

“어째서 그런 소릴 하는 것이냐, 클로이. 나는 절대 이 아이를 사생아로 키울 생각이 없어.”

“그렇지만…… 귀족들과 교단에서 모두 반대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지금도 폐하께서 저를 위해 굉장히 무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요.”

“그건 네가 걱정할 바가 아니야.”

도타운 손바닥이 내 뺨을 감쌌다. 언제나 서늘하던 그의 것과 달리 황제의 손은 뜨거운 열기가 감돌았다.

“클로이, 나는 너를 반드시 나의 부인으로 만들 것이다. 뱃속의 아이 또한 공식적인 나의 아이로 자랄 거야.”

“제국법상 일부이처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일부이처가 불가능하다면.”

황제가 씨익 웃으며 내 뺨을 부드럽게 훑어내렸다.

“오직 너만이 나의 유일한 부인이 되겠지.”

“이혼이라도 강행하신다는 건가요?”

순간 놀란 나는 황제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언제나 황제의 앞에서 웃음을 지우지 말라던 카일로스의 말에 위반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이번만큼은 나의 잘못을 가벼이 넘어가 주리라 생각되었다. 그만큼 황제의 발언은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큰 대가가…….”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황제는 나의 말을 끊어내며 단호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속삭였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귓등으로 넘겨 주는 황제의 손길은 투박하면서도 섬세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 주는 황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멍하니 황제를 쳐다봤다. 푸스스 흐트러진 그 눈매를, 한참 동안 그저 바라만 보았다.

* * *

“내가 뭐라 했어, 클로이.”

카일로스는 삐딱하니 벽에 등을 기대고서 나를 향해 웃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눈꼬리가 바드랍게 접혔다.

“너를 위해서라면 나라라도 팔 거야, 지금의 황제는.”

결국 황제는 황후와의 이혼을 강행했다. 그 위자료로 내어준 제국 동쪽 땅은 일반적인 귀족가의 영지 세 곳을 웃도는 크기였다.

“이해가 안 가요.”

“사랑에 빠진 남자는 원래 그래. 저돌적이고 맹목적이지.”

“숙부님도 그런가요?”

“황제의 우를 범하고 싶지 않으니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면 자신의 감정마저도 그 이익을 위해 이용할 남자였다.

로잘라인 후작가의 힘이 필요해 후작 영애를 선택한 카일로스였지만 이따금씩 후작 영애와 함께 있는 그를 볼 때면 정말로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방금 그의 말을 들어 보니 그것은 아닌 모양이다. 후작 영애와 함께 있는 카일로스는 저돌적이지도, 맹목적이지도 않았으니까.

“처음 폐하를 봤을 때, 굉장히 두렵고 위압적인 분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철두철미하다고 느꼈죠. 꼭 숙부님처럼요. 그런 분이 어째서 저 같은 아이를 사랑해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그건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가진 남자였기 때문이야.”

그렇게 말하는 카일로스의 표정은 왠지 씁쓸해 보였다.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눈에는 황제나 그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긴 매한가지였으니까.

“산달이 얼마나 남았지?”

제법 부풀어 오른 아랫배를 흘깃 쳐다보며 카일로스가 물었다.

“세 달이 조금 안 남았어요.”

“적당한 시간이군.”

카일로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부턴 나도 더 바빠질 거야. 당분간은 너를 찾아오지 못해. 그래도 이해해 줘, 클로이.”

자박자박,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까지 걸어온 그가 느릿하게 허리를 숙였다. 시린 입술이 이마 위에 닿았다. 작은 접촉에도 화르륵 두 뺨이 달아올랐다.

나는 느릿하게 두 눈을 내리깔고는 테이블 위를 짚은 그의 손등만을 응시했다. 그는 손등 위로 불룩 솟아오른 핏줄마저도 지나치게 색정적인 남자였다.

“이해해 줄 거지?”

그가 재차 물었다.

“……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수줍게 답했다. 물론, 그가 바빠진 이유 중 하나가 로잘라인 후작 영애와의 결혼식 때문이라는 걸 전혀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 *

황제의 아이를 낳았을 때, 나를 찾아온 것은 카일로스가 아닌 에녹 브란스 경이었다.

“전하께서 보내 드리는 선물입니다.”

“고마워요.”

나는 못내 아쉬움을 감추며 브란스 경이 건네준 선물을 받아들였다.

