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 (98/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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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 배, 배를…… 마차까지…… 살려 줘! 날 도와주면 네게 큰 상을 내리겠다, 어서……!”

    “어서 타십시오, 폐하.”

    하인리히가 서둘러 그를 배에 태웠다. 다행히 그 많던 배들이 죄다 반대쪽 선착장에 몰려 있었다. 그를 뒤쫓아올 배가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윈스턴은 점점 뻣뻣해져 가는 사지를 미친 듯이 주무르며 정신을 똑바로 유지하려 애썼다. 일단 마을까지만 가면 의원이 있을 테니 해독제를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약, 약이 있을 거야……. 이대로 죽을 리가! 이봐, 좀 더 속도를 높여 주게!”

    “그러겠습니다, 폐하.”

    “빠, 빨리 가 주게. 어서…….”

    사공은 노 젓는 동작을 빨리했다. 윈스턴은 불안한 눈으로 저택 쪽을 돌아보았다. 아직 의식이 있는 근위대가 블랙웰가 사병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요란한 다툼 소리, 비명으로 소란이 일어나며 계단 위쪽에 횃불이 정신없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이렇게 어이없이 당할 수가!

    낭패 중의 낭패였다. 그는 이를 빠득 갈았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당장 전 군대를 이곳에 내려보내 저 빌어먹을 저택을 통째로 초토화시킬 작정이었다. 카일렉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그놈은 어디에…….

    공작은 출발 직전, 눈에 띌지 모르니 친위대가 아닌 사병으로 위장하겠노라 계획을 변경했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연회 홀로 향할 때였다. 카일렉은 주위의 동태를 살펴보고 홀로 다시 돌아오겠노라 말하곤 자리를 떠났었다. 그에 생각이 미친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며, 호수 한가운데서 배가 살짝 흔들렸다.

    “여기, 수심이 깊은 편인가? 빠져 죽을 정도는 아니지?”

    윈스턴이 겁에 질려 덜덜 떨었다. 사공이 앞니 빠진 입 안을 뻐끔거리며 선선히 답했다.

    “웬걸요, 폐하. 이렇게 보여도 수심이 꽤 깊습니다. 트리에스테에서 가장 깊은 호수가 이 테 데움 호가 아닙니까……. 하하하.”

    분위기에 맞지 않는 호탕함에 윈스턴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사공의 태도는 처음부터 어딘가 이상했다. 아까처럼 그를 대공 전하가 아닌, 폐하로 부르고 있긴 했지만 기괴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윈스턴이 점점 굳어져 가는 다리를 주무르다 사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네…….”

    “조심하십시오, 폐하. 여기가 가장 수심이 깊은 지점이랍니다. 잘못하면 눈 깜짝할 새 빠져 버려 위로 올라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공은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양손에 쥐고 있던 커다란 노 역시 위로 떠올랐다. 노질이 멎자 배가 그 자리에 멈췄다. 소슬한 바람도 뚝 그친 듯 정적만이 감돌았다.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첨벙, 물보라 소리에 이어 무시무시한 한기가 들이닥쳤다. 윈스턴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허우적댔다. 조금 전까지 배 위에 있었는데 갑자기 물에 빠진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코와 입 안으로 물이 사정없이 들어와 숨통을 막았다.

    “이봐, 살, 살려…… 흐억! 크흑!”

    간신히 중력을 거슬러 머리를 수면 위로 젖힌 순간, 시커먼 동굴처럼 크게 벌린 사공의 입 속이 보였다. 하인리히는 노 한 짝을 두 손에 들고 머리 위로 힘껏 들어 올렸다. 그 짧은 순간, 윈스턴은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았다. 깨달음과 동시에 둔중한 충격이 정수리를 강타해 왔다.

    싸늘한 냉기와 요란한 기포 위로 피비린내가 흘렀다. 혀를 휘감는 제 피 맛이 짭짤했다. 그게 윈스턴 대공이 느낀 최후의 감각이었다. 의식 잃은 몸뚱어리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호수는 고요한 늪지처럼 그 육신을 조용히 빨아들여 삼켰다. 형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탐냈던 야심가, 불사를 꿈꾸었던 사내는 그렇게 소리 없이 최후를 맞았다.

    하인리히는 수면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노를 저었다. 일국의 2인자가 이렇게 시시하게 최후를 맞다니. 쓴웃음이 흘렀다.

    배는 다시 저택 쪽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그 순간, 반대쪽 선착장을 향해 거대한 소음이 몰려왔다. 마차 바퀴와 말발굽, 말 울음소리에 사위가 삽시간에 떠들썩해졌다. 하인리히는 깜짝 놀라 노 젓던 손을 멈췄다.

    무장한 경찰 제복 사내들이 마을의 사공들을 앞세워 선착장의 배에 올라타고 있었다. 빈터가르 왕실 경찰국의 배지와 허리춤에 찬 총집, 검집 모두 달빛을 받아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하인리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트리에스테 왕실 군대도 아니고 빈터가르의 경찰국에서? 도대체 왜?

