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 (97/106)
  • #97

    황제 대리와 최측근 호위대는 차에서 내려 테 데움 호숫가 앞까지 다시 마차로 이동했다. 말을 탄 나머지 근위대도 곧 뒤따라올 예정이었다.

    윈스턴 대공은 해가 넘어가기 직전의 호수를 굽어보았다. 섬 한가운데 떠 있는 저택은 짙은 겨울 안개에 둘러싸여 한층 더 신비롭게 보였다. 생각보다 더 짧은 여정이라 기분이 꽤 호쾌했다.

    “가솔린 자동차란 것이 아주 편리하군. 마차로 꼬박 하루는 걸릴 거리를 고작 다섯 시간 만에 오다니.”

    뱃사공 하인리히가 덮개 달린 배 안에 카펫을 깔고 황제 대리를 모셨다. 평소의 조각배 대신 장정 여럿이 탈 만큼 커다란 배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윈스턴은 어째서 교각을 만들지 않고 번거롭게 배를 타는지 살짝 언짢았지만 군말 없이 배 안에 올랐다. 싸늘한 초겨울 냉기에 입김이 절로 나왔다.

    “남부라 좀 더 온화할 줄 알았더니 저녁엔 북부와 다를 바가 없군. 하지만 공기가 더 맑다는 건 알겠어.”

    “그렇다마다요, 폐하. 여기 며칠만 계셔도 폐하의 귀하신 옥체에 기분 전환이 되실 것이라 믿습니다.”

    뱃사공은 활짝 웃었다. 듬성듬성 이가 빠진 입 안이 새카만 동굴처럼 보였다. 윈스턴은 역겨움을 느꼈지만 저를 ‘폐하’라 부른 것을 감안해 잠시간 참아 주기로 했다.

    배는 오래지 않아 선착장에 도착했다. 새하얀 예배당과 첨탑, 고성처럼 장엄한 저택은 어딘지 스산하고 음울한 기운을 풍겼다. 북부의 수도와 달리 발전소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지 사위가 어둡고 적막했다.

    하지만 대공과 친위대가 정문에 이르는 계단으로 올라서는 순간부터 가스등이 하나둘씩 밝게 켜지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자 환영하듯 화려하게 불을 밝힌 샹들리에와 거대한 분수대가 그들을 맞았다. 집사와 메이드가 빈틈없이 열 지어 허리를 굽힌 가운데, 미카엘이 한쪽 무릎을 꿇고 대공 일행을 맞았다.

    “고(故) 레니에 러틀랜드 오토 카를슈타인 하르젠 8세, 트리에스테 제국의 황제이자 코토르, 몬테비아, 하일랜드, 오흐리드센의 왕의 동생, 황제 대리 윈스턴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절대 군주제 전통 방식의 인사에 윈스턴의 눈빛에 만족감이 감돌았다. 벌써부터 황제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했지만, 테 데움에 온 진짜 목적을 떠올리고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고 없는 방문에도 이리 환대해 주니 고맙군.”

    가문의 서자는 일견 자신을 겸허히 낮추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대였다. 다른 의미로, 적자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놈이었다.

    미카엘은 성대한 만찬이 준비된 연회장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늘 적막하던 호수에 여러 척의 배가 오가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도착한 근위대가 속속 도착해 호수를 넘어오고 있었다.

    윈스턴은 저택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며 홀로 향했다. 저택 내부는 고색창연한 외관과는 또 달랐다. 별장용으로 쓰는 시골 영지치고는 구조가 지극히 세련되고 장엄했으며 규모도 꽤 큰 편이었다. 하지만 결코 편안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웅장한 화려함 속에서도 어딘가 기괴함이 흘러서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대공은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몸을 굳힌 채 턱수염을 쓸었다. 가문의 값진 보물은 어디 숨겨져 있을까. 아니, 그보다……. 불사의 교리가 담긴 비서는 과연 어디에 잠들어 있을지.

    * * *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을 가린 친위대는 셋, 근위대는 총 백 명에 육박했다. 정식 황제도 아닌 황제 대리가 가신의 촌구석 영지를 며칠 방문하는 인원치고는 과했다.

    만찬 자리까지 대동해 대공을 지키는 스무 명은 일반 사병이 아닌, 장교나 하사 제복 차림에 무장까지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순수한 방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카엘은 상석을 차지한 대공의 대각선 왼쪽에 앉아 그의 형식적인 안부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서자이기 때문에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앉히는 태도에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무슨 상관일까. 잠시 후 그는 황제 대리도, 황족도 아닌 운명이 될 텐데.

    근위대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연회가 무르익을 때였다. 대공이 술이 올라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

    “공작의 처형일은 차주에 집행될걸세. 그보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 긴장이 약간 풀려 있었다. 그는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말고 함구하라던 카일렉의 경고도 잊은 채 제멋대로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이봐, 서자.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네. 이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엄청난 비화에 대해서 말이지.”

    “어떤 비화 말씀이신가요, 전하.”