검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귀걸이였다. 검은 다이아몬드는 황제마저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보석이었으나, 카일로스가 직접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아쉬움에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아이가 레이디 가넷슈를 닮았습니다.”

잔잔한 목소리가 나의 상념을 깨뜨렸다.

레이디 가넷슈, 황제의 아이를 낳았으나 황제의 부인은 되지 못한 나는 여전히 ‘레이디 클로이 가넷슈’였다.

황제가 전 황후와 이혼 절차를 밟는 데에만 족히 두 달은 걸렸다. 그마저도 최대한 신속히 처리한 결과라 했다.

그리고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까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빨갛고 쭈글쭈글한 이 아기가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야기 속에서 들은 것과 달리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는 전혀 예쁘지 않았다. 붉고, 작고, 쭈글쭈글했다. 한마디로 못생겼다.

“작고 사랑스럽지요. 그 부분이 레이디 가넷슈와 닮았습니다.”

브란스 경의 말을 곱씹어 보니 정말로 그런 듯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의 아기는 비록 예쁘지는 않았지만 브란스 경의 말마따나 사랑스러웠다.

그것을 인지하자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나는 홀린 듯이 작고 쭈글쭈글한 아기를 내려다봤다.

“조금 무례한 발언일 수도 있으나.”

잠자코 나를 응시하던 브란스 경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붉은 것도 레이디 가넷슈를 닮았네요.”

“아…….”

뒤늦게 발그레해진 두 뺨을 알아챘다. 손을 가져다대니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는 아기를 쳐다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 자꾸만 내 시선을 당겼다.

브란스 경의 말은 틀렸다. 나를 닮았다면 이토록 사랑스러울 리 없었다.

문득 내 아이가 나보다는 차라리 황제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비록 사랑에 빠진 어리석은 남자였지만, 나보다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더듬어 가다 보면 늘 그 끝에 있는 것은 카일로스였다. 카일로스를 보지 못한 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그가 보고 싶어졌다.

“숙부님은 많이 바쁘신가요?”

“음…….”

브란스 경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나는 그를 보채는 대신 가만히 기다렸다.

“지난달에 결혼식을 올리셨습니다.”

“네?”

잠시, 나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그가 결혼을 했다고? 누구와?

“엘리자베스 로잘라인 후작 영애께서 이제 루드비히 대공비가 되셨습니다.”

“……그렇군요.”

묵직해진 고개가 느릿하게 떨구어졌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카일로스는 오래전부터 황제를 제거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여러 물밑 작업을 해 왔다.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여자, 로잘라인 후작 영애 역시.

카일로스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이 적기였다. 황제의 기반은 약해져 있었고, 그에게는 로잘라인 후작가의 힘이 필요했다.

“이거 참, 죄송해서 어떡하지요. 저는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그의 옆자리에 내가 설 것이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결혼식에는 함께하고 싶었다.

그때가 오면 누구보다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축하해 줄 거라고, 그를 사랑한다고 깨달았던 열일곱의 어린 시절부터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아쉬운 것 같았다.

“혹 레이디 가넷슈가 그렇게 말하거든, 당신은 이미 그 존재만으로도 생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참 잔인한 남자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숙부님을 위해 산다는 건 언제나 제게 큰 기쁨이지요.”

나는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브란스 경의 표정이 미묘했다. 동정하는 걸까.

브란스 경이 돌아간 뒤에도 나는 한참이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브란스 경에게 말했던 것처럼 분명 카일로스를 위해 사는 것만이 내 생의 유일한 목적이었는데. 어째서일까, 자꾸만 눈가가 홧홧해졌다.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카일로스, 진창에 잡아먹힐 비참한 운명이었던 내게 다시 생명을 주었던 나의 구원자. 이 한 몸이 으스러지도록 평생을 보은해야 할 나의 은인.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오직 단 하나뿐인 나의 사람.

그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러니 이런 마음은 안 되는 건데.

“우으으…….”

“아기야……?”

울컥하던 마음이 낯선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소리의 근원은 내내 새근거리며 자던 나의 아이였다.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어찌할 줄 몰라 우왕좌왕했다. 카일로스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지만 그 대부분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었고, 그중에 아이를 다루는 법은 없었다.

다급히 은종을 흔들자 바깥에 있던 시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기가 울고 있어. 왜 우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애석하게도 아기에겐 유모가 없었다. 명망 높은 귀족가의 여인들은 모두들 나의 출신을 문제 삼아 내 아기를 맡기 꺼려했고, 황제의 핏줄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도 없던 탓이다.

