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 (102/106)
  • #102

    그는 곧바로 상체를 들어 올려 두 손으로 그녀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날카로운 이 끝이 생채기를 내며 혀가 안쪽을 사납게 후벼 팠다. 며칠을 갈증에 시달렸던 짐승이 물방울이 새어 나오는 조그만 틈을 걸신들린 것처럼 쑤셔 대는 것 같았다.

    앤지는 묵묵히 아픔을 참았다. 그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고 팔을 내준 채 가만히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떤 의학적인 지식이나 의혹도 상관없었다. 카일이 흡혈귀든 뭐든, 그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저, 그를 살려야 한다는 본능에만 충실히 따랐다.

    섬의 기괴한 자연, 이터니티를 탄생케 한 초목이 숙주로 하여금 사람의 피를 양분으로 취하게 한다면, 그럼 제 것을 주면 그만이었다. 카일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몸속의 피 절반을, 아니 전부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앤지, 지금 뭘…… 도련님!”

    뒤늦게 상황을 목격한 제롬이 카일을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 카일의 눈빛이 조금씩 평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앤지는 그렇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의 기행을 깨닫기도 전에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카일의 무사한 얼굴을 보니 순식간에 긴장감이 풀어지며, 지금까지 간신히 버텨 왔던 체력이 순식간에 고갈된 것이다.

    “앤지! 앤지, 정신 차려!”

    앤지는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입가에 보일락 말락 안도의 미소가 떠오른 것도 같았다. 따뜻한 온기와 체취가 그녀를 뒤덮은 채, 배가 선착장 도크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단단한 팔이 그녀를 양팔에 안아 올리며,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누르는 익숙한 감각이 엄습했다. 그게 앤지가 정신을 잃기 전 만끽한 최후의 감각이었다.

    * * *

    미카엘의 시신은 테 데움 호수 저편, 황량한 숲 한가운데 방치되었다. 눈 아래 핏줄기가 말라붙은 동공은 텅 비어 있었고 사지가 대자로 못 박힌 형태는 흡사 악마의 현신이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카보르 영지의 주민들은 저마다 손에 든 횃불을 시신에 조금씩 붙였다. 뒤에 선 여자들은 목에 걸린 십자가를 매만지고 성수를 뿌리며 기도문을 읊었다.

    트리에스테의 남부에는 여러 미신과 민간 풍습이 남아 있었다. 마귀 들려 죽은 자의 시체를 불에 태워 온전한 재로 만들어야 다시는 악마가 그들의 땅에 재림하지 못할 것이란 믿음도 그중 하나였다.

    그 외의 것들 역시 화염에 휩싸였다. 카일룸 교의 비서(祕書)는 물론, 테 데움의 서고 내 모든 장서, 보관소의 물품, 가구와 침구까지 죄다 태우고 내부를 완전히 비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증거 불충분으로 황제 시해 혐의가 벗겨진 블랙웰 공작, 가문의 주인이 내린 명령이었다.

    며칠에 걸쳐 본관이 깔끔히 정리되는 동안 카일은 치료 틈틈이 별관에서 빈터가르 경찰국의 조사를 받았다. 대외적으로는 망명한 자국민에 대한 엄중한 심문이었으나, 실상은 질의응답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그가 무죄라는 건 양쪽 다 명실공히 아는 사실이었다. 조사는 형식에 불과했다. 국장은 틈틈이 그의 도움을 받아 트리에스테와 빈터가르 양국에 제출할 엄청난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만 온 힘을 쏟았다. 물론 블랙 매스나 이터니티에 대해서는 한 단어도 언급되지 않았다.

    「윈스턴 대공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의 신이 배 안쪽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호수에 빠져 익사한 것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수심이 깊어 아직 수색 중에 있으니 며칠 더 시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또한, 미카엘 랜들과 공작가 가솔들은 정황상 어떤 종류의 집단 환각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것은 불법적인 약물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며, 지역적인 특색이나 기상 이상에서 비롯된 초자연적인 현상이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자세한 동기와 원인을 조사하고 있으나 이 또한 현재로서는 정확한 진상이 규명될 것이라는 확신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중략)」

    국장은 카일이 의료실로 돌아간 뒤, 보고서를 몇 번이나 다시 썼다 지우길 반복했다. 몸으로 뛰는 현장 수사에는 관록만큼 노련했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문서를 써내는 일은 여전히 고역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 기괴한 눈빛들 하며……. 나 자신도 설득이 안 되는데 당국이며 의회, 폐하는 또 어떻게 납득을 시킬 수 있을지.”

    그는 가문의 일원들이 거쳐 간 무시무시한 교리, 그 참극에 깔린 의식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터였다.

    같은 시간, 국장이 모르는 또 다른 일이 본관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제롬의 수하들이 산처럼 쌓인 헬퍼의 시신과 모든 흔적을 지하의 소각장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자마자 점화 장치가 바로 가동되었다. 불을 붙인 마을 일꾼 중 하나가 소각장 문을 닫고 나가려다 움찔,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조셉?”

    “방금 비명 소리 들리지 않았어?”

