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100/106)
  • #100

    그 명령에, 카일렉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총을 멀리 던져 버렸다. 일단은 앤지의 살갗에서 날 끝을 최대한 떨어뜨리는 게 급선무였다.

    “미카엘. 넌 앤지를 해칠 수 없어. 너 자신이 잘 알잖아.”

    네가 앤지를 죽일 수 있을 리가.

    그 또한 자신처럼 그녀에게 미쳐 있었다. 각자 다른 여인의 배를 빌려 나온 두 형제는 앤지 리즈델을 삶의 구심점으로 삼고 있었다. 카인과 아벨처럼, 서로를 없애야만 살아남는 대척점 속에서 그 사실만은 인정해야 하리라.

    네 놈이 그녀를 죽일 수 있을 리 없어.

    “맞아.”

    미카엘이 선선히 답했다. 앤지는 젖은 눈을 깜빡이며 숨을 내쉬었다. 거기서 조금만 움직이면 날붙이가 목을 찢고 들어올 터였다.

    “그러니 어쩔 거야, 카일렉? 우리 셋 중 적어도 하나는 죽어야 이 싸움이 끝이 날 텐데…….”

    미카엘의 보랏빛 눈동자에 불이 화르륵 붙었다. 아마빛 금발, 수려한 이목구비에 흉측한 균열이 일었다. 분노에 휩싸이면 휩싸일수록 차갑고 단단한 돌처럼 변해 가는 카일렉과는 달랐다.

    “그러니……. 네가 죽어, 카일렉.”

    미카엘이 창 너머를 향해 턱짓했다. 스스로 몸을 날리란 뜻이다. 난간 아래는 선착장과 호수의 경계선 영역이었다.

    “잘하면 익사할 수도 있겠어. 혹시 즉사하지 않았대도 염려 마. 최대한 빨리 숨통을 끊어서 편안히 보내 줄 테니까.”

    그때 미카엘의 등 뒤로 하인리히와 다른 장정 몇 명이 들어섰다. 뱃사공은 섬뜩한 미소를 띤 채, 비무장 상태인 카일을 향해 앞장서서 다가섰다.

    카일은 짧은 딜레마에 빠졌다. 앤지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한꺼번에 몇 놈쯤 상대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촌각을 다투는 이 순간에도, 미카엘의 의중에 대해 극심한 혼란과 지독한 위기감이 동시에 일어났다. 앤지를 죽이지 않을 거라 믿으면서도 완전히 안심할 순 없었다.

    하인리히가 저만치 떨어진 총으로 다가서는 순간, 카일이 그의 손을 발로 차 냈다. 다른 헬퍼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그들 중 누구도 총을 소지하고 있진 않았다. 난간 앞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카엘이 앤지를 붙잡은 채 하인리히를 향해 소리쳤다.

    “그놈을 던져, 아래로! 밀어 버리라고!”

    “미카엘.”

    앤지가 그를 불렀다. 칼끝이 잠깐 멀어졌다.

    “저 사람을 보내 줘. 내가 너와 함께…… 같이 갈게.”

    카일이 난간에 기댄 채 앤지 쪽을 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그에게 목이 눌려 있던 하인리히가 재빨리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앤지!”

    카일이 그들에게 달려가려 할 때, 등 뒤의 하인리히가 다시 훼방을 놓았다. 그가 사공을 완전히 죽여 버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래서 잠시 앤지가 시야에서 벗어난 사이, 그녀가 미카엘의 손에 들린 단도를 천천히 밀어내고 그에게로 돌아섰다. 두 사람은 일견, 서로의 몸에 밀착한 연인처럼 보였다.

    “정말이야, 미카엘. 너와 같이 갈 테니까……. 카일만은 살려 줘.”

    앤지가 미카엘을 코앞에서 올려다보며 울먹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입술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정말이야? 나와 함께 갈 거야……?”

    미카엘은 앤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말갛게 젖은 녹안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앤지가 단도를 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꿈결 속을 걷는 것 같았다.

    앤지의 아름다운 눈이 애처롭게 웃고 있었다. 어쩐지 슬픈 것도 같았다. 지난 한 달간 그를 괴물처럼 보던 눈빛이 아니었다. 미카엘의 의식이 아득해졌다. 다시 3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늘 그에게 환하게 웃어 주곤 했었다. 그의 어깨에 뭔가 묻으면 곧바로 털어 주고, 나란히 걷다 발을 삐끗하면 거리낌 없이 그의 팔에 기대고 손을 짚던 앤지. 그를 눈에 담고, 살갗이 닿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섬에서의 그녀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순간 미카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가슴이 아팠다. 최근 앤지를 볼 때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던 그 통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어딘가에 깊숙이 찔리는 고통이었다.

    그는 제 가슴팍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천 위로 붉은 원이 크게 번지고 있었다.

    “미카엘.”

    앤지가 벌벌 떨고 있었다. 가슴이 위아래로 세차게 오르내리며, 꽉 악물린 잇새로 거친 숨소리가 차디찬 밤공기 위로 흩어져 갔다.