“아기님의 안긴 자세가 불편한 게 아닐까요?”

사라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지만 일곱 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어릴 적부터 돌봐 왔다고 했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경직된 몸에 힘을 풀고자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자꾸만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결국 사라에게 아기를 넘기고 나서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이것 보세요. 아기님이 방긋방긋 웃으셔요.”

“……그러네.”

나는 다소 맥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사라의 품에 안긴 아기는 천사처럼 웃고 있었다. 다시 보니 쭈글쭈글하지만 못생기진 않았다.

아기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가슴 한구석에서 홧홧한 감각이 밀려올라왔다. 카일로스를 생각할 때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내게 카일로스 외에 진짜 ‘가족’이라 칭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 * *

“아이의 이름을 정했어요.”

이제는 익숙하게 내 손으로 아이를 안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아이의 이름을 정했다.

“에스델.”

“에스델?”

“네, 아스타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요정 여왕의 이름을 땄어요.”

“예쁜 이름이군.”

황제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나는 출산 직후에도 한동안 아이의 이름 짓기를 망설였는데, 황제는 나를 채근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내게 가족은 오직 카일로스뿐이라고 여겼기에, 아이의 이름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내 시선을 붙잡고 내 가슴을 채우는 이 작은 온기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안녕, 에스델.”

깜빡, 깜빡. 아이가 황제를 향해 두 눈을 깜빡였다. 황제는 상당히 재미있어하며 아이의 뺨을 검지로 쿡쿡 찔러 댔다. 내 아이의 아버지가 내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내게 굉장히 묘한 기분을 전해 주었다.

‘이것만은 절대 잊지 말아, 클로이.’

황제는 종종 내게 묘한 감정이 들게 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럴 때면 머릿속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있었다.

‘절대, 황제에게 연민을 가져서는 안 돼.’

황제가 처음 마차를 보내 온 날, 카일로스는 세뇌하듯 내게 말했다.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곳이 바로 황궁. 그러니 황제를 동정하지 말라고.

오랫동안 그에게 교육을 받아 온 내 인지 속의 황제는 추악하고 위험한 남자였다. 그런데 종종 내 앞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들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속으면 안 돼, 클로이.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의 여자 앞에서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순수한 가면을 쓰곤 하니까.’

어쩌면 그가 그토록 신신당부한 것은 저러한 황제의 모습을 예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황제를 향한 연민을 애써 지워 냈다.

“오늘 형님께서 방문할 예정이야.”

“정말이요?”

카일로스가 찾아온다는 소식에 내 눈이 커졌다. 근 넉 달 만에 만나는 그이다.

“비록 지금은 이름뿐이라지만 그는 너의 후견인이지. 본래라면 진작 찾아왔어야 했어.”

본래라면. 그러나 나는 그가 그러지 못한 이유를 안다. 한창 바빴을 테지. 그 여자와의 신혼 생활로.

황제가 자리를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일로스가 찾아왔다. 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고 새신랑이 된 그를 맞이해야 했다.

“어서 오세요, 숙부님.”

“오랜만이야, 클로이.”

“많이 보고 싶었어요.”

“저런, 폐하의 앞에서는 그런 감정을 내보이지 마렴. 언짢아하실 거다.”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등장한 그는 여전히 다정하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많이,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울컥이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나는 그를 따라 바드랍게 웃었다. 그러자 내 머리를 쓰다듬는 익숙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래?”

귓가에 닿는 음성이 사무치게 좋아서, 눈물이 나려 했다.

“나도 네가 많이 그리웠어, 클로이.”

뭉근하게 눈가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숨을 홉 들이마셨다.

“꽤 오랫동안 바빴었지. 너를 만나지 못할 만큼.”

느릿하게 얼굴선을 타고 내려온 손끝이 내 귓불을 스윽 훑었다.

“내가 보낸 귀걸이는 왜 하지 않았을까?”

비어 있는 내 귓불을 매만지며 그가 물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카일로스가 출산 선물로 보낸 검은 다이아몬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지만, 아이와 함께할 때는 굉장히 불편했기 때문에 착용하지 않고 빼 두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이유가 그에게는 핑계일 뿐이라는 걸 안다.

“못 본 사이에…….”