    활활 타는 소리에 기묘한 괴음이 섞여 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동료 일꾼은 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냥 타는 소리 아닌가? 평소보다 양이 많으니 소리도 더 요란한가 보지.”

    “아아……. 그런가.”

    누군가 산 채로 불타며 살려 달라, 소리 지르는 것 같았는데. 잘못 들었나. 하긴 아무리 응징받아 마땅한 사용인들이었대도, 시체 아닌 산 사람까지 집어넣었을 린 없지.

    소각장 문은 몇 시간 후에 다시 열렸다. 안쪽은 완전히 잿더미 산으로 변해 있었다. 누군가 그 안에 있었다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 * *

    보름이 흘렀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평화롭고 아늑한 시간이었다.

    빈터가르의 수도 외곽, 휴양지인 헤센은 하룻밤 만에 설원으로 변모해 있었다. 연일 12월의 혹한이 이어지던 끝에, 밤부터 오전까지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여 어딜 봐도 순백색 눈만이 가득했다.

    임시 거처로 빌린 별장의 장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량한 자갈길, 잠시 작동을 멈춘 분수대와 울타리, 방첨탑까지 눈보라가 비켜 간 곳은 단 한 구석도 없었다.

    제롬은 별관 게이트에 기대서서 빈터가르에서 온 서신을 열었다. 미카엘 랜들과 루이스 던스트가 시타델에 심어 둔 첩자들을 빠르게 색출 중이며, 그 과정에는 경시청 소속인 마르틴 실바와 그의 장인인 빌렘 반 아미티지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다는 소식이었다.

    “다행이군. 앤지의 그쪽 가족도 이제 안심이야.”

    두 사람의 아기 또한 무사할 터였다. 이제 더는, 그 소중한 생명에 마수가 뻗칠 일은 없을 것이다. 제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은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한 가지 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주인님의 증세에도 희소식이 있습니다. 얼마 전 비첸틴의 병리학자인 칼 란트슈타이너 박사가 체질마다 다른, 혈액의 유전학적 형질에 대한 발견을 최초로 발표한 바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사람의 피의 성분이 다르다는 것인데, 그 연구 결과가 사실로 입증되어 작년부터 비첸틴과 빈터가르의 국립 병원에서 혈액형에 따른 수혈을 실제로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롬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과거, 선대 공작들과 루이스 던스트가 소위 레머디, 무수히 많은 희생양을 끌어왔던 이유는 바로 그 피의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성별에 대한 부분은 교리와 미신에 의한 것이었지만, 누구의 피와 잘 맞을지 여부는 실제 피를 주입해 보기 전까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쪽 상황이 정리된 후 빈터가르에서 지속적인 치료를 받으시면 분명 차도가 있을 거란 답변을 받았습니다. 일단 주인님의 증세에 임시 처방이 될 약을 서신에 동봉합니다.」

    국경을 넘어온 의약품에는 비첸틴 왕실에서 정식 승인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인증서가 함께 들어 있었다. 산 사람을 제물로 삼은 레머디가 아니라 실제 레머디(remedy)였다. 제롬은 빈터가르 왕실에서 연결해 준 주치의를 부르러 안쪽으로 향했다.

    임시 의료실로 쓰이는 체임버 회랑을 막 지날 때 그는 뭔가 생각난 듯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몇 걸음 되돌아가 환자가 머무는 방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네, 들어오세요.”

    안에 들어서자 아네트가 병상에 누운 채 그를 돌아보았다. 옆에 서서 간호해 주던 메이드가 제롬에게 인사해 보이고 방을 나갔다. 제롬이 의자를 끌어당겨 그 머리맡에 앉았다.

    “좀 어떠냐? 의사 말로는 회복 속도가 놀랄 만큼 빠르다고 하더구나.”

    “맞아요. 제가 느끼기로도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아요.”

    아네트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엷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근심 어린 눈빛으로 바뀌었다.

    “앤지 언…… 앤지 님은요? 혼수상태에서 완전히 깨어난 게 벌써 닷새 전인데,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네 몸부터 먼저 나을 생각을 해야지. 그래야 앤지 님을 뵈러 갈 게 아니냐.”

    “전 지금도 괜찮아요!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타면 돼요.”

    “무리하지 마라. 그러다 상처 덧나니까.”

    제롬이 아서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보름 전 미카엘에게 공격당해 단검이 찍혔던 등은 아직도 완치되려면 한참 멀었다. 그나마 등이었기 망정이지, 심장 쪽에 정통으로 박혔다면 그 자리에서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앤지 님도 이제 한시름 놓았으니 걱정할 것 없다. 며칠만 더 진득하게 기다리거라.”

    “네, 어쩔 수 없죠. 더는 조바심 내지 않을게요. 앤지 님이 무사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 착하구나.”

    소녀를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하고 있었다. 앤지는 그날, 테 데움에서 쓰러진 날부터 빈터가르로 국경을 넘어와 이 임시 거처에서 머무르는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깨어났다 또 다시 혼수상태에 빠지길 수없이 반복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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