    “난 데려가도 괜찮아. 하지만 카일은 안 돼. 그리고 내 아기도.”

    촉촉하게 젖은 두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녹빛 보석이 조각조각 부서져 눈물로 분출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 악물고 손잡이를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큭, 미카엘의 가슴이 반동하며 입술 새로 피가 터져 나왔다.

    “노아는 절대 안 돼……!”

    앤지가 재차 속삭였다. 테 데움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수없이 생각했다. 3년 전 섬에서의 미카엘 랜들, 이렇게 괴물이 되어 버린 그가 정말로 같은 사람일까 의혹을 품기도 했었다. 무엇이 진실이든 과거,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공작저 별관에 갇혀 있었을 때 그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화재에 휩쓸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레반 마을에서도 암살자에게 당하기 직전 그녀를 구해 주었다. 카일의 부하가 한발 빠르게 암살자에게 독침을 날렸다고는 해도, 미카엘이 그녀를 구하고자 한 것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손잡이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물로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 그의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추악하게 일그러진 지금의 모습만이 진실은 아닐 터였다. 과거의 미카엘 랜들 역시, 그의 또 다른 이면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해도 지금의 그를 용서할 순 없었다. 다른 건 용서해도, 제 아이를 제물로 노리는 그 탐욕에는 일말의 관용도 베풀 수가 없다.

    “앤지…….”

    미카엘은 쥐어짜는 신음처럼 그녀를 불렀다. 보랏빛 눈동자를 크게 뜬 채, 흡사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을 목격한 것처럼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희미하게 경련하는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오른 것도 같았다.

    앤지,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그가 입술 모양으로 속삭였다. 그때 문이 부서지는 소음이 일었다. 다른 쪽 문을 부수고 난간에 들어선 제롬이었다. 카일이 감감무소식이라 걱정되어 와 본 것이다.

    “도련님!”

    “앤지!”

    카일이 장정들을 난간 너머로 던져 버리고 앤지를 향해 돌아섰다. 그는 앤지를 끌어안아 제롬 쪽으로 넘기고, 미카엘의 가슴에 박힌 단도를 빼냈다. 그리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다른 쪽 가슴에 재차 박아 넣었다.

    미카엘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덩어리째 튀어나왔다. 가녀린 앤지의 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에, 몸이 더 이상 서 있지 못했다. 허리가 꺾이며 상체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그는 이복동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제 끝내지, 그만.”

    카일이 손잡이를 쥔 손에 최대한의 힘을 실었다. 커헉, 미카엘의 입에서 피가 다시 흘러내렸다. 몸 한가운데를 꿰뚫고 단도 끝이 등 뒤로 튀어나오기 직전, 카일은 두 손을 다시 앞으로 당겼다. 미카엘의 몸이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카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피에 젖은 날 끝이 분주하게 춤을 추었다. 죽어 가는 시신이 무람없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코와 귀,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손과 발에 다른 단도로 하나씩 못이 박혔다. 카일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제롬에게서 총을 받아 들어 미카엘의 눈알에 대고 방아쇠를 하나씩 당겼다.

    시신은 크게 들썩이다 마침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걸레짝이 된 시체의 얼굴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난도질 되어 있었다. 앤지가 흐느끼며 그의 등을 짚었다.

    “카이, 그만……. 이제 그만해요. 그만…….”

    앤지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순간 악마처럼 돌변해 버린 그를 꼭 끌어안았다. 아무리 끔찍한 악귀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를 외면할 수도, 놓을 수도 없었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그만해도 돼요. 이제 그만…….”

    “앤지…….”

    카일이 그녀를 마주 끌어안고 숨을 골랐다. 앤지의 머리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없는 기도를 되뇌이는 동안, 호흡도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며칠이고 감사제를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제롬과 그의 수하들이 두 사람을 조심스럽게 부축할 때였다.

    “아, 아네트! 아네트는 어디 있나요? 혹시 오던 길에…….”

    앤지가 부리나케 일어나 난간 밖으로 몸을 뺐을 때였다. 그 옆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형체가 그녀의 발목을 콱 잡았다. 앤지가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누렇게 번뜩이는 하인리히의 눈과 마주친 순간, 그녀의 몸이 난간 가장자리로 밀리며 상체가 위로 떠올랐다. 죽어 가는 숨결을 꿰뚫고 낮은 저주가 흘렀다.

    “죽어! 크흑……. 테 데움 호에…… 제물을 바쳐서라도…… 불멸을…….”

    “앤지!”

    카일이 사공을 향해 총을 쏘았다. 총구는 철컥, 빈 소리만 낼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총알이 떨어진 것이다. 곧바로 하인리히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가 일 초 빨랐다. 난간을 잡고 버티려던 앤지의 손이 허공을 짚었다. 추락은 순식간이었다.

    “앤지! 앤지-!”

    끔찍한 기시감이 카일의 전신을 꿰뚫고 관통해 들어왔다. 컬리넌 섬의 절벽에서 앤지가 떨어졌던 3년 전, 그때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는 앤지의 두 번째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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