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 (99/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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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네트가 악, 소리치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새카만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붙잡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다. 앤지가 같이 넘어져 다 같이 뒤엉킨 채 통로 바깥으로 굴러 나왔다. 깜깜하던 시야가 저택과 선착장, 여기저기 걸린 횃불로 확 밝아졌다. 달을 가렸던 구름이 비껴 나며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너였구나, 아네트. 쥐새끼처럼 여기 들락거렸던 게.”

    “더, 던스트 부…….”

    루이스가 등 뒤에서 아네트를 붙잡고 있었다. 다른 손에 잡힌 뭔가가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서리한 달빛에 반사된 날붙이가 번쩍거렸다.

    “아네트!”

    저만치서 일어난 앤지가 소리를 질렀다. 던스트 부인이 당장이라도 아네트의 목을 찔러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를 노려보는 루이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네트를 놓아주세요, 부인!”

    “이 애를 살리고 싶으면 이쪽으로 와. 어서!”

    “흐으…… 흐…….”

    아네트는 겁에 질려 숨을 크게 몰아쉬고 있었다. 단도 끝이 목을 살짝 찔렀는지 아악, 쥐어짜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네트의 목에 붉은 선이 생겨난 순간 앤지가 다시 소리쳤다.

    “그만해요! 내가 지금 갈 테니까……. 아네트는 보내 주세요, 당장.”

    앤지는 이 악물고 루이스를 향해 한 발짝씩 다가섰다. 두려움과 분노, 겨울밤의 추위로 심장이 얼어 버릴 것 같았다. 주머니 속 나무 조각이 떠올랐지만 감히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부인의 큰 몸집, 시퍼런 칼날 앞에 그 파편은 무용지물일 게 뻔했다.

    “꾸물대지 말고 어서 와. 이 애가 너 때문에 죽어도 괜찮니?”

    루이스는 아네트를 꼭 잡은 채 이를 갈며 말했다. 저택 쪽에서 들리는 총소리, 사람들의 외침과 비명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차피 쓸모도 없는 계집, 진작 제거했어야 했어. 미카엘이 네게 쓸데없는 집착만 보이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빈터가르의 그 아기만 우리 손에 떨어지면 그만인데. 너 따윈 아무 이용 가치도 없는데 말이야.”

    마지막 말은 혼잣말에 가까워 잘 들리지 않았다. 앤지는 걸음을 빨리하며 다시 외쳤다.

    “아네트를 놓아줘요! 지금 가고 있잖…….”

    갑자기 예배당 쪽 횃불이 확 꺼지며 짧은 순간 어둠이 그들 위에 내려앉았다. 아네트가 외마디 소리를 치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누군가 루이스의 등 뒤에서 그녀를 밀친 것이다. 부인의 손에서 떠나간 단도도 바닥에 떨어져 어디론가 굴러가 버렸다.

    “아기라니?”

    철컥, 그립 부를 장전하는 금속음이 차디찬 밤공기를 꿰뚫고 루이스의 정수리에 와닿았다. 실제 총 끝도 머리에 닿아 있었다. 카일렉이 다시 되물었다. 총구만큼이나 서늘한 저음이었다.

    “아기라니. 누굴 말하는 거지?”

    저택 쪽 소란이 더 고조되었다. 그의 심문은 루이스의 귀에만 간신히 전해져 왔다.

    “말해, 루이스. 앤지에게 아이가 있었나?”

    루이스 던스트가 죽음의 공포 속에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련…… 주인님.”

    “내 아이인가?”

    “네, 주인……”

    탕! 총구가 가차 없이 불을 뿜었다. 아악! 아네트가 앤지의 품에 안겨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루이스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천천히 고꾸라졌다. 뻥 뚫린 구멍으로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땅바닥에 쓰러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블랙웰 가의 오랜 충복이자 주인들을 악마의 종이 되도록 이끌고, 어린 카일렉마저 교리의 노예가 되게끔 끊임없이 교화를 꾀했던 여인. 영생을 탐내던 루이스 던스트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카일…….”

    카일은 얼굴과 제복에 온통 피를 뒤집어쓴 채 앤지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네트를 부둥켜안은 채 충격에 떨고 있었다. 그녀는 아네트의 어깨를 연신 도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썼다.

    “앤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카일의 품속에 있었다. 찌를 듯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밀어내긴커녕, 두 팔은 그의 허리를 마주 끌어안고 바짝 힘을 주었다. 눈물이 차올라 하염없이 뺨을 적셨다.

    “카일, 진짜 카일 맞죠? 꿈이 아니죠?”

    “……이제 와서 미안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앤지. 네가 어떻게 되었더라면 나도 따라갔을 거야. 널 그렇게 만든 자들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이고, 산채로 불에 태우고……. 토해 내고 싶은 말들이 수십 마디도 넘었다.