    그는 최대한 노를 빨리 저어 먼저 저택에 당도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일단은 던스트 부인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초로의 그보다 제복을 입은 장정들이 좀 더 빨랐다. 그들은 순식간에 긴 계단을 뛰어 올라가 저택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불시 방문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카일렉 로던 블랙웰을 연행하러 왔습니다.”

    “공작님은 지금 수도의 황궁 감옥에 황제 시해 및 모반죄로 수감되어 계십니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시종장 야스민을 위시한 헬퍼들이 앞으로 나섰다. 야스민이 재빨리 집사를 돌아보곤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홀의 살육을 신속히 갈무리하고 루이스 던스트를 데려오란 지시였다.

    “빈터가르 왕실 경찰청이 무슨 권한으로 트리에스테 제국민인 공작님을 연행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야스민은 정말로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확실히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무리의 맨 앞에 선 경찰국장은 왕실의 인장이 찍힌 두루마리 서신을 꺼내 보였다.

    “빈터가르 왕실과 의회의 연행 승인서입니다. 아직 모르시는 것 같은데, 블랙웰 경은 이미 증거 불충분으로 특별사면된 상태입니다. 우린 그가 현재 여기 있다고 해서 온 것뿐이고요. 여기서는 풀려났다고 하지만 빈터가르로 연행해 우리 쪽에서도 조사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증거 불충분으로 사면……? 그게 사실인가요?”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빈터가르에서 연행해 간다는 겁니까?”

    야스민과 집사는 여전히 아연실색해 있었다. 사면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인데 어째서 타국의 공권력이 관여하는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찰국장은 답답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난달 레니에 8세가 트리에스테와 빈터가르간의 평화 수교 협정을 맺은 사실을 모릅니까? 그 협정은 자국민 보호와 타국에서의 범법 행위 관리 또한 포함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사안이 심각한 만큼 우리 쪽에서도 다시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쪽에서도 확실한 무혐의로 입증되면 그때는 트리에스테 왕실에서의 특별 사면까지 더해, 완전히 혐의를 벗고 풀려나게 되겠지요.”

    국장은 서신을 보좌관에게 넘기며 덧붙였다. 더는 문 앞에서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아무래도 모르는 모양이군요. 카일렉 로던 블랙웰은 이제 명실공히 빈터가르의 국민입니다. 지난번 사절단 방문 시 왕실에 정식으로 망명 신청을 했고 며칠 전 공식적으로 승인이 됐어요.”

    “예? 그게 정말입니까? 빈터가르로 망명을…….”

    공작가의 가솔들은 충격받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금시초문일 뿐 아니라 전혀 대비하지 않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공작이 지금 여기 와 있다니? 대체 언제부터?

    “그럼 이제 대답이 된 것으로 알고, 실례하겠습니다.”

    국장을 선두로 제복 무리가 거침없이 들어와 홀로 향했다. 그리고 아비규환이 된 만찬장을 접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트리에스테 왕실의 기병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고 피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홀의 반대쪽 체임버 한가운데서는 격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독에 당하지 않은 왕실 기병들, 미카엘이 고용한 용병 살수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국장은 총을 장전하며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블랙웰 공작과 앤지 리즈델을 찾아. 임무를 완료하는 즉시 바로 철수한다.”

    그 과정 중, 자기방어를 위해 부득이 무기를 쓰거나 희생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의미였다. 빈터가르의 경찰부대는 상관의 암묵적인 지시를 알아듣고 저택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졌다.

    날이 밝기 전까지는 반드시 두 사람을 사수해야 했다. 그게 빈터가르 왕실 측의 비공식적인 명령이었다. 왕실과 공작가의 장기 말 전쟁은 그들의 소관 밖이었다. 어차피 트리에스테 왕실의 와해와 나라의 몰락은 멀지 않은 미래였다.

    미카엘은 기병들을 살상하다 뒤늦게 상황을 전해 듣고 지하로 부리나케 향했다. 무기고에 보관 중인 사냥총을 꺼내 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그는 마음을 바꿔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예배당 첨탑이 있는 쪽이었다.

    * * *

    앤지는 벽장을 두드리는 소리에 상자를 옆으로 밀었다. 아네트가 전력으로 달려온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앤지를 잡아끌었다.

    “앤지 언니, 빨리 나와! 바깥에 큰일 났어!”

    “뭐? 큰일이라니 무슨…….”

    “본관 연회 홀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선착장에 배가 많으니까 탈출할 절호의 기회야!”

    “알았어. 빨리 나가자.”

    앤지는 아네트가 오면 언제든 나갈 수 있게 최대한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 봤자 잠옷 위에 클로크 가운을 걸치고 신발 대신 발바닥에 천을 둘둘 감은 게 다였지만 그녀 나름의 최선이었다.

    두 사람은 어둡고 협소한 통로를 지나 나선 계단을 천천히 더듬어 내려갔다. 낮에는 어디선가 빛이 새어 들어오는지 침침한 정도였지만 밤이 되니 암흑이나 다름없었다.

    마침내 바깥과 이어지는 마지막 계단에 다다랐을 때였다. 기둥 뒤에 숨어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림자가 아네트의 발목을 그러쥐고 아래로 확 끌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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