    “불사(不死)의 비밀 말일세.”

    미카엘의 눈에 동요가 떠올랐다. 대공이 히죽 웃었다. 놈은 역시 적자만은 못했다. 속을 철저히 숨기고 통제해서 속 터지게 만드는 카일렉보다 한참 아래다.

    “대공 전하,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한 박자 늦게 수습하려 했지만 무용한 시도였다.

    “역시 있군, 그런 것이……. 자, 그럼 어떤 건지 들어볼까. 다 알고 왔으니까 허튼수작 말고 털어놔라.”

    미카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이상 기미를 보인 것은 입구 가까이 앉은 기병들이었다. 느릿느릿, 동작이 굼떠 보였고 개중 비틀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꼿꼿하게 보초를 선 기병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음식과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해도 물은 마셨을 테니.

    “공작이 알려 드린 모양이군요.”

    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뒤를 돌았다. 루이스 던스트가 홀의 입구 너머에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멀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맞습니다, 전하. 블랙웰 가문에는 영생을 누리는 법에 대해 기술한 카일룸의 흑미사 교리서가 있습니다. 이터니티라고 부르지요.”

    “그래서, 그건 지금 어디에 있나? 응?”

    윈스턴이 눈을 부릅떴다. 책상을 쾅, 주먹으로 내리치는 몸짓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전에 여쭐 것이 있습니다. 황제가 되시면 호적법을 개정하실 계획에는 변동이 없으십니까? 이제 다섯 살인 데릭 공자님을 정식으로 적장자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당연하지. 적장자의 정통성을 부여해 줘야지. 데릭뿐 아니라 에드가와 브리짓 역시.”

    “불사의 몸을 얻기 위해서는 데릭 공자님의 희생이 필요한데도 말인가요?”

    “뭐라……?”

    “데릭 공자님의 목숨을 그 대가로 바쳐야 한다 이 말입니다.”

    대공의 낯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혼란과 분노가 그 자리를 빠르게 채워 갔다.

    “이 미친놈이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윈스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카엘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를 놀리는 것이라 여긴 듯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전하의 첫 아이의 피를 제물로 바쳐야 이터니티 의식의 기본 조건이 성립됩니다. 일종의 연금술이라 생각하셔도 되겠지요. 그게 두려우십니까?”

    미카엘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분노로 번들거리는 대공의 어깨 너머로, 비틀대다 하나씩 쓰러지는 근위대가 보였다. 다행히 독이 제 역할을 잘해 주고 있었다.

    “데릭이 없어도 차남인 에드가가 있지 않습니까. 자식은 또 낳으면 그만인 것을. 그토록 꿈꾸시는 불멸을 포기할 만큼의 가치가 있나요?”

    “이 서자 새끼가 아까부터 대체 무슨 헛소리를……!”

    “불과 몇 세기 전 아제르반의 황제도 제 몸의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제 아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웠습니다. 가장 아끼는 혈육의 재와 피를 대가로 바쳐야 낫는다는 신탁을 따라서 말입니다. 그 정도 용기도 없으시면서 불사의 몸을 꿈꾸셨나요……?”

    보랏빛 눈동자에 광기가 어리며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윈스턴이 부들부들 떨다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확 놓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면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까닭이었다.

    기병들이 하나씩 쓰러지고 있었다. 홀 바깥을 지킨 근위대 역시 부들부들 떨며 바닥을 기기 바빴다. 다들 입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네 놈……. 대체 무엇을…….”

    대공의 눈이 터질 듯 팽창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먹을 것에 장난을 칠 경우를 대비해 사전에 가져온 커틀러리를 썼는데 독에 중독되다니? 그 속내를 읽은 듯 미카엘이 의기양양하게 조소했다.

    “컬리넌 섬에서만 자라는 독풀의 종자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다행히 이 많은 인원을 마비시킬 정도로는 넉넉했죠. 은에 반응하지 않는 성분이며 저처럼 섬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에겐 면역이 있었…….”

    “뭣이! 이런 버러지 같은……. 너 따위가 감히! 더러운 서자 새끼 주제에…… 크헉!”

    윈스턴은 다시 미카엘의 멱살을 잡으려고 헛손질을 하다 재빨리 홀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행히 요리보다 술에만 손을 대서인지 하체는 아직 제대로 움직여 주고 있었다.

    “저기…… 배! 배를……! 큭……!”

    윈스턴은 목과 가슴을 틀어쥐고 쓰러지는 기병들을 헤치고 미친 듯이 선착장까지 달려 나갔다. 매서운 겨울 공기가 그의 얼굴이며 드러난 손발을 마구 후려쳤지만 추운 줄도 몰랐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겁에 질린 그의 집념은 대단했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공작가의 가솔들이 제 근위대를 확실히 처리하기 시작했는지 등 뒤로 단말마의 비명이 웅웅거렸다. 마침내 선착장에 당도하자, 그를 태우고 왔던 뱃사공이 조각배를 정박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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