    하지만 지금에야 도착해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끝으로,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앤지의 머리를 제 품에 끌어안고 그 생생한 온기를 거듭 확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신에게 감사한 적이 없었다. 신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신이 아닌 악마에게라도 기꺼이 혼을 팔며 경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품에 안은 채 떨어질 줄 몰랐다. 둘 사이를 둘러싼 시간만 잠시 멈춘 것 같았다. 본관 쪽에서 총소리가 몇 번 더 울리고 나서야 두 사람은 포옹을 풀고 서로를 눈에 담았다.

    “앤지. 다친 덴 없어? 괜찮아?”

    앤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같은 질문을 던지려다 목이 메어 입술만 달싹였다. 야윈 얼굴을 보니 그동안 감옥에서 얼마나 고생했을지 상상이 가서 마음이 아팠다.

    “얼굴이 왜 이래……?”

    카일도 그녀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날 선 벽안이 부서질 듯 한층 더 가늘어진 목과 쇄골, 반쪽이 된 뺨과 턱을 황망히 살피다 붕대에 감긴 팔로 다시 내려갔다.

    “그 새끼가…… 이랬어? 널 이렇게 만들었어?”

    그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푸른 눈에 불그스름한 얼룩이 떠오르며 숨이 과호흡에 한껏 거칠어져 있었다. 앤지가 재빨리 그의 팔을 짚고 달랬다.

    “아니, 아냐.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보다 감옥에서 어떻게 나왔어요? 지금 저택 쪽은…….”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가자. 제롬이 예배당 뒤편에 배를 준비해 뒀어.”

    카일은 앤지의 손을 잡고 이끌려다 그녀가 맨발인 걸 보고 번쩍 들쳐 안았다. 그녀가 괜찮다며 내려 달라 했지만 아랑곳 않고 달렸다. 오히려 너무 가벼워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한 것인지, 3년 전 그때보다 더 가벼웠다.

    미카엘…….

    일단 앤지를 제롬에게 안전히 맡기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미카엘을 제 손으로 직접,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지 않으면 테 데움을 떠날 수 없었다.

    “아네트, 뭐해! 빨리 와!”

    앤지의 부름에 아네트도 엉거주춤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저택 어딘가가 환해진 듯해 돌아보니 1층 홀 쪽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카일은 앤지를 아기처럼 가볍게 안아 든 채 예배당 회랑을 지나 계단으로 올랐다. 궁륭 위, 지붕과 가까운 창으로 넘어가면 저택 후미가 훨씬 가까웠다. 테 데움의 구조는 그의 손바닥을 보는 것만큼이나 익숙했다.

    안타깝게도 공작저의 일꾼들도 주인만큼이나 테 데움을 잘 알았다. 지난 3년간 이곳에 몸담고 살았던 자들은 더더욱.

    미카엘은 재빨리 저택의 난투극에서 물러나 예배당으로 향했다. 첨탑 아래를 지나는 순간, 루이스 던스트의 시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앤지의 리본이 떨어져 있었다.

    곧바로 첨탑에 달려갔지만 예상대로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불현듯 뇌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카일렉…….”

    그는 총알이 소진된 총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시신 옆에 떨어진 단도를 대신 주워 들었다. 사명감이 불길처럼 끓어올랐다. 오늘이야말로 이복형제와의 악연을 직접 끊어 내고 말 터였다.

    그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회랑을 가로질러 달렸다. 제 예감이 맞다면, 두 사람은 지름길인 지붕 쪽 창으로 후미의 선착장을 향해 가고 있을 터였다.

    * * *

    카일렉을 뒤따르던 아네트의 성대 깊숙한 곳에서 신음이 나오려다 막혔다. 미카엘은 등 뒤에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손을 내리고, 허리춤에 박힌 검을 빼냈다. 심장을 노렸어야 했는데 간발의 차로 비껴 나 버렸다. 그는 피를 쏟아 내는 가냘픈 몸을 떨쳐 내고 멀리 보이는 앤지의 뒷모습을 좇았다.

    앤지는 카일의 품에서 내려서서 지붕 아래 창 앞에 서 있었다. 그에게 안긴 채 가파른 절벽 형태의 옥외 계단을 내려갈 순 없었다. 카일은 5층 높이의 계단 끝에 서서 깜깜한 아래를 살펴보았다.

    “앤지, 거기 있어 봐. 어두워서 발을 헛디딜 수 있으니까 내가 짚은 곳만 그대로 밟고 내려와.”

    “조심해요, 카이.”

    그때 바람이 크게 불며 클로크의 두건이 벗겨졌다. 앤지가 두건을 고쳐 쓰려 할 때였다. 섬뜩한 전율이 일었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미카엘이 달려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바람보다 빠른 속도였다. 저항할 틈도,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카……”

    카일이 계단에 내려서기 직전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리볼버의 끝은 이미 미카엘을 향해 있었다. 그의 단도가 앤지의 목을 긋는 단 한 번의 몸짓, 제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는 속도 중 어느 쪽이 더 빠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미친 새끼.”

    카일이 입을 열었다. 제 목소리 같지 않았다. 극렬한 긴장감이 오히려 음색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총을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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