그가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내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반항하는 버릇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되네.”

“절대 아니에요!”

나는 두 손을 내저으며 강하게 아니라 주장했지만 카일로스는 한숨을 한번 내쉴 뿐이었다. 내심 억울해졌다. 불경한 마음이었다.

“날이 조금 더 풀리면 대공성에 놀러와. 네가 없으니 허전해.”

“노력해 볼게요.”

“아니, 노력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해야 해. 이왕이면 아우님과 함께 오면 좋겠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카일로스가 짧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 캐롤라인 공작가를 비롯한 황후파의 귀족들은 모두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지. 네 출산 이후 황제와 귀족들 사이의 대립이 더욱 심해졌거든.”

전혀 몰랐다. 나를 찾아오는 황제는 언제나 근심 따윈 없다는 듯 오만한 얼굴로 웃고 있었으니까.

그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내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고혹적인 눈웃음을 자아냈다.

“지금이야말로 황제의 목을 칠 적기야.”

* * *

대공성에 방문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황제는 상당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겐 친정과도 같은 곳이니까요. 폐하와 함께 가고 싶어요.’

황제는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그가 굉장히 곤란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 그 말을 꺼낸 지 열흘 만에, 우리는 대공성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근 일 년 만에 다시 찾는 대공성이었다. 점차 익숙해지는 창밖의 풍경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렇게 좋으냐, 클로이?”

대답 대신 조용히 웃자, 황제도 나를 따라 웃었다. 내 맞은편에 앉아 시종일관 나만 쳐다보고 있는 이 어리석은 남자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한 선물이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던 황제는 마침내 대공성에 도착하였을 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루드비히 대공성에 온 것을 환영해요, 아우님.”

카일로스는 사르르 웃으며 눈꼬리를 접었다. 그가 손가락을 한 번 튕김과 동시에 대공성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와 황제를 에워쌌다.

황제는 눈가를 찌푸리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치졸한 함정이군요, 형님.”

그를 노려보던 황제가 문득 스산하게 웃으며 칼을 뽑았다.

“수백 명의 병사를 데려온들, 이 내가 고작 형님의 병사들에게 당할 위인으로 보입니까?”

붉은 눈동자에 살의가 번뜩였다. 전쟁의 신을 연상케 하는 그 모습에서 언젠가 들었던 황제에 관한 풍문이 생각났다.

화염처럼 붉은 머리카락은 그가 죽인 자들의 피라고.

“그럼요, 이제 아우님께도 지켜야 할 것이 생겼으니까요.”

카일로스는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한 발짝 떨어져 있던 나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내 목에 칼을 드리웠다.

“클로이!”

황제가 당황하여 내 이름을 외쳤다. 나는 잠시 상황이 이해가지 않아 두 눈을 끔벅였다.

아, 그러니까 카일로스는 나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 황제를 제거하기 위해.

카일로스답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단순히 치졸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본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남자였다.

다만 나는 확실하지 않은 가능성에 승부를 건 그의 방법이 낯설다고 여겼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황제가 나를 살리기 위해 검을 내려놓을 리 없다.

나는 불안해졌다. 이대로 카일로스가 황제에게 당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젠장, 클로이는 관계없잖아!”

“검을 내리세요, 아우님. 그럼 이 아이는 살려 줄게요.”

황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신음했다. 반면 한결 여유로운 태도의 카일로스는 피시식 웃으며 들고 있던 검을 더욱 바짝 들이댔다.

날카로운 검날이 내 목덜미를 가볍게 스쳤다. 따끔한 감각 위로 뜨거운 핏물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저런, 망설이고 있네요. 그럴수록 위험해지는 것은 이 아이일 텐데.”

“그만 둬, 카일로스 루드비히!”

황제가 이를 바드득 갈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검날을 세웠다. 아팠다.

그의 검은 아주 느리게 내 살갗을 헤집었다. 피가 빠져나가며 어지러움이 밀려 왔다. 파르르, 눈꺼풀이 떨렸다.

“클로이!”

황제가 내 이름을 외치며 검을 집어던졌다.

카일로스의 방법이 옳았다. 사랑에 빠진 미련한 남자는 고작 나 때문에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했다.

‘황제에게 연민을 가져서는 안 돼.’

언제고 내 귓가에 속삭이던 카일로스의 목소리가 빙글빙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눈을 뜬 곳은 루드비히 대공성의 내 방이었다. 일 년간 떠나 있었음에도 달라진 곳 하나 없는 방을 둘러보며 몸을 일으켰다.

