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 (101/106)
  • #101

    빈터가르 경찰 부대는 꽤 지쳐 있었다. 갑자기 좀비처럼 튀어나와 칼과 총을 휘두르는 헬퍼들을 진압하느라 진이 다 빠져 있었다. 다행히 무기를 들었다 뿐 오합지졸에 불과했기에 그들 쪽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공작저 사용인 중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경찰 부대의 반격 때문이 아니라, 여기저기 화재가 일어났고 대부분 그 불길에 휩싸여 자멸한 것이다.

    “허, 이게 무슨 일이야. 무력이 있을 테니 단단히 준비하고 가란 말은 미리 들었지만, 이게 도대체…… 보고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군. 우린 뭐 정당방위니까 상관없지만…….”

    국장은 모자를 벗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하지만 잠시 중얼거릴 시간조차 없었다. 본저 앞 광장에 선 그를 향해 경관들이 여기저기 모여들어 동시다발로 질문을 날렸다.

    “국장님. 아직 공작과 앤지 리즈델을 찾지 못했습니다. 미카엘 랜들도 보이지 않아서 지금 예배당 쪽을 수색하고 있습니다만, 영지가 워낙 넓고 구조가 복잡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국장님! 생존한 사용인들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저택 곳곳을 뒤져 눈에 띄는 대로 구속해 홀에 모아 놓고 있습니다.”

    “윈스턴 대공도 아직 못 찾았나?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누군가 배로 건너편에 간 흔적이 없는……”

    국장이 말을 멈췄다. 초토화된 저택 아래 홀로 잔잔한 호수 쪽을 돌아봤을 때였다. 처음엔 환각이라 여겼다. 예배당 첨탑 아래, 새하얀 옷자락이 달빛을 받아 허공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금색 머리칼이 흡사 달의 요정처럼 보였다.

    국장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홀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순간, 또 다른 그림자가 요정을 뒤따라 허공을 날고 있었다. 첨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호수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국장님, 저게 대체……!”

    “일단 가서 구조하겠습니다!”

    국장은 그제야 제가 환시를 본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도 경관들을 뒤따라 선착장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도대체 이 저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불과 한 시간 전,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널 때만 해도 동화 속 그림 같은 장관에 감탄했건만.

    * * *

    카일은 앤지를 뒤따라 난간 아래 몸을 날렸다. 몸과 머리가 순식간에 분리된 것 같았다. 머릿속은 하얀 백지처럼 텅 비어 있었고, 몸은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죽음도 불사할 각오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강력한 자석에 이끌리듯 자꾸만 아래로 내려앉는 그녀와 닿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지금 이 순간, 앤지와 제 위치를 바꿀 수만 있다면. 제 몸이 아래에서 그녀를 안전히 받쳐 줄 수만 있다면.

    제 몸뚱어리는 어찌 돼도 상관없었다. 산산조각 부서지고 수천만 개의 살점과 뼈마디로 흐트러져도 기쁘게 죽을 수 있었다. 앤지만 무사할 수 있다면.

    제발. 앤지, 제발……!

    악마에게 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전 세계의 영혼을 다 달라고 해도 줄 수 있었다. 그 순간 첨벙, 소리에 이어 앤지가 수면 아래 사라졌다. 그의 몸도 그 뒤를 따랐다.

    경악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조금만 건물 가까이 떨어졌어도 호수 아닌 지면에 내려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구조는 요원해 보였다. 배가 정박된 선착장에 당도한 경관들은 예기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배마다 구멍이 나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구멍을 낸 흔적이 역력했다.

    “이런 제길! 그 미친 저택 사람들 짓이야.”

    “그 말이 맞습니다. 누구도 여길 빠져나갈 수 없어요.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다 죽어야 합니다.”

    스산한 여자의 음성이 그들의 주의를 일깨웠다. 야스민이 피투성이 차림으로 두 손에 사냥총을 받쳐 들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한 무리의 사용인들이 제각기 낫처럼 구부러진 칼을 들고 서 있었다. 마치 약에 취한 것처럼 다들 눈동자가 혼탁하기 짝이 없었다.

    경관들이 기함한 표정을 지으며 노련하게 총을 빼냈다. 정말로 저주받은 좀비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명은 재빨리 사용인들을 피해 공작이 떨어진 호수로 들어갔지만 수심이 깊어 여의치가 않았다.

    그때 건너편 선착장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기척에 다들 눈을 휘둥그레 떴다. 트리에스테도 아니고 빈터가르도 아닌, 낯선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정박된 배를 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잦아들었던 총소리와 비명이 달빛 아래 다시 어우러졌다.

    * * *

    기포가 수마처럼 밀려들었다. 귀가 먹먹해지며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전신의 땀구멍이 활짝 열리는 동시에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무시무시한 냉기가 살결을 꿰뚫고 뼛속까지 파고들어 몸속을 갈가리 찢는 것만 같았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조금 전의 상황이 선명히 재생되었다. 공작저의 헬퍼가 그녀를 난간 아래로 밀어서 떨어진 직후까지 기억이 났다.