욱씬.

목덜미 위로 짙은 통각이 느껴졌다. 무거운 몸을 움직여 거울 앞에 서니, 목을 감고 있는 흰 붕대가 보였다. 듬성듬성 새어 나온 새빨간 핏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픈 느낌이 들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카일로스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일어났니?”

“폐하는 어떻게 됐나요?”

“황제는 지금 대공성의 지하에 갇혀 있지. 그렇지만 이제 곧 죽을 거야.”

그의 목소리 곳곳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방금 전까지 황제와 함께 있었던 모양이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내게 걸어온 그가 가만히 손을 뻗었다. 서늘한 손끝이 내 턱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속을 꿰뚫을 것 같은 시린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그냥, 아주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이상한 기분?”

그의 미간이 언짢은 듯 찌푸려졌다.

“황제가 가여워?”

“…….”

“어리석은 클로이. 황제에게 연민을 가지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는데도 결국은 그를 동정하고 있네.”

“그런 게 아니에요.”

동정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황제를 동정하기에는 그보다 더 가엾은 이들이 세상엔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카일로스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한숨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나왔다.

그는 드물게 웃지 않는 눈으로 내 얼굴을 훑었다. 그의 손끝이 붕대로 감긴 목덜미를 쓸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흉터가 남을 수도 있다는군.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지?”

“…….”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카일로스를 바라봤다. 두 번째 한숨이 이어졌다. 카일로스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어쩐지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들어서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클로이.”

카일로스가 내 이름을 부르며 수그러지던 고개를 감싸 올렸다.

“모두 네 덕이야.”

희미한 미소가 그의 얼굴 위로 머물렀다. 불안했던 기분은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언제나 그렇듯, 착한 아이에겐 상이 있지.”

툭. 그의 이마가 내 이마 위로 닿았다. 불쑥 가까워진 거리에 코끝이 스쳤다.

“이제 황제는 잊어버려. 이곳이 다시 너의 집이 될 거야.”

그가 말을 할 적마다 뜨거운 숨결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러니 이제 내게 입술을 벌려 주지 않을래?”

사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정말 모든 게 끝이 났다고.

* * *

카일로스는 마지막으로 나를 황제에게 데려갔다.

처음부터 내가 당신을 낚기 위한 미끼였노라 말하는 그는, 지독히도 잔인한 남자였다. 그의 옆에 꼿꼿이 서 있는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충격에 일그러진 얼굴로 나와 카일로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체념한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군.”

순간 카일로스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황제는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내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엇이요?”

나의 물음에 황제는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형님이 너만은 죽이지 않을 테니까.”

이상했다. 그 말에 공연히 울컥, 슬픔이 스쳤다.

“제게 화가 나진 않으세요?”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이지. 하지만 이제와 그걸 따져 무슨 소용일까.”

“…….”

“그래도 나를 위해 울어 주는 네가 있어.”

나를 보는 황제의 눈에는 여전히 애정이 담겨 있었다. 수백 명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다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만.”

딱딱한 목소리가 나와 황제의 대화를 끊었다. 카일로스가 걸음을 옮겨 나의 시야를 차단했다.

“조악한 자기 위로는 그만둬요, 아우님. 이 아이는 처음부터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인형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그저 값싼 동정일 뿐.”

“…….”

“돌아가자, 클로이.”

황제에게서 몸을 돌린 그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황제의 모습을 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단단하게 나를 감싼 카일로스의 양손으로 인해 그럴 수 없었다.

에스델이 보고 싶었다. 카일로스가 내게 에스델을 데려와 주겠다고 약속한 날이 벌써 며칠 지나 있었다.

“에스델은 언제 만날 수 있나요?”

“…….”

카일로스는 나를 흘깃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차갑게 입술을 다문 그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속이 탔다.

“약속한 날이 지났잖아요.”

“아직 마무리할 일이 많아 그쪽까지 신경 쓸 수 없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렴.”

냉정하게 대답한 그가 나를 두고 지나쳐 갔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

* * *

얼마 뒤, 카일로스는 그토록 바라던 대로 황제가 되었다. 그의 대관식 날, 나는 먼 곳에서 그를 지켜볼 수 있었다.

나란히 서 있는 그와 그 여자는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의 머릿속에 문득 좋지 않은 생각이 스쳤다.

오로지 그가 황제가 되기 위해 거두어졌던 나. 그의 아우를 유혹하기 위해 길러졌던 나.

그러나 이제 쓰임이 끝나 버린 나는, 앞으로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걸까.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 * *

황제가 죽었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져 어리석은 죽음을 택한 전 황제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에스델은 오지 않았다.

“숙부님.”

“아니지, 클로이. 이젠 폐하라고 불러야지.”

“폐하.”

“…….”

카일로스는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봤다.

“그냥 예전처럼 숙부님이라 부르렴. 그게 낫겠어.”

“……숙부님, 에스델이 보고 싶어요.”

“또 그 소린가?”

“에스델은 어디에 있나요? 제게 에스델을 돌려주세요.”

“정말 지겹군.”

그는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네가 밥도 제대로 먹지 않는다는 소식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 달려 왔는데, 너는 어떻게 내게 하는 말이 그 이야기뿐이지?”

“부탁이에요, 숙부님. 약속해 주셨잖아요. 조금만 기다리면 에스델을 볼 수 있을 거라고요.”

“이해할 수가 없어.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내게 허리를 수그린 그가 짧은 사이 수척해진 내 얼굴을 한손으로 감싸 쥐었다.

“나는 네게 어미의 정은 가르친 적이 없는데.”

샅샅이 훑어보는 눈동자는 마치 실패작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때도 그랬지. 그 남자를 향한 연민을 갖지 말라 했는데, 너는 결국 그 남자의 죽음 앞에서 울었어.”

“제가 잘못했어요, 숙부님. 정말 잘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에스델만은…….”

“그 남자의 아이가 그렇게 소중해?”

차가운 목소리가 나의 애원을 잘라 냈다. 후두둑, 눈가를 타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눈물이었다. 이 또한 그가 내게 가르치지 않은 것 중 하나였다.

카일로스는 쓰게 웃으며 내 얼굴을 놓았다. 손에 묻은 내 눈물을 더러운 것인 양 털어내는 카일로스의 모습에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숙부님, 에스델은…….”

내 말은 더 이상 그에게 닿지 못했다. 울며 매달리는 나를 버려두고, 카일로스는 그대로 차갑게 돌아섰다.

* * *

에스델을 보지 못한 지 딱 두 달이 되었을 때, 나는 미쳐 버리고 말았다.

매일 울다 지쳐 잠에 들면 다음 날 낯선 곳에서 깨어나는 내가 있었다. 내가 모르는 상처들이 점점 늘어났고, 몸은 점점 야위어 갔다. 의사는 마음에 문제가 생겨 병이 깃들었다고 진단했다.

나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지, 카일로스는 결국 나를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내가 그토록 원했을 때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던 그가, 이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왔다.

분명 기뻐야 하는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그는 날더러 고장 난 인형 같다고 했다.

“대체 언제쯤이면 네가 아이 타령을 멈출까.”

“…….”

나는 히끅히끅 울며 그를 쳐다봤다. 이제 내가 무슨 대답을 하든 그는 화를 낸다. 그래서 나는 말을 하는 게 두려웠다.

점점 말을 잃어 가는 나를 보며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다정하고 상냥했던 카일로스는 사라지고 차갑고 냉정한 카일로스만 남았다.

“새로운 아이를 만들어 줄까? 그럼 우는 걸 그만둘래?”

“으…… 흡…….”

그것은 결코 내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내 모습에 카일로스는 서늘하게 웃었다.

“그래, 클로이. 네게는 아이가 필요한 거야.”

거칠게 내 허리를 낚아챈 그가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그와의 입맞춤은 언제나 부드럽고 여유로웠는데, 지금 내게 입을 맞추는 그는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입맞춤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그를 밀어내자 키득키득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그가 보였다.

“사랑스러운 클로이, 내가 말한 적 있을까? 너를 아우님의 마차에 태워 보냈을 때 굉장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단다.”

그의 손이 흉터가 남은 내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그가 내게 남긴 흉터는 사라지지 않고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마터면 계획을 어그러뜨릴 뻔했어. 내가 얼마나 인고의 시간을 버텨 냈는지 너는 모를 거야.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지.”

그렇게 말하는 카일로스는 이제까지 내가 알던 그와 굉장히 다른 사람 같았다.

“……저를 숙부님의 정부로 두실 생각인가요?”