    그렇구나. 이렇게 떨어져서 죽는구나……. 카일은. 카일은 무사할까? 노아를…… 그에게 노아에 대해 알려 줘야……

    간신히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에 무언가가 일렁거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녀를 잡아채며 그러쥐었다. 무게감 없이 부유하던 몸이 순식간에 단단히 사로잡혔다. 카일이 그녀를 꼭 안고 위로 올라가려다 갑자기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카일.

    앤지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그라츠에서 연행되기 전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을 참던 모습, 차에 태워지기 직전 손바닥에 묻어 있던 피가 떠올랐다. 발작이 일어난 것이다. 하필 지금, 이럴 때.

    안 돼, 카일.

    앤지가 이 악물고 한 팔로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른 팔을 휘저어 어떻게든 수면 위로 올라가려 애썼다. 하지만 카일의 무게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아무리 애쓰고 혼신의 힘을 다해도 하나로 얽힌 몸은 조금씩 더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절망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앤지는 두 팔로 카일을 꼭 보듬어 안고 괴로워하는 그의 머리를 감쌌다. 차라리 이대로 함께 갈 수 있어서 다행일까. 하지만 그럼 노아는. 우리 아기는…….

    노아는 아직 아빠를 보지도 못했다. 카일 역시. 노아의 존재조차 모르고 이대로 가 버리면…….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노아를 어떻게 지켜 왔는데, 이대로 그 애를 홀로 둘 수는 없었다.

    앤지가 마지막 힘을 다해 카일의 목을 끌어안고 수면 위를 올려다볼 때였다. 카일의 손이 그녀를 마주 끌어안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새카만 늪처럼 일렁이는 어둠 속에서도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바다색 눈이 빛을 발했다.

    카일은 심장이 비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앤지를 끌어안고 위로 올라가려 애썼다. 그는 죽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앤지만은 반드시 수면 위로 올려 보내야 했다. 마침내 물보라가 일어나며 수면이 갈라졌다.

    막혔던 귀가 확 뚫리며 바깥의 소음이 뇌리 속을 배어 들었다. 한순간 잃었던 감각이 되살아나며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통각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사람들의 아우성이 뇌성처럼 머리 위에서 울려 댔다. 배가 다가오며 커다란 손 여럿이 두 사람을 조금씩 끌어 올리고 있었다.

    앤지는 금세 배 위로 건져졌지만 카일은 좀 더 시간이 지체되었다. 건장한 체격 탓도 있었지만 반쯤 의식을 잃은 듯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까닭이었다. 앤지도 그의 한쪽 팔소매를 잡고서 목청 높여 외쳤다.

    “카이! 깨어나요! 조금만 힘을 주고 버텨 봐요……. 어서!”

    앤지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흠뻑 젖은 몸이 추위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맨발에는 이미 동상의 전조가 보였지만 제 몸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장정들이 여럿 더 달라붙어 그를 간신히 배 위로 끌어 올렸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카일이 기도하듯 엎드린 자세에서 괴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 물방울이 빗줄기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머리 아래,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물웅덩이가 검붉게 변해 갔다.

    “카이!”

    앤지가 그를 부축해 똑바로 눕혔다. 각혈은 멎었지만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그가 금방이라도 죽을 듯해 심장이 아프도록 조여들기 시작했다.

    “제롬 아저씨, 빨리…… 빨리 좀……. 카이가…….”

    “속력을 좀 더 내 줘! 빨리 저택으로 모셔서 응급처치를 해야 돼, 서둘러!”

    제롬의 요청에, 비첸틴 사병의 차림을 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만일을 대비해 카일이 개인적으로 고용했던 인접국, 비첸틴의 용병들이었다. 마을에서 대기하던 중 제롬의 신호탄을 보고 부리나케 달려왔건만 저택의 상황은 이미 마무리 중인 듯했다. 저택의 선착장 쪽에는 야스민을 비롯한 사용인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니……. 안 돼요. 너무 늦어!”

    앤지가 울먹이며 어쩔 줄 몰라 하다 주머니 속을 뒤져서 헤어 넷을 꺼냈다. 그 안에 숨겨 둔 나무 조각이 떠올랐다. 칼을 달라고 하거나 찔러 달라 요청하면 만류할 게 뻔했다.

    그녀는 제롬이 보지 않는 틈에 신속히 움직였다. 날카로운 조각으로 팔뚝을 힘껏 찌르자 곧바로 피가 흘러나왔다. 앤지는 손가락에 피를 발라내 카일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혀가 반응을 보이자 아예 피가 배어 나오는 팔뚝을 그의 입에 가져다 댔다.

    오래전, 컬리넌 섬에서도 이런 식으로 발작을 가라앉혔을 것이다. 레머디를 찾아 체질에 잘 맞는 혈액을 채취해 약으로 삼았을 테니까. 사람들이 제 침대를 둘러싸고 뭔가를 논의했던 당시의 흐릿했던 기억들, 지금은 말끔히 사라진 주삿바늘의 흔적이 그 증거다.

    푸른 눈이 기묘한 빛을 발했다. 카일의 흐릿한 시야가 제 입 안으로 흘러드는 새하얀 살점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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