오랜만에 입 밖으로 흘러나온 힘없는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왜, 싫어?”

“…….”

“네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

“아니면 그 남자처럼 너를 황후로 삼겠다고 난동이라도 부려 주길 바라?”

카일로스가 조소를 가득 머금으며 빈정거렸다.

“너무 많이 변해 버렸어, 클로이. 욕심이 없는 착한 아이였잖아.”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아요. 그저 에스델과 만나게 해 주세요. 그게 제 유일한 욕심이에요.”

또 다시 그의 표정이 사늘하게 굳었다.

“오늘 밤에 부를 테니 준비하고 있으렴.”

그는 냉랭한 비소와 함께 돌아섰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만 흘렸다.

* * *

그날 밤, 에녹 브란스 경이 나를 데리러 왔다. 브란스 경은 아주 오랜 옛날, 카일로스의 손을 잡고 발을 디딘 대공성에서 나와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 안에는 나를 치장시키는 걸 실패한 시녀들이 한 시간 전부터 동동거리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넋을 놓은 나는 누가 보아도 황제를 모실 상태가 아니었다.

대답 없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브란스 경은 방 안의 시녀들에게 잠시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레이디 클로이 가넷슈.”

중저음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방 안을 맴돌았다. 나는 그를 흘깃 쳐다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가지 않을 거예요.”

나조차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아이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그냥, 에스델을 만나고 싶은 거예요.”

“…….”

브란스 경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긴 정적의 끝에 그가 고요를 깨뜨렸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

나는 그의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에녹 브란스 경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이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왜…….”

어째서 나를 도와 주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애써 삼켜 냈다. 이것 또한 카일로스의 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브란스 경의 표정은 진지했고, 나를 속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가만히 브란스 경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을 잡고 걷노라니, 오래전 카일로스를 대신해 나를 에스코트해 주던 단단한 손이 생각났다. 그때도 이 손을 잡고 걸었지.

이상하게도 그의 손은 늘 나의 불안을 종식시켜 주는 힘을 갖고 있었다. 곧 다시 나의 에스델을 만나게 될 거라는 묘한 믿음과 함께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이쪽으로.”

그는 조심스럽게 나를 황궁 뒤편의 버려진 성으로 안내했다. 곧 에스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박이 빨라졌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경비가 삼엄했다. 전 황제의 아이라고는 하나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어미를 둔.

브란스 경은 잠시 나를 숨겨 두고서는 보초를 서던 병사들을 잠재웠다. 그 다음 그는 다시 나를 이끌고 폐성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바깥의 삼엄한 경비와는 달리, 폐성 내부를 돌아다니는 이들은 적었다. 우리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살금살금 계단을 올랐다.

“저기입니다.”

브란스 경이 가리킨 복도 끝의 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에스델……!”

요람 위에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는 나의 아이가 보였다.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의 두 뺨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서둘러 나가야 합니다.”

아이와의 재회에 감동받을 틈도 없이, 나는 브란스 경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약해진 몸은 조금만 뛰어도 힘들어했기에 더디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잠에서 깬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느 틈에 1층으로 내려온 우리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였다.

“한참을 기다렸어.”

예상치 못한 카일로스의 등장에 내 얼굴이 사아악 굳어 버렸다.

“어딜 가는 거야, 클로이?”

스산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그의 병사들이 내게서 아이를 앗아 갔다.

안 돼요, 안 돼…….

그는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나를 억지로 안아 들었다.

에스델…… 안 돼, 나의 아기…….

저 멀리 병사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브란스 경의 모습이 보였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나의 작은 에스델도, 나를 도와주었던 브란스 경도 영영 볼 수 없었다.

* * *

내가 감금된 곳은 황제의 침실이었다. 언젠가 내가 그의 아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그 공간은 이제 그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그날은 더 이상 나를 달래는 데 지쳐 버린 카일로스가 보름째 침실을 찾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다.

“쯧쯧, 사람의 몰골이 아니구나.”

나를 찾아온 것은 황후, 과거의 엘리자베스 로잘라인 후작 영애였다. 그 여자가 예전부터 나를 거슬려 했음을 안다.

“아이를…… 에스델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여자는 차갑게 나를 내려다보며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아이의 곁으로 가렴.”

유리병 안에 든 투명한 액체가 넘실거리며 나를 유혹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묻지 않아도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아이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까. 이제는 눈물마저 흐르지 않았다.

“폐하께서도 참 무르시지. 쓰임이 끝난 사냥개는 진즉에 치워 버려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쓰임이 끝난 사냥개. 나는 그에게 그런 존재였나 보다.

“그래도 참 다행이지 않니? 내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너를 치우게 되었으니 말이야.”

흘깃. 시선을 들어 풍성한 드레스 자락에 감춰진 여자의 아랫배를 쳐다봤다.

“그러니 이제 어서 가렴. 네 아이가 기다리잖니.”

“…….”

나는 가만히 유리병의 뚜껑을 땄다. 톡, 도르르르. 바닥에 떨어진 뚜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유리병 안의 액체를 삼켰다. 차가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죽음의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선연하다. 새빨간 핏물이 드레스 앞섶을 적신다. 시종일관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여자의 뒤로 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환영이 보인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여자를 껴안으며 나를 조롱한다.

두 눈이 묵직해졌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온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느리게 두 눈을 내리감았다. 아픔이 내 육신을 난도질했다. 고통이 내 정신을 헤집었다.

카일로스의 말이 옳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미 어딘가 고장이 나 있었다.

‘가엾은 클로이, 혼자가 되었네.’

희미한 과거 속에서 어린 날의 카일로스가 나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나와 함께 가자.’

그의 뒤로 꺼져 가는 화염이 일렁였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어둠 위로 새하얀 눈송이가 흩날렸다. 나를 향해 내밀어진 손바닥은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왜 나를 구해 줬어요?’

잊히지 않는 그날의 잔상을 떠올리며 물었을 때, 그는 바드랍게 웃으며 답했다.

‘네가 예뻐서.’

‘예쁜 걸 좋아하세요?’

‘나는 아니야. 하지만 내 아우님은 예쁜 걸 좋아하지, 무척.’

열두 살의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보게 된 빛이었다.

그를 따라 온 대공성의 사용인들은 그가 실은 선황제의 사생아이며 그가 말했던 ‘아우님’이 다름 아닌 제국의 하나뿐인 황제 폐하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내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황제고, 대공이고…… 내게는 모두 먼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클로이, 여기 숨어 있었구나.’

‘…….’

‘왜 수업을 빠지고 도망친 거지?’

‘글자 같은 거 배우기 싫어요. 어렵고, 머리 아파요.’

그가 붙여 준 가정교사를 피해 도망친 열두 살의 나를 보며 열일곱 살의 그는 푸스스 웃었다.

‘너를 위해 특별히 고용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말하니 굉장히 속상하네.’

‘저 같은 애가 글자를 배워서 어디에 쓰나요?’

‘언젠간 필요한 날이 올지도 모르지. 그래서 사람은 항상 미리미리 미래에 대비해야 해.’

‘하지만 배우고 싶지 않아요.’

‘흐음…….’

나의 강경한 거부에 잠시 골몰하던 그가 이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이건 어때, 클로이? 나와 함께 공부를 하는 거야.’

‘네?’

‘나는 무척 바쁜 사람이지만 특별히 너를 위해 시간을 내어줄게.’

‘어째서요?’

‘네가 내 마음에 들었으니까.’

나는 또다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가를 찌푸렸다.

‘왜요? 아우님이라는 분이 예쁜 걸 좋아해서요?’

‘아니.’

부드럽게 고개를 저은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걸 깨달았거든.’

‘가넷슈 가의 말하는 짐승’으로 지낼 적, 이복오라비의 괴롭힘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어린 날의 나조차도 두 뺨을 발그레 붉힐 만큼 달콤한 목소리였다.

나를 사랑에 눈 먼 여자로 만들었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어둑한 심연이 나를 잠식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차츰 가벼워질 무렵, 따사로운 햇살이 눈가를 간지럽혔다.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다시 눈을 뜬 세상에는 한때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클로이, 클로이. 어리석은 클로이야.

사랑에 눈 먼 여인은 그토록 아둔하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누나.

설익은 눈물아, 너는 뜨거운 비가 되어 차가운 대지를 적셔라.

클로이, 클로이. 가엾은 클로이야.

사랑에 굶주린 길 잃은 아이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다네.

나붓한 슬픔아, 너는 굶주린 야수 되어 서러운 세상을 삼켜 다오.

설운 사랑아, 저주받은 인연아, 참혹한 아픔아, 어리석은 클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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